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mie Mu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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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amie Muir =[ | ]

KingCrimson

1.1 # 인터뷰[ | ]

Translated by Chanung Park, mailto:cwpark@kobaco.co.kr.

약 1991년부터 1992년 사이 아마도 잡지로 보이는 Ptloemaic Terrascope에서한 Jamie Muir와의 인터뷰를 무쟈게 서툴르나마 번역하였습니다. 내용을 보면 시사하는 바가 좀 되는 거 같아서..
출처는 Elephant Talk이구요.

먼저 제가 아는 한, 구입가능한 Jamie Muir의 음반을 알려드리면 1. Larks' Tongues in Asic-King Crimson(1973)
2. The Beat Club, Bremen 1972-King Crimson(kccc vol.3)
3. Music Improvisation Company '68-71 4. Dart Drugs-Derek Bailey/Jamie Muir(1981)
5. Ghost Dance-Giles/Muir/Cunningham(1983)
3,4번은 Incus 발매로 www.forcedexposure.com에서 운송료 별도 장당 18$씩 구할 수 있는 게 가장 싸구요, 5번은 쉽게 구할 수 있고 Muir가 슬리브를 디자인한 Derek Bailey의 'Aida'는 예전엔 구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안보이네요..
3번의 커버 그림은 잼있어요.

참고로 Great Deceiver 부크릿을 보면 Fripp이 Muir에 아주 호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전 Muir의 독특한 퍼커션 소릴 아주 좋아한답니다.

아방가르드 타악기 즉흥연주는 확장일로의 Terrascope 렌즈에서 아직 다루어 지지 않은 매력적인 분야이다. 이분야를 얘기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며 전 킹크림슨 멤버이자 이 분야의 가장 뛰어난 연주자중의 하나인 Jamie Muir를 Terrascope의 기자 David Teledu가 최근 찾아내어 적절하고도 폭넓은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기자 : 당신은 언제 음악을 시작하였는가?

뮤어 : 난 에든버러에서 자랐다. Fife에 있는 학교에서 피아노 레슨을 시작했는데, 잘하진 못했다. 난 전학해서 프렌치혼을 시작했으나, 이악기는 극히 제한된 레파토리를 갖고 있는 꽤 지루한 악기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려 지겨워졌다. 그리곤 재즈에 관심을 갖게 되어 트롬본을 연주하였다. 또 스트링베이스도 시작했는데, 에든버러의 5층 계단에서 악기를 떨어뜨려, 막 싹이 트던 베이스 연주는 그만두게 되었다. 난 예술대학에 입학해서 밴드에서 연주를 시작했는데, 이 밴드는 처음엔 전통 재즈를 연주하였으나 점차 모던해졌다. 꽤 지나 밴드에서의 연주가 재미없어 졌는데, 왜냐면 즉흥연주와 불확정적인 거친 연주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5개의 샵을 지닌 음조를 연주하는 따위는 지적인 메조키즘으로 느껴졌고 창조적인 과정에 이르는 방식인 것 같았다.

그래서 트롬본을 그만두고 드럼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초보자가 된 것이었다. 난 열심히 연습했고 Tony Williams나 Kenny Clarke 같은 미국 재즈 드러머의 레코딩을 아주 주의 깊게 듣곤 했다. 꽤 지나 난 완전한 자신감과 확신을 가진 내자신이 되어야만 한다고 깨달았다. 즉 창조력에 대한 근원이 내자신에 있음을 확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에 연주하던 사람들과 다시 연주하기 시작했지만, 이번엔 드럼을 맡았다. 그러나 밴드리더는 여전히 미친 듯이 빠른 템포를 요구하는 그런 식이었기 때문에,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난 이런 가망없는 연주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Pharoah Sanders나 the New York Art Quartet, ESP 라벨 시절의 Albert Ayler 같은 뮤지션의 음반들을 들은 것이 기억 난다. Albert Ayler는 비범한 뮤지션이었다. 내가 감탄한 또 다른 뮤지션은 미국 타악기 주자 Milford Graves였다. 또한 '60년대의 민속음악도 많이 듣곤 하였다. 그렇다, 난 즉흥연주를 하여야만 했다. 처음엔 그것이, 누군가가 나를 보면 신이 천둥으로 날 날려버릴 것 같아 문을 잠그고 커튼을 내려야만 하는, 그런 종류의 일처럼 매우 위험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난 그것을 마치 오리가 물에 들어가는 것처럼 몰두하였다. 트럼펫주자와 시작해서 후에 알토색소폰주자를 추가하였다. 꽤 많은 연주를 함께 했는데, 이것이 the Assassination Attempt였다. '60년대 초기의 에든버러에서의 일이었다. 어떤 때는 시인과 두 명의 댄서를 포함해 약 16명이 함께 한 적도 있다. Roundhouse에서 막 시작된 조명쇼를 보러 런던에 간적이 있었는데, 우리 그룹을 위해 조명쇼를 만들기도 하였다.

