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산

무당

1 # 이중산 인터뷰[ | ]

막 두들겨서 오타가 많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우연히 책을 찾다가 잡지옆에 써있는 걸보고 여기에 싣습니다. 1991년 5월자 뮤직랜드에 실린 인터뷰 본을 옮깁니다. 문제가 된다면 리플을 달아 주시기 바랍니다. 동의없이 실었으므로, 자진삭제토록 하겠습니다. 자료로써의 가치나 인터뷰 내용이나 그렇게 알차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장신고 2004-2-4 12:15 am

2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이중산[ | ]

뮤직랜드 이하 생략 : 뮤
이중산 이하 생략 : 이

뮤 : 만나뵙게 되서 반갑습니다. 그동안 창간 당시부터 여러번 인터뷰 요청이 있었던것으로 아는데 사양하시다가 이번에 인터뷰를 하게 되어 많은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 드릴수 있겠습니다.

이 : 예! 제가 인터뷰를 사양한 이유는 아직 앨범이나 콘서트 활동을 시작하지않은 상태에서 나타 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3번째 요청을 받고 또 거절하기도 미안하고...

뮤 : 이중산씨의 경우는 거의 활동이 없는 상태에서 가끔 연주를 들었던 사람들에 의해 구전으로만 전해오는 특이한 경우이다. 이유가 뭔가? 사람들에게 들어본 바로는 이중산씨 연주는 그렇게 속주도 아니면서 한음한음이 살아있는 특이한 뉘앙스의 울림을 주어 사람들로 하여금 빨려들게 한다던데 무슨 독특한 주법이 있는가?

이 : 독특한 주법이라는 것보다 제가 어렸을적부터 음의 공명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한음한음 만족한 공명이 나올때까지 연습함으로 인하여 다른사람들보다 속주의 진도를 3배이상 늦게 잡은데에 있다. 그리고 사람들마다 뇌파나 손의 신경등이 다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기타로 전달되어 오는 힘이 다 각기 다른 것이다. 그런데 나는 기타를 연주하다가 내손과 줄사이에서 이상한 자력이 끌리는 것을 느끼고 놀랄때가 많다. 그래서 어떤 후배가 이태원 라이브(80년)에서 내연주를 듣고 왜 저런소리가 나는지 이해가 안된다고 이야기 하곤했다.

뮤 : 본인도 이해가 안되는가?

이 : 요즈음은 그것이 일종의 염력 또는 기(氣)라고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다. 20대초부터 사람들로부터 내 기타소리가 같은 장비로 사용해도 다른사람과 달리 음색이 많이 맑고 여음이 길어진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여러번 다른 사람들과 같은 장비로 실험을 해본적이 있다. 장말 내소리가 뭐가 다른가 하고.

뮤 : 그래서 무엇을 느꼈는가?

이 : 내가 다른사람의 소리를 듣고 좀 잡음이 많고 맑게 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어 내가 그 기타를 잡아 본 순간 잡음이 적어지고 소리가 다르게 나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왜 그런가 하고 한참 생각해 보았는데 내손에서 잡음을 흡수하는 능력이 조금 더 있지않나? 하고 짐작할 뿐이다. 그래서 다른사람들과 여러번 비교해 보았다. 연주를 하지않을때 왼손으로 기타를 잡고 있는 경우에도 내가 잡았을때가 더 잡음이 적어지는 것이다. 그때 나는 정말 놀랐다. 내 자신도 잘 이해가 안된다.

뮤 : 음의 공명에 대한 연습을 많이했다고 했는데 어떠한 연습인가?

이 : 여기서 설명하자면 좀 복잡해서 밝히기 힘들다. 23세때부터 30세까지 7년간 집에서 하루 10시간 정도씩 음의 공명을 크게하는 연습프로그램을 만들어 거의 그 한가지만 연습했다.

뮤 : 그 프로그램을 밝힐수 없나?

이 : 그것은 서양에서도 없는 방법이다. 비디오를 찍어서 공개해도 손동작을 봐서는 알수없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현역에서 은퇴할때즘에 후배를 선정해서 전수하겠다.

뮤 : 그때문에 속주의 진도가 늦어졌다고 했는데?

이 : 그런연습을 잘못하면 손이 망가진다. 그리고 시간이 너무 걸린다. 나같이 뒤늦게 활동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몰라도.

뮤 : 이중산씨는 특히 블루스를 잘한다던데.

