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직후의 생활상

1 개요[ | ]

6.25 직후의 간단한 생활상

이것은 사학개론 들었을 때의 리포트였나보다. 이것과 가족사에 관한 리포트를 쓴 기억이 나네.


처음에는 몇가지 일에 초점을 맞추어 정리해보고자하는 의도가 있었다. 예를 들면 시기적으로 내려오면서 바뀌어간 먹거리나 입거리 등을 적어보고 묘사해보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여기서 힘들었다. 한 개인이 그러한 것을 체계적으로 생각해 보는 것도 아니며 패션(?)에 민감한 사람이 아니라면 더더욱 힘든 일이다. 그리고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것을 필요에 맞게, 그리고 무례하지 않게 유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 그저 말씀하시는 대로 적는 수 밖에 없었다.

조사 대상자는 우리 어머님의 친구분이신 동네 아주머니 한분(41년생)으로 함경남도 함흥분이시다.
아주머니께서는 전쟁 전을 잘 기억 못하시는데 전쟁이 50년에 발발했으니 그때가 9세였을것이다. 그러나 아주머님 남편되는 분도 역시 이북분이라 아주머님께서는 아저씨의 애기를 조금 해주실 수 있었다.
아저씨는 대동아전쟁때 어린시절을 보내셨는데 당시 수많은 물자를 일제가 수탈해가서 무척 어려운 시절을 보내셨다고 한다. 해방직후 남에는 미군이 북에는 소련이 진주할 무렵 당시에는 세력있고 정치력이 있는 집단이 권력을 잡기 시작했는데 남에서는 이승만정권이었고 북에서는 김일성정권이었다. 아저씨는 전 한양대 교수이신 리영희교수와 같은 중학교 1년 후배였다고 하시는데 함께 벽에다 '김일성 물러가라'라는 벽보인지 낙서인지를 하셨다고 한다. 김일성의 조직원들은 학생이 있는 집을 일일이 뒤져가며 글씨를 대조하고 조사, 심문한 끝에 아저씨와 리영희씨를 잡았는데 아저씨는 어른들의 도움으로 곧 나올 수 있었으나 리영희씨는 좀 고생을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에도 언론이나 TV에 리영희 교수가 나오면 아저씨는 저양반 아직도 저러고있구먼...이라고 하신단다.
아주머니에게 전쟁 전은 기억에 없고 파난오실때가 기억에 있는데 피난올 때를 이렇게 증언하신다. 해방될 즈음에 함흥에서 서울로 내려와 신당동에 자리잡았는데 전쟁이 나서 수원, 용인을 거쳐 부산으로 피난을 가셨다. 그사이에 가벼운 병을 앓았던 동생이 수원에서 죽었다고 하신다. 당시에는 먹을것이 없어 영양실조도 많았지만 전염병이 쉽게 되던 때임에도 변변한 약이없어 그다지 심한 병이 아니어도 걸리면 죽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아주머님의 어머님은 무척이나 생활력이 강하고 손재주가 많으신 분이었다 한다. 그래서 피난 도중에도 뜨개질이나 바느질감을 맡아서 생활을 꾸려나가셨다. 이북에서 비교적 여유가 있었기에 가지고 내려온 패물이나 입고있는 옷가지등을 팔아가며 생활하셨다. 아주머님의 아버님은 기계쪽에 관계된 일을 하셨었는데 전쟁통에 남쪽에 있는 이북분들이 박해를 당하셔서 헤어져서 피난가실 수밖에 없었다.
대개 집들이 외따로 떨어져있는데 한 집에 여러 사람들이 묵고있었다. 아주머님 가족도 여기서 묵고있었는데 멀리서 B-29의 폭격이 시작되는 것을 눈치채시고 허겁지겁 아이들과 급한 패물만 챙겨 도망가셨다고 한다. 이렇게 험하게 몸을 피하느라 매우 지쳐있었다. 특히 아주머님과 동생은 나이가 어려 매우 힘들어하셨다고 하는데 어떨때는 이 두 아이들을 따로 이불에 묶고 끌고 내려가실 정도로 강인한 모습을 보이셨다고 한다.
부산에서 다행히 아버님과 합류할 수 있었는데 그 와중에도 아저씨는 자동차부품상을 꾸리실 수 있었다. 그래서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허나 주위의 다른 사람들은 보리, 밀기울, 나물 등으로 죽이나 개떡같은 것을 만들어 겨우 끼니를 해결하는 일이 매우 흔했다 한다. 당시 아주머님 가족에는 단 둘뿐이었지만 다른 집에는 자식들이 많아서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당시로서는 비교적 유복한 생활을 보내셨는데 부모님이 좀 구시대 분들이어서 가부장적인 점이 뚜렷한 집안이었다 한다. 학창시절에도 교복 외엔 한복(평소에는 통치마, 명절이나 기념일에는 긴치마)을 입고다녔으며 집안 단속이 꽤 철저했다고 하신다.
학창시절은 모두 부산에서 보내셨는데 당시는 초등학교에도 입시 비슷한 것이 있어 아주머님도 교장실에 가서 시험을 치르셨다 한다. 이때 고무줄놀이, 땅따먹기, 공기놀이, 자치기, 말뚝박기, 술래잡기 등을 하고 놀았다고 하셨는데 이것들 중 일부는 지금도 전해지나 많이 사라졌다. 내가 어린시절에도 다들 이런 것들을 하며 놀았던 기억이 있다. 종종 애들끼리 규칙을 바꿔가며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중고등학교 생활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셨다. 두발제한이나 교복도 여전하고 시험도 많이봤다. 아무래도 여학생이셨으니까 분식을 많이 드셨다는데 당시에는 떡볶기나 쫄면 이런것은 없었다고 한다. 대신 찐빵이나 당면에 멸치국물과 간장을 넣은 면같은 것이 있었고 특이한 것은 순대대신 고래고기를 널리 팔았다. 부산이 바닷가니까 아무래도 그랬을법 한데 고래도 순대처럼 여러 부위를 따로 놓고 달라는대로 주었다고 한다. 오뎅같은것은 그 때도 있었다. 당시에는 가게도 없이 적당히 국같은 것을 끓여 밥그릇에 퍼주는 국밥집 같은것이 많았다고 한다. 가방이 없어 검은 천으로 요즘의 쇼핑백처럼 만들어 책을 넣어다니셨다는데 집에서 자동차부품을 취급하니까 자동차 쿠션을 이용해서 만들어 다녔다고 기억하신다.
당시의 분위기라는 것은 매우 절실한 것이었다. 이 가난을 다음 대에도 물려주면 안된다는 분위기가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이어지는 엄청난 교육열로 나타난 것 같다고 말씀하신다. 가난하여 다들 공부를 많이 못했기에 돈만 있으면 쉽게 대학을 갈 수 있었고 배운사람을 대접하는 분위기여서 배움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마 당시 배움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절대명제였을 것이다. 지금이야 입시라는 것이 절대명제가 되어버렸지만.
지금과는 달리 당시 학생들은 성숙하고 정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이야 의무교육처럼 되어버렸지만 당시는 초등학교 졸, 중학교 졸이 허다했으며 고등학교만 나와도 잘 나온 것이었기에 일찍 사회에 나갔으며 그들은 사회의 쓴 맛을 일찍 봐왔기에 아무래도 지금처럼 마냥 어리광을 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지금처럼 빈부의 차가 크지 않아서 어느정도의 동질감이라는 것이 존재했다고 하신다. 다함께 없이사니만큼 더 없는 사람을 도와주거나 고통받는 주위의 친구들을 돕는것이 무척 자연스러웠다고 한다. 정이라는 것을 수치로 환산할 수는 없지만 물질과 반비례하는 것이 맞는것 같긴 하다.
아주머니는 4.19를 기억하신다. 당시 정권의 부패는 하늘을 찔러 학교 선생님들 조차 학생들에게 데모를 하도록 사주했고 고등학생 뿐 아니라 중학생들까지 나가서 데모를 했다고 한다. 물론 뭔가를 크게 의식한 것은 아니었다.
이후 아주머니께서는 아저씨를 만나 속초에서 결혼하셨다. 당시는 대개 집안 마당에서 하는 구식결혼이 많았는데 아주머니는 시민회관 같은 곳에서 신식으로 결혼하셨다고 한다. 허나 당시의 속초라면 매우 한적한 해안도시였으므로 오징어잡이가 사람들의 삶을 이어주는 그런 곳이었다. 전기도 수시로 나갔다 들어왔다 하고 밤이되면 오징어잡이 불빚이 가득한 그런 곳이었다 한다.

