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BirthOfProgressiveRock

1. 프로그레시브락의 탄생 (The Birth of Progressive Rock)

translated by 홍사여리[1]

1.프로그레시브락의 탄생(The Birth of Progressive Rock)

"(비틀즈의) 서전트 페퍼의 출현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어요.- 날카로운 불신의 소음이었죠. 어딜 가나 이 음악을 들을 수 있었어요. 이 놀라운 음악으로 인해 모든 게 가능할 것처럼 생각되었어요" - VDGG의 David Jackson 1960년대 중반까지 영국(서구) 중산층의 록큰롤에 대한 입장은 이런 것이었다: 원시적인 음악, 기본적으로 하류 계급이 듣는 음악. 특별한 미적 감각을 느낄 수 없는 음악. 심지어는 청소년 비행의 원인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1955년을 그 탄생의 해라 할 때) 십 년의 역사를 갓 넘긴 록큰롤이, 그것도 엘비스 프레슬리나 제리 리 루이스, 척 베리 같은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어온 거칠고, 단순하며 비예술적인 음악이 이렇게 복잡하고 다차원적인 프로그레시브 록의 모습으로 변형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러한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요인은 60년대 중반 젊은이들을 기반으로 한, 샌프란시스코, 런던에서 출발하여 서구 전반을 휩쓴 이른바 하위 문화의 출현이었다. 이 하위문화는 주로 젊은, 중산층의 백인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은 부모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따르길 의식적으로 거부하고 보다 실험적인 인생을 살고 싶어하였다.

"히피"라고 불리기도 했던 이들은 (조직이란 것 자체를 싫어하기로 유명했지만) 비교적 조직적인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사회 전반의 정치적/영적 변화를 추구하였다. 의식과 인지의 영역에서의 새로운 지평을 발견하는데 큰 가치를 두었다. 그래서 마약과 명상에 빠져들기도 한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의 제도화된 물질주의를 거부하였다. 일하기를 거부하고, 방랑 생활을 추구하였으며, 다양한 공동체 생활을 실험하였다. 베트남 참전을 거부하고 전쟁 자체를 반대하였다. 특히 남자들의 긴 머리와 여자들의 미니 스커트는 기성세대에 대한 정면 도전이자 타격으로 받아들여졌다.
1968년은 이러한 하위 문화의 정점을 이루는 해였다. 프랑스, 멕시코, 미국, 그리스 등지에서 (특히 정치적으로) 이러한 젊은이들이 주도하는 정치적 소요가 정점에 달했으며 마약, 섹스, 록큰롤은 이러한 젊은이들의 3대 상징이었다.
마약 등 환각제의 영향으로 앨범커버 역시 초현실주의적인 모습은 띄었으며 콘서트에서는 라이트 쇼를 동원하여 집단적 환각상태를 시도한다. 환각제 (Lysergic Acid Diethylamide (LSD)를 줄여서 Acid라고도 불렀다.) 는 가사에도 영향을 미쳐 밥 딜런과 비틀즈의 60년대 중반의 가사는 초현실적인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아가 밥 딜런은 저항적인 가사를 비틀즈는 우주적인 명상을 가사에 담기도 한다. 이러한 경향은 당시 팝뮤직 씬에서는 상당히 새로운 시도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모든 변화에 더하여 "음악적"으로 하위문화를 규정하는 것은 사이키델릭 스타일이다. 사이키델릭은 60년대 당시까지의 기존 팝음악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었다. 브리티쉬 블루스의 리바이벌이 싸이키델릭에 큰 영향을 미쳤다. Alexis Korner's Blues Inc.와 John Mayall's Blues Breakers는 특히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에서 영국 싸이키델릭에 큰 영향을 끼친다.
1. Muddy Waters나 B.B. King같은 미국 흑인 스타일의 블루스 음악을 라이브로 영국 젊은이들에게 선보였다.
2. 이들의 블루스 음악은 당시로선 약간 나이 많은 중견에 속하던 Brian Auger, Ginger Baker같은 영국의 재즈 뮤지션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들이 재즈를 통해 쌓은 임프로비제이션 실력은 싸이키델릭의 출현을 가능하게 한 주요한 요인이 된다.

