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mphonyX

# The Divine Wings Of Tragedy[편집]

[Neo-Zao, 김남웅, mailto:zao@wm.lge.co.kr]

너무 ROM으로만 있는 것이 미안해서 올립니다. 재킷그림과 함께 보실 수 있는 홈페이지는

http://14-225.wm.lge.co.kr/article/symphony_x.html 입니다.

감상회때 많이들 나오셔서 운우의 정을 나누시길.. :-)

[Symphony X - The Divine Wings Of Tragedy ('97)]

Independent label이라는 용어가 근 몇 년 사이에 무척 많이 쓰이고 있다. Alternative 음악의 성황과 더불어 쓰이고 있는 이 용어의 해석으로, 영화에서 말하는 '독립/저예산 제작'이라는 꼬리표가 그리 틀린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영화와 틀린 점은 Label이란 개념일 것이다. Indie Label이라 하면, Major급의 Label과 거의 동등한 작품들을 발표하고 있는 Chandos같은 메이저 급의 Minor Label이나 소량을 발매하여 희소성을 높이는 private pressing과는 다른 것이다.
그 것은 전문적인 쟝르라는 필수적인 요소가 함의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음악산업에서의 Indies가 영화계의 Indies의 사정보다 좋은 점은 무엇인가? 그 것은 바로 질의 문제다. 소규모의 밴드에 의해 이루어지는 대중음악은 major든 minor든 상관없이 뮤지션의 자질에 의해 음악의 qulity가 부여된다. 그러나 인디영화는 어떻게 하든 스필버그의 기름기는 따라갈 수 없지 않는가?

Dream Theater가 메이저에서 상영을 시작한지도 5년이 지났다. 탁월한 리듬감과 Virtuosity...
(Rolling Stone지의 비정상적/국수적/옹고집적/ 음악외적 focusing/결국에는 대중성에 회귀하는/ 평론가 들이 집필한 앨범 가이드의 최근 버젼에는 - 나는 예전 버젼만을 보았다. - 이렇게 적혀 있을지도 모르겠다.
Rush의 코드진행에 80년대의 잘난척하기 좋아하는 기타 연주자들의 테크닉을 갔다 붙인, 허황된 가사를 쓰는 녀석들...) 그러나 그들의 음악을 평가하는 잣대를 발전성 이라는 측면에서 보아도 그 어떤 밴드보다도 칭찬해주고 싶다. 지난 5년여간의 음악계를 볼 때, Industrial이든, Techno든, 이제는 모든 음악 쟝르를 대부분 포괄하는 듯이 보이는 Alternative나 Progressive나 과연 모골의 송연함을 전해주는 밴드가 몇이나 있을지..

Symphony X는 Dream Theater(DT)와 비교하면 어떻게 자리 매김될 수 있을 것인가? 이 밴드는 아직 indie 밴드이다.
(Zero Corporation이라는 레이블 소속임. 국내 발매 JIgu) 아직 흔한 인터넷의 홈 페이지조차 갖추지 못했고, 솔직히 이들이 메이저로 진출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DT와는 비교될 수 없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가장 논리적이지 못한 형태의 '권유'를 빌어) 마음을 열고, _The Divine Wings of Tragedy_의 20여분에 귀를 기울여 보면 DT가 지금까지 보여준 20여분의 한계 -말하자면, _A Change of Season_- 를 보상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최소한 20분이상의 곡에서는 DT의 판정패다. DT는 10여분대의 곡들에서 보여주는 tight함을 20여분대 곡에서 100 % 연장하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Symphony X는 5인조다. 이 밴드는 Michael Romero(Gt.)와 Michael Pinnella(Key.)에 의해 주도된다고 볼 수 있는데, 특히 로메로의 기타는 '매우' 훌륭하다. 현재까지 3집을 내놓는 동안 초기에 보여주었던 DT외의 Yngwie에 좀 더 치우친 모습이 조금씩 희석되어가 있고, 빈 공간을 메우는 앨런 홀스워스 타잎의 연주도 더할나위 없이 타이밍이 좋다.
이 3집 _Divine Wings Of Tragedy_는 은 매우 알차며 (70여분), 앨범 전체적으로는 유기성과 일관성이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기는 하지만 indie label에서 이 정도의 음이 나오는 것은 혜택이다!

