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

1 #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 ]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날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 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깨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벨 것인데
한켠에서 되게 낮잠 자버린 사람들이 나지막히 노래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2 # 지하인간[ | ]

   내 이름은 스물두 살    한 이십 년쯤 부질없이 보냈네.
   무덤이 둥근 것은    성실한 자들의 자랑스런 면류관 때문인데    이대로 땅 밑에 발목 꽂히면    나는 그곳에서 얼마나 부끄러우랴?    후회의 뼈들이 바위틈 열고 나와    가로등 아래 불안스런 그림자를 서성이고    알만한 새들이 자꾸 날아와 소문과 멸시로 얼룩진    잡풀 속 내 비석을 뜯어먹으리
   쓸쓸하여도 오늘은 죽지 말자    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지금껏 많았던 날에 대한    말없는 찬사이므로.

3 # 도망중[ | ]

   한 사나이가 있다. 그는 도망중이었다.    한 사나이는 새침한 여자와 만난다 그녀는    예뻤고 그녀는 귀여웠고 도망중이었고    사나이는 그녀가 좋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할 때, 사내는 매일    구두를 반짝거리게 닦지요 붉은 장미를    사지요 비 오는 공원에서 기다리지요.    그러던 어느 날 사내는 그녀에게    구혼을 한다. 그들은 결혼을 하고 신접    살림을 차린다. 그 살림은 도망중이었다.
   한 사나이가 있다. 그는 묻는다.    한 사나이가 있다. 그는 아내에게    묻는다. 아직 소식이 없어, 왜 그렇지?    그날 밤 남자와 여자는 한 번 더 간다.    아직도? 한 번 더 간다. 아직도? 아직도야?    사나이는 초조해서 유순하고 순한 개 한마리를    사온다. 사나이는 메리라고 부르며 그 개의    목을 끌어안는다. 그때 메리는 그 사내의    강한 팔둑 속에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 개 또한 도망중이었다.
   한 사나이가 있다. 어느 날 그는    아내의 뺨을 한 대 갈긴다.    기분이 언짢아 갈긴다. 아내는 울음을    참고 따진다. 메리가 누구예요, 메리가 대체,    메리가 누구냔 말예요? 사나이는 대답    하지 않는다. 그제서야 아내는 운다.    한구석에 구겨져서 조용히 운다. 울며    아내는 짐을 싼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어요    아내는 짐을 싼다. 깨끗이 끝장내기로 해요    그러기에 두 사람이 함께 도망다니는 일은 힘이    든다. 그들은 이제 따로 도망하기로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태어난다. 도망중에    무관심중에, 고대중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어떤 시간중에, 불어오른 메리    몸에서 아이가 태어난다. 사나이는 돈을 지불    한다 돈을 준다. 메리는, 내가 키우겠어요    요만큼 가지고는 어림없어요! 물론 사내는    좀더 준다. 그리고 아카시아향에 젖은 아이    무죄에 싸인 아이와 홀로 산다. 살며    사나이는 발가벗은 아이의 몸뚱이를 꼭 껴안아    자기 귀에 대어본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여리게 들린다.    확, 확, 확, 확, 확, 아이는 저 혼자 도망하고 있었다.

4 # 세일즈맨의 죽음 -속, 안동에서 울다[ | ]

