WTO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 세계화 과정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어, 함께하는 시민행동의 사이버강좌에서 퍼왔습니다. 현재 강좌는 계속되고 있으며, 새로운 내용이 추가될 때마다 업댓하겠습니다.
  • 출처 : 인터넷시민학교강의실
  • 장하준 : 현재 영국 캠브리지 대 경제학과 교수이며 고려대 교환교수이기도 합니다.

1 # 세계화와 WTO, 그리고 우리나라[ | ]

2차 대전 이후로 세계경제의 통합이 꾸준히 진행되면서, 이제는 “국경 없는 세계”(borderless world), “하나의 세계” (one world), “지구촌” (global village) 등의 말들이 일상적으로 쓰이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지난 20여년간에 벌어진 세계경제의 통합과 2차 대전 직후부터 1970년대까지 이루어진 통합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2차 대전 종전 후 1970년대까지의 통합이 세계경제의 성장과 발전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통합의 측면이 강하다면, 소위 세계화, 혹은 지구화 (글로벌라이제이션, globalisation)로 불리는 1980년대 이후의 경제통합은 자연스러운 측면보다는 선진 강대국들에 의해 강제된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 들면서 시장개방과 자유화를 외치는 신자유주의 (neo-liberalism) 가 득세하면서, 국제통화기금 (IMF, International Monetary Fund)과 세계은행 (World Bank) 은 자신들이 자금을 지원하는 나라들에게 무역, 금융, 서비스업 등에서 강도 높고 광범한 개방을 요구했으며, 선진국들도 후진국에 원조를 줄 때 유사한 개방압력을 넣었다. 이에 따라 많은 후진국들은 지난 20여년간 무역자유화, 자본자유화, 외국인 투자에 대한 광범하고도 강도 높은 규제완화를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한 획을 그은 것이 1995년 WTO (세계 무역기구, World Trade Organisation)의 출범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WTO가 이전의 GATT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 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체제에 비해 엄청나게 포괄적이고 강제적이기 때문이다. GATT가 상품무역만을 다루었던 데에 비해 WTO는 상품무역뿐 아니라 서비스 무역 (GATS, General Agreement on Trade in Services 서비스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지적재산권 (TRIPS, Trade-related Intellectual Property Rights, 협약), 외국인 직접투자 (TRIMS, Trade-related Investment Measures, 협약) 등 광범한 분야를 포괄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국제무역 체제 속에서 우리나라의 갈 길은 무엇인가? 매우 혼란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이제 많은 공산품 부문에서는 국제시장 경쟁력이 확보되었기에 WTO를 통하여 세계 전반의 공산품 무역개방을 추구하는 것이 대체로 이익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의 대가로 개방하여야 하는 농업의 경우는 국제경쟁력이 매우 취약하여 계속적으로 보호와 보조를 유지하는 것이 유리하다. 2003년 9월 칸쿤 각료회의에서 우리 농민들의 시위, 그리고 농민운동가 이경해씨의 자살 사태, 그리고 한-칠레 자유무역 협정 (FTA, Free Trade Agreement) 비준을 둘러싸고 계속 일고 있는 농민시위 및 국민적 갈등 등이 바로 이러한 문제를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새로운 국제무역질서에서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현재 우리 정부는 “국익”을 내세우면서 공산품부문에서는 선진국들과 보조를 같이하여 후진국의 개방에 대한 압박을 가하면서 농업부문에서는 보호를 유지하기 위해 “개도국 지위”를 고수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전략은 국제적으로 설득력이 있는가? 그리고 이것이 정말로 우리의 국익을 위하는 길인가?

앞으로 10차례에 걸쳐 전개될 이 강의 시리즈에서는 국제무역 체제의 변천사, 현재 WTO의 문제점과 전망,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나라가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 세계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 I[ | ]

최근 국제경제질서의 변화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그 뒤에 깔려 있는 세계화 현상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은 세계화를 가져 온 것이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른 국제 교역과 통신의 비용의 급감(急減) 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비용의 급감은 무역을 증가시켰고, 생산설비 이전을 촉진시켜 기업의 초국적화 (超國籍化)를 가져왔으며, 금융자본의 순간적 국제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등 종전의 국경을 무의미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 통념이다.

