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숙

시인의마을

1 # 풍 차[ | ]

이제는 너 아닌 누구라도
함께 떠나야 할 마지막 시간인데
나는 아직 물풀같이 떠도는
妓女의 마음일까

그리움에 맴도는 나뭇잎 하나
붉은 색지처럼 손끝에 돌리며
멋없이 멋없이 배회하는 날

외로움이 진하면 거울을 보고
거울 속 눈물에 번져나는
희미한 얼굴

붉은 연지꽃처럼 진하게 칠하며
웃어도 보는
뉘라서 알까만 배율의 양심

보라빛 새옷이랑 갈아 입고
검은 머리 꽃이랑 꽂고
나비 같은 마음으로 나서 보건만
짐짓 갈 곳이 없는......

너 없는 이 거리 어디로도
갈 곳이 없는
내 마음은 부칠 데 없는
가랑잎 옆서 한 장
바람에 돌고 도는 장난감 풍차

이제는 너 아닌 누구라도
함께 떠나야 할 마지막 시간인데
나는 아직 물풀같이 떠도는
기녀의 마음일까

붉은 洋館 긴 층계를 내리면서
문득 내 나이 이미 젊지 않음을
생각하는 날

2 # 우리들 잠 속엔[ | ]

사랑아
너와 나 지금은 먼 길에 떠도는
나그네지만
우리들 잠 속엔 퇴락한 집이 있고
한 줄기 길이 있고
둥근 지붕 줄지어 늘어선 거리
사람들의 말소리 기침소리 가득한
도성이 있다
밤마다 화해와 이별이 글썽거리고
평안과 근심들이 불이 켜는 땅
꿈 속에도 가고 있는 우리들의 잠 속엔
고향의 낯익은 창이 있고
등불이 있고
해맑은 아침해와 반짝이는 銀器들이
부딪치는 소리
목이 가는 소녀들이
면사포 아른아른 시집가던 봄길의
살구꽃이 있고
작은 묘지들이 도란도란 모여 있는
언덕 위 수풀로 가는 가을길이 있다
사랑아, 너와 나 지금은 먼 길에
떠도는 나그네지만
떠도는 그 길이 바로
생애를 걸어서 돌아가는 집임을
꿈 속에도 가고 있는
우리들의 집임을


 

경성 여자 사범대학을 졸업
1947년 에 '가을'을 발표하여 등단.
1949년 태양신문사 문화부 기자
1950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과 중퇴
1975년 시집 <타관의 햇살>로 한국 시인협회상을 수상.
1984년 한국 여류문학인회 회장을 역임.
1986년 한국 시인협회 회장 역임.
1989년 한국카톨릭 문우회 회장
1990 ~ 현재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1997년 제 42회 예술원상 문학부문 수상.
1993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상. ||


시인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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