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루백

1 개요[ | ]

( ? ~ 1206 )
최루백

2 생애[ | ]

  • 15세 때 아버지가 범에게 물려 죽자 최루백이 범을 잡아 아버지의 뼈와 살을 범의 배 안에서 찾아 개울가에 묻었다.[1]
  • 1124년(인종 2년)에 검교상서 우복야 대부소경(檢校尙書右僕射 大府少卿) 염덕방(廉德方)의 딸인 염경애(廉瓊愛)와 결혼했다.[2]
  • 1145년(인종 23년)에 사직(司直)에서 우정언 지제고(右正言 知制誥)로 자리를 옮겼다.[2]
  • 1146년(인종 24년) 1월 28일에 부인이 사망했다.[2]
  • 1146년(의종 즉위년) 여름에 우사간에 올랐고 12월에는 좌사간으로 옮겼다.[2]
  • 1147년(의종 1년) 봄에 시어사로 옮겼다가 겨울에 예부원외랑으로 좌천되었으며, 1148년(의종 2년) 봄에 예부 낭중으로 옮겼다가 다시 청주부사에 임명되었다.[2]
  • 1148년(의종 2년)에 첫번째 부인인 염경애을 위한 묘지명인 「염경애 묘지명」을 지었다.
  • 1153년(의종 7년)에 금나라에 가서 용흥절(龍興節)을 하례하게 했다.[3]
  • 1155년(의종 9년)에 왕이 최자영, 양원준, 최루백 등에게 국정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4]
  • 1158년(의종 12년)에는 국자제주(國子祭酒) 염직량과 함께 윤돈서 등 16명을 뽑았다.[5]
  • 1205년(희종 1년) 12월 1일에 사망했다.[6]

3 가족관계[ | ]

부인 염경애와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두었으며, 염경애가 죽은 후 유씨(柳氏)와 결혼하여 3남 2녀를 낳았다.[6]

  • 부인: 염경애(廉瓊愛, 1100년 ~ 1146년) - 검교상서 우복야 대부소경(檢校尙書右僕射 大府少卿) 염덕방(廉德方)의 딸
  • 아들[7]
    • 장남: 최돈인(崔敦仁)
    • 차남: 최돈의(崔敦義)
    • 삼남: 최돈례(崔敦禮)
    • 사남: 최돈지(崔敦智)
    • 장녀: 최귀강(崔貴姜)
    • 차녀: 최순강(崔順姜)

4 같이 보기[ | ]

5 참고[ | ]

  1. 『고려사』 권121, 「열전」34, 최루백
  2. 2.0 2.1 2.2 2.3 2.4 최루백, 「염경애 묘지명」
  3. 『고려사』 권18, 「세가」18, 의종 7년(1153) 11월
  4. 『고려사』 권18, 「세가」18, 의종 9년(1155) 9월 2일(병오)
  5. 『고려사』 권74, 「지」28, [선거2], 과목2, 승보시, 1158년(의종 12년) 9월
  6. 6.0 6.1 「최루백 묘지명」
  7. 아들의 이름은 「최루백 묘지명」에 따른 표기이며, 「염경애 묘지명」에는 각각 단인(端仁), 단의(端義), 단례(端禮), 단지(端智)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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