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춘20030128

정태춘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98년 「정동진/건너간다」앨범에 이어 만 4년만인 2002년 11월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라는 앨범을 선보인 정태춘씨를 1월 28일 방이동에 있는 까페 짜르에서 만나 자신의 음악,사회에 대한 생각,앞으로의 계획 등에 대해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정태춘씨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오랜만인데, 여러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는 기회 같아서 여러 가지 얘기를 했다. 그러나 내가 불안정한 시기라는 것이 읽는 분들에게 감안이 되어서 읽혀졌으면 좋겠다"는 당부를 덧붙였다.

이번 앨범 속지에 강헌씨는 "성찰이 거세된 혁명은 위험하다.하지만 혁명적 열정이 실종된 성찰은 감동이 없다. 저 질풍노도 같았던 1990년의 「아, 대한민국」에서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지나 「정동진」이라는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며 정태춘, 박은옥 부부는 지금 여기에 이르러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 힘겨운 의제를 우리에게 풀어 놓는다"고 적고있다.

그 힘겨운 의제들은 우리에게 감동을 넘어 또 다른 부채감마저 안겨준다는 느낌이 든다.정태춘씨는 "내 전반기와 중반기가 끝나고 후반기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이것이 시작일 수도 있고,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의 전반기는 아마도 수필가 박순백씨의 "그의 노래엔 사랑이 없다. 아니, 사랑이 없는 게 아니라 사랑 타령이 없다. 사랑이라 않고 그걸 깊이 깊이 감추고, 아닌 듯 다른 언어들로 표현한다. 그의 노래엔 그리움이 있고, 가라앉아 깊은 사랑이 있고, 오래 묵어 정겨운 한국적 정서가 있다"는 말로 대변될 수 있을 듯하다.

그의 중반기는 이영미씨가 말한 이 말이 가장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그의 감수성은 이제 내적으로 침잠하는 폐쇄적 자기고백의 정서를 넘어서서 탁 트인 광장에 모인 집단화된 대중의 아우성 같은 정서를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이는데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나는 태생적으로 중심부에 있지 못한는 것 같다'고 말한대로 정태춘은 집단화된 아우성 같은 정서를 이해하지만,거기서 역시 중심부에 있지 않은 그런 느낌을 받았었다.가사 사전심의 철폐를 이끌어냈던 그 투쟁의 과정에 대해 주철환씨는 "그것이 훗날 문화사에서 '정태춘의 난'으로 기록될지도 모른다"라고 했다. 정태춘씨는 불안정하다고 했지만, 여전히 그는 혁명적 열정이 담긴 성찰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 불꽃같은 역할을 준비하는 그는 그래서 더욱 불안정한지도 모르겠다.

다음은 정태춘씨와의 일문일답이다.

-지승호(이하 지) -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는 어떤 의미입니까? 절망, 희망이 모두 포함이 되어 있는 의미 있는 이야기 같은데요.

=정태춘(이하 정) - 4년만에 나왔고, 작년 봄에 20년 골든 앨범이라는 걸 냈어요. 레코드 회사를 옮기면서 그쪽 제안으로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여섯 개 앨범을 절판시키고, 쉽게 얘기하면 그 판들 그렇게 놔두면 어차피 안팔리니까 하나로 모으자는 요청이었죠. 굉장히 아쉬운 마음으로 각 앨범들을 죽여야 했기 때문에 굉장히 마음 무겁게 작업하면서 33곡인가를 편집하고, 그동안 발매했던 6개 앨범을 모두 절판시켰어요. 그러면서 어떤 정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단순히 사업적인 차원에서 한 것인데, 내 음악에 생각이 조금은 정리됐어요. 정리한 이후에 이번 앨범이 새로 나온거죠. 그 앨범에 내놓으려고 음악을 고르고 하면서 느꼈던 것이 많이 있는데, '내 노래가 무엇이었냐'하는 것, '나는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들을 깊이 있게는 아닐지는 모르지만, 처음으로 훑어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하거든요.

내 노래에 대한 평가도 있었고, 내 삶에 대한 부분도 있었고, 그게 대략 정리가 되고 나서 그전과 달리 하고 싶었던 음악적인 욕심들을 이번에 처음으로 음반화시켰다고 할까요. 편곡자들에게 편곡을 의뢰하지 않고, 레코딩 세션맨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우리 밴드가 직접 편곡하고, 연주를 했다는 것이 가장 특기할 일이라고 생각하구요. 내용에 있어서 다양한 리듬들, 그리고 우리가 만들어낸 우리 방식의 리듬들이 전반적으로 음반에 생동감을 부여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4년간 모았던 곡들 위주로 짜여진 새 노래들, 거기서 이전과는 다른 폭넓은 소재들을 가지고 새 노래들을 발표하게 된 것인데요. 그런 정도 얘기하면 되겠네요.

-지 - 골든 앨범에서 「아, 대한민국」이 빠진 것에 대해 섭섭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요.

=정 - 6개 앨범을 절판시켰다고 했는데, 그 앨범에서는 한 곡인가만 넣었어요. 그 앨범은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한거죠. 그 앨범은 다시 낼 겁니다. 별도의 앨범으로, 원래 상태의 앨범으로 다시 출시할 예정입니다.

-지 - 그걸 소홀히 하신게 아니고,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다시 낼려고 하신 거군요.

=정 - 각 앨범 앨범 하나 하나마다 그 당시의 내 관심사나 내 입장, 그속에 내 열정이나 고민들이 묻어 있는건데, 그것을 이런 식으로 풀어 헤쳐서 버린다는 것은 만만하지 않은 일이었어요. 다른 것은 포기해도 그건 별도의 앨범으로 살려두고 싶다고 생각했죠. 골든 앨범 작업을 하면서 나름대로 평가를 했던 것이 내 노래가 굉장히 주관적인 노래들이었다는 것이었어요. 대중의 일반적인 정서를 대변하거나 대중들의 기호에 영합하거나 하지 않고, 사춘기 때의 일기에서부터 내 상황에 관한 일기까지 그 풀어나가는 방식이나 입장들이 굉장히 주관적이었다는 것을 느꼈어요. 즐거운 노래는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고, 철저하게 주변자적이었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오랜동안 함께 해올 수 있었는가를 생각해보면 제가 대단히 운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감사하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번 앨범을 내면서 내 전반기와 중반기가 끝나고, 후반기로 접어들고 있구나, 후반기가 시작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후반기의 작업이 이것이 시작일 수도 있고, 이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지만, 여하튼 그런 느낌들도 있습니다.

-지 - 이번 앨범에 대해 "지난 수년간 내 가슴 속에서 일어난 감정의 기복이나 세상을 보는 눈의 변화를 음반에 담았다"고 하셨는데, 어떤 감정의 기복이나 변화가 있었습니까?

=정 - 그때 한 얘기들은 그런 걸거예요. 제가 근래에 4년 중에 많이 했던 생각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내가 많이 살았다는 거죠. '얼마 남지 않았다'는 그런 것들, 그리고 또 어떤 단계로 넘어가는 이를테면 내 삶을 정리하는 시기 쯤으로 넘어가는 그런 과도기, 그런 과도기에서 느끼는 불안정함 이런 것들로 인해 이런 저런 감정의 기복이 심했었죠.

그런 것에 의한 노래들이 이번 앨범에 들어갔는데, 초반기의 노래들이 철저하게 저만의 일기였고, 중반기에는 개인의 일기는 철저하게 배제된채 철저하게 상황에 관한 일기였다면, 이번 앨범에서 비로소 다시 내 이야기가 담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음반작업 후반부에 깨달았어요. '아, 이번 앨범에는 내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아치의 노래', '빈산' 이런 노래가 그 시기에, 지금도 정리가 되지 않았지만, 노래를 만든 그 시기의 불안정한 내 상황의 반영이라는 생각을 하죠.

-지 - '아치의 노래'는 '아치'라는 잉꼬새에 정태춘 자신의 감정을 이입해 그린 자화상이라고 하던데, 어떤 감정을 이입하신 겁니까? "날지마 날지마 그건 자학일 뿐이야… 너의 이념은 그저 너를 깊이 상처낼 뿐이야." 이런 가사가 인상적이던데요.

=정 - 그런 압박을 받는다는 거죠. 대개 그렇겠지만, 우리는 상황으로부터 한편으로는 분노와 답답함을 스스로 느끼면서 그것들에 관한 돌파구를 찾거나 도전의지를 가다듬기도 하지만, 일상이라는 끊임없는 상황에 부딪히는 태도들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압박을 받는 게 현실이고, 그게 누구의 압박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부터도 그런 느낌을 받기도 하죠. 무력해진다는 것과는 조금 다르겠는데, 꼭 상황에 의해서만 받는 건 아닌 것 같고, 내가 일부러 노래를 만들 때 나를 이입한다는 생각이 없었어요. 아치의 노래를 하고 있을 뿐이었죠.

녹음을 하면서 집사람이 '당신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얘기를 하길래 '그렇구나'하는 생각을 했죠. 전혀 몰랐다기 보다는 나는 표현하겠다는 욕심이 구체적으로 있었던 건 아니고, 은연중에 나왔다고 생각해요. '빈산' 같은 경우에도 뭔가 공허함 같은 거 그런 것들이 있어요.

-지 - 정태춘씨 노래를 듣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물론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고, 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외면하지 않는 게 인간적이고 좋은건데, 본인한테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거거든요. 어떻게 보면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관심도 없는 사람들은 당장은 행복합니다.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부끄러움도 모르게 만드는 사회 아니었습니까? 그렇게 살면 편하니까요.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라'고 욕을 하기도 힘든 상황인 것 같은데요. 또 막상 그렇게 얘기하는 것은 세상을 버려두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정 - 제가 세상에 관해 이야기하고, 분노하고, 누군가에게 문제 제기하고 그랬던 것들이 여러 사람들에게 굉장히 피곤한 일이죠. 어저께만 하더라도 '캐치 미 이프 유 캔'이라는 영화를 보고 와서 조카들과 잠깐 얘기를 했는데, 그게 재밌다고 조카들이 이야기하더라구요. 제가 '재미가 하나도 없더라'라고 했더니 그 친구들은 '그게 실화랍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 재밌지 않습니까?'라고 얘기 하더라구요. '나는 실화인지 아닌지 관심이 없고, 실화를 바탕으로 하더라도 영화적인 바탕이 더 많았을텐데, 영화 자체로서 재미가 없다'고 하니까 고등학교 졸업하는 아이가 '이모 아저씨 그렇게 살면 세상 피곤해요' 그러더라구요.

