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이슬람 세계의 그리스 과학 수용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하여

1 중세 이슬람 세계의 그리스 과학 수용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하여[ | ]

2 # 머리말[ | ]

압바스朝(749-1258) 시기의 이슬람 세계에서는 세계 과학사를 통틀어 탁월한 수준의 과학 발전이 있었다. 그러나 과학혁명을 필두로 한 서구 과학사 연구에 비해 여타 지역의 과학사는 아직도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실정에서, 이슬람 과학도 그 기여에 비해 정당한 평가를 아직 받지 못하고 있다. 저명한 과학사가 피에르 뒤엥은 “아랍 과학이란 없다. 모하멧교인 가운데 현명한 사람들은 항상 어느정도 그리스인의 충실한 제자였지만, 그들은 독창성을 결여하고 있었다”고 이슬람 과학을 매도하기도 했다.

Pierre Duhem, "Physics, History of," The Catholic Encyclopedia(1911), 11:48; D.C. Lindberg, the Beginnings of Western Science: the European Scientific Tradition in Philosophical, Religious, and Institutional Context, 600 B.C to A.D. 1450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2) p.175에서 재인용

물론 ‘아랍’과 ‘이슬람’을 혼동하고, ‘이슬람’을 ‘모하멧교’라고 오인하는 정도의 심한 몰이해와 편견은 시간이 지나면서 많이 시정되었다.

이슬람 세계에는 아랍인 이외에도 이란인(페르시아인)과 투르크인은 물론, 많은 비무슬림도 뒤섞여 살아 왔다. 그리고 무함마드(모하멧)의 지위는 ‘예언자’(al-rāsul)일 뿐 크리스트교의 예수와 같은 신성을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이슬람 신앙에서 무함마드는 신앙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슬람 과학에 대한 평가를 둘러싼 논쟁 구도는 아직도 시정되어야 할 몰이해가 많이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 이 글에서는 특히 그리스 과학에 대한 이슬람 세계의 반응에 대한 논쟁을 다룰 것이다. ‘이슬람 세계의 그리스 과학 수용’이라는 주제는 이슬람 과학의 ‘독자성’ 문제와 직결되고 있기 때문에, 독자적인 이슬람 과학의 발전과 성취를 인정하는 학자와 그렇지 않은 학자, 무슬림 학자와 이슬람 세계 외부의 비무슬림 학자 사이의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는 주제이기도 하다. 린드버그(D.C.Lindberg)의 논의를 따르면 이 주제에 대한 견해는 크게 ‘전유(專有) 명제’(appropriation thesis)와 ‘변두리 명제’(marginality thesis)로 구별해 볼 수 있다. 이제부터 린드버그의 논의와 두 명제 각각에 대한 비판 의견을 살펴본 후, 린드버그의 논의가 놓치고 있는 부분을 사브라(A.I.Sabra)의 논의를 빌어 보충해 보도록 하겠다.

3 # ‘전유 명제’와 ‘변두리 명제’[ | ]

3.1 # 논쟁의 요지[ | ]

이슬람 세계가 무함마드 사후의 성전(聖戰, jihād)을 통해 기존 오리엔트 문명의 거의 모든 유산을 접수하게 되면서 무슬림들은 그리스 과학을 포함한 그리스 철학 체계와 접하게 되었다. 뒷날 이슬람 세계를 통해 그리스 철학을 접하게 된 중세 크리스트 교회의 사상가들의 태도를 예견하듯이, 이슬람 신앙의 옹호자들은 그리스 과학에 대해 두 가지 상반되는 태도를 취했다. 한편으로는 실용적 유용성과 호교(護敎)를 위한 논쟁에의 필요성 때문에 그리스 과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외래적 사상이 갖는 잠재적 위험성에 대해 경계의 눈빛을 보낸 것이다. 이슬람 신앙의 옹호자들이 그리스 과학에 대해 이와 같은 복잡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전유 명제’와 ‘변두리 명제’는 동일한 역사적 국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로 상반되는 해석을 내리고 있다.

‘전유 명제(appropriation thesis)’에 따르면, 비록 그리스 과학의 외래적 성격은 경계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리스 과학 자체는 이슬람 세계에서 손님으로서 환대를 받았고, 그로 인해 그리스 과학은 이슬람의 고유한 제도와 융화됨으로써 이슬람 세계에서 독자적인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반면 ‘변두리 명제(marginality thesis)’에 따르면 그리스 과학은 종교적 보수파와 아랍의 자생적 문화에 의해 견제당했고, 정규 교육 과정에도 포함되지 못했으며, 이론적이고 추상적이라는 이유로 대중적으로 보급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슬람 세계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이에 따르면 이슬람 과학의 성취도 이슬람 사회가 거둔 것이 아니라 이슬람 사회의 주류를 거슬러 가면서 악전고투한 개인들에 의한 것이다.

