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레시브 록의 비평적 수용

(프로그레시브 락의 비평적 수용에서 넘어옴)

1 #[ | ]

8. 프로그레시브 락의 비평적 수용(The Critical Reception of Progressive Rock)

translated by Kim Seong Woo, libero (mailto:swkim@gaia.kaist.ac.kr)

ELP에 대해 "이 사람들은 전범들임에 틀림없다." 라고 말한 Lester Bangs [원주 1] 처럼 모든 락 비평가들이 프로그레시브 락에 대하여 가차없이 반 응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유형의 비난은 자주 주요 밴드들에게 퍼 부어져서, 본 연구에서 지금까지 단지 간접적으로만 다루어졌던 문제: 프로 그레시브 락의 비평적 수용 을 이 시점에서 이야기할 만하다. 그러나, 이 주제를 적절히 시작하기 위해, 락 저널리즘 역사의 짧은 개요가 필요하다.

1960년대 중반 이전에는, 팝 음악 저널들이 레코드 회사들의 후원 아래 발간된 본래 팬진(fanzine)들이었다. 이들 잡지들은 콘써트와 레코드 발매 날짜들을 싣고, 최근 챠트 순위들을 보이고, 특집 기사들, 즉 눈색깔과 기 호 음식과 같은 세부항목들을 포함한 최근 챠트의 센세이션들의 보통 짧은 바이오그래피들을 찍어냈다. 하지만, 1960년대의 반항문화의 출현은 전통적 인 오락산업의 가치들을 솔직담백하게 경멸했던 일단의 독자들을 만들었다.
그들은 저널들이 다루어진 음악의 역사적, 문화적인 전망을 제공하고, 비판 적인 태도들과 기준들을 개발하고, 그 음악을 반항문화의 이데올로기적인 투쟁들과 함께 결부되어지길 바랬다. 그 결과로, 1960년대 후반은 (1967년 설립된) Rolling Stone, Crawdaddy, Creem과 같은 미국 출판물들과 영국의 Zig-Zag를 포함해서, 싸이키델릭 음악과 히피 생활에 바친 언더그라운드 출 판의 출현을 맞이했다. 반항문화 이전 시대의 잉글랜드의 두 유력한 팝 음 악 저널들인 New Music Express와 Melody Maker도 또한 이 시기에 언더그라 운드 저널들의 많은 측면들을 적용했다.

락 저널리스트들은 1966-1970년 시기의 주요한 모습들을 거의 일정한 관 점으로 다루는 경향이었다. 무엇이 "좋은" 음악을 형성하는지에 관해 저널 리스트들과 청중들 사이의 일반적인 여론이 있었다. Beatles와 Bob Dylan은 자신들의 시기에 반 전설적인 인물들이 되었다.;반신(半神) 지위 아래 단계 이나, 여전히 높이 존중된 이들은 Rolling Stones, Who, Yardbirds, Cream, Hendrix, Procol Harum, Doors, 그리고 Jefferson Airplane이었다. 락 비평 가들과 락 청중들이 각각 개개의 길을 갔던 것은, 거의 통일된 젊은 반항 문화의 1970년 이후의 파편화(fragmentation)와 뒤따른 몇몇 구별된 락 스 타일들의 출현과 함께였다. 헤비 메탈은 그 비평가들이 싫어한 새로운 쟝르 들 중 하나였다; 프로그레시브 락은 또다른 하나였다.

본 연구에서 일찌기 지적했듯이, 비평가들을 화나게 한 프로그레시브 락 에서의 "예술을 위한 예술"의 유력한 요인이 항상 있었다. 이런 경향은 수 많은 방법들그 스타일의 기교에 대한 빈번한 인기, 그것의 절충주의와 다 른 형식상의 근원들을 섞는 데서의 기쁨, 그리고 고급 문화의 음악에 대한 참조들에서 명백해졌다. 영국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들에 의한 고전 음악 의 잦은 편곡과 인용들보다 더 분명하게 과거의 고급 문화에 매료된 곳은 없다. 특히, 밴드 ELP는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심포닉 음악의 전자적인 재해석으로 유명하게(또는 관점에 따라, 악명높게) 되었다. 이 그룹에 의한 한 전체 LP, 전람회의 그림 Pictures at an Exhibition은 Musorgsky의 1874 년의 잘 알려진 피아노곡(나중에 Maurice Ravel에 의해 관현악화된)의 전자 적인 재해석에 바쳐졌다. 그 밴드의 데뷰 앨범은 "The Barbarian"과 "Knife -Edge"로 각각 다시 이름붙여진 Bartok의 Allegro Barbaro와 Janacek의 Sinfonietta 5악장의 편곡들을 담고 있다. 나중 앨범들은 Aaron Copland (Hoedown과 Fanfare for the Common Man), Albert Ginastera (이 밴드에 의 해 "Toccata"라고 다시 이름붙여진 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의 4악장), 그리 고 Joaquin Rodrigo의 "Canario" (그의 Fantasia para un gentilhombre로 부터)에 의한 적품들의 편곡들을 담고 있다. 그 밴드의 고전 음악 편곡의 강조는 양날면을 가진 검과 같은 것이었다:많은 (항상 호의적인 것은 아닌)
비판적 관심을 끌었을지라도, 그것은 또한 그들의 더욱 순수하게 창조적인 고유의 작품으로부터 벗어난 주목을 끄는 데 쓸모있을 뿐이었다.

다른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들은 더욱 인색하게 고전 음악으로부터 편곡하 거나 인용하였다. Yes는 그들의 콘써트를 Stravinsky의 불새(Firebird)로부 터의 발췌로부터 시작했다. King Crimson의 첫번째 화신은 Holst의 "Mars"
(The Planets로부터)를 연주했고, 반면 Electric Light Orchestra는 Grieg 의 "In the Hall of the Mountain King"(Peer Gynt로부터)을 편곡했다.
Jethro Tull의 "Bouree"는 Egg의 "Fugue in D minor"(유명한 오르간을 위한 D 단조의 토카타와 푸가로부터 끌어낸)와 Procol Harum의 "A Whiter Shade of Pale"의 주 선율의 악상[원주 2]과 마찬가지로 J.S. Bach에 의한 곡에 기초했다. 많은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들은 고급 문화를 대중들로 가져오는 역할을 스스로 분명히 겪었고, 이러한 일을 거의 선교적인 열의로 다가갔다.
그러므로 ELP의 Carl Palmer는 분개한 Lester Bangs에게 "우리는 아이들에 게 보다 양질의 음악을 듣도록 장려하기를 조금은 바란다."라고 말했다.[원 주 3] Gentle Giant의 Acquiring the Taste LP의 라이너 노트는 청취자에게 "매우 인기없을 위험을 무릅쓰고 동시대의 대중 음악의 경계 영역을 확장시 키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처음부터 우리는 천박한 상업주의에 관한 모든 선입견들을 포기했다. 대신, 우리는 훨씬 더 실질적이고 충족시키는 것을 당신에게 주기를 바란다."[원주 4] 비슷하게, Jethro Tull의 직접 쓰여진 그들의 앨범 Thich as a Brick에 대한 리뷰는 "그러나 전체적으로 생각하면 이것은 우수한 음반이고, 그 저속함과 때때로 노골적으로 외설스럽게 유도 된 시시함으로부터 탈출하려고 시도하는 현재의 팝 씬의 좋은 예이다."라고 해설한다.[원주 5]

