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일리톨의금강산유람기

1 1일차[ | ]

이런 일은 내 생애 없었다. 복권을 사도 500원짜리 하나 걸리지 않던 나한테 금강산 관광 상품권이 떨어지다니... 그것도 꽁으로... 난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남한이라는 좁은 땅덩이에 태어나서 저 바다를 건너본 적이 아직 한번도 없다. 제주도 한번 가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어릴 적 우리집 형편이 어딜 그렇게 나다닐만큼 여유가 있지도 않았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그 맛을 안다고 여행을 거의 다녀본 적이 없던 나는 중고등학교 수학여행이나 수련회에 가면 꼭 배탈이 나거나 몸살이 나서 친구들에게 미안했던 기억이 있고, 방학동안 외국이라도 나갔다온 친구를 보고 마치 천국이라도 갔다온 사람을 보는 양 부러워했던 어렴풋한 아픔이 있다. 나에게 여행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 어디가나 다 똑같겠지 머"라는 식의 자기방어의식이 생겨났고 "난 어디 나다니는 거 싫어해"라고 친구들 앞에서 과감히(?) 선언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익숙할 정도가 됐다. 근데 꽁으로 생긴 금강산 상품권을 보니 마음이 흔들린다. 며칠을 두고두고 고민하다 그냥 가보기로 했다. 내돈도 아닌데 뭘... 회사에 하루 휴가를 내고 주말을 끼고 금강산관광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 '이거 물갈이라도 해서 또 배탈나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고개를 든다. 금요일 아침 7시에 서울 모처에서 관광버스에 올랐는데,속초에 도착하니 11시 반... 자그마치 4시간 반을 길에서 뿌렸다.ㅜㅜ;

속초여객터미널에 도착해서 승선수속을 밟는데 이건 완전 시골장터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두리번거리다가 옆에 사람이 하는 걸 보고 대충 따라해서 승선에 성공(?)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관광객들 대다수가 50대이상인 것 같다. 배의 승무원들은 거의가 다 필리핀 사람들이다. 북한과의 정치적인 이유로 제3국인을 고용한 듯 했고, 임금차를 감안해 필리핀인을 쓰는 듯 했다. 설봉호는 기대했던 것보다는 훨씬 작았다. 처음 금강산 관광사업을 시작했을 때 임대했던 큰 배들은 심각한 경영난으로 인해 다시 돌려보낸 듯 했고 설봉호만 남은 것 같다. 배는 12시 반에 출항했는데, 배가 작다보니 배의 흔들림이 장난이 아니다. 배멀미는 차멀미와는 격(?)이 달랐다. 멀미는 유치원을 졸업하며 같이 졸업했다고 생각한 나는 무방비 상태로 승선을 했는데, '키미테'가 그립다. 선실에 누워 눈을 감으니 출렁거리면서 위로 올라갔다 아래로 떨어지는 게 완전 바이킹이 따로 없다. 안 그래도 놀이기구 중에서 제일 싫어하는게 바이킹인데 4시간동안 바이킹을 타야한다는 사실에 눈이 캄캄하다. 거의가 노인층인, 게다가 100살이 가까운 할머니도 포함되어 있는 이산가족들은 어떻게 설봉호를 타고 금강산까지 갔을까를 생각하니 인간의 정신력이라는 게 새삼 대단해 보인다. 하긴... 배멀미가 난다고 해도 도망갈 데도 없긴 하다.

네시반 정도에 배는 고성항에 닿았다. 고성항에 내리기 직전 사람들은 20여명 정도가 한 조가 되어 조장(가이드)이 배정되었다. 현대아산직원인 조장이 이것저것 주의해야 할 사항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우리는 설봉호 선실에서 묵기 때문에 매일 아침에 금강산에 들어가면서 그리고 관광을 마치고 저녁에 들어오면서 하루 2번씩 북한측 통행소를 지나쳐야 한다. 남한 화폐와 카드, 신분증, 배율이 높은 카메라와 망원경, 영어가 크게 씌어 있는 갖가지 옷들 등등 가지고 내리면 안되는 게 너무나 많아서 실제로 북한 땅에 발을 딛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배가 항구에 닿은지 한시간정도는 족히 흘렀을 무렵 드디어 조장은 우리를 데리고 내렸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북한군인2명이 눈에 띈다. 금강산 관광이 6년째에 접어든만큼 그들의 눈빛도 심드렁하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관광객들이 지나가든말든 신경 안 쓴다. 그와는 반대로 관광객들은 제 세상인양 배안에서 웃고 떠들고 하다가 겸연쩍은듯 조용히 걷기만 했다. 사스때문인지 체온검사를 받은 후 입국심사대에서 도장을 받고 세관검사를 마친 후 관광버스에 몸을 실었다. 나름대로 긴장했었는데,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사천리로 통과해서인지 허탈하다.

