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테키안에게 부치는 문학편지

포항공대 인문사회학부 박상준 교수님의 포항공대 교지(?) 기고글

1 # 현대사회와 문학 - 천의 얼굴, 문학의 죽음 이후[ | ]

1.1 # 공상과학소설과 SF, 무협지와 무협소설[ | ]

문학에 대해서 공정하게 이야기하기 힘든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길을 안내하는 밤하늘의 달과 별 같은 그러한 문학의 성좌가 흩어진 지 오래된 까닭이다. 전문가들의 문학비평에서부터 인터넷에 널리 퍼져 있는 이런 저런 문학에 관한 이야기들을 보면, 그 각각이 그리고 서로가 한자리에서 논의하기 어려울 만큼 분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는 사람 수만큼 많은 문학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학비평가와 대중들이 소통 불가능한 상황에 빠진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고, 이제는 적지 않은 작가들까지도 저들만의 공간으로 들어가고 있다. 약간 비관적으로 그리고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작품의 생산과 수용, 전달을 아우르는 문학 활동의 주요한 주체들이라 할 작가, 독자, 비평가, 연구자들이 각기 핵분열을 이루면서 상호간에 만리장성을 쌓고 있는 형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본격문학 문인과 대중문학 문인은 견원지간 상태에 있고, 대중들은 대중들대로 ‘똑똑한 사람들’의 이야기와는 무관하게 자신들의 문학 활동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상황을 강조하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이러한 사정이 새로운 것만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소중한 문학적 전통으로 꼽고 있는 전근대사회의 평민문학 등이 당시 사회에서는 문학으로 대접받지 못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가까운 예로는, 지금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SF’나 ‘무협소설’ 등이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공상과학소설’이니 ‘무협지’니 하여 문학의 격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규정되어오던 것을 들 수 있다. 위의 예들은, 현재 문학으로 여겨지는 것들 중의 일부를 두고 그것은 문학이 아니라고 규정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원리상 동일하나 반대의 예도 많다. 국가를 불문하고 서간문이 오랫동안 문학으로 인정되어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금 기준에서 보면 내용상 철학의 범주로 분류되는 형성기 서구 근대 에세이들의 상당수는 문학적 글쓰기의 주요한 장르로 여겨졌다. 딸이 시집가서 지켜야 할 규범들을 운문 형식에 담아낸 내방가사가 조선시대 문학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것도 여기 보탤 수 있겠다.

이러한 예들은, 수많은 문학들 중에서 어떤 것은 새롭게 자격을 획득한 반면 다른 어떤 것들은 그 자격을 상실하기도 해왔음을 알려준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쉽게 확인되는 이러한 현상은 두 가지 사실을 의미한다. 문학의 경계가 부단히 변화해왔다는 문학의 역사성이 첫째요, 그러한 변화에서 문학과 문학 아닌 것의 경계를 가르는 논의 곧 ‘문학성’ 관련 담론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 둘째다. 지금 우리가 문학에 대해 공정하게 이야기하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다 할 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후자다.

1.2 # 톨스토이냐 황희 정승이냐[ | ]

현재에 이르러 문학에 대한 논의들이 공정성을 잃게 되었다는 점은, ‘문학성’ 관련 담론들의 위상이 심히 위태로워졌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문학의 역사성이 보여주듯이 문학의 경계가 끊임없이 변화해 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문학성’ 관련 담론들이 권위를 잃게 됨으로써, 문학에 대한 현재의 논의들이 편파적인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문학전문가들과 대중들 사이에 두루 통용되는 공정한 문학관이 없다는 사실’과, 이것의 원인이자 동시에 그 결과이기도 한 바 ‘문학 활동 주체들간의 소통불가능성의 심화와 그에 따른 괴리’, 이 두 가지 현상을 두고 일찍이 ‘문학의 죽음’이 선고되었다. 20세기 전반기까지 생명을 유지해오던 문학 이른바 본격문학 혹은 정통문학은 이제 교과서와 대학 강단에서나 겨우 명맥을 유지할 뿐이라는 서구의 진단이, 우리나라에서도 멀지 않은 장래에 내려질 것 같다. 엄밀히 따지면 사실 관계는 이미 그러한데 선고만이 남은 형편이라 할만하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가. 눈길이 닿는 한쪽에 톨스토이가 있고 그 반대편에 황희 정승이 있다.

현재의 우리는 여러 모로 톨스토이보다 불행하다. 그에게는 자신의 삶을 규율해주는 원리뿐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나가야 할 이상적인 삶의 형태가 밤하늘의 별처럼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불행하다면 불행했던 그의 가정사보다도 더 소중했던 이러한 이상의 결과가 바로 동양에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톨스토이주의이다.

문학예술에 대해서도 그러해서, 톨스토이는 자신의 신념과 열정을 담아 (1898)을 써냈다. 그의 은 과격하다 할 만큼 매우 근본적인(radical) 주장을 담고 있다. 자기 시대의 예술을 상류사회의 특권적인 것이라 규정하여 아예 예술이 아니라고 규정한 뒤, 민중들의 삶의 공간, 노동과 땀의 현장에 긴밀히 뿌리내린 것만이 진정한 예술이라고 주창한 것이다.

일흔을 넘긴 나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민중예술론에 속하는 예술관을 역설하는 그의 모습은 그대로 청년의 전형이라 할만하다. 청년 정신을 잃지 않은 것만도 부러운 일이지만, 정작 우리가 그보다 불행하다고 말하게 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톨스토이는 소수의 귀족에게 등을 돌려 자신의 문학을 주창하면서 일반 민중의 삶에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자신의 문학성을 추구하는 일이 민주주의의 일반화라는 근대의 흐름에 조응할 수 있었던 것인데, 바로 이 점이 톨스토이가 부러운 점이고 그에 비해 우리가 불행한 이유이다. 그의 경우 사회 일반 민중의 예술을 전범으로 삼으면서도 문학이고 예술일 수 있었던 반면, 우리는 그렇지 못한 상황에 처해 있는 까닭이다.

이러한 상황의 차이가 중요하다. 이 면에 주목할 때 이른바 ‘문학의 죽음’이라는 다소 선정적인 진단이 가리키는 상황을 제대로 보고 그 의미를 가늠하여 대처할 수 있는 길도 열린다. 문학의 죽음이란 사실 고전의 운명에 관해서만 적실한 표현이다. 1980년대 중반에도 우리는 ‘소설이 없다’는 암울한 진단을 들은 적이 있고, 1990년대 중반 이후로는 소설문학의 여성적인 편향이 우려할만하다는 걱정을 해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시기에도 서점에는 소설들이 넘쳐나서 24시간 편의점에까지 제 영역을 확장한 바 있다. 부재가 진단되고 그 양태가 걱정되었던 것은 항상 소위 본격문학이었을 뿐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중문학은 대형 유통센터의 상품처럼 넘쳐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그러한 문학상품만이 활개를 치고 정통적이고 전통적인 문학의 자리가 위축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인터넷의 활성화를 기반으로 하여 대중들의 문학 활동 또한 소수 본격문학처럼 자기들만의 잔치가 되는 것도 바람직한 것일 수 없다.

