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erGabriel/전기

1 피터 게이브리얼 1975-2000[편집]

1.1 # 인트로의 인트로[편집]

통신 26호입니다.

한 열흘 정도 '무서운~ 독감'에 시달리다가 어제제서야 조금 나아져 다시 학교에 갔다오니, 갈기회 사이트에 어떤 분이 제 글을 읽는데 깨져서 다시 올려달라고 부탁하셨데요. 그래서 엣날에 써두었던 글을 다시 클릭하여 읽고 교정도 보고 하다가 아예 통신으로 올립니다.

이 글은 일단 200년에 출간된 음악 전문 잡지 [뮤지컬 박스] 2호의 특집 '제너시스와 피터 게이브리얼'의 일부로 당시 쓴 것입니다. 잡지는 제가 음악 비평가 친구들과 만든 것이고요 현재는 단행본 체제로 전환하기 위해 정간되었지요. 오랫만에 읽어보니 쑥스럽네요 ... 그래도 문단 나누기와 띄어쓰기, 맞춤법 정도만 빠꾸고 거의 고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기회를 만들어 주신 '나그네' 님께 감사드리고요 ... 여하튼 매우 흥미있는 사람, 흥미있는 글(?)이지만, 관심이 가고 취향이 맞으시면 한번 읽어 보시길 ...

글이 길어서 3개로 나누어 올렸고요 ... 맨 마지막에 관련 사이트, 앨범 사진, 정보 등을 볼 수 있는 사이트를 올려 두었습니다. 아, 위의 사진은 차례로 본문에 등장하는 피터 게이브리얼의 2집과 3집이지요.

혹 앨범을 듣고 싶으시면 마지막에 링크해 놓은 사이트를 참조하시고요 ... 아니면 동네 레코드 점에서도 아마 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없어도 주문하면 가져다 줄꺼고요.

그럼 이만 총총이고요 기안녕입니다 ... 바야흐로 시작되는 본격적 겨울에 감기조심하시고요(아참, 저 멀리 칠레는 계절이 반대지... 그럼 바야흐로 시작될 '무더위' 조심하고...^^)...

2003년 12월 16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멀리서 그리고 가까이서

허경 드립니다.

1.2 # 인트로[편집]

피터 게이브리얼 1975-2000: 음악, 테크놀로지 그리고 휴머니즘의 심미적 결합

  • 들어가며

1975년 5월 피터 게이브리얼은 제너시스를 공식 탈퇴했다.

이때부터 이후 1집 <Peter Gabriel>을 발매하기까지의 약 2년 동안 게이브리얼은 영국 교외의 글래스톤베리(Glastonbury)에 머무르며 재충전의 시기를 갖는다. 당시 그를 만났던 음악 평론가 크리스 웰치에 따르면, 이 때 게이브리얼은 어린 시절 이후 중단했던 피아노 레슨을 새롭게 받고 있었으며, 자신이 최근 구상한 록 오페라 (Mozzo)의 아이디어 구상에 골몰해 있었다고 한다. 또한 게이브리얼은 당시 토쿄에서 막 개발되었던 소니 비디오 카메라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으며, 더욱이 UFO, ESP, 텔레파시 및 공중 부양에 이르는 갖가지 '초과학적인' 신비주의적 사상들을 탐구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이미 이렇게 말했다: '다른 종류의 음악적 하모니는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종류의 생물학적 효과를 낳아요.' 더구나 당시 그는 자신의 농장에서 양배추 키우기에 재미를 붙여가고 있는 중이었다. 음악과 생물학, 초과학적 신비주의 사상과 최첨단 과학 기술, 양배추 키우기와 소니 비디오 카메라 사이에는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신화와 동화의 세계를 넘나들며 인류의 과거와 미래를 노래하던 게이브리얼은 이제 또 하나의 신비주의적 구루(guru)가 되어버린 것일까? 역시 피터 게이브리얼은 영국 음악계의 괴짜이자, 기인인 것일까?

이 글은 우리 나라에 한 번도 소개된 적이 없는 피터 게이브리얼과 그의 음악 세계를 다루는 최초의 보고서이다.

1.3 # 게이브리얼이 부모로부터 받은 두 가지 주요한 관심 - 음악과 테크놀로지[편집]

어린 시절 게이브리얼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두 가지 주요한 관심은 음악과 테크놀로지라 말할 수 있다. 피터 게이브리얼은 1950년 2월 13일 영국 서레이(Surrey)에서 태어났다. 게이브리얼의 어머니 이렌(Irene)은 음악적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영국인들에게 <The Proms>라고 잘 알려진 야외 콘서트 <The Promenade Concerts>를 지휘한 것으로 특히 유명한 헨리 우드 경(Sir Henry Wood)과 함께 노래했으며, 그녀의 다른 네 자매 역시 모두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다섯 자매는 자주 게이브리얼의 집에 모여 각기 한두 가지 이상의 악기를 연주하며 함께 노래를 부르곤 했다. 어린 게이브리얼도 크리스마스 때마다 그랜드 피아노와 이모들에 둘러싸여 함께 노래를 부르곤 했다. 게이브리얼은 이 이모들로부터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배웠다.

그의 아버지 랠프 게이브리얼(Ralph Gabriel)은 목재상을 운영하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런던 대학(University Of London)을 졸업한 후 전기 엔지니어가 되었다. 그는 레이더 비행 시뮬레이터 개발 작업에 참여했고, 후에 영국 방송 중계 시스템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초기 광학 섬유를 사용하는 케이블 텔레비전 시스템 '다이얼-A-프로그램'(Dial-A-Programme)을 디자인했다 - 당신이 제너시스의 팬이라면, 이 '다이얼-A-프로그램'이란 이름을 어디에서 들은 것 같지 않은가? 이처럼 그의 세계를 지배하는 음악과 테크놀로지란 두 가지 원동력은 그의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자연스럽게 그에게 형성된 것이다.

게이브리얼 어린이는 이후 인근의 보육원(nursery school!)에 보내졌고, 후에는 워킹(Woking) 근처의 초등학교 준비반(prep school)에 입학한다. 그는 세인트 앤드류즈 보이 초등학교(St. Andrew's Boy School)를 거쳐, 1963년 열 세 살 때 - 이제는 록 그룹 '제너시스'의 산실로 유명해진 - 명문 사립 중·고등학교 차터하우스(Charterhouse)에 입학한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차터하우스 시기는 그에게 정신적 외상(外傷, trauma)의 시기로 남겨져 있다. 다른 모든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이 숨막힐 듯한 빅토리아적 규율의 보수적 명문 사립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계급 체계라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 생각엔 (사립) 학교 시스템이야말로 영국이 자신의 계급 분화를 강요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시 십대 초반으로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소년 게이브리얼은 이 시기 자신의 우상이 된 로큰롤과 소울 음악을 만나게 된다. 이는 학생 혼자 영화관에 가는 것조차 금지되던 60년대 초반의 영국 상황에서는 (소박하나마) 기존 질서와 사회에 대한 반항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제가 처음 산 앨범은 비틀즈의 데뷔 앨범이에요. 또 전 제가 처음으로 비틀즈의 'Love Me Do'를 들은 게 언제 어딘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해요. 또 비틀즈가 위성으로 세계에 동시 생중계했던 'All You Need Is Love' 공연도 그렇고요. 전 그 때 '우리가 해냈어'라고 생각했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참 소박한 곡이지만, 전 정말 흥분했었어요. 저는 제가 그 세대의 일부라고 생각했어요 ... 전 그 때 '주말 히피'였지요. 제가 처음 갔던 콘서트는 존 메이욜즈 블루즈 브레이커즈(John Mayall's Bluesbreakers)의 마키(Marquee) 공연이고요."

60년대 당시 니나 시몬(Nina Simone), 오티스 레딩(Otis Redding)의 열렬한 팬이던 10대의 게이브리얼은 댄스 밴드 '마이로즈'(M'Lords), 소울 밴드 '스포큰 워드'(The Spoken Word)에서 드럼을 쳤다. 더욱이 그는 차터하우스에서 이후 그의 가장 중요한 음악 동료가 될 동급생 토니 뱅크스를 만나게 된다. 뱅크스와 게이브리얼은 상대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오티스 레딩, 제임즈 브라운(James Brown)과 나이스(The Nice)의 팬임을 확인하고 뛸 듯이 기뻐한다. 이후 그들은 이 학교에서 또 다른 음악적 동료가 되어 함께 제너시스를 결성하게 되는 마이클 러서포드와 앤소니 필립스를 만나게 된다.

각기 게이브리얼·뱅크스와 러서포드·필립스가 재적하던 차터하우스 내의 두 학생밴드 '가든 월'(The Garden Wall)과 '어논'(The Anon)은 1965년 5월 '뉴 어논'(The New Anon)이라는 이름 아래 함께 활동을 시작한다. 한편 당시 게이브리얼은 이미 열두 살 경부터 초보적 작곡을 시도하여 이미 'Sammy The Slug' 등 자작곡을 가지고 있으며, 열세 살 생일 때 부모로부터 선물받은 드럼 키트를 자신의 보물 1호로 가진 뮤지션 지망생이었다. 이후 1967년 케임브리지 대학 졸업생으로 차터하우스의 '홈 커밍 데이'에 나타난 학교 선배 조너선 킹에게 데모 테이프를 전달한 그들은 킹의 추천으로 앨범을 녹음했다. 킹은 그들에게 제너시스라는 이름을 지어준 장본인이다. 이 1969년의 제너시스 1집 이후 75년 그의 탈퇴까지 앨범에 수록된 거의 모든 곡의 가사는 - 비록 앨범의 크레딧에는 작사·작곡을 포괄하여 일괄적으로 제너시스라 기재되어 있지만 - 게이브리얼이 쓴 것이다. 이 시기 제너시스의 음악적 활동에 대해서는 본 특집의 앞부분에서 충분히 다루어졌으므로, 아래에서는 다만 그 가사를 중심으로 하여 제너시스 시기에 있어서의 게이브리얼의 정신적 변화를 아주 대략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4 # 1965-73: 제너시스 시기 게이브리얼 가사의 두 요소 - 연극성과 영국성[편집]

이 시기 게이브리얼 가사의 핵심적 두 요소는 연극성(theatricalism) 및 영국성(englishness)이며, 아마도 이에 덧붙여 우리는 (서정적) '고독'과 (비극적) '투쟁'이라는 초기적 두 요소를 또한 첨가할 수 있을 것이다 - 영국성을 표현한 englishness는 영어에 존재하지 않는 조어로서 음악 평론가 이춘식이 아래의 참고 문헌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것이다.

