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욱/DT사이버에세이

1 # 사이버에서 타인과 대화[ | ]

2000/07/06

낯선 타인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 대한 약간의 정보가 필요하다.
처음 만나 명함을 주고받는 것, 미팅을 하는 남녀가 신상을 물어보는 것은 대화를 위한 기초 정보를 교환하는 행위이다.
상대에 대해 기본적인 정보가 없으면, 그가 신뢰를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없고, 이렇게 어정쩡한 상태로는 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화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 이름, 성별, 나이, 직업(경력)이다.
이런 정보가 필요한 이유는 대화가 자신과 타인을 적절한 관계 속에 배치하는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 세상에서 타인에 대한 정보는 사람들 사이에 '서열'을 만든다.
객관성을 생명으로 하는 과학에서조차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난다.
200년 전 프랑스 여성 수학자 소피 제르망(Sophie Germain)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업적이 무시당하는 것 때문에 종종 남자 이름을 사용했다.
같은 논문을 존 멕케이(John McKay: 남성)와 조언 멕케이(Joan McKay: 여성)가 쓴 것으로 꾸며서 회람시켰을 때, 과학자들이 남성이 쓴 논문에 (똑 같은 논문이지만) 더 후한 점수를 주는 것을 밝힌 연구도 있다.
과학이 이 정도니 실제 세상은 어떻겠는가. "여자가…" 또는 "어린것이 건방지기는…"이라는 한마디에 대화가 훈계로 변하는 일은 다반사이다.
이렇게 서로에 대한 정보는 대화를 가능하게 하지만 동시에 대화가 더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기도 한다.
인터넷이 열어준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우리는 타인과 만난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이버에서 만나는 사람의 진짜 이름, 성별, 나이, 직업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아이디를 쓸 수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다중 인격(multiple identity)을 가질 수 있다.
현실 세계에서는 남성이지만 사이버 세상에는 여성의 목소리로 참여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렇게 성(젠더), 나이, 경력을 만들(constructed) 수 있다는 사이버 세상의 특성은 현실에 존재하는 서열을 무위로 만들면서 좀 더 평등한 대화를 가능케 한다.
나는 최근에 우리모두(www.urimodu.com)라는 안티 조선일보 사이트에 있는 '소칼방'이라는 사이버 커뮤니티에 종종 들렀는데, 여기에는 40대 교수부터 학부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구성원이 진지하게 토론에 참여한다.
그들 중 절반 정도만 실명을 사용한다.
그렇지만 사이버 세상에서도 정보를 주고받는 수준을 넘어 토론과 협력으로 대화를 발전시키려면 상대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
익명으로 시작한 사이버 공동체도 결국은 서로 누가 누군지 알게 되고, 또 그 속에서 나름대로의 질서와 위계가 생기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사이버 공동체의 질서는 많은 경우 현실 세상의 질서(성별, 나이, 지위)를 반영한다.
물론 사이버 세상이 현실 세상을 100% 복제하는 것은 아니다.
거꾸로 수평적인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사이버 세상에서의 질서가 현실세계에 투영되기도 한다.
네티즌들은 통신과 인터넷에서 오랫동안 상대방의 아이디에 '님'이라는 칭호를 붙이곤 했는데, 이제 '님'은 호칭파괴를 통해 혁신을 꾀해보려는 기업들이 즐겨 사용하는 칭호가 됐다.
현실 세상의 위계가 사이버 세상의 질서를 형성하지만, 반대로 사이버 세상의 평등이 현실 세상을 좀 더 수평적으로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사이버 세상과 현실 세상은 이렇게 점점 닮은꼴이 되어가고 있다.

2 # 여성을 위한 인터넷[ | ]

2000/06/29

인터넷에 여성 인구가 늘고 있다.
불과 3년전만 해도 인터넷 인구의 70%가 남성이었지만 이제 미국의 AOL(American OnLine)의 경우 여성이 절반이 넘는다.
한국에도 '달나라 딸세포(dalara.jinbo.net)' '언니넷(www.unninet.co.kr)' '천리안 여동(user.chollian.net/~zsfemi3)' '사이버 주부대학(www.cyberjubu.com)'과 같이 여성을 위한 웹진과 포털 사이트가 속속 생겨나고 있다.
여성 인터넷 인구가 적던 시절, 사람들은 그 원인이 여성이 컴퓨터와 가깝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소년과 소녀가 간단한 컴퓨터 언어를 사용해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을 연구한 MIT의 심리학자 셰리 터클(Sherry Turkle)은 소년이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프로그램을 짜는 데 반해, 소녀는 대화하고 타협하는 식으로 프로그램을 익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소년의 방법만 올바른 방법으로 인정하는 교육이 결국 소녀들로 하여금 컴퓨터에서 멀어지게 한다고 터클은 결론을 내렸다.
이제 여성 인터넷 인구가 절반 가까이 되기 때문에 사이버에서 남녀는 평등하다고 할 수 있는가. 꼭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 사이버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의 압도적 다수가 아직도 남성이라는 점이다.
미국의 한 연구는 페미니즘에 대한 유스넷(Usenet) 뉴스그룹(newsgroup)에 올린 글 중 87%가 남성의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인터넷에서 이루어지는 '텍스트에 의한 소통'(textual communication)을 연구한 또 다른 연구에서는 남성들이 글쓰기나 논쟁을 즐기고 여성들이 채팅을 좋아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왜 남성과 여성의 인터넷 언어에 차이가 있을까. 이 문제를 연구한 텍사스 대학의 수전 헤링(Susan Herring) 교수는 인터넷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공격적인 언어(adversarial speech)'와 '도움을 주는 언어(supportive speech)'로 구별한다.
'공격적인 언어'는 강한 주장과 권위적인 억양, 그리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데에 적합한 언어이다.
하지만 '도움을 주는 언어'는 약한 주장과 개인적인 이야기, 그리고 다른 사람을 돕는 데에 적합한 언어이다.
헤링의 연구는 인터넷에서 남성이 주로 공격적인 언어를 사용함에 비해, 여성은 도움을 주는 언어를 선호함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여성들은 공격적인 언어가 활개를 치는 사이버 공간의 토론장에서는 불편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냥 놓아둘 경우 여성 사이트의 게시판은 공격적인 언어와 욕설로 도배가 되기 십상이다.
어떻게 하면 여성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할 것인가. 일단 한가지 방법은 여성들이 좀 더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여성 전용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말처럼 쉽지 않다.
사이버 세상에서 남성인가 여성인가 구별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주민등록번호를 받는다고 해도 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
포털 사이트에서 과다한 신상정보를 요구하면 여성이건 남성이건 아예 가입을 하지 않는 경향도 문제이다.
다른 방법은 여성-남성의 성(sex)을 구별하지 않고, 사이버 젠더(gender) 만을 보는 것이다.
즉 여성에 대해 공격적인 목소리를 '사이버 남성'으로 놓고 이런 목소리의 참여를 제한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지금 '달나라 딸세포'에서는 여성 전용 게시판과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 게시판을 만들고, 여성 전용 게시판에서는 여성주의에 호의적인 사람들의 목소리 만을 담아내고 있다.
이렇게 '열림'과 '닫힘'의 조화를 통해 여성들이 편안할 수 있는 사이버 세상을 만들기 위한 다양한 실험을 주목해 본다.

