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er Gabriel - (scratch)

1 개요[ | ]

Peter Gabriel
Peter Gabriel (1978)

2 허경[ | ]

결과적으로, 애초 상업적 측면에서 무난한 출발을 보였던 게이브리얼의 1집은 다른 기존의 거물 아티스트들의 앨범과 마찬가지로 영국은 물론 당시의 전 유럽을 휩쓴 펑크의 물결에 의해 침몰되었다. 게이브리얼은 이러한 재정적 적자로 인해 레코드사로부터 빨리 2집 앨범을 녹음하라는 압력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게이브리얼은 실로 이러한 재정적 문제보다 더 큰 본질적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아마도 1집이 발매된 77년 말 당시 1집에 대한 게이브리얼 스스로의 평가는 그리 만족스러운 것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냉정히 평가해 보면 1집은 실상 '제너시스 음악과의 차별화'라는 한 걸음만을 성취했을 뿐이다. 물론 그것은 게이브리얼로서는 절대 절명의 한 걸음이었겠지만 그 한 걸음은 아직 필요 조건일 뿐 완전한 충분 조건이 되기에는 부족한 것이었다. 그는 아직 자신만의 음악 스타일을 확립하지 못했던 것이다. '화학적 합성'에 이르지 못한 채 프로그레시브와 리듬 앤 블루스를 '물리적으로 결합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난 것처럼 보였다. 당시의 게이브리얼이 느끼고 있었음에 틀림없는 이러한 음악적 불만은 다음해인 78년 발매된 2집 <Peter Gabriel>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2집은 애틀랜틱 레이블에서 제작되었다). 그는 1집의 모토였던 '미국화'의 테제를 과감히 버리고 1집에 참여했던 이전 킹 크림즌의 로버트 프립을 프로듀서로 맞아들여 그만의 '게이브리얼화'를 위한 위대한 첫 걸음을 내딛는다.

1946년 생인 프립은 1950년 생인 게이브리얼보다 4살 연상이다. 프립은 68년 자일즈 형제와의 트리오 앨범 <The Cheerful Insanity Of Giles, Giles And Fripp>으로 데뷔했지만, 그가 69년 킹 크림즌의 이름으로 발매한 데뷔 앨범 <In The Court Of Crimson King>은 같은 해 발매된 제너시스의 데뷔 앨범 <From Genesis To Revelation>과는 실로 비교도 할 수 없는, 차원을 달리하는 '무시무시한 걸작'이었다. 이후 게이브리얼은 항상 킹 크림즌과 로버트 프립의 열렬한 팬으로 남아 있었으며, 프립 또한 피터 게이브리얼과 제너시스를 흥미로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프립은 게이브리얼의 첫 앨범에 게스트 기타리스트로 참여했다. 게이브리얼은 프립에게 자신의 2집 앨범을 제작해 줄 것을 부탁한다.

게이브리얼은 2집 앨범이 발매되기 한 달 전인 78년 5월 프랑스의 음악 잡지 와 행한 인터뷰에서 '프로듀서로 밥 에즈린이 아니라, 로버트 프립을 선택한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1집 앨범 이후 전 좀 더 제 자신에 대한 확신이 생긴 것 같아요. 그래서 2집에서는 제 작업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는 좀 더 중립적인 프로듀서와 일하고 싶었어요. 1집 때는 제가 밥 에즈린에게 바라는 걸 좀 이렇게 저렇게 해 달라고 많이 의지했지요. 그런데 요번에는 상황이 좀 달라졌고, 지난 번 절 도와줬던 밥 에즈린에게 '당신의 역할을 이번에 좀 축소해 보자'고 얘기하긴 어려웠어요. 밥 에즈린은 뛰어난 제작자예요. 하지만 전 결국 이번엔 저한테 좀 더 객관적인 의견만을 제시해 주는 그런 타입의 제작자를 찾게 되었어요, 저의 작업에 대해 자신의 아이디어나 취향을 강조하는 그런 제작자 말고요 ... 그래서 전 로버트 프립에게 부탁을 했지요. 게다가 저는 프립의 실험성을 무척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제가 저의 이번 2집에서 시도해보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런 실험성이었어요. 그리고 앨범의 '음색'도 상당히 바뀌었지요 ... 앨범의 세 요소는 연주자와 프립 그리고 저 자신이에요."

모두 놀라운 나름의 독창성을 갖고 있으며, 또 그만큼 자기 주장이 강한 것으로 유명한 이 두 사람, 특히 프립에 대한 일반의 이미지와는 달리 게이브리얼은 이렇게 '인간적인' 이유에서 프립을 초청한다.