우선 앨범 작업 중인 68년 당시 겨우 18살에 불과한 소년 게이브리얼이 가사를 쓴 69년의 데뷔 앨범 <From Genesis To Revelation>에서 드러나는 화자(話者)의 주된 정서는 무엇보다도 고독과 방황 혹은 번민이다. 이 1집을 통해 화자는 '어두운 침묵과 고독 속에 웅크리고 앉아 ... 당신을 기다리는' 나는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며 ... 다만 마음을 열고 ... 나의 따듯한 난로 가에 앉아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며', 때로는 당신에게 '그것이 정말 그렇게 잘못되었는지' 묻는다. 그러나 나는 한편 '당신에게 이리 와 우리와 함께 하자'고 권유하며, '언젠가 내가 당신을 사로잡고 말 것'이라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감싸는 전체적 정조는 언제나 '잘못한 것은 나이며' 그는 '언제나 슬프고, 외로우며, 뒤틀려 버린 그림자'라는 우울한 상념이다. 그러나 이러한 때조차도 그를 감싸 안는 것은 '음악이며, 음악만이 그가 듣는 모든 것'이다. 결국 이 자신만의 서정적 내면에 침잠해 있는 이 어린 소년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나만의 장소는 그녀의 자궁 안'이다.

이제 갓 20살이 된 게이브리얼은 70년의 2집 를 통해 그 안에 담겨 있는 음악만큼이나 자신이 더 이상 외롭고 번민하는 내성적 '소년'이 아니라, 여전히 고독하지만 세상의 불의에 대해 발언하고 투쟁하는 '청년'으로 성장했음을 드러낸다. 앨범의 주된 세 정서는 서정과 번민 그리고 투쟁이다. 그의 성숙한 보컬에 실려오는 가사는 이전 1집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렬한 힘과 시적 함축미를 지니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앨범의 가사는 커버를 포함하여 고대 그리스적인 신화적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이로써 게이브리얼이 진정 의도하는 곳은 당시 70년의 영국 사회, 특히 그 젊은이들의 정신 세계이다. 그는 '누구 혹은 무엇인가를 찾고 있으며' 그의 방황은 '신이 포기한 지 이미 오래인' 이 도시의 '지하철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젊은이'의 그것이며, 그의 안식은 '황혼'에 '들길에서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며' 고개를 들어 '나뭇가지를 만져보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다만 '천사들의 모습만이 나의 주변에서 춤추며 빙글빙글 돌며' 나를 위로한다. 나의 안식은 이같은 '자연'과 '환상' 안에만 있으며, 이 현실 세계는 더럽고 추하다. 하지만 나는 '내 몸의 모든 썩어 더러운 것들을 마셔 없애 버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더욱이 이 외롭고 고독하지만 자연과 신화를 사랑하며, 자신을 아낌없이 던질 준비가 된 이 비극적 영웅은 '칼로 흥한 길은 칼로 망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만 '너에게 세상의 모든 악을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그 자신과도 싸우는 평화주의자이기도 하다.

[이는 물론 차터하우스 시절 게이브리얼이 감명 받은 간디의 비폭력주의에 입각한 가사일 것이다. 영국인이 그가 인도인인 간디에게 영향받은 것은 아마도 한 일본인이 만해 한용운의 사상에 감명 받은 바와 마찬가지로 당시 보수적인 영국 사회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 간디의 비폭력·불살생(不殺生)주의의 영향으로 학생 시절 이후 채식주의자가 되었으며, 훗날 비폭력 인권 운동가들 및 양심수 석방운동을 위한 인권 단체 '국제 사면 위원회'(The Amnesty International)에 가입·활동하게 된다]

71년 21살이 된 게이브리얼은 3집 <Nursery Cryme>을 통해 또 다른 차원의 도약을 이룬다. 이는 이후 오늘날까지 그의 주요한 음악적·예술적 모티브가 되는 '연극성'의 확립이다. 앨범에서 게이브리얼은 이전의 뛰어난 2집 를 능가하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확립한다. 거의 모든 곡은 2인 이상의 '대화체'로 이루어져 있으며, 심지어는 사이사이의 '해설'마저도 담당하고 있다. 이제 화자는 더 이상 자신만의 세계에 고립되어 있는 고독한 젊은이 혹은 비극적 영웅이 아니라, 갖가지 은유와 비유, 특히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유모어'와 '골계미'(滑稽美)를 갖추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엮어가는 '연극적 다중 인격체'로 나타난다. 이는 특히 무대 공연시의 다양한 분장과 의상 및 조명 등으로 더욱 강화되어 각 곡마다 하나 이상의 일관적 테마를 선보이며 글자 그대로 '시어트리컬 록'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이런 면에서 이 시기 이후 게이브리얼의 탈퇴 이전까지 제너시스의 음악은 청각적인 앨범 청취만으로는 도저히 그 전모와 실체를 파악키 어려운 종류의 독특한 경험을 관중들에게 제공하였다. 이는 가히 우리 무성 영화 시대의 '변사'(辯士) 혹은 보다 정확하게는 우리 나라 판소리의 '소리꾼'(唱者)의 서양적 모습이라 해야 할 것이다(이하 씨어트리컬 록과 제너시스 음악 사이의 보다 일반적 관계 및 곡 해설에 대해서는 본 지 특집의 일부인 전정기의 글을 참조하라)]

여하튼 앨범은 제너시스가 음악적으로 가장 창조적이었던 71-75년 시기에 완전히 확립된 그들의 '연극성'과 '영국성'이 최초로 정립된 '현대적 고전'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한편 이들이 관객들에게 투사한 이미지의 다른 한 축인 '영국성' 또한 본 앨범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영국인이라면 'The Musical Box'에서 가사에 등장하는 영국 동요 'Old King Cole'의 멜로디가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전 앨범들과는 달리 이 노래들의 '이야기꾼'이 인용하는 각종 전거와 사례들 역시 - 일부 신화적 주제를 제외하고는 - 거의 모두 영국적인 것들이다. 실상 이러한 점은 영국에서 태어나, 영국인들의 (사투리와 문학 작품 등을 포함한) 의식적 언어·문화는 물론 무의식적인 갖가지 은밀한 소망과 혐오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영국인들' 그 자신이 아니라면 - 사실은 불가능이라 해도 좋을 만큼 - 좀처럼 제대로 포착해 내기 어려운 부분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 아래에서는 좀 길지만 (말미의 참고 문헌 중 이춘식의 글 안에 번역되어 있는) 영국인 평론가 나이젤 해리스(Nigel Harris)의 글 <초기 제너시스 음악에 있어서의 영국적인 모습>를 인용해 본다:

"제너시스 음악의 가사는 부조리한 시구, 구어체 영어의 악센트 및 기호, 신화, 전설, 동화, 동요 등 영국적 문화의 요소들로 가득 차있다. ... 피터 게이브리얼은 자주 영국의 지방 악센트(사투리)와 표현을 사용해 노래를 불렀는데, 그런 다양한 억양의 구사를 통해 게이브리얼은 곡에 담긴 여러 가지 개성의 인물들을 적절히 묘사해 냄으로써 이전에는 드라마와 연극의 소도구에 불과했던 노래가 이들 무대공연에 있어서는 구체적인 하나의 장치로서 기능할 수 있게 만들었다 ... 19세기 (심지어 현재까지도) 보육원은 부유한 영국 부모를 둔 아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비밀의 세계였다. 'The Musical Box'에서 잘 드러나는 것처럼 제너시스는 그러한 특권의 세계에 매료당했고 동시에 그것에 대한 반감도 가지고 있었다 ... 이는 'Return Of The Giant Hogweed', 'The Fountain Of Salmacis' 혹은 'The Battle Of Epping Forest', 'Watcher Of The Skies' 등에도 잘 나타나 있다 ...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의 음악을 영국적 사운드로 만들어주는 것은 그들의 가사이다. 이러한 이유로 제너시스는 때로는 초현실적 형식으로 때로는 넌센스의 형식으로 나타났던 영국적 개성의 절묘한 변형으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문맥에 따라 나 자신이 번역을 약간 고쳤다)