3 # 인쇄술 혁명과 인터넷 혁명[ | ]

2000/07/13

15세기 인쇄술 혁명 이전에 책값은 금값이었다.
대학과 교회는 값비싼 책의 분실을 막기 위해 책에 철갑을 입혀 쇠사슬로 붙들어 매어놓곤 했다.
대학 수업 시간에도 교수만 책을 가지고 있었고, 학생은 책을 구경할 수 없었다.
따라서 수업은 교수가 낭독하는 책의 내용을 받아쓰는 식이었다.
인쇄술의 혁명은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던 정보 폭발을 낳았다.
과거의 책을 전부 찍어 싼값으로 보급하면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일한 책을 읽고 같은 지식을 공유하게 됐다.
이렇게 되면서 훌륭한 학자는 남들도 다 아는 과거의 텍스트에 주석을 다는 사람이 아니라, 새롭고 독창적인 설명이나 해석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정착했다.
천문학, 지질학, 해부학 책의 보급은 사람들의 관심을 종교와 신의 세상으로부터 땅으로 끌어 내렸다.
휴머니즘을 강조한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전 유럽으로 퍼지고, 16세기에 과학혁명이 시작된 것, 모두 인쇄술의 혁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쇄된 책의 보급은 한 국가의 언어를 더 표준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이 과정을 통해 민족어(vernacular)들이 정착됐다.
인쇄술의 발전으로 가능해진 정확한 지도는 국경의 개념을 강화하면서 민족주의와 국민국가의 부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를 관장하는 중앙 정부의 권한이 강화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인쇄술 혁명 이전에는 책의 저자(authorship)라는 개념이 희박했다.
고대의 텍스트도 필사를 거치면서 여러 명의 필사자들의 의견과 스타일이 첨가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똑같은 책을 수천, 수만부 찍어내는 것이 가능해지자 이 책을 저술한 저자의 권리가 강화됐다.
저작권(copyright)에 대한 토론과 갈등이 뒤따랐고, 이는 개개인의 권리와 개인의 유일한 아이덴티티(identity)를 강조하는 개인주의와 화합했다.
20세기 후반에 시작된 정보혁명과 인터넷혁명은 인쇄술 혁명에 이어 인류 역사상 두 번째 정보폭발을 낳고 있다.
인터넷에 있는 정보는 18개월에 2배씩 늘어난다.
그렇지만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는 인쇄술의 근대적 기획에 도전하고 이를 흐트러뜨린다.
무엇보다 정보기술과 인터넷은 민족국가의 국경이란 개념에 도전하고 있다.
국제적 투기 자본이 생성되는 데에 정보기술의 발달이 한몫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나는 캐나다에 있지만, 인터넷을 이용해서 실시간으로 한국 TV를 보고 라디오를 듣는다.
심리적 거리가 무척 좁혀졌다.
인터넷에서 발생하는 범법행위에 어느 나라 법률을 적용할 것인지도 골치 아픈 문제이다.
인쇄술 혁명이 고대와 르네상스 사이의 지적인 거리를 고정(fix)시켜 새로운 지식을 만드는 기준을 정형화했다면, 인터넷의 하이퍼텍스트는 끊임없이 바뀌고, 무한정 연결돼 있고, 항상 유동적인 지식 생성의 새로운 유형을 창조했다.
또 인터넷의 익명성은 우리에게 다중 아이덴티티를 가지게 했다.
이는 개개인이 단일한 아이덴티티의 소유자라는 개인주의의 철학적 기반을 붕괴시키고 있다.
사이버 세상은 아마 우리 심성 저 깊은 곳에 잠자고 있는 다양한 나의 아이덴티티를 끄집어내는 데 도움을 줄 지 모른다.
인쇄술이 세상과 인간에 대한 독창적 지식, 국경과 언어로 구분되는 민족국가, 개인주의 등을 탄생시키면서 근대(modernity) 기획의 출범을 도왔다면, 인터넷 혁명은 이런 경계에 도전하고, 경계를 허무는 근대 극복의 양상을 띄고 있다.

4 # 냅스터와 MP3[ | ]

2000/06/22

MP3는 소리 파일을 축약(compression)하는 컴퓨터 포맷이다.
간단한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면 CD에서 곡을 뽑아 mp3 노래 파일을 만들 수 있고, 이 파일들을 연결해서 자신만의 컴퓨터 CD를 만들어 가질 수 있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법적 문제가 없다.
내가 만든 mp3 노래 파일을 친구에게 전자메일로 보내주는 것은 괜찮을까. 이것은 노래를 선곡해서 테이프나 CD에 넣어 애인이나 친구에게 주는 것과 비슷하다.
동서를 막론하고 수백만, 수천만명의 젊은이들이 즐겨 하던 일이다.
이것 역시 법적으로 제재하기 힘들다.
친구를 즐겁게 해주기 위한 선심을 처벌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는 사용자의 '공정한 사용권'(fair-use right)에 속한다는 것이 판례이다.
그렇지만 CD에서 꺼내 만든 mp3 파일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리는 것은 저작권(copyright) 침해다.
인터넷에 올라간 mp3 파일은 누구나 다운로드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CD를 사는 대신 공짜 mp3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불법으로 만든 mp3 노래 사이트들은 어제 없어졌다 오늘 생기는 숨바꼭질을 계속한다.
그런데 사용자의 공정한 사용권과 저작권 침해 사이에 애매한 영역이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록 밴드 '자우림'의 CD를 사서 이를 mp3 파일로 만들어 내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저장해두고, 자우림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누구나 내 컴퓨터에 접근해서 이를 복사해갈 수 있게 한다면. 이것이 저작권 침해인지는 분명치 않다.
친구에게 선물로 주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면, 이것 역시 막을 명분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까지는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mp3 파일을 찾아내거나 이에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mp3 노래 파일을 소유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소유한 노래를 공유하기로 동의하면, 서로 어떤 노래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내는 것이 기술적으로 가능하면, 저작권의 효력은 어떻게 될 것인가. 보스턴에 위치한 노스이스턴 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하던 19살의 대학생 숀 패닝(Shawn Fanning)은 친구가 인터넷에서 mp3 노래를 찾는데 너무 힘겨워하는 것을 보고, 그 친구를 위해 '냅스터'(Napster)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 작은 프로그램은 자신의 컴퓨터를 일종의 서버로 바꾸는 기능을 한다.
즉 인터넷에서 냅스터를 사용해서 mp3 노래 파일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하드디스크에 보관되어 있는 mp3 노래를 다른 사람들에게 활짝 열어놓게 되는 셈이다.
베풀수록 커진다는 공유의 정신을 구현한 기술이었다.
작년 11월에 처음 선을 보인 냅스터는 수백만명의 대학생들이 가입해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이로 인해서 다운로드할 수 있는 노래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수백개의 신곡을 다운로드해도 음반회사에 한푼의 돈도 낼 필요가 없었다.
미국 음반협회(RIAA)는 부랴부랴 냅스터사를 고발했고, 갑자기 급증한 인터넷 트래픽에 놀란 몇몇 대학은 기숙사에서 냅스터를 사용할 수 없도록 규정을 만들기도 했다.
지난 5월 캘리포니아 지방법원의 페이틀(M. Patel) 판사는 음반협회의 소송을 기각해 달라는 냅스터의 청원을 거절했다.
이는 냅스터사가 소송에서 힘든 싸움을 할지 모른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지만 냅스터에 대한 신규 투자가들은 줄을 잇고 있다.
'토론토스타'지는 올해의 기술 넘버원(No. 1)으로 냅스터를 선정했다.
저작권에 대한 기술(technology)의 도전은 냅스터의 출현으로 예상하지 못하던 국면으로 진입하고 있다.