멀리서 보이는 금강산은 예쁘다. 남한산과는 달리 좀더 예쁜 구석이 있다. 금강산은 서쪽의 내금강, 동쪽의 외금강, 해안쪽의 해금강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고성항이 있는 외금강은 웅장하면서도 소나무숲과 갖가지 기암괴석들로 아기자기한 맛을 느낄 수 있다. 관광객의 2/3정도는 한국보이스카우트연합과 유아교육학회에서 온 단체관광객들이었고 나머지는 개인적으로 온 주로 50대 부부들이나 아주머니들이다.

고성항에서 우리를 태운 버스는 양쪽으로 철조망이 쳐진 길을 따라 10여분을 달렸다. 이 길은 현대측에서 자재와 장비를 대고 북측 노동력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관광용도로만 사용이 된단다. 양쪽으로 북한주민들이 사는 마을이 보이는데 영화 '아름다운 시절'에나 나옴직한 광경이다. 회색의 시멘트 벽돌로 지어놓은 축사같은 건물인데 기와를 얹어서 사람이 사는 곳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사이로 주민들의 모습이 보인다. 자전거를 타거나 트랙터와 수레를 연결한 차를 버스인양 타고 다니는 모습이 이채롭다. 손을 흔드니 반갑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준다. 가슴이 먹먹하다.

곧 온정각 휴게소에 닿았는데, 약 3시간 정도의 자유시간을 주고는 저녁먹으면서 온천욕을 즐기고 기념품 사서 데리러 올때까지 기다리란다. 참으로 널널한(?) 첫날이다. 온천은 내일도 예정되어 있어 다음날 하기로 하고 그 주변을 거닐었다. 관광객 대부분이 온천을 하러 들어가서인지 주변엔 아무도 없다. 마치 휴양림에 들어온 것 같다. 산새들이 우는 숲길을 빠져나와 냇가로 나왔다. 냇물이 그렇게 맑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 동네 주민들은 그 물을 그냥 떠서 식수로 마신단다. 북한초소 너머로 마을이 보인다. 냇가에는 왠 아줌마가 몽둥이로 두들겨가며 빨래를 하고 있는데, 조금만 들어가면 바로 인민학교 교정이다. 옹기종기 둘러앉아 무언가를 하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고, 주변을 뛰어노는 아이들도 있었다. 손을 흔들었는데 이쪽을 멍하니 바라만 볼 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저 아이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는지... 시꺼먼 얼굴의 산골소년이 도시에서 내려온 허여멀건한 대학생을 바라볼 때 느꼈을법한 자괴감, 소외감만은 아니길 바란다.

어느덧 온정각 휴게소까지 걸어내려와서 저녁을 먹는다. 온정각 휴게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현대아산 직원이나 연변동포들일 뿐 북한사람들의 모습은 볼 수 없다. 파는 음식도 남한식 부페이고 서비스도 훌륭해서 북한에 왔다는 느낌은 거의 들지 않았다. 관광같지도 않은 관광을 마치고 배로 돌아와 선실에서 잠이 들었다. 조금씩 흔들리는 설봉호는 마치 물침대같다. 배에서 자는 것도 좋은 경험이다. 환상의 크루즈여행은 아닐지라도.

2 2일차[ | ]

금강산관광 2일차는 본격적으로 금강산을 오르게끔 되어 있다. 선실의 커튼을 열어놓고 잠이 들어서인지 아침햇살에 눈이 부셔서 잠에서 깼다. 5시40분. 조금씩 움직이는 설봉호의 느낌은 여전히 좋다. 엄마가 아이를 안고 잠을 재울 때 아기가 이런 느낌일까? 선실 공기 흡입구를 많이 열어놓아서 그런지 방안이 추워서 일어나기가 싫다. 6시30분 모닝콜이 울릴 때까지 자리에 누워 있었다. 샤워를 하고 2층 식당으로 올라갔다.

