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Cale/EatKiss

 

1 # Sonimage[ | ]

John Cale Eat/Kiss Music For The Films Of Andy Warhol

벨벳 언더그라운드 이후의 존 케일의 음악 작업들은, 음악적 내용물과, 그 내용물을 담기 위해 그가 차용한 방법론들에 의해 뚜렷하게 양분되는 현상을 보여준다. 그가 뉴욕 펑크와 뉴웨이브의 주도적인 프로듀서로 활동했음을 입증하는 앨범들, 이를테면 패티 스미스의 [Wild Horses]나 스투지스의 데뷔 앨범, 니코의 [Marble Index], 그리고 스퀴즈와 모던 러버스의 앨범들이 그가 록의 감수성을 확대해가는 작업에 얼마나 자신의 역량을 발휘했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이러한 작업들에는 닉 드레이크 앨범에의 참여라든가. 밥 딜런에 대한 오랜 경외감이 포함되며, 70년에 발매된 그의 솔로 데뷔작인 [Vintage Violence]나, 모든 평론가들이 그가 팝/록의 영역으로 돌아왔음을 기뻐했던 96년의 [Walking On Locusts], 또는 어쿠스틱으로 다시 들어본 그의 라이브 버전의 베스트 앨범 [Fragments Of A Rainy Season](92) 등의 작업이 이 범주에 속할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바라본 존 케일은 그 자신이 결코 록의 주류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그 경향성에 대한 익숙한 뮤지션이다. 한편, 존 케일이 미니멀리스트 작곡가 테리 라일리와 [Church Of Anthrax]를 제작하면서, 미니멀리즘과 앰비언트 사운드를 결합시키고, 아일랜드 레코드에서의 세 장의 앨범에서 엘비스의 [Heartbreak Hotel]을 해체시키고, [Guts]의 아방가르드 사운드로 나아갔던 것은 존 케일이 자신을 현대 음악의 적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펑크에서 현대음악으로 전이된 존 케일의 또다른 음악적 페르소나는 그의 십대 이전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 웨일즈 지방에서 출생한 그는 어린 시절, 음악 신동으로 불렸으며, BBC 방송에 출연하여 자신이 작곡한 곡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런던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한 그가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클래식 연주가이자 작곡가로서의 미래를 위해 코플랜드와 번스타인의 도움으로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이고, 그는 미국에서 존 케이지에게서 수학하고, 미니멀리스트 작곡가 라몬테 영의 씨어터 오브 이터널 뮤직에서 활동하였다. 라 몬테 영의 작업에 참가하면서 존 케일은 클래식에 근거를 둔 자신의 음악적 스타일이 새로운 방향을 찾았음을 알았고, 그것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시작과 이어진다. 60년대 초반, 비트 제너레이션이 미국 문학의 이정표를 세우고, 추상표현주의의 몰락과 함께 모더니즘이 서서히 자신들의 기치를 잃어가고 팝 아트가 도래했던 시기에, 시인을 자처했던 루 리드와, 베이스와 전기 비올라를 연주하던 존 케일은, 드러머 모린 터커, 기타리스트 스털링 모리슨과 함께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조직한다. 초기 벨벳 언더그라운드 두장의 앨범에서 들려오는 드론 사운드는 존 케일에 의한 라 몬테 영의 영향력이 스며든 것이며, 노이즈와 나레이션을 곡의 결정적인 구조로 차용한 것 역시 존 케일의 음악적 성향에 근거한다. [Venus In Furs]나 [Heroine] 등의 곡에 등장하는 초기 벨벳 사운드의 노이즈 친화적이며, 미니멀 사운드에 가까운 음색들의 아방가르드적 요소들은 바로 그가 즉흥성과 실험성을 록이라는 무대에서 실현하고자 한 것들이었다.