많은 락 비평가들, 특히 Rolling Stone과 Creem에 관련된 이들에게는, 프 로그레시브 락의 미학적 입장은 파문/저주받은 것(anathema)이었고, 순전히 이교(異敎)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비평가들은 프로그레시브 락의 고전적인 전통의 사용이 아무튼 "대중 음악의 경계를 넓혔거나", 팝 씬이 "그 저속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했거나, 혹은 "아이들에게 보 다 양질의 음악을 듣도록 장려했다"는 넌지시 비춤에 대해 분개했다. 그들 은 이런 관점을 엘리트주의이고 락의 대중주의적인 근원들에 대한 배신이라 고 알았다. 필자는 "고전적인" 영향들을 팝 음악으로 끌어오는 것이 "더욱 질높은" 음악에 반드시 기여한다고 믿지 않는 만큼, Palmer,Gentle Giant, 혹은 Jethro Tull에 의해 표현된 관점을 반드시 방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또한 필자는 고급 문화에 대한 그런 참조들이 필연적으로 팝 음악 을 더욱 "비진실적(inauthentic)"이거나 "헛된(sterile)" 것으로 반드시 이 끌지는 않을 거라고 믿는다. 더구나, 과거의 프로그레시브 락의 평가들에서 이와 같은 비평에 대해 지나치게 너무 많이 강조되었다. 우리가 이미 보았 듯이, 프로그레시브 락 뮤지션들은 심포닉 음악과 성공회/카톨릭 합창 전통 을 끌어왔다. 그것은 중류층 유럽인들로서 그것이 그들의 문화적 유산 중 일부분들이었고,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완전하게 의미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Jim Curtis가 주지했듯이, "60년대에 주요 영국 그룹들은 미국 대중 음악을 놀랄만한 결과들로 적용했으나, 그런 적용들은 단지 어느 정도 만 지속할 수 있었다. Stones의 흑인 블루스의 무서운 융합을 반복할 수 있었던 그룹은 없었고, 또 필요했던 그룹도 없었다." 는 것이다.[원주 6] 많은 프로그레시브 락 뮤지션들은 결코 그들 음악의 "고전적인" 요소들에 일부러 주목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많은 비평가들에 의해 가장 거만한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로 간주되는 ELP도 그들의 첫번째 앨범에서 두 곡은 Bartok과 Janacek의 작품들로부터 얻은 소재에 기초했다고 적는 데에는 그 작곡가들의 상속인들로부터 제기된 소송이 그렇게 하도록 강요할 때까지 신경쓰지 않았다.[원주 7]

비평가들은, 고급 문화에 대한 매력은 프로그레시브 락에 "우수함 (superiority)"를 빌려 주었다는 인지된 암시를 싫어한 것 외에도, 그 스타 일의 절충주의와 고전 음악과 관련된 악기/장치들의 사용이 리듬앤블루스에 서의 락의 뿌리들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졌다고 주장했다. Dave Marsh는 전 체적인 20세기 대중 음악의 실체를 말함에 있어서,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정말로 가장자리에 가까운 것은, 비평적인 토론을 지배하지만, 위대한 앨범 들과 히트 싱글들을 거의 만들어내지 못한 프로그레시브 락이다...[프]로그 레시브 락 싸운드는 락앤롤의 주근(主根 taproot):리듬앤블루스로부터 아주 철저히 유리되었기 때문에 내게는 신선하지 않다."[원주 8] Lester Bangs는 Creem을 위한 ELP에 대한 신랄한 기사에서 그 밴드를 그가 가장 큰 "범죄"
라고 생각한 것:"무엇보다도 락에서의 저속한 순수였던 음흉한 더러움"으로 비난했다.[원주 9] 심지어, 그 스타일의 기악 음악에의 막대한 의존은 커다 란 의심을 가진 채로 보여졌다: Robert Christgau는 Robert Fripp은 "락의 맥락에서 기악 작곡에 대한 비실제적인 재능이 있더라도 희박하다"라고 깔 보는 듯이 이야기한다.[원주 10]

비평가들이 프로그레시브 락의 음악적인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또 한 그들은 그것의 서사시적인 주제, 쪼개어지고 초현실적인 가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러니와 자아 의식적인 히피성(hipness)의 결핍에 대한 멸시 감을 표명하면서, 프로그레시브 락의 개념적인 내용을 싫어했다. 예를 들면, Robert Christgau가 King Crimson의 Lizard LP에 대해 최소한 좋아했던 것 은, Gordon Haskell이나 (잡초로부터 멀리 떨어진) Jon Anderson이 빈정거 림을 받을 만한 Pete Sinfield의 지나치게 장식된 가사들을 전달하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원주 11]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도록 하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 그런 락 비평가들 은 자신들로 하여금 대중주의자(populist)들의 배역을 맡는다는 것이 분명 하다. Bill Bruford는 Yes의 1971년 Fragile LP에 대한 비평가들의 공격을 토론하면서, 그 비평가들은 "능란한 학교 교육을 받은 뮤지션들을 미심쩍어 하며... 이런 음악은 그들이 좋아하는 3코드 포크 음악을 훔치고 그것을 고 급 예술(High Art)로 바꿀려는 시도를 암시한다고 느꼈다"고 언급했다.[원 주 12] 분명히, 그 비평가들은 "좋은" 음악은 1950년대 중반기부터 1960년 대 후반기를 통한 락의 "황금 시대"의 유산에 빈틈없이 따랐던 음악이었다 고 느꼈다. 그런 음악은 기악이 아닌 주로 보컬이어야만 한다. 그것은 기술 적으로 단순하고 R&B 전통과 명확한 유대관계를 유지해야만 한다. 무엇보다 도, 그것은 긴, 확장된 악곡과 앨범 단위를 강조하기보다는 짧은 노래들과 싱글들에 집중하여야만 한다.