1972년 22세가 된 게이브리얼은 제너시스의 4집 을 발표한다. 이 앨범에서 그의 가사는 좀 더 무거워져 현실을 비판하는 은유적 가사의 곡들을 써내게 된다. 이는 각기 지구에 내려온 '외계인 지배자'와 인간의 키마저 통제하는 2012년의 '유전자 관리국'을 다룬 'Watcher Of The Skies'와 'Get'em Out By Friday'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의 보컬과 가사가 이전과도 또 한 번 구분되는 '카리스마적' 성격을 획득하게 되는 것은 본 작, 특히 대곡 'Supper's Ready'를 통해서이다. 모두 7부로 구성되어 약 23분에 이르는 이 곡은 수년간에 걸친 멤버들의 개별 작곡들을 모아 밴드의 새로운 편곡과 게이브리얼의 가사에 의해 통일성을 부여받은 곡이다. 게이브리얼은 이 곡에서 초현실적 이미지와 기독교적 묵시론, 낭만주의 등이 공포 및 유모어와 한데 뒤섞인 기묘한 신화적/현실적/초현실적 환상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 곡의 내용은 먼 여행에서 돌아온 화자가 연인에게 다시금 사랑을 고백하는 프롤로그 1부와 그 이후 2-6부에 이르는 '환상 여행' 및 다시 현실로 돌아온 에필로그 7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의 서두에서 화자는 '대기실을 지나, 나는 텔레비전을 끄고, 네 곁에 앉아, 네 눈을 들여다봐. 이 한 밤에 자동차 소리가 멀어져 갈 때, 난 네 낯빛이 변하는 걸 정말 봤어. 편하지 않은 것 같았어 ... 하지만 넌 ... 우리의 사랑이 진실한 걸 넌 모르니. 난 그 동안 너무 멀리 가 있었어, 네 사랑스런 두 팔에서 말이야. 너와 함께 있으니 정말 좋군. 참 오래 됐지, 그치 않아?'라고 묻는다(<연인의 발걸음>). 그들은 이어 환상에 빠져든다. '자, 이제 모든 아이들이 길을 잃은 이 곳에 난 내 운명을 걸 거야. 너도 나와 손을 잡고 같이 들어가. 기다려 봐. 요 작은 뱀놈아, 우리가 널 놀라게 해주지'라고 노래한다(<틀림없는 영원한 신전지기>). 이제 '우리는 서쪽 아이들을 만나러 들판을 건넌다. 전쟁이 시작됐어. 평화를 위해 죽이자 ... 탕 탕 탕 ... 오늘은 경축할 날이야. 우리의 적들은 오늘 임자 만난 거야. 우리의 전쟁신은 찬양하고 춤추라고 명령한다'(<이크나톤과 이차콘 그리고 그들의 어릿광대 밴드>). '전쟁이 남긴 혼돈 속에 헤매는 우리는 시체들의 산을 넘어 온갖 것들이 살라 숨쉬는 들과 숲으로 나간다. 연못가에 서 있는 젊은이는 도살자들에 의해 '인간 베이컨'이란 스탬프가 찍혀 있었어(그는 너야). 우린 놀라 쳐다봤지, 나르시스가 꽃으로 변할 때 말이야. 꽃이라고?'(<난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버드나무 농장에 가면 말이야 ... 눈을 떠봐, 신기한 게 많아. 바위 위의 여우처럼, 음악 상자처럼 모두들 앉아 있거든. 엄마 아빠, 착한 사람 나쁜 놈 여기선 모두 행복해 ... 개구린 왕자, 왕자는 멋지잖아, 멋지면 달걀, 달걀은 새야. 너 몰랐니? ... 자, 그럼 우리도 바뀌어 볼까? 다 바꾸자! 니 몸이 막 녹는다 ... 넌 아직 안 가 본 방을 열어 보려고 내 목소리를 가만히 들을 때 ... 넌 언제나 여기 있었던 거야. 니가 싫든 좋든 말이야 ... 근데, 이젠 호루라기 소리, 탕 소리가 나면 다시 우리 자리로 돌아가는 거야.'(<버드나무 농장>) '피리 부는 사나이가 아이들을 땅 속으로 데려가고, 용들이 바다에서 나오며, 현자의 빛나는 은빛 머리가 날 쳐다본다. 그는 하늘에서 불을 내리고 ... 666은 이제 혼자가 아니야. 일곱 개의 나팔은 네 영혼에 직통으로 달콤한 로큰롤을 불어 대고, 피타고라스는 거울을 들고 보름달을 비춘다. 핏속에서 그는 아주 새로운 음조의 시를 쓴다 ... 자, 이제 네 그 천사 같은 푸른 눈 ... 넌 우리의 사랑이 진실한 걸 모르니, 그 동안 너무 멀리 있었어, 너의 사랑스런 두 팔에서 말이야. 이젠 너에게로 다시 돌아갈 거야'(9/8 박자 묵시록: 떠벌이 깔죽이의 유쾌한 친구들 우정-출연). 현실로 돌아온 그들은 '마치 강물이 바다에서 다시 만나는 것처럼, 씨앗 속의 싹이 트는 것처럼 ... 이제 우린 드디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야. 태양 아래 천사가 커다란 목소리로 외치고 있어 - '이 것이 크신 분의 저녁'이라고 말이야. 주인들 중의 주인, 왕 중의 왕이 어린아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돌아왔어, 아이들을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데려가려고 말이야(<달걀이 달걀인 것만큼 분명히 - 아픈 사람의 발>). 그리고 가사의 마지막엔 이렇게 적혀 있다: "계속"(Continued).

1973년 23세가 된 게이브리얼은 제너시스와 5집 <Selling England By The Pound>를 발매한다. 앨범에서 그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영국적 인용구 및 억양을 구사하여 다양한 캐릭터를 창출한다. 다만 주제의 측면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I Know What I Like'처럼 '하기 싫고 꼭 그렇게 안 해도 되는 일들을 '다 너를 위한 거'라는 명목 아래 강요하는' 말 안 통하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과 동시에 'The Cinema Show'처럼 '오랜 여행과 고생을 하고 돌아온 현자'로서의 노인에 대한 모티브가 반복되어 나타난다. 한편 'The Battle Of Epping Forest'는 런던 동부 지역의 주도권을 놓고 싸운 두 갱단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전체적으로 이전 앨범들의 연장선에 있지만 보다 현실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을 직설법이 아닌 묘사와 은유 등의 산문적 운문체로 드러낸 것이 특징이다. 이 앨범을 마지막으로 '영국성'과 '연극성'을 평행적 두 축으로 하는 게이브리얼의 '고전적 신화/동화 시대'는 종말을 고한다. 1974년 그룹의 야심적 6집 더블 앨범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가 발매되었던 것이다.

1.5 # 1974: <어린 양 브로드웨이에 눕다> - 연극성과 실험성/현대성[편집]

어린양브로드웨이에눕다

이제 24살이 된 청년 게이브리얼이 도전한 야심적 시도는 그룹의 6집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였다. 더블 앨범으로 발매된 본 작은 그의 기본 아이디어를 채택한 콘셉트 앨범이었고, 그는 전곡의 가사를 담당함은 물론 앨범 속지에 이에 연관된 한 편의 단편 소설마저 실어놓았다. 가히 모든 면에서 로저 워터스가 전권을 행사한 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79)에나 비견될 만큼, 결과적으로 게이브리얼의 전권 하에 제작된 1인작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는 실로 '시대를 뛰어넘은' 작품이었다. 따라서 앨범은 그 작품에 걸맞는 대중의 찬사도, 비평가들의 지지도, 심지어는 다른 멤버들의 동의조차도 받지 못했지만, 이 놀라운 앨범은 시간이 지날수록 실험성 및 음악성 양 측면 모두에서 '기념비적 걸작'이란 칭호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 콘셉트 앨범에는 특이하게도 정규적인 노래 가사 이외에도 피터 게이브리얼이 직접 쓴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앨범은 그 음악은 물론, 운문으로 된 노래 가사, 산문으로 된 동일한 내용의 단편 소설, 디자인 그룹 힙그노시스(hipgnosis)의 탁월한 커버 작업이 맞물리면서 본 작만의 독특한 초현실주의적 공간을 창출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전 <> 잡지의 특집 <아트 록 다시 읽기: Theatrical Rock>에 실렸으며, 특히 본 작에 수록된 여섯 장의 커버 그림들로 내용을 풀어 나간 전정기의 글이 - 본 소설의 본령인 '(현대의) 신화적 상상력'보다는 지나치게 정치적 담론의 구조틀에만 집중한 감이 있지만 - 여전히 탁월하다:

"피터 게이브리얼 자신이 그려 나간 이 초현실적 가상 체험은 앨범 커버 안쪽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으며, 이를 아티스트 집단 힙그노시스가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커버 바깥쪽의 사진들이다. 라엘이 여행한 세계는 피터 게이브리얼의 무의식 세계였다. 그 속에서 그는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잡지 해당면 두 번째 사진), 행동의 주체라고 생각했던 자아의 목소리는 그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타자들에 의해 구성된 것이었으며, 사실 그는 벙어리에 불과했다(세 번째 사진). 무의식 속의 라엘, 그가 찾아 헤매는 형 존, 그리고 라엘 자신의 외부 세계와 현실 속의 라엘은 모두 그 자신들이지만, 그것들을 관통하는 어떤 일관된 존재란 없다(네 번째·다섯 번째 사진). 여기서 피터 게이브리얼은 이성이 지배하는 자아, 즉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자아'(Cogito)는 이렇게 스펙트럼처럼 분리될 수 있으며, 따라서 결국 우리가 인식하는 자아는 실상 허상이거나, 혹은 극히 표피적인 모습일 뿐일지 모른다는 지극히 프로이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실재계'(Real) 속에 존재하는 자신을 라엘(Rael)이 존재하는 '상상계'(Imaginary)로 투영하면서 자신의 무의식을 이미지로 구체화하려 했다. 그리고 그는 이 상상계 속에서 여러 기표들의 상징화를 통해 타자를 구성하고, 그 타자들과 자신을 구분지으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여섯 번째 사진). 즉 그는 무의식에 의해 제어당하기 보다는 그 무의식의 세계를 응시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마지막 여섯 번째 사진은 또한 '현실의 여집합'으로서의 나, 즉 '나는 나 자신의 자기 동일성(self-identity)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와 관련된 것들 사이의 차이성(difference)에 의해 구성되는 타자적 존재'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실로 게이브리얼의 가사와 힙그노시스의 커버는 이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는 전혀 볼 수 없을 만큼의 완전히 의도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본 작은 많은 점에서 참으로 선구적인 실험적 시도였다.

한편 게이브리얼의 글쓰기와 연관하여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항은 본 작의 가사가 그 어느 때보다 산문적이며, 더구나 그 내용을 아예 풀어쓴 '소설' 양식마저도 실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전까지의 고전 주제를 다루었던 신화·동화적 글쓰기를 벗어난 이 소설은 게이브리얼이 얼마나 탁월한 문학적 감각과 예술적 상상력을 가지고 있는가를 실증하는 실로 뛰어난 초현실주의 문학 작품이다(더구나 게이브리얼이 이른바 '고졸'로서 한 번도 정규적인 문학 수업을 받은 사실이 없음을 생각해 보면 놀라움은 더욱 커진다).