특히 이러한 논의에 힘을 실어 준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 퍼지기 시작한 인터넷과 이-메일이다. 인터넷은 세계 어디에 앉아서도 전화선만 있으면 전세계의 정보를 접하게 해주었고, 이-메일은 빨라도 며칠씩 걸리는 국제 특급우편, 그리고 빠르기는 하지만 번거롭고 비용도 비싼 팩스를 대신하여 아무리 많은 양의 정보도 1-2분 안에 세계 어느 곳에나 받아보고 보낼 수 있게 해 줌으로써 많은 사람의 생활을 바꾸어 놓았다. 이렇게 첨단 기술의 혜택이 소수의 엘리트만이 아닌 (물론 선진국과 일부 중진국에 국한된 이야기이지만) 대중에게까지 퍼지면서, 세계화는 기술발전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는 관념이 광범하게 퍼지게 되었다.

세계화를 이 같이 과학-기술 발전의 필연적인 결과로 보게 되면 세계화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기술 진보를 부정하는 과거지향적인 인물들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 세계화론자들이 종종 자신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영국 산업혁명 초기에 기계를 파괴함으로써 산업화의 폐해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러다이트 (Luddite) 운동가들에 비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시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세계화는 과연 과학-기술 발전의 필연적인 결과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19세기 말부터 세계화의 역사를 살펴 보면 알 수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대략 1870년대부터 1914년의 1차 세계대전 때까지) 세계경제는 여러 면에서 1990년대만큼 세계화되어 있었다. 이 시기 국민 경제에서 국제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20세기 말보다 같거나 높았으며, 기업의 초국적화도 20세기 말 만큼은 못하지만 고도로 진전되어 있었다. 특히 선진국간의 자본의 흐름은 국민소득 대비로 하면 지금의 1배반 내지 2배에 달하였으며, 총인구 대비 이민의 비율 (즉, 사람의 국제적 흐름)은 지금과 비하면 5배 가량으로 월등히 높았다.

그런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1950-70년대에는 인터넷을 빼고는 이미 현대적 수송, 통신 기술이 모두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증기선과 유선전신에 의존하고 있던 19세기 말 – 20세기 초보다 세계화가 훨씬 덜 진전되어 있었다.

왜 그랬을까? 이는 1929년의 대공황, 2차 대전 이후 제국주의적 질서의 붕괴를 통해 많은 나라들이 과도한 경제통합이 해롭다는 인식 아래 과거보다 국제 무역, 자본이동, 이민 등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였기 때문이다. 즉, 세계화의 정도는 기술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 한다고 세계화의 정도를 결정짓는 데에 기술이 무관하다는 것은 아니다. 증기선도 없었던 19세기 중반 이전에 고도의 세계화는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기술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면 그 다음부터 세계화가 어느 정도 일어나는가 하는 것은 (특히 강대국에 의하여) 정치적, 정책적으로 결정되는 것이지 기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기술은 세계화의 한계를 규정하지만, 그 한계 내에서 정확히 어느 정도 세계화가 일어나는가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라는 것이다.

3 # 세계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 II[ | ]

지난 강의에서 자세히 논했지만 19세기 말 – 20세기 초의 세계화는 고도로 진전되어 있었다.

그런데 왜 이것이 계속되지 않았는가? 그 이유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 당시의 세계화가 무리하고 일방적인 세계화였기 때문이다.

이 당시 세계화가 “일방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제국주의라는 수단을 통해 주로 추구되었다는 사실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19세기 이전에도 제국주의는 존재하였지만, 그것이 19세기 후반기에 들면서 특히 강화된 것이 사실이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 Eric Hobsbawm 은 1875년부터 1914년의 시기를 다룬 그의 책을 “제국의 시대” The Age of Empire 라고 명명하였다).

이 당시 강대국들은 약한 나라들을 침략하여 식민지화하고, 그들의 무역장벽 및 외국인 투자에 대한 규제들을 모두 철폐하면서 이 나라들을 강제로 “개방”하였다. 동시에 식민지에서 생산된 제품이 본국 제품과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되면 식민지 제품의 본국 수출에 높은 “수출관세”를 부과하거나 심지어 식민지 제품의 수출을 완전히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기까지 하였다.