상황이 이렇다 할 때 일단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바로 황희 정승의 태도이다. 서로 다투던 이 종의 말도 옳고 다른 종의 말도 옳고 둘 모두가 옳다고 하는 잘못을 지적하는 아내의 말도 옳다 하는 그의 태도는, 줏대 없음이라기보다 차이에 대한 존중으로 읽힐 필요가 있다.

한편으로는 문학성을 따지는 논의들이 서로 토론하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문학 활동의 주체들이 서로 소통하지 않는 상황을 초래한 이 모든 사태의 궁극적인 사회적 원인을 생각할 때, 무엇보다 먼저 차이를 인정하고 사태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보는 일이 필요하다. 이렇게 한 호흡 길게 보면, 이른바 오늘날 문학의 위기란, 탈산업사회로 지칭되는 전반적인 문화혁명의 일부이자, 인쇄문화가 전자문화로 변형되는 기술혁명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전파미디어ㆍ시청각미디어에 의해 전통적인 문학이 위기에 몰린 것이다. 이와 더불어서 문자와 종이 책이라는 기존의 존재 형식과 관련되어 있고 그에 근거하고 있던 의미 영역 곧 재래의 ‘문학성’ 또한 위기에 처한 것이다.

1.3 # 문학, 그 천 가지 얼굴 껴안기[ | ]

문학성이 위기에 처해 문학의 죽음이 이야기되는 것은, 앞서 살핀 진단에 기초하여 거꾸로 보면, 문학의 얼굴이 좀더 풍요로워졌다는 징표일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생산적인 것은 톨스토이의 길이라기보다는 황희 정승의 태도이다. 문학성이라는 창공의 별을 향해 자기 정체성을 수립해온 정통 문학과 시장의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문화산업으로서의 대중문학,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전자문화 시대의 문학까지 실로 다양한 문학들이 혼재한 상황에서 길을 잃지 않고 풍요로울 수 있는 방식은 일단 자신을 비우고 각각을 인정하는 황희 정승의 길뿐이다.

채우고 다듬기 위한 첫걸음으로서의 비움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에 우리는 와 있다. 이렇게 비운 상태에서, 현재의 문학이 보이고 있는 넓은 품, 그 천의 얼굴을 일별해야 한다. 이 자리를 빌어 인간과 사회, 그리고 역사, 대중문화 등과 문학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 성과와 흔적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거칠게나마 살펴보고자 하는 것도 이러한 뜻에서이다.

2 # 문학과 인간 - 인간의 탐구, 신인간의 창조[ | ]

2.1 # 근대문학, 인간성 해방의 이야기[ | ]

문학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문학이 갖고 있는 여러 측면 중 어느 것에 주목하는가에 따라 입장이 갈린다. 한편에서는 문학의 역사 전체에 걸쳐 재미와 유흥을 보아왔다. 다른 한편으로 전근대 사회에서 예술로 인정된 문학들은 대체로, 그 시대의 지배적인 이념을 전파하는 기능 면에서 주목되었다.

이러한 사정이 바뀌는 것은 근대에 들어와서이다. 이제 문학은, 이미 존재하는 무언가를 효과적으로 전달해주는 기능이 아니라, 가려져 있던 진실을 파헤치는 주요한 장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좀더 나아가서는, 미지의 것을 탐구하여 진실을 확장하는 것이 문학의 몫으로 여겨지게도 되었다. 이때 근대문학이 탐구의 대상으로 놓은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하나이고, 이 자리에서 살펴볼 ‘인간’이 다른 하나이다.

근대문학의 주요 과제 중 하나가 인간 탐구로 설정되었다는 사실에서 중요한 것은 다음 세 가지이다. 탐구의 대상이 될 만큼 인간의 본질이 알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는 것이 첫째이고, 그러한 탐구 자체가 인간성을 발양, 확장하는 과정이기도 했다는 것이 둘째이다. 말을 바꾸자면, 문학을 통해 인간을 알아나가면서 새로운 인간을 창출해내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는, 이 모든 과정의 바탕에 ‘인간성의 해방에 대한 열망’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인간을 알아나가는 과정은 인간의 자유로운 면모들 각각을 드러내고 승인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으며, 궁극적으로는 각종 금기를 넘어선 보다 자유로운 인간, 신인간의 창조를 향하는 것이었다.

인간에 대한 하나의 관념 즉 기성사회가 제시하는 규범적이고 이상적인 인간형을 폐기하고 살아있는 인간들이 보여주는 자유분방한 모습들을 인정하고 키우는 것, 이것이 바로 근대문학이 인간을 탐구하는 목적이었으며 동시에 그 결과이자 성과라고 할 수 있다.

2.2 # 관념적 인간, 현실의 인간, 인간의 현실[ | ]

근대문학이 보여준 인간 탐구의 첫 번째 양상은, 현실의 인간을 긍정하면서 전근대적인 인간관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근대문학의 첫머리에 오는 보카치오의 (1353)이나, 세르반떼스의 <돈 끼호테>, 중국 근대문학을 연 노신의 <아Q 정전>(1921) 모두 이러한 의미를 공유한다.

흑사병을 피해 도시를 떠난 귀부인과 청년들 열 명이 열흘 동안 나눈 100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은,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사람살이의 모습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마음을 즐겁게 하는 얘기 이외는 무엇이고 결코 갖고 들어오지 말라’는 등장인물들의 결의대로, 이 소설에는 성적으로 자유분방하며 재치가 번득이는 보통사람들의 자유로운 모습이 풍성하게 엮여져 있다. 중세 서민들의 이야기 전통을 이어서 인간의 세속적인 모습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것인데, 이를 통해서, 중세적인 세계관에 토대를 둔 이상적인 인간관에 가려져 있던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간이 문학작품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영웅이나 기사, 이상적인 여성 등과 같은 관념적인 인간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자유로운 면모에 주목하는 이러한 근대적 전통은,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1378~1400)를 거쳐 라블레의 (1532)과 (1534) 등으로 이어진다. 이들 작품에는 ‘하고 싶은 바를 행하라’라는 계율 아래 육체적인 만족을 통하여 삶을 즐기고 정신적 쾌활함을 내세우는 현세적인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이렇게 이어진 ‘새로운 인간성의 옹호’ 경향이 제 힘을 키워 전근대적인 인간관을 공격한 기념비적인 작품이 바로 세르반떼스의 <돈 끼호테>(1605, 1616)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중세 기사도에 대한 신랄한 풍자인 한편, 이 소설은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담고 있는 점에서도 주목되었다. 예컨대 괴테나 실러 등 독일 낭만주의자들은 ‘돈 끼호테’에게서 ‘자유에 대한 불타는 신념’과 ‘이상을 향해 강인하게 돌진해나가는 의지’를 가진 근대적인 자아를 보았다.