싸이키델릭의 특징으로 자리잡은 장시간에 걸친 솔로 연주 자체는 재즈나 리듬앤 블루스에 영향을 받은 것이고, 전기를 이용한 사운드와 믹싱 스타일은 새로운 것이었다. 여기에 더불어 환각을 중시하는 당시 하위문화의 요구에 따라, 기존의 대중 음악이 주로 "따라 부르"거나 "춤추기" 위한 음악이었던 것에 반해, 싸이키델릭은 머리로 듣는 "감상용"음악으로 출발하였고 이는 음악적 실험이 다양하게 시도된 이유가 된다.

66년에서 67년에 걸쳐 런던과 샌프란시스코등 하위문화의 주요 거점이 되었던 도시들에는 클럽이라는 형태의 공연장이 속속 문을 여는데, 이런 곳에서 주로 싸이키델릭이 연주되었다. 이러한 작은 공간에서 연주자와 관객의 관계는 무척 가깝게 된다. 예를 들어 66년 2월 어느 일요일 오후 런던의 마키 클럽에서 "Spontaneous Underground"가 연주되었을 때, 관객과 연주자사이의 구분은 없어졌던 것이 좋은 예라 할 것이다. 밴드와 관객의 구분은 없었다. 연주자 자신이 하위문화의 산물이자 하위문화의 생산자였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후에 프로그레시브 록의 스타일 형성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음악적, 시각적, 그리고 구술적 전통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싸이키델릭 스타일이 폭발적으로 대중의 인기를 얻자, 이 새로운 음악 스타일에 대해서 레코드 회사들은 이러한 음악을 음반으로 발매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 또는 어떤 음악을 음반화하고 어떤 것을 말아야할지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다른 음악 스타일에서는 대중이 특정 밴드의 음악을 좋아할지 안 할지 판단할 능력이 있는 것이 음반 회사였지만, 이경우는 달랐다. 이들은 무척 당황했으며, 따라서 일단 모두와 계약을 맺고 음반화한 후 시장의 반응을 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에 이르는 기간동안 엄청난 양의 음악이 음반화 되었고, 많은 수의 레코드 회사들이 설립되기도 했던 것이다.
당시 싸이키델릭을 다루었던 언더그라운드 신문과 라디오 방송 또한 프로그레시브 록의 탄생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싸이키델릭 음악의 정교화와 보급에 이들이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이 방송사들이 클래식, 재즈등의 음악을 통해 기른 비판적 감상, 감정 평가, 예술성등의 감각을 프로그레시브 록을 평가하고 보급하는데 사용하였던 것이다.

