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하운

시인의마을

1 # 막다른 길[ | ]

저 길도 아닌
이 길이다 하고 가는 길.

골목 골목
낯선 문패와
서투른 번지수를 우정 기웃거리며.

이 골목
저 골목
뒷골목으로 가는 길.

저 길이 이 길이 아닌
저 길이 되니
개가 사람을 업수여기고 덤벼든다.

2 # 어머니[ | ]

어머니
나를 낳으실 때
배가 아파서 울으셨다.

어머니 나를 낳으신 뒤
아들 뒀다고 기뻐하셨다.

어머니
병들어 죽으실 때
날 두고 가신 길을 슬퍼하셨다.

어머니
흙으로 돌아가신
말이 없는 어머니.

3 # 비 오는 길[ | ]

酒幕도 비를 맞네
가는 나그네

빗길을 갈까
쉬어서 갈까

무슨 길 바삐 바삐
가는 나그네

쉬어갈 줄 모르랴.
한잔 술을 모르랴.

4 # 秋夜怨恨 - 어머님의 옛날에......[ | ]

밤을 새워 귀또리 도란도란 눈물을 감아 넘기자.

잉아 빚는 물레 소리에 밤은 적적 깊어만 가고.

청상스리 한숨 쉬며 어이는 듯한 그리움에 앞을 흐리는 밤.

눈물은 속될진저 오리오리 슬픈 사연을 감아 넘기자.

바람에 부질없어 문풍지도 우는가

무삼일 속절없는 가을밤이여.

5 # 봄[ | ]

제일 먼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좁은 지역에도 한 포기의 꽃을 피웠더냐.

하늘이 부끄러워
민들레꽃 이른봄이 부끄러워.

새로는 돋을 수 없는 빨간 모가지
땅속에서 움돋듯 치미는 모가지가 부끄러워.

버들가지 철철 늘어진 초록빛 계절 앞에서
겨웁도록 울다 가는 청춘이요 눈물이요.

그래도 살고 싶은 것은 살고 싶은 것은
한 번밖에 없는 자살을 아끼는 것이요.

6 # 무지개[ | ]

무지개가 섰다.
무지개가 섰다.

물 젖은 하늘에
거센 햇살의 프리즘 광선 굴절로
천연은 태고의 영광 그대로
영롱한 七彩의 극광으로
하늘과 하늘에 穹 한 다리가 놓여졌다.

무지개는 이윽고 사라졌다
아쉽게
인간의 영혼의 그리움이
행복을 손모아 하늘에 비는 아쉬움처럼
사라진다 서서히......

만사는
무지개가 섰다 사라지듯이
아름다운 공허였었다.

7 # 輪廻[ | ]

가랑잎이 우수수 굴러간다
지난해 가랑잎이 굴러간 바로 그 위로
올해의 가랑잎이 굴러간다

이제 사람이 죽었다
지난해 죽은 사람의 시간 바로 그 시간에
지금 사람이 또 죽었다

모두가
지금 있는 것 그것은
과거에도 있었고
또 미래에도 있을 지금의 바로 그것이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현재에 미래에 똑같은 그것이
영원으로 이어주는 것이다 輪廻 우수수 가랑잎이 굴러간다

8 # 戀主님[ | ]

얼마나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가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못 견디게 그리웁기에
한시도 잊을 길 없어
구름 위 상상봉에 올라

하늘 아득히
님 오시는 길이라도 보고 싶어

꽃피는 날인가
기러기 오는 날인가

비 오는 밤
눈 오는 밤을 가리지 않고

사랑한다는 것은
이렇게도 청승스러운 것인지
눈물인들 울음인들 어찌하랴

한평생 기다리는
하늘보다 높은 높은 사랑이여

戀主님이여

9 # 冷水 마시고 가련다[ | ]

산천아 구름아 하늘아
알고도 모르는 척할 것이로되
모르면서 아는 척하지를 말라.

구름아 또 흐르누나
나는 가고 너는 오고
하늘과 땅 사이에서
너와 나와 헛갈리누나.

아 아 하늘이라면
많은 별과 태양과 구름을 가졌더냐

이렇듯 맑은 세월도
푸른 地平도 건강한 生도 평등할 幸도
나와는 머얼지도 가깝지도 못할
못내 허공에도 끼어질 틈이 없다.

삼라만상은 상호부조의 깍지를 끼고
을스꿍
저 좋은 곳으로만 돌아가는가

산천아 내 너를 알기에
냉수 마시고 가련다.

기어코 허락할 수 없는 생명을 지닌
내 목으로 너를 들이키기엔
너무나도 시원한 이해이어라.

10 # 보리 피리[ | ]

보리 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인환(人窪)의 거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 - ㄹ 닐니리


 

1920년 함경남도 함주 출생
1943년 중국 북경대학 농학원 졸업
1944년 함경남도 도청 축산과에 근무
1945년 나병의 악화로 사퇴
1946년 함흥 학생 데모 사건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석방
1949년 시집 『한하운 시초』 발간
1975년 사망
시집 : 『한하운 시초』(1949), 『보리피리』(1955), 『한하운 시전집』(1956), 『한하운 제3시집』(19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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