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와 중국어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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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운동 동문회*의 [자유발언대]에서 가져와 다듬은 글입니다. 저 밑에 본디글도 있습니다.

  • 글쓴이: 김경일 ( 소개한 이: 이봉원 / 다듬은 이: 겨레지기 )
  • 국민대학교 한문과 졸업
  • 중국문화대학(타이완) 중문연구소 석사, 박사
  • 상명대학교 중문학과 교수
  • 지금은 미국에서 연구 활동 중

한자와 중국말*은 이음고리가 없다.

중국*이 우리 사회 속으로 파고들어 오고 있다. 너무도 여러 밭에 빠르게 파고들어 옴을 느낀다. 시장에서 푸성귀를 파는 아주머니들도 중국* 땅이름 한두 개는 자연스레 꿰고 앉아 계시다. 중국*에서 나는 농산물 때문이다. 가까운 친지들을 만나거나 길거리에서 우연히 말벗 삼아도 중국과 교수라는 것을 알면 많이 물어오고 나름대로 좋은 의견들도 많다. * 밭: 분야

그런데 두루 잘못 아는 것이 하나 있다. 중국*은 한자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려면 먼저 한자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두루 잘못 알려진 앎은 사회 한 귀퉁이에서 한자 타령하는 이들에게는 목청을 돋울 다시없는 틈새이다. 국자(나라글자)라는 표현을 서슴없이 하기도 한다. 한 귀퉁이에서는 중국*을 고갱이로 한, 한자 문화권 한자 경제권 어쩌고 하면서 한자 교육 더하기를 우기고 있다. 그나마 한자를 조금 대하고 있었고 조금이라도 가르치고 있다는 점이 다행이라는 말투다. 또 한자 교육이 줄어들고 있다며 나라의 앞날을 잇대놓고 긴 한숨을 내쉰다. 글쓴이는 끝내는 한글만 쓰기를 생각하는 사람이다. 시나브로 한글만 쓰기 주의자이다. 언젠가는 한자가 모두 사라져 버리기를 바라고 애쓰는 사람이다. 중국말*을 배우고 가르치고 쓰면서 한글만 쓰기 주의자라니 이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리냐는 되물음이 없을 수 없다. 바로 그렇다. 글쓴이는 중국말*을 배우고 가르치고 쓸 뿐이다. 한자를 배우고 가르치고 쓰는 것이 아니다. 글쓴이는 한자를 두루 가르치는 것을 반대한다. 또 한자와 중국말*을 짬뽕으로 엮어서 한자 퍼뜨리기론을 펴는 야릇한 논리를 반대한다. 먼저 한자 교육에 대한 반대론을 조금 펴 본다. 정말로 한자 경제권이 두려운 것이고 나라의 앞날이 걱정된다면 한자 교육은 참으로 다른 차원에서 따져보아야 한다. 자라나는 뒷세대들에게 이미 미이라가 되어버린 말의 억지요구는 쓸모 없는 일이다. 문화의 끊김이 정말 걱정된다면 어려운 한자말을 더욱 쉬운 우리말로 바꾸어 주어야 한다. 끊임없고 성실한 뒤침으로 하여 지난날의 생각과 삶의 모습들을 오늘날에 걸맞고 앞날에도 사라지지 않을 말들로 바꾸어 주어야 한다. 이것이 한자 세대가 뒷세대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섬김이요, 진지한 갈음안(대안)이다. 글쓴이의 아버님도 한글보다 한자 쓰기가 편하시고 강단에서 한자를 오래도록 가르치시는 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듯이 한자를 알면 중국사람과의 생각 주받기가 쉬우리라고 생각하셨다. 그러나 글쓴이의 긴 풀이말 끝에, 그리고 중국* 여행으로 하여 이제는 한자와 중국말*이 또렷이 다른 두 개의 말임을 깨닫고 계시다. (다듬은이: 한자*는 말이 아니라 글자임. 한자말*은 중국말*의 한국 사투리라고 할 수 있음.) 글쓴이도 아버님께 천자문을 배웠다. 또 열두 살 때부터 시킴에 따라 붓글씨를 배운답시고 팬티에 먹물도 발라 보았었다. 그러나 공부를 하면서 그것도 한자의 내림(내력)을 연구하는 문자학을 배우면서 한자 교육이 한국 사회에 얼마나 많은 해를 끼지고 있는가를 깨닫기 시작했다. 군대의 쓰이말들에서, 법률 조문들에서, 신문에서, 책 속에서 알지도 못하고 써대는 한자들 때문에 나의 벗들과 아우들이 얼마나 많은 문화적 갈등을 겪고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