이렇게 탁월한 음악적·문학적 재능의 소유자인 게이브리얼이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 앨범 발표 후 매진했던 일은 다름 아닌 본 작의 영화화였다. 이전 영화 학교에 입학했던 이 '과거의 영화학도'가 자신의 프로젝트를 위해 선택한 감독은 놀랍게도 다름 아닌 영화 <El Topo>와 <Santa Sangre>의 감독 알레한드로 호도로프스키(Alejandro Jodorowsky)였다! 이 계획이 게이브리얼 자신의 그룹 탈퇴와 여타 재정적인 이유 등으로 결국 실현되지 못한 것은 정말 아쉬운 일이다. 호도로프스키는 그 자신 대단한 록 음악광이며 현재 파리에 거주하고 있는데, 이런 연유로 그는 최근 프랑스의 음악잡지 <Rock & Folk> 99년 7월호 <나의 애장 음반> 코너의 주인공으로 선정되었다. 이 코너에서 호도로프스키는 게이브리얼과의 작업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 그리고 피터 게이브리얼하고는 아주 친해요. 게이브리얼이 저한테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 영화의 시나리오를 써 달라고 했었거든요. 그 때 전 게이브리얼과 함께 약 한 시간 분량의 아주 복잡한 비디오 클립 시나리오를 썼지요. 근데 사정이 생겨서 영화를 제작하진 못했어요. 하여튼 중요한 건, 그 때 제가 게이브리얼한테 타로(tarot - 이탈리아의 카드놀이)를 가르쳐 줬지요 ... 그 때부터 게이브리얼은 저한테 종종 전화를 해서 자기 비디오 클립을 찍어 달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요. 근데 우리가 막상 만나면 우린 타로를 치느라고 비디오 클립 얘긴 항상 잊어버려요!"

1.6 # 1975-76: 제너시스 탈퇴 후의 게이브리얼 - 도약을 위한 준비와 모색의 시기[편집]

1975년 5월 피터 게이브리얼은 제너시스를 공식 탈퇴했다. 서두에서 말했던 것처럼, 탈퇴 후 게이브리얼은 영국 고향 근처의 글래드스톤베리에서 가족들과 새로운 전원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게이브리얼은 자신의 향후 진로에 대한 명확한 밑그림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만간 새로운 방향의 음악적 활동'을 재개할 것이라는 의향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이 시기 동안 어린 시절 이후 중단했던 피아노 레슨을 새롭게 받았으며, 전자·멀티 미디어 부분에도 큰 관심을 갖는 등 60년대 말 이후 처음으로 자신만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막 개발된 두 가지 새로운 '발명품'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두 가지는 소니(Sony)사에서 막 출시된 비디오 카메라와 신서사이저였다. 그는 앞으로 동시대의 음악과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이 두 과학·기술적 발명의 놀라운 가능성에 가장 먼저 주목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당시 그는 'TV 등에 방송되기 위한 약 10분 가량의 비디오 클립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직 '뮤직 비디오'라는 용어조차 생기기 이전이던 75-76년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 만약 75년 호도로프스키와의 공동 작업으로 영화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가 만들어졌다면, 그의 표현대로 '록 아티스트에 의해 시도된 최초의 멀티 미디어 작업'이 되었을 것이다(핑크 플로이드와 앨런 파커의 영화 <The Wall>은 82년 개봉되었다). 당시 그는 신서사이저 강의를 들었는데, 게이브리얼의 '선생님'은 다름 아닌 <Switched On Bach>를 낸 신서사이저 주자 웬디 카를로스(Wendy Carlos)였다(그는 원래 남성으로 월터 카를로스(Walter Carlos)였으나 성전환 수술을 거쳐 웬디 카를로스가 되었다).

한편 어린 시절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농장에서 자란 게이브리얼은 집 마당에서 양배추를 키우는 등 자연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표현한다 - 그는 어린 시절부터 채식주의자였다. 이 때 게이브리얼은 향후 그가 발표하게 될 곡들을 만들면서 본격적인 작곡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하게 된다. 후에 게이브리얼은 자신의 작곡 방식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전 음악을 통해서는 말로 하는 것보다 내적 검열 같은 걸 쉽게 벗어날 수 있어요. 작곡을 할 때 전 곡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뜻 없는 말을 흥얼거려요 - 전 이 걸 '게이브리얼어'(gabrielese)라고 부르죠. 전 이 무의미한 즉흥 게이브리얼어를 사용해서 작곡을 해요. 무의미가 없이는 의미도 없어요(There is no sense without nonsense) ... 많은 아티스트들은 마음 속에 목표를 정하고 그것에로 직접 나아가지요. 하지만 전 가장자리에서부터 가운데를 향해서 원을 그려봐요. 무슨 일을 할 때, 뭔가 마술 같은 감정이 생겨날 때까지 기다려고, 그리고 그게 찾아오면 그걸 따라가 보지요. 이렇게 저렇게 말이에요."

이렇게 해서 그가 그룹 탈퇴 후 최초로 작곡한 곡은 영국의 코메디언이자 대중 음악 가수인 챨리 드레이크(Charlie Drake)를 위한 곡이었는데 실제로 발매되지는 않았다. 그 외 게이브리얼은 당시 마틴 홀(Martin Hall)의 작사로 'People In Glass Houses', 'The Box' 등 약 20 여 곡을 작곡했는데, 이 중 'Excuse Me'는 그의 1집 앨범에 수록되었다.

한편 그는 새로운 록 오페라 '모조'(Mozo)의 작곡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이 프로젝트는 결국 실현되지 못했지만, 'Down The Dolce Vita', 'Here Comes The Flood', 'On The Air', 'Exposure', 'Red Rain', 'That Voice Again' 등 당시 작곡된 곡들은 이후 그의 솔로 앨범들에 다양하게 분산되어 수록되었다. 그는 75년 당시 인터뷰를 통해 늦어도 76년 안에 자신의 첫 솔로 앨범을 발표하려는 계획을 표명하고 있는데, 실제 그의 첫 솔로 앨범이 발매된 것은 77년이었다.

1.7 # 1990: <Shaking The Tree: 16 Golden Greats> - 첫 솔로 베스트 앨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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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년 게이브리얼은 자신의 와 앨범에 참여해 주었던 세네갈의 유순 두르의 앨범 에 게스트 아티스트로 참여한다. 동년 6월 두 사람은 공동 작곡의 듀엣곡 'Shaking The Tree'를 싱글로 발표한다. 게이브리얼이 - 백 보컬리스트가 아니라 - 다른 아티스트와 듀엣 곡을 발표한 것은 이 곡이 처음이다. 96년 발매된 게이브리얼의 CD-롬 에는 'Shaking The Tree'의 곡 해설이 실려 있다: "이 노래는 아프리카의 모든 여성들, 세계의 모든 여성들을 위해 훌륭한 세네갈 싱어인 유순 두르와 함께 쓴 곡이다 ... 이 곡은 남성 지배적 사회에 대한 비판이며, 또한 여성들의 커져 가는 자기 확신과 지위에 대한 찬가이다."

이어서 그는 그러한 과정에서 파생되는 두려움과 고통에 대해 이렇게 말을 잇는다: "심리학자 롤랜드 메이(Roland May)의 말처럼, 우리는 어떻게 해도 상처받게 된다 ... 당신이 자신의 감정적 문제에 직면해도 그것은 고통스럽고, 도망가도 역시 고통스럽다. 나는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커다란 깨달음을 얻는 것은 고통을 통해서이며, 따라서 우리는 고통을 기대할 필요가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좋아한다. 당신은 고통받게 되고, 당신은 배우게 될 것이다." 엄청난 개인적 고통과 성공을 거의 동시에 맛본 게이브리얼로서는 가슴에 와닿는 말이었을 것이다(한편 90년 현재 그는 여전히 87년부터 받기 시작한 심리 분석을 지속하고 있는 상태였다).

90년 11월 게이브리얼은 첫 솔로 베스트 모음집 <Shaking The Tree: 16 Golden Greats>를 발매한다. 수록곡을 앨범 별로 살펴보면, 'Solsbury Hill', 'Here Comes The Flood' 등 의 두 곡, 은 한곡도 선곡되지 않았고, 'I Don't Remember', 'Family Snapshot', 'Games Without Frontiers', 'Biko' 등 의 네 곡, 'Shock The Monkey', 'San Jacinto', 'I Have The Touch' 등 의 세 곡, 'Sledgehammer', 'Mercy Street', 'Don't Give Up', 'Big Time', 'Red Rain' 등 의 다섯 곡, 그 외 의 'Zaar', 기존 미발표곡인 'Shaking The Tree' 등 모두 16곡이다. 에서 다섯 곡, 에서 네 곡이 선곡된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에서 세 곡, 그것도 실상 전혀 히트하지 않은 'San Jacinto', 'I Have The Touch'가 선곡된 것은 이 곡들에 머무는 -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들을 들어주었으면 ... 하는 - 그의 애정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이는 'Mercy Street'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한편 그는 90년 홈 비디오 <The Desert And Her Daughters>를, 91년에는 그간 발표한 비디오 클립의 베스트를 모은 를 발매하여 영국 뮤직 비디오 판매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1.8 # 앨범 의 음악적 성과에 대한 논란 - 하나의 중간 결산[편집]

그러나 당신이 예리한 관찰자라면 에 관한 이제까지 필자의 글에서 정작 무엇보다도 중요한 '음악'에 관한 이야기가 한 마디도 없었음을 눈치 챘을 것이다. 그것은 물론 의도된 것이다. 나는 80년 라디오에서 그의 'Games Without Frontiers'를 들은 이후 그와 제너시스의 음악 세계에 매료되어 꾸준히 그의 음악을 들어왔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자리에 기술된 이전의 모든 앨범들에 대한 나의 기술이 그의 앨범들을 꾸준히 들어온 사람들의 대체적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나 나 역시도 이 앨범에 대해서는 명쾌한 입장의 결론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음악적으로 는 '애매한' 앨범, 무엇인가 '망설여지게' 만드는 앨범이다. 한 장의 앨범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 가사의 인식론적 성취, 커버의 아름다움과 참신성, 참여 아티스트들의 화려한 면모 이전의 - 단순하고 소박한 그것의 음악적 성취이다. 92년에 발매된 의 음악적 성취에 관한 전문가·일반인들의 의견은 8년이 지난 2000년 현재에도 여전히 분분하며, 어떤 '최종적인 동의 혹의 합의'에 이른 것이 아니다. 는 그런 면에서 논쟁적인 작품이며 또한 여전히 문제작임에 틀림없다.