3.2 # ‘변두리 명제’에 대한 반론[ | ]

사브라(A.I.Sabra, "The Appropriation and Subsequent Naturalization of Greek Science in Medieval Islam: A Preliminary Statement", History of Science 25 (1987), pp.223-243)에 따르면 ‘변두리 명제’의 위와 같은 세 가지 논지는 역사적 사실에 의해 모두 반박될 수 있다. 첫째, 종교적 보수파가 그리스 과학을 견제했다는 주장과는 달리, 이슬람 법학자(파키)는 법제화된 권한이 아닌 언변과 설득을 통한 권위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 과학에 대해 구체적인 반대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피크(fiqh)는 이슬람 법학, 파키(faqīh)는 이슬람 법학자를 말한다. 이하 용어에 대한 해설은 김정위, 『이슬람 사상사』(민음사, 1987) 참조

그리고 ‘고대의 과학’('ulūm al-awā'il)이 공격의 대상이 되었을 때에도 그말은 헬레니즘 사상의 신비주의적 분파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둘째, 그리스 과학이 고등 교육 기관, 특히 마드라사(madrasa)의 정규 교육 과정에 포함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마드라사의 설립 목표는 원래 신학적・정치적 교육이었으며, 그 실용적 필요성이 인정되었기 때문에 마드라사에서도 교수 개개인의 선호도에 따라 비공식적으로는 과학 교육이 상당한 수준으로 이루어졌다. 마지막으로, 그리스 과학의 도입이 실용적인 것부터 이루어졌으며, 번역 사업을 열렬히 지원한 칼리파 알 마문(재위 813-833)의 뒤를 이은 알 무타와킬(재위 847-861)이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무타질라派 신학을 배척했음에도 불구하고 궁정에서는 여전히 수학자와 천문학자들을 고용했다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 과학은 이슬람 세계에서 실용성을 인정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3 # 사브라의 ‘전유 명제’[ | ]

사브라는 ‘변두리 명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슬람 세계가 그리스 과학을 능동적으로 전유(appropriation)하는 과정을 수동적인 수령(reception)의 과정으로 오인하는 근본적인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평하고, 이어서 전유의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이슬람 과학을 세 단계로 나누어 볼 것을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비무슬림이 주축이 된 번역과 습득의 단계가 첫 번째 단계, 헬레니즘에 경도된 이븐 루쉬드와 같은 무슬림이 주축이 된 무슬림 철학자가 나타나는 단계가 두 번째 단계, 종교적으로 독실하게 단련된 무슬림들이 주축이 된 토착화의 단계가 세 번째 단계가 된다. 세 번째 단계의 ‘토착화’란 ‘철학자-의사’가 ‘율법학자-의사’로, ‘수학자’가 ‘법관’(faradī)으로, ‘천문학자’와 ‘점성가’가 ‘예배 시간 안내자’(muwaqqit)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이 주장을 받아들이는 경우 ‘변두리 명제’에서 그리스 과학의 억압과 쇠퇴의 징후로 받아들이던 독자적인 이슬람식 교육과 학문 체계의 수립은 거꾸로 그리스 과학의 발전적 토착화의 징후로 해석된다.

3.4 # 린드버그의 ‘전유 명제’에 대한 평가와 그에 대한 비판[ | ]

린드버그는 ‘변두리 명제’에 대해서는 그것이 이슬람 세계에서 과학이 융성했던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비판적이지만, ‘전유 명제’를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의 논지는 이슬람 세계에서 과학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적은 없으며, 그리스 과학을 가르치는 안정적인 제도적 장치가 수립된 적이 없기 때문에 ‘전유 명제’를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린드버그의 평가대로, ‘전유 명제’는 몇 가지 난점을 지니고 있다. 알 마문이 그리스 과학의 수용을 지원했지만 당시 압바스朝 국가의 최대 관심사는 쉬아派의 도전에 방어하여 통치권을 방어하는 것이었으므로 과학의 번역 사업이 중심 과제는 아니었다.

알 마문은 쉬아派를 진정시키기 위해 816년에 제8대 쉬아派 이맘이었던 알리 알 리다에게 칼리파位를 넘겨주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기도 했다. Ann K.S.Lambton, State and Government in Medieval Islam (NY, Oxford University Press, 1981); 김정위 옮김, 『중세 이슬람의 국가와 정부』(민음사, 1992), p.84.