한편 <돈 끼호테>는 인간의 행위와 그것을 추동하는 욕망의 원리를 보여준 작품으로도 해석되어 왔다(르네 지라르,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돈 끼호테’를 움직이는 힘은 그가 이상적인 기사로 흠모하는 ‘아마디스’를 모방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이 욕망에 의해 주인공 자신이 ‘알론소 끼하노’에서 ‘돈 끼호테’로 되는 것이며, 마을 처녀 ‘알돈사 로렌소’가 숭배의 대상 ‘둘씨네아 델 또보소’로, 말라빠진 말이 ‘로시난떼’로 바뀌게 된다. ‘돈 끼호테’의 욕망은 사실 ‘아마디스’의 욕망인 셈이다.

이렇게 우리의 욕망이 대상과의 관계에서 직접 촉발되는 것이 아니라 중개자에 의해 조종되는 것임은, 우리 주변에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학생들은 부모에 의해, 소비자들은 광고모델에 의해 중개되면서 욕망을 키우며, 같은 원리로, 사랑은 질투에 의해 증식된다. 우리들의 욕망이란 사실 우리 자신 고유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방하고자 하는 중개자나 라이벌의 것이라는 사실, 근대인의 이러한 특성을 잘 보여준 작품들로 지라르는 스탕달의 <적과 흑>(1830),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1857), 도스토예프스키의 (1875),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13~27) 등을 <돈 끼호테>에 이어 언급하고 있다. 이들 모두 근대인의 한 특징을 탐구한 성과라는 것이다.

이성에 대한 신뢰를 특징으로 하는 18세기로 접어들면서 문학은 근대인들이 생각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직접 제시한다.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1719)가 대표적인 예가 된다. 무인도에 홀로 떨어진 주인공이 무려 28년 동안 살아남을 수 있게 한 합리적인 삶의 자세는 그대로 계몽주의의 인간상 곧 합리적이고 자율적인 개인 주체의 핵심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후, 인간 이성의 절대성을 회의하면서 감정의 가치와 자아의 의지를 강조하는 새로운 경향이 인간의 면면을 좀더 풍성하게 해주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은 이런 경향의 선구로서, ‘낭만적 사랑’이라는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품은 근대적 개인의 모습을 포착하고 있다.

개인 내부에 존재하는 규율되지 않는 욕망의 발견은, 한편으로는 분열된 의식의 발견으로 이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성이나 낭만적 감성 너머에 있는 새로운 영역에 눈 뜨게 하였다. (1871~2)과 <카라마조프의 형제>(1879~80) 등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광인들은 바로 이러한 인간 발견의 서주로서 계몽주의적, 합리적인 인간상을 해체하고 새로운 인간들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보였다.

‘의식의 분열’은 모더니즘 소설의 주요 테마로 다루어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새롭게 발견된 인간성의 영역인 비합리적인 것들은 에드거 앨런 포(1809~49)에 의해 판타지, 그로테스크, 괴기 등의 양식으로 근대문학에 포괄되었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1886) 등을 잇는 현대의 장르문학들이 그 직접적인 후손이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갈래인 에로티즘은 18세기말의 사드(1740~1814)를 선구자로 하여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1928) 이후 문학의 인간 탐구 영역으로 끌어들여졌다.

2.3 # 자유로운 인간의 거울, 근대문학[ | ]

지금껏 살펴보았듯이 문학의 역사는 한편으로 근대인의 다양한 면모에 대한 발견의 역사이기도 하다. 종교와 이념의 눈으로 조명되던 인간상이 르네상스기 이래로 현실의 인간으로 대체되고, 계몽주의를 지나면서는 합리적인 존재로 제시되었다. 여기에 감성과 욕망이라는 새로운 측면이 발견되고, 언어로 규정하기 힘든 비합리적인 속성까지 부가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이러한 개괄에서 중요한 것은, 근대문학은 인간성의 본질을 하나의 전형으로 내세울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반대로 근대문학은 인간들이 보이는 차이와 개성, 새로운 면모에 주목하여, 인간의 다양하고도 이질적인 모습을 강조해왔다.

근대사회에서 인간의 삶이 갖는 궁극적인 의미나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기는 하지만, 그 결과를 모아 하나의 전형적인 인간상을 수립하고자 하지는 않는 이러한 태도의 바탕에는,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보는 관념이 깔려 있다. 대상이 무엇이든 마찬가지이듯, 인간에 대해 하나의 상을 제시할 때 인간성에 대한 억압이 필연적으로 뒤따른다는 점을 근대문학은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인식 위에서 근대문학은, 배제되거나 억압되어온 인간성을 새롭게 발견하여 생명을 불어넣어줌으로써 우리의 인간 이해를 진정 자유로운 것으로 만들어온 것이다.

사실 근대문학이 발견해온 이질적인 속성들의 총화가 바로 우리 현대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근대문학이 행한 인간 탐구의 역사는 불연속적이되 축적적인 것으로서 끊임없이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이다.

3 # 문학과 사회 -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 | ]

3.1 # 현대사회 속의 문학, 그 세 가지 얼굴[ | ]

현대사회로 접어들면서 문학의 존재 방식은 큰 변화를 겪었다. 후원자(patron)를 잃은 것이 가장 큰 요인이다.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높은 안목을 가지고 예술가를 후원하는 일을 명예롭게 생각하던 귀족들이 몰락하면서, 문학뿐 아니라 예술 전체가 실로 딱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놀이’와 마찬가지로 예술 또한 ‘생산’이 아니라 ‘소비’와 ‘탕진’에 가까운 것이어서, 예술가의 생존과 위신을 보장해주던 후원제의 붕괴와 더불어 문학과 예술의 존속 자체가 문제로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학이 취한 태도는 크게 세 가지이다. 신흥 부르주아지와 손을 잡고 그들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적극 나선 경우가 첫째이다. 다른 하나는, 부르주아 시민사회와 거리를 유지한 채 자신의 문학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둘과는 달리, 새롭게 펼쳐진 시민사회를 움직이는 실질적인 원리 곧 시장 논리에 몸을 맡기는 것이 셋째 유형에 해당한다. 이 중에서 앞의 두 가지가 문학이 현대사회와 맺는 고유한 관계를 보여준다.

3.2 # 운동으로서의 문학, 화해와 반목의 스펙트럼[ | ]

현대사회와의 관계에 있어 첫 번째 경우에 속하는 갈래를 ‘운동으로서의 문학’이라고 불러볼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좀더 낫게 바꾸고자 하는 모든 행동을 사회운동이라 할 때, 부르주아지들이 품은 사회 변혁의 꿈을 나눠 가진 문학가들이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나선 까닭이다.

이러한 문학가들은 역사의 전개에 따라서 시민계층과 복잡한 관계를 맺게 된다. 근대 지식인의 등장과 변화 양상을 설명하는 사르트르의 말대로(<지식인을 위한 변명>) 이들 또한 유사한 과정을 겪는다. 등장 초기에는 부르주아지들의 이념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부르주아 계급 내에서 근대자본주의사회를 비판하는 세력이 등장하게 되었을 때 일군의 문학가들 또한 이에 가담한다. 그 결과 운동으로서의 문학은, 이데올로기상으로 볼 때 좌ㆍ우 문학 활동을 양극으로 하여, 여러 갈래로 폭넓게 펼쳐지게 된다.