또 공식적인 식민지가 되지 않은 중국 (당시는 청나라), 태국 (당시는 샴), 터키 (당시는 오토만 제국), 이란 (당시는 페르시아), 일본, 그리고 (후에 결국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지만) 한국 등의 나라들에게는 “불평등 조약” (unequal treaty) 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불평등 조약들은 이 나라들의 정부가 부패하고 무능하여 관세같이 “어려운” 국제문제를 잘 운영할 능력이 없다며 이들의 관세 자주권을 박탈하고 저율 (대개 3-5%)의 관세를 강요하였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의 “개방”과 “세계화”의 실상이다.

이에 더하여 이 시기의 세계화는 선진국 내부에서도 많은 갈등을 일으켜 개방주의적, 자유방임주의적 체제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증기선, 그리고 이어 냉동선의 발달로 미국, 아르헨티나 등에서 값싼 곡물과 육류가 대량 수입되면서 유럽의 많은 농민들은 생존을 위협 받게 되었다. 독일, 스웨덴 등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19세기 말 농업관세를 올리기도 했지만, 많은 나라에서 농민들은 “퇴출” 되었다. 특히 1차 대전 이후에는 국제 자본 이동이 급증하였음에도 이에 대한 국제적, 국내적 규제가 부족하여 금융위기가 빈발하고 한번 위기가 일어나면 공적자금 투입 등 적절히 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취약해 경기침체가 지속되면서 많은 사람을 실업과 빈곤으로 몰아 넣었다.

이렇게 하여 증가된 사회갈등을 줄이기 위하여 도입된 것이 복지국가제도이다. 1870년대 비스마르크 (Otto von Bismarck) 수상이 이끄는 독일을 선두로 하여 많은 유럽 나라들은 산업재해 보험, 의료보험, 국민연금, 실업보험 등 사회복지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하여 1차대전 때까지는 대다수의 나라들이 이 제도들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제국주의를 추구하는 선진국간의 세계 분할 투쟁 때문에 일어난 1차 대전, 그리고 투기 자본의 국제적 이동이 한 원인이 되어 일어난 1929년의 대공황을 거치면서 국제 무역과 국제 금융이 붕괴되었고, 또 2차 대전에 따른 통제경제의 불가피화로 세계경제의 통합은 1차 대전부터 2차 대전 사이에 급격히 저하된다. 제국주의적 세계화에 대응하여 독립투쟁을 벌인 후진국들은 2차 대전 후 독립을 쟁취한 후 개방에 대한 극도의 거부반응을 보이게 되고 내향적 발전을 채택하게 된 것도 2차 대전 후 세계화의 정도를 낮춘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였다.

즉,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사이에 무절제하게 진전된 세계화는 1차 대전 이후 국제 경제 체제의 붕괴를 가져왔고, 이러한 경험은 2차 대전 이후 여러 나라들로 하여금 경제 개방에 신중을 기하게 하였다. 이러한 경험에 바탕하여 (다음 강의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2차 대전 후에는 국제경제 질서 자체도 무절제한 경제통합보다는 규제된 통합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재편되었다.

4 # GATT에서 WTO로 I - 2차대전의 종전과 GATT체제의 출범[ | ]

지난 강의에서 자세히 논했지만 19세기 말 – 20세기 초의 세계화는 고도로 진전되어 있었다.

그런데 왜 이것이 계속되지 않았는가? 그 이유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 당시의 세계화가 무리하고 일방적인 세계화였기 때문이다.

이 당시 세계화가 “일방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제국주의라는 수단을 통해 주로 추구되었다는 사실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19세기 이전에도 제국주의는 존재하였지만, 그것이 19세기 후반기에 들면서 특히 강화된 것이 사실이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 Eric Hobsbawm 은 1875년부터 1914년의 시기를 다룬 그의 책을 “제국의 시대” The Age of Empire 라고 명명하였다).

이 당시 강대국들은 약한 나라들을 침략하여 식민지화하고, 그들의 무역장벽 및 외국인 투자에 대한 규제들을 모두 철폐하면서 이 나라들을 강제로 “개방”하였다. 동시에 식민지에서 생산된 제품이 본국 제품과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되면 식민지 제품의 본국 수출에 높은 “수출관세”를 부과하거나 심지어 식민지 제품의 수출을 완전히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기까지 하였다.

