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준님의 터키 여행기

1 # 여행자의 천국 터키[ | ]

터키는 여행자들에게 천국 같은 곳입니다. 천혜의 자연 환경, 찬란한 문화 유적, 잘 갖추어진 관광 편의 시설, 그리고 너무나도 따뜻하고 순박한 사람들. 이 모든 것들을 지닌 터키로 전 세계의 수많은 여행자들이 몰려드는 것도 당연하다 하겠지요. 그럼에도 이 매력적인 보물단지 '터키'라는 나라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아쉬웠습니다. 이에 본 코너에서는 터키를 접해 본 한국 사람으로서, 제가 발견한 터키, 터키 사람들의 매력에 대해 컴퓨터 자판 가는 대로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1 관습[ | ]

먼저 터키에 대한 기본 학습부터 시작하지요. 터키는 남북한을 합친 면적보다 대략 3.5배큽니다.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유럽과 아시아의 사이에 위치해 있구요. 서쪽으로는 불가리아와 그리스가 이웃이고 동쪽으로는 러시아, 시리아, 이라크, 이란, 아르메니아, 그루지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지요. 인구는 남한 인구와 비슷한 6천만 명. 국사 시간과 세계사 시간에 등장했던 돌궐족이라고 있지요? 그 돌궐족이 바로 투르크족, 즉 오늘날의 터키인들이지요.

1.2 자연환경[ | ]

자연 환경면에서 터키는 참 축복 받은 땅입니다. 널찍한 땅에 오곡백과 풍성한데다 위치 또한 유럽과 아시아 두 대륙을 연결해주는 통로에 자리해 있으니, 자연 인류 역사 속에서 화려한 공간적 배경이 되어 주었지요. 고대 로마, 초기 기독교, 동로마 비잔틴 제국, 이슬람, 오스만투르크 이 모두가 터키 땅에서 흥망성쇠를 이루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의 터키는 세계사 수업의 넘버원 현장 학습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터키가 여행자들의 천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신이 내려주신 천혜의 자연 환경과 수천 년 간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찬란한 문화 유적들 때문만은 아닙니다. 낯선 객도 오랜 벗처럼 스스럼없이 반겨주는 터키인 특유의 환대 문화, 전국 방방곳곳으로 거미줄처럼 뻗어있는 버스망, 수많은 여행사 및 숙식 시설, 저렴한 물가, 친절한 서비스 등 여러 요소들이 뒤를 바쳐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터키는 전역이 여행자들의 발길을 잡아끄는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역사, 문화유적지들에서는 그 유구함과 장엄함에 감동하고, 푸른 파도 넘실거리는 해변에서는 삶의 여유를 만끽하며 휴식을 즐기고, 촌락의 꼬부랑 할머니가 미소지으며 건네주는 물 사발에서는 훈훈한 정을 나눠 가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매력적인 땅 터키에서 여행자들은 왕이 되며 스타가 되고 터키인이 됩니다. 다음 편부터는 본격적인 터키 여행담 및 생활기가 펼쳐집니다. 2편에서는 천년 고도의 화려함이 가득한 이스탄불 여행담과 제가 터키를 가게 된 과정을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기대해 주세요!

2 # 터키 관광의 출발점 술탄아흐메트[ | ]

먼저 제가 터키를 갔다오게 된 사연을 얘기하지요. 오래 전부터 '터키'라는 나라는 제게 있어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었고, 언젠가는 꼭 찾아가 보아야 할 곳이었습니다.

발단은 이렇습니다. 초등학생 시절 어린이 백과사전을 뒤적이다가 어느 예쁜 외국 어린이의 사진을 보게 되었습니다. 크고 까만 예쁜 눈에 까만 단발머리를 늘어뜨린 어린 소녀의 사진 밑에는 '터키의 어린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저는 "아, 예뻐라! 이렇게 예쁜 아이가 사는 터키라는 나라는 어떤 곳일까?"하며 '터키'라는 나라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극히 사소한 계기로 일기 시작한 터키에 대한 저의 관심은 그 이후 계속 이어져 이런저런 책들을 뒤적이며 터키와 관련된 사항들을 찾아보기도 하고 TV나 신문에서 어쩌다 터키에 대한 소식이 나오면 유심히 보곤 했지요. 그러면서 마음 속으로 '언젠가는 터키를 꼭 가봐야지.'하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주변에 터키 관련 자료들이 별로 없어 항상 답답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99년 여름에 터키에서 일어났던 큰 지진은 터키인들에게는 가슴 아픈 참변이었겠지만 제게 있어서는 터키에 보다 가깝게 다가가게 해 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터키 지진 보도가 나간 뒤 우리나라에서도 터키 지진 피해자 돕기 행사가 벌어졌었잖아요. '터키 애호가'를 자칭하던 저 역시 터키 돕기 성금 모금 행사장에 돈을 내러 갔었지요. 행사장에서 웬 종이쪽을 나눠 주기에 받아서 읽어보니 '이스탄불 문화원'이라는 곳의 팜플렛이었습니다.

서울 강남 역에 있는 이스탄불 문화원은 터키 문화 소개 및 한국과 터키간의 교류 증진 목적으로 98년에 터키인에 의해 설립된 곳으로, 이곳에서는 한국에 유학 온 터키 학생들이 가르치는 터키어 강좌도 설치되어 있습니다. 팜플렛에서 이 사실들을 확인한 저는 '한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나라의 말을 알아야지.'하는 생각에 이스탄불 문화원을 찾아가 터키어 강좌 수강 신청을 했고, 그리하여 1년 여 전부터 터키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터키어는 우리말과 같은 알타이어족이라 우리말과 어순도 같고 문법적 구조도 유사한 부분이 많아서 다른 외국어와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쉽고 재미있게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터키어를 잘못해서 부끄럽군요. 호호_) 터키어를 배우면서 자연 한국에서 공부하는 터키 유학생들과도 친분을 쌓게 되었는데, 터키인들은 제가 이제껏 만났던 그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도 착하고 순수한 사람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터키어를 배우고 마음씨가 비단결 같은 터키인들을 알게 되면서 터키를 향한 저의 관심과 애정은 갈수록 커져갔고, 터키를 가보고 싶은 마음 역시 더욱 간절해졌습니다. 그래서 작년 여름 터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석 달을 지내며 터키어 학교에서 터키어를 배우고 여행도 다녔습니다.

사실 어떤 곳에 가보고 싶다고 해서 훌쩍 떠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죠. "터키 가고 싶다."고 노래를 하던 제가 결국 터키를 다녀온 것을 보고 한 친구는 부러움 반 놀라움 반이 섞인 말투로 이렇게 말하더군요. "넌 참 자유인이야!" 글쎄요. 저는 제 자신을 그렇게 'free spirit'의 소유자로 생각하지는 않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다른 그 어떤 것들보다 유독 더 끌리는 어떤 대상이 하나 정도씩은 있을 거예요. 제 경우에는 그 대상이 터키인 것 같아요. 저에게 있어 터키는 금속을 잡아당기는 자석처럼 이상한 마력으로 제 마음을 끌어당기는 곳입니다.

이 코너에서는 지난 여름 제가 보고 느끼고 체험한 터키의 단면들이 소개될 겁니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여러분들에게 터키를 안내해 드리도록 하지요.

먼저 제가 체류했던 이스탄불에서부터 시작하지요.

이스탄불(Istanbul)은 보석 상자 같은 도시입니다. 이 거대한 도시 곳곳은 옛 동로마(비잔틴) 제국 시대부터 내려오는 화려한 유물, 유적들로 반짝거립니다. 터키의 현재 수도는 앙카라(Ankara)이지만 이스탄불은 동로마 제국 시절부터 셀주크 튀르크, 오스만 튀르크 시대에 이르기까지 과거 천육백여 년 간 대제국의 수도였고, 오늘날에도 터키의 최대 도시로서의 위용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이스탄불에는 정말로 볼거리가 많지만 그 이스탄불 안에서도 여행객들이 필수적으로 들르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술탄아흐메트(Sultanahmet) 지역입니다. 이 지역이 터키를 찾는 여행자들의 필수 코스인 까닭은 이곳에 유명한 역사 유적들과 관광객들을 위한 편의 시설들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터키의 상징물인 술탄아흐메트 사원, 비잔틴 시대의 고색창연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아야소피아, 오스만 튀르크 시대의 영화를 보여주는 톱카프 궁전, 어마어마한 규모와 활기를 자랑하는 대시장 그랜드바자, 터키의 길고 화려한 역사를 보존한 각종 박물관들을 모두 술탄아흐메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관광객들을 위한 여행사, 호텔, 식당 등도 다수 모여 있습니다.

이스탄불 내에서 술탄아흐메트 지역에 가기 위해서는 전차를 타는 것이 좋습니다. (이스탄불에는 아직 서울처럼 지하철망이 뻗어있지 않습니다.) 터키에서는 전차를 '트람와이(tramway)' 혹은 '트램'이라고 부릅니다. 전차를 타려면 먼저 역 매표소에서 '제톤(jeton)'이라는 이름의 토큰을 사서 (가격은 우리 돈으로 약 500원 정도) 개찰구에 집어넣고 플랫폼으로 나가면 됩니다. 터키 전차는 우리나라 전철을 약간 작게 축소시켜 놓은 형태입니다. 매 역을 지날 때마다 안내 방송이 나오는데 이를 잘 듣고 있다가 '술탄아흐메트'라고 나오면 내립니다. 역에서 나오면 한쪽으로는 잔디로 푸르게 단장된 광장이 펼쳐져 있고 맞은편에는 여행사들과 기념품 가게, 환전소, 식당, 호텔들이 죽 늘어서 있습니다.

일단 술탄아흐메트 사원(Sultanahmet camii-술탄아흐메트 자미)부터 찾아가기로 하지요. 광장이 있는 길로 들어가면 술탄아흐메트 사원의 입구가 보입니다. 전차 역에서도 사원 건물이 훤히 보이니까 찾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술탄아흐메트 사원은 이슬람교 사원입니다. 전 국민의 90% 이상이 이슬람교도인 터키는 동네마다 이슬람 사원이 있습니다. 술탄아흐메트 지역에 있는 이슬람 사원의 이름인 술탄아흐메트 사원은 터키의 상징물로도 자주 등장하는 곳으로, 6개의 높은 첨탑들과 우뚝 솟은 돔들이 웅장미를 자랑합니다. 술탄아흐메트 사원은 400여 년 전에 술탄 아흐메트 1세에 의해 세워졌다고 합니다. 이곳을 찾을 때는 이슬람 사원인 점을 감안하여 반바지나 소매 없는 슬리브리스 상의 차림은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원래 이슬람 사원에 들어갈 때는 노출이 심한 옷차림을 해서는 안 되며, 여자들의 경우에는 머리를 스카프로 감싸야 합니다. 그러나 술탄아흐메트 사원의 경우에는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워낙 많다보니 사람들의 옷차림새를 문제삼아 일일이 출입을 저지시키지는 않고, 다만 노출을 심하게 한 사람의 경우에는 보자기를 나눠주어 노출 부위를 가리게 하지만 어쨌거나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 주는 게 성숙한 여행객의 자세겠죠? 술탄아흐메트 사원의 별칭은 '블루 모스크(The Blue Mosque)'입니다. 별칭 그대로 사원 내부는 푸른색의 아름다운 장식 타일들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습니다. 벽과 천장에 붙은 타일들과 바닥에 깔린 카페트에 새겨진 독특한 아라베스크 문양들을 감상하며 널따란 사원 내부를 천천히 거닐다보면 이슬람 신자가 아니더라도 경건한 느낌이 들게 됩니다. 이곳의 아름다움을 직접 확인하면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오는지 이해가 갑니다. 이곳은 입장료는 따로 받지 않고 출구에 기부금을 넣는 통이 놓여져 있어서 원하는 사람은 그곳에 돈을 넣으면 됩니다.

술탄아흐메트 사원 몇백 미터 앞에 있는 붉은 색 건물 아야소피아(Ayasofya)는 동로마제국 시절 그리스정교 교회로 쓰여졌던 곳입니다. 때문에 이곳은 '성 소피아 성당(St. Sophia)'이라고도 불려집니다. 동로마 제국 멸망 후 오스만 튀르크 제국 시절에는 이슬람 사원으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첨탑도 세워져 있어 무척 특이한 느낌을 줍니다. 성당 내부에는 비잔틴 양식의 예수와 성모 모자이크 벽화들이 벽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술탄아흐메트 사원과는 또 다른 느낌의 경건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곳의 입장료는 7천원 정도입니다.

아야소피아 뒤쪽에 있는 톱카프 궁전(Topkapi Sarayi-톱카프 사라이으)은 15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500여 년 동안 오스만 튀르크 술탄(王)들이 거주하던 궁전입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최고의 영화를 누리던 이들이 거주했던 곳인 만큼 넓은 내부는 각종 보석과 도자기 등 온갖 화려한 보물들로 치장되어 있고, 각종 전시실과 부엌, 도서관, 후궁들의 거처(하렘) 등 부속 건물들도 많아서 이 모든 것들을 꼼꼼히 둘러보려면 하루를 꼬박 투자해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궁전 바깥 정원에는 고고학 박물관, 고대 오리엔탈 박물관, 장식 타일 박물관 등 볼만한 박물관들도 세 개나 있습니다. 박물관 입장 티켓(가격은 4천원 정도) 한 장만 사면 세 곳 모두 입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각 박물관마다 휴관일이 다르고 그때그때 보수공사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어서 한 두 곳이 닫혀 있을 때가 많습니다.)

술탄아흐메트 지역에는 톱카프 궁전말고도, 예레바탄이라는 '궁전'(Yerebatan Sarayi-예레바탄 사라이으)도 있습니다. 이름은 '궁전'이지만 사실 이곳은 궁전이 아니라 동로마 제국 시절에 세워진 지하수로(水路)입니다. 입구에서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가 보면 길다랗게 늘어선 기둥들 밑으로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어두운 지하를 밝히는 조명등들은 놀이공원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옆으로 뉘어진 메두사 머리 조각상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아내기도 하고 흐르는 물에 동전을 던져 넣고 소원을 빌기도 합니다. 지하에 있기 때문에 더운 여름날 더위를 식히기에도 좋습니다. 입장료는 학생의 경우 2천원 정도입니다.

쇼핑객들의 파라다이스 역시 술탄아흐메트 지역에서 찾아낼 수 있습니다. 대시장, 일명 그랜드 바자(터키어로는 'Kapali Carsi-카팔르 차르슈')가 그곳입니다. 대시장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이곳은 규모도 대단히 크고 길도 사방으로 뻗어있어 자칫 길 잃어버리기 십상입니다. (다행히 시장 안 곳곳에 경찰 아저씨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큰 규모에 걸맞게 시장 안에는 별의별 상품들이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전통 민예품, 자수제품, 터키 전통 사탕, 차, 향신료, 귀금속류, 그릇류, 의류, 가죽제품 등등. 가게들도 많고 쇼핑객들도 많지만 통로 간격이 넓어서 지나다니는데 불편함은 없습니다. 이곳 상인들의 호객 행위 역시 꽤나 극성맞습니다. 상인들은 가게 문 밖으로 나와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지나갈 때마다 각 나라말로 인사를 건네고 터키 사탕 등을 권하며 손님들을 잡아끕니다. 재래 시장 물건들이 으레 그렇듯이 이곳에서 파는 상품들 역시 가격과 품질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질 좋은 물건을 바가지 안 쓰고 저렴하게 구입하기 위해서는 물건 보는 안목과 요령 있는 흥정술을 지녀야 합니다. 터키인 친구와 함께 가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이거고 저거고 자신이 없다면 그냥 아이 쇼핑만 하거나 저렴한 기념품들을 구입하는 정도로 만족하는 것도 현명한 쇼핑 요령일 수 있습니다. 이곳은 그저 눈요기하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쏠쏠한 곳이니까요.