기자 : '60년대가 저물 때 당신은 완전한 즉흥연주를 하게 되었고 Music Improvisation Company에 가입했지?

뮤어 : 에든버러의 예술대학에서 누군가가 런던의 그룹이 와서 연주하도록 준비했다. 나는 Bernie Green과 함께 서포팅 밴드에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방문한 뮤지션중의 한 명이Derek Bailey였는데, 내 연주를 맘에 들어하는 것 같았고 내게 런던으로 가자고 했다. 같은 때에 에든버러 축제에 온 런던연극단의 한 연주자와도 알게 되었는데, 내게 같이 앉아 연주하자고 해서 그렇게 했다. 리더는 알고 보니 Lindsay Kemp였는데, 일주일 동안 라인업을 갖춰 공연할 런던으로 같이 가자고 했다. 그래서 나와 Bernie Green이 따라갔다. 내 기억에 우린 보수를 받은 적이 없었는데, Kemp가 너무 열성적이고 재미있었기 때문에 그건 상관 없었다. 그는 아직도 매우 화려한 사람이다. 이것이 1965, 66년 주변의 일이었다.

그리곤 Derek Bailey와 어울리게 되었다. John Stevens는 런던 St. Martins Lane에서 좀 떨어진 작은 장소에서 the Little Theatre Club을 시작한 사람중의 한사람이었다. 초창기엔 거기서 뛰어난 음악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Derek은 그와 헤어져, 나와 Evan Parker와 함께 했다. 우린 M.I.C를 트리오로 시작했던 것이다. 나중에 Hugh Davies가 합류했다.

기자 : 그리곤 2장의 앨범이 제작되었지?

뮤어 : 우리가 ECM에서 한 레코딩은 그 라벨이 막 시작됐을 때였다. 그들은 그때 이렇다 할 음악의 노선을 수립하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물론 후에는 명확한 노선, 즉 꽤 순수하고 뉴에이지 같은, 매우 부드러운 음악을 하게된다.) 그들 음악의 일부는 좋지만, 그것은 채로 걸러진 것들이다. 그러나 그당시로 돌아가면 ECM은 신생 라벨이었고 또 당시에는 즉흥연주도 좋았었다. 그것은 당대의 정신, 즉 급박감, 역동성, 방향감각을 지닌 진정한 음반이었다. Incus의 앨범? 나는 오랫동안 어떤 M.I.C도 듣지 못했고 Incus는 Derek의 라벨이다. 그는 내가 '70년대 초기에 그린, 한 그림을 좋아했고 음반의 슬리브로 사용하겠다고 했다. 그게 '68-71 음반의 커버이다. 그 그림은 무제다.

  • 역주 : Derek Bailey와 Jamie Muir가 함께 했던 M.I.C의 앨범, 즉 위에서 언급한 ECM의 앨범을 묶어서 "Music Improvisation Company 1968-71"로 Incus에서 재발매 함

기자 : 몇 년 후에 M.I.C는 해체되고 당신은 Boris(한때 "기괴한 아름다움으로 승화되는 통제된 추함"이라 묘사되던)에 관여하게 되었지?

뮤어 : M.I.C의 멤버로 있으면서도 나는 락뮤직과 같은 다른 영역을 탐구하는 데 점차 관심을 갖게 되었다. 즉흥음악은 한계를 갖고 있는 것 같았다-복잡함과 세밀함에 있어서는 좋았지만 좀 멀찍이서 보면 그것은 자주 같은 형태를 띠는 경향이 있었다. Boris전에 나는 에든버러 페스티발에서 등장했던 Pete Brown의 Battered Ornaments에서 연주했었다. 락을 연주하면서 처음엔 꽤 당혹스러웠다. 그 밴드엔 R&B 연주자로 꽤 유명했던 괜찮은 연주인들이 있었다.

Boris는 진짜로 좋은 그룹이었다. 베이스를 연주하던 Jamie Peters가 주축이었다. 그는 Georgie Fame과 Dusty Springfield와 연주했었다. 나는 그를 완전히 우연하게 만났고 우린 꽤 거친 즉흥음악을 연주했었다. 그리고 전Collosseum 멤버 기타리스트 Jim Roache와 테너색스폰주자 Don Weller가 멤버였는데, 둘은 Major Surger에 있었다. 그리고 내가 드럼을 맡았다.