5 # DNA혁명과 디지털혁명[ | ]

2000/06/01

DNA와 디지털(Digital)이 결합하고 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A. Toffler)는 디지털혁명과 DNA혁명이 합쳐져서 조만간 '제4의 물결'을 만들 것이라고 예측한다.
모토롤라(Motorola)사는 발빠르게 '디지털DNA'를 회사의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인간이 정보를 전달하는 두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는 부모-자식 사이에 DNA를 통한 유전적인 정보전달이다.
다른 하나는 미디어를 통한 정보전달인데, 20세기 디지털기술은 이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런데 기술의 발달은 유전에 대한 이해도 획기적으로 바꾸었다.
물리학자로서 생명현상에 관심을 두던 슈뢰딩거(E. Schroedinger)는 1945년 출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유전정보의 전달이 전신(電信)의 모르스부호(Morse code)의 전송과 비슷하다고, 즉 통신 기기를 통한 정보전달과 흡사하다고 주장했다.
이후 생물학자들은 생명의 본질을 유전자에 각인된 정보로 정의하고, 그 원리를 알기 위해 노력했다.
1953년 DNA구조가 밝혀지고, 1960년대 초에는 유전정보 해독의 메커니즘이 발견됐다.
이후 유전자를 잘라서 증식하는 유전자재조합법이 등장했고, 1983년 DNA를 복제해서 찍어내는 PCR(Polymerase Chain Reaction)이라는 기술이 발명됐다.
1990년에는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인간 유전정보를 전부 해독하는 인간게놈계획이 출범했다.
인간게놈계획에서 DNA와 디지털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접점을 만들고 있다.
첫 번째는 셀레라 제노믹스(Celera Genomics)사의 숏건(shotgun) 방법에서 보듯이 DNA의 염기서열 분석(sequencing)에 컴퓨터와 암호해독 방법을 이용하는 것이다.
두 번째 접점은 유전자를 찾아내는 작업에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 분야의 선두는 인사이트(Incyte)와 인간게놈과학(Human Genome Sciences)사이다.
세 번째는 생명 정보를 해독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생명정보학(bioinfomatics)이며, 이 분야는 더블트위스트닷컴(DoubleTwist.com)과 인포맥스(Informax)사가 주도하고 있다.
마지막 접점은 반도체 대신 DNA의 일부를 포함하는 바이오칩(biochip)이다.
바이오칩의 기술 특허는 어피메트릭스(Affymetrix)사가 독점하고 있다.
지금 숨가쁘게 진행되는 DNA혁명과 디지털혁명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
디지털혁명이 지구 한구석에 있는 정보도 쉽게 찾아서 내 컴퓨터에 띄워주듯이, DNA혁명이 진행되면 나나 내 2세가 유전적으로 어떤 병과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상세히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비슷한 위험도 존재한다.
애인과 찍은 비디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인터넷에 올라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열람되듯이, 생물학혁명도 개인의 정보를 노출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
결혼을 할 때 배우자가 상대방의 상세한 유전정보를 요구하거나 회사가 신체검사 대신 유전자 검사를 요구할 수도 있으며, 이런 정보는 곧바로 특정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을 고용하지 않는 식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데 사용되기 쉽다.
새로운 네트워크나 정보가 제공하는 가치를 충분히 이용하지만 그것이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거나 사람을 차별하는 데 쓰이는 것을 막는 것. 이것이 우리 시대의 디지털혁명과 DNA혁명이 지닌 공통된 과제이다.
홍성욱 (토론토대학 교수. 과학기술사. mailto:sungook@chass.utoronto.ca)

6 # 온라인 숨바꼭질과 표절[ | ]