  • 쓰이말: 용어 파랑집*에서는 언제나 높은 사람들이 만찬*을 하고 우리들은 그 모습을 티븨로 보면서 저녁밥*을 먹는다. 사실 중국말*에서 만찬*은: 거지나 높고 훌륭한 벼슬아치나 똑같이 때우는 저녁끼니*일 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글자 때문에 만찬도 다르게 해야 하는가? 사실 한자 교육을 우기는 많은 사람들의 경우 바로 이러한 만찬*의 거드름을 못내 아쉬워하기 때문이다.
  • 파랑집: 청와대 말수가 모자라던 시대에 쓰인 한자말들은 선문답들이다. 한자말들에 묻어 있는 사기성 짙은 신비한 느낌과 위엄을 즐기고 끌어쓰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주역*의 표현이며 한시*의 표현들이라고 해도 요즈음 말로 풀어보면 다 배고프면 먹고 먹다보면 똥누어야 한다는 속내들이다. 이것을 아는 사람만 알면서 한두 마디씩 권위스럽게 뱉어낸다. 문화의 끊김이 안타까워 한자를 가르친다고 해도 이것도 논리스럽지 않다. 옛날의 한자는 뜻 버렁이 넓어서 한 글자가 여러 뜻을 담고 있었다. 보기로 문(文) 같은 경우 '글월 문'의 뜻만을 전해 주지만 참일 이 글자는 십여 개의 뜻을 담거나 쓰이고 있다. '무늬, 약한 불, 이치, 외형, 외형적 의례' 따위의 여러 뜻을 지니고 있다. (글월)문* 따위의 조각 한자 천여 개 가르치면서 오묘한 뜻을 다 알아내라고 다그치고 있다. 그 보다는 차라리 한자 아는 사람들이 친절하고 깊이 있는 한글 뒤침월(번역문)을 만들어내는 것이 더욱 효과롭고 나중님(후배)이나 아이들을 위하는 길이다. 글쓴이의 한자에 대한 반대는 두루 교육에 대한 반대이다. 겨우 천여 개의 한자를 매겨서 외우도록 하는 것은 뜻없는 교육 짐지우기만을 더하는 일이다. 그러나 길속이(전문인)를 길러내고 그 길속이들이 오늘날과 앞날의 말로 지난날의 문화와 생각을 되풀어 내는 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뼈저림을 느낀다. 이러한 길속이들이 해야 할 책임을 온 사회에 '전통 문화의 계승' 따위의 이름을 달고 교육 짐지우기로 떠넘겨서는 안된다. 이번에는 중국말*의 중요성을 빌미로 한자가 한 자리를 얻어 보려는 논리에 대해서 한 마디 할 차례다. 홑지게 말해서 한자*는 중국말*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자를 익힌 뒤 중국말*을 배우겠다는 에돌아가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그런 번거로운 일을 하는가? 중국말*을 배우고 싶은 많은 동아리 모람들이여, 중국말*이 배우고 싶으면 중국말*을 배워라. 한자 옆에서 얼씬대지 말아라. 시간을 헛되이 쓰지 말라. 한자는 제할 구실이 따로 있다. 중국사람이 쓰는 간체자의 형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한자의 꼴과 너무도 다르다. 