를 여러 번 들어본 사람들이라면 최소한 그것에 담겨진 음악의 기술적·테크놀로지적 성과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하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보여주는 기술적 완성도, 섬세한 후반 작업의 탁월성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이에 덧붙여 아름답고 유려한 작곡, 더욱 풍부하고 심오해진 가사, 안정되고 잘 조화된 편곡, 게스트 뮤지션들의 탁월한 역량 등 앨범에서 구체적 하자 요소를 찾아내기는 참으로 어렵다. 심지어 여기에 세련된 커버 작업과 비디오 <All About Us>의 성취가 더해지면 우리는 더욱 곤혹스러워진다. 그렇다면 의 문제점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 자신이 정리해 본 바에 따르면, 를 들어본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는 '문제점'이란 실로 단순하다: "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다 듣기가 어렵다. 물론 는 모든 면에서 좋은 앨범일 것이다. 하지만 앨범의 소리는 왠지 답답하다. 그래서 는 꺼내서 잘 듣게 되지 않는다." 그래서 가 좋은 앨범이라는 것은 인정할 수도 있지만, 선뜻 '정말 좋은 앨범'이라는 말, 더구나 '내가 좋아하는 앨범'이라는 말이 잘 안 나온다.

한 마디로 는 무엇인가 우리로 하여금 '망설임'을 갖게 만드는 앨범이다. 왜 그런 것일까? 이미 가 발매된 지 8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아래에서 나는 - 최종적 결론은 아닐지라도 - 지난 8년간의 논의를 토대로 앨범에 대한 음악적 '중간 점검'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92년에 발매된 정규 스튜디오 6집 앨범 는 그가 리얼 월드 레이블과 스튜디오를 세운 이후 처음 발표한 작품이다. 물론 그 이전에 89년 영화 음악 이 발매되었지만, 이는 영화와의 유기적 연관도가 매우 높으므로 순수한 그 자신만의 의도로 완성된 작품이라 보지 않기로 한다. 는 리얼 월드 레이블의 법적인 공동 소유권자인 피터 게이브리얼 자신이 자신의 레이블에서 발매한 온전한 자신만의 작품이다. 그는 아마도 86년 5집 의 성과에 대한 부담과 함께 처음으로 제작하는 '온전한 자신만의 작품'에 대한 도전적 의욕을 느꼈을 것이다. 는 이후 6년, 이후에도 3년만의 작품이다. 그에게는 충분한 시간과 돈과 인력과 공간이 있었다. 이 경우 문제시되는 것은 오직 아티스트 피터 게이브리얼이 발표한 앨범의 배면에 깔린 그의 음악적 아이디어들 및 그것의 현실적 성공 여부이다. 그렇다면 그 자신은 앨범에 대해 무어라 말하고 있을까?

그는 인터뷰 등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의 작업 과정은 만족스러웠지만 그래도 때보다 더 어려웠어요. 에서는 정말 많은 노력을 했지요. 그리고 지금은 그 결과가 얼마나 잘 되었는지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저는 가 80년의 가 그랬던 것처럼 동시대보다는 이후에 더 잘 이해 받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는 에 대해 이렇게 자부심에 가득 찬 만족감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의 입장은 더욱 난처해졌다. 아래에서는 이제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듣는 이'로서의 우리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 보자.

우선 앨범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말 중 하나는 그가 이 앨범을 발표한 92년 이후 그 자신의 표현대로 '멀티미디어 아티스트'로 변화해 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이미 앨범에서 화가·컴퓨터 아티스트 등과의 공동 작업을 통해 앨범의 음악과 커버 작업을 행했으며, 93년 이의 작업 과정을 담은 홈 비디오 <All About Us>를 발매한 것으로 잘 드러난다. 한편 그는 같은 해인 93년 '리얼 월드 멀티미디어 사'를 창립하고 이를 통해 94년 첫 CD-롬 <Xplora 1>, 96년 두 번째 CD-롬 를 발매했다. 그는 데이빗 보트릴·리차드 블레어·리차드 에반스 등 3인 프로듀서·엔지니어 군단의 도움을 받아 리얼 월드 스튜디오와 레이블의 위상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바로 이들이 프로듀서 다니엘 라누아와 함께 리얼 월드 스튜디오에서 의 녹음과 믹싱을 담당했다.

앨범의 진정으로 특이한 점들 중 하나는 수록곡들의 앨범 버전보다 싱글에만 실린 리믹스 버전들이 음악적으로 더 높은(?) 성과를 들려준다는 이상한 사실이다(최소한 더 쉽게 '끝까지 들을 수 있는' 버전이다). 이는 물론 싱글로 발매된 곡들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이지만, 첫 싱글 'Digging In The Dirt'의 앨범 버전보다 각기 데이빗 보트릴, 리차드 에반스가 리믹스한 'Instrumental', 'Richard E Mix'가, 두 번째 싱글 'Steam'의 앨범 버전보다 봄 스쿼드(The Bomb Squad)가 리믹스한 'Oh, Oh, Let Off Steam Mix & Dub'이 그러하다. 특히 네 번째 싱글 'Kiss That Frog'의 앨범 버전보다 윌리엄 오빗(William Orbit)이 리믹스한 'Mindblender Mix'가 월등히 훌륭하다. 한편 'Steam' 싱글 CD에 수록된 매시브 어택/데이빗 보트릴의 리믹스 'Games Without Frontiers - Massive/DB Mix'는 원 곡과는 또 다른 의미의 뛰어난 '오리지널리티' 창출에 성공하고 있는 희귀한 '걸작 리믹스' 버전을 들려준다.

이러한 경우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게이브리얼의 원 곡보다 오빗의 리믹스 버전이 '더 낫다'면 - 물론 그러한 리믹스 프로듀서를 선택하고 돈을 지불한 게이브리얼의 공도 무시될 순 없지만 - 그 공은 당연히 오빗에게 돌아가야 한다. 따라서 훌륭한 리믹스 곡들을 만들어 낸 공은 1차적으로 각기 데이빗 보트릴·리차드 에반스·봄 스쿼드·윌리엄 오빗·매시브 어택에게 돌아가야 한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게이브리얼은 훌륭한 리믹스 엔지니어·프로듀서들을 선택했다. 그것은 첨단 테크놀로지를 흡수하고 리드해 나가려는 노력을 한 그의 공이다. 그러나 정작 라누아와 자신의 공동 제작으로 앨범에 수록된 버전들의 소리는 '답답하다'.

왜 이런 결과가 발생하게 된 것일까? 나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하나는 그의 멀티 미디어, 첨단 테크놀로지에의 지나친 경도이다. 이러한 요소들을 음악 제작에 끌어들이는 것은 물론 바람직한 일이며, 시대의 조류에 뒤쳐지지 않으려는 아티스트의 당연한 노력이며 의무이다. 그러나 한 음악가의 기술 수용은 어디까지나 그 음악 자체의 향상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여기서 '음악적 향상'이란 무엇이며, 그 기준은 무엇인가, 또 그 기준을 누가 정하는가 등등의 문제가 제기되어야 한다.

그러나 앨범을 청취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앨범의 테크놀로지적 측면이 음악과 메시지 자체를 압도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의 주제는 그의 말대로 '관계 혹은 소통'(relation or communication)이다. 그러나 이러한 참다운 (인간) 관계와 소통을 이루려는 그의 노력은 앨범이 그 매체(?) 혹은 수단으로 선택한 기술적 성과에 압도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타인 혹은 자연, 기계와 소통하려는 그의 의도는 제 의도를 성취하지 못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혹은 그러한 과정에서 문제를 느끼고 발언하는 주체는 '사람', 보다 정확히 말해 사람의 '몸'이다(그가 '기계 자체의 생명과 소통'을 말하는 크라프트베르크의 랄프 휘터가 아닌 이상 이는 필연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앨범에서 참으로 관계 맺고 소통하는 존재는 사람이 아닌, 컴퓨터라는 '기계' 혹은 그것의 '몸'이다(실로 는 기존 스테레오 앰프보다 '컴퓨터'에서 플레이될 때 더 나은 소리를 들려준다). 이것은 이후 그가 추구해온 자신의 입장에 위배되는 결론이다. 에서의 '인간'이란 소통의 주체가 아니라 실제로는 '기계 속의 유령'(Ghosts In The Machine)에 불과하다.

아마도 게이브리얼이 이후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기술) 철학적 언명은 캐나다의 커뮤니케이션학자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의 다음과 같은 명제일 것이다: "매체가 메시지이다"(Media is a message).

이 첫 번째 이유에 연관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역설적으로 테크놀로지 조작상의 미숙함이다. 이것은 순수한 나 자신의 가설인데, 나는 아마도 게이브리얼이 를 제작할 91-92년 당시 막 새로 개발되어 도입한 리얼 월드의 기기들의 조작과 운용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갖기 이전에 앨범의 녹음과 믹싱을 포함한 후반 작업이 완성되지 않았는가 하는 가정을 생각해 보았다. 이는 역시 첫 번째 이유와 맞물리는 것으로 그와 제작진이 새로운 기기의 특성과 음색 등에 대한 충분한 이해에 도달하기 이전에 그 기기들의 기술적 진보의 측면에 압도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두 이유를 종합한 나 자신의 결론은 '앨범의 문제는 다른 어떤 요소도 아닌 프로듀싱 작업에 있다'는 것이다. 음악 앨범의 프로듀서는 영화에 있어서의 감독의 지위에 비할 수 있다. 프로듀서는 이름 그대로 제작 과정 전반을 감독하고 통제하며 각 부분과 상황에 대한 적절한 판단을 행한다. 앨범을 구성하는 제반 각 요소들은 그 자체로 완벽한 제1급의 질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앨범은 쉽게 말해 '이견의 여지없는 제1급의 앨범'은 아니다.

전체는 단순한 부분의 합이 아니다. 전체란 글자 그대로 각 부분·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하나의 종합이다. 바로 이 점에 참다운 프로듀서의 역할이 있으며, 는 최소한 바로 이 점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보여주는 데 실패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상기의 두 이유와 함께 가 만족스럽지 못한 가장 기본적이고 당연한 또 다른 이유들을 구성할 것이다.