물론 농담으로 한 얘기겠지만, 나한테도 피곤하고, 여러 사람에게 피곤한게 문제 의식을 갖는다는 것 이런 건데, 그건 기본적으로 본능적인데서 나오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을 하구요. 집사람은 저보고 형질이라고 하는데, 형질로서 타고난 부분이 있다고 생각을 하고, 이제까지의 활동이 주변자적이었다고 하는데, 주변자적인 입장이 사회에 던져진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 상당부분 있고, 내가 가지고 태어난 것들도 있겠죠.

그런 어떤 형질에 의해서 문제의식이나 중심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에 대한 비판의식 같은 것들이 하나가 있을 것이고, 그 다음에는 부채의식이라고 생각해요. 왜 피곤하게 그런 일을 하냐고 하는데, 어떻게 보면 나 같은 경우 많이 부족하고 한 것을 가지고, 한동안 내 삶에 있어서 상당부분동안 많은 사람들로부터 갈채도 받고, 칭송도 듣고, 감사도 받고, 또 지나칠 정도의 대우도 받고, 함께 살아가면서 그 시대의 사람들로부터 그런 특별한 대우를 받았던 것에 대한 부채감 같은 것도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만약에 그렇지 않았다면 타고난 형질로서의 기질들이 상당히 많이 다운이 되고, 나이가 들면서 희석되고 말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그런 두 부분이 '이렇게 노래하고 활동할 수 있게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요. 그런데 지금은 그걸 고민하고 있어요. 그 부채감, 내가 얼마나 더 잘할 수 있을까, 그걸 굳이 따져볼 필요가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해요. '그런 부채감을 가지고 살 수 있을 것인가? 살아가야 할 것인가? 아니면 상황이 많이 달라져서 그런 부채감을 안 느껴도 된다고 생각할 것인가?' 고민을 해요. 지금 제 시기가 노년기로 접어들어가는 과도기라고 했는데, 지금은 우리 상황으로 얘기한다면 또 하나의 과도기라는 말이죠.

92년 운동 진영이 깨지면서 김영삼 정권 들어서고, 세계화되고 이렇게 할 때 하나의 전환기가 있었다면, 어떻게 보면 '그것보다 더 묵직한 전환기가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닥친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정감을 느끼거든요. 사실은 이런때 인터뷰를 한다는게 좋은 시기가 아닐 수도 있는데.....

-지 - 이번 앨범에 대해 "우리네 삶을 풍경화처럼 그려낸 앨범이지요. 너무 붙어있거나 너무 동떨어지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둔 채 그림을 그린 겁니다. 내 안의 세상이나 내 밖의 세상에 대한 시야가 조금 넓어진 거죠"라고 하셨는데, 그 거리두기라는 게 어떤 의미입니까?

=정 - 그건 특별한 의미는 없을 것 같고, 그걸 특별히 설명할 말은 뭐가 없는 것 같아요. 거리두기라는 말이 꼭 내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내 이야기와 상황에 관한 이야기, 사회에 관한 이야기가 전보다는 다소 객관적으로 씌여졌다고 할까요. 하지만 그런 속에서도 '오토바이 김씨' 같은 경우 이 사회에 대한 절망감 같은 것, 이 사회를 탈출하고 싶은 절망같은 것들이 있는데 그걸 객관화 되었다고 해야 될지 어떨지 모르겠어요.

-지 - '오토바이 김씨'를 들어보면 여전히 그런 고민들을 많이 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가사에서 '21세기로 가는 길이 어디요. 여길 나가는 길이 어디요.... 굴러 떨어지는 리어카를 보았나. 절망하는 사람들을 보았나' 이런 것들이 나오던데요. 강헌씨는 '아! 대한민국'에 대해 "1978년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 이후로 가장 빛나는 저항음악의 성과다. 이 불법 테이프는 천민적인 음반산업계에 뛰어든 한 명의 왜소한 '연예인'이 12년 간의 오욕의 터널을 통과하며 어떻게 자신과 자신이 속한 역사를 바로 세웠는지에 대한 처절한 기록이다"라고 평했는데요. 그렇게 해서 가사 심의 철폐가 이루어지고 했는데, 심의나 검열이 완화되고 달라졌다고 보십니까?

=정 - '아 대한민국'에서 이야기한 것은 기본적으로 검열이라는 제도와의 싸움 때문에 이 앨범이 나온 것은 아니었고, 그 시기에 분출했던 내 분노와 내 어떤 희망 이런 것들의 결과물이었죠. 그걸 가지고 검열제도에 도전하게 되었고,「92년 장마, 종로에서」까지 그 싸움이 계속되는데, 일단 몇몇 곡들을 넣어봤는데, 역시 심의 통과가 안되었구요. 그래서 전면적으로 싸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때 기존의 음반법이라는 것이 음반 및 비디오에 관한 법률로 이름이 바뀌면서 불법비디오에 관한 처벌 강화 요구를 타고, 음반에 대해서도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법이 국회에서 통과가 되요.

그런데 그때 국회에서 통과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이 앨범을 내고, 96년도까지의 싸움이 되었죠. 검열제도와의 싸움 자체를 어떤 명분의 싸움이라고 얘기하기에는, 뭐라고 할까, 90년대 초에 어떻게 보면 제도 가지고 싸운다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우리의 문제의식이나 전투의지는 사회 제반의 것, 사회의 가장 중심적인 것과 대치선을 긋고 있었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검열제도 하나만을 가지고 싸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구요. 그러기에는 명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한테는 절박한 것이었죠.

이를테면 창작하는 사람으로서 자기 검열을 사전에 하게 만들고, 근본적인 상상력의 제약을 가져오는 그 제도가 존재하는 한 '나는 더 이상 노래할 수도, 노래를 만들수도 없다'는 개인적인 절박함 때문에 그 싸움은 필연성이 있었고, 그리고 어쨌든 간에 6년여만에 재판도 받고, 위헌 제청도 하고, 정부에서 진행하는 개정 프로그램, 토론회 등에도 참여하고 해서 해냈습니다. 그 성과들이 좀 더 다양한 좀 더 다른 상상력을 가진 아티스트들, 통속적인 사람들의 더 기발한 감각적인 것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고, 전혀 다른 상상력과 다른 세계관과 더 주변부적이랄까, 더 아웃사이더랄까, 더 기발한 친구들의 작업에 더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제 생각이었죠.

그런데 사회가 확 변화되면서 그런 상상력들이 다 거세가 되고, 통속적인 것들이 휩쓰는 시기에 검열 철폐의 성과는 우리 대중 음악 쪽에서 어떤 좋은 성과물들을 내는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 - 조금 전에 '음반 및 비디오에 관한 법률'이라는 이름으로 심의가 강화되었다고 하셨는데요. 밀로스 포먼 감독이 이런 말을 했지 않습니까? '왜 정부가 포르노와 싸우는지 아는가? 그렇게 되면 대중들이 검열제도를 반대하지 않고, 검열제도를 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검열이 정당화된 후에는 결국 정부에 반대하는 모든 목소리를 억압하게 되는 것이다'. 그 얘기처럼 대중들 스스로가 자기 검열 장치를 만들어 놓기도 하고, 그걸 사회에 요구하기도 하는데요. 표현의 자유라는 것이 어떤 부분까지 허용되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정 - 표현의 자유가 어떤 그룹에 의해 검열을 하거나 통제를 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상상력 자체에 개입을 하는 장치이기 때문에 사람들 본성에 영향을 미치고, 특히 사상적인 또는 예술적인 그런 상상력들에 가장 심각하게 통제를 가하는 그런 장치이기 때문에 처절하게 싸워야 될만한 가치가 있는 그런 싸움이죠. 이후로도 여전히 그런 싸움들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고, 그런 전근대적인 장치로서 상상력을 제한하고 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꼭 그런 장치만이 검열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근래 4년간 그런 생각들을 많이 했어요.

그 이후에 '표현의 자유를 충분히 구가합니까?'라고 얘기할 때,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제도가 통제하는 것은 아주 작은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것 외에도 우리를 통제하는 수많은 기제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런 것들이 예를 들자면 기성사회의 고정관념부터 시작해서 집단사회에서 은연중에 요구하는 어떤 순종적인, 순종적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지만, 이탈하는 자에 대한 응징 그런 것을 은연중에 강요하는 분위기나 그런 것들, 우리 사회의 전근대성 그런 것들이 여전히 심각하게 내 상상력을 가로 막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상상력만 가로막는 것이 아니고, 표현의 자유에 있어서도 '내 상상력이 이것 밖에 안되는가?'하고 답답함을 느끼는 것과 다르게, 나는 사실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내 머리 속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떠올라 있는데, 그것을 못하게 하는 어떤 분위기를 너무 심각하게 느꼈었어요. 이를테면 국가라는 것에 관한 우리의 여러 관념들, 그것에 도전하거나 그것을 부정하는 어떤 생각들에 대해서 불온시하는 그런 전근대성이 있구요.

집단도 마찬가지지만, 이런 것들, 저는 태극기에 대해서 경례하기 싫었고, 애국가 따라 부르기 싫었고, 국민 의례에 참가하고 싶지 않았어요. 저 혼자 그렇게 하지 않으면 되지만,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걸 공개된 자리에서 해야되는데, 그런 이야기들을 못하게 가로막는 분위기들, 그것만은 아니겠죠. 내 생각을 예술로서 정당화시킬 수 있건 없건 간에 내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수많은 충동같은 표현 욕구들, 어떤 것은 불손하다는 비판을 당하거나, 천박하다고도 비판을 당하거나 여러 가지 그런 식으로 매도당할 수 있는 내 나름대로의 섬세한 상상력들이 내 속에는 구체적으로 떠돌고 있는데, 그것을 표현해 냈을때에 내가 감당해야 하는 부담감 이런 것들이 엄청나게 많이 존재하고, 그것이 우리 사회의 전근대성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것들로 인해서 과거의 검열제도에 의해서 느꼈던 그 불편함 이상을 고통스럽게 느꼈을 때 그 절망감 같은 것들을 많이 느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제가 그런 능력이 있을까?', '또 다른 상상력이나 내 속에서 그려지는 또 다른 그림이나 이런 것들을 충분히 예술적으로 제대로 그려낼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있기는 한데, 잘 그려냈을 때 때때로 용인받고, 다소 그렇지 못할 때는 매도당하는 이런 기준들이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런 부분들을 고민해야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 - 노문모(노무현을 사랑하는 문화예술인 모임) 회원이시죠?

=정 - 회원이었죠. 2001년초부터 연말까지 멤버로 있었죠. 그러다가 노문모를 이끌어가는 분에게 메일로 인사를 하고 나왔습니다.