술탄아흐메트 지역은 참 혼잡하고 요란합니다. 이렇게 혼잡한 동네 한 구석에 조용하고 점잖게 서 있는 데데에펜디(Dedeefendi)의 존재가 특이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할아버님', '어르신'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데데에펜디는 평범한 고옥(古屋)의 이름입니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큰길에서 벗어나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조용하고 평범한 주택가들이 나오는데, 데데에펜디는 그 안에 있습니다. 예전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터키의 옛날 가정집을 통해서 터키의 주거 문화를, 즉 옛날 터키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곳입니다. 데데에펜디는 60여 평 정도의 이층 목조 주택으로, 아래층은 남성들의 공간, 위층은 여성들의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방 앞에 널찍하게 깔린 나무 마루며 좌식 구조로 이루어진 방 안 등은 우리나라 주택 구조와도 유사합니다. 입장료 천 원을 내면 직원이 각 방마다 차례로 안내하며 친절히 설명해 줍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그리 많지 않아서 평소에는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으로도 이용되고 있습니다.

술탄아흐메트 지역은 관광 유적지들의 집결지인 동시에 관광객들을 위한 편의시설의 집결지이기도 합니다. 큰길가에 죽 늘어선 여행사들에서는 터키 내의 각 지방 및 외국으로 가는 버스편, 국내외 각종 투어 프로그램들, 저렴한 할인 항공권 등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곳 여행사들을 통하면 터키 국내 여행 및 외국 여행을 저렴한 가격으로 편리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여행사마다 가격과 서비스 내용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다리품을 팔며 여러 군데 여행사를 돌아다니며 꼼꼼히 정보를 파악하여 비교하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이용했던 여행사 한 곳을 추천할까 합니다. 'Seven Student Travel Service'라는 곳인데, 다른 곳보다 가격도 저렴하고 서비스 질도 좋은 편이며 '부르주'라는 이름의 젊은 여직원이 고객의 요구에 맞춰 친절히 상담해 줍니다. 이곳의 이메일 주소는 mailto:7tepe@doruk.net.tr이고, 홈페이지는 www. ssts_tours.com입니다.

술탄아흐메트 지역에서 조심해야 할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사람 조심'입니다. 외국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곳에서는 이들을 상대로 하는 호객꾼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술탄아흐메트 거리를 걷다보면 여기저기서 접근해 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관광 가이드를 자처하기도 하고, '외국인에게 호기심이 많은 순진한 터키인 친구' 내지는 '외국인 손님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착한 사람', 혹은 '터키의 찬란한 문화 유적을 외국 관광객들에게 제대로 전달해야겠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애국 터키 청년' 등으로 자신들을 소개하며 외국 관광객들에게 영어로 말을 건네곤 합니다. 동양인에게는 일본어로 인사를 건네며 '동양에 관심이 많다.'는 둥 '너네 나라의 말을 배우고 싶다.'는 둥의 얘기를 하며 접근해 오기도 합니다. 괜찮은 현지인 친구를 사귀어서 우정도 쌓고 좋은 구경과 체험도 하고 여행 경비도 절약하게 되었다면야 문제될 게 없겠죠. 실제로 이곳에서 만난 사람으로부터 유용한 현지 정보를 얻고 도움을 받았다는 경우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지역은 꽤 오래 전부터 전문 '꾼'들이 극성을 부리는 곳으로 유명하고, 피해 사례(바가지를 썼다거나 절도를 당했다거나)도 끊임없이 보고되고 있으니, 모르는 사람이 유난히 관심을 보이고 친절을 베풀며 접근해 올 경우에는 일단 경계하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여성 여행자들의 경우에는 각별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일본 여자들이 터키로 건너와 '님도 보고 뽕도 딴다'는 식으로 난봉을 부리며 현지 물을 많이 흐려놓은 탓에 동양 여자들을 만만한 공략 대상으로 보는 경향이 있거든요. 이들을 퇴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관심입니다. 상대가 집요하게 말을 걸어오고 쫓아오더라도 대꾸하지 않고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대개는 제풀에 지쳐 가 버립니다. 적다 보니 마치 터키에는 사기꾼들이 득실거린다는 얘기처럼 되고 말았는데, 관광지에서의 '꾼'들의 문제는 비단 터키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지요. 사실 대부분의 터키 사람들은 순박하고 친절합니다. 저는 이런 착한 사람들 틈에 정말 극히 일부, 극소수의 '불량 감자들'도 섞여 있음을 잊지 말라고 노파심에서 지적하는 것입니다.

3 # 바다를 테마로 한 이스탄불 여행[ | ]

 

서울이 한강을 중심으로 강남과 강북으로 나뉘듯이 이스탄불은 보스포러스 해협이라는 바다를 중심으로 유럽 지역과 아시아 지역으로 나뉩니다. 터키가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있는 나라라는 사실은 알고 계시죠? 터키는 국토 중 97퍼센트가 아시아 대륙에 속해 있고 나머지 3퍼센트가 유럽 대륙에 속해 있습니다.

이스탄불 한가운데를 가르는 보스포러스 해협(Bosporus, 터키어로는 '보아즈 Bogazi')을 기준으로 동쪽은 아시아가 되고 서쪽은 유럽이 됩니다. 유럽 지역은 다시 골든 혼(Golden Horn, 터키어로는 '할리치 Halic')이라는 하구(河口)를 경계로 위쪽의 신시가지와 아래쪽의 구시가지로 구분됩니다. 2편에서 소개했던 술탄아흐메트 지역은 구시가지에 있습니다. 보스포러스 해협은 남쪽으로 마르마라 海(Marmara Denizi)와 이어집니다.

서울에서는 다리를 이용해서 한강을 건너지요. 보스포러스 해협에도 다리들이 있긴 하지만 이스탄불에서는 바다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널 때 배를 주로 이용합니다. 유럽 지역은 상업, 산업 중심 지역이고 아시아 지역은 주거 중심 지역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아시아 지역에서 유럽 지역으로 배를 타고 통근을 합니다. 이 때문에 바닷가 주변에는 배를 탈 수 있는 승선장들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대표적인 승선장들로는 유럽 지역의 에미노뉴(Eminonu), 베쉭타쉬(Besiktas), 카라쾨이(Karakoy), 아시아 지역의 위스큐다르(Uskudar), 카디쾨이(Kadikoy)가 있습니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오가는 배들을 터키 사람들은 '페리보트(feribot)', 혹은 '바푸르(vapur)', '데니즈 오토뷔스(deniz otobus)'라고 부릅니다. 우선 배 타는 법부터 안내를 하지요. 먼저 표부터 사야겠지요. 표는 승선장의 매표소에서 사면 됩니다. 매표소 앞에는 행선지와 요금 안내표가 붙어 있습니다. 규모가 큰 승선장의 경우에는 각 행선지 별로 매표소가 따로 따로 있습니다. 유럽에서 아시아로 혹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가는 배의 표 값은 우리 돈으로 700원 정도 합니다. (2000년 8월 기준) 표 형태는 토큰으로 된 것도 있고 회수권 형태로 된 것도 있습니다. 승선장에서는 여러 군데로 가는 배들이 있기 때문에 매표소에 붙여진 안내판 혹은 터미널 안의 전광판에 표시된 행선지 이름과 출발 시각을 확인하고 타야 합니다. 배들은 행선지 별로 보통 15분 간격으로 있습니다.

배들은 대개 이층으로 되어 있고 실내가 상당히 넓어서 한번에 많은 인원을 실어 나를 수 있습니다. 선실 밖 갑판 위에도 좌석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바다를 좀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이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가는데 드는 소요 시간은 불과 15분 남짓입니다. 배가 새하얀 물살을 가르며 새파란 바다를 씽씽 달릴 때의 기분은 정말 상쾌합니다.

승선장 터미널에서 정식으로 출발하는 커다란 배들 한옆으로 조그만 배들도 있습니다. 이 배들은 일종의 해상 마을 버스 아니 마을 배(?)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 미니 배들은 승선 인원이 차면 수시로 출발하며 요금은 배에 탄 뒤에 차장에게 내면 됩니다.

승선장에는 통근선뿐 아니라 보스포러스 해협의 멋진 경관들을 즐길 수 있는 관광선들도 있습니다. 관광선들은 부대 서비스 제공 정도에 따라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있고 소요 시간과 요금도 다양합니다. 배를 타고 한 시간 정도 보스포러스 해협을 돌며 이스탄불의 이곳저곳을 배 위에서 둘러보는 '기본' 프로그램의 경우에는 학생 요금이 이천 원 정도 합니다. 경관 좋은 해변가에 지어진 멋진 호텔들과 부자들의 고급 주택들과 별장들, 유명한 돌마바흐체 궁전, 군사 학교, 보스포러스 대교, 아나돌루 공원, 루멜리 성 등이 새파란 바다 위로 그림책 속의 풍경들처럼 멋지게 펼쳐집니다. 여름철 낮에는 햇볕이 강렬해서 자칫하면 피부 껍질이 벗겨질 수 있으니 긴소매 가디건 같은 것을 걸치는 게 좋습니다. 야간 투어도 있는데 화려한 조명들이 데커레이션 케이크 위에 꽂힌 촛불처럼 앙증맞게 반짝이는 이스탄불의 야경은 낮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보는 이를 매혹시킵니다.

보아즈 해변가에는 해산물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레스토랑들이 많이 있습니다. 1인당 1-2만원 정도면 옥외 테라스에서 바다를 바로 앞에 두고 싱싱한 생선요리를 풀 코스로 즐길 수 있습니다. 경관과 맛이 일품이니 짠돌이 짠순이 배낭여행자들도 돈 아깝다 생각하지 말고 한 번쯤 먹어보기를 권합니다.

아, 알뜰 배낭여행자들을 위한 정보를 한 가지 알려드리지요. 이스탄불 유럽 지역의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에미노뉴 승선장에는 술탄아흐메트 등지로 가는 전차를 탈 수 있는 전차역으로 가는 지하도가 있습니다. 이 지하도 내 상가에서는 싸구려 물건들을 많이 팝니다. 이곳 식당들에서는 라흐마준(lahmacun)이라는 터키식 미니 피자를 단돈 250원, 도네르케밥(doner kebap)이라는 고기 샌드위치를 500원에 팝니다. 또 해변가에서는 배에서 고등어를 바로 잡아 올려 기름에 튀겨 커다란 빵 사이에 끼운 맛있는 고등어 샌드위치를 천 원에 팝니다. 항상 사람들이 들끓는 승선장 주변에는 자연히 시장이 형성되게 마련이지요. 에미노뉴에는 이집트 바자(일명 양념 시장-Spice Bazaar, 터키어로는 '므스르 차르스스 Misir Carsisi')라는 시장이 있습니다. 먼젓번에 소개했던 그랜드 바자보다 규모가 작아서 아기자기한 맛이 있습니다. 이 시장의 뒤쪽에는 새, 고양이, 강아지. 닭 등 각종 애완동물 및 가축들을 파는 동물 시장과 화초, 씨앗들을 파는 원예 시장도 있습니다.

보스포러스 해협의 바닷물들이 아래로 흘러 내려간 마르마라 해에는 뷰육아다(Buyukada--'큰섬'이라는 뜻입니다), 헤이벨리 섬(Heybeliada) 등 조그만 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프린스 제도(Princes' Islands, 터키어로는 '크즐 아달라르 Kizil Adalar')라는 곳이 있습니다. 서울의 한강 위에 있는 섬 여의도는 빌딩의 숲이지만 이스탄불 바다 위의 섬들은 자연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아름다운 숲들과 멋진 해변, 예쁜 별장들이 아기자기하게 채워져 있는 이곳 섬들로 사람들은 소풍을 자주 옵니다. 사람들은 이곳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숲 속을 산책하고 풀밭에 앉아 점심을 먹으며 잠시나마 일상에서 벗어나 삶의 여유를 즐깁니다. 이곳으로 가는 배들은 에미노뉴의 선착장에서 탈 수 있습니다. 섬까지 가는 배삯은 삼천 원 정도이고 섬에 도착해서는 천 원 정도의 입장료를 또 내야 합니다. 이곳에서는 자동차가 다닐 수 없습니다. 섬의 공인(?)된 교통 수단은 자전거, 도보, 혹은 마차입니다. 마차라고 하니까 낭만적인 생각이 들겠지만 마차를 끄는 말들 덕분에 섬 안 여기저기서 말똥 냄새가 진동해서 후각이 예민한 분들은 상당히 괴로울 겁니다.

4 # 이스탄불의 명동 탁심 & 기타 관광 명소들[ | ]

우리 나라의 쇼핑 1번지는 명동이지요. 탁심(Taksim)은 터키의 명동에 해당되는 곳입니다. 탁심은 이스탄불 유럽 지역의 북쪽 신시가지에 위치해 있습니다. 탁심에 들어가는 입구의 광장에는 공화제 기념탑이 위용 당당하게 서 있습니다. 그곳을 지나 이스티클랼 거리 (Istiklal Caddesi)로 접어들면 각종 외국 유명 브랜드 옷가게들, 맥도널드, 버거킹 등 패스트푸드점, 선물 가게, 과자 가게, 영화관+서점+음반점 복합매장, 레스토랑, 바코(Vakko) 같은 고급 백화점 등이 줄줄이 나오고 조금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 오른쪽으로 꺽어 들어가면 소규모 수산 시장도 나옵니다. 탁심 거리는 쇼핑 나온 외국 관광객들과 터키 젊은이들로 언제나 북적입니다.

거리의 한가운데에는 전차 선로가 있습니다. 길을 걷다보면 간혹 뒤에서 짤랑짤랑 방울 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데 이는 곧 이 길로 전차가 통과하니 선로로부터 떨어져서 걸으라는 경보음입니다. 술탄아흐메트 지역의 구시가지를 달리는 전차들은 우리나라의 전철과 비슷하게 생긴데 반해 이곳 신시가지 탁심 지역을 달리는 전차는 19세기 풍으로 디자인되어 있고 차량도 한두 량에 불과하며 차문도 훵하니 뚫려 있어 교통 수단이라기 보다는 놀이공원의 코끼리 열차 같은 느낌을 줍니다. 운행 거리도 매우 짧습니다.