들은 것은 여기까지다.
이러한 인터뷰의 문제점은 개인적인 것을 다루는 것이기때문에 깊은 얘기를 듣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에 있다. 살다보면 좋은 일과 나쁜 일이 같이 있음은 당연하고 나쁜 일을 굳이 남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을테니까 말이다.
여기서 뭔가 보편적인 것을 끌어내려면 이러한 인터뷰를 많이 늘리고 공통되는 부분들을 찾아서 정리하면 될 것이다. 이것을 보완하려면 당시의 일간지를 살펴서 생활상이나 경제지표등을 조사하면 더 확실해질 것이다.

허나 이 인터뷰에서도 몇가지 중요한 점을 찾아낼 수 있다.
먼저 물질은 행복과 큰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채색된 감은 있지만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시는 학창시절(50년대 후반, 60년대 초반)은 꽤나 낭만적이다. 당시가 더 행복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허나 행복이란 개개인에 따른 주관적인 것이고 물질적으로 뭔가를 얻은만큼 정신적으로, 환경적으로 그만큼 잃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격변은 종종 한 개인을 엄청난 소용돌이 속으로 끌고들어가기도 하지만 대개의 평범한 민중들에게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사실 전쟁때에도 초기에는 부산까지 내려왔다가 다시 압록강까지 치고 올라가는 등 큰 변화가 있었고 따라서 많은 이들이 피난을 가기도 했지만 그 후 2년이 넘게 교착상태를 겪는 동안 후방에서는 평소와 같이 일상이 이루어졌다. 심지어는 한창 밀려서 많은 이들이 부산에 있을 때, 그때도 패물의 암거래가 성행했으며 그것을 통해 최소한의 경제생활이 이루어졌다. 4.19, 5.16, 12.12, 5.18. 6.29 등 그점에서는모두 마찬가지다(결코 4.19나 5.18을 폄하하는 의미는 아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이 쌓여서 역사가 되는것이지만 또다른 역사는 그저 면면히 흐른다.

2 같이 보기[ | ]

문서 댓글 ({{ doc_comments.length }})
{{ comment.name }} {{ comment.created | snsti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