한가지 테크니컬한 밴드들에 대한 오해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취향차이, 권유, 쟝르간 배타 모두 좋다.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교조주의적 과대포장, 과대평가에 대해서는 한마디 하고 싶다. 어려운 음악, 테크니컬한 음악에 대한 오해.. 나는 EL&P의 Toccata의 피곤함에 대해서 들을 때, Ginastera의 Piano Concerto 1번을 생각하며 웃는다. Yes의 어떤 곡이 1910년대의 _Petrouchka_ 보다 복잡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Yngwie의 기타연주도 Ysaye의 소나타에 비교하면 무엇이 새롭다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가 생긴다. 결국 연주지향으로 그보다 더 큰 장점을 망쳐버리고 마는 소수의 밴드를 제외하면 테크니컬한 밴드를 폄하할 만한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흔히들 이야기되는 복잡함의 피곤함에 대해서 그보다 100년 전의 작품들에 비교를 해보면, 자신들이 평가하는 가치의 기준이 '복잡한 연주'의 평가절하로 가야할 것이 아니라 혼란케 만드는 음색과 장황함에 초점이 맞춰줘야 할 것이다.

또한 작품의 맥락에 관련되는 텍스트 외적인 측면들에 해석의 초점을 과대 확장하는 직업적 평론가들에게는 신물이 나다. 그와 더불어 평가되고 있는 많은 음악들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최소한 조장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1900년대 초의 Stravinsky가 했던 말로 글을 맺는다.
"Jmnote bot (토론) 제 3번 교향곡이 공화국 시대의 보나파르트를 위한 것이든 나폴레옹 황제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이든 그 것이 무슨 상관인가?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직 음악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음악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것은 모험적인 일이고, 책임이 뒤따른다. 그래서 어떤 사람 들은 지엽적인 문제를 더 좋아한다. 그 것은 쉽고, 그들을 사려깊은 사상가로 생각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pollen, mailto:pollen@inote.com] Neo-Zao님 쓰시길 :

또한 작품의 맥락에 관련되는 텍스트 외적인 측면들에
해석의 초점을 과대 확장하는 직업적 평론가들에게는
신물이 나다. 그와 더불어 평가되고 있는 많은 음악들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최소한 조장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글쎄요... '직업적 평론가들'에 대해 묘한 거부감을 갖고 계신 것 같기는 한데.... 최근의 젊은 소장 평론가들의 작업들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텍스트 내재적이냐, 외재적이냐하는 문제는 문학쪽에서도 여러 이론들의 충돌이 있는걸로 알고 있습니다만은...러시아 형식주의나 기호학이 문학언어의 시적 기능 자체에 촛점을 맞추어 이전의 상징주의를 극복하고 과학적인 분석을 시도했다는 것은 나름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곤 있지만, 그에 맞서 상호텍스트적인 맥락을 지나치게 무시한 것으로 비판 받기도 합니다. 일테면 역사/사회적 맥락을 중시한 리얼리즘 문학비평이 그 쪽이지요. 음악 역시 예외가 아니라고 봅니다. 음악 또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상의 산물'이라고 볼 수 없는 한, 그것이 위치한 여러 맥락을 함께 분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그 내재적 요소가 신성시된 감이 없지 않아 있는 'Rock Spirit - 저항정신'이든, 이쪽 프로그레시브에서 많이 발견되는 것처럼 보이는 신화적/신비주의적 모티브든 말이죠. 신화를 표방하는 것 역시 나름의 문화적 컨텍스트 속에 놓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말씀하신 것처럼 '해석의 초점을 과대 확장하는' 경우가 되겠는데, 이것은 몇몇 평론가들이 음악의 내재적인 코드에 대해서 체계적인 지식을 보유하지 못한 결과 사회학적 도구에 지나치게 경도된 탓이라고 봐야 될겁니다. 그렇지만 지난 우리 대중음악 비평이 지나치게 인상비평에 머물고 만 느낌이라 ('직업평론가'가 아닌 전영혁씨를 거론해서 좀 안됐습니다만은 그 분이 쓴 오래된 앨범의 해설지를 봐도 어딘지 빈자리가 느껴지더군요) 90년대 들어서 각개분투하고 있는 소장평론가들의 글들은 나름대로 새롭고 의미있는 시도라고 보고 있습니다. 음악을 대하는 평론가들의 시각에 따라, 음악 텍스트 자체에 대한 정치한 구조적 분석과 말씀하신 외재적 맥락에 따른 분석이 병행되면 더할나위 없겠지요.
전무했던 한쪽의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좀 더 지나면 그런 의미에서 총체적 분석에 값하는 훌륭한 글들이 나오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Neo-Zao, mailto:zao@wm.lge.co.kr]