2000/05/25

사이버 세상에는 재미있는 숨바꼭질이 많다.
해커와 보안전문가 사이의 숨바꼭질은 그 중 대표적인 것이다.
13살에 FBI의 보안망을 뚫은 해커 케빈 미트닉(Kevin Mitnick)이 보안전문가 츠토무 시모무라(Tsutomu Shimomura)의 컴퓨터에 침입했다가, 결국 화가 난 시모무라의 손에 잡혀 감옥으로 보내진 이야기는 아직도 전설처럼 인구에 회자된다.
그렇지만 해커를 뒤쫓는 보안전문가들이 종종 해커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다.
어떤 경우에는 아예 해커들이 보안전문가로 '전직'하는 경우도 있다.
소비자 정보를 알아내려는 기업과 자신의 정보를 감추려는 사람들 사이의 숨바꼭질도 재미있다.
기업은 사용자등록, 무료 전자메일, 쿠키(cookies)를 사용해서 소비자 신상정보를 알아내려고 한다.
하지만 사용자들은 거짓 정보를 주거나 쿠키를 꺼놓음으로써 자신의 신상이 드러나는 것을 피한다.
이에 맞서 기업은 쿠키를 끄면 볼 수 없는 웹사이트를 만들고 있다.
대학가 주변에도 이런 사이버 숨바꼭질이 있다.
북미의 대학촌에는 학생 보고서를 대신 써주는 장사가 성업 중이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이런 장사가 아예 웹으로 진출했다.
리얼페이퍼스(www.realpapers.com), 스쿨페이퍼스(www.schoolpapers.com)처럼 대학생들에게 리포트를 판매하는 웹사이트가 수십개에 이른다.
인류학, 철학, 자연과학, 사회학, 여성학, 법학 등 없는 분야가 없고, 각각의 분야도 세분화되어 학생들이 구매할 리포트를 찾기가 아주 용이하다.
이런 사이트는 대개 페이지 당 8-10달러를 받는다.
대학생들이 자신이 이미 제출한 리포트를 올려놓고 아무나 다운로드할 수 있는 무료 사이트도 있다.
아무튼 교수의 입장에서 보면 표절한 보고서를 잡아내는 일이 더 힘들어졌다.
지금까지는 서론이 엉망인데 본론이 매끄럽던가, 인용과 본문의 어투가 비슷하던가, 시험 성적이 엉망인 학생치고는 보고서의 논지 전개가 너무 깔끔하면 일단 의심했다.
이제는 이것만 가지고는 표절을 잡아내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예를 들어 플로리다에 사는 학생이 작성해서 A를 받은 뒤 인터넷에 올린 보고서를 내 수업을 듣는 학생이 제출하면 이걸 잡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지만 교수들에게도 희소식이 생겼다.
학생들의 보고서가 표절인가 아닌가를 검사해주는 플레이저리즘(www.plagiarism.com)이라는 웹사이트가 생겼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약간의 돈을 받고 자신들이 확보한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해서 교수가 의뢰한 학생의 보고서가 표절인지 아닌지를 검사해준다.
우리 과에서도 교수회의 끝에 일단 이 서비스를 시험적으로 사용해 보기로 결정했다.
그렇지만 보고서를 파는 회사가 같은 서비스를 이용해서 감시를 피해간다면 이 역시 소용없어진다.
작년에는 콜로라도 대학의 인공지능 연구자 토머스 랜다우어(Thomas Landauer) 교수와 그의 팀이 만든 소프트웨어가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학생들의 보고서를 자동으로 채점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이들은 좋은 보고서에 특정한 단어나 표현의 빈도가 비슷하게 들어 있다는 점에 착안해서 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프로그램이 상용화될지 의심스럽지만 아마 교수들이 이 프로그램을 써서 학생들 보고서를 채점하기 시작한다면, 학생들은 이 프로그램에 대해 자동으로 최고 점수를 받는 보고서를 작성해주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 다른 숨바꼭질이 시작되는 것이다.
홍성욱 (토론토대학 교수. 과학기술사 mailto:sungook@chass.utoronto.ca)

7 # 커뮤니티를 사고파는 인터넷[ | ]

2000/05/12

영어에서 공동체를 의미하는 '커뮤니티'(community)와 '소통'(communication)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말 한마디 없이 친구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사람을 사귀고 관계를 맺어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서로 소통을 해야한다는 뜻이다.
네트는 사람들 사이에 소통을 용이하게 한다.
통신과 인터넷은 지역적으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쉽게 소통하게 함으로써, 예전 같았으면 불가능했을 공동체를 많이 만들어낸다.
전자메일을 이용한 메일링 리스트(mailing list), 리스트서브(listserve), 게임 공동체도 훌륭한 사이버 공동체이다.
공동체의 자양분은 시간과 노력이다.
공동체의 멤버들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공동체에 참여하고, 네트를 매개로 한 대화와 실제 세상에서의 만남을 통해 친구를 만든다.
이런 '공유된 경험'은 공동체 멤버들을 묶어주는 끈끈이다.
서로 마주보기 힘든 친구를 그리워하고, 연대를 느끼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것은 사이버 공동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서다.
사이버 공동체는 사이버 세상의 꽃이다.
그런데 공동체가 가지는 의미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인터넷 벤처기업들이 눈독을 드리는 '상품' 중에 하나가 바로 공동체이다.
사람들 사이에 공유된 경험과 관계가 인터넷 시대의 고부가가치 상품인 것이다.
포털 사이트, 인터넷서비스업체(ISP)들은 무료 멤버십을 주고 공동체를 만들게 해준다.
사이버 공동체를 많이 보유한 포털업체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길목에 점포를 가진 가게와 비슷하고, 따라서 그 인터넷 사이트가 광고와 온라인 상품 판매에서 더 큰 시장성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인터넷에 접속하는 사람들은 낯선 웹사이트를 헤매기보다는, 친구들이 많은 커뮤니티에서 시간을 보내길 선호한다.
공동체는 사람들의 관심을 붙잡아둘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수십명의 열성회원을 가진 사이버 공동체는 돈을 주고라도 사려고 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커뮤니티가 상품이 된 것은 인터넷이 처음이 아니었다.
1920년 경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자 미국의 RCA와 같은 회사는 가정에 라디오 수신기를 판매하고 이로부터 막대한 수익을 얻었다.
반면 AT&T는 발신기를 만들어 라디오 방송국을 세우는 사업을 맡았다.
음악이나 뉴스와 같은 방송은 라디오 수신기를 팔기 위한 '서비스'였고 홍보였다. 그런데 1920년대를 통해 가정용 라디오의 시장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음에 비해 방송국을 세우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더 많은 돈을 벌기를 원했던 AT&T는 방송을 유료화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AT&T는 방송국을 임대해주는 방법을 써보기도 하고, 커뮤니티 방송국(community station)을 지어 원하는 사람에게 방송을 1-2시간씩 쪼개서 팔았지만, 이 모든 것이 별로 인기가 없었다.
당시 '방송'이라는 것은 별로 상품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무엇을 팔 수 있을 것인가?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다.
커뮤니티에 방송을 파는 것이 아니라 광고주에 커뮤니티를 파는 것이었다.
수백만, 수천만명의 사람들이 이미 라디오를 듣고 있었고, 이렇게 라디오를 통해 만들어진 '대중'(mass)이라는 커뮤니티가 가장 고가의 상품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라디오 방송국들은 조직된 커뮤니티를 광고주에게 팖으로써 방송에서 돈을 버는데 성공했다.
커뮤니티 장사의 시작이었다.
흡사한 과정을 우리는 지금 인터넷 혁명의 시대에 다시 목격하고 있다.

