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1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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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조선 표 대조선국[1](大朝鮮國) 또는 조선국(朝鮮國), 약칭 조선[2](朝鮮, 1392년 ~ 1897년)은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한반도를 518년간 다스렸던 왕조국가이다. 조선은 1392년 7월 17일고려의 무관이었던 태조 이성계가 건국하였으며, 1897년 10월에 고종이 칭제건원하고 세운 대한제국으로 계승되었다. 수도는 한양이었으며, 북부로 압록강두만강을 경계로 중국과 러시아와 접경하였다.

조선의 건국 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은 유교를 국시로 삼고 사회 전반을 개혁하고자 하였다. 조선은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펴 성리학을 장려하고 상대적으로 불교는 억눌렀으며, 효과적인 중앙집권적 정책을 펴 나가며 국력을 강화시켜 나갔다.[3] 조선은 건국 후 약 200여 년 동안 평화로운 전성기를 맞았는데, 특히 세종 시기에는 문학, 과학, 예술,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났고 조선 문화가 발전하였다.[4] 시간이 지나면서 쇠퇴하였고 이후 쇄국 정책을 피며 해외와의 교류를 차단하였다. 이 때문에 해외에서는 ‘은자의 왕국’이라 불리기도 하였다.[5]

조선 후기에는 예술의 진흥기를 맞았으며, 식량 생산량이 늘어나고 인구가 늘어났다. 그러나 18세기 들어서는 점차 사회계급의 혼란, 조정의 권력다툼, 부정부패, 반란 등으로 그 병폐가 눈에 띌 정도로 심각해졌으며, 19세기 들어서는 민간의 힘이 강력해지고 상대적으로 중앙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크게 약화되면서 국력이 급격하게 하락하기 시작하였다.[6]

이자춘의 아들이자 고려의 신흥 무인 세력이었던 이성계는 고려 왕조의 명으로 명나라를 정벌하러 가는 도중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에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그는 창왕·공양왕을 왕위에 올렸다가 신돈의 자식이라고 사건을 조작하여 폐위하는 등 정권·군권·경제권을 행사하였고, 전제 개혁을 단행했다. 1392년 7월 17일(양력 8월 5일)에는 공양왕이 왕대비에게 준 옥새를 이성계가 받아 들어 주변 측근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면서 조선왕조가 시작되었다.[7] 1393년 2월 15일에는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2] 1394년에는 한양을 도읍으로 하여[8] “재상 중심 정치”를 꿈꾸던 정도전을 중심으로 고려의 기존 제도를 급진적으로 고쳤다.

정종을 꼭두각시로 세웠다가 곧 왕권을 양위 받은 태조의 아들 이방원(태종)은 특권층이 소유하고 있는 개인 사병들을 강제 해산하여 조선군에 편입하고 호패법을 실시하며 왕권을 대폭 강화하였고, 정도전을 암살한 뒤 관료 제도를 재상 중심 의정부서사제에서 임금 중심인 육조직계제로 개편하였다. 세종대왕은 1443년 집현전을 궁내에 설치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장영실을 등용하여 아들 문종과 함께 과학 발전에 힘썼고, 훈민정음을 창제하며 애민정치를 펼쳤다. 이후 왕위에 오른 단종계유정난으로 몰아낸 그의 삼촌 세조는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세력을 제거한 뒤 태종처럼 육조직계제를 채택, 왕권을 강화하였고, 《동국통감》, 《국조보감》 등을 짓기도 했다. 단명한 예종에 뒤이어 즉위한 성종은 치국의 근본이 되는 《경국대전》을 편찬하는 등 문물제도를 정비했다.

15세기 말부터 지방의 사림 세력이 정계에 등장하고 기존 대신인 훈구와 대립하면서 정치는 혼란해졌다. 사림과 훈구를 모두 배척하고 독단적으로 정치를 한 연산군중종반정으로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조광조를 중용하는 등 사림 공신에게 휘둘리지 않으려 애를 썼으나, 이렇다 할 치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인종명종 역시 사림과 훈구의 공방 속에서 요절했다. 선조 대에 이르러서는 훈구파가 정계에서 물러나고 사림파가 정계를 장악하게 된다. 이후 사림이 붕당을 형성하여 대립각을 세워 붕당 정치가 탄생했다.

200년간 큰 전쟁 없이 평화로이 지내다가 16세기 말에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은 국토가 쑥대밭이 되고, 재정이 바닥났으며,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 서인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쫓아낸 후, 왕위에 오른 인조는 친명배금 정책을 표방하다가 병자호란이 있었다.

이 양난을 기점으로 유학의 영향력이 공고해지고, 조선의 역사는 후기로 접어든다.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조정에서는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북벌론과 청나라를 본받자는 북학론이 대두되었으나, 효종의료사고로 숨지면서 북벌론이 흐지부지되고, 북학론도 여전히 청나라의 여진족들을 비하하는 관료들 때문에 국정에 반영되지 못하였다.

이후 왕위에 오른 현종경신대기근에도 불구하고 전쟁으로 고갈된 재정을 수습하고 황폐해진 조선을 복구하며 서인을 견제하는 데 힘을 썼다. 이즈음 붕당이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환국”을 숙종이 빈번하게 일으키면서, 붕당 정치는 견제와 균형을 통한 상호 공존 및 부패 방지라는 원칙은 퇴색되고, 정권을 잡을 때마다 다른 붕당을 모조리 축출하는 일당 전제화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숙종이 총애하던 장희빈의 소생 경종소론노론의 알력다툼에 지쳐 재위 4년 만에 승하했다.

