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국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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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

The Gate of Heavenly Peace
天安门
천안문, 톈안먼, (한국개봉명) 태평천국의 문

 

2 #[ | ]

天安門 태평천국의 문 관련자료:없음 [22746] 보낸이:정철 (zepelin ) 1998-12-08 23:56 조회:98

작년 초에 인권 영화제에서 틀려다가 중국측의 압력에 주최측인 삼성이 굴복하여 나중에 극장개봉이 겨우 가능했던 바로 그 영화이다. 본다 본다 하고 있던 차에 결국 학교에서 상영하는걸 보게 되었다.

나는 나름대로 감정이 풍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영화보고 눈물 흘린 적은 없었다. 채플린의 키드를 보았을때 눈물이 어린 적은 있었지만 그게 떨어지진 않았었다. 하지막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아마 내 눈물샘을 자극한 건 배반당한 혁명에 분노하는 북경시민들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꼭 천안문항쟁 뿐만이 아니라 중국 현대사에 관한 여러가지 자료화면들과 당사자들의 인터뷰를 적절히 배치하여 천안문항쟁 이전의 배경, 항쟁의 경과, 항쟁 이후를 입체적으로 이해 가능하게 하였다. 다큐멘터리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매우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일단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에 대해서 조금 알아야한다.

20세기 초에 유럽을 휩쓸던 마르크시즘은 결국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성립을 이루어 세계 지성들의 이목을 집중하였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세계를 분할점령하고있을 때에도 이 새로운 '유령'은 의식있는자와 민중의 희망을 안고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 공산당이 성립되고 있었다(조선 공산당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성립된 공산당중 하나이다).

모택동이 지도자가 되었던 중국 공산당은 그 중에서도 무척 독특한 의미를 가진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일제에 의해 침략당하고 있던 중국이었지만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장개석에 의해 중국 공산당은 궤멸적 타격을 입고 (북벌) 국민당의 추적을 방어해가며 북으로 도주해(대장정) 재기의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이후 근거지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국민당의 썩을대로 썩은 관료정치에 비해 비교적 도덕성을 확보하고있던 공산당은 농민층의 지지를 얻어 세력을 넓혀 나가게 되고 장개석도 결국 이들과의 연합을 허용하여 공동 항일전선을 펴게 되니 이겄이 국공합작이다. 결국 치열했던 공동투쟁과 국제사회의 지원으로 일본은 패망하였고 중국은 자주권을 다시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2차대전 종료와 거의 동시에 국공내전이 시작되었고 중국은 또 다시 전란에 휩싸이게 된다. 미국은 국민당을 지원하고 있었고 공산당은 결국 내전을 위해서 근거지로 대규모 철수를 감행한 뒤 농민들의 압도적인 지지 속에서 농업지대 위주로 재점령에 나선다. 부패한 국민당과 농민의 지지를 받는 공산당의 싸움은 엄청난 세력격차에도 불구하고 49년에 결국 국민당이 대만으로 철수하여 공산당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이렇듯 자본주의에 대항해 아래로부터 발생한 최초의 진정한 혁명이 바로 중국혁명이었던 것이다. 자료화면에서는 이렇게 중국민에게 친밀한 인민해방군의 모습이 자세하게 묘사된다.

그러나 모택동은 혁명가지 정치가가 아니었다. 소련과의 노선 차이에 의해 독자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걷기로 한 중국은 하루빨리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키 위해 '대약진' 운동을 펼치고 이 와중에서 과도한 산업화, 집단화를 시도하여 국가경제를 거의 파탄으로 몰아가 아사자가 속출하게 되었다. 거듭되는 실정에 자아비판까지 하며 실각위험에 놓인 모택동은 그 어떤 파시즘보다도 더 파시즘적인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을 일으킨다. 수정주의자들에 의해 회복의 기미를 보이던 중국은 문화혁명에 의해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되었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와 관료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미래를 암담하게 여기던 젊은이들 중 모택동을 개인숭배하던 이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홍위병이다. 이들은 모택동의 '계속혁명'을 부르짖으며 모택동에게 조금이라도 반하는 이들이 있으면 폭력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에 반하는 이들은 모두 반동으로 몰려 숙청당하였고 이 와중에 수정주의자들이 대부분 제거되어 모택동과 그를 지지하는 '4인방'은 다시 권력의 핵심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그 와중에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숙청당하거나 펜을 꺾게 되고 경제, 문화등 사회 전반에 걸쳐 10년이상 후퇴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문화혁명의 피해는 생각 이상이어서 서로 믿지 못하는 불신풍조가 전국가적으로 번졌고 백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박해로 사망하거나 사회에서 매장당했다.

비교적 청렴한 정치가이자 외교가였던 주은래의 사망을 기하여 시민들이 천안문광장에 모여 추도식을 가졌다. 그러나 주은래나 등소평 등 반문화혁명파의 위협으로 간주한 정부와 충돌이 발생하였으니 이것이 '1차 천안문 항쟁'이다. 이로인해 등소평은 다시 실각하게되고 모택동의 후계자인 화국봉에 의해 정국은 안정되게 된다.