8 # 인터넷 혁명과 인문학[ | ]

2000/05/18

자연과학자에 비해서 인문학자 가운데 컴퓨터나 인터넷 혁명에 뒤쳐지는 사람들이 꽤 있다.
우리 과 교수들만 해도 컴퓨터에 조금만 이상이 생기면 나를 부른다.
한국에서 인문학을 하시는 나이 지긋한 선생님들은 아예 컴퓨터나 전자메일을 쓰지 않는다.
기계에 친숙하지 않거나, PC가 원래 계산기부터 발달해서 이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인터넷 혁명은 인문학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먼저 인문학자들이 연구 대상으로 삼던 방대한 텍스트를 디지털화하고, 이러한 문헌에 대한 검색작업을 도와 연구를 촉진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로마 문헌들을 CD롬에 담은 티지알(TGR) 프로젝트, 19세기 영국에 대한 자료를 망라한 빅토리안 데이터베이스(Victorian Database), 지금 토론토대학 철학자들이 진행하는 데카르트 프로젝트,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을 CD롬에 담은 작업 등이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이런 작업은 인터넷을 통해 더욱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
철학에 대한 인터넷 데이터베이스를 검색 엔진과 함께 구축한 피터 수버(Peter Suber) 교수의 홈페이지 (www.earlham.edu/~peters/philinks.htm)나 데니스 더튼(Denis Dutton) 교수가 운영하는 인문학 뉴스레터(www.cybereditions.com/aldaily) 등은 인문학자들에게 귀중한 재원이 된다.
인터넷 혁명은 인문학 교육에도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인접한 두 도시에서의 사람들의 생활과 전투를 재현한 '그림자의 계곡'(Valley of the Shadow) 사이트(jefferson.village.virginia.edu/vshadow2)는 학생들로 하여금 19세기 도시들을 직접 둘러보고 탐구하게 함으로써 역사 교육에 비할 수 없는 도움이 된다.
반대로 인문학적 연구들이 인터넷 혁명에 다양한 방법으로 기여할 수도 있다.
로봇이나 인공지능 연구에 인문학이 도움을 주기도 한다.
카네기 멜론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피비 센거즈(Phoebe Sengers)는 인공지능을 가진 기계나 프로그램을 사회문화적 배경 속에 위치시켜 그 행동을 설명하는 연구에서, 1960년대 반정신병리학 운동이나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신분열론과 같은 인문학을 접목해서 좋은 성과를 얻어냈다.
인문학이 기여할 수 있는 또 다른 분야는 인터넷 커뮤니티이다.
네트워크 혁명은 자꾸 새로운 커뮤니티를 만들어낸다.
인문학자들은 사람들이 어떤 커뮤니티에 호감을 가지고 친숙해지며, 어떤 커뮤니티는 낯설어하는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인문학적 상상력이 도움이 된 한 가지 좋은 예는 아트뮤지엄 웹사이트(www.artmuseum.net)이다.
여기서는 인터넷을 통해 3차원 전람회에서 그림을 감상하면서 다른 감상자의 존재를 알 수 있고 이들과 실시간 채팅도 할 수 있다.
낯선 커뮤니티에 참여하길 강요하기 보다,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커뮤니티를 사이버 공간에 재현한 셈이다.
마지막으로 인문학은 인터넷 혁명의 미래를 예측하는 일을 도와준다.
인터넷과 TV가 만나면 사람들은 TV 대신 컴퓨터 모니터를 거실에 놓고 방송을 볼 것인가. 이런 문제에 대해 인문학은 TV가 가진 공동체적인(가족들이 둘러앉아 TV를 보는 것 같은) 상징성과 컴퓨터가 가진 개인적인 상징성간의 문화적 의미의 차이를 이해함으로써, 웹 TV가 어떤 방향으로 발달한 것인가에 대한 예측과 인간의 필요에 보다 부응하는 기술발전을 촉진하는 촉매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9 # 거품 뒤에도 남는 것[ | ]

2000/04/27

디지털 타임스의 독자 가운데 WWW가 월드와이드웹(World Wide Web)을 의미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월드와이드웹은 유럽핵물리연구소의 프로그래머였던 팀 버너스-리(Tim Berners-Lee)에 의해 1989년에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WWW라는 단어가 20세기 초엽부터 널리 쓰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때 WWW는 '범세계 무선전신'(World Wide Wireless)을 의미했다.
50년 전에 출판된 RCA나 AT&T의 신문 광고를 보면 WWW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범세계 무선전신은 1901년 마르코니가 무선전신을 사용한 대서양 송수신에 성공하면서 현실로 다가왔다.
야심에 찬 발명가와 사업가들은 유럽, 아메리카, 호주, 중국, 인디아를 잇는 전신망을 실현하고자 경쟁하듯 회사를 차렸다.
투자자들은 석유와 철도에서 빠져 나와 무선전신에 투자했고, 무선전신 회사들의 주가는 폭등을 거듭했다.
그렇지만 진정한 발명은 드물었고, 대부분은 기술을 베끼고 센세이셔널한 쇼를 선보여 주가를 올리기에 바빴다.
아브라함 화이트(Abraham White)는 20세기 초엽 미국에서 '잘나가던' 벤처 기업가였다. 당시 기업인들로부터 사기꾼이란 평을 듣기 했지만 그는 미국 사람들이 무선전신에 매혹돼 여기에 주식으로 투자하리라는 비전을 분명하게 꿰뚫던 사람이었다.
그가 제일 좋아하던 구호가 바로 이 WWW, 즉 범세계 무선전신이었다.
화이트는 기술자가 아니었기에, 투자가들을 매혹시킬 쇼를 준비하는 작업은 그의 동업자인 리 드포리스트(Lee de Forest)의 역할이었다.
이들은 맨해튼 한복판에 있는 빌딩 옥상에 유리로 된 송신소를 차려놓고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월스트리트의 다우 존스 사무실로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고, 이런 설비와 쇼를 언론과 투자자들에게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그렇지만 이런 설비들은 실제 메시지를 주고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투자자들을 끌어들여 주식을 팔기 위한 '미끼'였다. 이들은 주식을 팔아 번 돈을 연구개발이 아닌 광고와 쇼, 사치스러운 사무실 치장에 소비했다.
이들의 회사는 1906년 드포리스트의 수신기가 다른 기술자의 특허를 침해했다는 법원의 판결이 나오면서 치명타를 입게 되었다.
술수에 능했던 화이트는 당시 유럽을 여행 중이던 드포리스트를 해고시키고 모든 책임을 그에게 뒤집어씌움으로써 회사를 살렸다.
하지만 드포리스트는 알거지가 돼서 배신감에 치를 떨며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갔다.
1906년 여름부터 겨울에 이르는 반년동안 그는 연구실에 처박혀서 새로운 수신기의 발명에 전념한 끝에 결국 그해 겨울 '3극 진공관'(triode)의 발명으로 그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화이트는 곧 사업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드포리스트도 부침을 거듭하다가 빈털털이로 사망하고 만다.
그러나 3극 진공관은 이들의 운명과는 무관하게 현대 기술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3극 진공관은 검파는 물론, 피드백을 통한 증폭과 발진을 가능하게 했고, 이는 바로 라디오와 TV 방송의 기술적 기초가 되었다.
3극 진공관이 트랜지스터로 이어지고 트랜지스터가 집적회로(IC)로 진화하면서 3극 진공관은 20세기 전자·컴퓨터 혁명의 핵심 기술이 되었다.
거품이 꺼지면 무엇이 남는가. 기술이 남는다.
기술이 없다면. 그렇다면 남는 것은 과거의 영화(榮華)에 대한 아련한 기억뿐일 것이다.