우리나라 근ㆍ현대문학의 경우, 이광수와 염상섭, 이기영이 이러한 포괄적인 모습과 그 분화 양상을 잘 보여준다. 이광수(1892~?)는 우리 민족을 바람직한 근대인으로 개조하려는 소망을 담은 작품들을 줄기차게 발표했다. (1917), (1918), (1933) 등과 같은 계몽주의 소설이 그 성과이다. 이들 작품을 통해서 그는 자신을 수양하며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이상적인 인간을 바람직한 근대인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 스스로도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톨스토이의 문학세계 또한 동일한 갈래로 살펴볼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염상섭(1897~1963)은 자기 시대의 전체적인 모습을 객관적으로 그리는 데 주력한 작가이다. 그의 소설은 인간과 사회를 긴장 관계 속에서 형상화하고 있다. 사람살이의 근본적인 힘을 ‘돈’과 ‘성욕’이라 보고 그에 따르는 각계각층 사람들의 모습을 추적하는 방식으로 그는 사회의 전체적인 면모를 작품에 담아낸다. 그 대표적인 성과가 바로 한국 리얼리즘 소설의 주요 작품에 해당하는 <사랑과 죄>(1928), (1931) 등이다.

사회의 전체적인 모습을 담아내는 이러한 특징으로 해서, 염상섭의 문학 활동은 흔히 발자크(1799~1850)나 졸라(1840~1902)의 경우와 비교되어 왔다. 이들 또한 19세기 유럽 사회의 총체적인 면모를 작품화하는 데 평생을 바친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약 20년에 걸쳐서 쓴 70여 편의 소설을 통해 19세기 전반기의 프랑스 사회를 탐사한 발자크의 <인간 희극>이나, 유사한 의미를 갖는 졸라의 <루공 마카르 총서>(1871~1893)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중도적인 입장에서 사회의 전체적인 면모를 작품화하려는 이들과는 달리,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 개혁에 나서려 했던 경우가 좌파 문인들의 문학 활동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20~30년대 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활동이 그러한 경우인데, 이기영(1896~1984)이 주요한 작가이다. 그의 대표작 (1934)은 당시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였던 지주-소작농 갈등을 전면적으로 다루면서 좌파 계급투쟁의 사회관을 작품에 담고 있다. 같은 계열로 소련과 중국의 혁명문학을 들 수 있다.

3.3 # ‘작품’으로서의 문학, 현대사회의 역설적인 거울[ | ]

운동으로서의 문학 반대편에 ‘작품’으로서의 문학이 있어 근현대 사회와 내밀하지만 본질적인 긴장 관계를 이룬다. 예술지상주의를 극단으로 하는 이 흐름은, 자본주의 사회의 반예술적인 성격에 자신의 존재를 걸고 맞서왔다.

노동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던 원시종합예술(ballad dance) 이후로, 각 시대에 인정받던 문학과 예술은 대체로 삶의 현장에 직접 매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항상 현실 너머를 동경하며 정체를 규정할 수 없는 자신의 이상을 추구해왔다. 그 결과가 바로 문학 예술 작품에 고유한 광채 곧 아우라(Aura)의 획득이다. 아우라를 갖는 문학예술품은 하나의 ‘작품’으로서 인간이 만드는 다른 모든 산물들과는 달리 유일무이한 생명력을 갖는다.

문제는 이러한 작품의 창조가 현실사회의 논리에서 볼 때는 무용한 일이라는 데서 발생한다. 경제적인 이윤의 창출과는 거리가 먼 이러한 창조 행위에 대해 자본주의 사회는 충분한 보상을 제공하지 않는다. 후원제의 붕괴와 더불어서 ‘작품’의 창조를 뒷받침해줄 경제 외적인 조건이 없어진 까닭이다.

상황이 이러해서, 자신의 문학성을 계속 추구하고자 하는 문학가는 사회의 이단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실논리와는 다른 자신들 고유의 원리를 좇아 움직이는 그들은, 사회의 입장에서 볼 때 무익하고 가치 없는 자들이며 더 나아가서는 삶의 안녕을 해치는 위험한 존재였다. 그들이 창조하는 작품 또한 어떠한 실제적인 의미도 갖지 못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상태를 유지하는 각종 규범이나 금제를 위협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작품’으로서의 문학은 바로 그러한 존재 자체로써 우리 사회의 모습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어둠이 빛을 밝혀주듯이, 현대사회의 이물질이라 할 이 작품들의 존재가 현대사회의 진정한 면모와 일반적인 원리를 역설적으로 환기시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김동인(1900~1951)을 시작으로 하여, 나도향(1902~1927), 이상(1910~1937) 등의 문학이 이에 해당한다. 문예사조상으로는 차이를 보여도 이들은 모두 현실 건너편에 자신들만의 문학 세계를 꾸렸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예술의 창조에 들어가는 각고의 노력과 희생을 강조한 김동인의 (1929)나 (1935) 등은 예술지상주의의 면모를 보인다. 나도향의 <별을 안거든 우지나 말걸>(1922)과 (1923) 등은 현실을 돌보지 않고 특정 정서를 극대화한 감상주의(sentimentalism)의 극한을 보여주고, 이상의 시와 (1937), (1939) 등의 소설은 현실과 어긋났던 자신의 삶 자체가 작품으로 된 경우의 좋은 예가 된다.

자신만의 예술을 찾기 위해 경제적 궁핍과 사회의 몰인정, 냉대를 뒤로하는 이러한 모습은 근대의 문학 예술가들에게 널리 퍼진 현상이기도 하다. 멀리는 모더니즘의 선구로 꼽히는 보들레르(1821~1867)가 대표적인 예이며 그 뒤를 이은 상징주의 시인들 곧 폴 베를렌(1844~1896)이나 로트레아몽(1846~1870), 랭보(1854~1891) 모두 이러한 경우에 속한다. 현대사회의 논리 건너편에서 이들은 몇 편의 시를 이슬처럼 남기고 고단한 생을 마감했다. 현재의 우리 주변에서도, 작가가 되지 않았다면 얻을 수 있었을 물질적인 풍요를 뒤로하고, 일반인들은 쳐다보지도 않는 문예지에 작품을 쓰는 문인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3.4 # 문학 감상과 미래 꿈꾸기[ | ]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문학은 현대사회를 이해하는 데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준다. 사회 이념의 대변자이자 비판자인 운동으로서의 문학은, 현대사회의 참모습을 직접 보여주거나 우리가 이루어야 할 사회상을 제시해준다.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자신만의 성채를 쌓는 듯이 보이는 작품으로서의 문학 또한, 현대사회의 본질을 새삼 생각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이 모든 갈래들은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에게 익숙한 현실의 모습을 해체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현재의 사회를 낫게 만들고자 하거나 그에 귀속되기를 거부하는 태도 모두 현실이 문제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문학작품을 통해 우리도 현실을 낯설게 보고 좀더 나은 사회를 꿈꿀 수 있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문학작품이 그려 보이거나 염원하는 사회의 모습이란 궁극적으로 하나의 상, 하나의 이미지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문학작품을 전공 교재처럼 읽어서는 안 된다. 이들 작품이 의미를 갖는 것은, 작품을 통한 작가와의 대화에 힘입어, 익숙한 것들과 결별한 채, 현재 사회를 꿰뚫어보고 미래를 꿈꾸는 방법을 우리가 얻을 때뿐이다.