더구나, 비평가들의 판단에서의 "좋은" 음악은 스스로 너무 진지하게 취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상적으로, 그것은 스스로를 위해 듣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음악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댄스 음악일 것이다. 전자의 범주로 들 어갔으면, 그 가사는 락의 과거를 인정하고 어느 정도의 자아 의식적인 아 이러니를 보이도록 기대되었다. Will Straw는 "Bruce Springsteen, Emmylou Harris, 그리고 Tome Waits와 같은 가수들, 락앤롤 이미지를 가지고 자아 의식적으로 연주했던 Lou Reed와 같은 연주자들을 위한 지속적인 높은 경의 감은 이 시기(즉, 1970년대 초기부터 중반까지)의 Rolling Stone을 다시 읽음으로써 드러난다"고 썼다.[원주 13] 형이상학과 씨름하고 복잡한 이야 기들(narratives)을 장황하게 말하였던, 프로그레시브 락 가사들은 "잘난체"
하고 "지나치게 진지한" 것으로 생각되어졌고, 비꼬는 감이 부족하다고 비 난받았다. 사실, 거의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비평가들이 의미했던 것은 프로 그레시브 락의 가사들이 락(또는 적어도 이상화된 형태)이 적절하게 이야기 할 수 없었던 주제를 다뤘다는 것이다. Dave Marsh가 말한 바와 같이, 이런 류의 화제와 씨름하길 원하는 청취자들은 "고전(또는 어쨋든 '진지한') 음 악을 듣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다.[원주 14]

1954-1964년 시대의 락 음악에 익숙한 사람은 음악적 구성법(syntax)과 소재가 제한되고, 무한히 개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더구나, 1960년대 후반의 혼란 속에 살았던 뮤지션들이 반항문화 이전의 록커들이 한 것과 같은 순수하고 태평스러운 태도를 그들의 음악을 향해 가진다는 것을 기대 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Dave Marsh와 같은 비평가 들의 "대중주의" 신조(信條, credo)는 락이 리듬앤블루스로부터의 직접적인 정통적인 혈통을 보일 때, 가장 타당하다는 주장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Allan Moore는 그의 Rock: The Primary Text의 극히 알아채기 힘 든 부분에서 블루스 전통에 관한 비평가들의 가정들그리고 그 전통으로부 터 파생된 기준에 기초하여 다른 음악의 상대적 가치를 재려는 시도들이 심각한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논증했다. 이미 서술한 바와 같이, Marsh/Frith/Bangs/Christgau 스쿨이 프로그레시브 락에 대해 가졌던 주요한 문제들 중 하나는 "흑인" 영향의 상대적인 결핍이었다.
Moore가 올바르게 지적한 바와 같이, 흑인 음악은 백인 음악이 아닌 식으로 "진실"하고 "자연적"이다: "그것 [Marsh와 그와 견줄만한 사람들의 비평적 입장]은 미합중국 남부에서의 흑인들은, 그들이 음악을 통해서 어떤 음악 '이론'의 간섭 없이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표현했던, 지각없는 원시적인 상태로 살았다는 가정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자연적'이고 '비중개적인'
흑인의 리듬감이다."[원주 15] 누군가 언급하기를 조심할(그 스타일이 논증 할 수 있고 되풀이되는 원리들의 집합에 의해 지배되므로) 어떠한 고전적인 스타일만큼 블루스가 '이론적'이라고 지적한 후, Moore는 계속 주목하기를,

"낡아빠진 상태(mouldy fig)"의 태도는 항상 살아 있다. Small(1987)은 흑인 음악의 가치를 그것이 자발적이고, 즉각적이고, "자연에 밀접"하기 때문에 생기는 체제 전복적인 본성에 두려고 한다. Frith는 아마도 백인 음악이 "생각되어진" 것이기 쉽고 그러므로 흑인은 생각할 수 없다는 것 을 암시하면서 흑인음악을 "느껴지는" 것으로 위험스럽게 얘기한다. 심지 어 더 최근에는 Wicke가 블루스는 "진정한 경험의 순수한 표현"이었다고 주장했다.[원주 16]

Moore의 분석으로부터 가장 집요하게 나타난 것은 블루스 전통과 확실성에 대한 비평가들의 방정식은 일련의 지나치게 단순화한 가정들에 의해 본질적 으로 금가게 되므로 프로그레시브 락과 같은 스타일들을 "부자연스럽고", "불확실하다는" 비판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프로그레시브 락에 대한 비평가들의 혐오 뒤에 있는 강한 근본 요소는 국 한된 단호함으로부터 유래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960 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 고전 음악, Jazz 그리고 락 음악들이 새로운 거 대 스타일로 흘러들려고 했던 지류들이었다는 많은 기대가 있었다. 예를 들 면, David Ernst는 말하기를

큰 악곡 구조를 창조하려는 [프로그레시브 락과 재즈락 연주자들의 욕구 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이들 연주자들의 음악적인 훈련에 기인한다.
Stockhausen의 범세계적인 음악에 대한 이상의 실현으로의 또다른 단계로 생각할 수 있다. 모든 음악 스타일들은 하나의 체제로 점차 혼합되고 있 었고, 그 결과로 고전음악, 재즈, 락과 포크로의 음악의 분류는 중요성을 잃기 시작했다.[원주 17]

고전적인 함의(含意)와 함께 새로운 스타일로 변형하는 락의 전망은 고급 문화와 두려운 부르조아와 관련된 요소들을 끌어냄으로써 그들이 사랑하는 저급 문화 스타일의 "진실성(authenticity)"을 위태롭게 할 것이므로, 분명 히 비평가들을 거북하게 했을 것이다. 물론, 필자는 이미 비평가들의 "진실 성"의 개념에 대한 대단히 의심스러운 본질을 주목했다; 더구나, 그들의 입 장은 랙타임과 재즈와 같은 이전의 아프리칸-아메리칸 스타일들이 고급문화 /저급문화 융합의 결과로부터 일어났다는 정도의 역사적 인식을 거의 보여 주지 않았다.[원주 18]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평가들은 어떠한 종류의 퓨전 시도이든지 일부러 자주 공격하였다: Lester Bangs가 말했듯이, "클래시컬- 락(재즈와 교대로) 퓨전들이 결코 정말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라는 것이다.[원주 19] 하지만, 비평가들이 당황하도록, 많은 뮤지션들과 청취 대중의 커다란 부분이 (어쨋든, 1970년대 후반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의견이 달랐다.