아침식사는 부담없이 깔끔하게 차려져 있어서 좋았다. 국과 밥, 전복죽, 그리고 부페식 반찬 조금씩. 조장이 잘 잤냐며 인사를 건넨다. 활달한 성격에 매사에 적극적인 우리 조장은 정말로 내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다. 금강산도 '산'인지라 등산복을 유니폼으로 입고 있는데, 그런 옷차림이 오히려 정장보다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사람. 난 활달하고 적극적인 누님들이 좋다. 아직까지 나보다 나이가 어린 이성한테 끌려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막내라서 그런가?

북측 통행소를 지나 버스에 올라타자 온정각 휴게소에 잠시 들렀다가 금강산 입구로 올라간다. 만물상코스와 구룡연/상팔담코스 중 1개를 선택해야 하는데, 나는 구룡연/상팔담을 선택했다. 조장이 금강산 입구에서 마지막으로 화장실에 모두 다녀오라고 한다. 여기서 올라가면 유료화장실 밖에 없기 때문이란다. 금강산의 계곡물은 그대로 하류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환경보전에 최선을 기하기 위해서 유료화장실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인데, 유료화장실의 이용요금은 남자는 작은 것 $1, 큰것 $4, 여자의 경우 작은 것 $2, 큰것 $4이란다. 차등을 둔 이유는 알아서들 생각하시길...

금강산행은 알아서 개인적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목란관에서 점심을 알아서 먹고 금강산 입구에 있는 버스정류장까지 3시20분까지 내려오는 일정으로 되어 있다. 올라가는 중간중간 바라다보이는 금강산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고생끝에 상팔담에 닿았다. 상팔담 가는 길은 생각보다 엄청 힘들다. 철제 사다리와 밧줄로 상당히 먼 거리를 올라가야 하니까 말이다. 노인네들은 가다가 퍼지니 아예 사진으로만 보는게 상책이다. 상팔담은 구룡폭포 윗쪽에 있는 8개의 조그만 연못인데 선녀와 나뭇꾼의 공간적 배경이 된 곳이라나? 내가 올라가자마자 구름이 끼어버려 잘 보지는 못했으나 어렴풋이 멀리서 바라보니 옥목걸이같다는 생각이 든다. 김정일의 빨간 휘호(?)가 있는 곳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내려왔다.

구룡연으로 내려가자 역시나 구름이 끼어서 폭포의 어슴푸레한 실루엣밖에 보이는 게 없다. 허탈한 마음에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북한 안내원이 나를 따라오더니 말을 건넨다. 구름 때문에 구룡폭포를 못 보고 내려가는게 안쓰러워서 자기가 재미있는 전설을 얘기해주겠단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다부진 몸매를 하고 있는 30살 정도 먹은 사람이었는데 이름은 문성철이란다. 그의 얘기는 금강산 관광 6년의 역사만큼이나 노하우가 있었다. 말해주겠다던 전설이란 구룡연에 산다는 아홉마리의 용이 원래는 내금강의 어떤 절에서 살았는데 인도로부터 건너온 고승에게 혼쭐이 나서 여기 외금강 폭포 밑 연못에 살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갑자기 인도로부터 건너온 고승=외세, 미국. 9마리의 용=우리나라 라는 등식으로 얘기를 풀어 나간다. 갑작스런 이야기의 전환에 조금 당황했던 나는 그저 맞장구를 몇 번 쳐주며 가만히 듣기만 했다. 7.4남북공동선언에서부터 6.15남북공동선언, 현재의 북핵문제까지 이야기가 나아갔는데 솔직히 당위에 치우쳐서 하는 말인 탓에 그리 흥미롭지는 않다. 내가 그리 주의깊게 듣지 않는 걸 눈치챘는지 이 사람은 갑자기 부산아시안게임에 왔던 북한응원단 얘기로 화제를 돌린다. 북한의 아가씨들 어떻더냐 한번 연애해보고 싶지 않느냐 등등의 너저분한 말들. 난 솔직히 당시 한겨레21조차 '북에서 온 미녀 응원단 신드롬'운운하던 것에 상당한 반감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유럽여행을 다녀왔던 여자후배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 후배가 헝가리에 갔을 때, 남자가 에스코트해주지 않으면 여자들이 선술집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걸 알려주었던 헝가리 남자는 그 사실을 무척 자랑스러운 듯 이야기 하더랜다.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치던 공산권 국가들에서조차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억압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거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점심을 먹을 목란관에 닿았고, 문성철이라는 남자와의 씁쓸한 헤어짐이 있었다. 늦게 내려온 탓인지 벌써 많은 관광객들이 목란관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점심값은 9달러. 비싼 편이다. 메뉴는 평양냉면과 비빔밥 두종류 밖에 없다. 식탁에는 흰 식탁보를 깔아놓았는데 앞서 많은 사람들이 점심을 먹어서인지 너무 더러워서 안 깔아놓은 것만 못하고, 앞서 먹은 그릇이 그대로 식탁에 수북이 쌓여 있다. 산행에 지쳐서 목이 말랐지만 물이나 물수건을 달라고 해도 감감무소식이다. 내가 물어물어 갖다 먹어야 했다. 안 갖다줄거면 잘 보이는 곳에 준비해 놓을 것이지 구석구석에 짱박아 놓아서 한참 찾아다녔다. 게다가 목마른 놈이 우물판다고 내 자리에 쌓여 있던 빈그릇들도 내가 다 치웠다. -_- 옆자리 아주머니들이 일어서면서 냉면은 맛이 없다며 비빔밥을 먹으라고 권한다. 그래서 비빔밥을 시켰는데 나오는 건 냉면이다. 난 비빔밥 시켰다고 말하려다가 괜히 욕만 먹을 뻔 했다. 눈을 치켜뜨면서 덤비는데 무서웠다. -_-; 평양냉면은 정말 맛이 없었다. 마치 고무줄을 씹어먹는 것 같고 국물은 닝닝하고 도대체 이런 음식이 왜 1만원이 넘어가는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다.