이 : 그러나 나는 근본적으로 록커이다. 활동을 안하면서 전에 가끔 신촌블루스, 부활등의 콘서트에 놀러 갔다가 즉석으로 연주의뢰를 받으면 연습도 같이 안한 상태에서 할곡이 없었다. 그래서, 즉석에서 12소절 블루스와 'the messiah will come again'의 코드를 적어서 나누어주고 연주를 한적이 여러번 된다. 그 때문에 내가 요즘에 나를 처음 본 세대들에게 블루스 기타리스트라는 오해를 받은것 같다. 나는 70년대 초부터 '블랙 사바스', '지미 헨드릭스', '딥 퍼플'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미8군시절 활동을 시작한 록커이다.

뮤 : 그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하드록 도입인가?

이 : 초창기 시절이긴하지만 나 이외에도 드물게 밴드들이 미8군 영내나 영외의 클럽에서 그런곡들을 연주했다. 나는 그전에 사이키델릭뮤직 전성기부터 미8군에서 프로 연주자 생활을 했다.

뮤 :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가? 어차피 앨범이 나와야만 연주 분석도 하고 많은 기타 지망생 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자료를 공개할 수 있을것 같다. 이자리에서는 이중산씨의 히스토리를 듣는 것도 의미가 있을것 같다.

이 : 내가 중2때 기타를 처음 배워(음악학원에서) 악보와 '벤처스'의 연주곡 등을 마스터했다. 그때 학원에 김선생님이란분이 꼼꼼히 기초를 지도해주셨는데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4개월정도 다녀서 그 학원 에서 배울만한 것은 거의 마스터하고 집에서 연습하다가 고1때 다른학원에 가서 조교노릇을 했다. 그때 그 학원에서 연습하는 광경을 구경하곤 했는데 그것이 프로 생활을 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그러다가 고2때부터 가발을 쓰고 본격적으로 미8군 무대에서 활동했다.

뮤 : 그시절에 잘하는 연주자들이 많았었나? 그리고 현재 그사람들은 어떤가?

이 :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할 정도로 수많은 미8군 밴드들이 있었지만 각 파트별로 3~4명정도외에는 수준급연주자가 없었다. 그나마 거의 음악의 꿈을 포기하고 전업하거나 밤업소등에서 일하고 있다.

뮤 : 특히 기억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 그시절 문산 영외클럽에서 '라스트 챈스'(last chance)라는 밴드에서 김태화씨가 보컬을 했다. 그때는 그 밴드가 소문이 자자했다. 그리고 지금 '사랑과 평화'의 기타리스트 최이철씨와 김석규씨가 톱 플레이어로 칭송을 받았다. 그때 나는 미8군 데뷰 초창기였었는데 같이 일하는 맴버들로부터, 너는 언제 저만큼 할수 있겠느냐는 설움을 받았다. 음악에 재능이 없는것 같다는 소리와 함께.

뮤 : 그당시의 기분이 어땠는가?

이 : 너희들이 그런소리도 잠깐이다. 조금있으면 내가 누군지 알게될것이다 라는 생각을 했다.

뮤 : 그렇게 자신감이 있었는가?

이 : 그렇다. 그시절에 나는 전 파트를 다 정확히 파악해서 악보로 그릴수 있었는데, 다른 밴드의 연주를 듣고 너무나 정확하지 않은것을 보고 놀랬고 도 그 상태의 연주로도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것에 더욱 놀랬다. 그시절에 나는 지금의 일본책들같이 정확히 악보를 만들어놓고 분석하며 연주했다. 물론 연주 주법기호는 지금과 다른 내가 만든것들도 많지만, 그때문에 맴버들과 많이 다투었다. 곡과 완전히 다른 코드와 다른 박자로 여주하려 하는 것이다.

뮤 : 언제부터 두각을 나타내고 알려지기 시작했나?

이 : 데뷰 1년후부터 평판이 좋아지기 시작하다가 21세때에 국내에서 미8군 연예회사에서 가장 큰회사인 화양프로덕션내에서 또 가장 많은 밴드를 거느리고 있는 조단장이란분이 있었다. 그시절에는 일반무대보다 미8군이 더 많은 무대였으므로 밴드들에게는 가장 큰물이었다. 나는 다른 회사 소속으로 있다가 그곳에 조단장을 만나러 갔었는데 "헤이! 대한민국 최고기타리스트 이중한이 아닌가?" 하고 반기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속으로 "벌써 그런소리를 듣나?"하고 좀 어리둥절했다. 아마 내가 잘하는것보다 우리나라 음악 수준이 그정도였지않나 싶었다.