-지 - 나오신 특별한 이유는 있으십니까? =정 - 애초부터 생각이 좀 달랐어요. 그 당시에는 노무현씨가 민주당내에서조차 지명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민주당내에서 후보로 만드는 것이 급하다고 생각하는 분위기였고, 거기에 문화예술인 여러 사람들이 동참해서 압박을 가하자고 모였습니다. 저는 거기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한편으로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과거 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시기 이후에 처음으로 진보적인 문화예술인들이 정치적인 이슈를 가지고 모이기 시작했는데, 저는 또 다른 역할을 기대를 했어요. 그 가능성을 찾아보고 싶었고, 저는 단순히 노무현을 지지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 이후까지를 생각하자고 했어요.

그래서 노무현을 지지하는 문화예술인들을 조직하는 것 말고, 문화예술인들이 앞장 서서 노무현을 지지하고 함께 갈 수 있는 대중들을 이끌어내자고 했죠. 구체적으로 386을 중심으로한 비판적인 유권자들을 어떻게 전면으로 이끌어낼 것인가를 고민했어요. 매우 오랫동안 그것에 대해 많이 고민했고, 그것에 매달렸어요. 제가 지난 4년동안 감정의 기복을 많이 느꼈다는 것 중의 하나는 그런 희망에 대해서 포기해야 하거나 하는 그런 상황들이 저를 이렇게 저렇게 어렵게 하기도 했구요. 제 취지는 그랬어요.

문화예술인들이 적어도 백명, 이백명 모였다면 그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고, 문화예술인들이 그 세대의 문화를 끌어내고, 그것을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 확인시키고, 그 이상으로 고민을 하게 하거나, 더 전면에 나올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내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내자고 한거죠. 연말에 정식 기자회견이 있었는데, 그 기자회견에서 성명서를 작성하면서 제 얘기를 일부 집어넣긴 했지만, 제대로 안됐고, 그 모임이 그렇게 갈 전망이 안보였어요.

그래서 전 일단 나오겠다고 했고, 그리고 그 이후에 다른 프로그램을 진행했죠. '바람이 분다'라는 콘서트를 진행했어요. 노문모하고는 그래요. 거기서 나오면서 한편으로는 굉장히 허탈한 마음이 있었고, 이것이 내 개인의 꿈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 - 선거과정에서 신문에는 노문모 회원으로 계속 나왔는데요. =정 - 막판에는 빠졌어요.

-지 - 제 기억으로는 선거 막바지까지 명단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명단에도 있고 그런데, 정태춘씨 같으면 훨씬 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섭섭해 한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은데요.

=정 - 전 오히려 선거 20일쯤전이었나, 계속 거론이 된다고 해서 해명서를 돌릴까도 생각했어요. 그런데 주위에서 그렇게 하지 말자고 해서 그만뒀죠. 군산의 시민연대 행사에 가서 공연하면서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나를 노문모 멤버로 거론하는 신문들이 있는데, 나는 노문모에서 나왔다, 나는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고, 민노당을 지지한다. 하지만 대통령 후보로는 누구를 지지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계속 신문사에서 전화오는데, 누굴 지지할지 모르겠다'고 했어요.

12월 2일부터 공연을 시작했는데, 공연을 하는 동안 시청앞에서는 촛불시위를 하고, 인원이 많이 모이는 날에는 세실극장이 봉쇄가 되기도 했구요. 선거판은 급하게 진행이 되고, 제가 가장 기대했던 젊은 관객들이 덜 왔고, 그래서 공연하면서도 계속 편치가 않았어요.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걸까, 내가 누굴 도와야 한다는 도와야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리고 구체적으로 함께 하자는 요청도 있었는데, 전부 사양해야되는 상황이었어요. 그러면서 몇번 주위에 그런 얘기들을 했었어요. 한번은 우리 쪽의 스탭들에게 '권영길 지지 선언을 해야하는 것 아니냐? 지금 노무현이 쉽게 될 것 같다. 그러니 권영길지지 선언을 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했더니, 주위에서 너무 낙관하지 말라고 해서 접었어요.

막판에 가서는 '노무현을 지지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했었고. 불안한 상황이고 그랬을 때, 저도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지를 가지고 헤맸습니다. 민노당 정책이 나왔을 때 100% 흡족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바로 이거야'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민노당을 지지한다고 했었구요. 사실 노문모를 나오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렇게 1년간 노문모쪽에 있으면서도 노동자들의 이야기, 약한자들의 이야기들이 신문에서 거론될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라는 이야기를 했고, 그런 차이가 있었죠.

연초부터 '바람이 분다' 콘서트를 기획하고, 두 차례 공연을 하면서도 노문모에서 얘기했던 그 세대들의 등장을 기대하고 그것들을 진행했구요. 386의 등장해서 모두는 아니겠지만, 그들이 기성사회로 진입하고 있고, 기득권층으로 편입해 들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들어가더라도 이렇게 들어가서는 안된다. 말없는 10년의 묵비권을 깨야 한다. 그 묵비권을 깨고 그들의 정체성을 확인해가는 작업들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문화적으로 그들의 문화적인 취향이나 이런 것들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해서 그들이 각 부문에서 전면적으로 앞으로 나올 수 있는 뭔가를 촉발시킬 수 있는 작업을 해야 하고, 그것은 대선에서의 노사모, 노문모의 운동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제가 386에 가지는 애정이나 연대감 같은 것, 자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제가 가장 열정적인 삶을 살았을 때 만났던 세대이기도 하고, 제 나름대로는 논리적인 근거가 있다는 말이죠. 우리 현대사에서 해방정국과 그 이후 우리 사회에서 봤을 때 386이 젊었을 때 분출됐던 또 다른 욕구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면 해방정국 이후 두 번 있었던 좌파적 상상력이 열린 시기라고 생각했던 거죠. 해방정국에서 그런 체험을 했던 그 사람들은 전쟁통에 북으로 전부 갔거나, 빨치산으로 궤멸됐거나, 아주 소수가 남아서 흩어져 버렸죠. 우리 사회에 아무 역할을 못하고, 그런데 386은 다르다는 거죠.

그들은 그런 세례를 받았던 사람들이 수적으로도 어마어마하고, 그네들은 지금도 건재하고 있고, 기성세대로 자리잡아가고 있구요. 그리고 그런 역사체험을 했던 세대는 흔히 있는 세대가 아니라는 거죠. 자기 삶과 역사를 하나로 생각하고 헌신했던 그런 어떤 체험들이 아무 세대에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주 있는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죠. 나는 그들이 아름다운 역할을 이후에 할 것이라고 기대를 하고, 그런 역할을 해야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그들에 대한 기대가 높은거죠. 그들이 체험했던 것이 기성의 모든 것과 조금 다른 대항적인 것이었고, 문화적인 것이든, 이데올로기 적이든 대항적이거나 대안적인 것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거죠.

그것이 증발되어 버리고 있어요. 문화적으로도 증발되어 버리고 없고, 현재의 문화지형에서 없어져버린 거죠. 이념적으로도 민노당조차도 내놓고 있는 그런 정책이나 사회적인 전망이나 지향에 대해서도 그것과는 다른 뭔가가 있는데, 그것을 제대로 정리해내지 못하고 있고, 뿔뿔이 흩어져 있다는 거죠. 그런 부분들을 해내고 싶었어요. 그걸 제 남은 삶동안 하고 싶었던거죠. 그런데 그게 헛된 꿈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런 것들을 문화적으로 촉발시키려고 했던 것이 너무 순진한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상당부분 접고 있고,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겠다, 이야기는 하겠지만, 더 이상 선동하지 않겠다'고 거의 접고 있는 상태죠.

-지 - 어떤 부분에서 좌절감을 느끼셨습니까? =정 - 좌절감을 느꼈다기 보다는 전 그런 모습들을 보고 싶었어요. 그들이 우리 사회의 중심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이런 과정에서 그들이 보이는 모습을 보고 싶었고, '우리는 어떤 역사를 체험했던 세대다. 우리는 어떤 소명의식이 있다. 우리는 여전히 무엇을 고민하고 있다'는 것으로 뭔가 그들만의 공동체적인 정체성을 우리 사회에 드러내주길 바랬어요. 다른 그룹으로부터 그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들의 사회적 지향, 역사적 지향이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도록 정리를 해서 우리 사회에 제시해 주길 바랬던 거죠.

여전히 침묵하지 말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념적으로, 정치적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침묵하지 말고, 드러내주길 기대했던 거죠. 그리고 그것이 여러 분야에 파장을 일으키길 바랬던 거죠.

-지 - 그것이 미미한 부분일지는 몰라도, 이번 선거가 이회창 후보가 말하는 합리적 메인스트림(우리는 수구세력이라고 부르는)을 2030이 투표혁명으로 이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문성근씨는 '동학농민혁명 이후 실패로 점철된 역사에서 최초의 승리로 평가할만한 대목'이라고 까지 이야기 했는데요.

=정 - 이겼다고는 하지만 무엇이 이겼는지가 안나왔어요. 지금 답이 안나와 있는 거죠. 2030이 바라는 대통령을 뽑는 이벤트였고, 그리고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권력을 쟁취하는 이벤트였다는 말이예요. 권력의 핵심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은 있는데, 선거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지 얘기했는데, 그들을 지지했던 2030이든 386이든 그들 자신의 정치적인 지향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한 바 없어요. 같지 않다는 거죠.

노무현을 중심으로 한 참신한 정치집단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권력을 잡았어요. 다른 정치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이 정권을 잡았다고 해서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흡수되었다고 할 수 없다는 거죠. 이겼다고 하지만 과연 누가 이겼는지에 대해 정확히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어요. 노무현을 중심으로 한 그 정치집단이 선거 공약 이런 것을 가지고 이겼고, 젊은 층은 그들을 도와줬을 뿐이지, 그 집단의 정치적인 색깔이나 목적은 무엇이었는지, 그 이후에 그들이 어떤 역할들을 감당해 나갈 수 있을지 아무것도 안 나와 있다는 거죠.

우리 현대사는 10년 단위로 진행이 되어 왔어요. 김영삼, 김대중 정권이 20세기의 마지막 10년을 가고 있고, 그 기간동안 386은 침묵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새로운 10년을 준비하자 이런 얘기들이 나왔어요.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이후 새로운 10년간 무엇을 할 것인가, 그 뒤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 사회에 대한 지향도 보다 구체적이고, 참신한 것으로 끌어내야 하고, 그런 동력으로 386이 나서줘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지 - 386의 의미를 강조하셨는데, 일부에서는 386이라는 단어가 비아냥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386세대의 투쟁의 열매를 일부 운동권이 차지했고, 그 후광으로 정치를 하는 386세대 정치인들이 전혀 개혁적이지 못하다고 비난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김민석씨의 경우에도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구요.

