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로의 공공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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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현대미술관련 과목을 들을때 작성했던 리포트로군. 테헤란로에서 일한게 벌써 3년인데 이동네는 정말 언제봐도 아니다. 이 리포트는 그래도 꽤 열심히 썼는데 결과는 안좋았다. 교수가 원했던 것이 아니었나? 결코 재미있지 않았던 바보같은 수업이었다.


공공미술이란 말 자체를 생각해보자.
왜 이런 말이 생겨났는가.
분명히 공공이 접하는 환경이 그 조형성을 획득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 말일 것이다. 원래 뭔가가 빈약할수록 그것에 힘을 실어 말하기 마련이니까. 결여된 것을 좀 덜 자연스럽지만 생각하기 쉬운 방법으로 해결하려 시도한 것이 공공미술인 것이다.
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공간을 활용하는데 있어 건축이나 조경이 가지지 못한 미술이나 조각만의 특징을 그것들에 행복하게 결합시키는 것이라고.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 주위를 한번 둘러본다면 좀 민망해질 것이다. 이러한 말은 공공 환경이 조형성을 얻고 난 뒤에야 비로소 설득력 있는 말이다.
세상이 이렇게 삭막해진 것은 자본주의가 가진 과도한 기능주의 때문이다.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쑥밭이 된 유럽이나 일본에서 하루빨리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 뛰고있는 판에 조형성은 사치였다. 유럽은 워낙에 유구한 근대문명의 나라라 논외이고 일본만 해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치른 나라니만큼 그런대로 낫다.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에 전통과 철저하게 단절되고, 자유를 찾은 뒤에도 군바리들이 30년 이상 무대뽀로 설쳐서 나라 꼴을 갖추었기 때문에 되먹지 못한 기능주의의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것의 가장 큰 예가 바로 우리의 생활공간을 이루고 있는 이 서울대학교라 할 수 있다. 회색과 블럭형 건물이 전체를 뒤덮고 있다. 이 좋은 산자락에! 한적하게 먼 곳을 바라보며 술만한 곳도 별로 없고, 있어도 꼭 벤치 바로 옆이 쓰레기통이거나 건물을 정면에 두고있다. 왜 존재하는지조차 알기 힘든 총장잔디와 도서관 앞에 거대하고도 당당하게 서있는 관료주의의 상징인 본부가 숨통을 꽉 막고 있다. 최근에 세운 건학 50주년 기념물은 정말 추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무개념적인 관료주의가 만들어낸 공간 파괴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애석하게도 우리의 공간활용이 거의 이러하다. 뭐든 만드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왜 모르는지.
노자 도덕경11장은 우리말로 풀면 다음과 같다.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통에 모여있으니
그 없음에 수레의 쓰임이 있다.
진흙을 이겨 그릇을 만드니
그 없음에 그릇의 쓰임이 있다.
문과 창을 뚫어 집을 만드니
그 없음에 집의 쓰임이 있다.

따라서 있음의 이로움은 없음의 쓰임때문이다.

일단 이 '없음의 쓰임'이 전제된 뒤에야 비로소 그 '없음'에 뭔가 '있음'을 채워 넣을 것인데 우리 주위의 공간은 전혀 그러하지 못하다.

비교적 성공적인 공공미술 실현의 예라고 불려지는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97을 보며 바람직한 공공미술의 지향점을 생각해 보았다.
일단 여기서 볼 수 있는것은 이 뮌스터라는 도시가 자체로 공원이라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프로듀서가 이러한 성격의 기획은 오직 뮌스터에서만이 가능하다고 자부할만한 여건이 되는 것이다. 도덕경에 나온대로 일단 '없음'이 된다.
아마도 이 프로젝트의 가장 인상깊은 점은 공공미술이 가져야할 가장 당연한 명제-공공미술은 주위 환경을 고려해야 한다는-를 철저하게 밀고나간다는 것이다. 작가들이 작품을 이곳에 와서 구상하고 설치하게 하면 아무래도 좀 더 조화로운 작품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기본이 잘 되어있는 이상 이 프로젝트는 절반의 성공을 했다고봐도 좋겠다.
그러나 미술이 가진 개인적인 측면과 공공이라는 말이 갖는 사회적인 측면은 정면에서 충돌하게 마련이며 실상은 알 길이 없으나 도판으로 접한 몇몇 작품들은 이런 우려감을 낳게하기 충분하다.
백남준이 설치한 32대의 자동차가 절대적인 무언가를 표상하는 위대한 작품이라고 치자. 그렇지만 광장 한가운데 떡 버티고 있는 그 오브제들이 있는 한 그 광장의 공공성은 무참하게 파괴된다. 이것은 에르크맨의 하늘을 나는 조각에서도 나타난다. 헬리콥터가 질질 끌고다녀야하는 이 작품이 공공성을 가지기란 무척 힘들다. 이벤트가 아닌 이상에야 누가 그 헬리콥터 기름값을 대겠는가? 조각 프로젝트라면 말이 되지만 그것에 공공미술이라는 이름을 걸어선 안된다.
역시 첨예하게 드러나는 개인과 사회와의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공공미술의 최대 과제이다. 공간은 어느정도 확보되어있는가, 심미적 쾌감만을 위한것인가 아니면 편의를 제공 할수도 있는것인가, 어느정도의 실험성이 허용될 수 있을것인가, 모든 세대에 어필하여야만 하는가 등등의 숱한 문제가 걸려있는 것이다. 게다가 미술작품인만큼 관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도 있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극복하여야 나머지 절반의 성공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럼 공공미술을 말함에 있어 고려할 문제가 압축된다.