락 비평가들의 프로그레시브 락에 대한 혐오는 그것이 "대중주의적"(그러 므로, 반-고급문화)인 입장에 기초했을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반-유럽적 이었다는 점에서, 또한 국한된 단호함을 보여주었다. 영국 연주자들은 단지 그들이 미국 연주자들에 의해 확립된 관례를 굳게 지키기 때문에 존경받았 다. 유럽 뮤지션들이 아주 많은 분명히 유럽적인 음악 관습들을 적용시키기 시작했을 때, 비평가들은 파울이라고 외쳤다. 유렵 연주자들은 미국인 상대 자들보다 더욱 냉정하고 인정미가 덜하다는 것은 상습적인 비난이었다:그러 므로, Robert Christgau는 King Crimson의 라이브 앨범 USA에 대해 "일어난 흥분은 Little Richard보다는 더 Wagner적이다이 레코드는 영국 헤비 메 탈의 유럽적인 것에 대한 사례 연구이다." 라고 말했다.[원주 20] 확실히, 비평가들의 반-유럽적이고 반-고급 문화적인 경향들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Will Straw와 특히 Deena Weinstein이 지적했듯이, 이들 비평가 들의 "대중주의적"인 입장은 종종 오히려 위선적이다.[원주 21] 프로그레 시브 락이 너무 복잡하고, 너무 웅장하고, 너무 야심적이고, 너무 예술을 위한 예술과 관련되었다면, 헤비 메탈확실히 락의 대중주의적인 성향이 있다면 하나였던은 비평가들의 칭찬을 받았을 것이라고 누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비평가들은 헤비 메탈을 종종 비논리적으로 그들의 주장을 바꾸어 가면서, 프로그레시브 락을 공격한 것과 같이 맹렬히 공격했 다. 원조격인 영국 헤비 메탈 밴드 Black Sabbath는 한 비평가에 의해 "락 밴드 장비를 우연히 발견한 네 크로마뇽 수렵인들의 궤변"으로 묘사되었다.
[원주 22] 다른 비평가는 "앞에는 다림질된 만화책 아마겟돈 그림의 싸고 아주 큰 티셔츠를 입은 늘어진 턱(slack-jawed), 양털머리(alpaca-haired), 부드러운 콧수염(downy-mustachioed)의 저능아(imbecile)들을 위해 긴 장화 와 크롬 가죽을 입은 늘어진 턱, 양털머리, 둥근 뿌리 모양으로 봉합된 (bulbous-inseamed) 저능아들에 의해 만들어진 음악"으로 헤비 메탈을 묘사 했다.[원주 23] 어떤 이는 이러한 비평에서 프로그레시브 락이 비판받았던 대중주의적인 입장의 완전한 포기를 주목한다. Jim Curtis가 주지했듯이, "아트 락처럼, 헤비 메탈은 비평가들을 자주 화나게 했다. 그들은 아트 락 은 너무 잘난 체했으나, 헤비 메탈은 너무 자만하지 않았다고 흔히 생각했 다."는 것이다.[원주 24] 대중주의는 비평가들이 프로그레시브 락을 두들겼 던 클럽이었던 반면, 같은 비평가들의 헤비 메탈에 대한 비평은 그들의 "대 중주의"가 특별히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밝혀준다; 그 스타일에 대한 그들의 혐오를 위한 더 깊은 이유들이 있었다.

확실히, 표면적으로는 매우 다르게 보이는 헤비 메탈과 프로그레시브 락 이 공유한 특징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 나을런지도 모른다;필자는 그 대답이 두 스타일 모두 직접적인 정치적 행위에는 무관심그리고 흔히 불신감을 보인다는 것이라고 제안할 것이다. 이미 논의했듯이, 헤비 메탈은 반항문화 적인 가치들의 디오니소스적인 범위세속적인 즐거움의 추구를 삶의 문제 들에 대한 해답으로 보는를 나타내며, 반면에 프로그레시브 락은 내적 정 신의 추구와 어떤 류의 더 깊은 형이상학적인 진실에의 탐구를 강조하면서, 반항문화적인 가치들의 아폴론적인 범위를 보여준다. 어느 스타일도 직접적 인 정치적 행위에 많은 현상금을 걸지 않는다. 그들의 마약 사용의 결과로, 많은 히피들은 물질적인 세계는 근본적으로 비현실적이고, 정치적 혁명을 통한 이러한 바깥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들은 궁극적으로 쓸모없다고 믿 었다. 그러나, 락 비평가들은 두 스타일들을 도피주의적이며 무(無)사교적 (asocial)인 것으로 보았다; 1990년대의 개념을 1970년대로 되돌려 겹쳐 놓 으면, 프로그레시브 락도 헤비 메탈도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는 않았다.[원주 25] 비평가들이 단언한, 락의 역할은 "올바른 분노를 이성적인 정치적 행위 로 보내는 것"에 있었다.[원주 26] Deena Weinstein은 "락 비평주의는 단지 유일한 방법:세상을 뒤흔들 능력, 또는 어쨋든 그런 소망으로 음악의 의미 를 항상 정의했다."[원주 27]

물론, 4장에서 지적했듯이, 프로그레시브 락은 어떤 깊이 꿰뚫는 산업 사 회의 종교적/인문학적인 비평들을 가진다. 이런 많은 것들이 다소 간접적으 로, 초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 안에 있는 것처럼 표현되었지만, 적어도 어떤 것들(즉, 후기 Pink Floyd)은 아주 직설적이다. 그러나, 프로그레시브 락에 가장 피상적으로 정통하다는 것보다 더한 것을 얻으려는 어떤 진정한 시도들을 행한 주요한 비평가들이 별로 없으므로, 그 쟝르에 대한 그들의 깔아 뭉개는 감상은 "도피주의적"이라는 것이었고, 그들이 음악적인 근거에 서 프로그레시브 락을 공격할 때, 감지된 비정치적인 본성을 종종 실제로 공격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Simon Frith는 "디스코가 프로그레시 브 락보다 훨씬 더 풍부한 음악 쟝르이다"라는 상당히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장을 한다.[원주 28] 무슨 근거로? 화성적이고 주제적인 다양성 또는 구 조적이고 박자적인 관심에 관하여 프로그레시브 락보다 디스코가 더욱 풍부 한 음악 쟝르라는 것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지 알기는 매우 어렵다. Frith는 이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를 제공하지 않으며, 심지어 그러 한 주장이 삼을지도 모르는 근거의 기준을 제시할 수도 없는 것 같다.[원주 29]

그러면, 어떤 이는 왜 Frith가 프로그레시브 락에 반한 상대적인 가치(또 는 그것에 대해서 부족)를 측정하기 위한 스타일로서 특별히 디스코를 택했 는지를 물을 것이다. 필자는 디스코가 정치적으로 불리한 이들과 관련된 스 타일이라는 이유를 제시할 것이다; Robert Fripp은 그것을 "발로 투표하는 정치적 운동. 그것은 두 불리한 조건을 가진 공동체들...게이들과 흑인들의 표현으로서 발생했다."라고 불렀다.[원주 30] 그래서 "좋은" 음악을 동일함 (one and the same)이라는 사회적 억압에 반항하는 음악이라고 보는 Frith 와 같은 락 비평가에게는 디스코는 과연 "프로그레시브 락보다 더욱 풍부한 음악적 쟝르"이다.