=정 -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 굉장히 낮게 의미를 둡니다. 현재 정치권에 나와 있는 사람들, 특히 보수적인 층으로부터 유혹을 받았거나, 그쪽과 친화력을 가진 일부 사람들은 전체 386중에서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386은 그들의 정치적인 주도성도 안 드러냈고, 그 당시 이후로 침묵으로 일관했으니까 안 드러났고, 상업적으로도 주류적인 집단으로 드러나지 않았단 말이예요.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부문이라도 확실한 소비자 집단으로 떠올라 본적이 있다면 비아냥 거림의 대상은 아니었을텐데, 그런 여러 가지 면에서 숨어 있었고, 침묵해 왔고, 그랬던 수많은 대중들로 봐서 그중의 일부 정치인들로는 전혀 비중을 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 - <바람이 분다> 공연 에서 '바람'의 의미에 대해 "희망으로 가는 '바람'의 진원지가 바로 386을 포함한 80년대 세대의 정신이라고 믿는다"고 하셨는데요. 80년대의 정신이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겁니까? 어떤 분들은 386이야말로 자신의 문화적인 정체성도 없고, 기회주의적이라고 혹평하는데요.

=정 - 80년대라고 얘기하기에는 다소 문제가 있어요. 80년대의 성과가 모두 6.29로 끝난 것 같은 측면이 있고, 물론 그 부분이 강하기는 합니다. 60% 이상이 될 수도 있고, 80년대의 싸움의 결과는 6.29로 완성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이후의 흐름들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거예요.

군부에 대한 저항도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그것보다는 기성의 우리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나 그런 것들과도 싸워야한다는 거죠. 세계관에 있어서도 자본주의 세계관 말고, 또 다른 세계관을 접했던 체험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80년대 전반이라고 얘기하긴 곤란하고, 386 전체라고 말하기는 곤란하지만,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이 그런 체험들을 했고, 어떤 사람들은 흥건한 정도의 세례같은 것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고, 그것이 개개인들의 삶에 있어서도 중요할 것이라고 보는거죠.

문화적으로도 그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문화를 거의 완결 수준에까지 이뤄냈다고 생각하구요. 문화적인 틀로서 미학이나 형식 이런 면에서 정교하게 그들 나름대로의 문화를 건설했던 사람들이란 말이죠. 그 문화가 사라져버렸는데, 그 당시 문화인들의 모임이 이루어질 때 그런 것들을 다시 한번 재건을 하자는 거였어요. 그것을 완벽하게 재건은 하지 못하더라도 재현을 하면서 새롭게 만들어나갈 수 있는 방법이 찾아지지 않을까 했던 거죠. 다시 복구하자는 게 아니고, 그런 것들을 고민하자고 했던 거죠.

-지 - "나는 음악보다 예술보다 우리들의 시대를 사랑한다. 그것의 관용과 실천으로써 나의 노래가 있다"라면서 동시대에 대한 애정을 많이 보여주셨는데요. 그것을 다음 세대에 대해서는 애정보다 우려감을 보이고 있지 않나 하는 평가도 있는데요.

=정 - 그렇지는 않은데요.

-지 - 정도차이라고 할까요? 동시대에 대한 애정을 보이는 것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다음 세대에 대한 애정이 많이 비치지 않는 거 아니냐는 건데요.

=정 - 애정은 연대감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그 이후에 세대들에 대해서 체험으로서 함께 했던 그런 연대감은 없고, 우리 사회에 관한 고민의 방향이 좀 다르죠. 하지만 그들 역시 그들 나름대로 우리 사회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아요. 중립적이죠. 얼마간 거리를 인정하고 있고.

-지 - '문화적인 이질감이 있다'는 말씀도 하셨는데요. '젊은 세대들에 대한 대안과 전망을 포기했다고 보는 게 좋을 거다'는 자조적인 농담을 하신 걸 본 적이 있는데요. 요즘 젊은 세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 - 이질감은 많죠. 제가 그런 생각을 많이 했을 때가 90년대 중반경이예요. 대학에서의 행사가 변화되어지기 시작할 때 쯤이죠. 대학행사에서 그런 얘기들을 많이 했어요. '연대감을 못 느낀다. 이제 나를 부르지 마라'고 한 것이 대학에서 한 마지막 인사라면 인사였고, 연대감을 느끼지 않는 이유 몇가지는 MBC 생방송에서도 얘기한 적이 있어요.

지금은 제가 잘 기억을 못하겠고, 그때는 뭔가 허탈한 느낌 같은 것, 심한 이질감 같은 것을 몸으로 직접 느끼던 때였죠. 대학 일부에서는 아직도 나를 부르고, 일부에서는 전혀 저와 다른 분위기가 있었고, 제가 그 자리에 서는 것이 대단히 곤혹스러웠어요. 그때는 좀 강하게 그런 이야기들을 했었죠.

-지 - 어느 대학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태생적으로 중심부에 있지 않아요. 정말 좋은 세상이 이뤄진다고 해도 나는 그 주변에 있을 것 같구요"라고 하신 적이 있으신데요.

=정 - 하하하. 이번엔 좀 다른 생각을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기 보다는 그 이야기는 여전히 맞는데, 좋은 세상이 오더라도 중심에 들어가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은 여전히 맞아요. 이를테면 이제까지는 주변에 있음으로 해서 중심에 대해 늘 따지고 공격하고 그런 입장을 취하는 주변자였다는 말이죠. 하지만 좋은 세상이 오면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편안하게 주변으로 빠지는 것이지, 비판자로서 늘 예리하게 날을 세워서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이번에 노무현 정권이 뜨면서도 일부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 사람들이 정권을 잡는 몇 년동안 어떤 입장일 것인가?' 생각했을 때, 저는 주변부지만 적대적이지 않고, 전면적으로 비판적이지 않을 것 같아요. 그들에게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지도 않을 거고, 예전에는 '제가 주변부를 지향하거나 아주 반중심적인 그런 것인가' 하는 그런 생각을 조금 했었죠. 어떤 면에서는 편안해진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하긴 아까는 90년대 초반의 불안정한 과도기보다도 지금은 불안정한 느낌이 더하다는 말도 했는데, 어떻게될지 좀 더 지켜봐야 될 것 같아요. 제 생각도 어떻게 정리가 될 지....

-지 - 어떤 게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더 비중있다고 생각하는 역할이 있을텐데요. 이영미씨가 어느 글에서 "그의 감수성은 이제 내적으로 침잠하는 폐쇄적 자기고백의 정서를 넘어서서 탁 트인 광장에 모인 집단화된 대중의 아우성 같은 정서를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이는데에 이르게 되었다"라고 쓴 적이 있는데요.

=정 - 그런데 그것은 90년대 중반의 이야기예요. 저는 여중생 사망사건과 관련해서 몇번 요청이 들어왔지만 촛불 시위에 한번도 안 갔어요. 한번도 안 간 것은 '이제 내가 나서는 곳이 달라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을 몇 년 전부터 했고, 김대중 정권 들어서고 나서 운동 진영의 행사들이 일부 관에 의해서 이루어지거나, 뭔가 기념적인 행사로 치뤄지거나 하는 이런 것에 참여하면서 갈등을 많이 느꼈어요.

'이런 행사에 참여를 해야 하는가?'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풀리지 않는 숙제를 다루는 행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산이 많이 투여되는 것도 우려가 되었구요. 일반관객들을 대상으로 끌어들이면서 대중화를 시도하는 어떤 행사들이 필요하지 않다고 할 수 없지만, '그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이를테면 '양심수를 위한 시와 음악의 밤'만 하더라도 11년을 했는데, 조금씩 성격이 변화되면서 대중가수들이 대거 참여를 하게 되었고, 거기 오는 관객들이 이슈에 집중하기보다 이벤트에 집중하는 어떤 흐름이 생겼는데, 그걸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거고, '그렇다면 내가 빠지겠다'가 된거죠.

그리고 의문사 진상규명 관련된 행사였는데, 세종문화회관에서 많은 가수들이 참여해서 치뤄졌는데, 가서 확인해보니까 제가 갈 자리가 아니다 싶었구요. 백기완 선생을 돕기 위한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물론 기획쪽에 많이 관여를 했지만, 전체적인 그림이 '백선생의 생각이 뭐냐, 그 양반을 왜 도와야 하는가?' 이런게 아니었고, 이벤트 자체로서의 색깔이 너무 강해서 '이것도 잘못 참여했구나' 싶어 빠졌고, 그런 행사들에서 점점 빠지기 시작했어요. 올해도 양심수 공연을 안했구요.

그리고 '효순이 미선이' 행사에도 어떤 광장에서 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소 거리감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옛날에는 그 광장 자체가 도발적인 것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고, 광장이 월드컵 이후에 축제의 장이 되어버렸죠. 그런 광장에서의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저한테 편안하지 않았고, '폭넓게 공감대를 가지거나 이슈화된 사안에 대해 나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많은 가수들이 참여하고 있는데, '나까지 가서 무슨 얘기를 할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죠.

한편으로는 거기 모인 사람들의 기본적인 생각, 효선이·미순이, 미국 이런 것들에 대한 생각이 저와 같으냐고 생각했을 때 저는 동질감을 느끼지는 못했어요. 제가 더 과격할 수도 있고 한데, 그 분위기에 맞춰서 내가 노래를 편안하게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했었구요.

-지 - 저는 광장에 있을때조차 주변인 같은 느낌이 들때가 있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는데요.(웃음) 고향이 경기도 평택이시잖습니까? 여중생 장갑차 사건에 대해 특별한 느낌이 있으실 것도 같은데요. 미군과 관련한 기억 같은 것 있으십니까?

=정 - 일단은 저는 반미주의자예요. '미국이 세계사에 등장하지 않았다면' 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죠. 유럽을 중심으로 세계사가 진행되었고, 미국에서는 아메리카 원주민이 계속 살고 있었다면 '우리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는 사람이죠. 미국의 등장은 유럽 문명의 사생아요, 그런 부정적인 쪽으로 평가를 하거든요.

우리 사회에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등장한 것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는 어렸을때부터 미군부대 가까이에서 살았지만, 미국의 GI 문화를 접하지는 못했어요. 미군부대의 아름다운 골프장과 훈련할 때 하늘에서 내려오는 꿈같은 오색 낙하산을 유년기부터 봐왔고, 중고등학교때는 미군부대를 통해서 통학을 하기도 했습니다.

미군들 제대로 보지도 못했고, 심각하게 만나지 않았는데, 내 체험으로 미국을 느낀 것이 아니고, 사회과학으로 미국을 만나기 시작한거죠. 그러면서 미국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하는 생각에 이른 거죠. 그런데 과연 그런 내 정서를 가지고, 대중적인 집회에 가서 노래를 하고, 이야기를 한다고 했을 때 뭐라고 얘기해야 할까도 갑갑했지만, 반드시 안간다고 했던 것은 아니예요. 시간이 맞으면 갈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고, 윤금이를 위한 노래인 '금이를 위한 만가'라는 노래를 부르려고 다시 연습하기도 했었어요. 그런데 결국은 웬만하면 참여하지 말았으면 했었구요. 얘기 듣기로는 많은 가수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하더라구요.

