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수학, 경제, 그리고 정치

1 개요[ | ]

인구, 수학, 경제, 그리고 정치
  • 저자: Jjw
  • 2012-02-22

어제(2012년 2월 21일) 폐친과 수다를 떨다가 어, 이거 그냥 수다로 묻어버리기엔 쫌 아까운 주제인데 싶어서 노트로 남겨본다.

2 예전에 말야 맬서스란 애가 있었어..[ | ]

Thomas Malthus.jpg

토머스 맬서스의 초상 (출처:위키미디어 공용)

수다의 진수는 수 많은 가지치기에 있다는 친구의 말에 따라 딴 소리부터 하고 가면, 맬서스는 언청이였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으니 돈이야 충분했지만 당시 의학 기술의 문제때문에 수술을 할 수가 없어서 일생의 대부분을 외모 컴플랙스에 시달리며 살았다. 지금 왼쪽에 보이는 초상화는 1833년 그의 나이 67세가 되어서야 언청이 수술을 하고 그린 것이다. 맬서스는 그 이전에 초상화를 그린 적이 없다.

맬서스는 흔히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르도 등과 함께 영국 고전경제학파의 일원으로 취급된다. 하지만, 맬서스가 지금 살아있다면 난 그들과 다르다고 삐쳤을 것이다. 사실, 각자가 모두 색깔이 다른 이들을 그냥 한 통속으로 뭉뚱그려 말하는 건 실상을 제대로 말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랴. 이들 역시 자기보다 앞선 시대의 경제학자들을 수 많은 차이를 무시하고 "중상주의자"라는 말로 뭉뚱그려 평가했으니, 자업자득이라고 해두자.

맬서스는 살아 생전에 자신의 미들 네임인 로버트로 불려주기를 희망하였고 스스로를 수학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맬서스는 토머스로 불릴뿐만아니라 수학계에서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누구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평가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3 18세기 최대의 헛소리[ | ]

맬서스가 유명한 건 그의 뻘소리 때문이다. 맬서스는 《인구의 원리에 관한 일론(一論), 그것이 장래의 사회개량에 미치는 영향을 G.W.고드윈·M.콩도르세 그리고 그 밖의 저작가들의 사색에 언급하며 논함》이란 논문에서 "식량은 산술급수로 늘고 인구는 기하급수로 늘어 과잉인구로 인한 기근,악덕, 빈곤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당대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두고 두고 씹히는 맬서스의 주장이다. 맬서스는 "잉여" 인구 조절을 위해 빈곤층의 성적 난행을 막아 산아를 제한하고, 도시 빈민의 보건 환경을 억지로 개선하지 말고 그냥 두어야 죽을 인간은 좀 알아서 죽어주지 않겠냐는 주장을 펼쳤다.

사실, 맬서스의 이러한 주장은 몇 번의 예외를 제외하면 주로 대표적인 헛소리의 사례로 인용되어왔다. 당장에 마르크스는 "맬서스가 말하는 잉여는 산업예비군으로서 일정 정도의 실업자를 비축해두는 자본주의 때문에 일어나는 상대적 잉여일 뿐"이라고 반박했고, 미국의 헨리 조지는 "제이호크(매의 일종)와 사람은 둘 다 닭을 먹는다. 제이호크가 닭을 잡아 먹으면 닭의 수는 줄어들 뿐이지만, 사람들이 닭을 먹을 때는 닭은 증가한다. 닭의 수요가 늘면 농부들은 공급량을 늘릴 것이니까"라고 응수하였다.

4 피보나치 수[ | ]

맬서스 시대에는 이미 피보나치 수열이 알려져 있었다. 이런 얘기다. 토끼 한쌍이 있다고 하자. 아래와 같이 가정할 때 n 개월이 지난 뒤 토끼는 몇 쌍일까?

  • 첫 달에는 새로 태어난 토끼 한 쌍만이 존재한다.
  • 두 달 이상이 된 토끼는 번식 가능하다.
  • 번식 가능한 토끼 한 쌍은 매달 새끼 한 쌍을 낳는다.
  • 토끼는 죽지 않는다.

피보나치 수열의 생성 함수는 다음과 같다.

[math]\displaystyle{ {\displaystyle F_{n}={\cfrac {1}{\sqrt {5}}}\left({\cfrac {1+{\sqrt {5}}}{2}}\right)^{n}-{\cfrac {1}{\sqrt {5}}}\left({\cfrac {1-{\sqrt {5}}}{2}}\right)^{n}} }[/math]

이렇게 말하면 수식만 봐도 머리아픈 사람들은 이쯤에서 이 긴 수다를 그만 읽으려 할 것이므로.. 다음과 같은 방법을 권한다.