하지만, Frith 스스로 음악의 가치를 평가할 두가지 방법이 있다고 인정 했다: 창조자의 의도 혹은 기술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그 음악의 효과와 청중 과의 관계를 위하여 음악을 가치화하는" 반문화적인 응답을 사용할 수 있다.
혹은 "음악의 가치는 그 기술과 '텍스트' 자체의 복잡함에 있다는 문화주의 적인 접근법"을 취할른지도 모른다.[원주 31] 필자는 1970년대 후반기 동안, 음표들이 특정한 사회 공동체들에서 펼쳐질 때에만 단지 의미를 가진다는 것에 중점을 둔 Frith의 급진적인 "반문화주의"가 전통적인 음악학의 똑같 이 급진적인 실증주의(positivism)에 대한 유용한 해독제였다고 충분히 확 신하고 있다. 하지만, "문화주의적" 입장에 대한 Frith의 전적인 해고는 부 분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로부터 생겨난 것 같다고 지적하는 것이 바로 공 정하다고 생각한다. 즉, 음악학적인 배경이 없는 훈련된 사회학자로서 그가 "텍스트"는 사회적 긴장상태를 수동적으로 반영하고 어떤 내적인 원동력이 부족한 암호문에 불과하다고 가정하는 것이 훨씬 더 쉽다는 것이다; 이것은 책임감으로부터 그를 해방한다.[원주 32] 더구나, 그들의 반문화적인 입장 의 유효성을 인정할지라도, Frith, Marsh, Bangs, Christgau와 같은 비평가 들은 우선적인 찬성을 주도록 요구하는 전체적인 대중 음악 문화로의 지나 치게 많이 모호한 가정들, 예를 들면, 단지 억눌린 소수의 음악 혹은 "정치 적으로 의식있는" 음악만이 어떤 진정한 사회적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 들을 여전히 만드는 경향이다. Deena Weinstein은 다음과 같은 날카로운 소 견을 진술한다.

진보적인 비평가들은 그들이 공통된 기준들을 가진 사회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락 비평주의가 태어났을 때 그것은 타당한 생각이었다; 정말로, 비평가들은 기꺼이 배울려고 했던 청중들에게 알리 는 것을 도왔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락 음악은 다양화, 세분화되기 시작했다. 반항문화는 해소되었고 수많은 기호 대중들과 음악 기반의 몇 몇 소문화들로 대체되었다. 비평가들이 계몽에 공헌할 수 있었던 공통된 기준들을 가진 사회를 가정하는 것은 더이상 공정하지 않았다.[원주 33]

"정치적으로 의식있는" 대중 음악에 관한 전체 네오맑시즘적 견해"올바 른 분노를 이성적인 정치적 행위로 보내거나 세상을 뒤흔들 소망"을 청중들 에게 주는 음악의 관점에서는 대체로 락 비평가들에 의해 불멸케 한 신화라는 것이 필자의 믿음이다. 이것은 특별히 다음의 Mick Jagger와의 Rolling Stone 인터뷰에서 분명하게 된다.[원주 34]

Chet Flippo     Mick, 당신이 보기에, 10년 혹은 11년 전에 락앤롤이 강력
                한 사회적인 힘이었고, 그때 이후로 서서히 앞니가 뽑히고
                흡수되어 왔던 것 같습니까?

Mick Jagger     (그의 머리를 흔들며) 아뇨. 그것은 명백하게 잘못된 생각
                입니다.

Chet Flippo     하지만, 예를 들면, "Street Fighting Man"은 결집된 문제
                였죠. 정치적으로요.

Mick Jagger     (끄덕이며) 맞아요, 하지만 그건 급진적인 베트남 시기 동
                안이었죠.  그건 단지 [그 때]였죠. 행진하고 있다면 좋은
                곡들을 항상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 곡들이 [행진을 만
                들지는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락앤롤은 저항하는 것이
                아니고, 결코 아니었죠.  그것은 정치적이지 않습니다....
                락앤롤에서의 전체 반항은  밤에 시끄럽게 할 수 없고, 락
                앤롤을  그렇게 크게 그리고 부기-우기를 연주할 수 없고,
                차를 이용할 수 없는 그런 모든 것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Rehebl Rock:The Politics of Popular Music에서, Jon Street은 팝 음악이 실제로 어느정도까지 "정치적"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해 아주 분명하다:

일상 상식과 상상 사이에서의 대중 음악의 상호 작용은 대중 음악을 정치 적 성명을 동반하거나 집단 행동을 고무하는 완전히 부적절한 매체로 만 든다. 하지만, 그것이 정치적으로 대수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세상을 변 화시킬 수 없는 팝의 무능력은 그 세상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접합하거나 수정하는,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다른 더 나은 세상을 일견하게 하는 능력에 의해 보상받는다.[원주 35]

이러한 정의를 척도로 사용할 때, Pink Floyd의 "정치와 무관한(apoliti- cal)" Dark Side of the Moon은, The Wall이 일반적으로 비평가들에 의해 그 밴드의 첫번째 진정 "사회적으로 의식있는" 앨범으로 받아들여졌을지라 도, 사실상 The Wall보다 훨씬 더 정치적인 효과가 있는 앨범이다. Dark Side of the Moon은 인간의 상태(human condition)에 대한 묘사에서 청중을 상상력있게 끌어들이고, 그들이 스스로 분열들을 통하여 사고하도록 북돋운 다. 반면에, The Wall은 청중에게 너무 자주 쉽게 설교하고, 그들에게 사고 하는 바를 이야기한다. Roger Waters는 The Wall의 영화판에 대한 놀랍도록 솔직한 평가에서 스스로 그만큼 인정한다:

처음 10분간 알 수 없이 당신을 강타하면서 시작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리고 그건 끝날 때까지 멈추지 않았죠; 조용한 시간은 불가능했었죠...저 는 Pink 역[그 영화와 연가곡의 주인공]에는 관심이 없었죠; 저는 그에 대해 일말의 감정 이입도 느끼지 않았죠....락앤롤의 도해(圖解, iconogr aphy, 역주:우상연구?)에 대한 전체주의적 본성에 관한 그의 관심에 대해 ....그리고 제가 영화를 보러 가서 어떤 인물들도 주목하지 않는다면, 그 건 나쁜 영화입니다.[원주 36]