우선 한편, 라누아와 게이브리얼은 이전 그들이 공동 제작했던 전작 의 엄청난 성공에 따른 '부담감'을 떨치지 못 한 것이다. 이는 의 빅 싱글 'Sledgehammer'와 거의 비슷한 의 싱글 'Steam' 등에서도 다시 한 번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물론 의 공동 프로듀서 라누아와 게이브리얼은 상업성과 음악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던' 전작 의 길을 답습할 수도 있었으나, 그들은 - 상기한 'Steam' 정도를 제외하고는 - 전체적으로 그러한 '쉬운 길'보다 '예술적 실험의 길'을 택했다. 이 점은 우리가 높이 사주어야 할 부분이고 그들의 이러한 시도 자체는 매우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마찬가지 이유로 우리는 그들의 소중한 실험에 대한 성실하고도 냉정한 평가를 지향해야 한다.

또 다른 한편, 아티스트 피터 게이브리얼의 '의욕 과잉'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물론 부정적 의미보다는 바람직한 측면을 더 많이 가지고 있지만, 한 작품의 냉정한 평가에서 긍정적 요소로만 작용하기는 어렵다. 그의 6집 는 자신의 제작으로, 자신의 레이블에서,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첫 작업'이다. 그것이 정말 한 아티스로서는 '꿈의 작업'이 되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는 정말 공을 들여 앨범의 모든 부분, 모든 소리, 모든 이미지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결과는 '왜인지 잘 꺼내어 듣게 되지 않는' 앨범, 분명 '객관적으로 좋은 앨범이지만, 내가 정말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품은 아닌' 앨범이 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나의 결론은 이런 것이다: 앨범의 문제는 그것이 너무 '완벽'하다는 점에 있다. 앨범의 구조와 결, 편곡과 연주 등 모든 제작 과정은 한 마디로 정성과 기술의 완벽한 결합이다. 수록된 모든 곡들 하나하나에는 제작자 게이브리얼이 적절히, 섬세히, 때로는 드러나도록, 때로는 숨겨지도록 배치하고 구성해 넣은 온갖 아름다운 소리와 실험들로 가득 차 있다 - 이런 점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이 앨범이 '동시대보다 후대에 더 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게이브리얼의 말에 동의하는 편이다. 그러나 에는 단 한 가지, 듣는 이가 들어가 그것을 듣고 즐기고 소통할 수 있는 '빈 공간', 즉 '허'(虛)가 없다.

철학자 김용옥의 말대로, 실로 불완전은 궁극적으로 완전보다 상위의 가치이다(The Imperfection is ultimately a higher value than the Perfection). 이러한 여유, 여백, 빈 공간이 앨범이 없기 때문에 청자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답답함과 불만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상의 비판적 관점을 제외한다면 는 역시 뛰어난 앨범이다.

첫째 거듭 말한 것처럼 는 기술적 테크놀로지 수용의 측면에서는 동시대의 거의 어떤 그룹, 어떤 앨범도 이룩하지 못했던 놀라운 사운드적 진보를 보여준다.

둘째 이와 연관하여 와 그에 뒤이은 리얼 월드의 다양한 작업들은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피터 게이브리얼이 자신의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최초의 '종합 예술적 기획'이라 부를 만 하다.

셋째 에서 그는 자신이 혹은 이후 추구해왔던 다양한 세계 민속 전통 음악의 도입에 덧붙여 첨단 테크놀로지와의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그는 에서 전통과 현대가 결합된, 진실로 새로운 개념의 '월드 뮤직'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넷째 그러나 는 상대적으로 세계 각지의 민속 음악적·문화적 요소들이 병렬적으로 배치되었던 이전의 ·과는 달리 자신의 기본적 신화적·정서적 지향을 보다 기독교적인 서구 문화에서 찾고 있다. 이는 'Blood Of Eden'과 같은 제명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이는 그가 이전의 '세계 시민적' 태도를 버리고 '자신의 서구 기독교 문화'에로 회귀했다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문화에 대한 보다 균형 잡힌 평가라는 측면이 더 강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섯 째 는 자신의 심리 치료 경험이 십분 반영되어 그의 표현대로 '치료로서의 예술 창작' 개념이 정립된 앨범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이후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1.9 # 1993-94: '리얼 월드 멀티미디어'의 창립과 CD-롬 <Xplora 1>의 발매[편집]

1994년 2월 게이브리얼은 자신의 첫 CD-롬 <Xplora 1 - Peter Gabriel's Secret World>를 발매했다. 이는 93년 자신이 설립한 '리얼 월드 멀티 미디어'(Real World Multi Media Company)와 미국인 스티브 넬슨의 브릴리언트 미디어(Brilliant Media)에 의해 공동 제작된 작품이다. 맥킨토시 컴퓨터와 윈도우 95에서 실행할 수 있는 <Xplora 1>에는 게이브리얼이 안내자로 직접 등장해 리얼 월드 스튜디오와 앨범 의 제작 과정·WOMAD 페스티벌 등을 소개해 준다. <Xplora 1>에는 100분 분량의 동영상, 30분 분량의 음악, 100 여 개의 기본 스크린, 200-300쪽 가량의 책 분량에 해당하는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팝·록 아티스트가 제작한 최초의 CD-롬이었던 <Xplora 1>의 제작에는 미화 25만 달러 이상이 소요되었다. 한편 본 CD-롬은 94년 가장 많이 판매된 음악 관련 CD-롬이 되었으며, 1994년 인터액티브 미디어 페스티벌, BIMA상, 디지털 미디어상 등에서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Xplora 1>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 부분에서 사용자는 앨범 와 앨범에 실린 아티스트들의 작업 및 비디오 클립의 제작 과정 등이 들여다 볼 수 있다. 두 번째 부분은 월드 뮤직 섹션으로 WOMAD 페스티벌의 무대와 백 스테이지 등을 방문할 수 있다. 세 번째 부분은 리얼 월드 레코드 섹션으로 사용자가 화면에 나타난 앨범 커버를 클릭하면 앨범에 담긴 음악과 제작 과정 등을 감상할 수 있고, 해당 아티스트의 국가를 방문해 그 곳의 관광지 등에서 민속 음악을 즐길 수도 있다. 마지막 부분에는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사진첩, 여권 등의 사용자 개인 파일, 게이브리얼의 홈 비디오 파트, 그가 참여하고 있는 인권 단체들인 국제사면위원회, '증언'(Witness) 프로그램 등에 대한 정보가 수록된 파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게이브리얼은 오래 전부터 여러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진정으로 되고 싶은 것은 단순한 하나의 음악가(musician)라기 보다는 '체험 디자이너'(experience designer)이며, '멀티 미디어 아티스트'라고 밝히고 있다. 96년 의 발매에 즈음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는 최근 이런 종류의 작업에서 제일 큰 흥미를 느끼고 있어요. 전 이런 작업이 앞으로 예술가로서의 제 작업에서 중심을 차지하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출판사 리얼 월드에서 실제로 하고 있는 작업이고요. 어떤 면에서 이런 CD-롬은 '일종의 상호적인 창조·체험 디자인 레이블'(a sort of interactive creator and experience design label)로 - 전 이 이름을 선호합니다 - 발전해 가고 있는 우리 레코드사가 시작한 하나의 운동이기도 해요. 전 제가 정말 혁명의 첨단에 있다는 생각을 해요."

한편 96년 리얼 월드 멀티 미디어에서 발매된 CD-롬 의 첫머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니체는 '좋은 책이란 모름지기 얼어붙은 호수를 가르는 망치 같아야 한다'고 썼다. 한 아티스트가 무언가 현실적인 것을 다루고 있다면, 그는 이미 자신의 도구를 만들어 낸 것이다. 멀티미디어는 예술을 그러한 도구 상자처럼 다루며 탐구하기에 최적의 공간이며, 또한 이것이야말로 내가 더욱 진척시키고 싶은 분야이다 ... 나는 몇 년 이내에 컴퓨터를 사용하는 젊은이들이 자신들만의 멀티미디어 언어를 만들어 내리라고 생각한다 - 그 '말'은 텍스트와 번역의 장벽을 넘어서 궁극적으로 우리가 채택하게 될 언어이다 ... 우리를 서로 보다 잘 이해하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의 테크놀로지 개념 위에 인간 관계, 정신적 영역 및 자연 등의 새로운 영역을 더하는 작업이 요청된다 ... 우리(=서양, 인용자 첨가) 사회는 예술 작품의 창조는 재능을 부여받은 소수의 엘리트만의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많은 전통 사회에서 이러한 말은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은 얼마든지 자신을 예술가로 느낄 수 있다는 점에 나는 매료되었다. 나는 이제 내가 선택하는 어떤 종류의 매체를 통해서도 나의 생각을 발전시킬 수 있으며, 다른 모든 사람들 또한 나와 똑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믿게 되었다."

1.10 # 1996: CD-롬 - 예술과 자연 그리고 심리학의 만남[편집]

1996년 게이브리얼은 리얼 월드 멀티 미디어에서 자신의 두 번째 CD-롬 를 발표했다. 역시 지난 번 <Xplora 1>과 마찬가지로 음악 감독 리차드 에반스, 기술 감독 마이클 코요티(Michael Coyote) 등 파트별 디렉터 이외에도 총감독에 마이클 컬슨(Michael Coulson), 제작자로 리얼 월드 그룹의 마이크 라지(Mike Large), 랠프 데릭슨(Ralph Derrickson)이 참여했다.

의 내용은 (화면에 등장하는 '도우미' 역의 피터 게이브리얼과 함께) 이브를 찾아 떠나는 아담 역의 '실행자'가 겪게 되는 다양한 예술적·심리적 체험들을 주제로 하고 있다. 는 기본적으로 네 개의 '세계'(world)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세계는 각기 게이브리얼의 곡을 하나씩 포함하고 있다. 또한 각 세계는 각기 한 사람의 예술가를 초빙하여 해당 곡의 주제에 걸맞는 그들의 작품들을 수록하고 있다.

의 기본적 네 세계와 해당 수록곡 및 아티스트는 다음과 같다:

1) 진흙(Mud) - 'Come Talk To Me', 야요이 쿠사마(Yayoi Kusama). 2) 정원(The Garden) - 'Shaking The Trees', 헬렌 채드윅(Hele Chadwick). 3) 이익(Profit) - 'In Your Eyes', 카티 드 몽쇼(Cathy De Monchaux). 4) 예술과 자연(Art And Nature) -'Passion', 닐즈-우도(Nils-Udo).