  • 1, 1, 2, 3, 5, 8, 13, 21, 34, 55, 89, 144, 233, ...

이 수열을 보면 앞의 두 수를 더한 값이 다음 수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1+1=2
  • 1+2=3
  • 2+3=5
  • ...

역시 수학은 초등학생용까지만이 좋은 것이다. 암튼...

전쟁, 기아, 질병 등 다른 어떠한 간섭이 없다고 가정하면 생물 개체의 증가는 피보나치 수열을 따른다. 확실히 맬서스의 걱정은 기우가 아닌 듯 보인다. 과연 그럴까?

재미 없긴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인구의 문제는 수학만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엔 경제와 정치의 문제가 빠질 수 없다.

5 흑사병[ | ]

Paul Fürst, Der Doctor Schnabel von Rom (Holländer version).png

닥터 쉬나벨 (출처:위키미디어 공용) - 독일에서는 로마에서 온 닥터 쉬나벨이 흑사병을 몰고 왔다는 전설이 있다.

어찌되었든,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인구의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요소는 질병이었다. 흑사병이 한창 번지던 14세기 유럽에서는 지역에 따라 인구의 30%에서 80%가 흑사병에 희생되었다고 한다. 1351년 이탈리아 시에나에 살던 아그놀로 디 투라의 탄식을 보자

매일 밤낮으로 수백명의 사람들이 죽어갔다. …… 역병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 머지 않아 온 땅이 묘지로 덮이리라. 나, 아그놀로 디 투라 또한 다섯의 아이들을 내 손으로 묻었다. …… 이 수많은 죽음을 목도하며 사람들은 세상의 종말이 왔다고 믿었다.

대재앙이 휩쓸고 간 뒤 영국에서는 흑사병에 희생된 사람들의 수와 생존한 사람들의 수를 조사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유럽 최초의 인구 조사라고 한다.

6 조선 시대 인구의 증가[ | ]

역질이 돌지 않는 때에도 갓 태어난 아이가 죽는 경우는 아주 흔했다. 조선시대 후반 양반의 평균 수명은 53세에서 57세 정도였다고 하며,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은 47세였다. 영아 사망을 감안한 조선시대 평균 수명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 떨어진다. 돌잔치를 괜히 하는게 아니다.

박통 시절 유포된 이상한 국수주의 역사관만을 믿고 한국이 역사상 남을 침공한 적이 없고 3년에 한 번 꼴로 침략을 당했느니.. 하는 뻥을 아직도 믿고 계신 분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에서 대부분은 평화로운 시기였고, 특히 조선 시대는 비교적 평온한 시기였다. 크고 작은 분쟁은 대부분 외교적으로 해결하였고 500년 동안 전쟁다운 전쟁은 딱 두 번 있었다. 이렇게 평온한 시기였던 조선시대에도 인구의 증가는 매우 완만하여 인구가 1천만이 된 것은 숙종 연간인 16세기로 추정되고, 갑오경장 무렵의 인구는 2천만이 좀 못되었다고 한다. 매우 평온한 시기였음에도 인구가 두배로 증가하는데 근 3백년이 걸렸다. 그래서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에서 "우리 이천만 동포여, 노예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라고 썼던 것이다.

7 전쟁[ | ]

Pike and shot model.jpg

30년 전쟁 당시의 스웨덴 군 모습 (출처:위키미디어 공용)

중세에서 부터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은 늘상 전쟁터였다. 게르만 전사의 후예들인 유럽의 왕가는 정복 사업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백년 전쟁 덕에 노르망디 지역의 인구는 4분의 3이 희생되었다. 게다가 흑사병이 휩쓸고 간 뒤 근대 초기의 유럽에서는 "종교 전쟁"이 일어나 "사랑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서로 참 많이도 죽였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프랑스의 인구는 약 2천 6백만명이었다고 한다. 그 뒤로는 "나폴레옹 전쟁"이 또 한 차례 유럽을 휩쓸었다.