주도적인 락 비평가들의 다수에 의해 받아들여졌던 것 같은 반항문화의 정치적으로 의식있는 "반문화주의" 진영은 전체 반항문화의 단지 소수를 대 표했다는 것이 필자의 믿음이다. 반항문화는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주 로 정신적/종교적/인문주의적인 운동이었다는 필자의 더욱 이른 주장을 유 지한다. 1970년대 초중반기에서 주요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들 다수의 큼직 한 상업적인 상공은 반항문화의 히피 이후의 확장에서 상당한 부분은 이들 그룹들이 그것들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고 느꼈다는 것을 예증한다; 1970년 대 중반기 동안 명확한 소문화로서의 반항문화와 상업적으로 자랄 수 있는 스타일로서의 프로그레시브 락의 평행한 파편화는 필자의 주장을 더 한층 증명한다. 중요하게도, 락 비평가들이 가장 가혹하게 공격했던 그룹들은 19 70년대 초중반기 동안 가중 성공적이엇던 정확히 그 그룹들:ELP, Yes, Pink Floyd, Jethro Tull, the Moody Blues 였다. 숭배의 매력을 남겼던 밴드들 (특히 King Crimson)은 상당히 더 큰 존경심으로 다루어졌다.

바로 여기에, 비평가들의 프로그레시브 락에 대한 평가에서 일관성의 부 족이 특히 분명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상업적으로 성공적인 행위들에 대한 비평가들의 의심은 "진실성"에 대한 그들의 이해로부터 계속 생겨나는 것 같다. 비평가들이 그것을 볼 때, 분명한 정치적인 입장의 부족과 고급 문화 에의 과다 의존이 예술가적인 타협으로 가는 두 가지 확실한 길이라면, 커 다란 상업적인 성공은 또 다른 길이었다.(1970년대 말 Marsh-Bangs-Frith- Christgau 비평 노선은 거의 대다수의 모호한 펑크/뉴웨이브 밴드들에 대한 거절로 악명높게 되었다). 하지만, 그 비평가들은 어떻게 the Beatles, the Stones, 그리고 Dylan과 같은 더 이른 비판적인 귀염둥이들이 수천만의 판 을 팔면서 그들의 "진실성"을 간직할 수 있었는지 결코 만족스럽게 설명하 지 못했다. 짧게 말해서, "진실성"은 비평가들이 계속해서 재정의했던 신화 적 특질이 되었고, 그들이 좋아했던 행위에 수여했고 그렇지 않았던 행위에 주기를 유보했던 칭호였다. 흥미롭게도, 상업적인 성공에 대한 그 비평가들 의 흔히 표현된 의심은 음악 스타일(혹은 개인 연주자)은 대중의 인기에 의 해 어떻게 해서든 자동적으로 오염된다고 제시한다는 점에서, "상업적인 음 악"에 대한 많은 학문적 음악학자들의 멸시와 놀랍도록 흡사한 점이 있었다.
Robert Walser는 그의 저서 Running with Devil에서 이런 종류의 낭만적으 로 묘사된 엘리트주의를 정당하게 거절했다:

나는 "대중(popular)"을 사회적 논쟁과 형성의 중요한 장소로 본다, 그리 고 [락 비평가들이 가진 것처럼] 사회의 가장자리 또는 [학계가 유지했던 것처럼] 위신있는 엘리트들 사이에서 존재하는 문화는 대중적인 주류의 문화보다 필연적으로 더욱 중요하고, 흥미롭고, 복잡하거나 심오하다는 공통된 생각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을 알았다.[원주 37]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요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들로 향한 Roling Stone/ Creem 비평 진영의 반감은 오늘날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만큼 강력하다.
Jimmy Guteman(전 Rolling Stone 편집인)과 Owen O'Donnel은 그들의 The Fifty Worst Rock'n'Roll Records of All Time에 매우 조심스럽게 ELP, Yes, Jethro Tull, the Moody Blues의 앨범들올 포함시켰다.[원주 38] Pink Floyd는 그 밴드의 전 베이시스트와 작사가였던 Roger Waters에 의한 솔로 앨범들을 통하여 여기에 나타난다.

확실히, 그 비평가들이 프로그레시브 락이 청중들의 삶에 작용했을런지도 모르는 어떤 의미있는 역할의 인정을 지속적으로 거절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그 스타일의 더욱 부정적인 특성들의 평가에서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은 아니다. 반복해서 언급하지만, 주요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들과 팬들과의 관계(그리고, 그 일에 관한 한, 프로그레시브 락 취향 대중의 인 구 통계)는, 주요 밴드들이 클럽과 작은 곳으로부터 스타디움과 광장으로의 이동(영국으로부터 미국으로를 언급하지 않더라도)함에 따라, 1970년대 초 기 동안 깊은 전환을 겪었다. 의심할 바 없이, 이들 밴드들이 지역적으로 구별된 소문화와의 공생 관계를 즐길 기회를 잃었으므로, 그들이 기교, 시 각적 구경거리, 그리고 거대한 미국 팬 기반을 다질(그래서 계속 잡았다)
어떤 원격 지배감을 점점 더 요구했다. 이것이 사실인 한, 프로그레시브 락 의 구경거리에 대한 애정은 방종이었고, 기교와 기술적인 눈부신 전시회, 그리고 환상의 기호는 자기 도취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특징들이 1970년대의 전체적인 품질 보증이 아니었던가? 이 시기가 결국 까 닭없이 "Me Generation"이라고 이름붙여진 것은 아니었다. 누구나 같은 경 향을 heavy metal, glam-rock(여기서 필자는 David Bowie로부터 Alice Cooper까지 Queen과 Elton John까지의 전역의 행위들을 묶을 것이다), 그리 고 다른 스타일들에서 분명한 눈부신 연주자/청중 양분법을 제거했으나, 자 기 도취,[원주 39] 구경거리에 대한 애정, 그리고 유사 종교적 지각 표상 (表象)들로의 과시하는 버릇들을 또한 일으켰던 디스코와 같은 다양한 70년 대 스타일들에서 볼 수 있다.

