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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속 사람들에 관하여 / 창문지기

<html><embed src=mms://218.38.55.213/LOW_WMA_040419/268/268698.asf width=68 height=25 loop=1></html> El Antifaz (가면)

사춘기에 마리 로랑생의 그림을 처음 보았더랬다. 파스텔 톤으로 이루어진 색채의 여자들. 아.. 예쁘구나. 그런데..? 하는 물음표가 있었지만 부호 뒤에 따라와야 할 느낌이 무엇인지 그때는 풀지 못했다. 그리고 이십대 중반쯤 그녀의 그림을 다시 보게 되었고 그녀가 남긴 글을 읽었다. 죽은 여자보다 더 슬픈 것은 잊혀진 여자라고 했던가? 이 때 다시 보았던 아름다운 색채 속 그녀들의 눈엔 빛이 없었고 부드러운 파스텔 톤으로 위장되었지만 색은 차갑다고 느꼈으며 세상에 날 잊지 말아달라고 외치는 그녀가 무척이나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그 말을 남겼던 때가 그녀의 나이 몇 세였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시간이 지나가면 잊혀지는 게 인지상정인 것을 때 써가며 잡고 싶어하는 그녀는 내게 왕 공주병에 사로잡혀 헤어진 연인에게도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여인네로 밖에 느껴지지 않아서 당신이 물망초요~!하며 혼자 거의 분개하다시피 했댔는데 좀 더 시간이 지난 지금 내게 온 그녀의 그림과 글은 슬프지만 솔직하다.

세상에서 숨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럴 땐 무식하게 큰 깜장 썬글래스를 밤이나 낮이나 쓰곤 했댔는데 검은 렌즈 뒤로 보이는 세상은 내게 한 겹의 막을 친 것처럼 느껴졌기에 토끼가 제 눈 가리고 사냥꾼이 자길 못 찾는 줄 아는 그런 모양인지 뻔히 알면서도 임시방편의 어두워진 세상에서 조금이나마 안식을 얻곤 했다. 그런데 재미난 사람의 심리는 항상 반작용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강하게 어떤 것을 원한다면 그 반대의 상황 역시 그만큼의 강도로 무의식 중에 갈구하고 있기 마련이란 것. 숨으려고 애를 쓰는 동시에 아무리 숨어도 '누군가'는 '나'를 알아주고 찾아주며, 공감하기 원한다는 것이다. 그건 어떤 대접을 받아야겠다는 것과는 다르다. 그저 한 존재로서의 인정을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두가 아닌 특정인 '누군가'에게 향하는 로랑생의 이야기는 이미 잊혀지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알기에 나올 수 있었던 간절한 바람이란 것을 알게 된 지금. 이 여자. 존경할 만하다 싶을 만큼 솔직하게 느껴질 수 밖에. 레오나드 코헨이 쓴 딱 두 줄의 연시 '서른살'도 마찬가지다.

이런 온라인 상에서 실제의 표정이나 목소리를 통하지 않은 어떤 매개체를 통해, 즉 사진이나 글, 그림을 공개하는 것은 두렵지만, 그래도 '누군가'와는 나누고 싶은 순수한 맘일 것이다. 때론 한 사람이 보이는 여러 모습에 누군가 혼란스러워 당신이 이해가지 않는다.라고 말한다면 슬픈 일이 아니라 그제서야 난 외롭지 않은 존재라는 것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해가지 않는다는 것은 적어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타인을 이해하려는 것은 다른 언어를 나의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과 같다. 그리고 번역을 거치면 작품의 흠은 늘어나고 아름다움은 훼손되기 마련이다' 라고 누군가가(아마도 볼테르?) 말했다. 아마도 언어란 그 사람의 가치관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타인의 무언가를 본다면 나의 잣대로 그를 판단하지 말며 그의 언어를(가치관을) 섬세하게 읽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때, 누군가도 나를, 나와 같은 마음으로 읽고 있을지 모른다.

나를 찾는 것과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과정이라 생각되기에 어떤 도구로 가리지 않고 솔직하게 내놓고 외치는 그들이 실은… 부러운 것일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20040119 오야붕

Maritha, please find me,
I'm almost thirty.
-Leonard Cohen

  • 참고이미지: Owen Kanzler / selfportrait
 



오야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