탁심은 외국 관광객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기 때문에 주변에는 고급 호텔들과 유흥업소들도 많습니다. 탁심 광장에 위치한 마르마라 호텔에서는 카지노를 즐길 수 있고 탁심 광장에 조금 못 미쳐서 자리잡은 힐튼 호텔 옆에는 관광 안내소가 있습니다. 터키의 관광 안내소는 우리 나라, 영국 등의 관광 안내소와 마찬가지로 간판에 'i'자가 커다랗게 쓰여져 있습니다. 최근에는 탁심을 찾아온 외국인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범죄들도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고 합니다. 친절을 가장하며 다가와서 술집으로 유인해 바가지를 씌운다든지 수면제를 탄 음료를 마시게 하고 돈을 갈취해 가는 사건들도 심심지 않게 발생합니다. 과거에는 남성 호객꾼들만 있었는데 요즘은 여성 호객꾼들도 등장하여 미인계를 이용하여 남성 관광객들을 유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낯선 사람이 유난히 친절한 태도를 보이면서 말을 걸어올 경우 대꾸하지 말고, 혼자서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가지 않는 등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탁심은 교통의 요지이기도 합니다. 이스탄불 각 지역으로 가는 버스들을 탈 수 있는 버스 터미널이 있고, 공항 버스도 다닙니다. 또한 항공사 사무실들과 러시아 대사관, 루마니아 대사관 등 외국 대사관들도 있습니다.

그 외에 이스탄블에서 가 볼만한 곳들:

  • 돌마바흐체 궁전(Dolmabahce Sarayi)
돌마바흐체 궁전은 보스포러스 해변가에 세워진 백색의 아름다운 대리석 궁전입니다. 탁심에서는 도보로도 갈 수 있습니다. 19세기 중반에 세워졌으며, 오스만 제국 후기의 술탄들과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가 이 궁전을 사용했습니다. 이곳의 방은 무려 285개나 되며 각각의 방들은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습니다. 특히 인상적인 볼거리들로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서 선물 받았다는 휘황찬란한 수정 샹들리에가 매달린 살롱, 오스만 제국 통치자의 생활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술탄의 침실과 욕실, 화장실, 터키의 국부(國父)로 추앙 받는 아타튀르크 대통령이 집무 도중 운명한 집무실과 빨간 보료 덮인 침실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궁전 한 옆에는 여인들의 거처였던 하렘이 따로 세워져 있습니다. 이곳의 어린이 방에는 오스만 제국의 어린 왕자, 공주들이 가지고 놀았을 앙증맞은 장난감들과 조그만 침대들이 놓여 있고, 벽에는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왕세자가 할례 받던 당시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궁전과 하렘을 모두 관람하는 티켓은 학생 할인 요금이 2,000원 정도입니다. 영어 및 터키어 가이드가 있어서 가이드의 인솔에 따라 각각의 방들을 둘러보고 설명을 들을 수 있으며 소요 시간은 한 시간 정도입니다. 가이드 투어가 끝나면 바로 나가지 말고 연못이 있는 아름다운 정원과 담 밖으로 보이는 푸른 보스포러스 바다를 잠시 둘러보기 바랍니다.
  • 루멜리 요새(Rumeli Hisari)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해안선을 따라 죽 걸어 내려가다 보면 에미르간 공원(Emirgan Parki)이라는 평화로운 장소가 있습니다. 주말이면 사람들이 자주 소풍을 나오는 곳이지요. 여기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루멜리 요새가 나옵니다. 아름다운 초록색 숲과 새파란 바다에 둘러싸인, 동화에 나옴직하게 예쁜 성(城) 모양을 하고 있는 이 석조 요새는 1452년에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계단을 타고 성 꼭대기로 올라가서 보게 되는 푸른 숲과 보스포러스 해협은 정말 그림처럼 예쁩니다. 이곳의 입장료는 무료입니다. 안에는 공연장도 있는데 유명 가수들의 콘서트가 자주 열립니다.
  • 이노뉴 스타디움(Inonu Stadyumu)
터키 사람들은 축구를 무지무지 좋아합니다. 축구 때문에 싸움도 일어나고 살인도 일어납니다. 이노뉴 스타디움은 터키의 유명 축구팀 베쉭타스 팀의 홈구장으로, 돌마바흐체 궁전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축구 경기 뿐 아니라 각종 공연들도 자주 벌어집니다.
  • 갈라타 탑(Galata Kulesi)
신시가와 구시가를 연결하는 갈라타 다리를 건너 신시가로 들어가 골목 안으로 들어가 언덕과 계단을 한참 올라가면 갈라타 탑이 나옵니다. 갈라타 탑은 1348년에 세워졌으며 높이는 62m입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망대로 올라가면 보스포러스와 골든 혼 일대를 조망해 볼 수 있습니다. 입장료는 삼천 원 정도입니다. 옥상 스카이라운지에는 카페와 나이트클럽이 있습니다.
  • 귤하네 공원(Gulhane Parki)
귤하네 공원은 톱카프 궁전 옆에 있습니다. 전차를 타면 귤하네 역에서 바로 하차할 수 있습니다. 아주 넓은 공원이며, 안에는 동물원도 있습니다.
  • 크즈 쿨레시(Kiz Kulesi)
크즈 쿨레시란 우리말로 소녀탑이라는 뜻입니다. 보스포러스 해협의 아시아 지역에 있는 작은 섬인 이 곳에는 등대가 있어서 이스탄불 항구의 입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12세기에 세워졌다가 18세기에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습니다. 옛날옛적 어느 임금님이 사랑하는 공주를 못된 마술사의 저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이곳에 공주의 거처를 지어주고 생활하게 했으나 결국 마법사의 저주로 공주를 잃게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크즈 쿨레시에는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 참르자(Camlica)
아시아 지역 보스포러스 교 부근의 언덕인 참르자는 서울의 남산 같은 곳입니다. 이스탄불에서 가장 높은 지역이기 때문에 전망을 둘러보기에 안성맞춤입니다. 이곳에는 TV 송신탑과 공원이 있으며 관광객들을 위한 마차도 운행하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아쉽지만 이스탄불 관광을 마치겠습니다. 사실 여기에 소개된 것말고도 이스탄불에는 볼거리가 무궁무진합니다. 나머지 볼거리들에 대해서는 다음에 또 소개할 기회가 있겠지요. 제 5편에서는 이스탄불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보는 '이스탄불의 지붕밑'을 스케치해 드리겠습니다. 기대해 주세요.

5 # 이스탄불의 지붕 밑[ | ]

하얀 칼라 달린 파란 재킷을 입고 등에는 빨간 가방을 메고 오른손에는 간식 가방을 든 초등학생들, 미니 스커트 교복에 배낭을 맨 깜찍한 여중고생들, 머릿수건을 쓰고 땅에까지 끌리는 외투처럼 긴 가운을 입고 장바구니를 든 아주머니들, 양복 차림에 서류 가방을 든 사무원들, 차 쟁반을 들고 배달 가는 찻집 아저씨들. 금발, 흑발, 갈색머리, 검은 눈, 갈색 눈, 초록 눈, 파란 눈. 다양한 외양을 지닌 사람들이 바삐 지나가는 인도 한쪽에서 행인들에게 휴대용 티슈를 팔던 꼬마 녀석은 외국인인 나를 보자 반색하며 달려들어 티슈를 내밀고는 "누나, 티슈 좀 사 주세요. 한 개에 150원밖에 안 해요."하고 애원합니다."몇 살이니?" "다섯 살이에요." 비정한 부모가 밥값 벌어 오라고 내보낸 것인지 혹은 앵벌이 조직에 유괴된 것이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고달픈 다섯 살 인생이군요. 저 꼬마애가 뙤약볕 아래 종일 티슈를 팔아 벌어온 돈으로 어른들아이의 부모 혹은 앵벌이 두목은 빵을 사먹고 차를 마시고 담배를 사 피우겠지요. 그런 생각으로 찜찜해하며 다섯 살배기에게 150원을 건네 주고 티슈를 받아들고서 몇 걸음을 떼는데 이번에는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남자애가 티슈를 내밀며 사달라고 애걸합니다. "누나, 이것 좀 사 주세요. 식구들이 빵 사먹을 돈도 없어요." 이런 식으로 매번 사 주면 곤란한데 하고 난감해하는 순간 웬 아저씨가 나타나더니 소년에게 "너, 이 녀석, 우리나라를 찾아온 외국인 손님에게 이게 무슨 경우냐? 옜다, 이 돈 받고 이 여자 분 귀찮게 해 드리지 마라."하고 꾸짖으며 150원을 쥐어 주고 사라집니다. 동전을 받아든 소년은 머쓱한 표정으로 저쪽으로 뛰어갑니다. 머쓱해지기는 나도 마찬가집니다. 계속 걸음을 옮깁니다.

환전소 앞 전광판에는 '$1=660,000TL'이라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한 달 전에는 1달러에 62만 리라였는데 그새 4만 리라가 더 올랐군요. 얼른 안으로 들어가 20달러를 13,200,000리라로 바꿨습니다.

환전소를 나오니 갑자기 케밥 냄새가 확 풍겨옵니다. 환전소 옆 식당의 콧수염 기른 아저씨가 문 앞에 서서 "부유룬 부유룬( 어서 옵쇼)"을 외쳐댑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점심을 못 먹었네요. 마침 저 앞에서 초록색 가운을 입은 청년이 손수레 가득 빵을 담아놓고 팔고 있습니다. 250원을 주고 도넛 모양으로 가운데 구멍이 뻥 뚫리고 겉에 참깨가 다닥다닥 붙은 시미트 빵을 사서 베어 물며 계속 걷습니다.

이윽고 횡단보도가 나옵니다. 신호등은 빨간색이지만 사람들은 조금도 거리낄 것 없이 획 건너갑니다. 그들을 따라 나도 얼른 횡단보도를 건너 버스 정류장까지 왔습니다. 버스 한 대가 멈춥니다. 열두 살 난 소년 차장이 앞문에 나와 서서 "메지데이쾨이, 쉬실리, 탁심, 에미노뉴 갑니다."하고 행선지를 외칩니다. 버스에 올라타서 차장에게 350원을 주고 안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습니다. 동양 여자가 타니 신기한지 다들 쳐다봅니다. 다음 정류장에서 할아버지가 올라탑니다. 맞은편 좌석에 앉아 있던 청년이 얼른 일어나 할아버지에게 자리를 양보합니다.

'삐리리' 조용하던 버스 안에서 느닷없이 핸드폰이 울립니다. 사람들은 다들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핸드폰 주인을 쳐다보며 '이보쇼, 버스 안에서 핸드폰 사용하는 건 금지돼 있는 것도 잊었소?'하고 소리지릅니다. 운전사도 핸드폰 주인에게 눈을 부라립니다. 얼굴이 홍당무가 된 핸드폰 주인은 황급히 다음 정류장에서 내립니다.

 

어느새 나도 내려야 할 정류장에 왔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길을 걷는데 저편에서 새하얀 양복 차림에 깃털 장식 달린 가운을 등에 두르고 깃털과 금박줄, 구슬이 달린 흰 모자를 쓰고 왕자처럼 성장(盛裝)한 어린 소년이 엄마 손을 잡고 걸어오고 있습니다. 할례(이슬람교도 남성들이 종교 관례의 하나로 받는 포경 수술)를 받은 모양이군요. 오늘 저녁때는 소년의 집으로 친척들이 멋진 장난감과 금을 선물로 사들고 찾아와서 소년을 위한 잔치를 열어 주겠지요.

스포츠 센터 운동장에서 미래의 하칸 슈큐르를 꿈꾸며 축구공을 날리는 터키의 슛돌이들을 바라보며 운동장 철조망을 옆에 끼고 계속 걸어가던 중 누군가 따라오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려보니 웬 총각이 옆에 서 있네요. "헬로우, 웨어 아 유 프롬?" "난 한국 사람인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아, 우리말 할 줄 아는군요. 당신 참 예쁘군요. 당신하고 친구하고 싶어요. 어디 들어가서 차나 한 잔 하지요" 음, 녀석, 예쁜 건 또 알아 가지고. (앗, 여러분. 죄송!) 한국에서는 좀처럼 들어 보기 힘든 예쁘다는 아첨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으나, 안 되지, 지조 있는 한국 여인으로서 절개를 지켜야지. "아니요, 됐어요. 난 지금 아주 바빠요." "아, 나를 못 믿나 본데 난 컴퓨터 회사에서 일하는 전문 프로그래머예요. 나쁜 사람 아니에요. 딱 5분만. 그냥 차나 한 잔 마셔요." "아니, 됐다니까요." "당신, 어디서 살아요? 전화번호 좀 알려주세요." "이봐요. 난 원래 외간남자와 얘기하지 않아요." "아니, 당신은 왜 남자와 얘기하는 걸 싫어합니까? 난 예쁜 여자들과 얘기하는 걸 아주 좋아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원래 여자들이 외간 남자들과 함부로 얘기하질 않아요." (아, 이런 거짓말을) "그러면 내 전화번호를 적어 줄 테니 다음에 이리로 꼭 전화 줘요."

전화번호 적힌 쪽지를 받아들고 간신히 총각을 쫓아내고 진땀을 닦으며 상가들이 죽 늘어선 시장 골목으로 들어가니 가게 주인들과 점원들이 일은 않고 가게 밖에 의자들을 내놓고 앉아서 수다를 떨다가 저쪽에서 걸어오는 나를 보자 "일본 여자다."하고 수군덕거리며 뚫어져라 쳐다봅니다. 동양 여자로서 터키에서 지내다 보니 인기 스타의 심정, 하 이건 너무 과하고, 동물원 원숭이의 심정을 이해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빵집으로 들어가 막 구워서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팔뚝만한 빵 두 개를 100원에 산 다음 그 앞 과일장수 아저씨한테서 큼지막한 수박 한 개를 1500원 주고 사고, 복숭아 한 무더기를 600원 주고 샀습니다. 서둘러 골목으로 들어왔는데 어제 이사를 한지라 아직 길이 낯설어 영 집을 못 찾겠군요. 아무래도 이 골목이 아닌 것 같습니다. 골목에서는 초등학생들이 포케몬 카드를 꺼내놓고 놀고 있습니다. "얘들아, 메르디벤 골목이 어디지?" 한 녀석이 쓱 앞으로 나오더니 제법 의젓하게 말을 하네요. "제가 길 알아요. 안내해 드릴게요. 따라 오세요. 터키에 처음 오셨나요? 터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제 이름은 메흐메트라고 하고 초등학교 2학년이에요. 이쪽은 제 친구 알리에요."

꼬마 애들 덕분에 무사히 아파트 입구까지 와서 열쇠로 아파트 현관문을 딴 다음 계단을 올라가기 위해 전등 스위치를 누르니 불이 안 켜집니다. 오늘도 또 정전이 됐나 보네요. 이따 여덟 시에 TV 드라마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전기가 들어와야 될텐데요. 손으로 벽을 더듬으며 계단을 올라가 8호 문을 열쇠로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때마침 골목에서 경쾌한 '아이가스' 노래가 흘러나와 같이 따라 불렀습니다. ('아이가스'란 가정용 LPG가스의 상표명으로, 트럭에 가스통을 싣고 하루에 수 차례씩 CM송을 틀며 골목을 순회하면서 가스가 떨어진 집에 배달을 해 줍니다.) 매일같이 듣다보니 이제는 골목에서 '아이가스' 노래가 나오면 저절로 따라 부르게 됩니다.