그러면, 끝맺으면서, 비평가들의 프로그레시브 락에 대한 경멸은 그들이 그렇게 자주 악마화했던 그 스타일에 대한 것보다 더 그들 스스로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준다는 것이 명백하다고 해도 무방하다. 결국, 비평가들의 좋 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은 그들이 받아들였던 음악의 네오맑시즘적인 관점, 즉, 한 음악 스타일은 사회적인 관습들과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 도전했던 정도에 직접 비례하여 정당했다는 믿음의 배경에 반하여 이해되어야만 한다.
이런 입장은 Frith에 의해 설명된 "반문화주의"가 아니라, 비평가들의 신념 에 대한 진정한 근본 원리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그와 다른 이들이 설 명했던 반문화주의적 기준들은 항상 선택적으로 적용되었다; 그 비평가들은 문제의 청중들이 사회적으로 불리했거나 문제의 음악이 체제에 직접 맞섰을 때에만 "청중들에 끼친 영향과 그들과의 관계를 위하여" 음악을 평가했다.
이들 조건들이 음악 스타일에서 존재하지 않았을 때, 비평가들은 수용의 문 제들에 대한 현저하게 적은 관심을 보였다. 프로그레시브 락은, 헤비 메탈 처럼, 억압된 스타일이 아니었다; 또 헤비 메탈처럼, 비평가들이 바랬던 체 제에 대한 일종의 직접적인 도전을 만들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심하게도 그것은 경멸적인 부르조아들이 항상 우월감의 상징으로 사용했었던 고급 문 화의 요소들을 끌어왔다. 비평가들이 그것을 싫어했다는 것이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가?

하지만, Bangs, Marsh, Christgau, Frith 등에 의해 획득된 음악의 네오 맑시즘적인 관점은 1970년대의 큰 부분의 미국 락 청중들에게는 낯설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ELP, Yes와 the Moody Blues혹은 Black Sabbath, Deep Purple, 그리고 Rush와 같은 밴드들은 비평가들이 뭐라고 말하던지 잘 해 냈다. 더욱 독선적이고 악의있는 비평들은 팬들에게 그들의 포위된 영웅들 의 차들을 빙 둘러싸도록 동기를 주면서, 종종 의도된 효과에는 반대하였다.
실로, 그러한 평들의 완전한 일방성은 뮤지션들을 비난하는 정확히 같은 종 류의 건방짐과 거만함의 먹이로 전락하는 것으로 비평가들을 인식했던 팬들 의 눈에는 비평자의 경솔한 믿음을 부셔뜨리는 경향이었다. 궁극적으로, 지 나치게 경직된 이데올로기에 의해 짐이 부과되었으므로, 이들 비평가들은 기껏해야 사회적인 힘으로서의 프로그레시브 락에 대한 매우 왜곡된 묘사를 우리에게 주며, 그들은 사실상 음악 스타일로서의 프로그레시브 락에 대해 말하는 데 전혀 유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주된 의무여야 했던 것: 어떻게 프로그레시브 락이 상당한 기호 대중의 관심, 걱정, 그리고 정체성 을 반영했는지와 맞붙고, 개개의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들이 팬들에게 그 스 타일을 얼마나 상상력있고 일관성있게 전해줬는지에 따라 그들을 판단하는 것을 포기했다. Allan Moore의 Rock: The Primary Text (1993)이 중요할 때 까지 비평적인 여론이 결코 본격적으로 초래되지 않았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더욱 분명하고, 더욱 객관적인 유리한 위치로부터 1970년대의 문화 적인 역사를 재조명할 수 있는 곳에 우리가 바로 이제야 도달하고 있다는 것을 제시하여 준다.

주석(괄호 안은 참고문헌)