글쓴이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위해 간체자 연습 책자를 만들어 연습시키고 있다. 책자를 만들며 살펴낸 간체자에 대한 몇 가지를 참고로 내놓는다. 문자 꼴을 보자. 중국말* 간체자에는 약 189 개의 바탕 부수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자주 나타나는 부수는 136 개 인데 이들 가운데 한국의 한자와 꼴이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또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늘씀(상용) 간체자는 537 자인데 이것도 한자 먼저 익히고 들여다 봐서는 한두 글자의 비슷한 꼴도 찾아내기 힘들다. 이번에는 뜻을 보자. 오늘날 중국*에서 바탕스런 늘씀자(상용자)로 살려쓰고 있는 글자는 어림잡아 6000 여 자가 된다. 이들 늘씀 중국말* 한자 가운데서 한국이 쓰는 한자와 뜻이 똑같은 경우는 많지 않다. 눈으로 간체자를 익혔다 하더라도 이번에는 뜻이 다르다. "짜(家-가), 워(我-아), 라이(來-래)" 따위로 나머지는 뜻이 크게 다르다. 이번에는 소리를 보자. 이 책의 모든 중국말* 표기에서 보듯이 그 소리가 아주 다르다. 중국말*을 배우면서 한자를 거치지 말아야 하는 가장 큰 까닭은 바로 소리 때문이다. 한국의 딴나라말 교육이 낙제점을 받는 중요한 까닭 가운데 하나는 딴나라말을 눈에만 묶어 두는 데 있다. 이른바 글공부*의 유교스런 버릇이 깊이 남아 있는 게 바로 딴나라말을 가르치는 곳의 모습이다. 아메리카말 교육에서 그렇게 쓰라린 실패를 맛보고도 중국말*에서 또다시 눈으로 하는 글공부를 해대고 있다. 말본과 낱말은 쫘*해도 입은 젬병이다. 중국말*은 딴나라말이다. 소리다. 따라서 중국말*을 딴나라말로서 소리로 만나지 못하면 중국사람과의 생각 주받기는 할 수 없다. 서구의 카톨릭, 개신교 선교사들이 중국에 처음 들어오면서 중국말*을 익힐 때 그들은 로마 병음자로 중국말*을 익혔다. 글자는 나중에 익혔다. 왜!? 누리에 이름난 중국말* 언어학자가 있다. 스웨덴 사람으로 이름은 까오번한*(高本漢) 이다. 그의 언어학 이론은 중국 학자들도 끌어 쓰는 누리스런 권위자이다. 쉽게 보면 한자 잘 아는 우리 한국에서 누리스런 중국말* 학자가 나와야 제대로인 것 같다. 그런데 웬 난데없는 코 큰 학자인가? 까닭은 오직 하나이다. 그는 소리가 궁금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소리에 대해 캐고 캐고 또 캤다. 마침내 중국사람들도 여느 때 깨닫지 못하던 소리의 비밀을 캐냈고 빈틈없이 꼼꼼하게 논리롭게 정리해냈다. 이것이 중국말*을 잘 할 수 있는 비결이다. 중국말*을 한자와 같게 여기고 학생들에게도 그렇게 다가서게 하는 교수법들을 많이 본다. 위험 천만이다. 학생들을 말 못하게 하는, 책임 없음이다. 똥시*(東西-동서)는 방향과는 아무 이음고리 없는 물건*의 뜻이다. 