또 공식적인 식민지가 되지 않은 중국 (당시는 청나라), 태국 (당시는 샴), 터키 (당시는 오토만 제국), 이란 (당시는 페르시아), 일본, 그리고 (후에 결국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지만) 한국 등의 나라들에게는 “불평등 조약” (unequal treaty) 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불평등 조약들은 이 나라들의 정부가 부패하고 무능하여 관세같이 “어려운” 국제문제를 잘 운영할 능력이 없다며 이들의 관세 자주권을 박탈하고 저율 (대개 3-5%)의 관세를 강요하였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의 “개방”과 “세계화”의 실상이다.

이에 더하여 이 시기의 세계화는 선진국 내부에서도 많은 갈등을 일으켜 개방주의적, 자유방임주의적 체제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증기선, 그리고 이어 냉동선의 발달로 미국, 아르헨티나 등에서 값싼 곡물과 육류가 대량 수입되면서 유럽의 많은 농민들은 생존을 위협 받게 되었다. 독일, 스웨덴 등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19세기 말 농업관세를 올리기도 했지만, 많은 나라에서 농민들은 “퇴출” 되었다. 특히 1차 대전 이후에는 국제 자본 이동이 급증하였음에도 이에 대한 국제적, 국내적 규제가 부족하여 금융위기가 빈발하고 한번 위기가 일어나면 공적자금 투입 등 적절히 정부가 개입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취약해 경기침체가 지속되면서 많은 사람을 실업과 빈곤으로 몰아 넣었다.

이렇게 하여 증가된 사회갈등을 줄이기 위하여 도입된 것이 복지국가제도이다. 1870년대 비스마르크 (Otto von Bismarck) 수상이 이끄는 독일을 선두로 하여 많은 유럽 나라들은 산업재해 보험, 의료보험, 국민연금, 실업보험 등 사회복지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하여 1차대전 때까지는 대다수의 나라들이 이 제도들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제국주의를 추구하는 선진국간의 세계 분할 투쟁 때문에 일어난 1차 대전, 그리고 투기 자본의 국제적 이동이 한 원인이 되어 일어난 1929년의 대공황을 거치면서 국제 무역과 국제 금융이 붕괴되었고, 또 2차 대전에 따른 통제경제의 불가피화로 세계경제의 통합은 1차 대전부터 2차 대전 사이에 급격히 저하된다. 제국주의적 세계화에 대응하여 독립투쟁을 벌인 후진국들은 2차 대전 후 독립을 쟁취한 후 개방에 대한 극도의 거부반응을 보이게 되고 내향적 발전을 채택하게 된 것도 2차 대전 후 세계화의 정도를 낮춘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였다.

즉,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사이에 무절제하게 진전된 세계화는 1차 대전 이후 국제 경제 체제의 붕괴를 가져왔고, 이러한 경험은 2차 대전 이후 여러 나라들로 하여금 경제 개방에 신중을 기하게 하였다. 이러한 경험에 바탕하여 (다음 강의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2차 대전 후에는 국제경제 질서 자체도 무절제한 경제통합보다는 규제된 통합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재편되었다.

5 # GATT에서 WTO로 II - 우루과이 라운드와 WTO의 출범[ | ]

GATT는 출범 직후의 제네바 라운드, 1963-67년의 케네디 라운드, 1973-79의 도쿄 라운드 등을 통해 관세를 인하하였다.

1986년에는 소위 우루과이 라운드가 시작되었는데, 우루과이 라운드라는 이름은 이 때 시작하여 이후 1993년 12월 제네바에서 타결 때까지 이루어진 일련의 협상이시작된 것이 우루과이의 푼타 델 에스테 (Punta del Este) 였기 때문이다.

우루과이 라운드는 처음에는 주로 선진국 중심으로 상호간의 공산품 수입관세를 동시에 내린다는, 이전의 라운드들과 유사한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선진국들, 특히 미국, 은 이를 전례 없는 새로운 무역질서를 건설하는 계기로 사용하였다.