다행히 전기는 곧 들어왔습니다. 급히 터키어 숙제를 한 뒤, 집주인 아주머니와 함께 밥과 당근 샐러드, 닭고기, 아이란(요구르트를 희석시킨 음료)으로 저녁을 먹고 TV를 보며 소주잔 같이 조그만 터키식 찻잔에 차를 따라 연거푸 네댓 잔을 마시며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나누다 보니 어느덧 밖에서 밤 기도 시간임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슬람 신자인 주인 아주머니는 오늘 하루도 일용할 양식을 내려 주시고 무사히 지낼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립니다. 이스탄불의 지붕 밑에서 보낸 오늘 하루도 또 저물어가는군요.

6 # 카파도키아 여행기[ | ]

6.1 # 카파도키아는 어디에?![ | ]

"카파도키아에 가겠다고? 그게 어디 있는 건데?" 이번 주말에 카파도키아를 여행하기로 했다는 나의 말에 터키인 집주인은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세상에, 자기네 나라 지명도 모르다니, 더우기 이 나라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유명한 관광지를. 이런, 무식한…이라고 속으로 비웃으며 터키 지도를 펼쳐보니…아니, 이게 웬일입니까? 눈을 씻고 찾아봐도 터키 지도에는 '카파도키아'라는 지명을 지닌 도시가 찾아지지 않습니다.

카파도키아는 터키에 없나? 하긴 생각해 보니 'Cappadocia'라는 철자도 터키어식 표기법이 아닙니다. 터키어에서 'c'는 우리말의 'ㅈ'발음입니다. 그러나 지도에는 '잡파도지아'라는 곳도 없습니다.

이스탄불, 파묵칼레와 더불어 터키의 3대 관광지로 꼽히는 카파도키아는 옛 로마 시대 때의 지명에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옛날 고려가 오늘날 '코리아'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흔히 '카파도키아'로 알려져 있는 지역은 '괴뢰메(Goreme)', '네브쉐히르(Nevsehir)', '위르귭(Urgup)' 등의 도시를 중심으로 펼쳐진 터키 중부 아나톨리아 고원의 기암 지대입니다.

카파도키아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기기묘묘한 바위들과 협곡, 봉우리들, 기독교 박해 시대에 숨어든 기독교도들에 의해 건설된 동굴 교회, 지하도시 등이 들어차 있는, '자연의 경이(Natural Wonders)'를 그대로 보여주는 지역입니다.

카파도키아는 지역이 넓고 지형이 험준하기 때문에 개인 여행보다는 여행사의 관광상품을 이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스탄불 술탄아흐메트 지역의 모든 여행사들에서는 카파도키아 관광상품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괴뢰메나 네브쉐히르, 위르귭 등으로 버스를 타고 직접 가서 현지의 여행사에서 관광 안내 신청을 할 수도 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저의 카파도키아 여행기가 시작됩니다.

이스탄불의 주요 관광지를 둘러본 뒤 지방 여행을 계획한 저는 첫 지방 여행지로 카파도키아를 택했습니다. 카파도키아 여행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우선 술탄아흐메트의 여행사를 찾았습니다. 본 코너 제2편에서도 얘기했지만 술탄아흐메트 거리 대로변에는 여행사들이 죽 늘어서 있습니다. 각 여행사들의 유리창에는 어김없이 카파도키아 관광 상품 안내지가 붙어 있습니다. 어느 여행사의 상품이 가격이 저렴하고 프로그램이 충실할까 고개를 갸웃거리다 일단 제일 가까이에 있는 여행사로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여행사 직원은 외국인인 나를 보자 "헬로우, 메이 아이 헬프 유?"하고 영어로 말을 건넵니다. 아직 서툰 터키어 실력이지만 그래도 현지 물을 몇 주일 먹으니까 나의 입에서는 이제 영어 대신 터키어가 먼저 튀어나옵니다.

6.2 # 여행사에서[ | ]

"음, 저…카파도키아 여행에 관한 정보를 얻고 싶은데요."

"아! 터키 말을 할 줄 아는군요. 이리 앉으세요. 제가 자세히 설명해 드리지요"

여행사 직원은 팜플렛을 보여주며 카파도키아 관광 상품을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 평일에는 터키어 학교에서 수업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여행이 가능한 시간은 주말뿐입니다. 이러한 사정을 여행사 직원에게 얘기하자 직원은 금요일 저녁에 이스탄불에서 밤버스를 타고 토요일 아침에 카파도키아에 도착하여 토요일, 일요일간 관광을 하고 일요일 밤에 버스를 타고 월요일 아침에 이스탄불에 도착하는 이틀 짜리 프로그램을 제시합니다. 이스탄불-카파도키아간의 왕복 교통편, 카파도키아 지역에서의 호텔 1박 숙박, 이틀 간의 가이드 관광, 현지에서의 입장료, 중식 2회를 포함한 가격이 200달러라는군요. 그 정도면 적당한 가격인지 아니면 비싼 가격인지 판단이 안 섭니다.

"저는 학생인데요. (하하, 사실 한국에서 학교를 졸업한지는 꽤 되었지만, 이곳 터키에서는 터키어를 배우는 '학생'이니까요.) 학생 할인은 안 되나요?"

"아, 그래요? 그렇다면 학생 할인을 적용시켜 드려야죠. 더욱이 터키어도 잘 하시니까 특별히 파격적으로 깍아드려서 180달러로 해 드리죠. 아주 저렴한 가격입니다. 별 세 개 짜리 고급 호텔에 묵게 되는 것을 감안해 볼 때……."

"저는 학생이라 돈이 많지 않아요. 더 싼 숙소에서 묵는다면 가격이 더 낮아질까요?"

"음, 그렇다면…시설이야 호텔만 못하지만 펜션(터키에서 펜션은 호텔보다 시설이 한 단계 낮고 가격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숙박시설을 가리킵니다)에서 묵으실 경우 140달러에 가능합니다."

아무래도 다른 곳과 가격을 비교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곳을 나와 다른 여행사들 대여섯 군데를 더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곳들 역시 첫 번째 여행사의 것과 대동소이한 프로그램들을 제시하고 가격 역시 비슷비슷합니다. '에이, 아무 곳에서나 신청해야겠다. 마지막으로 저 곳에 한 번 들어가 볼까.'하면서 들어간 여행사는 'Seven Student Travel' 여행사였습니다. 안내 데스크에 앉아있는 여직원에게 주말 카파도키아 여행상품의 가격을 묻자 내게 학생이냐고 묻습니다. 그렇다고 하니까, 여직원은 110달러라고 대답합니다. 여태껏 들은 가격 중에 제일 저렴한 가격입니다. 여직원은 설명을 덧붙입니다. "이 가격에는 이스탄불-카파도키아 간의 왕복버스비와 카파도키아 현지의 별 세개짜리 호텔에서의 1박 숙박비, 가이드 관광비용. 관광시설 입장료, 토요일 중식, 석식 및 일요일 조식, 중식이 포함되어 있어요." 가격면으로 보나 서비스 내용면으로 보나 이 여행사의 프로그램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경제적일 듯 싶습니다. 더욱이 앞서 여행사 직원들의 호들갑스러운 태도와는 달리 시원시원한 이곳 여직원의 태도도 마음에 듭니다.

"좋아요. 신청하겠어요. 다음 주말에 가는 것으로 접수해 주시고요. 돈은 언제까지 내면 되지요?"

"출발하기 3일 전까지요. 다음 주 금요일 저녁에 출발할 테니까, 다음 주 수요일까지 내 주세요. 그러고 나서 다음 주 금요일 저녁 일곱 시까지 이 사무실 앞으로 오세요. 이 앞에서 무료 셔틀버스가 버스 터미널까지 태워다 줄 거예요."

6.3 # 여행 준비[ | ]

그 다음 주 수요일, 여행사에 가서 110달러를 내니, 여행사 직원은 버스표 예약증을 끊어주고, 카파도키아에서 묵을 호텔과 관광 안내를 해 줄 현지 여행사 이름이 적힌 종이를 줍니다 카파도키아 현지에 도착하면 버스 도착 시간에 맞춰 그곳 버스 터미널에 현지 여행사 직원이 내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합니다.

드디어 금요일이 왔습니다. 오후 2시에 학교 수업이 끝나자 마자 허둥지둥 집으로 뛰어와 배낭 안에 들어있는 터키어 교재들과 사전들을 쏟아내고, 안에 여행용품을 챙겨 넣었습니다. ―이틀 간 갈아입을 속옷, 양말, 티셔츠, 치약, 칫솔, 조그만 휴대용 수건, (샴푸, 비누, 큰 수건은 호텔에 비치되어 있을 테니까 생략하고요) 휴대용 화장품, 여행 안내서, 항상 가지고 다니는 <영어-터키어/터키어-영어>미니사전, 카메라, 선글라스, 볼펜, 수첩, 지갑, 그리고 숙제장(주말에는 숙제가 많답니다), 휴대용 티슈, 손수건, 비상식량으로 초코바 1개, 버스 안에서 읽을 잡지 한 권, 그리고 일기장―'음, 이 정도면 되겠지.'

배낭을 둘러매고 집을 나섰습니다. 술탄아흐메트 거리에 도착하니 여섯 시입니다. 일곱 시까지는 아직 시간이 충분합니다. 인근의 맥도널드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터키어 숙제를 하다가 일곱 시 5분 전에 나와 딱 일곱 시에 여행사 앞에 가보니, 아악, 이럴 수가! 여행사는 셔터가 내려져 있고, 앞에는 셔틀버스 비슷하게 생긴 것조차 서 있지 않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돈은 이미 다 치렀는데.

얼굴에서 핏기가 막 가시는 찰나 저 앞에서 여행사 여직원이 짠하고 나타납니다.

"늦었군요. 버스는 당신을 기다리다가 가버렸어요. 나도 문닫고 이제 막 퇴근하려던 참이었어요."

"아니, 뭐라고요? 지금이 딱 일곱 시인데, 돈도 이미 치렀는데……."

내가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자 여직원이 급히 말을 잇습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버스는 곧 다시 올 거예요. 아, 저기 운전사가 오네요"

과연 셔틀버스 운전사가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여행사 여직원은 미소를 지으며 "여행 잘 다녀와요."하고 손을 흔듭니다. 운전사는 한 쪽에 정차해 둔 미니버스로 나를 데리고 갑니다. 버스에 오르니 안에는 부자(父子)지간으로 보이는 터키인 아저씨와 아들, 그리고 젊은 동양 여자 한 명이 이미 타 있습니다. 버스는 한참을 달려 고속버스 터미널인 오토가르(Otogar)에 섭니다.

6.4 # 버스를 타고[ | ]

오토가르는 매표소가 한 곳에 있는 우리나라의 고속버스 터미널과는 달리 각 버스 회사들의 사무실들이 죽 늘어서 있고, 승객은 그곳에 있는 수많은 버스 회사들 가운데 자신이 가고자하는 행선지가 있는 곳을 골라 버스 회사 사무실에서 표를 사서 해당 버스에 타게 되어 있습니다. 각 버스 회사들은 보다 많은 승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터미널까지 무료 셔틀버스를 운행하곤 합니다.

내가 타고 온 셔틀버스의 운전사는 동양 여자?나를 자기네 버스 회사 사무실로 데리고 가더니 이스탄불-카파도키아 간의 왕복버스표를 줍니다. 그리고는 버스 출발 시각까지 여유가 좀 있으니 사무실 위층의 휴게실에서 기다리라고 합니다. 휴게실에는 의자들과 TV, 신문 등이 비치되어 있습니다. 휴게실 한쪽에서 아주머니가 나오더니 동양 여자와 나에게 차를 가져다 줍니다.

함께 차를 마시며 옆자리의 동양 여자가 영어로 말을 걸어옵니다.

"나는 일본 여잔데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니?"

"응, 나는 한국 사람이고, 지금 이스탄불에서 터키어를 공부하고 있어. 너는 터키에 어떻게 왔니?"

올해 대학을 졸업했다는 일본 여자는 직장에 매이게 되기 전에 여행을 즐기기 위해 삼 개월 전에 여행길에 나섰다며 그간 인도, 네팔, 동남아시아, 유럽을 돌고 닷새 전에 그리스에서 마지막 여행지인 터키로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닷새 동안 이스탄불을 관광한 뒤 카파도키아 여행에 오른 길이었습니다.

밤 아홉 시경이 되자 셔틀버스 운전사가 우리에게 다가와 버스가 왔다고 알려줍니다. 휴게실 밖으로 나와 버스에 올라탄 뒤 아까 받았던 버스표에서 좌석 번호를 확인하여 자리를 찾아 앉았습니다. 일본 여자와 나는 나란히 앉았습니다. 사람들은 동양 여자들인 우리를 신기한 듯이 쳐다봅니다.

승객들이 다 자리에 올라탄 뒤 버스가 출발하자 버스 차장은 환영의 뜻으로 승객들의 손에 레몬향 코롱을 뿌려준 뒤 생수를 한 컵씩 나눠줍니다.

물을 받아든 일본 여자가 "여행 안내서에 따르면 승객들에게 커피, 주스, 과자 등을 나눠준다는데 이 버스는 물밖에 안 주네."하며 투덜거리는데, 어느새 차장이 승객들에게 커피와 차, 과자 등을 나눠주기 시작합니다.

처음 하는 지방 여행이라 가슴도 설레고 처음 타보는 터키의 장거리 여행버스가 신기하여 처음 얼마간은 창밖을 열심히 바라보았지만 밤 시간이라 밖이 깜깜하여 눈에 보이는 게 별로 없더군요. 옆자리를 보니 일본 여자는 큼지막한 선글라스를 낀 채 수면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가지고 온 잡지를 잠시 읽고 일기를 쓴 뒤 나도 자야겠다는 생각에 눈을 감았습니다. 버스 안의 조명도 몇 개만 남기고 모두 꺼집니다.

6.5 # 카파도키아를 향하여[ | ]

터키의 고속버스는 우리나라의 고속버스와 비슷한 형태이지만 승차감은 더 좋습니다. 하지만 그래봤자 버스 좌석이니 침대 위에 누웠을 때처럼 편히 잠이 오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에어컨이 계속 가동되어 처음에는 시원하고 좋았지만 나중에는 으실으실 추워집니다. '아이고, 추워라. 긴소매 카디건을 하나 가져왔어야 되는 건데…….' 이런 상태로 내일 아침까지 열두 시간을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고 생각을 하니 조금 걱정됩니다.

간신히 잠이 들락했는데 버스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조명이 켜집니다. 휴게소에 도착한 겁니다. 터키의 장거리 여행버스들은 두서너 시간마다 한 번씩 휴게소에서 20분간 정차합니다. 그 동안에 승객들은 화장실을 다녀오고 요기를 하고 맑은 공기를 들이마십니다.