-지 - 자발적으로 많은 국민들이 참여해서 미국에 대해 항의를 하는 시위는 처음이었는데요. 국민들에게 미국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촛불 시위에 대해 노 당선자도 자제를 당부하고 있고, 보수 신문들은 국익에 도움이 안된다고 하고 있고, 일부 종교단체에서는 촛불 시위 반대 시위까지 벌이고 있는데요. 촛불 시위를 계속 해야한다고 보십니까?

=정 - 그런 코멘트는 제가 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주한미군 철수를 원하는 사람이고, 흔히 말하자면 보수 언론에서 얘기하는 반미주의자인데, 그 집회에 대해서는 코멘트를 할 수 없죠. 하지만 굉장히 의미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한편으로 안도감을 느끼는 건 제가 90년대 해왔던 동력들을 떨어뜨릴 수도 있는 건데, 굉장히 안도감을 느끼거든요. 민노당에서 제시한 정책같은 것들을 통해서 그런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이 이 사회에도 있다는 것이 드러난 것에 대해서 얼마나 안도했는지 몰라요.

거기에 대해 아쉬운 점이나 부족한 부분들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근래에 들어와서 제도언론들이, 전 한겨레와 중앙일보를 보는데 중앙일보에서 여론조사를 하면서 5060의 불만감을 조장하고 그러고 있으면서 우리 사회의 여러 측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들을 여론 조사를 통해 드러내는데, 저는 그것을 보고 오히려 굉장히 안도감 같은 것을 느꼈어요. 이를테면 '불편해지더라도 소파 문제는 풀어야 한다'든지, 미북간의 관계에서 미국의 의존도가 어마어마하게 떨어진 것이라든지 다른 현실에 대해서도 '분배냐 성장이냐' 이런 문제에서 우리사회의 기본적인 가치관들이 바뀌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아주 큰 안도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다는 거죠.

그런 것을 보면서 내가 열을 올릴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을 하고, 내가 열을 올리지 않아도 얼마든지 희망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지 - 기대와는 달리 김대중 정부가 친노동자적인 정권은 못되었던 것 같은데요. 두산중공업노동자 배달호씨가 분신자살을 하기도 했구요. 진의를 알 수는 없지만, 노무현 당선자 역시 '해고를 더 쉽게 하겠다'는 등의 발언으로 노동자들을 실망시키고 있는데, 그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 봐라. 예전이 훨씬 나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은데요.

=정 - 선거 며칠 지나고 나서 주위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노무현을 지지하는 사람들, 비판적으로 지지했던 사람들,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이회창이 되면 안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그리고 민노당 쪽에 미안하지만 노무현을 당선시켜야 된다고 말했던 사람들, 특히 이름을 내놓고 지지했던 사람들이 모두 민주당의 정책이 올바르기 때문에 지지하지는 않았다는 말이죠. 민주당의 공약 중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는 거죠.

예를 들자면 노무현 씨는 새만금 같은 경우 노골적으로 '새만금 사업은 계속된다'고 했는데, 그런 것은 정리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노무현의 공약 중에서 그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던 사람들이 '이건 아니라고 선을 그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너무 빨리 나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선을 그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더구나 그 공약을 포기하도록 만들어야 된다는 거죠. 새만금 외에도 노동에 관한 부분이 있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 분을 노골적으로 지지했던 사람들은 그 사람 전체 공약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요. 양심적으로 틀렸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제 선을 그어야 되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지금 인수위원회가 얘기하는 것 중에서 논란이 되는 것들에 대해 분명하게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아니다. 우리는 이것을 지지해서 당신을 선출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해야할 그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 - 저도 100% 동감하는 부분이긴 합니다만, 만약 정치를 할 사람이면 모르겠지만, 뭔가 다급한 것 같아서 참여했다가 '난 다시 생업에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다시 끄집어내서 '너 그거 책임져야 되지 않냐?'라고 말하는 것은 가혹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정 - 아니죠. 책임지는 방법이 다시 정치적인 방법으로의 책임이 아니고, 다른 방법이 있지 않나 하는 거죠. 제가 얘기하는 것은 문화예술인들의 경우인데, 학자들이라든지 이런 사람도 있겠죠. 그들이 노무현 정권이 내걸었던 공약 중에서 어느 것을 지지하고, 어느 것을 지지하지 않는지 정리를 해야된다는 거죠. '전면적인 공약에 대한 지지가 아니었다. 우리 사회의 후퇴를 막기 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 내가 당신을 지지했다면 당신의 모든 공약에 대해서 책임이 있고, 그 중에 어떤 부분들은 반대한다는 것은 분명히 밝힌다. 그리고 그것을 포기하기를 바란다'라는 요구를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관철되지 않는다면 그 다음에 다른 방법이 나와야겠죠. 그것에 대해 '노 코멘트' 하고 지나간다면 굉장히 위험하고, 무책임하다는 거죠.

-지 - 맞는 얘기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기존의 연예인들이 동원 아니면 국회의원이 목적인 경우에만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대해서는 크게 비난을 받지 않는데, 오히려 자신이 확실한 정치적인 소신을 가지고 참여할 때 수구언론 등을 통해 '완장 찬 홍위병'으로 묘사되고, 대중들은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더 불편한 눈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선거가 끝났을때 어떠한 정치적 발언도 하기 힘든 그런 면도 있을 것 같은데요.

=정 - 어느 한시기에만 정치적인 발언을 하고, 어느 시기에는 본업에만 전념하는 이런 이야기는 별로 공감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물론 어디에 얼만큼 투여하느냐는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떤 정치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고, 대중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 알고, 대중의 삶에 대해서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때때로 정치적인 공간에서 발언을 하는 사람이라면 일상적인 삶 속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입장 표명이나 프로그램의 참여나 이런 것에서 어떤 때는 참가하고, 어떤때는 코멘트 조차 삼가는 것은 오히려 지나친 결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일상에서도 같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죠.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 - 정태춘씨 같은 경우 살아오시면서 쭉 그런 모습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개인이 그런 선택을 하는데는 굉장히 피곤한 여러 가지가 따르는 것도 사실이지 않습니까? 결벽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끝났으니까 이제 쉬겠다'라고 선택을 하는 것도 이해는 가거든요. 저같은 경우에도 '좀 더 해주십시오'라고 요청하는 편이긴 하지만요.

=정 - 인간적으로 이해는 가는데, '굉장히 피곤한 일이었어. 나한테 굉장히 안 어울리는 일이었어' 이런 뉘앙스로 비칠 수 있거든요.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한 일이면 그 뒤에도 그것을 청산하듯이 얘기하는 것은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거죠. '피곤했기 때문에 쉬고 싶다. 떨어져 있고 싶다. 그것 때문에 내 일을 빼앗겼기 때문에 전념해야겠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하는 식으로 선을 그으려는 태도는 좀 답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 - 노당선자의 광주 95% 득표의 의미를 어떻게 보십니까? 그 안에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을텐데, 어떤 분들은 '전라도 독립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지역감정이 깊어질까 우려하기도 하는데요.

=정 - 저는 이번 투표에 지역 색깔은 다른 때와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이 부산 사람인데도 많이 줬다고 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변화 차원에서는 특별히 다른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당 성향이나 야당 성향이냐' 라고 봤을 때 전라도의 야성이 결집이 되었다고 생각을 하구요. 제 공연이 작년 12월 2일날 시작해서 20일날 끝났어요.

공연 끝나기 전날인 19일날 투표가 있었구요. 그날 사무실에서 출구조사 결과를 봤구요. 그리고 나서 그 밤에 결과가 나왔고, 20일날 마지막 공연을 올라갔어요. 공연이 끝나는데 대한 감회가 있었고, 대선도 끝났고 해서 무대에 올라가서 '새 대통령이 선출되었습니다'라고 했더니 관객들이 '와'하더라구요. '이제 태극기에 경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애국가도 따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홀가분합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마지막 공연을 하겠습니다'했더니 관객들이 박수를 치더라구요. '비로소 국가 사회에서 시민 사회로 넘어가는 모습을 봅니다'라는 말도 했어요.

저한테는 이번 대선이 '드디어 국가사회에서 시민사회로 이행을 하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주는 것 같아요. 몇 년 전인가 부산에서 부마항쟁 기념 공원이 만들어지고, 개원 1주년인가 해가지고, 시민단체의 초청으로 공연을 하게 됐어요. 부마민주항쟁인데, 마산하고 별개로 부산에서 한거죠. 기념식을 하는데 태극기를 단상에다 걸어놓고 하더라구요. 저는 굉장히 불편했어요. 그리고 부산 시장이 나와서 인사를 하는데, 김대중 정권에 대해 아주 안 좋게 말하면서 '부산이 김대중 정권 들어서서 가장 차별받는 지역이 되었지만, 시장을 중심으로 똘똘뭉치면 잘될 것입니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더라구요.

그런 정도는 받아들였어요.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태극기가 맘에 걸렸어요. 올라가면 떼라고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2부 공연에서 올라갔는데, 보니까 태극기가 없어요. '태극기가 없네요. 뗐나 보네요. 잘했습니다' 그러니까 분위기가 일순 썰렁해졌어요. 얘기를 좀 했죠. '민주항쟁 당시 싸웠던 사람들이 누구냐, 그들이 누구를 위해서 싸웠느냐, 과연 그들이 저 태극기의 주인이 되었는지는 난 잘 모르겠다. 이런 행사에서 태극기를 걸어놨다는건 완성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한거죠. '태극기의 주인이 누구냐? 걸어놓고 해도 되는거냐?'고 했더니 전체적으로 썰렁해지는데, 한쪽에 장기수들이 있었는데, 장기수 쪽에서 박수가 나오더라구요.

국가라고 하는 것, 그것의 표상으로서의 깃발과 애국가 이런 것들이 '시민의 상징으로 넘어갈 수도 있겠다'는 그런 느낌을 이제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포퓰리즘이다 어쩌다 하는 것은 엘리트가 아닌 일반 대중들을 폄하해서 생각하는 지배세력들의 이야기이고, 결국은 그들도 대중의 표를 얻고, 우중에 의해 선출되면서 그런 이야기들을 하거든요. 이후로도 우리 사회가 내 맘에 꼭 드는 정권이 들어서지 않을지는 몰라도 대중들의 힘의 의해 이끌어져 가는 방향으로 자리 잡힌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존의 권위주의라든지, 기득권의 전수 이런 것들이 정비되어질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아니겠는가 하는 면에서도 굉장히 안도를 합니다.