뮤 : 그시절에는 어떤 음악을 연주했나?

이 : '지미 헨드릭스'의 hey joe와 purple haze, '아이언 버터플라이'의 in a-gadda-da-vida, '에릭 클립튼' '롤링 스톤즈', 'C.C.R', '바닐라 퍼지', '레드 제플린', '그랜드 펑크 레일로드,' '산타나'등등이다.

뮤 : 그 이후에 활동은?

이 : 내가 22살때 새로 밴드를 정비하고 이태원클럽에 들어갔다. 그때 이태원클럽들은 지금같은 디스코 클럽이 아니라 외국인전용 음악감상클럽이었다. 물론 춤곡이 나오면 춤도 추고하는.

뮤 : 그시절엔 어떠한 음악을 연주했나?

이 : '블랙 사바스', '레드 제플린', '지지 탑', '올맨 브라더즈', '앨리스 쿠퍼', '무디 블루스', '에릭 클립튼', '산타나'등등을 연주했다. 그 시절에는 외국인 전용클럽이외에선 아예 이런 록을 연주할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국내수준이 낙후한 시절이었다.

뮤 : 그시절에 갈등이 많았는가?

이 : 갈등정도가 아니라 정신병이 생기지 않은것이 이상할정도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같이 희망을 가지고 끝까지 록을 할만한 맴버를 찾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시절에는 초킹을 많이하는 연주를 들려주면, "야! 너무 낑낑 대는 소리말고 부드럽게 하는거 없냐? 너는 너무 고집이 세! 그런거 백날 해보았자 아무소용없으니 정신 좀 차려라" 하는 소리를 친구들과 선배들로부터 지겹게 들었다. 미8군시절에도 클럽의 70%는 록이 배척받았다. 그런곳에 가서는 다른음악을 연주해야했다. 그시절에는 맴버들을 모아보면 한사람은 소울 스타일, 한사람은 컨트리, 한사람은 가요스타일, 뭐 이런식이었다. 그렇게 록커가 거의 드물었다. 그래서 맴버가 모여서 좀 호흡이 맞을만하면 "나는, 록은 비젼이 없어 싫다"고 떠나갔다. 그시절 무수한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고의 연속이었다. 거리에서는 경찰들이 긴머리만 보면 잡아가서, 머리 깎이우고 구류살고 뮤지션들은 록을 하려는 사람들을보면 멍청하다고 손가락질하고 (그나마 그시절 몇안되는 록한다고 하는 사람들중에는 실력도 없이 노력도 않고 워낙 록하는 사람이 드물 어서 자기가 잘하는줄로 착각하는 부류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지경이었으니 참으로 암담하던 70년대 시절 이었다. 그래도 나는 계속 맴버를 찾아 소문만 들리면 부산도 가고 대구도 가고 하면서 끊임없이 추진했다. 언젠가는 인천에가서 키보드주자를 포섭하려고 며칠씩이나 밤세우며 설득하고, 정말 지칠줄 모르고 그러한 상황과 투쟁하던 시절이었다. "저 친구 만큼은 신념을 가지고 록을 끝까지 할수 있을것이다."라고 믿었다가 또 배신당하고, 집에와서는 아버님이 "너는 도대체 직업이 뭐냐? 몇달동안 잘나가서 돈벌이하고 있나하면 또 들어와서 빈둥빈둥놀며 고민만하고 남들은 악사생활해도 꾸준히 돈벌이를 잘한다던데 넌 그래가지고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 빨리 돈벌어 장가도 가서 이 애비 살아생전에 손자라도 보아야 할 것이 아니냐? 안될것은 빨리 단념하고 직장이나 다녀랴" 하시는 말씀을 듣고 암담했던 일이 한두번이 아닌었다. 그서절, 잠자기전에 "이중산은 일어난다, 좌절하지 않는다"를 여러번 속으로 되뇌어야 잠을 잘수있었다.

뮤 : 정말 고난의 시절이었던것 같다. 그 이후에는 조금 나아졌나?

이 : 계속 마찬가지였다. 다만 내가 75년도에 이태원에 있던 맴버들과 부산 서면에 뉴부산 틴 클럽이라는 곳에가서 좋은 호응을 받았다. 아웃사이더라는 그룹명으로(후에 연석원의 아웃사이더와는 다르다) 그때 그곳은 낮에는 음악감상실이고 밤에는 나이트 글럽이었는데 낮에는 그런 록을 처음 듣는 부산 팬들 로부터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그러다가 밤에는 우리음악이 춤과 안맞는다고 말이 많았다. 클럽측에서도 연주음악을 바꾸라고 성화였다. 그시절수준에 '블랙 사바스'난 '앨리스 쿠퍼'음악에 춤을 출수 있는 사람은 없었겠지만.