위에 서술한바와 같은 문화적, 경제적 배경이 없었다면 프로그레시브록은 결코 생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요약하면, 하위문화의 생성, 사이키델릭 스타일의 형성, 클럽 문화, 언더그라운드 라디오 방송국이 프로그레시브 록 형성의 토대를 이룬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이키델릭의 생성 당시엔 이 장르에 한가지 스타일만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었다. (십분이 넘는 경우가 허다한) 장편 편성, 강화된 연주 섹션, 긴 솔로 연주, 피드백 효과 사용, 에코 머신등의 이펙트, 멀티 트랙킹이나 스플라이싱같은 테잎 이펙트등이 사용된 음악으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북인도의 악기가 간간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비슷한 점이 있는 동시에 서로 다른 스타일이라고 불릴만한 요소도 많이 있었다. 이제 와서 보면, 프로그레시브 록의 모태가 된 싸이키델릭에는 크게 세가지 스타일이 존재하였다.
1. Cream, Yardbirds, Jimi Hendrix 스타일 헤비하고 블루스를 전기 음향으로 재해석한 스타일. 이는 롤링 스톤즈가 60년대 중반에 이미 시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톤즈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단순하고 블루스적인 화음진행을 사용하였으며, 반복적인 기타 리프 (두마디 혹은 길어야 네마디), 그리고 드라이빙 백비트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스톤즈나 어번 블루스의 마스터로 통하던 더 후와는 달리 이들은 연주 부분에 긴 시간을 할애하였으며 특히 불꽃튀는 기타 연주로 라이브에서 관객을 압도하였다. 이들 밴드는 대개 한 대나 두 대 정도의 기타와 베이스, 드럼 그리고 한명의 보컬로 이루어졌다. 프로그레시브 록의 대명사격인 풍부한 보컬 하모니나 웅장한 키보드 반주는 이들의 음악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면에서는 스톤즈나 더 후가 이들보다 프로그레시브 록에 가까왔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 부류의 음악은 후에 레드 제플린, 블랙 사바스, (71년 머신헤드 앨범 발표 이후의) 딥 퍼플에 의해 헤비메탈로 발전된다.

2. Traffic, Colosseum, IF와 Soft Machine, Caravan 스타일 브리티쉬 블루스와 재즈를 기반으로 형성된 지파. 이들은 플륫이나 색소폰 같은 관악기를 도입하였다. 사이키델릭에서조차 시도되지 못했던 수준으로까지 실험적 연주파트를 강화하였다. 코드 변화와 리듬 패턴의 변화가 더 심하고 복잡해진다. 70년대 초 이들의 음악은 마하비쉬누 오케스트라 및 그 추종자들, 그리고 이들보다 더 실험적인 캔터베리/ 소프트머쉰 학파에 의해 재즈록 퓨전으로 발전해간다.