선진국들은 우루과이 라운드를 통해 관세나 보조금에 관한 후진국들의 “특혜”를 축소하려 하였다. 또, 선진국들은 후진국들이 자신들을 “괴롭히고” 있는, (특허, 상표권, 저작권 등) 지적재산권 문제, 외국인 투자에 대한 규제 문제, 서비스 산업의 보호 문제 등, 무역과 관련되어 있으면서도 이전 GATT의 범위에서 벗어나 있었던 사안들을 무역문제화 함으로써 후진국의 시장개방을 가속화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한 “대가”로 선진국들은 MFA의 철폐를 통한 선진국의 섬유산업 보호 완화, 그리고 농산물 수입 쿼타의 철폐, 농업 관세의 인하, 농업 보조금의 대폭 인하 등을 약속하였다.

이리하여 1994년 4월에는 모로코의 마라케쉬 (Marrakech) 에서 GATT 체제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WTO체제를 출범시킬 것을 약속하는 마라케쉬 선언문이 발표되었고, 이에 기초하여 1995년 1월 1일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WTO가 출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WTO 규정들, 특히 GATS, TRIPS, TRIMS 등 새로 추가된 규정들, 은 표면적으로는 모든 회원국에 동일하게 적용되지만 사실은 후진국에 불리한 것들이 태반이다.

WTO 체제 하에서 모든 회원국은 관세를 인하하고 관세 상한선을 부과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관세율이 높던 후진국들이 더 관세를 많이 인하하게 됨으로써 이는 후진국의 상대적인 보호장벽의 약화를 가져왔다.

보조금의 경우에도 많은 보조금이 “불법화”됨으로써, 상대적으로 산업 장려를 위한 보조금이 많았던 후진국이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또한 지금까지 GATT의 영역 밖에 있던 서비스업에서도 GATS를 통한 대폭적인 개방이 약속되었다. 물론 GATS는 교육, 문화 등 민감한 부분이 포함된 것을 고려하여 나라마다 일정분야에 대해 개방을 하지 않을 것을 미리 밝힐 수 있도록 하는 소위 네가티브 리스트 (negative list) 체제를 택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서비스업이 약한 후진국의 입장에서는 문제가 크다.

이전에는 GATT의 소관 밖이던 특허, 상표권, 저작권 등 지적재산권 문제도 WTO로 넘어왔다. 처음에 이 문제는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의 상표도용 문제를 중심으로 논의가 되었으나 점차 그 범위가 넓어져 결국은 지적재산권 전반의 문제를 다루는 TRIPS가 되었다. 후진국의 입장에서 지적재산권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 기술발전이나 수출에 유리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것도 후진국에 절대 불리한 것이다.

또 외국인 투자의 규제에 관한 문제도 과거에는 GATT의 소관 밖이었으나 무역과 관련된 투자규제는 무역기구의 소관이어야 한다는 주장 하에 TRIMS가 도입되면서 국내 부품조달 의무비율 부과 (local contents requirement) 등 외국인 투자의 파급효과를 키우기 위한 정책 수단들이 “불법화”되어 외국인 투자를 받는 입장인 후진국의 입지를 좁혔다.

6 # WTO 체제의 진전과 좌초 I - 싱가포르에서 시애틀까지[ | ]

WTO는 1996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1차 각료회의 (Ministerial Meeting)를 시작으로 2년 정도마다 무역관계 장관회의를 열어 주요한 교섭주제를 정하고, 새로운 협약을 맺으며, 이에 대한 자세한 협상은 제네바에 주재하는 대표부를 통해 하는 협상체제를 출범시켰다.

그런데 선진국들은 WTO의 개막전이라고 할 수 있는 싱가포르 회의에서부터 더 광범한 후진국 시장개방을 끌어내기 위한 공세를 펴기 시작하였다.

이 회의에서 선진국들은 WTO의 영역이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며 자신들이 앞으로 시급히 협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4가지 이슈를 내놓았다. 외국인 투자규제에 대한 광범한 (기존 TRIMS의 범위를 훨씬 뛰어 넘는) 다자간 협약, (기본적으로 국내기업에 대한 우대를 철폐하는) 경쟁정책에 대한 국제적 협약, 정부의 구매행위에 대한 투명성에 관한 국제규약, 무역절차 r간소화가 그 4가지 이슈 였는데 이들을 소위 “싱가포르 이슈”라고 한다.