터키 휴게소의 화장실들은 대부분이 유료입니다. 금액은 우리 돈으로 2, 3백원 정도 합니다. 큰돈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고속버스 휴게소 화장실이 무료인 것을 생각하면 이것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만 원활한 여정을 위해서는 화장실에 안 들를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화장실 앞에는 돈을 받는 사람들이 앉아 있고, 그들 앞에는 휴지와 레몬향 코롱도 놓여 있어 원하는 만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화장실 문을 열어보니 화장실 내부가 희한합니다. 일반 양변기가 아니라 쭈그리고 앉아 일을 보게 되어 있는 변기가 달려 있는데, 우리나라의 재래식 변기처럼 밑으로 구멍이 완전히 뻥 뚫려 있는 게 아니라 뒤쪽으로만 조그마한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물을 내리는 손잡이도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수도꼭지와 조그만 물통이 놓여져 있습니다. 일을 본 뒤 물통에 물을 받아서 변기에 흘려 보내라는 것 같습니다. 터키에서 지낸 지 한 달여 되었지만 제가 지내는 집은 일반 양변기가 설치되어 있어 이런 식의 터키식 화장실을 사용할 기회가 없었던지라 처음 사용할 때는 좀 당혹스럽더군요.

자다 깨다 하며 버스에서 밤을 보내고 어느덧 다음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밤새 달려온 버스는 어느 곳에선가 멈춰 섰습니다. 승객들중 일부가 내렸습니다. 갑자기 불안해집니다. 생각해 보니 내가 내려야 할 곳의 정확한 지명을 확인하지 않은 겁니다. 카파도키아에 가겠다고 이 버스에 타기는 했지만 전술했다시피 카파도키아에 가기 위해서는 괴뢰메나 네브쉐히르 혹은 위르귭에서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묵을 호텔과 가이드를 해 줄 여행사가 이 세 도시 중 어느 곳에 위치한 것인지를 사전에 확인하지 않았던 겁니다. 호텔 이름과 여행사 이름이 적힌 종이가 있긴 하지만 거기에는 그것들이 어느 지역에 있다는 것은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내 얼굴에서 당황하는 기색을 읽었는지 버스 차장이 우리 좌석으로 오더니 버스표를 보여달라고 합니다. 버스표에는 내려야 할 곳의 이름이 적혀져 있거든요. 버스 차장은 다음 정류장인 괴뢰메에서 내리라고 알려 줍니다. 드디어 괴뢰메 도착. 버스 터미널에는 호텔 및 여행사들의 호객꾼들이 여러 명 진을 치고 있다가 관광객을 보면 달려들어 서로 자기네 호텔을 혹은 여행사를 이용하라고 잡아끕니다. 호텔과 여행사를 미리 예약해 놓은 나와는 달리 버스 차편만을 예약했던 일본 여자애는 그중 한 호객꾼을 따라가며 내게 '안녕!'하고 인사를 보냅니다.

6.6 # 미아가 되다[ | ]

호객꾼들 사이를 지나며 내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있을 사람을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습니다. 이윽고 버스에서 내린 승객들도 호객꾼들도 다 사라지고, 조그만 지방 도시 버스 터미널 마당에는 이제 나밖에 안 남았습니다.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현지의 호텔과 여행사의 이름이야 알지만 전화번호를 모르니 전화를 걸 수도 없고, 천상 이번 여행을 신청했던 이스탄불의 세븐 스튜던트 트래블 여행사에 전화를 걸어야 될 것 같은데 지금 시간이 아침 여덟 시니 직원들은 아직 출근 전일 것이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으려니 웬 할아버지가 다가와 영어로 말을 건넵니다.

"관광객이로군. 이쪽 관광안내소로 들어오시구려."

그러고 보니 터미널 옆에는 관광안내소가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관광 안내소의 관리책임자이셨습니다. 할아버지에게 정황을 설명하며 현지의 호텔과 여행사 이름이 적힌 종이를 보여드렸습니다. 그것을 보신 할아버지가 고개를 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잘못 내렸구먼. 이곳에는 이런 이름의 호텔과 여행사가 없어."

'Aman Allahim!(=오 마이 갓!=하나님 맙소사!)' 처음으로 떠난 여행길에 초장부터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이 일을 어쩌나. 낯선 곳에서 미아 신세가 되는 건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곳에 그런 이름의 여행사와 호텔이 없다는 게 확실한가요?"하고 할아버지께 묻자 할아버지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곳 괴뢰메 관광 안내소에서 수십년간 일해왔어. 괴뢰메에 있는 여행사와 호텔 이름은 줄줄 꿰고 있는데. 이곳에는 확실히 그런 이름의 여행사와 호텔이 없어."

내 얼굴에 빗금이 좍좍 그어지는 것을 보신 안내소 할아버지는 "걱정하지 마. 괴뢰메에 없으면 필경 위르귭에 있을 거야.내가 그곳 안내소에 전화 걸어서 연락을 취해볼 테니 걱정하지 말고, 일단 사무실에 들어가 있게나."하며 나를 안심시키며 사무실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여기저기로 전화를 몇 번 거시더니 잠시 뒤 "위르귭의 여행사에 전화해서 차 가지고 이리로 오라고 했으니 곧 올게야."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다소 마음이 놓였습니다. "고맙습니다."하고 인사를 드리니, 할아버지는 "아니, 그러고 보니 터키 말을 할 줄 아는구먼."하며 놀라는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할아버지께 내가 한국에서 터키어를 배우러 한 달 전에 이스탄불에 왔다는 사실을 설명 드리자, 할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이스탄불이라, 대도시는 크고 화려해 보이지만 너무 복잡하고 각박하고 사람들 사이의 정도 없어. 나도 그곳에서 몇 년 살아봤지만 영 정이 안 가더라구, 결국 이렇게 고향으로 되돌아왔지."

"할아버지는 괴뢰메가 고향이시군요?"

"응, 나는 이곳 토박이야. 이곳에서 태어나서 자라나 결혼해서 자식 낳고 일하면서 이렇게 지금까지 쭉 살아왔지. 나는 이곳 괴뢰메가 좋아. 정말 정 많고 아름다운 곳이지. 관광객들이 들끓어서 좀 정신 없긴 하지만 이곳이 좋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안내해 주는 일을 하고 있으니 그 또한 보람 있는 일이지."

'알리'라는 이름의 이 할아버지는 새벽 다섯 시부터 오전 아홉시까지 다시 오후 두 시부터 저녁까지 관광안내소를 지키며 괴뢰메를 찾는 관광객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외국인 관광객 여러 명이 사무실에 들어왔고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지도를 나눠주기도 하고 관광객들의 요구 조건에 맞는 호텔과 여행사 정보를 알려주고 친절히 길 안내를 해주셨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땅을 사랑하며 그 땅을 지키고 가꾸고 알리는 일을 열심히 해나가는 알리 할아버지의 모습은 절로 존경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윽고 할아버지가 다음 근무자와 임무를 교대하는 아홉 시경 원래 예약되어 있던 위르귭의 여행사 직원과 운전사가 미니버스를 몰고 괴뢰메 관광안내소에 당도했습니다. 고마우신 알리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린 뒤 나는 여행사의 미니버스를 타고 위르귭으로 향했습니다.

6.7 # 텔레비전 없는 별 세 개 짜리 호텔[ | ]

여행사 직원과 운전사로부터 "네가 띨띨해서 우릴 번거롭게 했구나."하는 책망이라도 행여 듣지 않을까 약간 걱정했으나 다행히 그들은 전혀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고 (음, 허긴 손님은 "王"이잖아요) 오히려 터키 말을 할 줄 아는 외국인을 보기는 처음이라며 반가워했습니다.

미니버스를 타고 30여 분 달렸을까. 버스는 위르귭의 한 호텔 앞에 당도했습니다. 여행사 직원과 운전사는 30분 뒤에 호텔 로비에서 다시 픽업하겠다며 돌아갔습니다.

호텔 직원에게서 열쇠를 건네 받고 방문을 연 순간 나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분명 별 세 개 짜리 호텔이라고 얘기를 들었는데 그 '별'이란 것은 그냥 예쁘라고 갖다 붙인 장식물에 불과한 것인지 객실의 실내장식과 설비는 지극히 '수수한' 수준이었습니다. 방에는 텔레비전조차 없었습니다. 프론트에 비치된 팜플렛 안에 실린 객실 사진에는 분명 텔레비전이 있었는데. 나는 즉시 프론트로 달려갔습니다.

"이것 보세요. 객실에 텔레비전이 없잖아요."

"우리 호텔의 객실에는 원래 텔레비전이 없어요."

"그렇다면 이 팜플렛에 실린 객실 사진 속에는 어째서 텔레비전이 있지요?"

"……. 텔레비전 갖다 드리도록 할게요."

겨우 하룻밤 묵을 건데 까다롭게 굴고 싶지는 않았지만 또 내가 텔레비전 앞에만 붙어사는 '테순이'도 아니지만 (사실 저는 한국에서는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아요) 외국에 나가면 '말을 배운다'는 핑계 하에 텔레비전을 많이 보는 편이랍니다. 때문에 텔레비전 없는 객실을 보는 순간 앙꼬 없는 호빵을 보는 것처럼 실망했던 것이지요.

객실로 돌아온 나는 급히 샤워를 하고 호텔 로비로 나왔습니다. 로비에는 여행사의 운전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를 따라 미니버스에 올라타니 차 안에는 오늘과 내일 이틀 간 함께 카파도키아 여행을 할 일행들이 있었습니다. 터키인 젊은 남녀 한 쌍과 미국 여자와 이집트계 영국 남자 커플 한 쌍, 현지 안내원과 운전사, 그리고 나 이렇게 일곱 사람이 탄 9인승 미니버스는 드디어 카파도키아 여행의 첫 행선지를 향해 부릉부릉 바퀴를 굴렸습니다.

6.8 # 기암 도시에서의 첫 날[ | ]

 

부릉부릉 달리던 미니버스는 한참 산골짝을 오르더니 어느 골짜기 위 탁 트인 벌판 위에서 멈추고는 우리더러 차에서 내리라고 합니다. 우리가 차에서 내리자 가이드는 유창한 영어와 영어보다 더 유창한 터키어로 자기 소개를 합니다. 이틀 간 우리들의 카파도키아 관광을 책임질 가이드의 이름은 아흐메트. 이즈미르에서 대학에 다닌다는 그는 방학이면 고향인 위르귭에서 관광 가이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습니다. 아흐메트는 터키에서는 보기 드문 장발족 총각입니다. 길다란 까만 곱슬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그의 모습은 헤비메틀(그 중에서도 고딕 메틀) 밴드의 드러머를 연상시킵니다. 자기 소개를 마친 아흐메트가 말했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보세요."

저 아래로 카파도키아의 구릉지형이 쫙 펼쳐져 있습니다. 적황색 땅 위로 드문드문 초록색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사이사이에 민가들이 있습니다. 지면에는 괴상한 구멍이 뻥뻥 뚫려있고 희한한 모양의 봉우리, 언덕, 기암들이 주변을 그로테스크하게 장식하고 있습니다.

'음, 이곳이 카파도키아란 말이지.'

카파도키아의 조감도를 확인한 우리들은 다시 차에 올라타 두 번째 행선지 '지하 도시'로 향했습니다. 초기 기독교 시절 기독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 지하의 동굴에 거주를 했노라고 아흐메트는 설명해 주었습니다. 박해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피신처였던 만큼 외부 세력으로부터의 보안에 신경을 써 꼭꼭 숨어든 채 미로처럼 얽혀있는 이 지하 도시는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면적도 상당히 넓고 내부는 주거공간, 취사공간, 저장공간, 예배 공간 등이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숨바꼭질을 하듯 요리조리 미로를 거쳐 지하도시로부터 빠져나온 우리는 점심식사를 위해 어느 식당의 야외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아침 식사도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여간 배가 고프지가 않습니다. '음, 뭘 먹을까?' 메뉴판을 펼치니 터키 요리의 대표격인 케밥 요리며 동그랑땡 고기완자 쾨프테, 뜨거운 뚝배기 속에서 지글지글 끓어대는 규베치 요리 등이 서로 먹어달라고 아우성입니다. 잠시 망설이다 메인요리로는 꼬치구이 고기요리인 쉬쉬케밥을, 음료로는 요구르트에 소금과 물을 넣은 아이란을 주문한 뒤, 식탁에 함께 앉은 여행단 일행과 그제서야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눴습니다.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미국 여자 크리스와 이십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이집트계 영국 남자 샘은 무척 다정해 보여서 오래 전부터 알고지내온 연인 사이로 알았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각자 유럽 여행을 하던 중에 그리스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터키로 여행온 것이라고 합니다. 터키 여자 세르필은 스물다섯 살로 콘야 인근의 작은 도시의 병원에서 수술실 간호사로 일한다고 합니다. 자그마한 체격에 까만 머리, 반짝반짝 빛나는 녹갈색 눈, 얼굴 가득 담은 상냥한 미소가 퍽 예쁩니다. 그녀의 파트너인 터키 남자 에부는 스물한 살로 직업은 세르필과 마찬가지로 간호사. 에부 역시 까만 머리에 자그마한 체격, 상냥한 미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정하고 친근한 느낌을 주는 세르필-에부 커플과는 대조적으로 크리스-샘 커플은 퍽 도도한 느낌을 줍니다. 크리스와 샘은 자기네들끼리만 웃고 떠들어댈 뿐 우리에게는 한 마디 말조차 건네지 않습니다. 하긴 터키인인 세르필과 에부는 영어를 잘 못하고, 크리스와 샘은 터키어를 모르니 의사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질 수야 없겠지만, 크리스와 샘의 태도에서 제3세계에 대한 서구인들의 우월적 태도를 느꼈다면 제3세계인으로서의 지나친 피해의식일까요?

잠시 뒤 테이블로 식사가 착착 날라왔습니다. 수프, 샐러드, 쉬쉬케밥, 빵, 밥, 아이란 등을 배불리 먹은 뒤 후식으로 수박까지 해치우고 나서 식후경, 아흐메트가 주변 동네를 둘러보라고 합니다.

식당 주변을 둘러보니 저만치 앞에 사진으로만 봤던 암굴촌(暗窟村)이 보입니다. 아흐메트의 말에 따르면 그곳에 실제로 사람이 산다는 겁니다. 세르필, 에부와 함께 동네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멀리서 보기에는 신기한 동굴 주택 같았는데 실제로 동네 안으로 들어와서 보니 우리나라의 예전 시골 마을 풍경과 비슷합니다. 꼬불꼬불한 길을 당나귀를 타고 지나가는 시골 꼬마와 촌아낙의 모습이 정겨워 보입니다. 나무그늘 아래서 쉬고 있던 할머니 두 분이 낯선 객을 보자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앉으라고 붙듭니다. 세르필과 에부가 이곳에 관광 왔다고 말하자 할머니는 나를 흘끗 보더니 세르필에게 "일본 여잔가?"하고 묻습니다. 세르필은 그렇다고 합니다. 하긴 촌구석 파파 할머니가 '한국'이라는 존재를 알리 없겠지요. 자식들은 다 큰 도시로 나가있고 혼자서 산다는 주름이 쪼글쪼글한 꼬부랑 할머니는 "길손한테 뭐 대접할게 있어야지"하면서 일어서서 비탈길을 내려가시더니 잠시 뒤에 꼬부랑 허리로 큰 플라스틱 물통을 낑낑대며 들고 나타났습니다. 할머니는 찌그러진 양은 대접에 물을 담아 우리들에게 차례로 마시게 했습니다. 특별히 목이 마르진 않았지만 또 물통이 그리 깨끗해 보이지도 않았지만 할머니의 마음을 생각해 큰 대접의 물을 다 들이킨 뒤 인사를 드린 뒤 마을을 내려왔습니다. 이어서 우리가 간 곳은 카파도키아 관광의 필수 코스라는 어느 유명한 골짜기. (음, 분명 이름이 있을 텐데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메모를 해 뒀어야 하는 건데....여러분, 기록하는 습관을 가집시다) 험한 비탈길을 헉헉대며 올라가 과거 기독교도들의 은신처였다는 동굴들을 둘러보았습니다. 이곳 역시 오전에 둘러보았던 지하도시와 마찬가지로 주거공간과 예배공간 등이 잘 구획되어 있습니다. 지하 도시와 다른 점은 계곡 정상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지요.