4 # 문학과 역사 - 지워진 것들의 복원[ | ]

4.1 # 역사물과 역사소설[ | ]

역사소설에서 사람들은 두 가지를 기대한다. 한편으로는 다른 경우들에서처럼 즐거움을 찾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소설 읽기 고유의 몫이라 생각하면서 역사의 진실에 대해 알고자 한다. 재미로 읽거나 역사를 알기 위해서 읽는 것이다. 문학전문가들의 용법대로 하자면 앞의 것이 통속적인 역사물이고 뒤의 것이 진정한 역사소설에 해당한다.

이러한 명칭에 담긴 가치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이 둘 사이의 차이는 알아둘 필요가 있다. 한 편의 역사 이야기가 어느 유형에 속하는지를 알 때, 그에 맞는 적절한 감상이 가능해지고 효과 또한 배가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유형의 역사 이야기는 시간을 사고하고 역사를 대하는 태도에서 차이를 보인다.

4.2 # 순환적인 시간과 재미의 왕국[ | ]

재미를 위주로 하는 역사소설에서 시간은 순환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역사는 반복의 측면에서 조명된다. 순환되는 시간을 타고 전개되는 역사란, 인물과 시대적인 상황이 다르다 해도 겉모습만 바뀌었을 뿐이어서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사건의 연속이 된다.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 단종의 인생이나(이광수, ) 경륜을 못 다 펴고 시운에 뒤쳐지는 대원군의 행적(김동인, <운현궁의 봄>), 무기와 권력이 위세를 떨치는 세상에서 비껴나 소리의 길을 좇는 우륵의 편력(김훈, <현의 노래>) 등은 인생의 덧없음으로 그 주제효과가 추상화된다는 점에서 사실상 동일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소설에서 배경으로 설정된 각각의 역사적 상황은 자기 고유의 목소리를 갖지 못한다. 우륵의 시대가 단종에게서 그리고 대원군에게서 반복되었다고 할 만큼, 인생에 관한 아주 보편적인 의미 곧 덧없음(vanitas)을 드러내는 역할에 머물 뿐이다.

신라 황실을 뒤흔든 미실의 욕망이나(김별아, ) 자유로운 인간이고자 했던 황진이의 바람(전경린, ), 주어진 숙명을 자유의지로 선택한 장씨 부인의 이상(이문열, ), 낯선 이국에서 생존을 위해 온몸을 던지는 연수의 역정(김영하, <검은 꽃>) 등 또한 개인적인 소망의 주관적인 발현인 까닭에 효과 면에서 실질적인 차이를 갖지 않는다. 여기서 역사는 단순한 배경으로 물러앉는다. 주인공인 인물이 한껏 도드라져서 마음껏 춤을 출 수 있을 만큼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는 흐릿한 배경에 그칠 뿐[머물면서], 그의 춤을 제약하거나 그것과 길항관계를 맺는 살아있는 힘으로 기능하지 못하는[기능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러한 소설들은, 기본적으로,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고, 인간의 삶과 사회의 상황이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라는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순환적인 시간관에 내포되어 있는 궁극적인 불변성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러저러한 과거를 배경으로 하더라도, 여기서 그려지는 것은 언제나 ‘사실상 비역사적인(a-historical) 동일한 사상(事象 Sache)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삶의 본질 중에서 시대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 시작과 끝이 일정한 동일사건의 반복인 셈이다.

해서 이러한 작품들 전체를 두고 보면, 각각의 소설들 또한 순환된다고 할 수 있다. 구성원이 바뀌어도 일정한 형식을 갖고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축제처럼, 대상이 달라져도 패턴은 변치 않는 부단한 연애처럼, 역사물들은 그렇게 반복된다. 인물과 배경의 역할 관계는 동일한 상태에서 시공간의 설정과 배역이 바뀌는 데 따라 주제가 반복되고 흥미가 재생산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해서 역사물 읽기는 쾌락 추구의 한 양상이기도 하다. ‘욕망으로 시작되고 그것의 해소로 끝을 맺는 단일한 과정’이 끊임없이 순환되는 것이야말로 쾌락 추구의 본질적인 속성이기에 그러하다.

이렇게 사실상 반복되는 이야기들을 선보이고 그에 따라 작품들끼리도 순환ㆍ반복되는 결과, 역사물들은, 현재적인 관심사 너머에 자기들만의 세계를 갖게 된다. 독자인 우리가 놓여 있는 현재의 특수한 소망이나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영원한 인간 본성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의 공간이 그것이다.

4.3 # 비연속적인 시간과 역사의 재구성[ | ]

두 번째 유형의 역사 이야기는, 앞서 살핀 역사물들이 역사를 몇몇 개인의 일인 양 그렸다고 즉 사사화(私事化)했다고 비판하면서 자신을 구별 짓는다. 이들 소설은 ‘역사의 진정한 모습’을 형상화하고자 하며 그러한 탐구심을 독자에게도 요구한다. 참된 역사를 그리고자 한다 해서 역사가 고정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역사 파악의 진위는 역사의 실정화 여부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역사 기술 자체가 항상 그렇듯이, 이러한 소설들 또한 과거의 역사를 현재의 전사(前史)로 ‘재구성’하는 데 궁극적인 목적을 두고 있다. 이것이 바로 현대소설의 한 장르인 역사소설이다(루카치, ).

이러한 역사소설에서는 시간이 비연속적으로 위계화된다. 중요한 시간과 그렇지 않은 시간, 현재적인 의미를 띠는 시간과 그렇지 못한 시간들처럼 분열되는 것이다. 이러한 분열 상태 그 서열관계의 윗자리를 차지하는 특정한 과거가 현재화된다.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의 연속체를 파괴하면서, 현재적인 관심사가 자신의 미래를 과거의 특정한 시간에서 찾는 것이다. 프랑스혁명이 스스로를 로마의 환생으로 생각하고, 87년 6월이 4ㆍ19와 5ㆍ18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았던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방식에 의해 역사소설에서 역사는, 동질성과 연속성을 잃고 현재로 충만한 시간 위에서 새롭게 짜여진다.

따라서 역사의 진정한 모습을 재구성한다는 것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 자신에게 의미 있는 과거를 환기해내어 새롭게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주어진 역사를 승리자들의 역사, 야만의 역사로 해체하면서 이러한 욕망은, 기존의 역사에서 지워진 것들을 복원하고자 한다(벤야민, 참조). 이를 두고서, 현재로 의미 있게 귀환하기 위해서 과거를 현재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현대적인 역사소설들은 바로 이러한 욕망을 좇아 과거로 도약한다.