3. Moody Blues, Procol Harum, Pink Floyd, Nice 위의 두 부류에 비해 후기 비틀즈 영향을 더 많이 받은 부류이다. 후기 비틀즈는 실제로 거의 사이키델릭 밴드가 되어 있었으며 (바르토크나 스톡하우젠의 영향하에) 아방가르드 스타일도 채용하고 있었다. (She's leaving home을 들어보라. 실제로 비틀즈의 서전트 페퍼 앨범의 커버에는 쉬톡하우젠의 얼굴이 나온다.)
앨범의 마지막 부분에서 들려오는 앨범 첫곡서부터 끄트머리까지의 재현과, 환상적인 테이프 이펙트에 의한 곡과 곡간의 연결, 무엇보다도 한가지 컨셉에 의한 앨범 구성으로 인해 서전트 페퍼는 최초의 컨셉트 앨범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는 19세기 초의 클래식 음악가인 슈만이나 슈베르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서양 고전 음악의 전통과 닿아 있다. 이것이 비평가들이 서전트 페퍼 앨범의 컨셉튜얼한 구조를 "클래식"하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이를 보다 더 직접적으로 클래식 음악과 연결한 것이 무디 블루스가 런던 페스티발 오케스트라와 함께 녹음한 Days of Future Passed이다. 이 앨범으로 무디 블루스는 한번에 "심포닉 록"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낸다. 후에 무디 블루스는 멜로트론을 써서 심포닉한 반주 부분을 만들어 내었으며, 비틀즈의 3부 보컬을 발전시켜 4부 보컬로 풍부한 보컬 하모니를 만들어 내었다. 67년 A Whiter Shade of Pale로 단번에 명성을 얻는 프로콜 하럼은 하몬드 오르간으로 파이프 오르간을 대치한다. 이전의 팝음악에서 별로 사용되지 않다가 비틀즈에 의해 시도되기 시작한 어쿠스틱 악기의 과감한 도입을 발전시켰다.(69, Salty Dog)
나이스와 핑크 플로이드도 적어도 그들의 데뷔 앨범에선 비틀즈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위의 두 밴드에 비해 좀더 (프로그레시브 록쪽으로) 발전된 모습을 보인다. 특히 핑크 플로이드에 의해 선보여진 사운드는 소프트 머쉰의 음악과도 연관된다. 이 두 밴드는 특히 장편의 연주곡에 의한 음악적 파노라마를 만들어 내는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구현하기 위해 19세기와 20세기 초에 걸친 클래식음악의 표제음악에서 다악장 조곡 기법을 사이키델릭 음악에 도입하였다.
핑크 플로이드의 A Sauceful of Secrets (68)와 나이스의 Ars Longa Vita는 4악장으로 된 표제 음악이다. A Sauceful of Secrets는 신비한 체험 (혹은 커버 아트로 미루어 봐선 우주 여행?)에 대한 표제 음악이고, 바하의 브란덴 부르그 조곡 3번을 인용한 Ars Longa Vita 역시 음악 자체로 해석된다기보다는 음반의 이너 노트에 쓰여진 철학적인 글을 보충하는 표제 음악이다.
이들이 발표한 연주곡은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클래식으로 훈련된 나이스의 키보디스트 키스 에머슨이 구사한 당당하고 강력한 키보드 플레이는 프로그레시브 록의 표상이 되었고, 핑크 플로이드의 이 세상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사운드 이펙트 또한 프로그레시브 록의 주요 유산이 되었다. 핑크 플로이드가 이 때 보여준 실험적 전자 음향 효과는, 70년대 이후 이들의 앨범에선 확실히 감소하고 대신 앨범이나 곡 전체를 대상으로한 구조적 어프로치를 더 많이 사용되어 이러한 구조적 어프로치가 프로그레시브 록의 또 다른 특징으로 굳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보여준 오르간 사운드(다른 세상에서 만들어진 것 같은)와 미묘하게 짤랑거리는 기타 라인, 듣는 이를 최면 상태로 이끄는 반복적인 리듬 패턴, 그리고 아방가르드한 전자 음향은 70년대 독일 일렉트로닉 록과 80년대 뉴에이지 음악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서전트 페퍼 시절의 비틀즈로부터 받은 영향에 더불어 위에 언급된 밴드들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60년대 중흥기를 맞이했던 포크뮤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풍부한 보컬 사운드를 주무기로 하는 포크 스타일과 어쿠스틱 악기(특히 어쿠스틱 기타)의 연주를 강조하는 포크는 서로 각자의 길을 걸어 발전하다가 60년대 중반에서부터 서로 섞이기 시작했다. 밥딜런, 버즈 그리고 비틀즈가 그 선두에 있었다. 프로그레시브 록이 하나의 장르로서 본격적인 형성이 시작된 것은 서전트 페퍼 이후의 이러한 비틀즈 음악에 포크와 사이키델릭을 혼합하면서부터이다. 체계적으로 어쿠스틱와 일렉트릭 소절, 악절 혹은 악장을 병치(竝置) 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멜로트론, 하몬드 오르간, 그리고 다양한 어쿠스틱 악기들이 풍부한 보컬 하모니 속에서 길고 정교한 음악을 만들어 내었다.
이러한 이유로, 무디 블루스, 프로콜 하럼, 핑크 플로이드, 나이스등이 사이키델릭 음악의 선두 주자로 불리는 동시에 프로그레시브 록의 기본적인 원형을 만들어낸 "프로그레시브 록 1세대"를 형성했다고 평가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프로그레시브 록의 특징들이 각각의 밴드의 음악에서 완전히 드러나지는 않았다. 또한, 프로그레시브 록의 전형에선 이미 사라진 사이키델릭적 요소가 여전히 살아 있었기 때문에 아직은 프로그레시브 록이 장르로서 충분히 성숙된 단계는 아니다.