  1. 공간을 얼마나 확보하고 있는가.
  2. 주위 경관과의 조화도는 어떠한가.
  3. 편의를 제공할 수 있는가.

이러한 점들에 기초하여 테헤란로에 위치해있는 몇가지 공공미술작품과 건축물과의 관계에 대해서 고찰해 보았다. 지하철 2호선 선릉역에서 포스코 빌딩쪽으로 가는길과 그 건너편 길에 있는 몇몇 미술작품들과 포스코 빌딩을 그 대상으로 삼았다.
표로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번호 작품 작가 위치 완성도 친화도
S01P01 위대한 탄생 최기원 샹제리제 빌딩 B- D0
S02P02 미상(장승) 미상 다봉타워 C+ D0
S--P03 미상(삼성중공업 빌딩) 미상 삼성중공업 빌딩 B0 B+
S03P-- 미상(수직) 미상 포스코 빌딩 B0 B-
S04P04 미상(포스코 빌딩) 미상 포스코 빌딩 A0 B+
S--P05 설악산 풍경 김종학:93 포스코 빌딩 C+ C-
S05P06 Amabel Frank Stella:97 포스코 빌딩 B0 B0
S--P07 큐브 95-II 도흥록:95 포스코 빌딩 B0 B+
S--P08 무제 심문섭:95 포스코 빌딩 C+ B+
S06P09 EBENEZER 이일호:96 신스타워 빌딩 C+ C+
S07P10 集律 문인수:95 연당 빌딩 C+ D+
S08P11 미상(종) 미상 대종 빌딩 C+ D+
S09P12 미상(나무) 미상 대원타워 B+ A-