그리고 세계 '이익'과 '예술과 자연' 사이에는 히든 파트인 낙원(Paradise)이 숨겨져 있다. 참가한 예술가들 중 영국의 헬렌 채드윅은 96년 43세의 나이로 타계했는데, 그녀의 작품 가 - 이는 실제 카카오를 끓인 것이다 - 표지로 선택된 본 CD-롬 는 그녀에게 바쳐져 있다. 참여한 아티스트들 중 닐스-우도는 나무, 꽃잎, 나뭇잎 등 순수 자연물들로만 작업하는 작가인데, 그는 물위에 떠 있는 갈대 둥지 위에 어린 소년이 누어 있는, 의 기본 컨셉트 작품을 제작했다.

이와 같은 아티스트들의 작업에 힘입어 예술적·기술적 측면에서 의 수준은 가히 동시대 최고의 수준이라 불릴 만하며, <Xplora 1>와 마찬가지로 팝과 (순수) 예술의 경계를 훌쩍 뛰어 넘어버린 탁월한 성취를 보여준다. 화면의 시각은 360도 회전이 가능하며, 22,000장의 사진이 들어간 120 개의 기본 스크린이 있다. 여기에는 80분 분량의 비디오가 포함되어 있으며, 각 장면에는 특별 제작된 음악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아마도 에서의 제작자들이 가장 정성스럽게 공들인 부분은 역시 '실행자'가 게이브리얼의 곡들을 스스로 '리믹스'해볼 수 있는 프로그램일 것이다. 수록된 네 곡은 모두 각기 실행자가 선택할 수 있는 12 가지 종류의 기본 반주(loops) 위에 18-21개에 이르는 파트별 악기 연주들(flyings)이 제공되어 있다. 실행자는 이들을 선택해 거의 무한한 조합의 리믹스를 스스로 '제작'할 수 있으며, 이를 녹음·전송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 힘입어 는 96년 말 '밀리아 도르'(Milia d'Or) 상을 수상했다.

한편 CD-롬의 제명 는 전작 <Xplora 1> 즉 '탐험'의 연장선상에서 해석될 수 있다. 아마도 게이브리얼이 영향받은 융의 아니무스/아니마 이론처럼 '이브'는 '아담'과 상보(相補)적인 관계에 놓여있다. 그것은 실제의 이성 짝일 수도 있으며, 무의식, 자연, 혹은 예술일 수도 있다. 인간은 자신의 '이브'(아담)을 찾아간다, 혹은 탐구한다. 이는 역시 게이브리얼 자신의 이혼과 그에 이어졌던 심리 치료의 경험이 그의 예술 세계에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의 가장 독특한 점도 바로 이 부분에 있는데, 에는 위 네 명의 예술가들 이외에도 10여명의 심리학자, 종교학자, 예술가들이 등장해 자신의 경험과 이론을 설명한다.

한편 각 파트의 말미에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등장해 사랑·우정과 만남·헤어짐에 대한 자신의 짤막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몇 개의 예를 들어보자('/' 전후는 다른 사람들): "전 제가 정말 사랑에 빠진 적이 있는지 모르겠어요/전 능력 있는 사람한테 끌려요/전 애인이 항상 같이 있는 건 싫어요/전 발 크기가 중요해요. 발 사이즈가 클수록 일이 잘 풀렸거든요/전 이혼한 적이 있지요. 다른 사람하고 만나고 데이트하는 것까지는 좋아요. 하지만 집에 들어와 같이 사는 건 '노'예요/사랑하고 우정은 거의 같은 것 같아요. 좋은 친구가 되지 못하면 좋은 배우자가 되기 어려운 것 같아요/적당한 선의의 거짓말을 제 때에 잘 하는 것도 중요한 기술이지요." 이렇게 CD-롬 를 실행해 따라 가다 보면 게이브리얼이 참으로 자신의 삶에서 배운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한다는 점을 느끼게 된다.

1.11 # 국제 사면 위원회 등에서의 활동: 1980-1999[편집]

어린 시절 게이브리얼이 인도의 간디에게 크게 감명 받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영향은 그로 하여금 비폭력 저항운동과 평화주의에로 이르도록 만들었으며, 한편 그를 채식주의로 이끌기도 했다. 아마도 이러한 그의 생각이 드러난 최초의 곡은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하리라'는 메시지를 담은 제너시스 시절의 70년 2집 에 담긴 'Knife'일 것이다. 이러한 그의 관심은 78년 의 'Mother Of Violence', 80년 의 'Games Without Frontiers', 'Biko' 같은 곡을 통해 본격적으로 피어나게 된다.

그는 80년대 초 이후 국제사면위원회의 멤버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브루스 스프링스틴, 스팅, 트레이시 채프먼, 심플 마인즈, 유순 두르 등과 함께 대표적 저항 가수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음악을 통한 저항 운동이 집단적 운동의 형태로 본격적으로 피어난 계기는 역시 아일랜드의 붐타운 랫츠(The Boomtown Rats)의 리더 밥 겔도프(Bob Geldorf)가 주도하여 피터 게이브리얼과 로저 워터즈 등에게도 큰 영향을 준 '라이브 에이드'(Live Aid) 공연이었다. 이후 산발적으로 지속되던 반인종차별·반전·반독재 투쟁의 물결이 또 한번 결집된 계기는 국제사면위원회를 돕기 위해 86년 6월 4일부터 시작된 자선 투어 <Conspiracy Of Hope>이었다. 게이브리얼은 물론 이 공연에 참가하여 'Biko' 등을 부른다. 그는 이 투어 도중 경찰에 의해 대로에서 아들이 분신 살인 당한 이후 칠레 인권 운동에 뛰어들게 된 베로니카 데-네그리, 스티브 비코의 동료 등의 방문을 받기도 한다.

게이브리얼은 이후에도 백인 600만, 흑인 3700만의 국가에서 온갖 인종차별은 물론 흑인의 투표권조차 부정하고 있던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의 야만적 정책에 반대하는 <반-아파르트헤이드>(Anti-Apartheid) 운동 자선 콘서트, 88년 <넬슨 만델라 70회 생일 기념 파티>(Nelson Mandela 70th Birthday Party) 콘서트, 동년의 <Human Rights Now!> 콘서트에 참여한다.

한편 그는 독재 국가의 인권 운동가들에게 비디오 카메라를 포함하여 증언용 혹은 교육용 멀티미디어 등을 무상으로 보급하는 국제 운동 '증인'(Witness)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89년 그는 국제 환경단체 그린피스의 기금 마련을 위한 컴파일레이션 CD <Rainbow Warriors>에 'Red Rain'을 실었으며, 90년 4월 16일에는 <An International Tribute To A Free South Africa> 콘서트에 참여한다. 그는 9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방문하여 약 2만 5천 여명이 운집한 스티브 비코의 사망 20주기 추도식에 참석하는데, 그는 이 곳에서 'Biko'를 불러줄 것을 갑자기 요구받아 밴드 없이 자신의 CD 녹음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한편 그는 이 곳에서 스티브 비코의 가족 및 넬슨 만델라 등을 만나 그들로부터 감사의 말을 전해 듣기도 한다.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민족이 이란·이라크·시리아·터키 등 4개국에 분산되어 거주함으로써 분리 독립 운동과 학살을 번갈아 경험하게 된 쿠르드(Kurd)족 난민들을 돕기 위한 91년의 자선 공연 <The Simple Truth>, 92년에는 <Lawyer's Committee For Human Rights> 콘서트에 참여했다. 한편 98년 3월 10일에는 <The 10th Annual Reebok Human Rights Awards> 시상식에 참여했다. 동년 12월 10일에는 프랑스 파리 베르시의 옴니 스포르(Palais Omnisport De Bercy A Paris)에서 열린 <The 50th Anniversary Of Amnesty International>에 참서했다. 특히 퀸·조지 마이클·애니 레녹스·패신저즈·루치아노 파바로티·트레이시 채프먼·폴 매카트니·에릭 클랩튼·브루스 스프링스틴·유순 두르 등이 참여한 본 공연의 특기할 만한 점은 그가 자신의 솔로 7집 에 수록될 것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는 'Signal To Noise'를 공연의 마지막 곡으로 유순 두르와 함께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1.12 # 글을 마치며 - 7집 + 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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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이후 게이브리얼의 가장 야심적 프로젝트는 예술·음악·시각 멀티 미디어 테마 파크인 '리얼 월드 테마 파크'(Real World Theme Park)이다. 디즈니 랜드와 실험적 멀티 미디어 체험 공원이 결합된 개념의 이 테마 파크는 그와 브라이언 에노·로리 앤더슨·로베르 르파쥬 등이 주도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참가를 승인한 '꿈의 아티스트들'로는 필립 글래스·다비드 방 티겜·크라프트베르크 등이 있다. 현재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시가 유력한 후보 물망에 올라있으며 피터는 이를 자신의 '평생 가장 커다란 꿈들' 중 하나로 생각하고 추진 중이다.

한편 97년 이후 계속 미루어지고 있던 게이브리얼의 솔로 7집 이 2000년 '상반기' 중 발매된다고 한다. 앨범이 예정대로 2000년 안에 발매된다고 해도 92년 이후 정규 앨범으로는 무려 8년만의 일이다. 93년의 <Secret World Live> 이후에도 7년만의 일이다. 물론 그는 그 사이 94년의 <Xplora 1>, 96년의 등 두 장의 CD-롬 발표, 1998-2000년 동안의 '밀레니엄 쇼' 기획 등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최소한 음악적으로는 너무 긴 공백기였다. 아마도 독자 여러분이 이 글을 읽고 있는 이 순간에는 이미 그의 새로운 신보가 발매되어 있을 것이다(앨범은 2003년에야 발매되었다 - 통신주). 그는 의 발매에 이어 또 한 차례의 세계 순회 공연을 가질 예정이다.

