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우

시인의마을

1 # 벽 2 - 낯선 시간 속으로[ | ]

이 벽은 이인성 소설집, [낯선 시간 속으로]의 표지와 같다
이 벽은 신문이다, 보다시피
이 벽은 지방 일간지 7면 문화면이다, 보다시피
이 벽은 파스텔로 회칠한 벽이다
금이 가고
애매모호하다
냉담하고
덮어도 덮어도 다 덮여지지 않는 세속이다
이 벽 속에는 신문 소설, [인스탄트 러브]의 달라붙은 남녀의 삽화가 있다
이 벽 속에는 부동산 광고가 있고
이 벽 속에는 에프킬라와 제주도 관광 안내문이 있다
돈 급히 쓰실 분
댄스 빨리 배우실 분
여종업원 금방 필요하신 분
독신녀 진실남 구하시는 분
뭐, 이런 분들도 있을 수 있지만
이 벽 속에는 보다시파, 단식 투쟁한 舊정치인의 소문이 없다
보다시피, 원풍 毛紡의 후문도 미국인 쌀장사 이야기도 없다
그렇지만 이 벽은 금이 가 있다
아 그래, 금이 가 있다
금이 가고 가운데가 뻥 뚫리고
그 틈틈으로 푸른 하늘 흰 구름
아 그래, 시원한 바람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2 # 겨울산[ | ]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3 # 비 그친 새벽산에서[ | ]

비 그친 새벽 산에서
나는 아직도 그리운 사람이 있고
산은 또 저만치서 등성이를 웅크린 채
槍 꽂힌 짐승처럼 더운 김을 뿜는다
이제는 그대를 잊으려 하지도 않으리
산을 내려오면
산은 하늘에 두고 온 섬이었다
날기 위해 절벽으로 달려가는 새처럼
내 希望의 한가운데에는 텅 비어 있었다

4 #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

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새때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5 # 수은등 아래 벚꽃[ | ]

社稷公園 비탈길,
벚꽃이 필 때면
나는 아팠다
견디기 위해
도취했다
피안에서 이쪽으로 터져나온 꽃들이
수은등을 받고 있을 때 그 아래에선
어떤 죄악도 아름다워
아무나 붙잡고 입맞추고 싶고
깬 소주병으로 긋고 싶은 봄밤이었다

사춘기 때 수음 직후의 그
죽어버리고 싶은 죄의식처럼,
그 똥덩어리에 뚝뚝 떨어지던 죄처럼,
벚꽃이 추악하게, 다 졌을 때
나는 나의 생이 이렇게 될 줄
그때 이미 다 알았다

이제는 그 살의의 빛,
그 죄마저 부럽고 그립다
이젠 나를 떠나라고 말한,
오직 축하해주고 싶은,
늦은 사랑을
바래다주고 오는 길에서
나는 비로소
이번 생을 눈부시게 했던
벚꽃들 사이 수은등을 올려다본다

6 # 뼈아픈 후회[ | ]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모든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
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 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리는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高熱)의
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도덕적 경쟁심에서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나의 희생, 나의 자기 부정;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알을 넣어 주는 바람뿐

7 # 성(聖) 찰리 채플린[ | ]

영화 <모던 타임즈> 끝장면에서 우리의 '무죄한 희생
자',
찰리 채플린이 길가에서 신발끈을 다시 묶으면서, 그리고
특유의 슬픈 얼굴로 씩 웃으면서 애인에게
「그렇지만 죽는다고는 말하지 마!」하고 말할 때
나는 또 소갈머리 없이 울었지

내 거지 근성 때문인지도 몰라; 나는 너의 그 말 한마
디에
굶주려 있었단 말야:
「너, 요즘 뭐 먹고 사냐?」고 물어 주는 거

8 # 너를 기다리는 동안[ | ]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서울대학교 미학과 및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졸업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이 입선
1980년 『문학과 지성』에 <대답없는 날들을 위하여> 등을 발표하여 등단
1983년 제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1991년 제36회 현대문학상 수상
1994년 제8회 소월시 문학상 수상
시집 :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 『겨울 - 나무로부터 봄 - 나무에로』 (1985), 『나는 너다』(1987), 『게 눈 속의 연꽃』(1990)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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