게이브리얼의 표현에 따르면, 1집에서 게이브리얼이 처했던 상황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프립은 "정확히 밥 에즈린과는 반대로 행동하려고" 애썼다. 프립은 단지 '작업상의 제안'으로만 자신의 역할을 한정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적어도 1집보다는 나은 것이었다. 그들은 1978년 봄 네덜란드의 릴라이트 스튜디오와 뉴욕의 히트 팩토리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시작했다.

프로듀서 프립과 게이브리얼은 2집의 제작을 위해 베이스의 토니 레빈과 신서사이저의 래리 패스트를 제외하고는, 전혀 새로운 밴드의 라인업을 구성했다.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드럼의 제리 마로타(Jerry Marotta), 기타의 시드니 맥기니스(Sidney McGinnis), 키보드의 로이 비턴(Roy Bittan)·베이트(Bayete) 등이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물론 이후 86년의 5집 앨범까지 참여하게 되는 드러머 제리 마로타이며, 한편 본 작은 베이시스트 레빈이 이후 자신의 트레이드마크가 될 스틱(Chapman Stick)을 처음 사용한 앨범이기도 하다. 한편 게이브리얼은 현명하게도 '문제가 되었던' 이전 앨범의 두 악기 주자, 드러머와 기타리스트를 교체했다.

앨범에서 음악적으로 돋보이는 곡은 앨범을 여는 'On The Air', 'D.I.Y.', 및 'Exposer'일 것이다. 앨범의 '소리'는 전체적으로 1집보다 훨씬 그와 잘 '어울린다'. 특히 첫 곡 'On The Air'에서 들리는 레빈의 베이스와 비턴·패스트의 키보드·신서사이저, 새로 등장한 마로타의 드럼 사운드는 1집의 성과를 이미 거뜬히 뛰어넘는다. 이어지는 싱글 'D.I.Y.'는 레빈의 스틱 베이스가 처음 등장하는 곡인데, 게이브리얼 자신의 피아노와 드럼·기타 사운드가 잘 어울리는 멋진 곡이다.

이 두 곡만으로도 청자는 게이브리얼이 이전 1집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활기찬'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특히 "나한테 뭘 해라 말아라 명령하지마, 난 그렇게 안 할테니까, 나한테 널 믿으라고 말하지마, 난 널 안 믿으니까 ... 일이 너무 커지면, 난 그들을 전혀 안 믿어. 네 일을 콘트롤하고 싶으면 보다 작은 걸 지켜내야 돼, 네 스스로 해야 되(do it yourself)!"로 이어지는 곡의 가사는 이후 이어질 새로운 그만의 독창적인 자기 주장을 예견케 하는 '예고편' 격이다.

다음 곡 'Mother Of Violence'는 맥기니스의 기타와 비턴의 키보드가 잘 조화를 이룬 서정적 취향의 어쿠스틱 넘버인데, 특히 마지막 부분에 잠시 등장하는 프립의 일렉트릭 기타는 곡의 매력을 배가시킨다. 한편 이 곡은 당시 게이브리얼의 아내였던 질 게이브리얼(Jill Gabriel)이 가사에 참여했는데, "폭력의 어머니는 ... 두려움"(Fear, fear - she's the mother of violence)이라는 반복 후렴구를 가지고 있다. 이는 명백히 어린 시절 간디의 비폭력주의에 크게 영향 받은 게이브리얼의 휴머니즘적 성향이 명백히 드러난 사례이다. 한편 이 곡은 앨범의 'White Shadow', 'Indigo', 'Flotsam And Jetsam', 'Home Sweet Home' 같은 곡들과 함께 (1집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거나, 적절히 구사되지 못 한) 게이브리얼-프립 류의 '서정성'을 드러내는 좋은 곡들이다.

다음의 'A Wonderful Day In A One-Way World' 역시 레빈의 스틱 베이스 작업이 돋보이는 곡으로 전체적 가사와 분위기 측면에서 게이브리얼의 특기인 이전의 유머러스한 환상적 취향의 '골계미'(滑稽美)가 잘 드러난 곡이다. 'Animal Magic'도 이와 비슷한 연장선상의 곡이다.

앨범의 음악적 백미는 그러나 단연 LP의 뒷면을 여는 'Exposure'일 것이다. 원래 프로젝트 '모조'의 일부로 기획되었던 이 곡은 게이브리얼·프립의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졌으며, 마로타의 드럼, 레빈의 베이스, 맥기니스의 기타, 게이브리얼의 보컬과 프립의 프리퍼트로닉스(frippertronics)가 어우러져 놀라운 실험적 성취를 이루어낸, 앨범의 다른 곡들과도 깊이와 차원을 달리하는 기념비적인 곡이다. 특히 곡의 전반을 리드하는 프리퍼트로닉스와 베이스는 단순한 연주력이라는 기량의 차원을 넘어선 - 이후 80년 3집 이후 게이브리얼의 성취와 81년 새로운 킹 크림즌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될 - 80년대 '프로그레시브·아방가르드 정신'의 새로운 부흥을 예고하고 있다.

