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시네마쿠스

ISBN:8990720028

  • 원제:호모 시네마쿠스(2003)
  • 저자:류상욱

1 # 거북이[ | ]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싫어하는 것중 하나를 분명히 알게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과대포장'이다. '호모 시네마쿠스'라는 제목 대신 '누벨바그와 프랑스영화'정도로만 했어도 훨씬 진솔했을 것이다. 내용물들도 뭔가 구체적인 체계가 있다기보다는 그냥 인물이나 사건을 키워드삼아 몇가지 자기 생각들을 담아두었는데 그 내용 전개는 어수선한 것과 간결하게 정리가 잘 된 것들로 상당히 편차가 크다. 어쨌든 이 책의 도움으로 자주 언급되는 이름인 바쟁이나 몇몇 평론가들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에 대해 조금은 알게되었고 누벨 바그의 신화를 조금 벗겨낼 수 있어서 좋았다.

이 책의 저자는 상당히 여러번 바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언급을 한다. 뭐 돌아가야할지 어쩔지는 모르겠지만 바쟁은 상당히 실천적인 인물로 지금의 떠들기만 하는 평론가들과는 상당히 다른 인물이었던 것 같다. 다른 곳의 영화에 대해 알고자하는 노력을 끊임없이 했고, 씨네마테크를 운영했으며, 까이에 뒤 씨네마를 발행하는 등의 씨네필이 해야하는 것의 모범답안을 제시한 사람인듯 하다. 특히 공장에 가서 노동자들에게 채플린을 틀어주며 이야기를 했다는 에피소드는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이해가 안된 부분들은 적어본다. 베르그송의 영향을 받아 실증주의를 극복한 평론가라고 하며 저자는 이 현상학과 생철학(베르그송은 생철학을 추구한 사람이라고 하니)적인 면에서 '우리'의 사유를 시작해야 한다고 언급하는데 솔직히 뭔소린지 모르겠다. 이런 말을 하고싶으면 우리에게 실증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해부터 말해야한다. 한국 문학과 영화에서 기대할 부분이라곤 리얼리즘 뿐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저런 주장은 당연히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된다.

고다르에 대한 부분은 한마디로 고다르는 다혈질의 논객이었고 일관성이 결여된 사람이었다라는 것으로 요약되는듯 하다. 그의 몇몇 '선언'성 글들이 사람들에게 선동적으로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고다르는 트뤼포에 비해 글을 얌전하게 썼지만 영화 자체는 가장 실험적이었다고 한다.

트뤼포는 고다르 못지않은 논객이었나보다. 트뤼포는 작가주의에 대해 강하게 언급하고 감독들을 작가와 아닌 사람들로 나눠버렸다는 것과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과의 관계는 가능하면 일치하는 편이 바람직하며 감독이 시나리오 작가를 압도하는 편이 많다는 얘기를 했다는 소리가 주로 씌여있다. 그런 주제에 트뤼포는 누벨바그 감독중 가장 시나리오 작가의 도움을 많이 받은 감독이라고 한다. 그리고 전통적인 내러티브에도 충실했다고 하네.
작가주의에 대해서 프랑스까지 건너가 그들의 이론에 기대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어디서 본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어쨌든 동북아의 고전중에서 '책에 대해 알고자하면서 그 책을 지은 사람에 대해 공부하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그 책을 이해할 수 없다.'는 요지의 문장을 읽은적이 있다. 뭐 계보학이니 뭐니 해서 양놈들의 발명품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계보적인 접근은 학문의 기본이다. 하다못해 집집마다 있는 족보만 해도 그런 것이고 학파의 계보, 왕의 계보등을 통해 그 실체를 이해하지 않는가. 결국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그 작가를 이해할 수 밖에 없고, 그 작가를 이해하려면 시대적 배경과 작품의 위상등에 대해 고려하지 않을 수 없고, 그 와중에 작가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수 밖에 없고, 그러면 그것이 작가주의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들이 작가주의에 대해 언급하면서 어떠한 면을 가진 사람이 작가다라고 규정을 한 것을 참고하는 것 정도야 나쁘지않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보는 작가의 개념은 그때 그들의 맥락과는 좀 다르니까 그들의 작가를 우리가 꼭 알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보다는 우리만의 작가만들기에 신경쓰는 편이 낫지 않은가 싶다.
트뤼포는 자기도 평론가였으면서 평론가들은 바보같은 놈들이니까 무시하라고 했다한다. 뭐 실체는 없이 개념어와 추상어를 팔아 먹고사는 요즘의 평론가들을 보면 무시할만도 하다고 생각한다.

누벨 바그에 대한 요약은 솔직해서 좋았다.

  1. 누벨 바그는 당시 상업적으로는 반짝하고 곧 묻힌 흐름이었고
  2. 지금의 개념으로는 독립영화에 가까운 움직임이었고 (저예산 작가주의 & 실험)
  3. LP의 등장과 같은 기술발전에 의해 지탱될 수 있었으며 (지금의 디지탈 혁명처럼)
  4. 이후의 감독들에게 이렇게 해도 안죽는다는 것을 보여준 흐름이었다

누벨 바그에 대한 언급들 중에 가장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제약이 미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말이었다. 돈이 없어서 제약이 생기고, 제약이 생기니 발버둥칠 수 밖에 없고, 발버둥 속에서 새로운 미감이 생겨난다는 얘기다. 나는 이것을 억압의미학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그때 그들이 했던 스타일을 따라가보기 위해 여유가 있는데도 그것들을 모사해보는 것이다. 즉 스타일은 작가의 개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시대적 정황, 물리적 상황들에 의해 규정된다.
누벨 바그는 인디음악과 동일한 태도를 가진 흐름이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은 영화 이론과 개념에 대한 설명이 담긴 책이라 인명, 추상적 개념어들이 많이 나오는, 전반적으로 내가 싫어하는 글쓰기의 한 면이 잘 드러난 편이다. 아무래도 잡지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은 탓인지 얘기하고자 하는 면이 그다지 분명하지도 않다. 영화 공부하는 친구가 말하길 나에게 맞는 책이 아니었다고 하는군. 뭐 하긴 나는 예술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이론을 들이대는 것 자체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다. 개념이 만들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되지만 종종 그 개념을 과하게 원용하여 그 개념을 들이대지 않아도 되는 곳까지 들이대거나 개념을 위한 개념을 따따불로 만들어나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저자를 때려주고싶은 마음이 저 밑바닥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온다.

아 그리고 좀 더 소박한 편집을 요청하고 싶다. 본문과 관계있는 삽화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삽화들도 많았던 것 같고 가끔 한 문단을 큰 폰트로 써서 한페이지를 뒤덮는 편집들을 하던데, 읽고나면 그 문단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경우가 많았다. 그런 편집 자체는 좋지만 의미있는 문장들을 그렇게 만들었더라면 더 좋았을 뻔 했다. 이번은 안하느니만 못했던 기분이 들었다. -- 거북이 2005-3-20 5:14 pm

2 # 촌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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