Pollen님 쓰시길..

글쎄요... '직업적 평론가들'에 대해 묘한 거부감을 갖고 계신 것 같기는
한데.... 최근의 젊은 소장 평론가들의 작업들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제가 쓴 글에 대해서 그 일천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두드려 맞음'에도 달게 수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제가 말씀한 뜻과는 좀 다른 뜻을 전하신 것 같아서 오해를 풀려고 합니다.
지금 현재의 음악평론 시장은 제가 볼 때는 일말이라도 기형적이라는 감을 지울 수 없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협소한 평론가 집단 - (정확을 기할 수 없는 저의 통계적 자료를 탓하면서..) 대부분 음악 비 전공자이고, 어릴 때 세례받은 음악을 향유하면서 정보를 의존하던 일단의 대중음악 잡지에 조소를 보내던 집단 - 들이 자신들에게만 배타적으로 공유되던 용어의 적용범위를 미디어를 통해 급작스럽게 확대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러한 사실은 오늘 아침 배달될 신문의 문화란에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이죠. 또한 기존의 팝음악으로 밥벌어 먹고 살던 집단과, 실제로 대중/순수 음악을 수행하고 있는 집단들은 불현듯 어느날 '음악을 논해야 되는 시점'에서 자신들의 무지를 자각하지만 방어할 기제조차 가지고 있지못한 사실에 더욱 기존의 방법을 고수한다고 느껴집니다.

문제는 어느 누구도 음악자체를 논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개 '직업적 평론가'들의 평론을 간추려 보면, (크고 작은 데비에이션은 제외합니다.) 체제 및 제도권에 대한 저항 그리고 대안적 제시에 촛점이 맞춰져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의 평론은 '지금 음악이 흘러가고, 나의 귀에 연결된 뇌의 언어중추에서는 이 것을 문화/비평과 연결된 정치적 선언으로 디코딩하고 있다.' 는 식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저는 One Of These를 주지 않고, 일방/획일적으로 치닫는 상황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고 있는데, 그 것은 이들의 평론이 그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정말 무수히 재생산되어 하나의 교조적 신화를 이룩하고 있기 때문 입니다.

적절한 예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Pollen님이 쓰신 글에서도 영향이 보입니다. (이 분야를 전공하시고 계시고, 뭘로 보나 저보다 훨씬 훌륭한 글을 쓰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러 면에서 저의 생각이 협소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왕 시작한 말이니 끝을 맺겠습니다.) Pollen님이 아마도 군에 계실때, 내무반에서 쓰신 _The Long Road To..._라는 글에 보면, Anti문화가 갖는 물화를 거부하는 노력에 대해서 이러한 분야의 음악이 갖는 음악의 전복적 양식을 열거하신 것이 있습니다.
1)기존의 음악적 문법에서 완전히 탈피하는 경우, 2)불협화음, 구조적 난해함, 쟝르의 혼재 3)The Un Merry Go Round 저조차도 음악적(정확히 악보적) 지식이 별로 없는 불쌍한 인간이지만.. 이 중 1)의 예로 들으신 아방가르드 음악만을 살펴보더라도 일단 그 용어가 너무 포괄적인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대부분의 작곡가는 (대표적으로 쇤베르크, 스트라빈스키, 존 케이지) 기존체제에 대항하기 위해서 전위를 했다는 말을 한 것을 그들의 글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아이슬러 같은 사람은 좀 특이한 경우라고 볼 수 있겠죠. 또한 아방가르드 음악이 악기 상호간의 인터플레이와 임프로바이제이션에 의해 이루어 진다는 말씀은 아마도 50년대 말, 60년대 초부터의 프리재즈나 이에 영향받은 유럽의 뮤지션들로 아방가르드를 한정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경우라도 대표적 사회학적 대중음악 평론가 사이먼 프리스의 동생인 프렛 프리스 및 그 일단의 몇몇의 RIO계열을 제외하면 정치적 도구로서 그들이 음악을 했다고 해석할 근거는 극히 빈약하지 않겠습니까? 분명 이러한 음악의 정치적 의미에 대한 성찰은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만연되고 조장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것이 시시한 얼터너티브 밴드 (시시한 얼터너티브 음악이 절대 아님.)들에 대한 것들과 결부되는 것을 볼 때, 그들 평론의 근간이 되는 음악사회학에서 비판하는 미학적 신비화경향의 또 다른 형태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입니다.