1. Bangs, "Energy Atrocities," 40.
(Bangs, Lester. "Exposed! The Brutal Energy Atrocities of Emerson Lake and Palmer." Creem 6 (March 1974).)
2. 또한, Janell R. Duxbury의 Rockin' the Classics and Classicizin' the Rock:A Selectively Annotated Discography(Westport, Conn.: Greenwood Press, 1985)를 보라. 이것은 동시대의 대중 음악에서 고전음악 인용에 대한 완전한 목록을 제공하려고 시도한 참고 작업이다. Duxbury는 Procol Harum 의 "A Whiter Shade of Pale"이 두 개의 근원Bach의 Cantata No. 140(Wachet auf)의 1악장과 그의 조곡 no. 3 in D major, BWV 1068의 "G선상의 아리아(Air for the G-string)(Duxbury, 50-51)
으로부터 끌어온 것 같다고 썼다.
3. Bangs, "Energy Atrocities," 44.
(1번과 같음)
4. Gentle Giant, Acquiring the Taste (Vertigo 1005), 라이너 노트 5. Jethro Tull, Thick as a Brick (Chrysalis MS 2072), 라이너 노트, 7.
6. Curtis, Rock Eras, 278.
(Curtis, Jim. Rock Eras: Interpretations of Music and Society, 1954-1984. Bowling Green, Ohio: Bowling Green State University Popular Press, 1987.)
7. Milano, "Keith Emerson," Comtemporary Keyboard 6, 23.
(Dominic Milano, "Keith Emerson," Contemporary Keyboard 6(September 1980).)
8. Dave Marsh, The Heart of Rock and Soul (New York: Plume Books, 1989), xv.
9. Bangs, "Energy Atrocities," 44.
(1번과 같음)
10. Robert Christgau, Christgau's Record Guide: The 80s (New York: Pantheon Books, 1990), 232.
11. Robert Christgau, Rock Albums of the 70s: A Critical Guide (New York: Da Capo Press, 1981), 232.
12. Bruford, When in Doubt, Roll, 8.
(Bruford, Bill. When in Doubt, Roll. Cedar Grove, N.J.: Modern Drummer Publications,1988.)
13. Straw, "The Case of Heavy Metal," 103.
(Straw, Will. "Characterizing Rock Music Culture: The Case of Heavy Metal." In On Record, ed. Frith and Goodwin.)
14. Marsh, Heart of Rock and Soul, xv.
(8번과 같음)
15. Moore, Rock: The Primary Text, 65.
(Moore, Allan. Rock: The Primary Text; Developing a Musicology of Rock. Buckingham, U.K.: Open University Press, 1993.)
16. 상동. Christopher Small에게 공정하게도, 흑인 음악을 묘사하기 위해 "자연에 가까운"이라는 구절을 사용한 Music of the Common Tongue에서 어떤 곳도 필자는 찾을 수 없고, Moore는 쪽수를 언급하지 않는다.
반대로, 461쪽에서 Small은 "흑인 문화"를 "자연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인종차별적이고, 흑인 문화에 대한 찬사의 결과로 이 런 견해를 가진 자유주의자들은 "가장 미결된 인종차별주주의자들만큼 깊게 잘못되었다고 서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oore가 Small에 의 한 유럽과 아프리카 음악 형성의 중심 주의(主義)의 비교(pp. 42-46를 보라)가 그가 전자보다 후자를 더욱 즉각적이고 순간적이라고 생각한다 는 것을 오히려 분명하게 제시한다고 추측한 것이 틀리지는 않다.
(Small, Christopher. Music as Social Text. Cambridge, U.K.: Polity Press, 1991.)
17. David Ernst, The Evolution of Electronic Msic (New York: Schirmer Books, 1977), 209.
18. Peter van der Merwe, Origins of the Popular style: Antecedents of Twentieth-century Popular Music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2).
19. Bangs, "Energy Atrocities," 43.
(1번과 같음)
20. Christgau, Rock Albums of the 70s, 212.
(11번과 같음)
21. Straw, "The Case of Heavy Metal," 102-3과 Weinstein, Heavy Metal, 239-44를 보라.
(13번 참조; Weinstein, Deena. Heavy Metal: A Cultural Sociology.
New York: Macmillan, 1991.)
22. Paul Battiste (Creem 1972), Philip Baske, Heavy Metal Thunder (Garden City, N.Y.: Dolphin, 1985)에서 인용.
23. Robert Duncan, The Noise (New York: Ticknor and Fields, 1984), Weinstein, Heavy Metal, 1 에서 인용.
(21번 참조)
24. Curtis, Rock Eras, 287.
(6번과 같음)
25. 필자는 이런 쪽의 비평가들이 필자가 가치, 정의, 수단에 대한 매우 깊 은 고군분투를 하찮게 하려고 시도한다고 주장하리라는 것을 안다. 이것 은 필자의 의도가 아니다. 하지만, 필자는 제안된 해법들의 "규범"을 적 용해서 관점들이 다를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독선적인 비난에 관여하려 는 경향이 있는 오늘날의 학계 내부의 조직이 있다고 믿는다. 1990년대 의 어떤 학자들과 1970년대의 락 비평가들 사이의 유사점들이 이 점에서 자명하지만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믿는다.
26. Anthony DeCurtis, "Music's Mean Season," Rolling Stone (December 14-28, 1989), 15-16.
27. Weinstein, Heavy Metal, 240.
(21번 참조)
28. Simon Frith, "Towards an Aesthetic of Popular Music," in Music in Society, ed. Richard Leppert and Susan McClary (Cambridge: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7), 134.
29. 여러번의 경우에 Frith는 그가 음악학적인 기반에서 형식적인 비교에 참여하는 데 결코 유능하지 않았다. Frith, "Towards an Aesthetic,"
144와 Frith, A Sociology of Rock, 176를 보라.
(28번 참조; Frith, Simon. The Sociology of Rock. London: Constable, 1978)
30. Robert Fripp, Tamm, Fripp, 24에서 인용.
(Tamm, Eric. Robert Fripp: From King Crimson to Guitar Craft.
Boston: Faber and Faber, 1990.)
31. Frith, The Sociology of Rock, 151.
(29번 참조)
32. 다르게 말하면, 필자의 입장은 누구나 "문화주의"와 "반문화주의" 해석 중에 선택할 필요가 없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둘 모두에서 끌어 올 수 있어야만 한다. 필자는 음악 연주 중에 확립된 관계들이 음악 "의미"의 중요한 측면이라는 반문화주의적인 입장을 받아들인다; 필자는 이 점을 인정하기를 거절한 실증주의 음악학을 Christopher Small이 비 판한 것은 옳다고 생각한다. (Music of the Common Tongue, pp. 49-78을 보라) 하지만, 그 "텍스트"가 특정한 장소나 시간에 그룹 또는 개인에 의해 그것으로 읽혀진 것 외에 다른 내용을 가지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 하는 것은 오히려 비약인 것 같다; Frith는 객관적인 실재로서의 음악적 "텍스트"를 평가하는 데 대한 그 자신의 무능력에 의해 이런 견해로 내 몰리게 되었다. 고전 음악을 위한 혹은 반한 선입관이 없는 가장 초보의 청취자들은 아마 Clementi의 것보다는 Beethoven의 "Waldstein"을 더 좋 아할 것이다. 이것은 "텍스트" 그 자체 안에서 중요 순간에 기대감들을 만들고 좌절시키고, 과도한 상투(진부)적인 것들과 과잉의 놀람 (2차 대 전 이후의 아방가르드의 저주)을 피하는 데 있어서 Beethoven이 더 잘해 내기 때문은 아닐런지? 짧게 말해서, 필자는 음악에서 의미에 관한 Leonard Meyers의 견해들이 약간 수정특별히, 음악이 중재되는 방식이 그 "의미"에 영향을 끼친다는 매우 실제적인 충격을 통합하려는 점에서 을 요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그것들을 완전하게 제외하기에는 너무 이 르다. "의미"가 음악을 통해서 어떻게 전달되는지에 관한 여러가지 이론 들에 대한 고찰을 위해 Anthony Storr의 Music and the Mind (London: Harper-Collins, 1992) 를 참고하길 누군가 바랄지도 모른다.
(16번 참조)
33. Weinstein, Heavy Metal, 241.
(21번 참조)
34. Curtis, Rock Eras, 125-26에 인용.
(6번과 같음)
35. Street, Rebel Rock, 166.
(John Street, Rebel Rock: The Politics of Popular Music (New York: Basil Blackwell, 1986.)
36. Roger Waters, Schaffner, Pink Floyd, 251 에서 인용. Street는 그의 Rebel Rock, pp. 163-66에서 John Lennon의 "정치와 무관한" Imagine과 "정치적으로 의식있는" Sometime in New York를 비교할 때 비슷한 점을 강조한다. 위에 초안된 기준들을 이용해서, 그는 Imagine이 Sometime보 다 훨씬 더 정치적으로 영향력있는 앨범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후 자(Sometime)의 귀에 거슬림이 Lennon의 사회주의적인 견해에 공감했던 사람에게도 심지어 흥미를 잃었다고 특별히 언급한다.
(Schaffner, Nicoholas. Saucerful of Secrets: The Pink Floyd Odyssey.
New York: Harmony Books, 1991.; 35번 참조)
37. Walser, Running with the Devil, xiv.
(Walser, Robert. Running with the Devil: Power, Gender, and Madness in Heavy Metal Music. Hanover, N.H.: Wesleyan University Press, 1993.)
38. Jimmy Guteman and Owen O'Donnel, The 50 Worst Rock'n'Roll Records of All Time (New York: Citadel Press, 1991).
39. 이유없이 그리스 신 나르시스(Narcissus)의 상이 New York의 가장 고급 디스코 텍 Studio 45의 로비에 서 있는 것은 아니다. Curtis, Rock Eras, 300 을 보라.
(6번과 같음)

2 같이 보기[ | ]

문서 댓글 ({{ doc_comments.length }})
{{ comment.name }} {{ comment.created | snsti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