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을 위한 한국 현대사

봉화 95학번 세미나
청년을 위한 한국 현대사
  • 제 3부 종속 경제와 군사 파시즘 - 1960/1970년대
  • 제 3장 일본 독점 자본의 한국 진출
한일 경제 관계의 재구축

2차대전 이후 최대 제국주의 국가가 된 미국은 사회주의와 민족 해방 세력을 막는 주된 국가가 되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일찌기 친미 정권이 구성된 대만과 우리나라가 중심 국가로 부각되었다. 게다가 중국과 북한의 공산화는 그 역할을 더욱 증대시켰다.

이 때 미국은 일본의 대대적 개혁을 추진시켰고 이 와중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일본 경제를 급속히 발달시켰다. 당시 미국은 사회주의 국가들의 경제 개발 성공에 고무되어 자본주의에서도 성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여기던 참이었다.

미국은 우리에게 막대한 양의 원조를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군사적 원조가 대부분이었고 약간의 경제적 원조마저도 소비재 원료가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이러한 원조물자의 배분이 몇몇 재벌들에게 돌아가서 가뜩이나 취약했던 우리 경제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곧 이러한 경제적 위기는 이승만 정권의 위기로 이어졌고 결국 4.19 혁명이 일어났다.

박정희는 민중들에게서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처음에는 여러가지로 우리 경제를 회생시키고자 노력하였으나 지지부진하였다. 당시 미국은 자신들이 주도하던 원조를 힘겨워하게 되었고 일본은 과잉 축적으로 인한 공황이 일어나던 시점이었다. 따라서 박정희는 한일협상을 통해서 자신의 난국을 타개하려 하였고 이는 미일의 바라던 바였다. 이때문에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일본에까지 종속되게 되었다.

한일 경제 유착

차관으로 유지되던 우리 경제는 차관이 점차 누적되자 엄청난 적자를 앉게 되었다. 그래서 외국의 직접 투자를 선호하게 되었다. 그나마 다른나라에서는 중화학공업등의 산업이 들어왔지만 일본에서는 사양산업과 공해산업이 들어왔다. 일본은 고임금과 에너지 문제때문에 아시아의 다른나라에 산업거점을 만들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마저 한국에서도 임금이 상승하기 시작하자 대부분 철수하였다. 이 때의 일본 기업 진출은 대체로 한국 시장을 노리고 들어온 것이었다.

당시 일본에 대한 기술의존도 또한 엄청났는데 주로 제 2차 경제개발 계획 이후에 강화되기 시작했다. 일본에의 의존도가 50% 미국에의 의존도가 30%였다. 그러나 미국의 기술 이전이 훨씬 스케일이 큰 것들이었다.

국제 분업 구조의 재편

미일의 차관과 기술도입에 의한 수출 지향적 공업화는 곧 노동 집약적 경공업 제품을 미국에 수출하고 그 생산 수단을 일본에서 수입하는 구도로 정착되었다. 이것은 뒤에 미국은 첨단산업과 군수산업을, 일본이 중화학공업을 그리고 우리가 그중 노동집약적 과정을 맡는 구조로 변해갔다. 당시 일본은 중화학공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켜 미국내 생산을 강행하는 등 나날이 입지를 넓혀갔다.

국제적 하청 생산의 진전

일본 독점 자본은 꾸준히 축적되어 수출 규제, 엔화 절상, 시장 개방 등의 압력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의 타개책을 그들은 자본 수출에서 찾았다. 경영합리화를 통한 경쟁력 강화로 미국의 서비스 부문과 제조업 부문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유럽에도 진출하였다. 그리고 신흥 공업국에의 직접 투자로 국제적 분업화를 더욱 강하게 하였다. 이는 일본 독점 자본의 새로운 축적 방식이다.

일본의 '아시아 태평양 경제권 구상'속에서의 한국

현제의 블록화 추세에서 일본의 선택은 협상을 유리하게 하면서 동시에 아시아 태평양 블럭을 조직하는 것이다. 현재 이의 가장 큰 걸림돌은 아시아 제 국가들의 반일감정이다. 그래서 일본은 우리나라를 그 중재자 혹은 완충자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으며 동시에 수출 시장이자 하청 생산기지로 여기고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우리의 독점 재벌들이 자본 축적과 기술이전을 원하고있어 그들의 이해와 맞물린다는 것이다.