역사소설들이 보이는 역사 재구성의 양상은 단일하지 않다. 현재의 관심사에 따라서 ‘복원되어야 할 지워진 것들’이 달리 설정되고 복원 방식 또한 변화되는 까닭이다. 역사에 객관적인 발전 법칙이 내재해 있으며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다는 역사주의적인 신념이 위력을 떨칠 경우 대체로 정통적인 리얼리즘의 방식이 선택된다. 갑오농민운동을 총체적으로 그려낸 송기숙의 이나, 한국전쟁 전후의 현대사를 재구성한 조정래의 , 베트남 참전 문제를 현재의 시각에서 조명한 방현석의 소설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 소설에서 시공간적인 배경은, 시대적인 제약과 현실의 위력으로 힘을 발휘하면서 인물들과 긴장 관계를 맺는 등 주제 구현에 있어서 고유한 기능을 한다. 새롭게 조명되고 재구성된 것이긴 하되, 실제의 현실처럼 제 힘을 잃지 않는 것이다.

역사주의적인 신념이 붕괴된 이후에는 모더니즘적인 기법이나 환상적인 방식 등이 자유자재로 구사되기도 한다. 한국전쟁의 비극과 분단의 고통을 그려낸 황석영의 이나 4ㆍ3사건에서 광주민주화운동에 이르는 현대사의 굴곡에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임철우의 <백년 여관> 등이, 토속적이고 환상적인 방식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대표적인 예가 된다. 산 자와 죽은 혼령이 만나서 대화하거나 이승 너머의 존재들이 영향력을 발휘하기는 해도, 그러한 설정이 역사를 주관적으로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진상을 파악하는 데 복무하는 방식으로 기능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경우에서 역사는, 작품 자체를 통해서 재구성될 뿐, 작품 속에서 주관적으로 변형되는 것이 아니다.

4.4 # 역사 이야기를 통한 시간 여행[ | ]

역사가 고정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역사란 본질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하고 그 기억과 전승이 언어를 통해서만 가능할 뿐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사정이 이렇다고 해서 역사가 주관적인 산물일 수 없음 또한 분명하다. 역사 기술의 궁극적인 목적이 현재를 올바로 이해하고 미래를 기획하려는 것인 이상, 현재 현실의 객관성이 역사 구성의 궁극적인 발판으로 기능하는 까닭이다. 역사소설은 바로 이러한 의미로 역사 기술과 같은 부류에 속한다. 그것은 ‘지워진’ 것들을 복원함으로써 미래를 기획한다.

역사물로 구획되는 또 다른 소설들은 역사 속에서 ‘잊혀진’ 것들을 되살려 문학 본연의 기능을 다한다. 이 경우는 역사의 재구성이 아니라, 문학 읽기의 흥미 혹은 인간 본성이나 인간 삶의 보편적 특징의 구현에 목적을 둔다. 역사를 소재로 하여 인간 삶의 비역사적인 본질을 환기시켜주는 것이다.

두 종류의 역사 이야기가 선사하는 ‘지워진 것들의 복원’과 ‘잊혀진 것들의 환기’, 이를 통해서, 시간을 넘나들며 우리의 삶과 사회를 새삼 바라보는 것도 좋으리라.

5 # 대중문화와 문학 - 원한[르상티망]과 재미[ | ]

5.1 # 분열된 문화의 폭력[ | ]

우리 사회의 특징 중 한 가지는 문화의 정체가 모호해졌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사람들에 따라서 ‘문화’라는 말이 의미하는 내용과 가리키는 대상이 큰 차이를 보인다. 그 결과 사람들의 ‘문화생활’도 천차만별이고 ‘교양 있는 문화인’의 모습도 각양각색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소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뿐이다.

첫째는, 개념과 경계는 모호해도 우리의 문화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로 양분되어 있다는 점이다. 한편에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예술을 축으로 하는 고급문화(refined culture)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텔레비전과 컴퓨터, 인터넷 등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대중문화(mass culture)가 있다. 예술과 기술을 축으로 하는 두 문화가 서로 마주보며 있는 셈이다. 이렇게 서로 반대편에 위치해 있지만, 이들 문화는 모두 사람들의 실제적인 삶의 공간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민중ㆍ민속문화(popularㆍfolk culture)가 소멸된 까닭이다. 이로써 우리 삶의 정수(精髓)로 문화가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문화의 논리에 삶이 휘둘리는 상황이 전개된다.

5.2 # 얼리 어답터와 타임 걸의 문화[ | ]

우리 시대의 문화에 대해 말해볼 수 있는 두 번째 사항은, 그 수용 과정에서 유사한 면모가 확인된다는 점이다. ‘따라하기’와 ‘과시하기’가 그것이다.

고급문화든 대중문화든 우리는 문화 산물들을 소비하는 데서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도록 노력한다. 집단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든 남들처럼 산다는 위안을 얻기 위해서든, 새로운 문화 산물들을 끊임없이 소비하는 데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유행처럼 뚜렷한 근거를 갖지 않은 채 덧없이 변하는 대중문화의 경우 이러한 현상이 좀 더 심하지만, 고급문화라고 사정이 다르지는 않다. 예술 애호가로 자처하기 위해서는 각 분야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게 되었다. 새롭게 쏟아져나오는 문화 산물의 동향을 재교육[르시클라주 recyclage]받아야 하는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다.

새로운 산업 제품이 나올 때마다 곧장 그것을 구매하는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와 다를 바 없는 이러한 상황, 문화의 ‘르시클라주’ 현상이 강화되는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전통에서 멀어지고 비판적 사고의 여지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의미와 가치를 음미하기 전에 스스로를 재교육시키며 추세를 따라가야 하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리하여, 문화생활의 영역에서 가장 반문화적으로 행동하게 된다는 우리 시대의 역설이 가능해진다(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참조).

현대 문화생활의 또 다른 특징은 ‘과시하기’의 성격이 강하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태도도 다시 둘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따라하기’의 심리가 극대화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얼리 얼리 어답터’로 자신을 내세우는 경우이다. 둘째는 양 문화의 경계를 넘어서 따라하기가 이루어질 때이다. 대중문화 수준의 안목을 가진 채 고급문화를 따라하여 생기는 조잡한 문화 곧 ‘키치(Kitsch)’가 대표적인 예이다.

키치에 대해서는, 대중들의 심미안이 발전해나가는 과정을 증명해주는 것이라고 역사적인 면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에드워드 쉴즈, <대중사회와 대중문화>), 그 원리에 있어, 문화예술을 감상ㆍ이해하기보다 그것을 소유하고 소비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지위를 뽐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칼리니스쿠,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 한강변에 늘어선 고딕 풍의 아파트라든가, 바로크적인 외양을 갖춘 가구와 모조 도자기가 함께 진열되는 우리 시대 중산층의 거실 등이 키치적인 문화 수용의 좋은 예가 된다. 이러한 수용자들은,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지를 옆에 끼고 다니며 대학생임을 은연중 과시하던 1980년대 ‘타임 걸’의 선후배며 동료이다.