Boris는 진짜로 일거리가 없어서 붕괴되었다. 광기가 다분한 즉흥음악을 연주하던 좋은 라이브밴드였다. 우린 데모를 만들었는데, 어떤 미국 영화사가 철저한 무명에서 스타덤에 오르는 락밴드의 성장에 관한 영화를 만들 프로젝트를 갖고 전유럽에서 그룹들을 인터뷰해왔다. 그들은 우리와 만났고 우리를 찍기로 결정했다. 우리를 멋진 식사에 데려갔으며 우린 그들을 위해 데모를 만들었다. 그것은 매우 급박한 일이었고 우린 단지 약 4시간 밖에 없었다. 암튼 그들이 돈이 떨어져 그 일은 중단되었다. 그때 난 희망을 상향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거나 실제로 그것이 일어나기 전에 어떤 것을 믿지 않아야 하는 것을 배웠다. 우린 여러 가지 이유로 해체되었으나 그것은 좋은 밴드였다. Jim과 Don은 몇몇 마법같은 음악을 프러듀스했다.

기자 : 1970년 후반에 Boris가 해체된 후 당신은 잠시 아프로락 밴드인 Assagai의 멤버였지?

뮤어 : 그것은 무척이나 끔찍했다. Assagai의 리더는 Osibisa에 있었는데, 그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모든종류의 이상한 다툼과 머리싸움이 있었었다. 진짜로 악몽이었다.

기자 : 그후 당신은 Alan Gowan과 Allan Holdsworth과 포함된, 임시로 Sunship이라 명명된 밴드를 조직했지?

뮤어 : Alan Gowen은 Assagai의 키보드주자였기 때문에 알게 되었다. 그는 아주 좋은 사람이며 좋은 키보드주자였다. 당시 많은 일거린 없었고, 독일에선가 약간 일거리가 있었다고 생각되나 우린 함께 연주했었고 베이스주자 Laurie Baker 역시 같이 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Allan Holdsworth는 North에서 상업적인 작업을 하다가 왔다. 우린 내 집에서 리허설을 했었는데, 내 기억에 전력산업 파업이 있던 해였다. 우리가 위층에서 리허설 하는 동안 Laurie의 아내가 아래층 부엌에서 촛불빛 아래에서 훌륭한 야채스프를 만들곤 했다. Allan은 뭔가 결정적인 음악을 하려고 왔으나 나는 소위 예술 음악이라 불리는 음악에 관심이 있어서 다른 영역을 시험하길 원했다. 그래서 우린 꽤 장난스런 방식으로 접근했고 상당히 재미있었다. 우린 연주 보단 웃는데 더 시간을 보냈다. Laurie Baker는 지적인 면에서 예술음악에 매우 몰두했지만 제대로 된 분위기에선 대단한 베이스를 연주할 수 있었다.

기자 : 그리고 1972년에 King Crimson에 가입하란 제의를 받지?

뮤어 : Robert Fripp은 새로운 밴드를 찾고 있었고 내게 전화를 했다. Melody Make의 Richard Williams가 그에게 나를 추천한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그때 Alan Gowen 등과 리허설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떠나는 것에 대해 좀 당황해했다, 진짜로....

King Crimson은 내가 있었던 밴드중 유일하게 진짜 유명한 밴드였다. Fripp은 개방적이었고, King Crimson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처럼 여러가질 한 데 묶는다는 것이 어렵긴 하지만 서로 다른 음악적 요소들을 모아서 재미있는 음악을 생산하는 혼합물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다. 우리가 리허설할 때 우린 고민했고 스튜디오에서 즉흥음악의 방식으로 일이 되도록 노력했다. Fripp은 확실히 보스였고 거기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건 좋았고 그는 내게 아주 훌륭한 밴드 리더였던 것 같았다. 단지 내가 즉흥음악에 너무 몰두했기 때문에 그에게 난 너무 풋내기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로직과 역할에 매우 집중했고 연주하기 전에 항상 그의 솔로를 연습했다. 그는 아주 까다롭고 엄격한 체질의 사람이었다.