   당신은 여수에서 죽은 사내에 대하여    들은 적이 있는가. 새파란 분말의 쥐약을    삼키고 개처럼 죽어간 -40년을 개처럼 살았던    삶이다-세일즈맨에 대하여 들은 적이    있는가?-모른다면, 당신은 신문을 읽지    않는 얼마 되지 않은 정의로운 시민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다-
   신문 사회란에 실린 사내의 약간 심약해 보이는    얼굴을 보고 당신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아,하고서-왜냐하면    그 역시 당신과 똑같이, 흰 수건을 가슴에    달고 다닌 코흘리개 국민학생이었고, 중학생,    고등학생이었으니 말이다. 또 꿈 많은    대학노트를 옆에 끼고-가끔은 노트 대신    새침한 여학생의 팔짱을 끼고-4년 간의 대학    생활을 했고, 풀기 먹은 육군 병장으로 제대를 했다.    그 사이, 당신은 그 옆자리에 앉았던 동료였거나,    같은 학교를 다닌 동문이었거나, 한 축구팀의    선수였을지도 모른다.
   여수에서 죽어버린 사내-왜 한 많은 사내들은    여수에 가서 죽는 것일까?-그 사내의    약간 우수에 잠긴 긴 얼굴을 보고 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그를 기억해낼 것인가-전국의    모든 유곽에서, 일제히!-그는 살아 생전 자신의    신세를 혀로 핥고, 주무르고, 사정해대었으니    그리고 알 만한 창부들은 알 것이다.    그가 얼마나 다정다감했던 줄을-비록 향수값을    거웃한 그곳에 더 얹어주진 못했어도-
   파란 쥐약을 먹고 여관방 쓰레기통을    안은 채 새우처럼 등이 굽어버린 사내에    대하여 들은 적이 있는가. 커다란 첩보원 가방에    월부책 카다로그를 가득 넣고, 전국을 개처럼 돌아다닌    그의 말없는 가죽구두에 대하여-그의 가죽구두는    네 짝-그 외롭고 큰 네 발에 대하여 당신은    들은 적이 있는가? 가족을 지척에 두고 간이역과    간이역을 내쳐 뛸 때, 그는 깨달았다. 날이 갈수록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어렵다는 것을.    하여 그는 끝장냈다. 더는 울지 않고-언젠가 초라한    여관의 꿉꿉한 이불 위에서 그는 울먹인 적이 있다.    끝? 끝? 이라고-스스로의 목구멍을 막았다. 견디지    못하여!-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그의    생을 우리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그 때문에,    우리가 목격하는 자살은 언제나 타인의 몫이 된다.    결국, 그것이 그렇다.-
   해버리면, 그것으로 일이 끝난다면    얼른 해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mama I love you.    오늘도 死神을 못 보고 잔다. 아마도 죽음은    꿈이 없는 잠. 여보, 용서하구료. 회한 속에 몸부림    쳤고 매일매일 더 잘해보자고 자신을 격려    했었소. 박과장, 더러운 새끼! 휴식과 알콜에    넘친 어둠. 숙아 아빠가 불쌍하지? 전화 52,    2158......-그의 검은 수첩 여기저기에 적힌 말들-

5 # 약속 없는 세대[ | ]

     우리들은 약속 없이 만나지 않는다. 우리들은 언제나
   약속을 하고서야 만난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이미 약속    없이 만날 수 있는 영감이 사라진 지 오래니까. 하므로    우리에게 약속 없이 만나는 갑작스런 기쁨이 선사되는    일이라곤 없다.
     그렇다고 해서 대체 우리가 어떤 약속을 하기나 했다
   는 걸까. 우리들은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났고, 우연히    극장에서 만났는데, 그리고 디스코 텍과 맥주 홀에서 우    연히 만났는데. 또, 한잔 더 하기 위해 찾아들어간 포장    집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그래, 이런 일들이 정말 어떤    약속하에 이루어진 것일까. 정말 어떤 약속하에? -믿    기는 어렵다.
     우리들이 만나기 위해 더는 약속이 필요치 않다. 우리
   들은 약속 없이도 만날 수 있는 예민한 습관을 가지고    있다. 티 브이를 켜면 만나지는 얼굴같이, 너와 내가 만    나는 것은 타성이다. 우리들은 그 습관 위에서 만난다.
     진정 사랑할 만한 그녀를 공들여 찾아내고, 전화번호
   를 훔치고, 그녀가 있을 만한 시간을 점쳐 몇 번이나 망    설인 끝에 전화를 하고, 실랑이 끝에 만날 약속을 하고,    어렵게 장소를 정한 그날부터 만날 날을 손꼽으며 하루    또 하루를 보내고, 가슴 아프게 기다리고, 수첩을 확인    하고, 달력을 보고, 또 보고, 그날이 되어 아껴둔 셔츠    를 입고, 정성들여 구두를 닦고,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두 사람 몫의 커피값을 비는 일은 이제 할 필요가 없다.
     깨끗이 씻은 두 손으로 고급한 요리를 차례대로 먹듯,
   그런 약속된 형식을 누리는 즐거움은 사라졌다. 우리들    은 버려진 고아같이 약속 없는 거리에서 만난다. 우리들    은 두 손을 호주머니 깊이 찌르고 거리를 걷다가, 첫눈    에 서로 반한다.
     우리들은 첫눈에 반하기를, 너무 잘하는 세대. 남자들
   은 길거리에서 아무 여자나 잡아 강간을 하고 여자들은    잘난 사내를 애태우며, 그 완강한 근육 속에 천천히 잡    혀들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혼음으로 젊음을    달떠보낸다.
     우리들은 약속 없는 세대. 노상에서 태어나 노상에서
   자라고 결국 노상에서 죽는다. 하므로 우리들은 진실이나    사랑을 안주시킬 집을 짓지 않는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발끝에 끝없이 길을 만들고, 우리가 만든 그 끝없는 길    을 간다.
     우리들은 약속 없는 세대다. 하므로, 만났다 헤어질
   때 이별의 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헤어질 때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지 않는다. <거리를 쏘대다가 다시    보게 될 텐데, 웬 약속이 필요하담!>-그러니까 우리    는, 100퍼센트, 우연에, 바쳐진, 세대다.