카파도키아의 모든 관광지역들이 그렇듯이 이곳 역시 관광객들로 북적거립니다. 마침 이곳을 찾은 터키 꼬마들이 나를 보자 "야, 일본 여자다!"하고 수군거리며 신기한 듯 쳐다봅니다. 어느 곳이든 어린이들은 다 예쁘겠지만 터키의 어린이들은 특히 더 예쁩니다. 아이들에게 터키어로 "안녕, 얘들아. 나는 한국에서 왔는데, 너희들은 어디에서 왔니?"하고 말을 건네자 아이들은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어! 일본 여자가 우리 말을 한다!"하며 큰 구경거리 난 듯이 내 옆으로 우르르 몰려옵니다. 아이들에게 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더니 유명 스타와 기념 촬영이라도 하는 듯 다들 좋아서 입들이 쫙 벌어집니다. 아이들은 헤어지면서 내게 잘 가라고 열심히 손을 흔듭니다.

다시 비탈길을 헉헉대며 내려와 일행들보다 조금 먼저 미니버스에 올라타니 운전사 아저씨가 내게 미혼이냐고 묻습니다. 그렇다고 하니 자기도 미혼이라며 명함을 건넵니다. '으잉? 생긴 것만 보면 애가 셋쯤은 딸려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이 아저씨, 왜 나한테 그런 건 묻는 거지?'

우리들이 향한 다음 행선지는 대형 귀금속 상점이었습니다. (터키의 단체 관광 프로그램에는 으례 상점 순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은 먼저 차(茶)를 대접받고 보석 제작 공정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들은 뒤 상점을 둘러보았습니다. 상점의 규모는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점원들이 내게 일본어로 인사를 붙이며 열심히 귀금속을 보여주지만 나의 돈주머니는 휘황찬란한 귀금속 구입을 위해 열리기에는 너무 얄팍합니다.

그럭저럭 카파도키아의 첫날 관광 일정은 끝이 났고 여행사의 미니버스는 우리들을 각자의 숙소에 떨어뜨려 주었습니다. 여행사 직원이 "저녁 때 밸리 댄스(배꼽춤) 디너쇼를 관람하지 않겠느냐?"고 물었지만 피곤하기도 하고 얄팍한 돈주머니도 생각나서 거절한 뒤 호텔로 들어갔습니다.

객실로 들어가 보니 약속했던 대로 테이블 위에 텔레비전이 떡하니 놓여 있습니다. 샤워를 한 뒤 여덟 시 경 저녁 식사를 위해 호텔 식당으로 들어가니 어찌된 셈인지 넓디넓은 식당에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습니다. '으잉? 호텔에 투숙객이 없나?' 순간적으로 <은하철도 999>를 떠올리고 있는데 어느새 종업원이 다가와 부지런히 서빙을 합니다. 수프, 샐러드, 완두콩깍지 요리, 닭고기, 밥, 빵, 수박 등이 접시마다 수북히 담겨져 나오는데 '이국 땅에 있을수록 건강에 신경써야지, 밥이 보약인데'하며 그 많은 양을 조금의 남김도 없이 싹싹 비우고 있으려니 독일인들로 보이는 중년의 남녀 단체 관광객들이 식당 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어오며 식당 안은 갑자기 활기가 흐릅니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와 잠시 텔레비전을 보다 그대로 침대에 엎어져 어느덧 쿨쿨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6.9 # 클라우스 삼촌[ | ]

 

다음날 아침 호텔 식당에서 차, 빵, 꿀, 잼, 버터, 토마토, 오이, 흰치즈로 구성된 터키식 아침식사로 든든하게 배를 채운 뒤 호텔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여행사 미니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안녕, 아흐메트. 안녕, 크리스 & 샘. 안녕, 세르필 & 에부. 안녕, 운전사 아저씨."하고 인사를 하며 차안을 둘러보니, 어? 낯선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오늘 새로 합류한 사람은 독일에서 온 클라우스 할아버지. 거의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로 짐작되)지만 독일 사람답게 기골이 장대한 클라우스 할아버지는 이한우 아니 최근에 이참 씨로 개명한 귀화 독일인의 이십 년 뒤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오늘의 첫 번째 행선지는 위치사르(Uchisar) 계곡. 아,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사실 저는 경사진 비탈길을 잘 다니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사지 멀쩡한 젊은애가 산도 제대로 못 오른다며 주변으로부터 그간 핀잔깨나 들어왔습니다.) 이곳 계곡의 길은 어찌나 가파른지 겁이 나서 도무지 발을 뗄 수가 없습니다. 분속 1m의 속도로 엉금엉금 엉거주춤 기어올라가는 나를 본 클라우스 할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더니 부축을 해줍니다. 명색이 이십대 젊은이인데 칠순 노인의 부축을 받는다는 건 여간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어쩌겠습니까. 나중에는 에부와 세르필까지 합세하여 클라우스 할아버지는 나의 오른팔을 에부는 나의 왼팔을 부축하고 세르필은 뒤에서 내 등을 밀고 하여 민폐를 잔뜩 끼치며 간신히 계곡의 정상까지 올라가니 캬! 올라온 보람이 있습니다. 황토색 동굴 주택이며 비둘기집, 교회터, 성터 등이 수백 년 전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게 만듭니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전경 또한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아흐메트가 위치사르 계곡에 대해 우리들에게 영어와 터키어로 설명을 해주는데 어제와는 달리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바로 언어 문제입니다. 클라우스 할아버지는 터키어는 물론이요 영어도 전혀 못하는데, 우리들 중에 독일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바벨탑의 비극을 떠올리게 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성이 명랑한 클라우스 할아버지는 시종 허허 웃으며 아흐메트에게 독일어로 열심히 질문까지 던집니다. 간혹가다 등장하는 영어와 비슷한 독일어 단어로 대충 그 뜻을 짐작하며 아흐메트와 우리들은 터키어와 영어로 클라우스 할아버지와 의사소통을 해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인 의문은 터키어도 영어도 전혀 못하는 이 할아버지가 어떻게 혼자 카파도키아를 찾아왔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딸, 아들, 손자, 손녀들과 함께 찍은 가족 사진을 보여주며 열심히 뭐라고 떠들어댑니다. 추측해 낸 바로는 가족들과 함께 터키에 왔고(여행을 위한 일시적 체류인지 다른 용무가 있는 중.장기 체류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무슨 까닭인지 클라우스 할아버지만 혼자서 카파도키아 여행을 왔다는 사실입니다. 성격 좋은 에부는 클라우스를 '삼촌'이라고 부르며 (터키에서는 나이든 남자를 친근하게 부를 때 '삼촌'[amca 암자]이라고 부르고, 나이든 여자를 친근하게 부를 때 '이모'[teyze 테이제]라고 부릅니다.) 그때그때 통역(?)도 해 주고 속성 터키어 레슨까지 해줍니다. 어느새 에부 조카와 클라우스 삼촌은 친해져서 둘이서 허허 하하 즐겁게 웃으며 서로의 언어로 열심히 대화(?)를 나눕니다.

다시 부축을 받으며 계곡을 내려오는데 앞서가던 세르필의 핸드폰이 때르릉 울립니다. 얼핏 들으니 자기네 엄마한테서 전화가 온 모양입니다. 전화 내용을 옆에서 엿들은 아흐메트는 "저 여자는 부모 몰래 여행을 왔군."하고 중얼거립니다. 사실 미혼 남녀가 함께 며칠씩 여행을 다니는 것은 터키에서는 일반적인 경우가 아닙니다. 참고로 밝히자면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숙소에서 묵었습니다. (아,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요? 여행사의 미니버스가 아침에 우리들의 숙소를 돌며 차에 태웠는데 세르필과 에부는 각기 다른 지점에서 차에 올라탔거든요.) 그러고보니 세르필은 에부보다 네 살 연상입니다. 하긴 남성이 연하인 커플이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아무튼 두 사람은 매우 다정해 보입니다.

다음으로 젤베 야외 박물관(Zelve Acik Muzesi)에서 옛날 교회터와 집터, 터널 등을 둘러본 뒤, 세 번째 방문지로 도자기 전시판매장을 찾았습니다. 매장 직원이 내온 사과차를 마시며 옹기장이 할아버지의 도자기 제작 시범을 본 뒤 직접 도자기 제작 실습을 해 본 뒤, 멋진 자기, 그릇류들이 진열된 매장을 둘러보다가 1달러하는 사기 컵받침과 10달러하는 예쁜 종지를 기념으로 샀습니다.

정신 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 점심 식사를 위해 우리들은 인근에서는 꽤 유명하다는 쾨프테(고기완자) 전문 식당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비 타이를 맨 소년 웨이터는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환영의 표시로 손에 레몬 코롱을 뿌려줍니다. 쾨프테 규베치(뜨거운 뚝배기에 쾨프테를 넣고 요리한 것)를 맛있게 먹고 있는데 식탁에 함께 앉은 우리의 터키인 가이드 아흐메트가 뜻밖의 말을 합니다.

"난 사실 터키 사람이 아니야."

6.10 # 안녕, 카파도키아[ | ]

 

"사실 우리 부모는 프랑스계와 이탈리아계야.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가 세 살 때 나 홀로 터키에 떨어뜨려 놨어." 아흐메트는 은근히 장난꾸러기인 데다가 농담을 잘하는 사람이라 그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비?터키 혈통을 부정하는 아흐메트이지만 터키 민족에 대한 자부심은 상당해 보입니다.

"작년에 클린턴이 터키를 찾아왔을 때 이렇게 말했어. 21세기는 터키 민족의 시대가 될 거라고 말이야. (인샬라∼) 사실 터키 민족은 터키뿐 아니라 유럽, 중앙 아시아, 중국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방방곡곡에 퍼져있지. 터키 민족에게는 저력이 있어."

긴 머리 총각 아흐메트의 이야기는 계속 됩니다.

"우리 고향에는 긴 머리 남자가 나하고 내 친구 딱 두 사람 있지. 고향 사람들은 우리 둘이 머리가 길다는 이유만으로 우릴 동성연애자라고 한다니까. 난 꽉 막힌 이곳이 싫어."라고 한탄합니다. 하지만 고향은 그에게 방학마다 아르바이트 일거리를 제공해 줍니다.

점심 식사 후에 찾은 곳은 야외 박물관(Nevsehir Muze ve Oren Yerleri). 아주 넓은 지역에 프레스코 성화가 그려진 동굴 교회, 오두막 교회, 무덤 등이 펼쳐져 있습니다.

이곳에서 우스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대만 여행객들로 짐작되는 한 무리의 동양인 단체 관광단이 마침 이곳을 찾아왔는데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들 양산들을 받쳐들고서 줄지어 걸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카파도키아의 여름철 햇볕이 강렬하기는 하지만 남녀노소 불문하고 전원이 양산을 들고 한 줄로 가는 모습은 분명 진풍경입니다. 아마도 대만에서 나온 여행안내책자에 여름철 카파도키아 여행에는 양산이 필수라고 씌어있었나 보지요. 하지만 양산은 물론이요 우천시에도 우산도 잘 안 쓰는 터키인들의 눈에는 동양인들의 양산 행렬이 큰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구경을 마친 우리들은 휴게소에서 음료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잠시 더위를 식혔습니다. 에부와 세르필이 옆의 기념품가게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미니 카페트가 붙은 예쁜 카드를 두 장 사서 한 장은 클라우스 삼촌에게 한 장은 나에게 주며 말합니다. "즐거운 터키 여행이 되길 바래요."

이어서 간 곳은 캐러밴 호텔. 상인들의 거처와 낙타우리, 마구간 등이 있는 이곳은 옛날에 실크로드를 타고 무역을 하던 상인들이 쉬어가던 숙소였다고 합니다. 80년대 중반에 TV로 방영됐던 NHK 다큐멘터리 '실크로드'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작은 기념품이라도 하나 살까하고 캐러밴 호텔 입구의 기념품 좌판대를 살펴보니. 털실로 짠 모자, 장갑, 양말, 양털 가방, 열쇠고리, 목걸이, 팔찌 등의 장신구, 사과차, 말린 살구, 민속인형, 기암 장식품 등이 있습니다. 괜찮은 것들은 가격이 좀 부담되어 망설이다 며칠 전에 내게 한국 김을 선물로 주었던 터키어 학교의 일본인 학생 유키오를 주기 위해 사과차를 한 봉지 사는데, 마침 좌판상인들 사이에 앉아서 쉬고 있던 여행사의 운전사 아저씨가 나를 보더니 좌판대에서 파는 파란 팔찌를 사서 선물로 줍니다.

캐러밴 호텔을 마지막으로 우리들의 여정은 끝이 났습니다. 클라우스 삼촌은 내일 하루 더 카파도키아 관광을 하기 위해 위르귭에 남고, 크리스와 샘은 파묵칼레로 세르필과 에부는 내일부터 다시 시작될 병원 근무를 위해 코니아로 나는 이스탄불로 가야 합니다. 여행사 직원 압둘라 씨가 건네주는 이스탄불행 버스표를 받아들고 미니버스를 타고 네브셰히르 시외버스 터미널에 내리니 그곳에는 코니아 행 버스를 기다리는 세르필과 에부가 있습니다. 그들과 다시 반갑게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이스탄불 행 버스가 옵니다. 세르필과 에부는 버스 안까지 따라 올라와 좌석을 확인해 주고 잘 가라고 손을 흔듭니다.

이스탄불로 돌아가는 야간 버스 안, TV화면에서는 며칠 전에 죽은 터키의 유명 코미디언 케말 수난(터키판 故서영춘)이 출연한 코미디 영화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버스가 휴게소에 정차할 때 깨어나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화장실 지킴이 청년(입구에서 화장실 이용료를 받고 휴지와 레몬 코롱을 주는 일을 하죠)이 내게 "며칠 전에도 여기 들렀었지?"하고 묻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스탄불에서 카파도키아로 갈 때도 이곳에 들렀었습니다. '원, 저 총각, 남 화장실 가는 것까지 다 기억하다니.' 동양인이라 눈에 잘 띄는 것일까요.

다시 버스에 올라탄 뒤 꾸벅꾸벅 졸다보니 어느덧 아침은 밝아오고, 버스는 이스탄불 오토가르에 도착했습니다. 월요일 아침 이스탄불은 출근하는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그들 틈에 섞여서 나는 여행 가방을 둘러맨 채로 그대로 터키어 학교로 향했습니다. 오늘 수업 시간에는 카파도키아를 여행한 이야기를 선생님과 반 친구들에게 들려주리라고 생각하면서요.