S00P00은 slide no + picture no로 이루어진 기호이다. 완성도는 작품이 주는 미적 감흥에 의한 완전히 주관적인 것이다. 친화도는 주위 환경과 얼마나 어울리는가, 얼마나 효용이 있는가를 기준으로 삼았다.
먼저 '위대한 탄생'을 보자. 작품 자체로는 뭔가가 태어난다는 느낌을 주니까 뭐 그런대로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친화도에서 문제점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일단 작품 바로 옆에는 신한은행의 현란한 입간판이 자리하고 있고 그 뒤에는 빌딩의 현관이 아주 크게 위치해 있으며 그 위에는 또 커다란 간판이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이 있을 곳은 전혀 없다. 안쓰러워 보일 정도다. 게다가 작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화단이 가꿔지지 않아서 더러운 도시의 이미지를 더해준다. 이 나무 가꾸기나 화단의 부조화는 빌딩마다 거의 나타나 있는데 화단 관리가 얼마나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하는지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미상(장승)'을 보면 작품은 그냥저냥 밋밋하나 역시 친화도에서 문제점이 나타난다. 빌딩 앞이 주차장으로 쓰이는거야 어쩔수 없는 고질이니 경관이고 뭐고 넘어간다 하더라도 조각이 빌딩에 딱 붙어 있어서 왠지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다는 느낌을 준다. 1%법이 잘못 시행되는 전형적인 예가 아닌가 한다.
'미상(삼성중공업 빌딩)'은 아무 조각도 있지 않다. 대신 화강암의 재질을 잘 살린 건물 외관과 현관 주위를 툭 터놓고 않을 곳을 만들어놨다는 것 만으로도 다른곳과는 큰 차별성을 갖는다. 나는 기본적으로 대기업들의 마크를 혐오하는 편이지만 그런대로 깔끔한 파란색으로 마크가 찍혀있어서 산뜻하다는 느낌을 준다. 이는 사진은 안찍었지만 옆의 LG빌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쉴자리와 공간을 확보해 놓았으며 석조 입간판이 산뜻하게 세워져있다. LG의 로고는 대기업들의 마크중 가장 인상적이라고 생각한다.
'미상(포스코 빌딩)'을 보자. 워낙 건평이 큰 건물이기는 하지만 다른 빌딩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공간감과 위용을 보여준다. 왠지 극우적이라는 느낌을 갖게하는 태극기만 없다면 더 좋았을 법 했지만 강철과 유리로 이루어진 이 건물은 포항제철이라는 세계 최대 규모의 기업을 당당하게 상징한다. 내부로 들어가면 백남준의 TV나무라는 작품이 있긴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인상적인 것은 바로 투명한 엘리베이터이다. 기계가 움직이는 것을 여과없이 보여주어 우리는 옛날 프랑스 만국박람회에서 사람들이 느꼈을법한 기계문명의 꿈을 볼 수 있다. 이미 허망한 꿈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연친화적으로 살지 않으면 분명 파멸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기계적 사고관, 진보주의 세계관의 유혹에 끌린다. 전체적으로 일관된 단순함, 건조함의 이미지가 산뜻하다는 느낌을 주며 자그마한 철강 박물관도 있어 발길을 머물게 한다. 반면 그 조화를 깨는 것도 있으니 그것이 바로 '설악산 풍경'과 같은 그림들이다. 이 단순한 공간에 그런 요란한 유화가 있을 필요가 없다. 화단이나 커튼까지 무채색의 단순한 것들로 잘 꾸며놓은 곳에 이것들이 있어 어색한 느낌을 준다. 정말 옥의 티같은 것이다. 적어도 문외한인 나에게 이 건물은 거의 나무랄 데가 없다.
외관역시 널찍한 공간에 큼지막한 작품을 설치해놓았는데 스테인리스를 구겨놓은 것이 프랭크 스텔라의 작품 '아마벨'이다. 그의 네임벨류에 비해서 왠지 작품자체는 초라해보이는데 아마벨이란 것이 뭘 뜻하는지도 알 수 없을 뿐더러 부제-A Flowering Structure in Memory of Amabel-처럼 뭔가가 피어오른다는 느낌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아르망의 폐품모음같은 것이 더 어울릴 뻔 했다. 아무래도 우리 도시에는 로댕의 조각보다는 브랑쿠지의 조각이 더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포항제철의 이미지에도 단순한 작춤이 더 어울릴 것이다.
반면에 '무제'나 '큐브'와 같은 작품들이 건물과는 더 어울린다. 작품 자체로는 그런대로 좋지만 만약 작가가 이것이 공공미술이라는 생각을 했다면 '큐브'같은 작품은 사람들이 앉아서 쉴 수 있는 좀 더 친절한 작품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무제'같은 경우는 소나무들과 그런대로 어울리는 산뜻한 작품이다. 소나무 주위에 검은 자갈을 놓고 작은 나무들을 심어놨는데 그것보다는 아무것도 없이 검은 자갈만 두었다면 더 좋았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중요한 것은 전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빌딩 전면에 위치한 택시 정류장과 '큐브' 옆에 있는 공붕전화 부스가 바로 그것들이다. 이것들은 공공미술이란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우리 주위를 예술품으로 채우는 것, 그것이 바로 공공미술 아니겠는가. 산업디자인의 영역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뭔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한다. 단순함과 실용성의 조화를 꾀하는 것은 어떤 건축가든지 어떤 (실용) 미술인이든지 항상 생각하여야 한다.
포스코 빌딩 건너편으로 넘어오면 'EBENEZER'라는 작품을 볼 수 있는데 뭐 평범하고 진부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공간도 좁고. 하지만 건물의 전면은 꽤 아담하다는 느낌을 주면서도 산뜻하다. 19세기 은행건물같은걸 연상하게 하는데 그리 뛰어난 것은 아니나 평범한 블럭형의 건물들보다는 훨씬 낭만적이라 하겠다.
좁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효과적으로 공간을 활용했다고 느껴지는 것이 바로 '미상(나무)'이다. 건물 입구를 확 터놓고 현관을 만들었으며 그 옆을 파놓아 공간감이 느껴지게 한다. 그 앞에 서있는 간결한 나무상은 회색 건물에 있어서 홍일점의 역할을 하여 시선을 끌 뿐만 아니라 작품 자체만으로도 꽤 괜찮다는 느낌을 준다. 다른 것들과 워낙 차이가 크게나는 포스코 빌딩을 제외하면 이 대원타워가 가장 인상적인 건물이다.

실례에서 볼 수 있듯 일단 여유 공간을 확보해놓지 않으면 작품의 완성도와는 관계없이 보는 이로 하여금 답답한 마음만을 가지게 한다. 공간을 확보한 뒤에는 그 주위 환경에 맞추어 작품의 성격을 결정하여야 한다. 앞서 밝힌대로 우리 도시에서는 비교적 간결하고 청량감이 감도는 작품이 좋다. 그 다음에 시민들을 위한 공간인만큼 그들에게 편의를 제공할 수 있도록 식수대나 의자정도가 갖추어져 있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물론 그것보다 좋은 것은 우리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생활속의 아름다움을, 건축 자체의 아름다움을 살리는 것이다. 의자 하나를 만들더라도 전자제품 하나를 만들더라도 그러한 것을 생각하고 더 나아가 건물을 지을때도 조금은 낭만적으로 할 수도 있는것이다.
앞서 공공미술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충분히 논하였으므로 부언하지는 않겠다. 무엇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은 수용자가 주체적으로 미적 감수성을 기르는 것이다. 수용자의 요구를 거부할 수 있는 공급자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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