6 # 라디오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 김춘수의 [꽃]을 변주하여[ | ]

   내가 단추를 눌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속 버튼을 눌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7 # 길안에서의 택시잡기[ | ]

   길안*에 갔다.    길안은 시골이다.    길안에 저녁이 가까워왔다. 라고    나는 썼다. 그리고 얼마나    많이, 서두를 새로 시작해야 했던가?    타자지를 새로 끼우고, 다시 생각을    정리한다. 나는 쓴다.
       길안에 갔다.        길안은 아름다운 시골이다.        그런 길안에 저녁이 가까워왔다.        별이 뜬다.
   이렇게 쓰고, 더 쓰기를    멈춘다.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으로    나는 끼워진 종이를 빼어,    구겨버린다. 이놈의 시는    왜 이다지도 애를 먹인담. 나는    테크놀러지와 자연에 대한 현대인의    갈등을 추적해보고 싶다. 종이를 새로    끼우고, 다시 쓴다.
       길안에 갔다.        길안에서 택시를 기다린다.        길안에 택시가 오지 않는다.        모든 도시에서 나는 택시를 잡았었다.        그러나 길안에서 택시잡기 어렵다.
   쓰기를 다시 멈춘다. 너무 딱딱하지    않은가? 모든 문장이, 다.    로 끝나는 것이 이상하게도 번역투의    냄새를 풍긴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그런 지적을 많이 들었지 않은가?    쓰던 종이를 빼어 구기고, 한 장의 종이를    다시 끼웠다. 나는 쓴다.
       길안에 갔다.        길안에 택시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모든 도시에서 쉽게 택시를 잡았건만        길안에서 택시잡기 어렵고        어느새 어두워진 길목마다 별이 쏟아진다.        문득 길안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다시 쓰기를 멈추었다. 좀더    매끄럽게, 좀더 구체적인 풍경묘사로부터    서두를 전개할 수 있어야 한다.    아름다운 길안의 시골 풍경을 묘사한 다음    택시가 서지 않는 곳에서 택시를 기다리는    여행자의 자신만만한 모습을 묘사해내야 한다.    나는 종이를 빼어 구기고, 새로운 종이를    끼워, 이렇게 쓴다.
       길안에 산이 높고        그 물이 맑다. 길안에 나무가 푸르고        나뭇가지 위에 비둘기떼가 지어올린 흰구름은        마치 건축같이 아름답고 웅장하다.        멀리서 바라봄이 아니라 길안 가운데 있을 때        길안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여행자는 독일빵같이 커다란 슈트케이스를        길가에 내려놓고, 택시를 기다린다.
   이쯤에서 쓰기를 잠시 멈춘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시작으로서는 적당히    내 구미를 돋우는 것 같고, 독자로 하여금    계속 읽어내려가게 할 만큼 경쾌하다.    이제 길안에 밤이 내려오며, 나는 이 여행자를    존재론적 자기인식에 이르게 할 작정이다. 나는 쓴다.
       웬일인지 꽤 오랫동안 택시가 오지 않고        택시를 기다린 시간만큼, 저녁이 가까워왔다.        이름 모를 잎새들의 흔들림.        여행자는 자신이 혼자임을 느낀다.        이름 모를 새떼가 햇빛 한 조각씩을 물고        서쪽으로 지고, 연이어        모래단지를 엎지른 듯 이름 모를 별들이 흩어졌다.        사십 년 간의 도시생활이 어린시절 시골에서 익힌        동식물과 별자리 이름을 깡그리 잊게 했다. 모두가        이름 모를 것들. 여행자는 갑자기        심한 부끄럼에 휩싸인다.
   쓰시를 더 멈춘다. 여행자의 고독이    너무 비현실적이다. 그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사십 년 간의 도시생활이,    생경스레 튀어나온 것은 아닌가? 나는 출판사의 사장이자    시인인 한 선배로부터, 비약이 심하다는    평을 들은 적이 있다. 사실 구체적이지 않은 시는    내 자신이 질색이다. 지금껏 쓴 것을    빼어 버리고, 다시 종이를 끼운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쓸 결심을 한다. 나는 쓴다.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사십 년 간 살았던        한 오십대가 있어 오랫동안 찾아보지 않았던        고향에 온다. 길안...... .