10 # 논객열전[ | ]

2000/04/20

통신 동호회, 자유광장, 인터넷 토론장과 같은 사이버 공간에는 논객(論客)이 산다.
무협지의 검객(劍客)이 중원을 누비는 주인공이라면, 논객은 사이버 세상의 검객이다.
검객의 무공이 문파(門派)에 따라 갈리듯이, '글발'을 무기로 삼는 논객에게도 특장이 있다.
어떤 논객은 단순명료하고 군더더기 없는 논리적인 글로 사람을 설득하고, 어떤 이는 감성을 자극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을 뚝뚝 흘리게 한다.
해박함을 무기로 삼는 논객이 있고,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상식의 통찰력에 호소하는 논객도 있다.
논쟁을 즐겨하는 사람도 있고, 논쟁보다 조용한 글쓰기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고수(高手)의 대열에 끼기 위해서는 논리와 감성, 해박함과 통찰력, '격투'와 '독백'을 겸비해야 한다.
누가 논객이며, 이 중 누가 고수인가 서열을 매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서로가 다른 공간에서 활약하는 경우가 많고, 고수 논객들 사이에 진검승부가 오가는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어떤 의미에서 사이버 공간에 글을 쓰는 사람들 모두가 논객이다.
그렇지만 고수와 사이비를 구별하는 것은 간단하다.
누구보다 사이버에서 이들의 활약을 지켜보는 독자는 누가 고수이고 누가 사이비인지 금방 파악한다.
글을 자주 올린다고, 사람들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한다고 논객의 대열에 합류하는 것은 아니다.
깊은 여운을 남기는 글을 쓰고, 가끔씩 글을 올려도 조회수가 월등히 높다면 그런 사람이 논객이다.
다른 글들을 제쳐놓고 그의 글만 읽는 '고정 팬'이 존재한다는 얘기다.
가끔 논객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붙으면 조회수가 2-3배로 뛴다.
사이버라는 중원에 등극하길 꿈꾸는 예비 논객들이 이 논쟁을 두번 세번 읽으면서 '초식'을 익힌다.
논객의 주변에는 팬을 자처하는 사람들과 추종자들이 있다.
운이 좋으면 '사이버 애인'을 하고 싶다고 자청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다.
전자 메일을 열면 '팬레터'가 몇 통씩 와 있기도 하고, 격렬한 논쟁에 휘말려 있을 때에는 편지와 격려의 전문이 줄을 잇기도 한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르는 독특한 재미가 쏠쏠하다.
물론 논객의 글쓰기가 이런 '재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의미도 있고, 배움의 기회도 될 수 있고, 글을 통해 세상의 문제를 폭로하고 이를 바꾼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개개인의 동기는 그들의 글만큼이나 다양하고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글을 좋아하는 많은 독자가 생기고, 이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글이 더 인정받게 된다는 재미가 큰 매력임에는 틀림없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글쓰기가 겉멋만 잔뜩 든 논객을 양산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다.
그렇지만 인정받고 싶어하고, 자기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가져보고자 하는 것이 왜 잘못된 것인가. 추종자가 있고, 팬을 가지는 것은 소위 사회의 '유명한' 사람에게나 주어지던 특권이다.
정치가나 돈 있는 기업가, 유명한 학자들은 추종자를 가졌고, 교수, 유명한 컬럼니스트나 작가, 연예인들은 '팬'을 가지고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도 좋은 글을 쓰고, 창조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동기 가운데 동료와 더 많은 독자에게 자기를 더욱 인정받게 하는 욕구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사이버 공간은 '가진 사람'만이 느끼던 이러한 '재미'를 더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 줄 가상 세계 속의 커뮤니티를 어렵지 않게 복제해낸다.
이를 비난하기 전에, 그것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열어줄 가능성을 볼 필요가 있다.
홍성욱 (과학기술사, 토론토대학. mailto:sungook@chass.utoronto.ca)

11 # 모든 것이 공짜[ | ]

2000/05/04

사이버 세상에는 공짜 소프트웨어, 공짜 스크린세이버와 같은 공짜가 많다.
통신회사와 달리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는 회비가 없다.
게다가 포털 사이트의 회원에게는 무료 전자메일과 홈페이지가 주어지며, 채팅도 무료다.
공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신문, 주간지, 월간지를 보는 것도 공짜이고, '창작과 비평' '인물과 사상' 같은 잡지도 과월호는 그냥 볼 수 있다.
TV는 물론, 영화도 공짜로 볼 수 있다.
인터넷 게임과 성인물도 공짜가 많다.
자신이 좋아하는 MP3 음악파일도 공짜로 다운받을 수 있고, 거의 정품과 다름없는 데모 게임을 무료로 쓸 수 있다.
새롬의 다이얼패드를 통해 해외전화를 공짜로 걸 수도 있다.
물론 광고를 봐야 하지만, 고객으로서는 상당한 돈을 절약할 수 있다.
무료 해외전화를 놓고 벤처회사들 사이에 고객 유치 경쟁이 심한데, 조만간 해외전화를 걸면 돈을 준다는 회사가 나올지 모른다.
이 모든 공짜를 쓰기 위해서는 인터넷에 돈을 내고 접속해야 한다.
하지만 공짜는 여기에도 적용된다.
인터넷서비스회사(ISP)들이 고객 유치를 위해 조금 철 지난 모뎀을 그냥 주는 것은 옛날 얘기다.
조만간 PC를 그냥 줄 수 있다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아예 인터넷 사용도 공짜가 가능하다.
한달 무료 패키지나 50시간, 100시간 공짜 서비스가 그것이다.
북미에서는 AOL의 무료 패키지를 모아 공짜로 인터넷을 사용하는 얌체들이 꽤 많다.
얼마 전에는 인터넷에 무료로 접속하게 해주는 ISP가 등장했으며, 이는 앞으로 확산될 전망이다.
광고를 봐주면 돈을 주거나 경품을 준다는 회사도 있다.
광고를 보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마우스를 움직여야 하지만, 마우스를 움직이는 효과를 내는 프로그램을 돌려놓으면 된다.
이 프로그램조차 인터넷에서 공짜로 다운받을 수 있다.
공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돈을 내라고 하는 것은 파산한 사람에게 빌려준 돈을 받는 것보다 어렵다.
초기 넷스케이프가 유료화를 시도했다가 MS사의 익스플로러에게 시장을 뺏기고는 서둘러 무료로 바꿨으며, MS사의 웹진 '슬레이트'(Slate)가 유료화를 시도했다가 본전도 못 찾고 다시 무료로 전환한 것은 이런 실례이다.
따라서 이런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A는 공짜로 얻은 PC를 켜서 공짜로 인터넷에 접속해서 전자메일을 체크하고, 동호회에 새로 올라온 글을 읽은 후 동호회 친구들과 채팅을 하고, 광고를 보면서 공짜 게임을 몇시간 즐기다가, 미국에 있는 친구와 인터넷 전화를 하고, 애인에게 사이버 카드를 한장 보내고는, 인터넷 TV로 저녁 뉴스를 보고, 자신의 전자 지갑에 광고를 본 수고비와 약간의 경품이 들어와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 돈으로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한 권 주문하고, 자장면을 시켜먹은 후, 접속을 종료하고 잠자리에 들어간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이것이 150년 전에 마르크스가 꿈꿨던 공산주의 사회에 다름 아니다.
그렇지만 사회의 부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누군가 정신적, 육체적 노동을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와 재화를 만들어내야 한다.
아이디어와 재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은 인터넷과 네트워크 혁명이 엄청난 부가가치를 줄 것을 꿈꾸며 공짜를 뿌린다.
벤처에 투자하는 투자가들은 이런 꿈에 투자하는 것이다.
사이버 세상의 공짜는 순간적인가 아니면 앞으로도 지속될 것인가. 이것은 우리의 꿈이 순간적인가 아니면 영원히 지속될 것인가를 묻는 것과 같다.