그러나 앨범은 전체적으로 여전히 그의 '본령'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으며, 카타르시스의 측면에서도 만족스러운 성취를 보여주지 못 하고 있다. 더구나 앨범은 상업적인 측면에서 처참한 실패를 맛보았다. 78년 5월 발매된 싱글 'D.I.Y.'는 물론, 동년 9월 발매된 같은 곡의 리믹스 싱글조차 전혀 차트에 오르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는 펑크의 물결이 여전히 런던을 휩쓸고 있었을 때이며, 대중은 이전 킹 크림즌의 로버트 프립과 제너시스의 피터 게이브리얼이 만든 이 데이빗 보위 스타일의 '펑크'(D.I.Y. 스피릿!) 넘버를 외면했다 - 물론 이는 게이브리얼만의 '내적 맥락'을 갖고 있으므로 상기 요소들의 맥락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아마도 그는 이러한 현실을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인터뷰에서 그는 "이 앨범은 단지 팝 앨범이고 또 그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라고 거듭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러한 게이브리얼의 1집 참여 경험으로 자신의 주관적 의견을 관철시키길 극도로 꺼려했던 프로듀서 프립의 소극적 태도로 인해 앨범은 게이브리얼이 원했던 '충분한 실험성'의 측면에서도 아쉬운 바를 남기고 있다(아마도 'Exposure' 한 곡 정도만이 만족스러운 결과를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결국 앨범은 실험적 측면에서도, 팝적 대중성의 측면에서도 의도했던 결과를 얻지 못했다. 다만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 '컬트'(cult)의 원 정의에 충실하게도 - 한 장의 뛰어난 '컬트 앨범'으로 남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2집은 - 많은 사람들이 논증하고 있는 것처럼 - 아마도 사운드적 정교성의 측면에서는 1집에 비해 기술적으로 떨어질지 모르지만, 최소한 그 안에 담긴 소리와 정신적 취향은 피터 게이브리얼의 기질과 목소리에 보다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필자는 바로 이 점에서 이 앨범이 성취한 이러한 진일보한 측면을 높이 평가한다.

필자의 이러한 평가는 피터 게이브리얼의 음악적, 정신적 지향의 뿌리가 - 1집에서 그가 시도했던 보다 정서적이고, 보다 감정에 호소하는 (미국적) 리듬 앤 블루스 + 록에 있다기보다는 - 어디까지나 이성에 호소하며, 지성적 측면을 강조하는 (영국적) '프로그레시브 록'의 전통에 있다는 점에 기인하는 것이다(프로그레시브란 글자 그대로 진보이며, 이성과 논리가 없는 곳에 진보란 없다. 기존의 것을 비판하지 않고 진보란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진보의 정신이란 긍정이기보다는 부정의 정신이며, 이 부정이란 바로 기존의 것들에 대한 저항이며 비판이다. 나는 이 부정적 비판의 정신과 긍정적 사랑의 정신을 화해시키려는 것이 피터 게이브리얼이 이제까지 해온 작업의 본질을 이룬다고 본다. 그리고 나는 그 결과가 성공적이며, 기존의 논리틀을 뛰어넘는 성취를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게이브리얼의 이러한 '프로그레시브적 특질'은 적어도 필자의 판단으로는 가히 '체질적'이다. 적어도 게이브리얼은 2집을 통해 자신의 '정신적 지향'에 어울리는 음악을 찾았다. 그는 적어도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두 갈래 길에서 올바른 방향을 선택했다.

그러나 아직 그것은 그의 '몸'에 맞는 음악이 아니었다. 어쩌면 우리는 그가 2집에서 추구한 진정한 '피터 게이브리얼화'에의 시도는 사실 '로버트 프립화'에로 귀착되었던 것뿐이라고 말해야 하는지도 모른다(실제로 이후 프립은 모두 자신이 제작한 78년의 본 작과 79년 자신의 솔로 1집 , 홀 앤 오츠(Hall & Oats)의 데릴 홀(Daryl Hall)의 80년 솔로 앨범 <Sacred Songs>를 자신의 'MOR 3부작'으로 불렀다). 그는 이번에도 단지 한 걸음의 진보만을 성취했을 뿐이다. --사용자:허경, 2003

3 참고[ | ]

문서 댓글 ({{ doc_comments.length }})
{{ comment.name }} {{ comment.created | snsti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