우린 투어를 가졌고 "Larks' Tongues in Aspic"앨범을 녹음했다. 그런 종류의 즉흥연주를 레코드에 담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우린 그룹으로서의 잠재력과 음악에서 엄청난 파워를 창조하는데 관심이 있었다. 앨범에서 내가 드럼을 연주한 부분은 양철판을 흔들어대는 소리와 찢는 소리, 도자기 더미가 부서지는 소리 등으로 더욱 거칠었어야 했었다. 그랬다면 한 두 가지는 Robert가 좀 과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같은 사람에겐 나 같은 사람과 실제로 일을 한다는 것은 매우 경탄스럽게도 창조적인 결정이었다.

내게 King Crimson과의 투어는 과히 즐겁지 않았다. 나는 많은 장비를 갖고 있었는데, 즉흥음악을 할 때는 내 스스로 장비를 세팅하고 연주하고 다시 분리했었다. King Crimson 때에는 드럼 설치공이 드럼을 세팅하고 다시 불리하는 것 때문에 심하게 불평을 하고 언짢아 했다. 우린 좋은 점이라곤 없는 로드팀(road team)을 규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또 하나 기억나는 주된 요인은 락콘서트에서 퍼커션이 직접 마이크와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퍼커션을 들리도록 노력하는 것이었다. 난 수많은 연주에서 이점을 느꼈고 이것은 진정 영혼을 파괴한다.

Bill Bruford와 나는 음악적으로 아주 잘 어울린 것으로 내겐 보였다. 그는 매우 순수하고 빈틈없으며 사려깊은 스튜디오 타입이었고 나는 상상력이 풍부한 이상한 것들에 몰두했었다.

기자 : 1973년 초기에 두번째 영국 투어 후 그룹을 떠났는데, 왜 그랬지?

뮤어 : 내가 떠난 이유는 내가 불교에 관심이 있어서였다. 내가 음악을 관두게 만든 약 6개월 간에 걸친 경험이 있었는데, 그래서 어느날 아침 E.G 매니지먼트에 가서 그들에게 말해야만 한다고 느꼈다. 물론 일년내내의 투어가 막 준비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내 집을 정리하고 스코틀랜드에 있는 티벳식 수도원에 가서 승려가 되어 법복을 입었다. 남들을 실망시키는 것은 기분 좋지 않았지만, 이것은 반드시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이었고 그렇지 않으면 여생동안 깊은 후회거리가 되었을 것이었다. 난 많은 명상-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단 활동적인-을 하였고, 은거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기자 : Robert Fripp은 1970년대 초기에 외견상 Wicca에 열중했었고 결국 신비스런 Gurdjieff의 가르침에 몰두했었다. 거기에 대해 무슨 의견이 있나?

역주 : Wicca-마술숭배Gurdjieff-아르메이아에서 태어난 Gearge Ivanovitch Gufdjieff(1866?-1945)에 의하면 사람은 깨인 잠 속에서 일생을 보내며, 이 상태를 초월하기 위해선 특별한 내면적 작업이 필요하며 이것은 개인적인 조용한 상태에서 그리고 타인과의 삶 속에서 수련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 수련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생기와 자각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이 Gurdjieff 방식은 구전되는 것이라 세상에 알려진 바가 별로 없고 선생과 제자간 직접적인 접촉에 의해 교습된다고 한다.

뮤어 : 난 그것에 대해 단지 희마하게 기억날 뿐이다. 그것에 대한 내 태도는 우리는 우리에게 정신에 대한 어떤 탐구방식에도 개방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난 또한 세상엔 야박하고 적대적이며 공격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안다...오우, 위험한 세상인 것이다. 인류에 대해 진정으로 염려한다면 무엇이 틀린 것인지 알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그래서 Wicca, Gurdjieff, 불교는 모두 좋다. 최대한 많은 선의의 사람들이 이런 것들에 다가가 탐구했으면 좋겠다.

기자 : 연주하고 녹음하는 것으로부터 떠난 몇 년 후에 당신은 다시 즉흥음악 분야에 다시 나타난 것으로 보이는데?

뮤어 : 대략 1980년에 영국으로 돌아왔다. 은거로부터 돌아오는 것, 그것은 꽤 충격적이었다. Derek Bailey는 날 다시 그룹 즉흥음악으로 끌어들였다. 난 진짜 참여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는 좀 어려운 국면을 보내고 있었고 과거에 알던 친근한 사람을 원하고 있었다. 난 결국 마음이 약해졌다. Evan Parker와 아주 훌륭한 베이스주자인 Barry Guy와의 몇몇 연주, 그리고 하나의 Company 투어를 제외하곤 실제로 상당히 즐겁지 않았다. 즉흥음악은 생기를 잃은 듯했고, 많은 음악인들은 그것을 그들의 커리어를 위한 것으로 또 겉치레와 '척'을 위해 이용하는 것 같았다.