  • 봉화 95 세미나
  • 미소공동위원회와 좌우익의 대응
  • 정철
토지개혁 문제

46년 3월 3상회의 결의가 나오자 제정치단체들과 미소는 나름의 정책을 강구해야 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에 대한 여론은 아주 좋지 않았다. 때문에 미국은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시키기위해서 토지개혁이나 원조등의 미끼가 필요했다. 그래서 한국통인 번스를 보냈지만 미군정은 그를 받아들여 토지개혁을 할 형편이 못되었다. 일단 미군정은 안전하게 들어오는 소작료를 포기하기 싫었다. 또 좌익조직의 장악력에 비해 미군정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게다가 극우적 부르주아지들의 반발 또한 거세어서 할 수 없었다.

미군정이 미적거리는 사이 소군정에서는 한달만에 순식간에 토지개혁을 해치웠고 인민위원회는 그것으로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남한 좌익들의 비난이 거세졌고 미군정은 이 북풍을 막느라 고생해야했다. 결국 이에 대한 대응으로 미군정이 보인 것은 고작 신한공사를 창립해서 욕을 먹는 일이었다.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한 미군정과 우익의 반응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한 우익의 대응은 방해, 결집 강화, 협력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한민당쪽에서는 언론을 이용한 흑색선전을 끊임없이 퍼부었다. 특히 왜곡된 기사를 내보내서 언론이 끼친 해악은 엄청난 것이었다. 김구는 우익의 결집을 위해서 노력한 끝에 한민당을 제외한 한독당, 국민당, 신한민족당이 한독당으로 통합했다. 한민당이 통합되지 못한 것은 이승만이 방해했기 때문인데 이승만은 김구가 보스가 되는 것이 싫었다. 그는 그 때 광업권을 판 짓거리로 피곤한 상태였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고 공동성명이 몇가지 나왔지만 미소간의 관계는 아주 험악했다. 미국으로서는 가뜩이나 남한에서도 좌익이 설치는데 미소공동위원회의 협의 대상에라도 우익세력을 많이 끼워넣어야했고 소련으로서는 자꾸 스트레스주는 반탁세력을 배제해야 속이 풀릴 상황이었다. 이런 대립이 지속되다가 결국 소련이 과거를 묻지 않고 3상회의를 지지하면 끼워주겠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이는 어둠속의 한줄기 빛이었다.

그러나 이때쯤 등장한 단정수립론은 물을 끼얹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승만도 이를 부인하지 않음으로서 속을 내보였다. 하지만 미소공동위원회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좌익내 노선대립과 연합성 민주주의론

좌익은 우익과의 연계를 모색해도 시원찮을 판에 박헌영의 국제 노선 추종으로 말미암아 내분이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여운형의 노선을 비난했던 것이다. 당시 여운형은 3상회의 결의를 민족국가 수립의 기회로 보고 자율적 통일기반 위에서 연립정권이 구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북으로 넘어가 그쪽의 지도적 인사들과 접촉했다.

백남운은 서울신문에 '조선민족의 진로'라는 글을 기고했는데 이 연합성 신민주주의론은 좌우합작을 통한 민족통일전선 형성의 지침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좌우익의 극단적 노선을 배격하고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논의를 전개했고 독립군가 수립이 우선되어야 사회혁명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를 실행할 만큼의 세력을 갖지 못했다. 그는 기회주의자로 배격받았다.

당시 좌익은 기층 대중의 지지를 받고 북쪽과도 연계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리주의적인 박헌영 일파가 정국을 주도함으로서 그에 대한 반향으로 우익세력이 나름대로 힘을 얻고 결집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미국을 불안하게 하여 결국 단정으로까지 이어지는 결과에 일조했다. 그들은 소련과의 연계를 통해 소련의 정책을 유연하게 할 수도 있는 존재였다. 그들이 우익보다 악당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들은 좀 더 시야를 넓었어야 했다.

미소공동위원회의 공동성명 5호와 휴회

난항을 거듭하던 미소공동위원회는 결국 소련의 양보로 3상회의만 지지하면 과거를 묻지 않겠다는 것으로 일단 얘기를 매듭지었다. 좌익이나 우익의 합작파들은 협조했지만 극우쪽이 말썽이었다. 하지가 다독여서 그들도 결국 싸인을 했지만 이번에는 좌익단체가 너무 적다는 이유로 소련이 깽판을 놓았다. 또 우익쪽은 여전히 적대감을 갖고 있었다. 우익쪽은 중경임정을 추대하려는 노력을 여전히 하고있었고 이는 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공동성명 5호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소련은 미국쪽에 비해 열세였으므로 모스크바 3상회의안을 완고히 고수하고 있었고 미군 역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스티코프나 하지 모두 우리 사정에는 어둡고 이념에 충실한 사람들이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휴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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