그리고 마드라사의 교수들이 교과 과정에 얽매이지 않고 폭넓은 강의를 했던 것이 유럽의 통일된 교과 과정에 비해 장점도 가지고 있었지만 통일성의 결여라는 약점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린드버그는 ‘전유’라는 말을 사브라가 뜻한 것과 다르게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리스 과학을 ‘온전한 형태로’ 교수할 수 있는 제도가 아니면 제도로 인정하지 않고, 그리스 과학에 그것이 그리스에서 가졌던 지위보다 낮은 지위를 부여했다는 이유로 그 수용이 불완전함을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슬람 세계의 과학을 논하면서 유럽의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슬람 세계에는 과학의 제도적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유럽과 비교하는 것을 포기한다면 답변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나스르(S.H.Nasr)는 Science and Civilization in Islam에서 이슬람 세계의 교육 제도에 대해 특별히 한 장(章)을 할애하고 있다.

Seyyed Hossein Nasr, Science and Civilization in Islam (New York, New American Library, 1968), ch.2, "The Basis of Teaching System and the Educational Institutions", pp.59-91.

다양한 시대와 지역에 걸쳐 다양한 분포를 보이고는 있지만 이슬람 세계에는 초등 교육과 고등 교육 기관, 관측소, 병원, 그리고 수피의 회합에 이르기까지 많은 종류의 교육 기관이 있었고, 그 교육 기관의 대부분에서는 넓은 의미의 과학 활동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반드시 그리스 과학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공유하거나 하지 않아도 이슬람 세계에서 자연에 대한 지식 일반은 계속 학습되어 왔던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전유’를 인정하느냐의 판단은 ‘과학’에 대한 정의를 얼마나 유연성 있게 할 수 있느냐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슬람 세계에서 그리스 과학의 위치’와 같은 주제를 논쟁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 빠지기 쉬운 함정은, ‘이슬람 세계’나 ‘그리스 과학’이라는 용어를 거듭 사용함으로써 그 어휘들이 단일한 양상을 띤 어떤 실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오인하게 되는 것이다. ‘전유’에 대한 평가에 인색해지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이다.

3.5 # 그리스 과학의 ‘국지적 전유’[ | ]

뒤에 발표된 다른 논문을 통해, 사브라는 ‘전유’를 좁게 해석하면 ‘본질주의’(essentialism)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이슬람 과학의 국지적 성격(locality)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슬람 세계에서 그리스 과학의 수용’을 연구하는 경우 이슬람 과학 고유의 특성에 대한 고찰은 제쳐두고 이슬람 과학을 ‘원조 그리스 과학’과 비교하거나 중세나 근대 초기의 유럽 과학과 비교하는 것은, 과학에 어떤 ‘정수’(essence)가 있다고 가정하고 그것을 제대로 계승했는가 아닌가로 이슬람 과학을 판단하려는 그릇된 태도라는 것이다.

‘본질주의’를 포기하고 이슬람 과학의 국지적 성격에 초점을 맞추면 “대학의 정규과목으로 과학이 포함되었는가”와 같은 문제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되지 못한다. 이슬람 세계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의 지적 유산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주된 과제였고, 유럽의 대학에서 과학을 어떻게 가르치는가와 같은 문제는 관심 밖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슬람 세계와 유럽의 제도를 따로 떼어서 일대일로 비교하는 대신 이슬람 세계에서 과학의 ‘전유’가 이루어진 영역을 살펴보면 이슬람 과학의 발전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면, 마드라사에서 그리스 과학을 교과 과목에서 뺀 대신 마드라사에서 독자적인 신학적 원자론을 발전시킨 것이나, 궁정의 각종 필요를 위해 과학자를 항시 고용했던 것이나, 사원의 예배 시간 안내자(muwaqqit)들이 상당한 정확도의 천문 관측 자료를 남긴 사실들은 이슬람 세계에 과학이 토착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생생한 예로 재인식될 것이다.

4 # 이슬람 세계의 다양성[ | ]

국지적 성격의 중요성에 눈을 돌리면, 이슬람 과학의 주체적 발전을 실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슬람 과학의 발전사를 일목요연하게 쓰려는 시도가 단순화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 또한 깨닫게 된다. 이러한 단순화는 편의상 ‘이슬람 과학’이라는 용어를 이용하게 되면서 무의식중에 범하게 되는 실수이기도 하다. 이슬람 세계가 비록 강한 종교적 결속으로 묶여 있다고는 하지만, 이슬람이라는 이름 아래에도 쉬아와 순니, 수피를 비롯한 종교적 차이에 따른 여러 갈래의 흐름이 존재했으며 여기에다 인종적・언어적・문화적 차이까지 고려하면 사실상 ‘이슬람 세계’라는 추상적 범주는 그 기의를 잃게 된다.