7 # NOTICE & 터키 여행 서바이벌 키트[ | ]

7.1 NOTICE[ | ]

좀 늦은 감이 있습니다만 본 칼럼의 성격 내지는 지향점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설명 드리고자 합니다."이양준의 Hello 터키"는 어느 한국 여자의 터키 여행 경험담일 뿐입니다. 즉 여행 정보· 안내와는 다소 거리가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여러분들에게 "나는 이렇게 터키 여행을 했어요."하고 알려드리는 것이지, "이렇게 하면 가장 싸게 혹은 가장 알차게 혹은 가장 품격 있게 터키 여행을 할 수 있습니다."하고 안내해드리지는 못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저는 수박겉핣기 수준의 터키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터키에 가서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 식으로 터키를 살폈고 좌충우돌하며 터키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의 칼럼은 터키를 경험한 이들의 여러 사례 가운데 한 가지일 뿐 터키 여행을 위한 모범 답안은 아닙니다. 본 칼럼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는 장차 터키 여행을 계획하시는 분들도 상당수 계실 텐데 이 점에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문이 불여일견"이고, "실수에서 배운다"고, 터키를 한 차례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여러분들에게 "알아두면 유용할 몇 가지 정보"를 알려드릴 위치는 되지 않을 까 싶어 <터키여행 서바이벌 키트>를 제시합니다.

7.2 터키 여행 갈 때 뭘 가지고 가지?[ | ]

"간편한 복장에 짐은 단촐하게..."하는 것은 어느 여행에나 기본적으로 적용되는 룰이므로 이곳에서 새삼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요. 저는 특히 터키 여행시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는 다음의 물품들을 알려드리겠습니다.

  • 레몬코롱
레몬향이 나는 샤워코롱입니다. 터키어로는 '리몬 콜로냐스(Limon kolonyasi)'라고 합니다. 터키에서는 손님이 왔을 때 환영의 뜻으로 손님의 손바닥에 뿌려주곤 합니다. 모든 슈퍼마켓이나 약국에서 팔며 가격은 상표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200ml 한 병에 2000여 원 정도 합니다. 더운 여름에 여행을 하다보면 몸에서 땀이 많이 납니다. 이럴 때 땀이 난 곳을 수건이나 휴지 등으로 닦아내고 레몬코롱을 바르면 땀냄새가 사라지고 기분이 상쾌해지지요. 또 손을 닦아야 되는데 물과 비누가 없는 상황일 때도 레몬코롱을 사용하면 좋습니다. 레몬 코롱에 함유된 알코올 성분이 손에 묻은 세균을 없애주거든요. 가격이 부담 없고 향도 좋으니까 터키 여행 기념 선물로도 좋습니다. 개인적으로는 Duru 상표의 레몬 코롱의 향이 제일 마음에 듭니다.
  • 생수
터키의 수돗물은 질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터키 사람들은 절대 수돗물을 마시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반드시 가게에서 생수를 사다 마십니다. 식당에서도 물을 서비스로 그냥 내주지 않기 때문에 물을 마시려면 돈을 내고 따로 주문해야 합니다. 여행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자연 땀이 많이 나서 목이 금새 말라집니다. 부근에 가게가 있으면 문제가 아니지만 가게가 멀리 떨어져있는데 마실 물도 없다면 그야말로 입이 바싹바싹 마르는 상황이 되겠지요. 그러므로 여행 다닐 때는 비상용으로 생수를 한 병 가지고 다니는 게 좋습니다. 생수는 보통 500ml, 1.5L, 5L 단위로 병에 담겨져 가게와 슈퍼에서 팝니다. 가격은 500ml짜리가 보통 4∼500원 합니다.제 경험에 의하면 여름철에 땀을 많이 흘릴 때면 1.5L 생수병도 순식간에 동이 납니다.

7.3 터키 여행 때는 뭘 입어냐 되나?[ | ]

여행시에는 간편한 복장이 필수임은 두 말하면 잔소리겠죠. 티셔츠에 막 입을 수 있는 바지, 굽 없는 편안한 신발. 그런데 복장에 있어서 터키 여행시 특별히 유의해야 될 부분이 있습니다.

  • 반바지는 입지 마세요!
여름철에 여행할 때 흔히들 반바지를 입잖아요. 터키는 이슬람 국가이기 때문에 옷차림새에 있어서 꽤 보수적인 편입니다. 물론 터키의 거리에서도 반바지와 초미니스커트, 슬리브리스 상의 차림의 사람들이 활보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반바지는 예의범절에 어긋난 차림새라고들 생각합니다. 과히 예쁘지도 않은 다리(앗, 이건 저에게만 해당되는 얘긴가요?)를 노출시켜가며 굳이 현지인들의 눈총을 받을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 여성분들만 읽어 주세요!
여성분들, 터키에 가실 때는 다음 물품들 <스카프, 긴치마, 긴소매 옷>을 꼭 챙겨 가시는 게 좋습니다. 터키에는 관광의 필수코스인 아름다운 이슬람 사원들이 많습니다. 이슬람 사원을 들어갈 때는 반드시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고 팔, 다리가 노출되지 않도록 가려야 합니다. 여름철이라고 할지라도 소매가 긴 얇은 셔츠를 가지고 가세요.

그리고 긴치마. 터키 사람들은 외국인들, 그 중에서도 동양인들에게 유독 관심이 많습니다. 특히 터키 남자들은 젊은 동양 여자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관심을 보입니다. 뚫어져라 쳐다보고 말을 걸고 쫓아오고…이런 상황이니 종아리가 훤히 드러나는 짧은 치마나 반바지, 몸매가 잘 드러나는 타이트한 바지 같은 것을 입으면 온 동네 남정네들의 시선이 온통 여러분들의 예쁜(?) 다리로 쏠릴 게 뻔합니다. "예쁜 것도 죄라면" 내지는 "나는 주목받는 게 좋아"라고 생각하신다면야 문제 될 거 있겠습니까만, 주목받는 것도 정도 문제지 개나 소나 다 노골적으로 쳐다본다면 대부분의 여자분들은 마음이 그리 편치 않을 겁니다.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라도 몸매가 잘 드러나지 않는 긴치마를 입는 게 좋습니다. 사실 적당한 폭의 긴치마는 활동하기도 편하고 여름에는 바지보다 더 시원하답니다. 이를 알고 있는지 터키에서는 많은 여성들이 긴 치마를 입고 다닌답니다.

7.4 이런 점들을 유의하세요.[ | ]

  • 돈 돈 돈
터키에 가서 놀라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어마어마한 화폐 단위입니다. 터키의 화폐 단위는 '리라(Turkish Lira, TL)'입니다. 1리라를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쯤 되냐고요? 그건 묻지 마세요. 계산 불가니까요. 그러면 우리 돈 천 원은 리라로 따지면 몇 리라일까요? 2001년 8월 기준 '1,000원=1,000,000리라' 정도 됩니다. 켁! 백만 리라가 과자 한 봉지 값어치라니! 터키에서는 거지조차도 백만장자인 셈이군요. 터키 경제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극심한 인플레입니다. 환율은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작년에 제가 터키에 있을 때만 해도 '1,000원=600,000리라' 쯤이었는데 1년 사이 환율이 두 배로 올랐더군요) 리라화의 가치가 떨어지다 보니 경제는 자꾸 위태로워지고 많은 사람들이 달러화를 선호합니다. 한국인 여행자 여러분들이야 터키 경제의 위기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인플레로 인한 문제로부터 외국인 여행자들이라고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숫자 단위가 너무 높다보니 돈 계산 할 때 엄청 헷갈리거든요. 특히 저 같은 수맹(數盲)의 경우에는....
  • 거스름돈
터키에 가서 처음 얼마간은 물건 살 때마다 긴장하곤 했어요. 처음 보는 화폐들이 안 그래도 헷갈리는데 금액에 븥은 동그라미 숫자들도 너무 많아 어느 지폐가 더 높은 액수인지 제대로 분간을 못해 가게 점원에게 엉뚱한 지폐를 내밀기 일쑤였답니다. 저의 어리뜩함을 눈치챈 극소수 나쁜 이들이 거스름돈을 잘못 내주는 경우도 간혹 있었답니다. 거스름돈 얘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얘기하지요. 우리나라에서는 100원짜리 알사탕을 하나 사고 만 원짜리 지폐를 내밀어도 점원들은 군말 없이 9,900원을 거슬러 주지요. 그런데 터키에서는 1,500원짜리 물건을 사고 5,000원짜리 지폐를 건네도 거스름돈이 없다며 판매를 거부하는 황당한 경우가 간혹 있으니 유념하시기를.
  • £¥$환전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터키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환율이 치솟으니 한번에 많은 금액을 환전해 놓을 경우 손해를 봅니다. 한 번에 10∼30달러 정도만 환전하도록 하세요. 환전은 은행보다는 사설 환전소에서 하는 게 훨씬 간편합니다. 환전소는 큰 도시나 유명 관광지의 경우 거리마다 한 두 군데씩 있습니다. 터키어로 환전을 뜻하는 Doviz라는 글자가 씌어 있는 곳을 찾으면 됩니다. 물론 영어로 Foreign Exchange라고도 씌어 있지요.

※여성분들만 읽어 주세요!! : 터키의 남자들

위에서도 적었듯이 터키 남자들은 동양 여자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인답니다. 특히 한국 여자분들이 터키에 가시면 예쁘다는 찬사를 귀가 따갑도록 들으실 것이고 사귀어 보자는 제의도 수없이 들어올 겁니다. 물론 그로 인해 잘 생기고 착하고 훌륭한 터키 남자와 좋은 인연이 엮인다면 양국의 관계 발전을 위해서도 축하할 일이겠지만…그러나 사람 속은 들여다 볼 수 없는 법이고 세상이 흉흉하다 보니 언제 어느 때 위험한 사태가 발생될 지 모르는 일이지요. 그러니 언제나 경계심을 늦추지 마시고, 가능하면 밤에는 돌아다니지 말고 한적한 길을 혼자 다니지 말 것이며, 남자들이 여러분들을 귀찮게 할 경우에는 대꾸를 하지 마시고, 그래도 계속 성가시게 할 경우에는 화 난 표정을 지으며 "살락"이라고 해보세요. 상대 남자가 움찔하며 혹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날 겁니다. "살락(salak)"이란 '멍청이, 얼간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아무에게나 함부로 말해서는 안됩니다. (외국어 학습자들은 이상하게도 나쁜 말들은 빨리 배우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이 단어는 절대 함부로 사용하지 마세요) 어디까지나 비상용으로 알고 계시도록 하세요.

8 # 종굴닥여행기[ | ]

8.1 # 흑해로 가는 입구 종굴닥[ | ]

여름이 더운 거야 자연의 당연한 순리지만 작년 이스탄불의 여름은 정말 유난히도 무더웠습니다. 폭염이 계속되자 7월 어느날 이스탄불 시는 각급 학교, 학원, 관공서 등에 폭염 휴가령을 내렸고, 제가 다니던 터키어 학교도 사흘간 임시 방학을 했습니다. 뜻하지 않은 휴가.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궁리하며 마침 터키인 주인 가족도 시골로 내려가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안에?"아흐흠, 심심해라"하며 하품을 내뿜고 방안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고 있는데 때르릉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주인 가족도 없는데 웬 전화?'하고 긴장하며 수화기를 들으니 전화를 걸어온 이는 터키에서의 저의 보호자(?)인 한국인 하미트 아비(Hamit Abi)입니다. ('하미트'는 이분의 터키 이름이고 '아비'(abi)는 터키어로 '오빠'를 뜻합니다. 제가 터키에 갈 때 저의 터키어 선생님이 터키에서의 보호자로 소개해 주신 하미트 아비는 당시 이스탄불 종교대학 석사과정을 공부하시는 한편 터키를 찾아오는 한국인들의 가이드 역할도 해주고 계셨습니다.)

하미트 아비는 평소의 스타일대로 대뜸 자기말부터 꺼냅니다.

"내일 우리 선생님과 함께 좋은 곳에 가기로 했으니 준비해요."

오호, 그것 참 잘됐군. 안 그래도 심심해서 몸이 근질근질하던 참인데.

"어딜 가는데요?"

"종굴닥이라는 곳이에요."

"그게 어디 있는 건데요?"

"지도 찾아봐요."

전화를 끊고 터키 지도를 펼쳐 살펴보니 흑해로 들어가는 입구에 '종굴닥(Zonguldak)'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이스탄불에서 그리 먼 거리는 아닙니다.

갈아입을 옷과 세면도구를 배낭 속에 챙겨넣고 낯선 도시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배를 타고 보스포러스 해협 건너 이스탄불의 아시아 지구 위스큐다르 선착장에서 하미트 아비와 만났습니다. 이스탄불에는 시외버스 터미널이 두 군데 있습니다. 한 곳은 시가지 외곽에 위치한 오토가르(Otogar)라는 곳이고, 또 한 곳은 위스큐다르 선착장 근처의 하렘(Harem)이라는 곳입니다.

오랜만에 만난 하미트 아비와 안부인사를 나눈 뒤, 하미트 아비에게 물었습니다.

"종굴닥에는 왜 가는 거죠? 밤에는 어디에서 묵어요? 그리고 같이 가신다는 선생님은 또 누구고요?"

"일단 가보면 알아요. 그리고 제 선생님은 잠시 뒤 이곳에 오실테니 그때 인사 나누도록 해요."

잠시 뒤 하미트 아비가 얘기한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파룩(Faruk) 선생님. 서울 이태원의 이슬람 성원에서 성직자(imam)로 계시는 파룩 선생님은 휴가를 받아 터키에 들어오셨다가 예전 임지 종굴닥을 다시 방문하시게 되었고, 하미트 아비는 수행인으로, 저는 곁다리로 끼어 따라가게 된 거지요. 선량해 보이는 파란 눈이 인상적인 파룩 선생님은 초면임에도 친근감이 느껴집니다.

아침 아홉시, 종굴닥 행 버스표를 사서 버스에 오르니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나비넥타이의 소년 차장이 동양인인 하미트 아비와 저를 보자 귀여운 얼굴 가득 환하게 미소 지으며 반깁니다. 이스탄불에서 종굴닥까지는 버스로 다섯 시간 걸리는 거리입니다. 남한보다 7배가 넓은 터키에서는 그 정도면 단거리 여행에 속합니다.

흑해로 가는 입구에 위치한 종굴닥으로 가는 도로는 해안선을 따라 나 있습니다. 새파란 바다와 울창한 초록 나무들이 죽 이어진 종굴닥 가는 길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파룩 선생님은 자상하시게도 나를 위해 한국말로 종굴닥이라는 도시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고, 창밖 풍경도 설명해 주십니다.