5.3 # 대중문학의 두 얼굴[ | ]

문화의 르시클라주 현상이 우리에게 얼리 어댑터의 강박을 부여하고, 키치적인 면모가 우리들을 타임 걸의 후예로 만드는 현상이 좀더 짙게 드러나는 것은 물론 대중문화에서이다. 대중문학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인터넷에 산재해 있는 대중문학 사이트의 글들 대부분은, 어떠한 작품이 나왔으며 무슨 작품을 읽었다는 사실의 기록에 그쳐 있다. 작품의 의미나 의의에 대한 생각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과 동향을 파악하고 따라가는 데 집중할 뿐이다. 상황을 주도하는 소수 마니아들의 동향 소개 글이나, 드물게 볼 수 있는 다소 깊이 있는 분석 글들을 퍼 나르는 것 또한 동일한 행위에 속한다. 그 글들에 대한 평가나 판단은 거의 없이, 남들보다 빨리 그리고 많이 옮기는 데만 몰두하는 까닭이다. 대중문학의 부정적인 양상은 이렇게, 예술적으로 저급하기는 한 대중문학 작품들 자체의 수준에 있다기보다, 그것을 수용하고 전파하는 일반적인 방식이 보이는 무의식성에서 찾아진다.

대중문학 자체가 나쁘거나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탄생 과정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는 역사적인 의의와 더불어 대중문학 작품들의 주제효과 또한 매우 소중하다.

대중문화 및 대중문학의 의의는 무엇보다도 문화 향유의 민주화를 증대시켰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대중문학이 수립된 이후 1950년대 초의 미국 텔레비전 방송에 이르기까지, 형성기의 대중문화는 말 그대로 문화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책과 신문 라디오 영화 텔레비전 등 대중적인 의사소통 매체를 통해 고급문화가 대중들에게로 확산되어 들어간 것이다. 이후 자본의 논리가 우세해지면서 대중문화의 저속화 현상이 심해지기는 했어도, 대중문화의 발전이 문화생활의 민주화를 증대시킨 공로는 잊을 수 없다.

대중문화의 산물, 대중문학 작품들이 보이는 작품 세계 또한 나름대로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초창기 대중문학에 있어서, SF가 보인 과학적 사고에 대한 지지와 경계나 추리소설이 전제로 하는 합리적인 추론 능력에 대한 신뢰 등은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이다. 과학의 미래를 낙관하는 줄 베른의 SF는 메리 셀리의 이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등이 보이는 우려와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셜록 홈즈 시리즈>는 당대 사회의 사실주의적인 보고 기능도 겸하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감상성이 짙은 연애소설이나 엽기적인 호러물 또한 필요한 것이고, 실제 사회와는 무관한 세계에서 나름의 법칙을 가지고 전개되는 무협소설이나 판타지 등도 유흥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순기능을 인정하지 못할 것이 아니다. 추리와 환상, 과학적 원리, 에로티즘 등이 대중문학에만 고유한 것이 아님은 자명한 일이니, 그러한 요소로 일관하였다고 대중문학을 탓하는 것은 편협한 처사라 할 수 있다. 고급문학과 교양, 여타 예술이 주는 재미 이외의 측면 즉 인간성을 고양시키거나 사회적 삶에 대해 반성하게 해주는 것 등과는 거리가 있어도, 대중문학이 제공해주는 유흥과 재미 또한 인간의 필요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5.4 # 원한의 치유, 진정한 향유[ | ]

우리나라에서 대중문학은 약자의 불행한 역사를 겪어왔다.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대중문학은 저급한 것으로 여겨져 제대로 된 독서물로 인정받지 못했다. 문학의 유흥 제공 기능이 문학 논의에서 거론조차 되지 않는 시대 분위기 등을 이유로 들 수 있다. 그 결과 SF, 추리, 판타지 등 중요 장르문학들은 주로 아동용으로 소개되고, 연애소설은 하이틴문학으로, 무협은 청소년 및 성인들의 저속한 독서물로 낙인찍혔다.

최근 20년간은 이러한 상황이 극적으로 전복되는 시기였다. ‘전복’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닐 만큼 대중문학의 위력이 막강해져서 본격문학 또한 그 물결에 휩쓸리거나 고립되는 형편이다. 대중문학의 득세로 인해서 대중들의 문학활동 일반이 ‘따라하기’와 ‘과장하기’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보면, 지나온 불행한 역사 속에서 대중문학이 원한[르상티망 ressentiment]을 품었다고 할 수도 있다. 약한 노예가 약함을 선으로 강함을 악으로 규정하는 도덕상의 반란을 통해 주인을 부정하고, 끝내는 본능을 전도시킨 명제를 따라 폭력을 행사하듯이(니체, <도덕의 계보>), 오늘의 대중문학 특히 그 소비 양상은 문학계 전반에 르시클라주와 키치 현상을 만연시키며 문학의 죽음을 재촉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남아 있는 탈출구는 무엇인가. 문학 감상이 문화의 향유가 되도록 하는 것뿐이다. 작품을 마주할 때 옆을 힐끗거리거나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작품에 담겨 있는 요소들을 작품 내에서 충실히 음미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문학 읽기가 진정한 문화생활이 되게 해 주는 기본적인 자세이다. 대상이 고전이든 장르문학이든 이러한 사정이 바뀔 리는 없다.

6 # 다시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 ]

P군에게.

문학에 대한 몇 가지 상념을 전하는 일도 이제 막바지에 다다랐네.

문학의 정체를 잘라 말하기 곤란한 상황에서 우리가 취할 자세는 무엇인가에서부터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네. 한 가지 문학관을 고집하는 것보다는 문학의 다양한 얼굴에 골고루 시선을 던지는 것이 현명하리라 했지. 다소 막연한 이러한 전제에서 우리는 인간과 사회, 역사에 대한 문학의 시선을 살펴보았네. 그러면서 ‘운동으로서의 문학’과 ‘작품으로서의 문학’이 보인 다채로운 면모를 시공간적으로 간략히 훑어보았네. 그 결과로 우리는, 인간의 자유로운 면모를 확장하고 사회의 잊혀진 것들을 복권시키며 역사를 재구성하거나 보편적인 즐거움을 제공하는 문학의 갈래들을 정리해볼 수 있었네. 끝으로 우리는 휘황찬란한 대중문화의 한 영역인 대중문학 곧 ‘유흥으로서의 문학’을 이야기하면서 우리 시대 문화활동의 특징에 대해서도 짚어보았네. ‘따라하기’와 ‘과시하기’가 그것이었지.

P군, 이 시점에서 나는 진부한 질문 한 가지를 다시 떠올리네. 바로 ‘문학이란 무엇인가’가 그것이네.

자네를 포함한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깔려 있는 것이 바로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실체 규정적인 질문이네. 사실 보통 사람들도 의식하지만 않을 뿐, 언제나 이 물음을 바탕에 두고 문학을 접하게 마련이네. 귀여니의 소설을 두고 벌어졌던 네티즌들간의 공방이나 팬덤(fandom)이라 불리는 장르문학 애호가들의 행동은 극단적인 예일 뿐이지. 서점의 문학 코너에서 책을 골라 지갑을 열 때마다 우리들 각자는 이 질문에 답하고 있는 셈이니 말일세.