경종의 아우 영조는 당쟁을 혁파하기 위하여 탕평책을 폈으나 붕당 정치를 완전히 청산하지는 못했고, 오히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임오화변이 일어났다. 이때를 전후하여 서학(→천주교)이 조선 사회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영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정조 역시 탕평책을 폈을 뿐만 아니라 정약용과 같은 실학자들을 발굴하여 수원 화성을 축성하는 등 개혁 정치를 시도했지만, 1800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후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19세기 순조·헌종·철종 3대에 지속하였다. 이 기간에 조선은 급격한 쇠퇴를 맞이했다. 외척 가문은 왕위 임명에도 손을 대는 등 부정부패 속에서의 절대권력을 누렸다. 그러던 가운데 흥선군 이하응이 풍양 조씨의 대표 조대비와 결탁하여 둘째 아들 명복을 조선 국왕 자리에 올리는데, 그는 고종이다.

흥선군은 흥선대원군이 되어 고종을 배후에서 조종하였다. 그는 붕당의 근원인 서원을 철폐하고, 외척 가문인 안동 김씨 세력들을 축출하는 등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프랑스미국의 통상 요구에는 통상수교 거부정책(→쇄국정책)으로 대응했다. 1873년최익현이 흥선대원군을 끌어내렸고, 이로써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나, 실권자는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였다.

명성황후는 민씨 일가를 국가 요직에 대거 임명하여 조정을 장악한 뒤, 대외적으로 문호를 개방했다. 명성황후는 임오군란이 일어나 조선 왕조를 위협하자 청나라를 끌여들였고 임오군란 이후에는 청나라는 일방적으로 조선의 종주를 주장하게 되었다. 1876년에는 조선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 조약일본 제국과 체결하였다. 1882년에는 구식 군인들이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고(→임오군란), 1884년에는 김옥균 등이 주도하여 개화 정권을 수립했다가 삼일천하로 끝났다(→갑신정변). 1894년에는 농민 수탈에 저항하여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농민 자치를 추구했고, 이어서는 갑오개혁이 발표되었다.

1895년에 친일파가 일제와 함께 친러파 명성황후를 암살(→을미사변)하자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몰래 아관파천을 감행하여 러시아 주한 공사관에 1년 동안 피신했다. 1897년 11월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이 경운궁의 편액을 덕수궁으로 고쳐 쓰고, 원구단과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2 국호[ | ]

틀:한국사

태조 이성계의 어진

조선은 공식 명칭으로 대조선국(大朝鮮國) 또는 조선국(朝鮮國)이라 하였으며, 주로 대조선국을 어보(御寶), 국서(國書) 등에 사용하였다.[1][9] 흔히 조선(朝鮮) 또는 조선 왕조(朝鮮王朝), 이씨 조선(李氏朝鮮), 이왕조(李王朝), 이조(李朝), 이왕(李王)라고 부리기도 하였다.[10][11]

3 같이 보기[ | ]


4 참고[ | ]

  1. 1.0 1.1 〈부산항 조계 조약을 체결하다〉. 《고종실록》 13권. 1876년(조선 개국(開國) 485년; 고종 13년) 12월 17일(음력 10월 27일). 2020년 7월 18일에 확인함. 竝錄副以地圖, 互鈐印以防他日之紛拏如是。大朝鮮國丙子年十二月十七日。東萊府伯洪祐昌印。大日本國 明治十年一月三十日。管理官近藤眞鋤印。 
  2. 2.0 2.1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는 예부의 자문〉. 《태조실록》 3권. 1393년(태조 2) 음력 2월 15일. 2020년 7월 19일에 확인함. 지금부터는 고려(高麗)란 나라 이름은 없애고 조선(朝鮮)의 국호를 좇아 쓰게 할 것이다. 
  3.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시대 불교 정책의 시대적 추이 억불 정책과 폐불”.  |제목=에 라인 피드 문자가 있음(위치 19) (도움말)
  4. “우리역사넷”. 2021년 5월 17일에 확인함. 
  5. 우리역사넷. “‘은둔의 왕국’과 ‘조용한 아침의 나라’”. 
  6. 중앙일보 (2014년 5월 1일). "조선 패망은 부패 관료제 탓, 권력 카르텔 만들어 이권 독점". 
  7. 태조실록 (1413) 1권, 태조 1년 7월 17일 병신년 1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1년〉7월 17일, 태조가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였다.
  8. 〈한양으로 서울을 옮기다〉. 《태조실록》 6권. 1394년(태조 3) 음력 10월 25일. 2018년 12월 13일에 확인함. 한양으로 서울을 옮기었다. 각 관청의 관원 2명씩은 송경에 머물러 있게 하고, 문하 시랑찬성사 최영지(崔永沚)와 상의문하부사 우인열(禹仁烈) 등으로 분도평의사사(分都評議使司)를 삼았다. 
  9. 대조선국우정규칙(大朝鮮國郵征規則) 참조.
  10. 조선(朝鮮) 말살론(抹殺論)의 일면(一面) 동아일보 1면 정치 기사 (1947.10.04, 칼럼/논단)
  11. 이씨조선(李氏朝鮮)은 일제(日帝)조어 「조선(朝鮮)」으로 써야 옳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거주하는 동아일보 구독자 김복중 씨의 주장(1992.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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