-지 - 조직에서 검열을 하기도 하지만, 검열을 당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들과 닮아 있는 경우를 많이 보지 않습니까? 태극기에 관한 얘기를 하면 '태극기를 거부해?'라고 하면서 굉장히 의아해하거나, 운동권조차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어떤 상징적인 건물을 점거한 상황에서도 태극기를 흔드는 모습을 보였는데요. 정치적 의사의 표현의 하나로 성조기를 태우는 것이 인정되는 미국과 같은 일은 상상하기도 힘듭니다. 그런 국가주의의 세뇌를 담당하는데 언론이 빠지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인터뷰만 하더라도 기성언론이 예전에 보도하는 방식대로 한다면 '정태춘, 태극기 거부. 국가 모독. 사상검증 필요' 이런 식의 기사가 나갈텐데요. 네티즌들은 조중동으로 대변되는 언론권력이 바로 서지 않고서는 나라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언론개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 - 제가 지난번 겨울에 공연할 때 홍보 얘기하면서 조중동과 인터뷰를 해야 되는데, '조선일보만은 하지 않겠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기획사에서 난감해하면서 '그것을 제외한 모든 신문보다 그것 하나의 위력이 더 크다'고 하더라구요. 그래도 정식 인터뷰는 곤란하다고 했는데, 인터뷰처럼 해서 이상하리만치 크게 기사가 나갔어요. 사람들에게 굉장히 미안한 생각이 들었고, 그리고 '그게 잘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기본적으로 시민에 의해서, 진보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보수적인 언론에 타격을 가하거나, 그러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어요. 근데 이제 문제는 시민들의 그런 것 뿐만이 아니고, 시민들이 많이 해왔잖아요. 현실을 얘기하자면 노무현씨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언론개혁에 대해 수많은 얘기가 나왔던 것을 새 정부가 어떻게 현실적으로 만들고, 법제화하고, 부당한 것에 대해서 견제를 하느냐가 관건인 것 같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면 더 이상 그것을 우리가 힘으로 누르기는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 모르겠어요.

-지 - 악순환이고 딜레마인데,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가수라고 하더라도 기획사에서 '앨범이 나가야 계속 활동할 수 있는 거 아니냐'라고 얘기할 때 거절할 수 있는 명분이 없다보니 그들의 지면을 장식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격이 되어서 여전히 강한 힘을 유지하게 되는 것 같은데요.

=정 - 이후에 시민의 정부에 있어서나 부당한 방법으로가 아니고,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수준에 맞춰서 언론도 그런 수준까지 개혁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 자체가 심각하게 저항을 받는다든지 전혀 개혁에 가능성이 안 보이고, 이번 정부에 의해서도 어려워보일때는 시민들이 새로운 무엇을 해야되겠죠. 기존의 언론개혁운동을 다른 방법으로 전개되거나 다른 방식으로 안티조선이 조직화되거나 하는 것들을 시도해볼 수 있겠죠.

-지 - '시인의 마을', '촛불' 이런 서정적인 노래로 데뷔하셨다가 90년대 들어 민중가요를 부르게 되셨는데요. 사회참여적인 노래를 하시게 된 특별한 계기는 있으십니까?

=정 - 계기는 더러 얘기했던 건데요. 서정적인 노래 부르다가 결혼해서 애기 낳고 방황을 하면서, 방황하는 모습도 예술적으로 표현하면 멋있잖아요.(웃음) 그래서 그런 노래들이 나왔고, 현실 속에서 결혼한 가장으로서 적응을 잘못하면서 부적응자가 되어 버리고, 그렇게 되면서 '왜 그런가' 하고 생각하게 되고, 그럴 때 상황에 눈을 뜨게 된거죠. 80년대 초반 광주항쟁 이후에 상황에 눈을 뜨면서 저와 비슷한 사람들을 많이 본 거죠.

그런 부적응자들을 보면서 이게 '부적응인가? 소외인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게 된거죠. 그런 생각을 하게 되고, 실천문학 창간호를 접하면서 거기 소개된 책들을 보면서 독점과 소외라는 것, 근본적인 모순을 알기 시작하면서 제 나름대로의 활로 같은 것을 찾은 느낌이었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찾은 거구요. 특별히 계기가 된 것은 '청계피복노조'라고 하는 그 당시의 대표적인 지하조직과 만나게 되면서 거기의 비밀스러운 일일찻집에 참여하면서 그게 노동쪽으로 소문이 나면서 모임에 불려나가고, 나도 깨기 시작하고,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비로소 현장들을 보게 되고, 또 한편으로는 은연 중에 동질감 같은 것이라든지 작은 사명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어요.

그리고 민예총이라는 문화예술인 단체를 만나면서 오히려 음악하는 사람들보다는 타 장르의 예술인들과 교분을 가지게 되고, 이렇게 저렇게 다시 한번 제가 태어났다고나 할까, 사회적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할까요. 그런 체험들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그런 체험들을 못하고, 제 삶을 살고 갔다면 더 많이 엉터리였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 - 불법음반이었던 '아, 대한민국'과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가사 사전심의 철폐의 1등공신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사에 대한 사전심의가 폐지되던 96년에 한겨레 신문에서 선정한 '그 해의 음반'으로 뽑히기도 했는데요. 젊은 사람들은 그 것을 서태지의 힘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에 대한 서운함은 없으신가요? 주철환씨는 "그것이 훗날 문화사에서 '정태춘의 난'으로 기록될지도 모른다"고까지 했는데요. 문화인들에 대해서 우리 사회가 폄하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지금 와서 재조명을 받고 있는 신중현씨 같은 경우에도 자신의 예전 음반들을 찾을 수 없어서 일본에 있는 수집가들을 통해 입수하기도 하고, 자료조차 잘 남아 있지 않은데요.

=정 - 아니요. 섭섭한 부분은 없어요. 저는 자료를 잘 모으는 사람이었어요. 데뷔할때만 하더라도 음악 파일로 만들어 놨던 것을 정리해서 레코드 회사에 가서 하나의 파일을 쫙 펴서 보여주는 스타일이었구요. 지금도 컴퓨터를 좋아해요. 매킨토시를 쓰고 있는데, 자료 정리에 컴퓨터처럼 좋은 게 없잖아요. 폴더에 넣고 디렉토리를 정리해 놓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4∼5년전만 해도 개인 매니저와 함께 있었는데, 자료 정리가 잘되어 있는 편입니다.

모든 행사 프로그램들까지 다 모았는데, 5년전부터 안 모으고 있어요. 가지고 있다는 자체가 좀 짜증스러워서, 이게 정말 필요한 거라면 누군가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거죠. 그런데 집사람이 모으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모으지 말고, 버리라고 해요. 지금은 자료 안 모아요. 내 것이 가치가 있을까 싶고, 제가 어떻게 평가되는 것에 대해서도 적절한 선에서 평가될 것 같고, 그러니까 어떤 역할을 했던 사람으로 제가 기대했던 것만큼 낮게 평가되지도 않을 것이고, 내가 걱정하는 것만큼 높게 평가되지도 않을 것이고, 적절한 선에서 얘기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대단한게 없으니까, 단지 내 노래들이 어떤 사람들에게, 음악하는 후배들에게 때때로 신선한 영감같은 것을 줄 수 있다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제 음악을 들으면서 제가 좋은 노래를 들을 때 그랬듯이 때때로 가슴 설레게 하는 그런 음악으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근데 시장 상황이 너무 안 좋아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3∼4년간의 축적이 있어야 하고, 그것도 긴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노래를 만들어야 하고, 노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집중이 있어야 하고, 이야기에 관한 집중이든지 음악적으로 표현해낼 수 있는 집중이든지 해야 하고, 거기에 대해 적지 않은 예산과 적지 않은 노력이 들어가야 한단 말입니다. 음악을 어떻게 만들겠다는 기획에서부터 밤샘 작업하는데 이르기까지 이번에 음악하면서 굉장히 재미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피곤하고, 힘도 들었습니다. '힘든 만큼 좋은 것이 나와주지는 않는구나'하는 것도 느꼈고, '과연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고, '마지막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아까 여론조사를 보고 고무된 듯이 얘기를 했지만, 내가 굳이 떠들어야 될 것도 없을 것 같고, 예술적인 열정이 부글거리는 것도 아니고, 지금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지금 현재는 그래요. 얼마나 잘할지도 모르겠고.

-지 - 개인적으로 우리 음악계에 대해 궁금했던 건데, 조금전에 '후배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고 하셨는데, 우리 음악계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기는 밴드들도 계보를 형성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뮤지션끼리 영감을 주고 받는 경우는 있는 것 같은데, 대중들에게 알려질만큼의 어떤 음악적인 계보가 형성되지 못하고 단절되어 버리는 것 같거든요. 예를 들면 산울림처럼 한 시대를 풍미한 밴드가 있는데, 그 계보는 없거든요. 외국 같은 경우 어떤 계보 같은 것이 형성되는 것 같은데요.

=정 - 나만 그 계보에 들어가지 않은 거 아닌가요?(웃음) 이를테면 저는 김민기씨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고, 그분의 작품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기도 했는데, 많이 다르게 음악들이 나왔어요. 어떻게 보면 그 분으로부터 '음악이 이러냐'고 할지도 모를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나간 것 같아요. 저로부터 영감을 받은 예술인은 없는 것 같아요.

저만 빼놓고 다른 사람들은 연결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포크에서도 조동진씨의 스타일이나, 송창식씨 쪽으로의 그런 것들이나 생명력이 짧으니까 끊긴 것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도 줄기를 가르면 아주 단절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저만 좀 별나죠. 이것 저것 다른 것 많이 하고 싶었고, 직설적인 노래를 하고 싶었고, 진한 리얼리티의 노래를 하고 싶었고, 그러면서도 시적인 완성도 같은 것을 나름대로 고민했고, 그런가하면 음악쪽에서 우리 모국어 쪽에 많은 집착을 가졌고, 그런 것들이 이후로 연결되지를 않았죠. 그 이후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요.

-지 - 문화평론가 김창남씨는 "시대착오라고? 정말 그렇게 믿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다시 한번 정태춘의 노래들을 가슴으로 음미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철거현장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아이들만 남아있던 집에 불이나고, 기만과 협잡, 분열과 억압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현실, 그것이 과연 과거의 일일 뿐인가?"라고 했는데요. 10년이 지난 지금도 일정 부분 유효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정 - 전면적으로 유효하지는 않죠. 얘기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을 하구요. 제가 그때 만들었던 그 앨범은 그때로서 유효성이 있었다고 생각하구요.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진 것도 사실이고, 음악적으로 접근하는 것도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음악적으로 접근한다면 그 당시에 부족했던 부분을 보충하거나 음악자체로서 아름다움이나, 신선함이나, 품격 이런 것들이 있어야 할 거구요.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 부분도 충분히 강화해야할 것 같고, 전반적으로 바뀌어야 될 것 같아요. 그들과 지배자들의 대치전선이었던 상황과 지금은 또 달라진 이런 상황에서 그런 것을 감안해 가면서 노래들을 만들어야 할 것이고, 나는 그런 것에 충실하고 싶어졌어요.