이후 중국식사회주의로 불리는 자본주의의 물결이 생기고 이후 호요방이나 등소평같은 인물들에 의해 개혁정치가 시도되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이 시도되는데 여기서 그 유명한 '흑묘백묘(희든 검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다)'론이 나오게 된다. 이 과정에서 결국 공산당 일당 독재의 권력집중이 문제가 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흐름이 생겨나는데 이에 대한 반혁명으로 인해 결국 호요방이 실각하게되고 그는 얼마 있지않아 사망한다.

호요방의 사망을 추도하기 위해 모인 시민, 학생들은 천안문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게 되는데 이것이 우리가 '천안문사태'라고 알고 있는 '2차 천안문 항쟁'이다.

이런 배경지식을 가지고 영화를 본다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또 영화 전반부에 나오는 내용도 바로 이런 것이다.

당시 북경 사람들의 정서는 미묘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도입을 시도하며 끊임없이 자신들을 합리화해나가는 지도부에대한 불신감, 자신들을 진정으로 위했다고 생각되는 지도자들의 실각, 그렇다고 먹고 살만해지지는 않고 오히려 빈부의 격차만이 커져가는 초기 자본주의의 양상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민주화를 요구하게 하였을 것이다.

학생운동 진영은 처음에는 조직조차 되어있지 않았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자연발생적인 모임이 장기 점거 시위로 변하게 되고 연설하는 학생들 중에 자연스레 지도자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중 지도적인 인물이 '왕단'이나 '자령'과같은 이들이다. 시간이 가면서 이에 공감하는 이들의 지원이 전국에서 몰려들기 시작했고 홍콩이나 화교들의 자금도 몰려 일종의 정치력이 확보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자발적인 흐름은 단기적으로는 강한 추동력을 보이나 정통성있는 지도자가 없는 상황에서 이탈자나 반감을 품은 자가 나타나게 마련이다. 이 필름은 그러한 학생운동 진영의 혼돈과 방만함도 여실하게 보여준다. 학생운동진영의 자연스레 붕괴되어가는 사이에 지식인들 4명이 깨끗한 자세를 보여주며 단식투쟁에 나서자 이들 '사군자'를 중심으로 또다시 학생운동 세력은 결집을 시작한다.

이 사이에 정부쪽에서는 탄압결정을 내려 군대를 보내지만 광장 가득 메우고 있던 시민들이 몸으로 이들을 막아 며칠간 진입에 실패한다. 잠시 퇴각했던 이들은 결국 발포명령을 받고 시민과 학생들에게 무차별 발포를 시작하여 시위를 유혈진압한다.

내가 눈물을 흘렸던 부분은 여기였다. 시민들은 군인들을 막으면서 눈물을 흘린다. 인민해방군은 민중을 지켜주었던 친구이자 자식같은 존재였고 혁명의 대변자였는데 그들이 또다른 자식들인 학생들에게 총을 들이대는 상황이 너무나 기막혔던 것이리라.

그들이 지지했던 사회주의 혁명은 이런것이 아니었다.

시민들은 몸으로 막으면서 군인들에게 먹을것을 건네준다. 먹을것을 거부하던 이들도 아기가 건네주는 것까지는 거부하지 못하는 모습이 뭉클하게 잡힌다.

학생들은 모두 모여 '인터내셔널가'를 부르고 한쪽에서는 자유 의지를 뿜어대는 락밴드의 리듬에 맞추어 뭄을 흔드는 등 마치 60년대 세계적으로 휘몰아쳤던 '꽃의 아이들Flower Children'을 보는듯 했다. 이러한 모습은 중국이 앞으로 얼마든지 뻗어나갈 수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군인들의 발포는 실탄이었고 무력으로 해산된 학생과 시민들은 대항한번 제대로 못한 채 뿔뿔이 흩어지거나 구속되었다. 마치 문화혁명 때처럼 사람들에게는 무언의 압력속에 망각이 강요되었다. 주동자들이 수배되거나 잡히고 죄없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시민들에게 타인들은 그저 무관심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다. 발포한 중국 정부도 문화혁명때의 홍위병 같은 폭동을 두려워했고 입다물고 있던 사람들도 문화혁명때처럼 반동으로 몰릴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은 아직도 사람들을 옥죄고 있었던 것이다.

혁명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배반되어갔는가를 3시간에 걸쳐 차분히 보고 있던 나는 무척 슬펐다. 우리의 역사는 숱한 반혁명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청산하지 못한 과거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해야했던가.

슬픈 이유는 또 있다. 우리에게 주은래나 호요방과 같은 민중의 마음 속에 각인된 지도자가 있었는가? 김구(물론 문제가 많았던 인물이다)이후 민중 속에 다가갈 수 있었던 지도자는 '야당시절'의 김대중밖에는 없었다. 가슴 아픈 일이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이 천안문 광장은 그자리에 있다. 이미 등소평마저 사망하고 중국은 70년대의 우리보다도 더욱 빠른 속도로 자본주의화되고 있다. '천안문 항쟁'은 역사의 뒤안길로 지나갔고 현재는 신흥 공업국으로 자리를 확실히 잡아가는, 홍콩을 반환받은 현재 이제는 마카오를 돌려받으며 대만과의 관계만 개선하면 되는 초강대국 중국이 존재한다.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이 붕괴한지 이미 여러해가 지났고 중국의 사회주의가 자본주의화 하는 지금 우리에게 민주화는 무엇인지, 북한은 어떻게 바라봐야할지라는 고민을 던져주고 이 영화는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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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참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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