난 그룹 즉흥음악이 아주 급진적이기 때문에 20세기의 가장 훌륭한 음악 형태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주 지적인 방식이 아닌 라이브로 들어야만 한다. 다른 많은 음악들은 부조리하게도 지적이다.

기자 : 당신이 King Crimson의 첫 드러머였던 Michael Giles와 사운드트랙에 관여한 것으로 들었는데?

뮤어 : Derek과의 몇몇 썰렁한 연주 후에 몇몇 프로젝트를 함께 하려고 했으나, 실제로 결과가 나온 건 없었다. '80년대 초기에 사람들은 스스로의 일에 몰두한 것 같았고, 다른 사람의 일에 참여를 위해 준비되지 않았다. 그래서 난 집에서 일종의 사전제작(pre-production) 형태의 스튜디오를 계발했다. 기본적으로 멀티트랙킹에 관심을 갖은 것이었다. 그것은 내게 자연스런 것은 아니었다. 난 시퀀서를 샀고 약간의 샘플링 등을 하였다. Mike Giles, David Cunningham과 나는 'Ghost Dance'라는 영화를 위한 음악을 만들었다. 난 조각영화 하나, 한 두개의 비디오물과 'Etec'이란 영화를 위한 음악도 만들었다.

난 창조적인 과정에 작용하기 시작한 테크놀러지의 요구사항에 대해 좌절감을 느꼈고 혼란스러웠다. 한번 방식을 알게 되면 매우 빨리 작업할 수 있기 때문에 컴퓨터 16트랙 시퀀서에 흥미가 남아있었다. 난 아방가르드와 음악의 예술적 부분이 진정 지겨워졌다. 난 댄스뮤직에 몰두해서 순수한 멜로디와 리듬을 탐구했다. 난 무엇에도 이르지 못한 음악들로 가득찬 디스크들을 갖게 되었다. 내가 '80년대 초의 음악세계를 보았을 때 그것은 단지 뱀들이 들어있는 항아리 같았다. 매우 공격적이고 귀에 거슬리는(파티 지향적인) 정책이 예술전반에 스며들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범위에선 아직도 그것은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내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서는 음악인들은 필름산업에 있어서 열악하게 대우받고 있으며 더 못한 보수를 받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들은 주변으로 대우받고 있다. 진정한 과정의 일부가 못되는 것이다.

기자 : '80년대의 당신 활동에 대해 좀 말해주겠는가? BBC Radio3에서의 Evan Parker와의 세션이 방송되었고 몇몇 레코드의 슬리브를 디자인했고 Company와 Derek Bailey와의 듀오앨범도 만들었다.

뮤어 : Evan Parker가 내게 라디오 세션을 하자고 했다. the Quiet Violence의 'Requiem'앨범(Impetus 라벨)이 내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으며 내가 슬리브를 디자인했다. 일본인 음악 친구가 있었는데, 그의 모친이 돌아가셔서 그것을 기념하기 위한 레코드를 제작하고 싶어했다. 그는 영국에 있는 회사로부터 완전히 갈취당하였다. 그것은 매우 부끄러운 짓이었으며, 아발가르드계가 아닌 큰 상업적 세상에서나 있을 법한, 진짜 불쾌한 3류 사기였다. 난 그가 무척 가엽다고 느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난 Incus를 위해 서너개의 슬리브 디자인했고 그중 하나는 John Russell의 앨범 'Conceit'(Acta 라벨)이었다. Derek Bailey와 함께 만든 앨범은 내 스튜디오에서 한쌍의 스테레오 마이크로 녹음되었다. 슬리브는 진짜로 엉망이었다. 색깔이 모두 틀리게 나왔던 것이다! Company의 슬리브는 지금은 진짜 기억나지 않는다.

기자 : 당신은 아직도 퍼커션 장비를 갖고 있나?

뮤어 : 대부분을 없앴다. 1989년에 미국에 갈 돈을 마련하려고 많이 팔았다. 음악을 계속 쓸 수 있도록 시퀀서와 약간의 기본적 장비를 갖고 있으나, 그러지 않고 있다. '80년대를 통하여 난 미술과 음악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요즘은 음악을 전혀 하지 않는데, 2년전부터 그만두었다. 난 그림만 그리고 있다. 난 밤낮으로 스튜디오에서 작업하고 있으며 매우 은둔적으로 살고 있다. 그것은 진짜로 미술 영역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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