60년대의 마지막해인 69년에 와서야 프로그레시브 록은 제 2세대를 맞으면서 장르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에 이른다. 모든 메이저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들이 그들의 첫 번째 앨범-혹은 프로그레시브 록으로 평가받는 첫 번째 앨범-을 발표한다. 제쓰로 툴이 68년에, 킹 크림즌, 예스, 제네시스, VDGG가 69년에, ELP, 젠틀 자이언트 그리고 커브드 에어가 70년에 앨범을 발표하였다.
특히 킹 크림즌의 데뷔 앨범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은 발생기에 있는 프로그레시브 록의 움직임에 강한 충격을 주었다. 아마 프로그레시브 록 앨범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앨범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예스, VDGG, 제쓰로 툴의 데뷔 앨범이 완전히 성숙한 음악적 비전을 제시하지는 못한데 비해 킹 크림즌의 음악은 프로그레시브 록의 완숙기에 볼 수 있는 모든 주요 요소들을 보여준다. 핑크 플로이드나 무디 블루스등이 보여준 프로그레시브 록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킹 크림즌은 뚜렷하고 금방 알아챌 수 있는 형태로 정교하게 다듬었다.
Epitaph에서 어쿠스틱 기타와 심포닉한 색채를 띤 멜로트론을 통해 보여준 우울한 마이너 키 진행과 21st Century Schizoid Man에서 들려준 알토 색소폰과 퍼즈 기타의 재즈 색채 짙은 힘찬 폴리리듬(서로 다른 리듬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 양식은 70년대 프로그레시브 록 역사를 관통하여 울려 퍼진 요소들이다. 음악 자체의 요소 이외에도, Epithaph와 21st Century Schizoid Man에서 다루어진 묵시록적인 주제, 중세적 이미지와 신비로운 저음이 강력하게 부각된 타이틀곡은 고딕 양식의 초현실주의적인 커버 아트와 함께 이후의 프로그레시브 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예스와 제네시스가 Epitaph 스타일을 차용하여 풍부하고 심포닉한 긴장을 만들어 내었다. 즉, 포크 느낌의 기타 라인과 지속적인 키보드 코드를 통한 육중한 백드롭, (예스의 경우에는) 복잡하고 합창단 수준에 가까운 보컬 편곡, 예리한 일렉트릭 리드 기타와 리듬 섹션의 록적인 파워와 혼합하여 심포닉 록 수준의 곡을 만들어 내었다. 예스의 The Yes Album, Fragile (둘다 71년 발표), 제네시스의 Tresspass (70), Nursery Cryme(71), Foxtrot(72)이 모두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예스, 제네시스와는 달리 VDGG, 젠틀 자이언트, 커브드 에어는 Epitaph의 심포닉/포크록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Schizoid Man에서 퓨전의 기본형을, Moon Child에서의 아방가르드적인 요소를 뽑아내어, 비록 그 영향력은 적었지만 보다 더 개성있는 변형을 만들어 내었다. 젠틀 자이언트는 쿨재즈와 르네상스 음악의 요소를 심포닉/포크의 틀에 담아 발작적인 리듬과 짙은 텍스쳐, 그리고 극도로 다양한 악기 연주를 특징으로 하는 위압적으로 복잡한 어프로치를 만들어 냈다. 이러한 방법론의 극치는 Octupus(73)와 Free Hand(75)에서 들을 수 있다.
VDGG는 Crimson King의 어두운 저음을 발전시켜 피터 해밀의 냉혹하도록 황량한 가사를 고딕적인 오르간 연주와 예리하고 상쾌한 리드 (reed), 그리고 비르투오소적인 드러밍의 틀안에 담아 내었다. 71년작인 Pawn Hearts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커브드 에어는 수많은 멤버들이 거쳐가는 바람에 자신들만의 개성있는 음악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지는 못했다. 70년 데뷔 앨범인 Air Conditioning이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꼽힌다. 커브드 에어는 록 음악의 메인 스트림에 처음으로 전기 바이올린을 도입한 밴드이며,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중에는 처음으로 여성 보컬을 내세웠다.
ELP와 제쓰로 툴은 킹 크림즌의 유산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프로그레시브 록이 성숙한 스타일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한 밴드이다. 그렉 레이크가 초기 킹 크림즌에서 스카웃 되어 오긴 했지만 70년의 데뷔 앨범에서 보여 준 영웅적 키보드, 분노로 일그러진 하몬드 오르간과 사이보그적인 클래식 편곡은 나이스 출신의 에머슨의 덕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ELP는 무늬만 바꾼 나이스의 지속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그렉 레이크의 낭랑한 보컬과 어쿠스틱 기타는 나이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며, 에머슨이 사용한 모듈라 무그 신서 사이저는 대중음악의 메인스트림에 전혀 새로운 음향을 선보인 것이다. 예스/제네시스의 심포닉 프로그레시브 록을 대신하는 무겁고 배타적인 전기 키보드는 Tarkus(71)를 영향력있는 작품으로 만들었으며 73년의 Brain Salad Surgery에서 완성된다.
한편 제쓰로 툴의 고도의 절충주의적 사운드는 Stand up(69)과 Benefit(70)에서 완성되었다. 이언 앤더슨의 플륫이 밴드의 정체성을 확립하였고, 영국 포크 뮤직과 리듬앤 블루스, 그네상스와 바로크 시기의 연주 음악의 혼합이 이후 그들의 음악을 규정짓게 된다. 특이한 것은 다른 밴드들이 낭만주의 시절의 고전음악과 교회 음악에서 음악적 영감을 얻은 데 반하여 이들은 바로크와 르네상스 음악에서 얻었다는 점이다.