한편 그 사이에도 게이브리얼은 미셸 라아다(Michelle Lahada)의 제작으로 2000년 2월 발매된 유수 은두르의 신보 <Joko - From Village To Town>(SMALL·Sony France)에 수록된 아프리칸 포크·발라드 풍의 곡 'This Dream'에서 백 보컬리스트로 참여했다. 그의 야심적 7집 에 수록될 음악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확실한 정보는 현재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피터 게이브리얼과 상당한 개인적 친분을 가지고 있는 영국의 평론가 크리스 웰치가 98년에 발표한 전기 <The Secret Life Of Peter Gabriel>의 189쪽에는 그의 7집 신보가 '원래 97년 가을 발표될 예정이었으나 늦어도 올해 말에는 발표될 예정'이라고 전하면서 다음과 같은 예상 수록곡들을 싣고 있다: 'Signal To Noise', 'Children', 'While The Earth Sleeps', 연주곡 'Seven Zero', 'Lovetown', 'Party Man'. 그러나 5집 의 'This Is The Picture'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독집에 기존에 발표된 곡을 전혀 넣지 않던 관행으로 보아 이러한 리스트로 그가 자신의 신보 을 발매할 것 같지는 않다(위에 적은 곡들 중 'While The Earth Sleeps', 'Lovetown', 'Party Man' 세 곡이 영화 음악으로 이미 발표된 곡들이다).

이제 아래에서는 마지막으로 아티스트 피터 게이브리얼에 대한 종합적 평가를 내려보면서 글을 마치려 한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아마도 그가 미래의 음악사에 남게 될 특징 및 의미는 다음과 같은 것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첫째 그는 이전 60-70년대를 풍미했던 프로그레시브·아트 록 그룹 제너시스의 창단 멤버로서 확실한 위상을 갖게 될 것이다. 특히 그는 자신의 카리스마적 보컬과 함께 이후 '씨어트리컬 록'이라는 장르를 확립시킨 무대 연출의 창안자로 남게 될 것이다. 한편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 및 기독교 문화를 넘나들며 제너시스 데뷔 이후 그가 보여주었던 가사의 완성도는 초기 킹 크림즌의 피터 신필드(Peter Sinfield), 반 데어 그라프 제너레이터의 피터 해밀(Peter Hammill), 러시의 닐 파트(Neil Peart) 등과 함께 가히 최상의 예술적 형상화 능력을 과시한 것이었다. 이에 덧붙여 그의 노래말이 '가장 영국적인 밴드'로서의 제너시스의 이미지 형성에 크게 기여한 점 역시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그가 75년 제너시스의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 이후 현재의 솔로 활동까지 꾸준히 추구하고 있는 '인간 무의식의 탐구'라는 주제는 60년대 이후 여전히 현대 예술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테마가 된다. 특히 그는 자신의 개인적 심리 치료·상담의 경험에서 알게 된 심리 치료의 테마를 '치료로서의 예술 창작'이라는 개념과 온전히 접합시킨 보기 드문 현대의 아티스트이다. 앨범 와 CD-롬 는 이의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셋째 그는 이러한 자신의 작업들로 인하여 전통적 '저급/고급', '대중/학술' 문화 사이의 경계선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개념의 (대중) 예술 개념을 창안하고 있다. 이러한 특성은 동시에 음악과 미술, 멀티 미디어, 비디오 아트 등의 작업들과 맞물리면서 더욱 강화되게 된다. 이는 특히 앨범 와 및 그에 이어졌던 다양한 예술과 멀티 미디어 작업의 만남을 통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넷째 그는 자신의 비폭력·평화주의의 신념에 따라 국제사면위원회 및 각종 저항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과정에서 'Games Without Frontiers', 'Biko', 'Wallflower', 'We Do What We're Told', 'Fourteen Black Paintings' 등 수많은 저항 음악을 작곡하는 등 자신의 직업 및 재능과 정치적 실천을 유리시키지 않는 '바람직한 참여'의 방식을 창출해 내었다.

다섯째 그는 기존의 어느 서구 아티스트도 성공하지 못했던 '서구와 비서구' 음악·문화의 화학적 결합이라는 과제를 만족스러운 형태로 수행했다. 이는 그가 설립한 리얼 월드 레이블 및 WOMAD 페스티벌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 그의 독보적 공헌이다. 물론 이는 '비서구'에 사는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여전히 - 종종 신비적·이국적 차원의 - 소개적 요소를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의 작업이 보여주는 현실적 결과물들은 이미 단순한 '선구적' 차원의 작업 이상의 것이다. 이는 이전의 수많은 프로그레시브·아트 록 및 재즈·뉴 에이지 계열의 아티스트들이 도전한 과제였지만 그들의 작업은 '어디까지나 서구가 주체가 되는 실천'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 또 다른 '현대의 거장들'이라 할 로저 워터즈, 로버트 프립, 브라이언 이노 모두 이런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거나, 혹은 그런 관점을 지향하고 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그의 와 앨범은 이제까지의 성과를 단번에 넘어서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 앨범들이다.

여섯째 그가 발굴하고 공동 작업을 펼친 아티스트들에 관한 점이다. 그가 발굴한 리얼 월드 레이블과 WOMAD 페스티벌의 아티스트·엔지니어·프로듀서들도 그렇지만, 그의 개인 밴드 멤버인 토니 레빈, 제리 마로타, 데이빗 로즈, 마누 카체, 데이빗 샌시어스, 장 클로드 네므로 등의 아티스트들은 각기 그와의 초기 작업 당시에는 그렇게 최고의 일급 뮤지션들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아티스트들은 그와의 작업을 거치며 가히 세계 정상급 연주인들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물론 이에는 아티스트들 자신의 잠재적 역량이 선행된 것이겠지만, 이런 '잠재적 역량'을 알아보고 그들의 역량이 최대로 발휘될 수 있는 작업 환경을 창조한 리더 피터 게이브리얼의 공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그와 작업하면서 세계 최고의 엔지니어·프로듀서들로 성장하게 되는 (리얼 월드 스튜디오 등의) 리차드 에반스, 리차드 블레어, 데이빗 보트릴 및 스티브 릴리 화으트, 다니엘 라누아, 피터 월시 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마찬가지로 아티스트·프로듀서로서의 피터 게이브리얼 역시 '초지일관 뛰어났던' 식의 전천후 천재적 뮤지션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 다양한 시행착오를 거쳐 -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의 잠재적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만든 뛰어난 역량과 비전의 아티스트인 것이다.

여하튼 '조만간 발매될' 그의 새로운 신보는 - 이전 60-70년대 프로그레시브·아트 록의 '위대한' 그룹·아티스트들 중 예스, ELP, 핑크 플로이드 등 수많은 그룹이 단지 과거의 명성에 기댄 '기대 이하의' 앨범들을 발표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 여전히 우리로 하여금 '과연 어떠한 음악이 담겨 있을까'하는 기대를 금치 못하게 만든다. 1950년 생이며, 이미 음악 경력 30년을 훌쩍 뛰어 넘어 버린 한 아티스트의 앨범이 무수한 신예 아티스트들이 넘쳐 나는 오늘 2000년을 맞은 현재까지 동시대에 의미 있는 '오늘의 앨범'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일은 경탄할 일이다. 피터 게이브리얼의 이 오늘 날 보기 드문 '살아 있는 거장 아티스트의 신보'라는 명성에 걸 맞는 내용과 실질을 갖고 우리 앞에 나타나길 기대하면서 이 특집을 마친다.

[부록] 한편 게이브리얼은 솔로로 독립한 이래 싱글 B-면, 영화 음악, 트리뷰트 앨범 등 엄청난 수의 앨범 미수록곡들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아래에 이제까지 발표된 게이브리얼의 앨범 미수록곡들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다. 단 동일한 곡의 '상이한 버전'(different version)인 경우는 본 특집의 <제너시스 & PG 타임라인>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Single B-Sides

  1. 1978 - 'Me And My Teddy Bear'
  2. 1980 - 'Shosholoza'
  3. 1982 - 'Soft Dog'
  4. 1986 - 'Don't Break This Rhythm', 'I Have The Touch - 85 Remix'
  5. 1987 - 'Curtains', 'Ga Ga'
  6. 1988 - 'John Has A Headache'
  7. 1992 - 'Quite Steam'
  8. 1994 - 'San Jacinto (live)', 'Mercy Street (live)'

Original Soundtracks

  1. 'Walk Through The Fire', <Against All Odds>, 1984
  2. 'Lovetown', , 1993
  3. 'Party Man' with The World Beaters, , 1995
  4. 'Taboo' with Nusrat Fateh Ali Khan, <Natural Born Killers>, 19몇 년?(연도 따라 순서도 바꿔줄 것)
  5. 'I Have The Touch - 96 Remix', , 1996
  6. 'I Grieve', <City Of Angels>, 1998

Tributes & Etc ...

  1. 'Exposure', 'Here Comes The Flood', on Robert Fripp's , 1979
  2. 'Excellent Birds' with Laurie Anderson, <Mr. Heartbreak>, 19몇년?
  3. 'No More Apartheid' with NMA, <No More Apartheid>, 1988
  4. 'Shakin' The Tree' with Youssou N'Dour, 1989
  5. 'Across The River', <Worldwide: Ten Yeats Of WOMAD>, 1992
  6. 'Be Still' with Peace Together, <Be Still>, 1993
  7. 'Summertime', <The Glory Of Gershwin>, 1994
  8. 'Suzanne', <Tribute To Leonard Cohen>, 1995
  9. 'In The Sun', <Diana·Tribute>, 1997
  10. Akiko Yano, PG, Akira Inoue &David Rhodes, , 1998
  11. 'The Carpet Crawlers 1999', <Genesis - Turn It On Again: The Hits!>, 1999
  12. '100 Days To Go', <Real World Notes(#9)>, 2000

이상입니다. 아래는 위에서 말씀드린 '피터 게이브리얼 & 리얼 월드 레코드'의 공식 사이트인데요, 초기화면 의 뺑뺑 돌아가는 것들 중 파란 색 peter gabriel을 클릭하시면 됩니다.

아주 잘 만든 '아름다운' 사이트입니다. 시간되면 그냥 구경이라도 한번 해보시길:

http://www.realworld.co.uk/index/flash/

혹은 다음의 소닉넷에서는 각 앨범을 클릭하시면 노래들을 들어보실 수 있지요:

http://www.vh1.com/artists/az/gabriel_peter/albums.jhtml

1.13 # 촌평[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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