당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부상에는 앤디 워홀의 영향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미국의 소비문화와 고급예술의 연결고리였고, 작품보다는 예술가 자신의 이미지에 의한 명성을 추구했던 워홀에게 영화와 함께 록 스타덤은 또하나의 도전 영역이었다. 워홀에 의하면 ‘팝의 중심 철학은 누구나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65년도 말, 우리 모두는 당시의 음악적인 상황에 몰입하였다’고 한다. 이 말은 당시의 뉴욕 펑크와 뉴욕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애티튜드를 직접적으로 반영한다. 기이한 에로티시즘과 펑크, 반사회적 태도가 결합된 벨벳은 워홀의 음악적 스타덤에 대한 야망으로 픽업되었고, 네 명의 밴드 멤버 모두가 대중을 사로잡을 만한 카리스마가 부족하다고 생각한 워홀은 쾰른 출신의 모델 니코를 벨벳의 간판 스타로 내세웠다. 벨벳 멤버들의 반발은 상당했다고 알려졌으나, 연습 장소도 없이 클럽을 전전하던 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했던 워홀은 이를 묵살하였고, 자신의 멀티미디어 버라이어티 조명 쇼 익스플로딩 플라스틱스 이네비터블의 공연 무대에 이들을 니코와 함께 내세웠다. 두 장의 벨벳 앨범이 발매된 후, 루 리드와의 불화로 인해 존 케일은 벨벳을 그만두게 된다. 그리고 루 리드와 존 케일이 각기 다른 음악적 경력을 쌓아가는 긴 시간이 흐르면서, 벨벳 언더그라운드는 그들의 가장 창조력 왕성했던 60년대 중반 이후의 시대보다 훨씬 많은 지명도와 앨범 판매량을 갖게 되었으며, 팬들의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재결합에 대한 열망이 거세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90년대 초반, 네 명의 멤버들이 다시 모이게 되었다. 루 리드와 존 케일의 깊은 불화로 이들의 재결합은 93년 유럽에서의 3일밤의 라이브 공연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이 두 사람은 재결합 직전에 과거와의 화해의 제스처의 일환으로 90년에 [Songs For Drella]를 발매했다. 이 앨범은 앤디 워홀 트리뷰트 앨범으로, 87년에 타계한 워홀의 전기적 텍스트로서 발매된 것인데, 이 앨범은 그 어떠한 워홀의 전기보다 워홀의 삶의 논쟁적이며 빛나는 순간을 포착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존 케일의 워홀과의 인연은 이후로도 이어지는데, 그는 90년대에 나온 두 편의 영화 와 <나는 앤디 워홀을 쐈다>의 사운드트랙 감독을 맡았다. 그리고 94년에는 앤디 워홀 재단으로부터 워홀의 초기 영화 와 를 위한 음악을 제작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모린 터커와 B J 콜 등을 포함한 존 케일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프랑스 릴 페스티벌에서 와 의 음악을 초연했다. 는 시인인 로버트 인디아나의 먹는 모습만을 담은 흑백 영화이고, 는 워홀의 조수이자 시인이었던 제라드 말랑가를 비롯하여 워홀 주변 인물들의 키스하는 모습을 담은 영화로, 짧은 여러 편의 키스 장면을 모은 시리즈로 제작된 영화이다. <첼시 걸스>와 같은 일반 관객들에게 대중영화처럼 소비된 영화들도 제작하였지만, 워홀의 수십편에 달하는 대부분의 영화들은 잭 스미스(<불타는 피조물들>의 감독)의 영향을 받은 익스페리멘틀 범주의 언더그라운드 영화이다. 당시 조나스 메카스는 자신이 만들었던 영화 저널 [필름 컬처]에서 워홀을 높이 평가했다. 메카스는 워홀의 일련의 초기 영화들, . , , 등을 시네마 베리테의 맥락에서 보아야한다고 했다. 그는 최소한의 연출과 작위성을 배제한 이 영화들을 다이렉트 시네마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하며, ‘워홀은 영화를 그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바로 뤼미에르의 시대로. 그는 거의 강박적으로 인간의 일상생활과, 그 주변의 사물들을 기록한다’라고 평가했다. 이후, 메카스는 8시간 동안 엠파이어 빌딩을 찍은 워홀의 영화 의 촬영을 맡기도 했다. 본래 이 영화들이 64년에 링컨 센터에서 상영될 때, 워홀은 라 몬테 영에게 음악을 부탁했었고, 그는 바이올린을 이용한 극히 미니멀한 드론 사운드를 테잎에 녹음해서 틀도록 하였다. 그런데, 존 케일이 이 영화들을 위해 만든 새로운 음악들은 라 몬테 영의 접근과는 상당한 거리를 둔, 극히 서정적인 익스페리멘틀리즘이다. 영화 자체에 대한 참조보다는 워홀에 대한 회고적인 멜랑콜리아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일종의 실내악이며, 워홀와 영화의 관계에 입각한 맥락들을 음악으로 구현해낸, ‘Eat’나 ‘Kiss’가 아닌 ‘앤디 워홀’을 그 중심에 둔 표제음악이다. 존 케일의 현대음악과의 연대, 또는 아방가르드적 경향들에 속하는 이 앨범은 페달 기타 사운드와 하프시코드와 현악기를 결합시키면서 역동적인 사운드로 각 트랙들을 차별화시키고 있으며, 비트 제너레이션에 대한 회고담과 유사한 낭송을 위치시키고 있다. 존 케일이 이 앨범에서 시도하고 있는 것은 오리지널 스코어로서 워홀의 영화에 다가가는 것이며, 반면에 롱 테이크와 스트로보 효과로 일관했던 워홀 영화의 소격효과와 평행하게, 영화와 음악의 또다른 분리를 조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팝 아트의 시대와 무관한 콘텍스트에 입각한 이 앨범은 90년대 이후 문화 전반에서 끊임없이 재론되고 있는 앤디 워홀에 대한 또다른 참조목록이자, 존 케일이 이미지로서 사고한 작품 중의 하나로 거론되고 있다.

  • 이 글은 월간 KINO 2001년 7월호에 실린 글이다.

-- Sonimage 2004-4-11 2:13 pm

2 # 촌평[ | ]


거의 존 케일 바이오그래피군요. ^^ 이 판이 중고판가게에 있는걸 보았는데 살까말까 갈등하다가 결국 FrankZappa를 사느라 놓았던 기억이 나네요. Paris 1919를 듣고 별 감흥이 없어 존 케일은 일단 쉬어주고 있는 참입니다. 사실 저는 Velvet - Reed = Cale이라는 공식이라면 케일은 정말 제 취향일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안맞는 구석이 있어서 놀랐어요. -- 거북이 2004-4-11 5:36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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