텍스트 내재적이냐, 외재적이냐하는 문제는 문학쪽에서도
여러 이론들의 충돌이 있는걸로 알고 있습니다만은...러시아 형식주의나
기호학이 문학언어의 시적 기능 자체에 촛점을 맞추어 이전의 상징주의를
극복하고 과학적인 분석을 시도했다는 것은 나름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곤
있지만, 그에 맞서 상호텍스트적인 맥락을 지나치게 무시한 것으로 비판
받기도 합니다. 일테면 역사/사회적 맥락을 중시한 리얼리즘 문학비평이
그 쪽이지요. 음악 역시 예외가 아니라고 봅니다.

제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드릴 말씀이 없군요. :-)

음악 또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상의 산물'이라고 볼 수 없는 한, 그것이 위치한 여러 맥락을
함께 분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그 내재적 요소가 신성시된 감이
없지 않아 있는 'Rock Spirit - 저항정신'이든, 이쪽 프로그레시브에서
많이 발견되는 것처럼 보이는 신화적/신비주의적 모티브든 말이죠. 신화를
표방하는 것 역시 나름의 문화적 컨텍스트 속에 놓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말씀하신 것처럼 '해석의 초점을 과대 확장하는' 경우가 되겠는데,
이것은 몇몇 평론가들이 음악의 내재적인 코드에 대해서 체계적인 지식을
보유하지 못한 결과 사회학적 도구에 지나치게 경도된 탓이라고 봐야
될겁니다. 그렇지만 지난 우리 대중음악 비평이 지나치게 인상비평에
머물고 만 느낌이라 ('직업평론가'가 아닌 전영혁씨를 거론해서 좀
안됐습니다만은 그 분이 쓴 오래된 앨범의 해설지를 봐도 어딘지 빈자리가
느껴지더군요) 90년대 들어서 각개분투하고 있는 소장평론가들의 글들은
나름대로 새롭고 의미있는 시도라고 보고 있습니다. 음악을 대하는
평론가들의 시각에 따라, 음악 텍스트 자체에 대한 정치한 구조적 분석과
말씀하신 외재적 맥락에 따른 분석이 병행되면 더할나위 없겠지요.
전무했던 한쪽의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좀 더 지나면 그런 의미에서
총체적 분석에 값하는 훌륭한 글들이 나오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너무나 가치있는 말씀입니다. 동감합니다.
한가지 이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현재 소장파라고 말씀하신 문예적 평론을 주로 하는 사람들이 음악 텍스트를 병행해가면 현재 그들의 평론의 뼈대는 상당량 녹아내리고 말 것입니다.
대부분의 서구 팝스를 정신적 퍼랠러시스를 일으키는 정치적 도구로 해석할 경우, 또 '제도권'이라는 용어가 다용될 것이고 이에 따라 프랭크 시나트라의 음악은 거세되겠죠.
음악이라는 복잡한 정신현상의 산물 및 촉매제를 '통일장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차라리 침묵을 지킬까요? 그렇다면 저는 써로가 되는 겁니까, 아무 생각없는 바보가 되는 겁니까?

[Neo-Zao, mailto:zao@wm.lge.co.kr]

Pollen님의 글을 인용하면서 저 자신의 정당치 못 함을 다소간 느꼈는데, 또 하지만 내무반의 붉은 취침등 아래서 그런 멋진 생각을 하고 계셨다는 '존경'을 가지며 한 것이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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