8 제국주의, 노동력 부족, 그리고 잊혀진 맬서스[ | ]

19세기에 들어 유럽은 심각한 노동력 부족을 겪고 있었다. 당대 "세계의 공장"이었던 영국은 공장에 인력이 모자라 어떻게든 노동력을 확보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이 때쯤 나온 공장법, 빈민법, 거주민법 과 같은 복리 정책은 사회복지제도의 시초로서 각종 교재에 소개되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도 출산률이 계속 떨어져 각종 출산장려 정책과 복지 정책이 시작되었고, 독일의 경우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서 비스마르크는 사회보험을 도입한다. 어떻게든 노동 인구의 수명을 늘려야 했던 것이다.

결국, 맬서스의 호언 장담과 달리 인구는 급격하게 증가하지도 않았고, 전쟁의 원인도 인구의 증가와는 그닥 상관이 없었다. 19세기가 되어 유럽의 각국이 제국주의 정책을 펼칠 무렵 쯤, 맬서스의 인구론은 이미 백년도 지난 구닥다리 이론으로 치부되었으며 오히려 당면 과제는 어떻게 하면 인구를 늘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전쟁은 전혀 다른 이유로 벌어졌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1차 세계 대전은 열강들의 식민지 각축이 전쟁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19세기 말 벨기에 국왕의 주재로 열린 베를린 회의는 아프리카를 유럽 열강이 "사이좋게" 나눠갖기로 합의하였지만, 이미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한 영국과 뒤늦게 출발한 독일 사이에는 타협할 수 없는 간극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유럽을 휩쓸고 있던 낭만주의는 젊은이들을 앞다투어 전장으로 내몰았다. "역사의 부름 앞에 부끄러운 자되어 조국을 등질 수 없어 나로부터" 죽음의 행진을 시작했던 것이다.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자원 입대한 인물들은 히틀러, 무솔리니 뿐만이 아니었다.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지식인, 독일의 사회민주주의당마저도 이 황당한 애국주의의 자기장에 끌려들어갔다.

전쟁의 상처는 깊었고 유럽은 역사상 처음으로 대량 학살 무기를 경험하였다. 수백만이 죽는 전쟁이 끝난 뒤에야 유럽인들은 애국의 이름을 뒤집어쓴 만행을 반성하였다.

독가스 찬 폐 속에서 쿨렁쿨렁 쏟아져 나오는 피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 …… / 친구여 영광의 이야기를 졸라대는 아이들에게 / 그렇게 진심으로 거짓말을 하지는 못할 테지 / 그 오래된 거짓말 말일세 / "조국을 위해 몸바치는 것은 고귀한 영예라고. – 윌프레드 오언, 《고귀한 영예》

어찌되었든 1차 세계대전까지 전쟁과 맬서스는 그닥 관계없는 이야기였다. 아무도 감히 수백만의 죽음을 "잉여 인구 처리"에 빗대지 않았다.

9 다시 등장한 맬서스, 신맬서스주의[ | ]

이렇게 다죽어가던 맬서스의 인구론이 다시 살아난 것은 순전히 불행한 정치적 결과물일 뿐이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의 이른바 간전기(間戰期) 시대에 유럽에서는 제국주의와 함께 인종차별주의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그 유명한 "백인의 짐"이라는 가당찮은 자만감이 유럽을 횡횡하였다. "모글리"가 주인공인 "정글짐"을 쓴 키플링은 다음과 같은 시를 발표하였다.

'백인의 짐을 져라/ 그대들의 가장 훌륭한 자식을 보내라···거칠고 사나운 족속들/ 완고하며 반은 악마, 반은 어린애 같은/ 그대의 새 백성들을 위하여/ 무거운 갑옷을 입고 가라'.

어린애 같은 미개한 유색인종을 정복하고 문명으로 이끄는 것이 고귀한 백인의 짐이란 소리다. 그래서 난 정글짐은 애니메이션으로도 안본다. 그 위에 여전히 숨어있는 "모글리의짐"이 보이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주의를 마치 나치의 전유물인 것으로 오도하여서는 안된다. 당시 유럽과 아메리카 전역에서는 유색인종과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캐나다에서는 아메리카 원주민 (추장님 말씀 - 제발 인디언이라고 하지마~ 우리가 언제 인도에 가봤다구~ )을 강제로 기숙학교에 넣고 영어와 "문명"을 가르쳤다. 미국에서는 "백인 전용" 식당이 운영되는 한편, 장애인과 정신지체아 수용시설에서 공공연히 불임시술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영국과 독일에서는 "우생학"이 당당한 학문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맬서스의 이론은 다시 조명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 맬서스를 들먹이는 사람들의 표적은 빈민뿐만이 아니었다. 어차피 "잉여" 인구를 줄여야 한다면 열등 인종을 줄여야 하지 않겠는가? 인구 과잉이 전쟁을 불러올것이라는 협박속에서 산아 제한과 불임 시술은 2백년전 "수학자이고 싶은 경제학자" 맬서스의 이름을 빌려 신맬서스주의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제2차 대전은 인구 과잉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에서 수십만의 병사가 전사하여 병력이 극도로 모자라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앞다투어 독일인으로서 전쟁에 뛰어들었던 유대인 몇백만을 "청소"해 버렸다.