72년에 이르면 대중음악의 다른 장르와 구별되는 장르로서의 프로그레시브 록의 스타일 형성이 완성 단계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밴드의 음악은 모두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로 연주에 많은 차이가 있다. 예스/제네시스/ELP에는 심포닉 음악을 방불케하는 키보드/기타 플레이가 있었고, 이는 킹 크림즌과 VDGG, 젠틀 자이언트의 스타일은 재즈적이고 목관 악기가 많이 들어간 연주를 구사하였다. 둘째로, 비르투오시티의 차이가 있었다. ELP, 에스, 중기 킹크림즌의 음악에는 압도적인 비르투오시티가 있었고 이는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과 큰 차이를 보인다. 제네시스와 VDGG는 이 두 스타일의 중간쯤에 위치한다고 하겠다. 세 번째로는, 노래와 연주에 대한 강조를 어디에 두느냐하는 차이가 있었다. 무디 블루스와 프로콜 하럼은 보컬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고 핑크 플로이드나 나이스의 경우에는 연주에 훨씬더 많은 비중과 실험을 행했다. 마지막으로 분위기가 헤비하냐 아니면 라이트하냐하는, 느낌의 차이가 있었다. 이는 리듬, 모드, 연주, 가사 내용등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킹크림즌이나 VDGG가 70년대 중반에 보여준 원시적인 에너지와 젠틀 자이언트, 르네상스의 분위기를 비교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이쯤에서 프로그레시브 록이라는 용어에 대해 언급하는 게 좋겠다. 60년대 중반 혹은 후반까지 이 단어는 언더그라운드 라디오 방송국들에 의하여 사이키델릭을 칭하는 말로 통했다. 그러나 70년대 들어 이 단어는 좀 더 구체적인 의미를 띠게 된다. 주로 클래식 음악과 연관된 요소들을 차용을 통해 스타일(장편의, 구조적인 작품의 형식을 통해) 이나 개념적(서사적인 주제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인 측면에서 록의 경계를 넓히려는 음악을 칭하는 단어가 되었다. 69년 캐러밴의 데뷔 앨범의 이너 노트에 이 단어가 이러한 좀더 명확한 의미로 사용된다. "...세련된 하모니와 별난 박자 기호의 사용을 통해 전통적 팝 음악의 제한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밴드이다..."
클래시컬 록이라는 단어와 아트록이라는 단어가 쓰이기도 하는데, 클래시컬 록은 이 장르의 음악에서 사용되는 비 클래식적인 요소를 배제하는 효과를 가진다는 점에서 부적절하고, 아트록은 데이빗 보위나 록시 뮤직이 구사했던 매우 연극적이고 글램록의 아류로 분류되는 음악도 아트록이라고 불린다는 점에서 혼동을 초래한다. (롤링 스톤즈 지(紙)의 Encyclopedia of Rock and Roll 447-448에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다-역자주)