뮤 : 자작곡은 없었는가?

이 : 그시절부터 자작곡을 만들어 연주했다.

뮤 : 지금은 어떻게 생각되나?

이 : 형편없는 수준이다. 어쨌든 자작곡이라고 해도 록음악이었고, 가요도 연주했지만 우리는 결국 쫓겨나고 말았다. 고집만 좀 꺾으면 바로 성공할수있는 아까운 사람들이란 소리와 함께 맴버들과의 갈등도 많았다. 싱어는 유명 프로모터가 그 당시돈으로 천만원을 지원해준다고 하니까 가요를 해서 그 길로 가자고 하고 나는 그러기가 죽어도 싫었다. 그래서 또 그 팀을 해체하고 다시 고난의 길로 갔다.

뮤 : 그 맴버는 누구누구인가?

이 : 드럼의 한봉(나중에 무당), 베이스의 조용식, 키보드의 최정식, 보컬의 최정광이었다. 그시절에 클럽에서 무명시절이었던 최백호씨와 하수영씨 그리고 권태수씨와 김세화씨등이 낮에 노래를 불렀다. 우리팀에서 반주를 가끔해주었으면 했는데 내가 안된다고 했다. 그때는 그런 쟝르의 음악과 섞이는 것을 정말 싫어했다. 그때 우리팀은 무대에서 연주중에 콜라도 마시고 담배도 피웠다. 어느날 아래층 업소에서 일하는 음악인이 다짜고짜 오더니 우리 맴버의 뺨을 때렸다. 신성한 무대를 모독하는 것이었고, 선배입장 으로서 도저히 용납할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사장이 우리의 무대연출상 필요한 것이라고 옹호해서 간신히 무마되었다.

뮤 : 감사합니다.

2.1 # 촌평[ | ]

80년대 말인가 90년대 초인가 신촌 Be Full에서 몇번 봤는데 그때 감동이란 그후 한번도 그때의 감동을 못 느껴봤는데...
신청곡 없이 '오늘같은밤 으로 시작해서 레드제플린의 락앤롤로 클라이막스를 장식 ㅣㅏ -- 2004-6-28 1:12 am

예전에 조용필과 위대한탄생에도 잠시 몸 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연할땐가 리허설할땐가 기타솔로하다가 애드립으로 연주해서 조용필씨가 '너 나가라.'해서 나갔다는 얘길 들은적이 있습니다. (조용필씨는 자기연주에서 연주자가 애드립 하는걸 싫어한다고 하네요 무진장) -- 장신고 2003-12-16 3:14 pm

이중산 선생은 90년대 초까진 그나마 활동을 했는데 현재는 UFO 연구와 도 닦는데에 더 열심인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중산 선생을 뵙고 싶다면 제가 알아는 봐드릴수 있습니다. 저도 무당의 1집 2집 음반을 한 12년전에 8000원/5000원에 구매 햇는데 2집은 누구 줬고 1집은 있을 겁니다. 사놓고 들어본적 없슴. -_-;;;
그리고, 서태지 교주를 음악계에 들어오게 이끌어준 사람이 이중산 선생 이었다죠. 서교주는 그 보답으로 자기가 쓰는돈의 30분지 일 이라도 좀 생활비로 대줘야 사람이 아닐까요?. -- 김기태 2003-12-16 1:28 pm

기타리스트 이중산님에 대해서 알고싶은데... 자료가 없네요... 마당만이라도 만듭니다...

신중현 트리뷰트에 꽃잎 단 한곡으로도......

무당 1집에 참여한 것 이외에는 신중현 트리뷰트 음원에 참여한 것이 유일한 녹음인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무당에서 그가 남긴 기타톤은 확실히 그것 한장만으로 썩히긴 아까운 것이었지요. 90년대 초반에 이중산의 솔로앨범이 녹음될 뻔 했다가 무산되었다고 하네요. 그가 작곡한 것이 거의 없어서 그는 그냥 필이 좋은 기타리스트인 것으로 보입니다. 확실히 무당 1집은 준수한 한국적 락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 거북이 2003-12-16 12:03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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