   나는 한숨을 쉰다. 종이를 홱    빼어 던진다. 이놈의 시가 나를 골탕먹이는군.    나는 테크놀러지 이용에 대한 이율배반의    모순성을 갈파하고자 한다. 즉 테크놀러지를 이용할    때의 편리성, 그로 인해 그것에 종속되어가는    현대인들을. 그리고 덧붙여, 테크놀러지에    노예화됨으로써 테크놀러지를 이용할 수 없는    자연적인 상황에 부딪쳤을 대 보이는 현대인의    초조한 반응을 묘사하고 싶었다. 어떻게 될까?    그런 상황 앞에서 비로소 테크놀러지의 불편함을    느끼기도 하겠고, 도리어 테크놀러지화되지 않은    자연에 대해 신경질 부릴 수도 있겠지.    새로운 종이를 끼우고, 나는 쓴다.
       길안에 갔다.        길안이 아름다워 나는 울었다.        길안에 어둠이 내렸다.        길안에 택시가 보이지 않는다.        길안 바깥에서 나는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 생각을 한다.        길안이 불편해진다.        길안이 내 모든 약속을 퍼지르고 앉았다.        길안이 불안하다.
   연을 띄우고, 잠시 멈춘다. 이 어조로 쓰는 거야,    독하게 마음먹는다. 누가 뭐라건 말건    이런 생각을 한다. 우표를 모으는 우표수집가가    자신의 스토크 북 속에 우표를 수집해두는    일같이, 시쓰기 또한 내 가슴속에    시를 모아두는 일일 것! 새로운 시를 쓰고 싶은    열망은 우표수집가가 자신의 스토크 북 속에    없는 볼리비아산의 나비 우표를 간직하고 싶어하는    그 열망 이상의 것에 다름아닐 것이다. 우표    수집가가 아무리 구하기 어려운 귀한 우표를 구해    간직했다 한들, 그 때문에 세상이 바뀌지 않듯    시인이 아무리 좋은 시를 쓴들, 또한 세계는 변함    없는 것. 우표수집가와 시인 가운데 어느쪽이 더    위대한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때 우리는 우표수집가의    그, 성취의 기쁨을 위해 시를 써야 한다. 이렇게    밑도끝도없는 생각을 하곤, 나는 다시 타자기를    두드려갔다.
       길안의 바깥에 있을 때 자동판매기에서 커피 빼먹
     던 생각을 한다.
       길안을 빨리 벗아나고 싶다.        길안 벗어날 수단이 없구나.        길안이 불가해하게 느껴진다.        길안의 산과 물이 역겨워진다.        길안의 나무들이 유령같이 곤두섰다.        아아 상종 못할 자연        이해 못할 자연이다.        길안의 비문명이 공포스럽다.
   연을 띄우고, 잠시 쉬기로 한다. 여행자는 이미    충분히 불안해졌고, 그는 테크놀러지화되지 않은    길안의 자연상태에 대하여 추악을    느끼고 있다. 그러면 이쯤에서    그가 가야 할 곳에 대한, 현대인의 회의를    끄집어내면서 이 시를 마무리하자. 나는 쓴다.
       그러나 나는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인가?        내가 가야 할 거기가 어딘가?        택시를 쉽게 잡기 위해        택시잡기 어려운 이곳으로부터 빠져나가야 할        그곳은 어딘가?        과연, 길안을 떠나 다시 길안으로 돌아올 수 있겠는가?        길안에서 처음으로        길안 바깥이 불안으로 닥쳐온다.        나는, 너는, 모든 길들은        어디로 가게 되어 있는 것일까?        우리 있을 데가 없다.
   다 썼다. 3연의 시.    나는 그것을 읽어본다. 엉망이구나.    한숨을 쉰다. 이렇게 어려운 시.    이렇게 하기 어려운 일을 하며, 한평생    사는 것이 내 꿈이었다니! 나는    방금 쓴 3연의 시를 찢는다. 커피를 한    잔 끓여 마신다. 생각이 이어졌다. 유년시절에    계집애들이 하던 고무줄 놀이가 아닐까, 시 같은    것은. 점점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것. 자꾸    고무줄 높이를 높이면서 고통을 즐기는 것,    고통을 즐기는 것! 이 밤 기어이, 길안에서의    택시잡기를 쓰고야 말겠다. 나는 무섭도록 새하얀    종이를 끼운다. 다시 쓴다.
       풀이 우거진 자리에        한 무전여행가가 검은 슈트케이스를 든 채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늬엿늬엿 해가 지고 있었지만        택시는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여행가가 쉽게 포기할 것 같지도 않았다.
   여기까지 쓰자 아침이 밝고, 나는 세수를 하러 일어선다.    하룻밤 꿈을 꾼 듯. 밤샘한 어제가    어릿하다. 더운물에 찬물을 알맞게    섞는다. 생각이 떠올랐다.    물과 물이 섞인 자리같이    꿈과 삶이 섞인 자리는, 표시도 없구나!    나는 계속, 쓸 것이다.
  • 길안:안동 근교의 면소재지.

시인의마을

문서 댓글 ({{ doc_comments.length }})
{{ comment.name }} {{ comment.created | snsti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