프로그레시브 록의 1세대와 2세대는 그 시기와 스타일에 있어 확연히 구분된다. 무디 블루스와 프로콜 하럼, 나이스는 그들의 대표작 대부분을 67년에서 71년사이에 발표하였다. 2세대 밴드들은 대부분의 대표작을 영국 프로그레시브 록의 황금기라 할 71년에서 76년사이에 발표한다. 오직 핑크 플로이드만이 1세대와 2세대를 가로질러 활동한 밴드이다. 이또한 2세대 스타일을 많이 흡수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순수히 음악적 측면만 살펴보더라도 1세대와 2세대는 많이 다르다. 모든 면에서 더 복잡하고 더 기념비적인 작품이 많이 생산되었다. 곡의 길이가 길어졌고, 형식적인 계획이 더 많이 세워졌고, 전통적인 "노래"형식은 더 지양되었다. 연주에 있어서의 묘기가 더 강조되었고, 화성적인 문법과 곡의 짜임새가 더 복잡해졌다. 다운비트를 쓰긴 했지만 주로 네박자 속에서 연주하던 1세대에 비해 2세대는 더 복잡한 박자 구성을 가지며 싱코페이션이 많이 사용된다. 후퇴한 부분은 악기 제작 기술과 녹음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전자 음향 사용이 축소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핑크 플로이드와 소프트 머쉰, 에그의 작품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1세대와 2세대를 구분 짓는 또 다른 중요한 포인트는 그들의 음악이 펼쳐진 공간의 차이이다. 1세대 밴드들은 주로 영국 남부의 소도시 클럽에서 활동하였고, 연주 공간에서의 청중과의 관계는 무척 가까웠다. 2세대 밴드들 역시 시작은 이런 소규모 클럽에서 했지만 70년대를 넘어서면서 클럽 활동이 밴드의 수입원으로서의 역할을 못하는 한계상황에 이르면서 앨범을 팔기 위한 대규모 콘서트 투어를 통해 관객과 만나게 된다. 투어 코스는 관객이 많은 북미 지역으로 늘려졌으며, 유명 밴드의 공연은 스타디움이나 운동장 같은 대형 무대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헨리카우나 VDGG 같이 미국 연주 여행을 할 수도 없고 하기도 원치 않았던 밴드들은 그 음악성에 관계없이 그 중요성이 약한 것으로 비쳤다. 이러한 대형 무대에서의 공연은 당연하게도 관객과의 긴밀한 관계를 약화시켰으며, 밴드들은 그들이 자라난 토양이 되었던 하위 문화의 접촉으로부터 점차 차단되었다. 프로그레시브 록의 황금기의 시작인 71년 당시만 해도 이 음악의 연주자와 청중은 음악적 취향은 달라도 라이프 스타일과 세계관을 공유하며 하나로 뭉칠 수 있었지만 76년에 즈음해서는 관객과 연주자가 서로 다른 라이프 스타일과 세계관을 갖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밴드들은 레코드 회사와 흥행 에이전트들의 요청대로 음악을 만들 수밖에 없었으며, 필연적으로 프로그레시브 록의 쇠퇴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원저 : Rocking the Classics : English Progressive Rock and the Counterculture Paperback (November 1996) Oxford Univ Pr (Trade); ISBN: 0195098889 ; Dimensions (in inches): 0.82 x 9.19 x 6.13

저자 : Edward L. Ma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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