12 # 파트너 바꾸기[ | ]

2000/04/06

'펄프픽션'으로 유명한 퀜틴 타렌티노(Quentin Tarantino)의 데뷔작은 '저수지의 개들'이다.
영화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영화는 유혈낭자하고 끔찍한 장면으로 말이 많았다.
그렇지만 영화의 흥미는 폭력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
'저수지의 개들'의 매력은 서로 이름도 출신도 모르는 여섯 명의 건달이 '한탕'을 위해 모인다는 플롯이다.
이들은 미스터(Mr.) 오렌지, 미스터 화이트 같은 가명으로만 서로를 알고 있다.
서로의 과거에 대해서도 한탕 이후 미래에 대해서도 모르며, 또 관심도 없다.
이들의 관계는 목적을 위해 만나서, 한탕하고, 이익을 분배하고, 그리고 헤어지는 '파트너십'의 관계이다.
그렇지만 이들의 계획은 경찰의 기습으로 미스터 브라운이 죽고, 미스터 오렌지가 배에 총상을 입으면서 복잡하게 꼬인다.
멤버 중 경찰의 끄나풀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서로가 모르는 상황이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바뀌면서, 이렇게 증폭된 불신이 모두를 공멸로 몰고 간다는 것이 영화의 줄거리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과정 역시 흥미롭다.
할리우드의 독립영화 제작자 중에 벤더라는 젊은이가 영화에 미친 몽상가 타렌티노를 만나 그의 '저수지의 개들' 각본을 읽고 즉석에서 이를 영화로 만들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저예산 독립영화에 개런티를 많이 줘야하는 배우를 쓸 수 없었기에, 이들은 한번도 비중있는 주연을 맡아본 적이 없었던 하비 카이텔을 주연으로 선정하고, 오디션을 통해 스티브 부세미라는 신인을 발굴해야 했다.
벤더라는 제작자와 타렌티노라는 감독 겸 원작자가 만나 배우들은 모으고 발굴해서 영화를 찍고 시사회를 가졌을 때까지 6개월이 채 안 걸렸다.
다른 독립영화가 그렇듯이 이들의 관계는 이렇게 목적을 위해 만나서, 한탕하고, 이익을 분배하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파트너십의 관계였다. 그렇지만 '저수지의 개들'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이들의 운명은 복잡하게 꼬인다.
무명의 벤더는 일약 할리우드에서 주목받는 독립영화제작자로, 타렌티노는 미국 영화사상 가장 화려하게 데뷔한 감독으로 부상했다.
카이텔은 '피아노'의 남자 주인공을 맡아 오랜 슬럼프에서 벗어났고, 부세미는 '파고'에서 주연을 맡아 기억에 남을 명연기를 보여준다.
타렌티노와 벤더는 카이텔과 함께 모든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펄프픽션'의 준비에 들어간다.
'저수지의 개들'은 파트너 바꾸기가 일상이 되어버린 포스트모던 라이프(postmodern life)의 편리함과 그 속에 숨겨진 위험을 드러낸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과정 역시 파트너 바꾸기의 전형과 그 역설을 보여준다.
인터넷 사업, 벤처로 대표되는 새로운 경제 영역에서 경제 주체들은 파트너십을 선호한다.
벤처에서 'ㅇㅇ가족'과 같은 고리타분한 구호나 생각은 찾아보기 힘들다.
기술이 유동적이고, 콘텐츠가 유동적이듯이, 그 속에서의 인간관계도 순간적이다.
목적을 위해 합치고, 한탕하고, 뿔뿔이 흩어진다.
벤처에 뛰어드는 젊은이들에게서 평생직장과 같은 생각이 사라진지는 오래다.
반면에 사이버 모임과 동호회에서는 사이버 남매, 사이버 엄마와 같은 새로운 '가족'이 쉴새없이 만들어진다.
파트너 바꾸기가 실제 세상에서 가족의 경계마저 희석시키는 지금, 이러한 사이버 가족의 존재는 조금이라도 더 지속적인 인간관계를 만들어보고자 하는 숨겨진 욕구의 분출에 다름 아니지 않을까. 홍성욱(과학기술사, 토론토대학 mailto:sungook@chass.utoronto.ca)

13 # 바이러스와 프라이버시[ | ]