내려와서 한시간가량 기다리다가 모란봉 교예단의 공연을 봤다. 관람비는 자그만치 35달러. 하지만 목란관의 냉면과 달리 볼만한 공연이다. 이들은 북한의 주요한 외화벌이수단인 탓에 이들중 몇명은 인민배우라는 칭호를 받으며 장관급의 대우까지 받는다고 한다.

교예관람 후 온천욕을 하러 갔다. 온천시설만큼은 참 맘에 든다. 노천탕이 있어서 나가 보았는데, 머리위에는 허브향이 나는 나무로 울타리가 쳐져 있다. 은은한 허브향이 콧끝에 맴도는데 멀리 금강산도 바라다 보이고... 빡빡한 일정의 피로가 확 풀리는 것 같다. 온천이나 사우나가 점점 좋아지는 걸 보니 나도 나이를 먹고 있나보다. 나중에 시간도 되고 돈도 되면 일본에 온천하러 가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3 3일차[ | ]

여행의 마지막날이다. 삼일포를 2시간 가량 둘러보고 점심을 먹고 배에 오르면 이번 여행도 끝난다. 전날 하루종일 산에 올라갔다가 교예단 공연에 온천까지 빡빡한 일정을 보내서 그런지 아침에 일어나는 몸이 무겁다. 전날과 그 전날에도 그랬듯이 통행검사소의 입국심사를 받고서 버스에 오르니, 삼일포 가는 길은 북한마을을 통과하기 때문에 북한주민들의 모습을 조금 더 가깝게 볼 수 있을 거라고들 한다. 전날까지는 현대아산에서 만든 도로만을 따라 다녔는데 오늘은 실제 북한주민들이 이용하는 길을 통해 삼일포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저 멀리서 붉은 깃발을 꽂아두고 작업을 하고 있는 주민들의 모습이 보인다. 조장의 말로는 그 붉은 깃발이 그날그날의 작업량을 나타내는 거란다. 협동농장체제라서 그런지 단체로 일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리 능률적으로 일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둑방에 매어놓은 고삐가 풀려버려 비쩍마른 황소 한 마리가 옥수수밭에 들어가서 옥수수 줄기를 뜯어먹고 있는데도, 그저 팔짱을 끼고 멀거니 바라보는 농부의 모습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축사같이 생긴 우체국과 소학교, 고등중학교의 모습이 보이는데 고등중학교에는 전교1등부터 꼴등까지 이름을 써놓은 칠판이 길쪽을 향해 걸려 있는 모습이 재미있다. ‘저런 건 언제나 남북공통이군’이라는 생각이 잠깐 스쳐간다. 지나가는 길에 페인트칠이 되어있는 흔치않은 건물이 보이는데, 일제시대 때 금강산 온정역으로 쓰이던 건물이란다. 지금은 온정리 노동당 청년위원회가 사용하는, 우리로 치자면 관공서인데, 온갖 선전문구와 화려한 벽화들로 장식되어 인근의 주택들과는 확연히 구별되어 보였다.(북한에서는 집들도 나라에서 일괄적으로 지어서 배급을 해주기 때문에 집들의 모습이 거의 똑같다.)

