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종

 

1 # 이 노릇을 또 어쩌하리[ | ]

안은 바깥을 그리워하고
바깥은 안을 그리워한다
안팎 곱사등이
안팎 그리움
나를 떠나도 나요
나에게 돌아와도 남이다
남에게 돌아가도 나요
나에게 돌아와도 남이다
이 노릇을 어쩌하리

어쩌할 수 없을 때
바람부느니
어쩌할 수 없을 때
사랑하느니
이 노릇을 또
어쩌하리

2 # 늙고 병든 이 세상에게[ | ]

자꾸 자꾸 물을 줘야 해요
나무도 사람도 죽지 않게
죽음이 공기처럼 떠도는 시절에
그게 우리가 숨쉬는 이유
그게 우리가 꿈꾸는 이유

당신의 마음, 당신의 몸은
얼마나 깊은 샘입니까
사람의 기쁨과 슬픔의 가락으로
그 寶石의 가락으로 솟는 샘

가슴도 손도 꽃피고
나무와 풀
집과 굴뚝들도 꽃피게
초록초록 자라게
땅의, 보석의,
온몸의 가락을 다해 솟는 샘-

하룻밤 자고 나면
한 뼘씩 자라는 굴뚝의 어린 시절
던지는 돌에 날개 돋는 어린 시절
돛 단 지평선의 어린 시절
오, 경이의 어린 시절,
늙고 병든 이 세상에게
그 시절을 되찾아 주게!

3 # 몸을 꿰뚫는 쓰라림과도 같은[ | ]

내 사랑하느니
어디 어느 때의
느닷없는 쓰라림
밤 열두시, 밑도끝도없이
지진처럼 몸을 흔들고 지나가는
마음의 파문
뭘 아는 듯한 슬픔
뭘 아는 듯한 공복감
아는 듯한 흔들림
그 모든 걸 합쳐도 이름 붙일 수 없는
까닭 없을 수밖에 없는
마음에 이는
지진과도 같은 파문......
일상의 모든 일이
그것에서 도망가는 일에 지나지 않게 하는
지진으로 지나가는
地層의 金과도 같은
(아, 노다지도 찾았다!)
몸을 꿰뚫는 쓰라림과도 같은......

4 # 출 발[ | ]

모든 게 처음이에요
처음 아닌 게 없어요
싹도 가지도
사랑도 미움도
지금 막 시작되고 있어요.
기왕 시작된 건 없습니다
죽음 이외엔
죽음 이외엔 아무것도.

자, 우리가 출발시켜야 해요
구름도 우리가 출발시키고
(구름이여 우리를 출발시켜다오)
바람도 시민도
나라도 늙은 희망도
우리가 출발시켜야 해요
(나라여 우리를 출발시켜다오)
지금 막 출발하고 있습니다, 모든 게.
우리들의 이
끄떡도 하지 않는 바위
이름 부를 수 없는 쇳덩어리도
우리가 출발시키고
여러 하느님도
(하느님 우리를 출발하게 해 주시옵)
우리가 출발시켜요
낙엽 한 장이나
말발굽 소리
한 다발 불꽃도 우리가 출발시켜요
여러 불꽃-석유의 불꽃 연탄의 불꽃
노래의 불꽃 우리 얼굴의 불꽃
오 우리들 숨의 불꽃
한 다발 불꽃을 우리가 출발시켜요

우리가 우리의 길을
출발시켜야 해요

5 # 기다림에 관한 명상[ | ]

메시아가 오시면
이 세상이 살까
천만에
우리는 그를 다시
못박을 거야
<메시아>란 항상 못박힌다는 뜻이고
영원히 오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그렇다면?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게 되지
자기 자신을 기다리게 되지
내가 메시아가 아닌데?
자기 자신을 기다리지 않으니
와 있는 메시아를 없애게 되지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건 자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정당화하는 일이기 쉽거든.
  메시아가 다 해 주실 것이고, 대신 죽어 주실 테니까)
눈앞에 있는 걸 없애고, 뭔가 있으면 큰일 나니까 없애고
기다리는 거지. 우리가 기다리는 그걸 祭物化하고 그리고 기
다리는 거지. 궁핍에 처형된 우리들의 삶.
하긴 오지 않는 자, 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데가 이 세
상이야. 오지 않는 걸 기다리는 동안-그게 우리 일생이지.

6 # 걸작의 조건[ | ]

오늘날 나는 글을 쓴다
자신의 검열을 거쳐서
(나여, 제일 높은 벽이여)
활자와 함께 반짝이는 눈이 아니라
활자 뒤에 숨어 있는 눈을 거쳐서
이념들의 검열을 거쳐서
(벽은 새처럼 솟아오른다)
욕심들의 검열을 거쳐서
날개의 숨결을 압박하는 물귀신들
한숨의 길 眞空을 거쳐서
적대감의 균형, 잔인의 뒤안길
오해의 검열을 거쳐서
공포의 돋보기를 거쳐서
(벽은 불길 높이로 솟아오른다)
목구멍들을 거쳐서
막힌 귀를 거쳐서
그림자들을 거쳐서
거치고 거쳐서
거쳐서
(써도 써도 남는 쓸데 없는
무진장의 신경을 우리는 갖고 있느니!)
(지름길이 안 맞는 食性들)
(오 숨어 있는 눈의 섹스 어필)
(불길 높이로 타오르는 벽!)

그 모오든 신나는
걸작의 조건들을 거쳐서

7 # 바 다[ | ]

바다는
두근두근
열려 있다

이 대담한
공간
출렁거리는 머나먼
모험

떠나도 어디
보통 떠나는 것이랴
땅과 그 붙박이 길들
집과 막힌 약속들
마음의 감옥
몸의 감옥에서
이다지도 풀려나
오 발붙이지 않고도(!)
열려 있는 無限生涯
불가항력의 이
팽창이여

8 # 견딜 수 없네[ | ]

갈수록, 일월(日月)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시인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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