2000/04/13

작년 이맘 때 멜리사 바이러스(Melissa virus)가 네티즌을 공포에 몰아 넣었다.
이것 때문에 미국 컴퓨터 비상대기팀은 '트로이의 목마' 바이러스 이래 두 번째로 경보 사이렌을 울리기도 했다.
컴퓨터 비상대기팀은 1988년 모리스 웜(Morris Worm)이라는 바이러스 때문에 만들어졌다.
미국 코넬대학에 다니던 모리스 2세(Robert Morris Jr.)라는 젊은이가 재미로 만들었던 모리스 웜은 유닉스의 결함을 틈타 자기 복제를 하면서 네트워크를 잠식했고, 며칠동안 인터넷을 마비시키면서 작은 프로그램 하나가 국가의 보안을 송두리째 위협할 수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모리스가 검거된 데에는 그의 부주의가 한 몫을 했다.
그는 친한 친구들한테 이 프로그램 얘기를 했는데, 나중에 바이러스가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키자 그의 친구들이 이 사실을 수사 당국에 알렸던 것이다.
모리스는 1986년 제정된 컴퓨터 사기법 위반으로 기소된 최초의 피고가 됐다.
그에게는 3년 집행유예에 400시간 봉사와 1만달러의 벌금이 부여됐다.
멜리사 바이러스를 만든 데이빗 스미스(David Smith)가 검거된 과정은 모리스의 검거과정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바이러스와 해킹에 대해 천재적이었던 스미스는 자신이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 전자 지문(electronic fingerprint)을 남겼기 때문에 꼬리가 잡혔다.
MS사의 워드 프로그램은 워드로 씌어지는 모든 문서에 고유번호를 숨겨왔다.
멜리사 바이러스는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문서에 붙어서 전파되었는데, 바이러스를 전파한 워드 문서의 고유번호를 분석한 결과 이 바이러스를 만든 사람이 VicodinES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해커라는 사실이 처음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이렇게 인터넷 혁명은 예상치도 못한 방법으로 우리 모두를 노출시킨다.
정부, 기업, 공공기관이 감추고 싶어했던 사실이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네트워크를 통해 급속하게 전파됨으로써, 언론을 통제하는 식으로 이미지를 관리하던 전통적인 방법이 무력해지고 있다.
클린턴 스캔들이 인터넷을 통해 먼저 확산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인터넷 혁명을 주도하는 MS사조차 기업 간부들끼리 주고받은 전자메일이 다 파헤쳐져 법정에서 증거로 제시되었다.
편지는 찢어버리거나 태우면 되지만, 전자메일은 지웠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인터넷의 특성은 정부, 기업, 공공기관을 투명성을 고양시킬 수 있다.
바람직한 변화다.
반면, 개개인의 신상정보 역시 무방비 상태에 놓인다.
인터넷을 항해하는 것은 자기 정보를 끊임없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사용자 등록, 쿠키스(cookies, 웹사이트와 사용자의 컴퓨터 사이에서 통신을 매개해주는 정보로 사용자에 대한 정보가 기록된다), 무료 전자 메일, 무료 웹페이지는 모두 소비자 정보를 모으는 방편이다.
이렇게 모아진 정보는 기업의 마케팅에 사용되고, 시장에서 사고 팔린다.
회사나 관공서의 랜(LAN)에 연결되어 있는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웹사이트를 방문하고 여기서 얼마나 시간을 보내며 어떤 프로그램을 사용하는가 등이 모두 한눈에 모니터될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모리스 웜과 멜리사 바이러스를 만든 해커가 검거된 과정을 비교해보면 우리는 지난 10년간 인터넷이 프라이버시를 얼마만큼 침해했는가에 대한 한가지 상징적인 지표를 얻어낼 수 있다.
앞으로 10년 후에는 어떤 세상이 될지 궁금해진다.

14 # 논쟁과 오해[ | ]

2000/03/30

사이버 세상은 우리 삶에서 이미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앞으로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모뎀을 통한 접속 속도가 빨라지고, PC방이 늘어나고, 직장과 대학에 랜(LAN) 커넥션이 보편화되면서 사이버에서 사람을 만날 기회는 점차 늘어난다.
누군가와 얘기하고 싶을 때, 친구에게 전화를 거는 것보다 더 쉽게 사이버에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사이버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고, 친해지는 것은 기분 좋은 경험이다.
그렇지만 기분 좋은 대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논쟁이 벌어지고, 비아냥과 욕설이 난무하는 경우도 많다.
싸움이 벌어지는 공간에 처음 온 사람들은 이를 보고 기겁하곤 한다.
보통 사이버에서의 싸움은 사이버에서 끝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다.
하지만 가끔 이런 싸움이 실제 세상에서 명예훼손과 같은 고소로 번지기도 한다.
사이버에서의 소통은 종종 오해를 낳는다.
전자메일을 보낸 경우 사람들은 24-48시간 내에 답장을 받기를 기대한다.
며칠이고 답장이 없으면 메일을 보낸 사람은 "저 사람이 나를 무시해서 답을 안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분 나빠지는데, 이런 경우 수신자 서버(server)에 문제가 있어서 편지가 전달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통신에서 '쪽지'라는 것이 있다.
접속해 있는 친구에게 한 줄 짜리 메모를 보내서 대화하는 것이다.
어떤 때 쪽지를 몇 번 보내도 답이 없으면 불쾌해진다.
대화하기 싫어서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을 '쪽지를 씹는다'고 한다.
씹는다는 말 자체가 불쾌감의 정도를 그대로 반영한다.
물론 쪽지에 대답이 없는 경우 시스템이 불안정해서 쪽지가 전달되지 않은 일이 많다.
경험을 하나 소개한다.
통신 공간에서 어떤 친구와 논쟁이 붙은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친구의 글을 비판하는 반론을 올리고, 그가 내 반론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몹시 궁금했다.
특히 그 친구는 다른 사람의 비판에 대해 그냥 넘어간 적이 없는 '싸움꾼'이어서 내 궁금증은 사실 걱정의 수준이었다.
다음날 아직 반론이 올라오지 않았다.
확인해보니, 마침 그 친구가 통신에 접속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바로 "안녕~ 내 글 읽었지? 어떻게 생각하니?"라는 쪽지를 보냈다.
가슴을 졸이고 있는 나에게 한참만에 돌아온 대답은, "잘 썼던데"라는 단 한마디였다. 이 말은 "자알~ 썼던데"라는 비아냥거림으로 들렸다.
"내가 얘 성질을 건드렸구나…." 후회가 막심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재반론이 올라오지 않자 나는 조금 의아해졌고, 그를 다시 만난 기회에 왜 내 글에 불만이 많으면서 반론을 안 하는가를 물어보았다.
그는 내 질문을 이해 못하다가, 자기는 내 글이 좋았고, 잘 썼다고 생각한다고 다시 말하는 것이 아닌가. 비아냥거린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잘 썼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왜 '잘 썼다'는 칭찬을 '자알~ 썼다'는 비아냥으로 들었던가? 생각해 보니, 내 자신의 심정이 투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친구가 심하게 비판하면 어떡하나하는 걱정이 투영돼 칭찬을 비판(비아냥)으로 읽은 것이었다.
그의 쪽지에서 내 마음을 봤다.
나는 이후부터 만난 적도 없는 어떤 사람의 글에 매혹 당하거나, 이유 없이 싫어하면 그 이유를 한번 더 생각해 본다.
글쓴이의 의도를 읽는다면서, 내가 나의 심정을 그 사람의 글에 투영해서 읽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홍성욱 (과학기술사, 토론토대학. mailto:sungook@chass.utoronto.ca)

15 # 촌평[ | ]


[[홍성욱]

문서 댓글 ({{ doc_comments.length }})
{{ comment.name }} {{ comment.created | snsti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