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매점

새로 개교한 특수목적고를 다닌 덕에 나는 몇가지 특이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선생들이 학생을 너무 과대평가해서 말도 안되는 수준의 교육과정을 짰다가 좌절하게 되었다거나 기숙사가 채 완성되지 않아 교실에 군대 막사처럼 이층침대를 잔뜩 짱박아놓고 기숙사입네 하고 지냈다거나 하는 일들이 그것이다.

그 학교의 첫 교장선생님은 온화한 인상을 가진 할아버지셨다. 실제로 별로 버럭하시는 스타일은 아니어서 주로 교감선생님이 버럭하셨던 기억이 난다. 교장선생님은 이정도 학생들이라면 해볼만하다 여기셨는지 무척이나 이상적인 시도를 하셨다. 바로 자율 매점이다. 물건만 가져다 두고 학생들이 알아서 돈을 내고 거스름을 챙겨가길 바라셨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살짝 놀랐다. 아 선생님은 우리를 참 믿어주시는구나 하고.

결과는 처참했다. 아이들은 당연히 돈을 내고 싶어했지만, 거스름이 넉넉하지 않을 때도 많았고, 하필 그 시점에 돈이 없어 외상을 달기도 했고, 자기 맘대로 단 외상을 자연스럽게 까먹기도 하는 통에 매출대비 수금은 30% 아래로 떨어졌다. 이상과 실제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한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자율 매점은 타율 매점이 되었다.

이 외에도 선생님들의 여러가지 시도를 우리는 금새 좌절시켰다. 약간 모범생이었는지는 몰라도 윤리관이 제대로 형성된 학생들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단지 주먹으로 뭔가 해결하려는 성향이 일반 학생들보다 적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자율 매점의 실패와 잇따른 학생들의 배신(?)은 선생님들이 잠시 내려놓았던 몽둥이를 들게 만들었다.

지금도 교장선생님에게 미안하다. 그정도 믿음을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배신은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다. 당장 전직 대통령 두 분이 돌아가셔야 그들이 얼마나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였던가를 기억하지 않는가. 그 손쉬운 선거혁명을, 누구도 피흘리지 않아도 도장 하나 잘 찍으면 이뤄낼 수 있는 선거혁명을 우리는 하지 못했고, 어쩌면 다음 선거때 또 망각할지 모른다. 부자되세! 구호 한마디에.

대략 15년도 넘게 지난 지금 나는 회사에서 자율 도서관(?)을 만드는 시도중이다. 읽고싶은 책은 반납일과 관계없이 가져가서 읽고, 다 읽은 책은 아무때나 반납하는 방식이다. 뭘 가져갔고, 뭘 반납했는지 기록하지 않는다. 좋은 책을 가져가고 나쁜 책을 기부해도 관계없다. 그저 내가 읽지 않지만 누군가가 읽을만한 책을 공유하자는 취지로 운영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잘 되지 않는다. 나는 교장선생님이 겪은 좌절감을 몸소 체험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돈이 엮여있지 않고, 또 어차피 업무상 계속 늘어나는 신간을 소진하자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좀 더 해볼만 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서를 한명 둘까 한다. 사실 사서는 아니고 업무상 필요해 채용한 직원이다. 그 사서는 자기 일을 하지 도서관 관련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않는다. 단지 아파트 경비원처럼 존재할 뿐이다. 가끔 넘어진 책들을 잘 세워서 정돈하거나 누가 책을 기부하면 잘 받아서 꼽아놓는 정도의 일을 할 예정이다. 누가 뭘 가져가고 기부했는가는 꼼꼼하게 챙기지 않을까 한다. 불필요한 관리를 최소화하고도 잘 돌아가는 시스템을 만들어보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 1차 프로젝트는 실패로 끝났으나 지금 시도중인 2차 프로젝트는 1차 때보다는 상황이 낫다.

나는 이 일을 성공시킬 수 있을까? 좌절한다면 그건 언제일까? 그 결과가 나의 인간관을 어떻게 바꿀까? 내가 고등학교때 받은 교육 중 가장 소중한 것은 교장선생님의 실패한 자율 매점인 것 같다. -- 거북이 2009-8-23 12:54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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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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