신맬서스주의는 인종주의와 우생학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였을 뿐인 것이다.

10 둘만 낳아 잘 기르자[ | ]

1974년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jpg

둘만 낳아 잘기르자.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인류의 역사상 가장 급격한 인구 증가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에 찾아왔다. 인구과 과잉되어 전쟁이 난 것이 아니라 전쟁이 끝나자 인구 증가가 폭발해 버린것이다. 베이비 붐이라고 불린 이 현상은 20세기 후반에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었다. 한국의 베이비 붐 세대는 지금도 전체 인구의 17% 정도를 차지한다. 이로서 인구 증가와 전쟁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개인적으로는 근대 의학의 보급으로 영유아 사망률이 낮아진 것이 이 당시 세계적인 인구 증가의 주된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맬서스는 갔어도 그의 이름은 참으로 오래 남았다. 유신 시절 정부는 산아 제한 정책으로 정관 수술을 장려하였다. 수 많은 예비군 훈련장에는 초코파이를 나눠주는 헌혈차와 함께 정관수술팀이 항시 대기 중이었다.

사실, 지금에 와서 다시 살피면 여러 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과연 당시 대한민국의 노동력이 과잉 상태였는가? 전태일이 자신의 몸을 살라 "근로기준법을 지켜라"고 외치던 그 시기 대한민국의 산업 구조는 노동집약적이었고 수 많은 비숙련공을 쓸어담고 있었다. 급격한 경제 성장과 함께 70년대 중반까지 대한민국에서 실업률은 사실 의미없는 지표였다.

그러니, 오히려 문제는 사회복지 재정 문제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한다. 사회보험과 사회보장제도를 실시하면서 과도한 복지 지출을 막으려는 것이 산아제한의 현실적인 이유가 아니었을까?

오일쇼크로 위기를 맞던 70년대 말 경제 개발 추진 이후 처음으로 실업자가 사회 문제가 되었을 때, 산아 제한 정책은 오히려 시들해져가고 있었다.

11 자본주의는 최고의 피임 제도[ | ]

오늘날, 대한민국은 출산장려를 위해 많은 예산을 쏟아붇고 있지만 이렇다할 성과는 아직 없다. 사실 산아 제한 정책을 할 때에도 정책이 그렇게 잘 먹혀 들어가지는 않았다.

자본주의의 고도화와 함께 진행된 핵가족화로 인해 가족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매우 바뀌었다. 더 이상 대를 이을 아들을 강요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큰 힘을 발휘하지도 않고, 부부가 맞벌이를 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와 함께 진행되어온 양극화 현상과 함께 대한민국 특유의 사교육비 지출은 어지간한 경제력을 가지고선 애를 낳을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 놓았다. 게다가, 자기 생활을 중요하게 여기는 현대인에게 다자녀 = 나의 희생이라는 공식이 성립한다.

이 긴 잡답 말미에 당면한 말을 하나 덧붙이면, 둘만 낳아 잘기르자고 정관 수술까지 무료로 해주어도 산아 제한 정책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듯이 육아 비용을 공적 부조로 일정정도 국가가 책임진다고 하여도 출산율이 증가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서유렵과 북유럽의 출산율 증가는 저녁엔 쉴 수 있고 해고될 걱정에 떨지 않는 상황이 마련된 후에야 실현되었다.

12 잘가라 맬서스[ | ]

수다에서 시작된 이 긴 노트를 쓴 이유는 간혹 인구 증가로 "전쟁의 필연성"을 말하는 못된 무리들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인구는 전쟁의 원인도 아니고 전쟁은 인구때문에 일어나지도 않는다. 어찌되었든 철지난 헛소리를 해대는 - 문명의 충돌 같은 뻘소리를 해대는 사뮤엘 헌팅턴 등, 기타 등등, 등... 내 말을 들을리야 없다만. - 못된 무리들에게;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어!!"

13 같이 보기[ | ]

14 참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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