게다가 이슬람 과학의 주된 시대적 배경으로 거론하는 8세기에서 13세기에 이르는 기간은,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지역만 ‘압바스朝’ 시대로 말할 수 있을 뿐 전체적으로는 정치적 난맥상을 보여주는 시대였다. 압바스朝의 중앙권력이 쇠퇴하면서 이란에는 사파르朝, 사만朝, 부와이흐朝, 함단朝 등이 부침을 거듭했고,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에는 파티마朝가, 이베리아 반도에는 스페인 우마이야朝가, 그리고 11세기에 이르면 소아시아의 셀주크 투르크가 흥기했다. 게다가 13세기의 몽골 계통의 정복왕조까지 감안하면, 이 시대의 왕조사는 간추리기 힘들 정도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맥락에 비추어 보면, 이슬람 세계의 과학자들을 ‘이슬람 과학자’로 통칭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재고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저명한 이슬람 세계의 과학자와 철학자 가운데, 아라비아와 이라크를 포함하는 순니 이슬람의 중심지 출신은 자비르 이븐 하이얀(연금술사, 721-815)과 알 킨디(801-873), 알 마수우디(수학자・역사가, ?-956), 이븐 알 하이탐(965-1039), 알 가잘리(철학자, 1058-1111), 오마르 하이얌(시인・천문학자, 1038/1048-1123/1132) 정도이다. 알 콰리즈미(수학자, ?-863?)와 알 비루니(973-1051), 이븐 시나(980-1037)는 이란 인근 지역 출신이며, 알 파라비(870-950)와 알 투시(천문학자, 1201-1274), 알 시라지(천문학자, 1236-1311) 등은 중앙 아시아 출신이다. 그리고 이븐 루쉬드(1126-1198)는 이베리아 반도의 코르도바 출신이다.

Nasr, Ibid., ch.1, "The Universal Figures of Islamic Science", pp.41-58.

비록 이들이 고향을 떠나 이슬람 세계의 다른 부분을 주유하는 일이 잦았던 것은 사실이며, 멀리 떨어져 있었던 알 가잘리와 이븐 루쉬드가 서로의 주장을 알고 있었으며 서로를 논박했던 것으로 보아 지역적 거리가 학문적 소통에 장애가 되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다양한 지역의 과학자들이 각기 다른 권력자의 후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들을 하나의 과학 전통 안에 쉽게 묶기는 어려울 것이다.

Nasr, Ibid., ch.12, "The Controversies of Philosophy and Theology―The Later School of Philosophy", pp.305-321.

이슬람 세계의 과학자들이 이와 같이 다양한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국지적 성격’(locality)을 규명한다는 것은 단순히 세계 과학사에서 이슬람 과학의 독자성을 규명하는 문제를 넘어서 이슬람 세계 안에서 각각의 과학 전통의 독자성을 규명해야 하는 확장된 과제를 안게 된다. 따라서 앞으로의 이슬람 과학사 연구는 ‘이슬람 과학의 발전사’와 같은 단일한 주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 세계의 국지적 성격 안에서 다시 시대와 장소에 따른 세부적인 국지적 성격들을 규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5 # 맺음말[ | ]

유럽인들은 이븐 루쉬드의 철학을 받아들일 때에 ‘그 철학자’(the Philosopher, 아리스토텔레스)와 ‘그 주석자’(the Commentator, 이븐 루쉬드)로서만 받아들였다. 이슬람 세계에서도 파라비가 ‘제2의 스승’으로 불림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존경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스승’이나 ‘그 철학자’보다는 ‘그 예언자’(the Prophet, al-rāsul), 즉 무함마드를 더욱 존경했고, 철학자의 말보다는 하디스(ḥadīth, 예언자의 언행)를 따랐으며, 이븐 루쉬드보다 가잘리를 숭상했다.

“한 문화권의 역사는 이방인에 의해서는 제대로 쓰여질 수 없다”는 주장은 일반론 차원에서는 지나친 주장일 것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슬람 과학에 대한 비무슬림 학자들의 이해는 아직까지 객관적인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슬람 과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우선 이슬람 사회의 맥락 안에서 ‘이슬람 과학의 논리’를 보여줄 수 있는 정교한 모델의 설정이 최우선적으로 필요할 것이다. 최근 이 분야의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지만 이것은 아직까지 실현되지 않고 있는 일이며, 이 작업이 궤도에 오른 이후에야 유럽 과학사와의 대등한 비교 및 진정한 의미의 ‘비교과학사’는 가능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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