또 사내의 거시기*를 뜻하는 소리이다. 또 하나 중국말*을 소리로 익혀야 하는 중요한 까닭이 있다. 다름 아닌 중문 셈틀 때문이다. 중국말* 몇 마디 하는 사람들도 중국말* 셈틀은 낯설다. 중국말*을 셈틀로 칠 수 있어? 정말? 물론 정말이고 참말이다. 오늘날 많지 않은 사람들이 중문 셈틀을 다루고 있다. 대학 안에서도 중문 셈틀을 다루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이제 영문과 학생 영타 치고 일문과 학생 일타 치듯이 중문과 학생은 중타를 배워야 한다. 지난날 손으로 서류들을 썼던 대기업들이 이제는 중문 셈틀을 쓰고 있다. 중문과 나온 이들의 회사 얼굴시험 때에 물음이 하나 더해질 것이다. "중문 셈틀을 다룰 줄 아나?" 중문 글틀의 무른모 가운데 가장 흔히 쓰이는 것은 타이완*이 개발한 이티*(ET) 씨스템과 중국이 마이크로소프트*의 워드*를 끌어다 만들어 낸 쫑원쯔싱* (中文之星-중문지성)이 있다. 그런데 이들 중문 셈틀의 글틀들은 모두 중국말* 소리를 알아야 쳐넣을 수 있다. 타이완*의 이티*가 창지에*(倉詰)이라는 글자를 필획으로 뜯어서 쳐넣는 방법을 만들어 놓았지만 배우기가 쉽지 않다. 또 중국에도 우비쯔싱* (五筆字形)이라는 쳐넣기 방법이 있었다. 글자를 필획으로 나누어 치는 방법이지만 이것도 배우기가 어려워 시나브로 사라져 가고 있다. 마지막엔 소리를 바탕으로 중문 셈틀을 다룰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제는 HANGUO(한궈) 라고 글쇠를 쳐야 韓國(한국)이라는 글자를 볼 수 있다. 중국에서 셈틀 쓰는 이들이 아주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따라서 틀림없는 푸통화*(普通話-보통화)를 부려쓰는 일은 앞으로 중국사람과의 홑진 생각 주받기뿐 아니라 셈틀에 쳐넣기와 자료 맞바꾸기에서도 반드시 써야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제는 무역*을 마오이*라고 배우지 않으면 다음 세대의 생각 주받기 줄에서 뒤처질 수 밖에 없다. 한자를 가르쳐서 중국사람과의 생각 주받기를 막힘없이 하겠다는 논리는 이제 겸허해져야 한다. 중국말*을 빌미로 한자 교육의 마땅함을 내세우는 모습은 바뀌어야 한다. 한자는 한자로서의 값어치가 있다. 그 값어치는 거리낌 없이 알아듣게 풀어 말하되 중국말*이 딴나라말임을 깨끗이 그럼(인정)해야 한다. 이제는 있는 현실을 똑바로 보고 바뀌어가는 앞날을 짐작해야 한다. 중국말*을 배우고자 하는 먼저님(선배), 벗, 나중님(후배)들이여! 한자를 배우지 말라. 딴나라말을 배워라. 소리를 배워라. 중국사람이 하는 딴나라말을 배워라. 한자는 머리 속에서 지워버려라. 한자를 익히면 중국말*을 빨리 배울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도 버려라. 소리로 들리지 않는 중국말*은 죽은 중국말*이다. 눈으로 하는 딴나라말 공부는 '이제 그만'이다.