우루과이 라운드에서 체결된 TRIPS, TRIMS, GATS 등 협약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후진국들은 일단 합의한 것이나 이행하고 다른 이슈를 의논하자고 했지만, 선진국들은 당장 협상을 하자는 것은 아니라며 일단 이런 이슈들을 협상할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 연구하는 팀이라도 만들자고 하여 “싱가포르 이슈”를 아젠다에 올렸다.

1998년 제네바에서 열린 2차 각료회의에서는 선진국들이 서비스, 농산물 등의 개방에 대한 협상을 더 광범하게 해야 한다면 들고 나와 소위 밀레니엄 라운드를 시작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밀레니엄 라운드의 협상이 시작된 1999년 시애틀에서 열린 3차 각료회의가 좌초하면서부터 WTO 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시애틀 회의는 흔히 “반세계화” 시위를 한 집단들 때문에 결렬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더 중요했던 것은 후진국들의 반란이었다.

1995년 WTO가 처음 출범했을 때 후진국들은 전문 인력의 부족으로 우루과이 라운드에서 자신들이 양보한 사항들이 얼마나 자신들에게 손해인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후진국들은 점차 그 문제점을 깨달아 가기 시작하였다. 이에 더해 선진국들은 자신들이 약속했던 섬유, 농산물 등의 시장개방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후진국들의 신뢰를 저버렸다.

회의장에서 후진국 대표들을 결정적으로 분노하게 한 것은 선진국들이 소위 “그린 룸” (Green Room)으로 알려져 있는 밀실에서 자신들끼리 협상하고 자신들에 반대하는 후진국 대표를 불러 협박하는 등 국제무대에서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형태의 협상을 진행했던 점이다. 일부 후진국 대표들은 그린 룸에 들어가려다 경비원의 물리적 제지까지 받았다고 하니, 아무리 약소국의 대표이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이러한 상황에서 정상적인 협상이 불가능하다면서 많은 수의 후진국 대표들이 협상을 거부하였고, 이에 따라 소위 밀레니엄 라운드는 붕괴하고 말았던 것이다. WTO에 처음 위기가 찾아 온 것이다.

7 # WTO 체제의 진전과 좌초 II, III[ | ]

1999년 시애틀 각료회의가 유례 없는 실패로 끝나면서 선진국들은 전전긍긍 하기 시작한다. 1불1표의 원칙에 의하여 돈 많은 나라들이 좌지우지 할 수 있는 IMF나 세계은행과는 달리 WTO는 “1국1표”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고 따라서 투표를 하면 후진국들이 이기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는 선진국들이 이러한 결과를 두려워 하여 “합의”를 강조하며 투표를 피하고, 후진국들도 굳이 표결을 강요하지는 않지만, 극한 대결의 상황이 되면 후진국들이 투표를 강요하여 선진국들을 패배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1년 제 4차 도하 각료회의를 앞두고 선진국과 후진국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TRIPS 때문인데, 이는 AIDS 치료약에 대한 특허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 영국, 스위스 등의 제약회사들이 인도, 브라질, 태국 등에 있는 제약회사들이 자신들의 약을 복제하여 아프리카에 수출하는 것이 TRIPS 협약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AIDS 환자를 한 명 1년간 살리는데 필요한 약을 특허권을 가진 선진국 제약회사에서 사면 1만불 이상이 든다. 그러나 이 약들이 비싼 것은 제조비가 비싸서가 아니라 특허에 의해 독점권을 가지고 있는 제약회사들이 높은 이윤을 붙이기 때문이다. 같은 약을 인도 등에 있는 특허권이 없는 회사에서 사면 300-500 불이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소득이 300불도 안 되는 나라가 숱한 아프리카의 입장에서 “제 값”을 주고 AIDS 약을 사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자국민에 대한 사형선고로 받아들여 졌다. 특히 국민의 30-40%가 보균자이고 이미 전 어린이의 10-15%가 고아가 될 정도로 AIDS 사망자가 많은 일부 나라들의 입장에서는 TRIPS와 WTO는 자기 나라의 기본적인 생존권을 위협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질 수 밖에 없었다.