시대적인 리얼리티가 내 노래에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구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세밀한 이야기들, 그 단어들을 밀어넣으면서 노래를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 - 요즘들어 민중가요가 침체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세상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대중의 삶은 여전히 고단합니다. 그런데 왜 대중들이 운동가요에서 등을 돌렸다고 생각하십니까?

=정 - 사회가 달라졌고, 상황이 달라졌고, 이를테면 그 당시에는 작은 가능성에 대해서는 거부하는 분위기였어요. 내가 조금 나아질 수 있다든지 그런 부분들은 사양을 했고, 전면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희망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것에 대해 열정적일 수 있었던 상황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보통 대중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희망들이 있어요. 인간이 왜소해졌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그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자본주의적, 물질적인 희망이지만, 그런 희망들이 그 사람들 각 개인개인의 머리 속에 주입이 되어 있단 말이거든요.

자본주의가 전파한 그런 물질적인 희망들을 다 개별적으로 가지고 있는 상황이고, 그렇지 않은 그런 희망조차 가지지 못하는 절망적인 많은 사람들도 있어요. 가정도 불안정하거나 깨졌거나 그런 사람들, 물질적인 희망조차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죠. 그래도 작은 물질적인 희망을 바라보면서 안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보다 수가 적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이 우리 사회의 싸움에 전면으로 등장하기 힘든 상황이죠.

실질적인 숫자보다 더 작은 숫자로 평가가 되는데, 고의적으로 더 작게 평가되는 거죠. 그리고 그 중의 대다수를 중간 집단에 우겨넣는 여론조작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사회에 절망적인 사람들이 엄청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목소리가 전면에 나오기는 참 힘든 상황이라는 거죠. 물론 예술인들이 그 얘기를 해나가야 되는데, 절망적인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우리 사회의 가장 추한 부분, 악한 부분들을 얘기해야 되는데, '제가 계속해서 그렇게 할 수 있을까'는 모르겠어요. '못하지 않을까' 싶어요. 또 다른 사람들이, 후배들이 해주길 바라죠.

-지 - 현재 민중가요의 명맥을 윤민석씨 정도가 잇고 있는 것 같은데, 앞으로 후배들이 어떻게 해야 된다고 보십니까? 안치환씨 같은 경우 일부에서는 변절했다고 비난받고 있는데요.

=정 - 변절. 저는 모르겠고. 그들의 이야기를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 안치환이 '대중들의 폭이 넓은 쪽에서 활동한다, 상업적인 방식으로 활동한다'는 것에 대한 비판일텐데, 그러면서도 정말 힘든 사람들, 가장 소외된 사람들의 입장에 서지 않거나, 그런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비난일 것 같아요. 그 부분에서는 저도 상당부분 비판을 받아야 하구요. 저는 그런 딜레마가 있었어요. 민중들의 시대에 민중들과 함께 싸운 민중가수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제 노래는 가장 '반민중적'이라고 이야기했어요.

민중이라고 생각하는 보통의 노동자들, 서민들, 학력이 높지 않은 사람들은 제 노래를 별로 가깝게 느끼지 않으니까, 굉장히 지식인적이고, 그래서 반민중적이라고 얘기했는데요.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할 때 '그 사람들의 방식으로, 정서로, 그 사람들 앞에서만 노래를 할 것인가?' 하는 것과 아니면 일반 대중에게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방법, 우리 사회의 리더들에게 그 사람들의 얘기를 하는 방법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겠죠.

어느 쪽을 대상으로 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인가 했을 때 자기 스타일에 맞게 선택을 해야 할 것이고, 그런데 민석이 같은 경우에도 방향을 잘 잡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너무 묻혀있는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아요. 조금 더 대중적으로 나와서 '자기가 가진 생각들을 폭넓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니가 직접 노래를 부르고, 니가 메신저가 되서 직접 움직이고 다녀라'는 요구를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그런 우리 사회의 약자들의 입장이 누군가에 의해서 대변되어야 하고,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싸움을 지원해야 하는데, 방법을 잘 모르겠어요. 어떤 방법으로 해야할지, 내가 어떻게 그런 이야기들을 내 노래에서, 내 활동속에서 풀어나갈 수 있을지.

-지 - 부인 박은옥씨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계십니까? 투사 옆에는 가족의 눈물이 꼭 있는데요. 박은옥씨의 퍼스낼리티가 있는데, 그것이 묻혀있는 것도 사실인 것 같은데요.

=정 - 저는 자연스럽게 내 직업에 대한 방향, 예술가로서의 방향을 큰 갈등없이 변화시키면서 왔는데, 박은옥씨에게는 부자연스러웠던 것이 사실이었죠. 그리고 자기 퍼스낼리티는 전혀 드러낼 기회를 갖지 못했고, 한편으로는 박은옥씨가 나와 결혼하면서 내 노래만을 불렀기 때문에 그런 것이 있겠죠. 처음에 박은옥씨 만났을때는 독특한 느낌을 주는 특별한 가수였거든요. 특별한 감수성과 그런 것을 전달할 수 있는 호소력이 있는 그런 가수였는데, 그 뒤에 제가 그 사람의 노래하는 사람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곡을 못써줬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박은옥씨 스스로는 '자기가 열심히 하지 않았다'고 해요. 저는 제 노래만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곡을 받아서 당신 독집을 내보자고 하는데, 적극적으로 그렇게 해보지를 못했고, 막상 '그런 곡들이 있을까?' 했을 때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좋은 노래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조금조금씩 받아봤는데, 그 정도였지, 그 이상으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색다른 노래가 나올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적극적이지 못했어요.

그런 가수들이 여럿 있죠. 여자 가수들만 본다면 우리 부부끼리 얘기하는거지만 이연실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분도 아주 독특한 감성을 가지고 있지만, 곡이 뒷받침되지 않았어요. 우리 가요쪽에서 창작력이 빈곤해서 그 사람의 가창력을 살려주지 못했어요. 한영애씨 같은 경우도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지만, 더 많은 노래들을 할 수 있는 그런 특별한 가창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그만한 정도의 작품이 뒷받침되지 않았어요.

안타까운 경우가 몇몇 있는데, 박은옥씨도 그런 케이스라고 생각해요. 제 노래만 부르다보니까 이미지도 그런 식으로 굳어졌고, 본인 말로는 '지금은 그럴 수 밖에 없었다. 크게 능력있는 대단한 가수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열심히 좋은 노래를 찾으러 다닐만한 사람도 아니었다. 만약에 다시 태어난다면 더 열심히 하는 가수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합니다.

-지 - 앨범 속지에서 강헌씨가 "시장이 자신의 본질을 아낌없이 관철하는 순간 우리의 예술가들 거개가 무장해제 당했다. 이 앨범은 우리에게 멸종의 공포를 넘어서려는 이 시대 예술가의 초상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라고 했는데요. 이 얘기를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정 - 시장이 제게 부정적이진 않았어요. 이 앨범은 제 고민의 자연스러운 결과물이었고, 시장에 도전하려고 낸 것도 아니었고, 어느 정도는 어떤 사람들에게 상당히 공감을 받을 거라는 자신도 있었어요. 시장이 전면적으로 나를 외면했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그것에 대한 도전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구요. 어느 정도는 시장에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했죠. 지금과 같은 시장 상황이라면 힘 빠지는 것도 사실이죠.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주길 기대하는데....

-지 - 강헌씨는 이번 앨범 속지에 "정태춘은 쏜살같은 산문의 비수를 꽂으려 몸부림치고 박은옥은 운문의 시정을 고요하게 늘어놓는다. 그래서 새음반은 이전의 어떤 음반보다 혼란스럽고 동시에 경이롭다"고 했는데요. 어느 인터뷰에서 그 말에 동의한다고 하셨구요. 그건 어떤 의미입니까?

=정 - 혼란스럽다는 면을 동의한다는 거죠. 이번 앨범의 수록곡들이 소재가 다양하고, 혼란스럽다고 얘기가 나올 수 있는게 이번 앨범에 구체적으로 가사에 등장하는 나라만해도 5개 국인가 되요. 수많은 지명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 부분이 혼란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다음에 리듬에 있어서도 새로운 리듬들이 많아요. '압구정은 어디', '정동진' 이런 곡에서 독특한 리듬, 생경한 리듬이 있죠.

국악 장단을 가지고 양악을 만들어낸 리듬들, 그런데서 온 느낌, 그런가 하면 '아치의 노래'처럼 독백하듯이 한 노래가 있고, '오토바이 김씨'처럼 퍼부어대는 노래가 있고,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는 제 나름대로 절절한 편지 같은 노래이기도 하고, 그런 저런 다양한 부분들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다 싶어요.

우리가 강헌씨에게 음악을 들려줬을 때 완성되지 않은 중간녹음 상태에서 들려줬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르겠어요. 90년대초에 '92년 장마, 종로에서'라는 노래로 사람들에게 편지를 띄웠던 적이 있어요. 장마비가 내리고, 사람들은 빨간 신호등 앞에서 기다리고 있고, 세월이 흘러가듯이 사람들이 우산 속으로 흘러가고 있지만, 다시 비상하는 비둘기에 관한 것을 상징화해서 그네들에게 편지를 한번 쓴 적이 있고, 10여년 만에 두 번째 편지를 쓰는거죠. 당시에 막차를 타고 순응하고 들어가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 막차를 놓치고, 한동안 침잠했던 사람들에게 다시 첫차를 타고 새로운 언덕에서 만나기를 바란다는 거죠. 이 앨범이 386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생각하면서 만들고, 노래했어요. 바닥까지 떨어졌던 사람들,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얘기를 하는데...

-지 - 88년 청계피복노조 주최의 집회에 참가하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이후로 대중집회의 단골 손님이 되셨는데요. 힘드신 일도 많았을 것 같은데,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무엇입니까?

=정 - 크게 힘든 것은 없었고, 힘든 일은 없었어요. 검열철폐 운동할 때 외로웠던 적이 한번 있었고,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한적도 있어요. '아, 대한민국'으로 3년을 했고, '92년 장마, 종로에서'로 재판을 받고 할 때, 잘 안될 것이라는 그런 분위기가 강했어요. 안될지도 모른다, 정부에서도 극구 안바꾸려고 하고, 이게 없어지지 않는다면 노래 그만하겠다는 생각을 했죠. 한참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질때는 '아, 대한민국'을 운동진영에서만 현장 판매, 조직판매 한 것도 10만장쯤 되거든요.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그런 기반들을 잃었거든요.

