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시인의마을

1 # 수선화에게[ | ]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1998) 中

2 # 발자국[ | ]

눈길에 난 발자국만 보아도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눈길에 난 발자국만 보아도
서로 사랑하는 사람의 발자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은 발자국들끼리
서로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것을 보면

남은 발자국들끼리
서로 뜨겁게 한 몸을 이루다가
녹아버리는 것을 보면

눈길에 난 발자국만 보아도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1998) 中

3 # 수련[ | ]

물은 꽃의 눈물인가
꽃은 눈의 눈물인가
물은 꽃을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고
꽃은 물을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한다
새는 나뭇가지를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고
눈물은 인간을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한다

-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1998) 中

4 # 이별노래[ | ]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나는 그대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5 #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 ]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        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        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 말고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겨울밤은 깊어서 눈만 내리어        돌아갈 길 없는 오늘 눈 오는 밤도        하루의 일을 끝낸 작업장 부근        촛불도 꺼져가는 어둔 방에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절망도 없는 이 절망의 세상        슬픔도 없는 이 슬픔의 세상        사랑하며 살아가면 봄눈이 온다.        눈 맞으며 기다리던 기다림 만나        눈 맞으며 그리웁던 그리움 만나        얼씨구나 부둥켜안고 웃어보아라.        절씨구나 뺨 부비며 울어보아라.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봄눈 내리는 보리밭길 걷는 자들은        누구든지 달려와서 가슴 가득히        꿈을 받아라.        꿈을 받아라.

6 # 새벽편지[ | ]

       죽음보다 괴로운 것은        그리움이었다
       사랑도 운명이라고        용기도 운명이라고
       홀로 남아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오늘도 내 가엾은 발자국 소리는        네 창가에 머물다 돌아가고
       별들도 강물 위에        몸을 던졌다

7 # 눈길[ | ]

       크리스마스 이브날 밤        그는 체포되었다        별들도 짐승처럼        꽃들도 짐승처럼 생각되던 밤이었다        나는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내 가슴에 흐르는 물과 피를 생각하면서        눈길을 걸었다        껌 파는 할머니 한 분이        육교 아래로 길을 건너다 눈발에 쓰러지고        나는 컵라면을 사먹고        왜 흐린 불빛 아래        내린 눈들은 서서히 죽어가는지        왜 인간에게도 물결이 있는지        왜 오늘의 괴로움은 부끄러움인지        차가운 눈발이        내 야윈 등을 자꾸 밀었다

8 # 너에게[ | ]

       가을비 오는 날        나는 너의 우산이 되고 싶었다        너의 빈손을 잡고        가을비 내리는 들길을 걸으며        나는 한 송이        너의 들국화를 피우고 싶었다
       오직 살아야 한다고        바람 부는 곳으로 스러져야        쓰러지지 않는다고        차가운 담벼락에 기대 서서        홀로 울던 너의 흰 그림자
       낙엽은 썩어서 너에게로 가고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데        너는 지금 어느 곳        어느 사막 위를 걷고 있는가
       나는 오늘도        바람 부는 들녘에 서서        사라지지 않는        너의 지평선이 되고 싶었다        사막 위에 피어난 들꽃이 되어        나는 너의 천국이 되고 싶었다

9 # 가을편지[ | ]

       가을에는 사막에서 온 편지를 읽어라        가을에는 창을 통하여        새가 날으는 사막을 바라보라        가을에는 별들이 사막 속에 숨어 있다        가을에는 작은 등불을 들고        사막으로 걸어가 기도하라        굶주린 한 소년의 눈물을 생각하며        가을에는 홀로 사막으로 걸어가도 좋다        가을에는 산새가 낙엽의 운명을 생각하고        낙엽은 산새의 운명을 생각한다        가을에는 버릴 것을 다 버린        그런 사람이 무섭다        사막의 마지막 햇빛 속에서        오직 사랑으로 남아 있는        그런 사람이 더 무섭다

10 # 강변역에서[ | ]

       너를 기다리다가        오늘 하루도 마지막날처럼 지나갔다        너를 기다리다가        사랑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바람은 불고 강물은 흐르고        어느새 강변의 불빛마저 꺼져버린 뒤        너를 기다리다가        열차는 또다시 내 가슴 위로 소리 없이 지나갔다        우리가 만남이라고 불렀던        첫눈 내리는 강변역에서        내가 아직도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의 운명보다 언제나        너의 운명을 더 슬퍼하기 때문이다        그 언젠가 겨울산에서        저녁별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우리가 사랑이라고 불렀던        바람 부는 강변역에서        나는 오늘도        우리가 물결처럼        다시 만나야 할 날들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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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 당선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 당선
1979년 첫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간행
시집 :『서울의 예수』, 『새벽 편지』,『별들은 따뜻하다』,『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시선집 『흔들리지 않는 갈대』 간행
1989년 제3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1997년 제10회 동서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와 장편동화 『에밀레종의 슬픔』, 동화집 『바다로 날아간 까치』 간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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