TRIPS를 중심으로 하여 선후진국간에 극도로 감정이 악화되면서 2001년 도하 회의도 시애틀 회의와 같이 결렬되리라는 관측이 지배적이 되었던 시점에서 9-11 테러가 일어난다.

미국은 이 기회를 적극 활용하여 무역대표부 (USTR, United States Trade Representatives) 의 대표인 로버트 졸릭 (Robert Zoellick)이 노골적으로 “자유무역에 반대하는 자들은 간접적으로 테러리스트들의 편을 들고 있는 것”이라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면서 도하 각료회의를 성공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과 다른 선진국들은 도하에서 선진국의 농업시장 개방, AIDS 등 주요 질병에 대한 약품에 관한 TRIPS의 완화 등 후진국의 발전을 돕는 정책을 펴 나가겠다면서 소위 도하 개발아젠다 (Doha Development Agenda)를 내세워 후진국의 무마에 나섰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9-11 이후 두 달도 채 안되어 열린 도하 각료회의는 시애틀과 같이 붕괴하지는 않고 끝났다.

2 - WTO 체제의 진전과 좌초 III: 도하에서 칸쿤까지

9-11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힘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도하 회의를 무산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회의 개최 전과 회의 도중에 선진국의 후진국에 대한 회유와 협박이 필요하였다. 그러고도 막판에 합의가 조성이 잘되지 않아 회의를 예정보다 하루 더 연장해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도하 회의도 사실상 실패였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회의에서 선진국들이 얻어 낸 것은, 2003년에 열릴 칸쿤 각료회의에서 소위 “싱가포르 이슈”를 정식으로 토론 할 것인가 아닌가를 정해야 한다는 합의를 끌어냄으로써 “싱가포르 이슈”를 WTO의 정식 아젠다에 올렸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2003년 칸쿤 회의에 앞서서 특히 유럽연합 (EU: European Union)을 중심으로 한 선진국들은 농업부문에서 관세인하와 보조금 삭감을 해주겠다며 이에 대한 대가로 후진국들은 공산물 관세를 인하하고 무엇보다도 “싱가포르 이슈”에 대한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고 압박하였다.

칸쿤 회의를 앞두고 특히 쟁점이 된 것은 싱가포르 이슈 중의 하나인 외국인 투자에 관한 규제 문제였다.

선진국들은 외국인 투자에 대한 규제가 WTO의 기본 정신인 “무차별” (non-discrimination)의 원칙에 어긋난다며, 차제에 다자간 투자협정 (MIA, Multi-lateral Investment Agreement)을 통하여 외국인 투자자를 차별하는 정책을 펴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다자간 투자협정이 성립되면 외국인 투자규제가 줄어들어 후진국에 대한 외국인 투자가 늘어날 것이므로 따라서 이 협정은 후진국에 도리어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후진국들은 이에 대해 투자는 상품교역보다 파급효과가 훨씬 크기 때문에 투자와 상품교역을 동일선상에서 취급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또 규제완화가 외국인 투자를 증가시킨다는 구체적인 증거도 없다고 지적하였다. 많은 선진국들이 최근까지 외국인 투자를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엄격히 제한하였다는 점도 지적되었다.

투자협정 문제 외에도 후진국들은 선진국들이 요구하는 공산품 시장개방의 폭이 지나치게 크고, 이와 동시에 선진국들이 제공하는 농산물 시장 개방이나 농업보조금 철폐는 규모도 작고 불확실하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협상에서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다.

특히 이러한 후진국 협상력의 강화는 중국이 WTO에 가입하고 브라질이 룰라 대통령의 당선 이후 독자적 외교노선을 밟기 시작하면서, 이 두 나라가 WTO에서 전통적으로 후진국의 대변인 역할을 해 온 인도와 3자연합을 형성하면서 후진국들의 세력을 결집시켰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이전에 “각개격파”로 협상 막판에서 무너졌던 후진국들이 단결하여 버티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갈등 속에서 칸쿤 각료회의는 시애틀의 전철을 밟아 무산되었다. 도하 회의의 “성공”이 9-11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가능했던 것을 생각하면 1999년 시애틀 이후 WTO 각료회의는 매번 실패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WTO 체제는 이제 심각한 존립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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