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개요== ; ;慧超 또는 惠超 ;혜초(704년~787년) *통일신라 성덕왕(또는 경덕왕) 때의 고승으로, 787년에 중국의 오대산(五臺山)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서 입적 *인도기행문(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이 1908년 발견되어 동서교섭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음 == 생애 == 혜초의 생애에 관해서는 오랫동안 미궁 속에 빠져 있다가 근세에 와서야 비로소 그 대략적인 면모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지난 세기 초 그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오늘날까지 그의 생애는 약력 정도만 그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일찍이 [[당나라]]에 건너가 [[719년]]([[성덕왕]] 18) 남인도(南印度)의 밀교승(密敎僧) [[금강지]](金剛智)에게 불도를 배웠다.<ref name="글로벌-혜초2">[[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통일신라와 발해/고대문화의 융성#혜초|한국사 > 고대사회의 발전 > 통일신라와 발해 > 고대문화의 융성 > 혜초]],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ref> 바닷길로 인도에 이르러 사대령탑(四大靈塔) 등의 모든 성적(聖蹟)을 순례하고, 오천축국(五天竺國) 등 40여 개국을 거쳐 [[727년]]([[성덕왕]] 26) 당나라 [[장안]](長安)에 돌아왔다.<ref name="글로벌-혜초2"/> 여기서 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3권을 지었으나 전하지 않았는데 [[1906년]]에서 [[1909년]] 사이에 [[프랑스]]의 학자 [[폴 펠리오]](Pelliot)가 중국 간쑤 성 지방을 탐사하다가 [[둔황 석굴]]에서 구매한 앞뒤가 떨어진 책 2권을 발견함으로써 세계적으로 사학(史學)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었다.<ref name="글로벌-혜초2"/> 우선 혜초의 고국은 여행기가 발견된 지 7년 후인 [[1915년]]에 처음으로 [[일본]]의 종교학자인 [[다카쿠스 준지로]]({{llang|ja|[[:ja:高楠順次郎|高楠順次郎]]}})와, [[일본]]의 승려이자 [[니시혼간지]]의 세습 주지인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에 의해 밝혀졌다. 그 전에는 다만 그가 밀교승으로 [[불공]](不空, Amoghavajra, 705~774) 삼장의 제자라는 것만 알려졌을 뿐, 그의 국적은 미지로 남아 있었다. 다카쿠스 준지로는 당대 밀교 최성기의 중요 문헌인 [[원조]](圓照)의 《대종조증사공대판정광지삼장화상표제집(代宗朝贈司空大瓣正廣智三藏和尙表制集)》 속에 수록되어 있는 사료를 인용하여, 혜초는 신라인으로서 유년기에 당나라에 들어가 중국 [[밀종]](密宗)의 시조인 [[금강지]](金剛智, Vajrabodhi, 671~741) 삼장을 사사하고 불경의 한역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고 고증하였다. 《왕오천축국전》에 의하면 혜초는 여행을 마치고 [[787년]]까지 [[당나라]]의 [[우타이 산|오대산]](五臺山)의 금강지 대공삼장(大空三藏)의 역장(譯場)에서 54년 동안 지내면서 많은 불경을 번역하였다.<ref name="글로벌-혜초2"/> ==같이 보기== * [[신라승려]] * [[왕오천축국전]] * [[동서교섭사]] ==참고== * {{위키백과}} [[분류:704년 태어남]] [[분류: 787년 죽음]] [[분류: 통일신라 사람]] [[분류: 신라의 승려]] [[분류: 당나라의 승려]] [[분류: 아시아 탐험가]] [[분류: 여행가]]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Favicon (원본 보기) 틀:Lang (원본 보기) 틀:Llang (원본 보기) 틀:위키백과 (원본 보기) 모듈:Langname (원본 보기) 모듈:Langname/data (원본 보기) 모듈:String (원본 보기) 혜초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