김경일

중국인은 화가 날수록 웃는다

- 중국에선 한자 안 쓴다면서 -

한자와 중국어는 전혀 별개다.

중국이 우리 사회 속으로 파고들어 오고 있다. 너무도 여러 분야에 급속도로 파고들어 옴을 느낀다. 시장에서 야채를 파는 아주머니들도 중국 지명 한두개는 자연스레 꿰고 앉아 계시다. 중국산 농산물들 때문이다. 주변의 친지들을 만나거나 길거리에서 우연히 말벗을 삼아도 중국과 교수라는 것을 알면 질문도 많고 나름의 고견들도 많다

그런데 공통적인 착각이 하나 있다. 중국은 한자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인과 의사 소통을 하려면 먼저 한자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보편적인 오해는 사회 일각의 한자 애호가들에게는 목청을 돋울 절호의 찬스다 '국자(國字)'라는 표현을 서슴없이 하기도 한다.

일각에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한자 문화권, 한자 경제권 운운하면서 한자의 교육 강화를 주장하고 있다. 그나마 한자를 조금 접하고 있었고 조금이라도 교육이 되고 있다는 점이 다행이라는 어투다. 또 한자 교육이 약해져가고 있다며 조국의 장래를 연결해 장탄식을 해댄다.

필자는 궁극적으로는 한글 전용주의자다. 점진적인 한글전용주의자다. 언젠가는 한자가 모두 사라져버리기를 희망하고 애쓰는 사람이다.

중국어를 배우고 가르치고 쓰면서 한글 전용주의자라니 이 무슨 말같지 않은 소리냐는 반문이 없을 수 없다. 바로 그렇다. 필자는 중국어를 배우고 가르치고 쓸 뿐이다. 한자를 배우고 가르치고 쓰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한자의 보편적 교육을 반대한다. 또 한자와 중국어를 짬뽕으로 엮어서 한자 보급론을 펴는 묘한 논리를 반대한다.

먼저 한자 교육 자체의 반대론을 조금 펴본다.

정말로 한자 경제권이 두려운 존재이고 조국의 장래가 걱정된다면 한자 교육은 진정 다른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자라나는 후대 세대들에게 이미 미이라가 되어버린 언어를 강요할 필요는 없다. 문화의 단절이 정말 걱정된다면 어려운 한자어를 보다 평이하고 쉬운 우리의 표현들로 바꾸어 주어야 한다.

끊임없고 성실한 번역 작업을 통해 과거의 생각과 삶의 모습들을 현대에 걸맞고 미래에도 도태되지 않을 언어들로 바꾸어 주어야 한다. 이것이 한자 세대가 후대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봉사요, 진지한 대안이다.

필자의 아버님도 한글보다 한자 쓰시기가 편하시고 강단에서 한자를 오래도록 가르치시는 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듯이 한자를 알면 중국인과의 의사 소통이 훨씬 쉬우리라고 생각하셨다. 그러나 필자의 긴 설득(?) 끝에, 중국 여행을 통해 이제는 한자와 중국어가 전혀 다른 두 개의 언어임을 이해하고 계시다.

필자도 아버님께 천자문을 배웠다. 또 12살 때부터 명령에 의해 붓글씨 배운답시고 팬티에 먹물도 발라보았었다. 그러나 공부를 하면서 그것도 한자의 내력을 연구하는 문자학을 배우면서 한자 교육이 한국 사회에 얼마나 많은 폐해를 주고 있는가를 깨닫기 시작했다.

군대의 용어들에서, 법률 조문들에서, 신문에서, 책 속에서 알지도 못하고 써대는 한자들 때문에 나의 친구들과 동생들이 얼마나 많은 문화적 갈등을 겪고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

청와대에서는 언제나 높은 사람들이 '만찬'을 하고 우리들은 그 모습을 TV로 보면서 '저녁밥'을 먹는다. 사실 중국어에서 '만찬'은 거지도 고관 대작도 같이 때우는 '저녁밥'일 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글자 때문에 반찬도 다르게 해야 하는가? 사실 한자 교육을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의 경우 바로 이러한 '만찬'의 거드름을 못내 아쉬워하기 때문이다.

어휘가 부족한 시대에 쓰여진 한자 표현들은 일종의 선문답들이다. 한자 표현들에 묻어 있는 사기성 농후한 신비감과 위엄을 즐기고 이용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주역의 표현이며 한시의 표현들이라고 해도 현대어를 풀어보면 다 배고프면 먹고 먹다보면 똥누어야 한다는 내용들이다. 이것을 아는 사람만 알면서 한두마디씩 권위적으로 뱉어낸다.

설사 문화의 단절이 안타까워 한자 교육을 시킨다고 해도 이 역시 비논리적이다. 고대의 한자는 의미 영역이 넓어서 한 글자가 다양한 의미를 포항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서 '문(文)'같은 경우 '글월 문'의 의미만을 전수하지만 사실 이 글자는 십여 개의 의미를 포함하거나 전용되고 있다. '무늬', '약한 불', '이치', '외형', '외형적 의례' 등의 다양한 뜻읏 지니고 있다.