어느덧 삼일포에 차가 닿았다. 삼일포는 관동팔경을 이루는 호수인데, 그 주위를 둘러싼 해송군락지와 암벽이 기막힌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관동팔경 한곳당 1일씩만 묵어가던 신라의 화랑들이 이곳의 경치가 너무나도 마음에 들어 3일동안 묵어갔다는 이유로 ‘삼일포’라고 불린다는데, 그 말이 빈말이 아니다. 북한에서는 김정일의 어머니인 김정숙이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리라고 하여 혁명유적지로 관리되고 있고 ‘단풍관’이라는 북한의 고급 음식점도 들어서 있어, 얼마 전 제7차 남북한 이산가족상봉 행사가 치루어진 장소라고 한다. 삼일포 관광을 마치고 버스에 오르니 그제서야 가는 빗줄기가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차창밖으로 손을 흔드니 북한 환경요원들도 손을 흔들어 답을 해준다. ‘벌써 여행의 끝이구나.’라는 생각에 아쉬움이 남았다.

4 감상[ | ]

윗부분까지 글을 쓰고 잠깐 금강산 여행을 다녀왔다는 사실을 망각해버린채 한달여를 살았다. 나의 일상에는 누구의 그것과 같이 챙겨야할 소소한 일들로 넘쳐났고 회사가 한창 바쁜철에 공짜 여행을 다녀온 탓에 섣불리 여행이야기를 입밖으로 꺼낼 수도 없었다. 그러던 중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정몽헌 회장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설마.. 거짓말이겠지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무런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면서 커온 조선의 한 부르주와의 죽음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가 비자금을 조성해서 정치권에 뿌렸던, 형과의 재산권 다툼에서 빈껍데기 뿐인 허수아비그룹을 물려받았건 내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다. 하지만, 그가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위해 했던 일만은 어느정도 기억되기를 바란다. 사실 그가 그의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서 대북사업에 매진했던 것만은 아닐게다. 나름대로 그는 북한을 황금의 시장으로 보았고 경제적인 타당성이 있다는 판단을 내렸기에 대북사업을 추진했을거다. 하지만, 그런 불순한(?) 의도라고 하더라도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시키고 북한을 국제사회로 끌어내는 커다란 결과를 만들어냈다면 그의 그러한 행동은 역사에 남을만 한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정몽헌이 투신한 날 퇴근길에 석간 문화일보를 한 부 샀다. 도올 김용옥이 말도 안되는 정몽헌 찬가(?)를 장황하게 써 제꼈다.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란다. 이놈은 지한테 돈주고 입에 발린 칭찬해 주면 그게 누구이던 꼬리를 흔들며 삽살개마냥 짖어댈 놈이다. 난 이런 용비어천가식 평가도 싫거니와 '비운의 황태자' 등등의 웃기지도 않는 기자들의 문예창작욕구에 구역질이 난다. 금강산 여행이 내게 남긴 인상은 두가지다. 첫째는 북한이 아직도 상당히 폐쇄적인 사회라는 거다. 그 폐쇄성은 자발적인 그리고 비자발적인 주민의 지지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즉, 곧 그 생을 마감할 것 같은 김정일의 전근대적인 전제군주정이 아직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거다. 모든 체제는 관성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 속의 주민들도 자신들의 눈으로 확인을 하지 않는 이상 섣불리 움직이지는 않는다. 때문에 북한주민들이 아사직전이어서 주민들이 자진 탈북할 것이고 곧 체제가 곧 무너질 거라는 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그 체제에 균열이 가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은 남북간의 교류확대라는 확신이다. 어쨌든 우리가 정몽헌이라는 부르주와에게 고마워해야 할 건 그 정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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