사정이 이러하니,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음미하는 것으로 우리 이야기의 끝을 시작하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싶네. 지금까지의 문학 이야기를 살려줄 바가 여기에 있는 까닭이네.

6.1 미래에 대한 규정[ | ]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네. 실체를 묻는 인문학의 질문들이 대체로 그러한 것처럼 하나의 명확한 답을 갖고 있지는 않은 까닭이지. 따라서 필요한 일은, 답들 중의 하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답이 여럿일 수밖에 없는 질문을 던지는 일’의 의미를 따져보는 것일세.

사실 이 질문은 문학의 정체를 묻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네. 이 질문에 답하는 수많은 논의들을 일별해보면 사정이 분명해지네.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경우에 따라서 ‘문학이란 무엇이라고 생각되어 왔는가?’ 혹은 ‘문학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등을 의미하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문학은 어떠한 것인가’를 거쳐서 ‘문학의 기능은 무엇인가’ 등으로 사실상 치환되곤 했네. 이렇게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실체 규정적 질문은 실체의 규정에 국한되지 않는 다양한 담론 속에서 제기되어 왔던 것이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 형식이 유지되는 것은, 위의 다양한 질문들을 포괄하면서 문학의 실체를 규정하려는 지향성을 내장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

이렇게 이 질문의 성격을 명확히 해 두고 보면 이 질문을 던지는 일의 의미 또한 자명해지네. 결론을 당겨와 말하자면, 요컨대 이 질문은 반성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네. 현재의 문학을 규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문학을 뒤돌아 살펴봄으로써 문학의 미래 모습을 규정하고자 하는 것이란 말일세.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유추적으로 생각해보게.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겠는가. 어떤 상황에서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되는가를 생각해보면 답이 조금 분명해지네. 이 질문은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네. 그것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이루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어 자신의 미래상을 모색하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네. 그렇지 않은가.

같은 의미에서,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또한 ‘탐구’가 아니라 ‘형성’에 관련된다고 할 수 있네. 현재 우리 주위의 문학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학이 장차 어떠해야 하겠는가라는 소망과 바람을 담은 질문이라는 말일세.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문학의 과거와 현재가 아니라 그 미래에 관련되어 있네. 달리 말하자면 이 질문은 그러니까 ‘미래에 대한 규정’을 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네.

따라서 이 질문을 우리가 공유할 때, 우리의 문학활동 곧 문학작품에 대한 향유의 방식과 의미가 달라질 것이네. 나아가서, 그것을 일부분으로 하는 우리의 문화생활 전반의 양상 또한 달라지겠지. P군, 어떤가, 너무 거창한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네. 우리가 무엇을 묻는가 그 물음을 통해 무엇을 추구하는가에 따라 얻는 것이 달라지기 마련 아니던가. 이 질문이 지금까지의 우리들 문학 이야기를 살려주리라는 뜻이 여기에 있네.

6.2 엘리트주의와 팬덤을 넘어서[ | ]

P군. 이제 우리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고 함께 묻는다면, 우리는 이 질문을 통해 무엇을 요구해야 하겠는가.

일단 소극적으로 이야기해보세. 나로서는, 적어도 다음 두 가지 곧 엘리트주의와 팬덤만큼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네.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바로, 편협하기 때문일세. 편협함이야말로 반문화적이라고 나는 믿네.

엘리트문학도 필요하고 팬덤을 구성하는 장르문학 또한 소중하지만, 그 각각이 문학의 왕자임을 참칭하는 것은 곤란하네. 그럼으로써 문학의 왕국을 자신의 영역으로 한정하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네.

누보로망(nouveau roman)에 뿌리를 두고 모더니즘 지향성의 극단을 달리는 난해한 문학이나 독특한 철학세계에 근거하여 보통사람들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문학세계 등과 같은 것만을 애호하여 대중과 소통하지 않는 자세뿐만 아니라, 교과서와 문학사를 장악하고 있는 본격문학만이 진정한(!) 문학이라고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태도 등이 부정적인 엘리트주의의 실상이 될 것이네. 이러한 문학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지마는 그것만을 문학인 양 편애하는 것은 문제라는 말일세.

마찬가지로, 장르문학에만 빠져서 주류문학을 뱀과 구렁이 보듯 하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하네. SF팬덤에서 이러한 목소리를 듣는 것은 일도 아니라 할 만큼, 대중문학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향 또한 심히 우려할만한 일이네. 교과서 문학과 애호하는 문학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아두고, 예컨대 무협소설만이 소설인 줄 안다면 이는 불행한 일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물론, 넓게 생각하면 문학 감상에서의 엘리트주의도 필요하고 팬덤도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하지만 문학 수용자 한 명 한 명의 입장에서 보면 사정이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 현실이네. 엘리트주의와 팬덤 양자에 두루 친숙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를 꿈꾸느니 우리의 문학활동 양상이 편견을 넘어선 상호소통의 모습을 띠기를 바라는 것이 옳지 않겠나 싶네.

6.3 원하는 만큼 얻는 유토피아[ | ]

P군, 여기 문학의 왕국이 있네.

끊임없이 경계를 확장해 나아가고, 도로망이 항시 변경되며 건물의 위치와 모양, 위상이 부단히 바뀌는 이곳은 어떠한 지도도 용납하지 않네. 자네가 남기는 자취가 곧 길이며, 자네가 머무는 모든 곳이 집이자 고향이고, 자네 발걸음 닿는 곳까지가 국경이네.

P군 자네는 지금 유토피아를 보고 있네. 한 가지 길과 특정한 모양의 집만 고집하지 않는다면, 그 대상이 무엇이든 자네가 원하는 만큼을 얻게 되는 곳이기 때문이네. 원하는 만큼 얻는 곳, 이야말로 유토피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문학이라는 유토피아의 왕국 앞에 선 P군이여, 부디 두루두루 돌아다니길 바라네.

무엇보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그리고 미래를 열어두기 위해서도 우리에게는 넓은 시선이 필요하네. 차이를 인정하면서 개별자들 하나하나를 존중하는 태도야말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지 않는가. 바로 이러한 까닭에, 문학의 왕국을 여행하는 군을 위한 안내서에 다음 몇 가지를 적고 싶네.

어슐러 르 귄의 <빼앗긴 자들>에서 사회사상을, 브란튼베르그의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페미니즘을 배우고 이해할 수 있을 걸세. 김주희의 <피터팬 죽이기>나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은희경의 등에서 군은 보통사람들의 속내를 울고 웃으며 볼 수 있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군은 사랑의 몇 가지 표정을 읽게 될 것이고,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 속에서는 부단한 인간사로서 역사를 보게 될 것이네. 이들 각 동네에서 군의 발걸음을 넓히게.

군을 위한 안내서에 적힌 이들 주소들의 열린 총합이야말로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포함된 모든 질문들에 해답을 주는 것일세. 정체성 찾기란, 원래, 여러 길을 밟는 편력의 다른 이름이 아니던가. 부디, 얻고자 하는 만큼 원하기 바라네.

7 # 촌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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