'글월 문(文)' 따위의 조각 한자 천여 개 가르치면서 오묘한 뜻을 다 알아내라고 다그치고 있다. 그보다는 차라리 한자 아는 사람들이 친절하고 깊이있는 한글 번역문을 만들어내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고 후배, 자녀들을 위하는 길이다.

필자의 한자에 대한 반대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교육에 대한 반대이다. 불과 천여 개의 한자를 정해서 외우도록 하는 것은 의미없는 교육 부담만을 증가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전문인을 양성하고 그 전문이들이 현재와 미래의 언어로 과거의 문화와 사고를 재해석하는 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절심함을 느낀다. 이러한 전문인들이 해야 할 책임을 사회 전반에 전통 문화의 계승 등의 이름을 달고 교육적 부담으로 전가시켜서는 안된다.

이번에는 중국어의 중요성을 빌미로 한자가 한자리를 얻어 보려는 논리에 대해서 한마디 할 차례다.

간단히 말해서 한자는 중국어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자를 익힌 후 중국어를 배우겠다는 우회의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그런 번거로운 일을 하는가?

중국어를 배우고 싶은 많은 동호인들이여, 중국어가 배우고 싶으면 중국어를 배워라. 한자 옆에서 얼씬대지 말아라. 시간 낭비 하지 말아라. 한자는 한자의 역할이 따로 있다.

중국인이 쓰는 간체자의 형태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한자의 꼴과 너무도 다르다. 필자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위해 간체자 연습책자를 만들어 연습시키고 있다. 책자를 만들며 조사한 간체자에 대한 몇 가지 사항을 참고로 제시한다.

문자 형태를 보자 중국어 간체자에는 약 189개의 기본 부수가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보편적으로 등장하는 부수는 136개인데 이들 중 한국의 한자와 모양이 동일한 것은 하나도 없다. 또 가장 흔하게 등장하는 상용 간체자는 537자가 있는데 이 역시 한자 먼저 익히고 들여다 봐서는 한두 글자의 비슷한 꼴도 찾아내기 힘들다.

이번에는 뜻을 보자. 현재 중국에서 기본적인 상용자로 활용하고 있는 글자는 약 6000여 자가 된다. 이들 상용 중국어 한자 중에서 한국이 사용하는 한자와 뜻이 똑같은 경우는 많지 않다. 설사 눈으로 간체자를 익혔다 하더라도 이번에는 뜻이 다르다. "짜(家-가)", "워(我-아)", "라이(來-래)" 등등으로 나머지는 의미 차이가 크다.

이번에는 음을 보자. 이 책의 모든 중국어 표기에서 보듯이 그 발음이 전혀 다른다. 중국어를 배우면서 한자를 거치지 말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발음 때문이다.

한국의 외국어 교육이 낙제점을 받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외국어를 시각에만 묶어두는 데 있다. 이른바 '글공부'의 유교적 유습이 강하게 남아 있는 게 바로 외국어 교육 현장이다. 영어교육에서 그렇게 쓰라린 실패를 맛보고도 중국어에서 또 다시 시각적인 글공부를 해대고 있다. 문법과 단어는 '쫘'해도 입은 젬병이다.

중국어는 외국어다. 소리다.

따라서 중국어를 외국어로 보고 소리로 만나지 못하면 중국인과의 의사소통은 불가능이다. 서구의 천주교, 기독교 선교사들이 중국에 처음 들어오면서 중국어를 익힐 때 그들은 로마 병음자로 중국어를 익혔다. 글자는 나중에 익혔다. 왜!?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국어 언어학자가 있다. 스웨덴인으로 이름은 까오번한(高本漢-고본한)이다. 그의 언어학 이론은 중국의 학자들도 인용하는 세계적인 권위자다. 기본학적으로 보면 한자 잘아는 우리 한국에서 세계적인 중국어 학자가 나와야 정상인 것 같다. 그런데 웬 난데없는 코 큰 학자인가?