그렇다고 불법음반을 레코드 가게에 꽂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물건을 가지고 다니면서 팔 수도 없고, 그렇다면 노래를 그만둬야겠다, 내게 동조해주고 함께 해주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고, 그게 싫은 거였어요. 나머지는 불편하고 어색하더라도 행사에 참여하거나, 나름대로 투여하는 것들은 그렇게 힘들 일은 아니었어요. 한가지 음악적으로 치열하지 못한 것은 있었어요. 음악적으로 그런 열정이 내 속에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가장 완성된 것을 내놓는다고 할까, 치열하게 작업을 해보지는 못했어요. 그런 부분들은 아쉽거나 부끄럽게 생각을 합니다.

-지 - 요즘 다른 활동은 어떤 활동을 하십니까?

=정 - 초청 행사들 더러 하고, 새 앨범과 관련해서 2월에 지방 순회공연을 준비하고 있어요. 그런 정도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고, 근래에 얼후라는 중국 악기를 배우고 있는데, 재미 붙여서 열심히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음악적으로 어차피 내 속에서 나오는 가사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테니까 음악을 어떻게 풀어볼까, '나한테 남은 음악적인 욕심이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해볼까?' 하는 생각들을 하고 있구요. 우리 장단을 가지고 모던하게 새로운 표현법을 찾아볼까 이런 것들을 고민하고 있어요. 또 '우리 상황과 나를 좀 떼놓을 필요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근래에 듭니다. 상황에 대해서 너무 관심을 가지지 말고, '얼마간 거리를 두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지 -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 등과 함께 '라이브 공연을 살립시다' 캠페인을 벌리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 - 그것은 전체 대중음악 개혁 프로그램 중에서 하나의 아이템이죠. 그것을 포함한 전반적인 대중음악산업 활성화를 위한 그런 논의가 진행되고 있어요. 그 중에 라이브 공연 활성화, 방송 쪽의 개혁이랄까, 저작권의 유통과 관련된 것들, 저작권 보호 프로그램, 유통구조 개선 이런 것들 전체적인 것을 포함한 대중음악 산업 개혁이면 개혁이고, 활성화면 활성화고 이런 것으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고, 아이디어를 내고 있습니다.

-지 - 저작권 협회 이사를 맡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MP3 유통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 - 기본적으로는 저는 저작권자고, 저작권은 특별한 권리가 아니고, 다른 여러 가지 개인의 권리중 하나기 때문에 저작권을 보호하고 옹호하는 차원에서 유통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Copyleft쪽의 생각들도 일부 동조하는 부분이 있어요. 하지만 저작권이 우선적으로 보호되는 차원에서 향유나 이런 것으로 되어지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쪽으로 가닥이 잡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온라인이라는 특수한 환경 때문에 기본적으로 저작자들에게 주어졌던 권리들이 포기되어야 된다는 건 아직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외국같은 경우 사적복제 보상금제라고 해서 출판 같은 경우 복사기 기계 자체에, 또 복사용지에 누군가의 저작권을 복제한다는 것을 전제로 상품가격의 7% 정도를 저작권료로 부과해서 저작권료를 나눠주는 셈인데, 음악의 같은 경우 오디오, 카셋트, 테이프, 비디오, DVD 모든 것들에 대해 적용할 수 있는거죠. 우리에게는 아직 도입이 안됐지만, 그런 취지들도 충분히 살아야 하고, 그런 입장에서 봤을 때 MP3도 저작자의 권리가 포기된 상황에는 동의하지 않죠.

-지 - 신해철씨 같은 경우에는 음악가를 무시하는 대중들의 태도가 더 문제라고 얘기하기도 하구요. 이게 복잡한 것이 만약 외국처럼 사적복제 보상금제를 실시한다면 정말 그 아티스트가 좋아서 정품을 사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손해를 보는 거거든요.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부과되어야 할 것을 정품을 구입하는 사람이 부담하는 게 될 수도 있는데요.

=정 - 7%를 걷는다는 것이 직접적으로 다 분배되지는 않아요. 저작권 쪽의 환경 개선이라든지, 저작권 쪽의 산업이라든지 이런데에 포괄적인 용도로 쓰여지죠. 제가 알기로는 그런데요. 그래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는 것 같고, MP3 같은 경우 이후의 시장 상황이 어떻게 변화될지 단정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오프라인의 유통상황과 온라인의 유통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그랬을 때 과연 저작권자들이 어느 정도만 보호받아도 충분할 것인가 얘기하기는 힘들어요. 길게 놓고 얘기하기 어려운데, 우선은 저작권을 무시하는 저작권의 유통은 납득하기 어려운 거죠.

일부에 있어서 저작권의 유효기간 그랬을 때, 사후 50년에서 70년, 90년 하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동의를 안하는 부분이 있어요. 미국처럼 저작권 보호의 기간이 늘어나는데 있어서는 그들이 가진 전체 시장에서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러는 차원으로 받아들이는 거죠. 개인 개인으로 봤을 때 취득한 저작권은 보호되어야 하지만, 자기 대에서 향유하는 것으로도 충분하고, 자기 대에서 향유하지 못하는 부분은 후손이 어느 정도 향유하는 것은 인정을 하는데, 이게 지나치게 길어지고 하는 부분은 반대합니다.

요즘 지적산업이 개인의 산업이 아니고, 자본의 산업이라는 말이죠. 자본이 지적 재산권을 더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자기권리 보호는 환경 개선이라는 면에서 보면 지나치게 길어지는 것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죠. 자기 대에서 하면 충분하고, 정말 독창적인 것이 아니고, 앞에서의 축적된 것에 의해서, 그것을 기반으로 파생된 것인데, 독점적인 권리를 오래 준다는 것에 대해서는 다소간 부정적이예요.

-지 - 마지막으로 해주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정 -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오랜만인데, 여러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는 기회 같아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불안정한 시기라는 것이 읽는 분한테 감안이 되어서 읽혀졌으면 좋겠어요. 386 문제에 이어 또 한가지 관심을 가지는 부분이 있는데요. 지난 14∼15세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제 1세계의 제 3세계에 대한 침략과 착취와 억압, 굴종 그 결과로서 양분된 8:2라고 하는 부의 분배는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샌디에고를 넘어서 멕시코로 건너갔을 때 '이게 같은 인간들의 세상인가?' 하는 것을 느끼게 하는 상황,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의 상황과 프랑스 남부의 휴양지에서의 상황이 너무나 다르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지구적으로 관찰되고 있는 투기 자본의 힘들, 그것에 대한 어떤 반성 그리고 그런 상황에 대한 개선, 결국은 지구에서 공존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문화쪽에서 한번 만들어내 볼 수 없을까 생각했어요. G7 할 때 오래전부터 안티 G7 행사들이 열리고 했는데, 세계화에 대한 이슈를 반대했을 뿐만이 아니고, 그들이 대표하는 제 1세계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는거죠. '그들이 저질렀던 일에 대한, 그들이 피해를 입혔던 것들에 대한 배상운동이 시작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구체적으로 현실적으로 피해와 이익을 산술적으로 계산해서 아주 거대한 그런 집단에 의해서,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계산되어지고, 21세기 들어서서 얼마동안 계획을 세워서 물질적으로 또는 다른 방법으로 보상을 하는 계획의 프로젝트가 일어나야 하는 것 아니냐, 그래야 21세기가 희망이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죠. 21세기의 인류사에서 그런 야만의 역사를 평가하고 반성하는 그런 것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구체적으로 제 1세계의 이익과 제 3세계가 받는 피해를 수치화해서 뽑아내고, 어떻게 보상할 것인지 계획을 세우는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자는 것이구요. 그것을 전면적으로 시행하자는 것이 아니고, 그런 화두를 문화쪽에서 던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근래 몇몇 군데의 G7 회의할 때 일부에서 논의가 되었을 거예요. 그런 것들도 구상해볼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거죠. 세계가 이 상태로 갈 것인가에 대한 반성이 분명히 일어날 것이고, 그 반성을 바탕으로 제가 가진 아이디어는 해보고 싶고, 누구에겐가 주고 싶은 아이디어는 그 두가지가 있는 셈이죠. 우리 사회 내에서는 386에 대한 프로그램, 바깥으로는 지구에서 공존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문화적인 것에서 시작하고 싶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어요.

지금은 제가 제안하는 기분으로 얘기할 상황은 못되고, 남기고 간다는 듯한 기분으로 얘기를 해요. 이것도 너무 자조적인 표현이 될지는 모르겠는데, '그런 게 있습니다'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단순하게 문화재 반환운동이나 정신대 보상 운동은 그것대로 하되, 포괄적으로 제대로 계산을 하자는 거죠. 역사의 기록이 있고 하니까. 그리고 제 1세계에도 분명히 양심 진영이 있고 하니까.

-지 - 너무 광범위하거나 포괄적이라서 힘들지 않을까요? 너무 이상적인 것 같기도 하구요.

=정 - 힘들겠죠. 그리고 이상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20세기까지의 세계사를 보면 지난 5~6세기간의 역사가 얼마나 야만적이었는지는 알 수 있잖아요. 유럽문명이 제 3세계의 착취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이고, 미국의 부흥도 제국주의에 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잖아요. 최근에 신문에서 본 것 같은데, 선진국의 한 마리 소에게 지원되는 돈만큼의 질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인간들이 있는데요.

그런 것에 대한 반성이 머지않아 있을 거라는 거죠. 21세기에 접어들었다면. 그런 반성이 있을 거라는 것을 전제하고, 그런 반성에 관한 화두를 던질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거죠. 제 3세계 예술인들이 함께 그런 것으로 시작을 해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지금 당장 돈을 내놓으라는 것이 아니다. 장기간에 걸친 계획을 세워라' 이런 요구를 하자는 거죠. 'G7 같은 곳에서 그런 계획을 세워라, 다보스 포럼 같은 데서 그런 계획을 세워라'고 요구할 수 있는 문화포럼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다소 허황된 감이 있지만요.

하니리포터 지승호 웹진 시비걸기

[편집자주] 하니리포터 지승호 기자가 지금까지 하니리포터 등을 통해 발표했던 유시민, 진중권, 김규항, 김어준, 문부식, 홍세화, 고종석씨 등과의 인터뷰를 묶은 책 '비판적 지성인은 무엇으로 사는가?'(인물과 사상)가 단행본으로 세상에 선보였습니다

[필자주]이 기사는 서프라이즈(seoprise.com)에도 송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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