이유는 단 하나다. 그는 소리가 궁금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소리에 대해 캐고 캐고 또 캤다. 마침내 중국인들도 평소에 깨닫지 못하던 소리의 비밀을 캐냈고 치밀하게 논리적으로 정리해냈다. 이것이 중국어를 잘 할 수 있는 비결이다.

중국어를 한자와 동일시하고 학생들에게도 그렇게 접근시키는 교수법들을 많이 본다. 위험 천만이다. 학생들을 말 못하게 하는 무책임이다. "똥시(東西-동서)"는 방향과는 전혀 상관없는 '물건'의 뜻이다. 또 사내의 '거시기'를 뜻하는 소리이다.

또 하나 중국어를 소리로 익혀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다름아닌 중문 컴퓨터 때문이다. 중국어 몇 마디 하는 사람들도 중국어 컴퓨터는 낯설다. 중국어를 컴퓨터로 칠 수 있어? 정말? 물론 정말이고 참말이다.

현재 많지 않는 사람들이 중문 컴퓨터를 다루고 있다. 대학 내에서도 중문 컴퓨터를 다루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이제 영문과 학생 영타 치고 일문과 학생 일타 치듯이 중문과 학생은 중타를 배워야 한다. 과거 손으로 서류들을 썼던 대기업들이 이제는 중문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다.

중문과 출신들 입사 면접 때에 질문이 하나 추가될 것이다.

"중문 컴퓨터 다룰 줄 아나?"

중문 워드의 소프트웨어 중 가장 보편적인 것은 타이완이 개발한 ET 시스템과 중국이 마이크로소프트 WORD를 이용하여 개발한 "쫑원쯔싱(中文之星-중문지성)"이 있다. 그런데 이들 중문 컴퓨터의 워드프로세스들은 모두 중국어 발음을 알아야 입력이 가능하다.

타이완의 ET가 "창지에(倉詰-창힐)"라는 글자를 필획으로 뜯어서 입력하는 방법을 개발했지만 배우기가 쉽지 않다. 또 중국에도 "우비쯔싱(五筆字形-오필자형)"이라는 입력방법이 있었다. 글자를 필획으로 나누어 치는 방법이지만 이 역시 배우기가 어려워 점차 도태되어 가고 있다.

결국 발음을 근거로 중문 컴퓨터를 다룰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제는 "HANGUO (한궈)"라고 키보드를 쳐야 "한국(韓國)"이라는 글자를 볼 수 있다. 중국에서의 컴퓨터 보급률은 급속도로 높아지고 있다. 따라서 정확한 "푸통화(普通話-보통화)"의 구사는 앞으로 중국인과의 단순 의사소통뿐 아니라 컴퓨터를 통한 입력과 자료 교환에서도 필수의 것이 될 것이다. 이제는 "무역(貿易)"을 "마오이"라고 배우지 않으면 차세대의 의사 소통 대열에서 낙오될 수밖에 없다.

한자를 가르쳐서 중국인과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겠다는 논리는 이제 겸허해져야 한다. 중국어를 빌미로 한자 교육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자세는 바뀌어야 한다. 한자는 한자로서의 가치가 있다. 그 가치는 당당하게 설득하되 중국어가 외국어임을 깨끗이 인정해야 한다. 이제는 존재하는 현실을 직시하고 변화하는 미래를 예측해야 한다.

중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선배, 친구, 후배들이여! 한자를 배우지 말라. 외국어를 배워라. 소리를 배워라. 중국인이 하는 외국어를 배워라. 한자는 머리 속에서 지워버려라. 한자를 익히면 중국어를 빨리 배울 수 있다는 착각도 버려라. 소리로 들리지 않는 중국어는 죽은 중국어다.

눈으로 하는 외국어 공부는 이제 그만 '스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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