8.2 # 평화로운 소도시 종굴닥[ | ]

오후 두 시경, 버스는 종굴닥 시외버스 터미널에 멈췄습니다. 터미널에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계시던 분들의 승용차에 타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뜻밖에도 어느 초등학교입니다. '아니? 웬 학교?' 의아해 하며 안내되는 대로 들어가보니 널따란 강당 한켠에 테이블이 놓여있고 테이블 위에는 쾨프테, 밥, 수프, 샐러드, 빵 등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습니다. 배고팠던 참이라 맛있게 식사를 마치고 보니 어느새 파룩 선생님과 하미트 아비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학교의 선생님들이 교내시설들을 안내해 줍니다. 컴퓨터실, 교실, 과학실, 부설 유치원 등을 보여주는데 시설들이 무척 좋습니다. 마침 방학중이라 학교에는 학생들이 몇 명 없습니다.

방명록에 서명을 한 뒤 교장실로 안내되어 차를 마시며 선생님들로부터 학교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학교의 이름은 'Ozel Ufuk Koleji'(우푹 사립학교). 어쩐지 학교시설이 무척 좋다 했더니 사립학교더군요. 개교한지 3년된 신설학교입니다. 교장선생님도 아주 젊습니다. 나의 전속 가이드(?)는 영어를 담당하는 중년의 여교사 을륵 선생님. 자신의 열두 살 난 아들도 이 학교에 재학중이라고 합니다. 앙카라의 하제테페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는 그녀는 종굴닥이 작은 도시라 외국인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아 영어를 활용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며 외국인인 나와 영어로 이야기하고 싶어 했지만 한달여 터키물을 먹은 나는 영어보다는 서투른 터키어가 먼저 튀어나옵니다.

을륵 선생님과 체육 선생님이 하미트 아비와 나를 차에 태우고 종굴닥 구경을 시켜줍니다.해변가에서 바다 구경을 하고 카페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항구와 독 시설을 둘러보고 한적한 시골길을 산책했습니다.

종굴닥의 주산물은 석탄입니다. 을륵 선생님의 남편도 석탄회사에서 근무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도시는 우리나라의 사북 탄광촌처럼 검은 느낌보다는 바다의 푸름과 신록의 초록이느껴집니다. 터키 내에서는 꽤 큰 도시중의 하나에 들어간다고 하지만 이스탄불 같은 대도시에 비하면 종굴닥은 장난감 같은 느낌입니다. 조그맣고 평화로운 느낌으로 종굴닥은 다가왔습니다.

선생님들은 우리를 데리고 쇼핑타운으로 나오더니 파룩 선생님의 선물이라며 가디건과 터키 동화책을 사서 내게 안겨주고는 인사를 하고 헤어집니다.

8.3 # 우준 씨 일가[ | ]

선생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뒤 안내되어 간 곳은 종굴닥의 유지인 우준(Uzun) 씨 댁이었습니다. 우준 씨 댁 가족들은 귀한 손님인 파룩 선생님을 위해 저녁 식사를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준 씨 댁 다섯 식구가 사는 전망좋은 아파트는 내부도 상당히 넓고, 실내 장식이며 가구 등도 퍽 고급스럽습니다.

나의 접대역을 맡은 장녀 귤달르는 스물네 살난 아름다운 처녀입니다. 종굴닥?2년제 대학을 졸업한 뒤 아버지 가게의 일을 돕고 있다고 합니다. 파룩 선생님과 하미트 아비, 우준 씨는 거실에서, 나와 귤달르는 베란다에서 식사를 즐기는 동안 우준 씨 부인은 부엌에서 계속 음식을 차려 내오고, 대학과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라는 귤달르의 남동생들은 베란다 한 구석에서 열심히 닭고기 바베큐를 굽고 있습니다.

식탁에는 수프, 밥, 샐러드, 콩깍지 요리, 피망쌈요리, 닭고기 바베큐, 수박 등등이 그야말로 상다리가 휘어질 지경으로 올라와 있습니다.

식사를 끝내자 귤달르와 그녀의 어머니가 사진첩을 가지고 와 보여줍니다. 우준 씨 부인은 "내가 종굴닥에 새신부로 들어올 때는 처녀였는데 지금은 이렇게 늙고 퍼진 아줌마가 됐다오."하고 말하며 웃습니다. 귤달르는 대학 시절 사진을 보여줍니다. 귤달르는 지금은 긴치마에 머리에 베일을 쓰고 있지만, 한때는 긴머리를 흩날리며 짧은 치마를 즐겨입고 다니던 발랄한 여대생이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파룩 선생님, 우준 씨가 나갈 채비를 합니다. 하미트 아비는 좀 있다가 다시 들러 묵을 집에 나를 데려다 주겠다고 말한 뒤 그들을 따라 횡하니 사라집니다. 곧 오겠지 하며 기다리고 있으려니 어느덧 시계는 밤 열한 시를 가리킵니다. 귤달르와 그녀의 어머니는 내게 편히 있으라고 하지만 이댁 가족들도 얼른 쉬어야 될텐데 나 때문에 여태 잠자리에 못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하미트 아비에게 핸드폰을 걸어보았지만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응답만 나올 뿐. 옆에서 보던 귤달르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하여 옆에 있던 하미트 아비에게 빨리 와달라고 이야기를 하여 잠시 뒤 하미트 아비가 씩씩거리며 달려왔습니다. 하미트 아비와 파룩 선생님, 우준 씨는 다른 이들과 중요한 회의를 하던 도중이었다는 겁니다. 물론 나도 중요한 회의를 중단시키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낯선 집 거실에 밤새 앉아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중요한 회의를 방해했다며 짜증을 부리던 하미트 아비에게 낯선 집에 영문도 모른채 덩그라니 남겨졌던 내 처지도 헤아려보라며 덩달아 짜증을 내니, 하미트 아비는 다소 기세를 누그려뜨리고는 내게 설명을 해 줍니다. 나를 원래 묵게 하려던 집은 지금 시간이 너무 많이 늦어 찾아갈 수가 없고 대신 인근의 다른 지인(知人)의 지인의 집에 데려다 줄 테니 거기서 하룻밤 자라고 합니다. 하미트 아비는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오겠다며 나를 어느 아파트 현관 앞에 세워놓고 또 다시 휙 사라집니다.

8.4 # 소녀와 분홍장미[ | ]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니 다섯 명의 소녀들이 우루루 나와 나를 맞이합니다. 시간은 밤 열두 시. 늦은 밤에 느닷없이 들이닥쳐 미안하다고 하니 자신들은 원래 늦게야 잠자리에 든다며 나를 안심시킵니다. 이들은 나를 자리에 앉힌 뒤 자두와 포도, 소금을 내옵니다.

이 집은 대학 3학년생인 스물두 살 왕언니 하티제를 위시하여 휼리아, 투바, 에스라, 미네, 파트마, 막내인 열여덟 살 대학 새내기 감제까지 여대생 여섯 명이 자취하는 곳입니다. 친구네 집에 자러간 파트마를 제외한 다섯 명의 터키 아가씨들은 거실 마룻바닥에 둥글게 모여 앉아 나를 바라보며 외국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기는 처음이라며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집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영어공부 좀 하는 거였는데"하며, 걔중 영어실력이 좀 나은 불문과 학생 미네가 종굴닥엔 어떻게 왔는지를 영어로 물어옵니다.

그녀들에게 터키어를 배우러 터키로 왔고 종굴닥엔 아는 분들을 따라서 놀러왔다고 터키어로 얘기하니, 터키엔 언제 왔느냐, 터키, 터키인들에 대한 느낌은 어떠냐, 종굴닥의 인상은 어떠냐, 한국은 어떤 나라냐, 한국에서는 어떤 일을 했느냐, 가족은 어떻게 되냐 등등 그녀들의 질문이 이어집니다.

그녀들은 모두 종굴닥 대학 재학생들로, 경영학, 화학, 불문학 등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이스탄불 출신입니다.

"이스탄불에도 대학이 많은데 왜 하필 종굴닥까지 와서 대학을 다니지?"하고 눈치없이 내가 물으니, 부끄러워하며 "응, 그게 말이지…우리들은 대학입학자격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해 지방대학으로 유학온 거야."하고 대답합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어느새 음악 얘기로 이어졌습니다. 터키 음악을 좋아하냐는 그들의 물음에 바르슈 만초(Baris Manco)라는 터키 가수를 좋아한다고 내가 말하자, 소녀들은 자신들의 집에는 그의 음반이 없다고 미안해하며 대신 자신들이 직접 불러주겠다면서 바르슈 만초의 히트곡 (Gul Pembe>를 하모니를 맞추어 불러줍니다. 멀리서 온 객을 위해 노래를 불러주는 소녀들의 모습은 내게 분홍장미보다도 더 곱고 감동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어느덧 시계는 새벽 두 시를 훌쩍 넘어섰습니다. 하티제는 나더러 자신의 방에서 자라며 침대시트를 새로 갈아줍니다. 한밤중에 예고없이 들이닥쳐 밤잠 못자게 한 것도 미안한데 주인의 방까지 빼앗는다는 건 너무 염치없는 짓인 것 같아 거실에서 자겠다고 극구 사양했으나 하티제가 거듭 권유하여 결국 그녀의 방에서 잠을 자기로 했습니다.

아가씨 방답게 깔끔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하티제의 방에서 푹 자고 다음날 아침 일어나니 소녀들은 잘 잤냐고 인사하며 아침식사를 차려 내옵니다. 거실 바닥에 빙 둘러 앉아 빵과 차, 흰치즈, 올리브, 소금 뿌린 토마토와 오이, 감자튀김까지 곁들인 맛있는 아침식사를 마치자 하미트 아비가 현관벨을 누릅니다. 소녀들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포옹하며 잘가라고 인사합니다. 휼리아는 자신의 스카프를 선물로 쥐어줍니다.

하미트 아비는 자신과 파룩 선생님은 일이 있어 더 머물러야 하니 내게 아침 버스를 타고 혼자 이스탄불로 올라가라고 합니다. 버스터미널에서 기다리고 계시던 파룩 선생님은 이스탄불행 버스표를 쥐어주며 조심해서 잘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종굴닥에서 이스탄불로 돌아가는 내내 내 마음은 흐뭇했습니다. 1박2일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반나절 남짓의 짧은 시간 머무른 종굴닥. 하지만 내 마음 속에는 종굴닥의 평화로운 정경과 친절한 사람들의 얼굴이 아로새겨졌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바르슈 만초의 를 들을 때면 분홍장미처럼 고왔던 종굴닥의 소녀들이 떠오릅니다.

9 # 터키어학교 이야기: TOMER[ | ]

세계화의 추세인지 최근 들어 국내에도 터키어를 배우시는 분들이 부쩍 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내에서 터키어를 배우시는 분들 상당수는 터키 현지로 날아가 터키어를 배우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제게도 터키에서의 터키어 교육과정에 대해 물어오시는 분들이 간혹 계시는데, 이에 터키의 터키어 학교에서 터키어를 공부했던 경험자 입장에서 터키의 터키어 학교에서의 저의 경험과 일반적인 정보들을 소개할까 합니다.

터키에서 터키어를 배울 수 있는 대표적인 기관으로 'TOMER'(토메르)라는 곳이 있습니다. 정식 명칭은 '앙카라 대학 부설 터키어 교육원'(Ankara University TOMER Language Teaching Centre / Ankara Universitesi TOMER Dil Ogretim Merkezi)입니다. 1984년에 처음 설립된 이곳은 현재는 앙카라, 이스탄불, 안탈리아, 이즈미르, 부르사, 트라브존 등 터키 내 주요 대도시에 분원들을 두고 있으며, 공인된 대표적인 터키어 교육기관으로 자리잡아 있습니다.

물론 터키에서 터키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이 토메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탄불 대학 내의 터키어 교육 과정도 있고, 이스탄불 하우스라는 사설 어학교육 기관의 외국인을 위한 터키어 코스 등도 있고, 터키의 영자 신문인 Turkish Daily News지를 보면 '터키어 개인교습을 해 드립니다'하는 광고들도 자주 게재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외국인들이 굳이 토메르에서 터키어를 배우는 이유는 이곳이 공인된 터키어 자격증을 부여하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토메르에서 터키어 최종 과정을 마치면 터키어 Diploma 자격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이 시험에 합격해서 Diploma를 받으면 '터키어 어학 능력을 갖춘 자'로 공인되어 터키 내의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터키 국내외에서 터키어 관련 기관 취업 및 학교 진학시 언어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토메르가 아닌 타 기관에서 터키어를 배워도 Diploma 응시는 가능하지만 합격률이 상대적으로 저조하다고 합니다. Diploma 시험을 주관하는 기관이 TOMER이기 때문이지요.

토메르의 수강 신청은 터키에 가서 직접 학교를 찾아가 등록을 해도 되지만 가기 전에 미리 연락을 취해 필요한 정보들을 파악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려면 토메르의 연락처를 알아야 되겠지요. 연락은 각 분원으로 해도 되지만 앙카라 본원에 연락을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토메르의 연락처는 아래와 같습니다.

Ankara University TOMER Language Teaching Centre
Ankara Central Branch
Ziya Gokalp Cad. No: 18/1 Kizilay, Ankara, Turkey
tel: (90)312-435-8405 / 435-9781, fax: (90)312-435-9786

http://www.tomer.ankara.edu.tr

emailto:mailto:webadmin@tomer.ankara.edu.tr

터키는 우리나라만큼 인터넷이 보편화되어 있지 못해서 그런지 홈페이지가 제대로 안 열리는 경우도 많고, 이메일을 보내도 답이 제대로 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메일 제목을 'COK ONEMLI'('매우 중요'라는 뜻입니다), 'VERY URGENT' 등으로 달면 답신을 조금 빨리 받을 수 있을까요?) 시간 여유를 조금 두고 우편으로 문의를 하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토메르에서 터키어를 공부하고 싶습니다. 상세한 안내문을 보내 주세요.'라고 써서 국제 반신 우편쿠폰(international reply coupon―우체국에서 구입 가능합니다)을 동봉하여 보내면 영문으로 된 안내책자가 우편으로 우송되어 올 겁니다.

 

토메르에는 외국인들을 위한 터키어교육 과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 터키인들을 위한 각종외국어 강좌(영어, 독일어, 러시아어, 일본어, 중앙아시아어 과정 등등)들도 설치되어 있습니다. 터키어 과정은 초급 1, 2 / 중급 1, 2 / 고급 1, 2 총 6단계로 나뉘어져 있고 각 단계는 주 20시간 기준 1달 코스입니다. 강의는 매달 초(혹은 첫째 월요일)에 시작됩니다. 터키어를 전혀 모르는 경우에는 바로 초급 1과정에 배치되고, 터키어를 아는 경우에는 반편성 배치고사를 보고 그 결과에 따라 수준별로 배치됩니다. 1달간의 과정이 끝나면 문법, 독해, 듣기, 작문 등의 시험을 보아 낙제점을 받지 않는 한 수료증(Certificate)을 수여 받고 그 다음 단계로 올라갑니다. 최종 코스인 고급 2단계까지 다 수료하면 Diploma 시험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달 수강료는 320달러. 그리고 매달 교재대가 별도로 8∼10달러 들어갑니다. 한 달 320달러라는 수강료는 터키 물가 수준으로 볼 때 엄청난 액수입니다.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비싼 수업료에 비해 시설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일례로 제가 토메르에 다니던 작년 8월 초 어느날 교실의 에어컨이 고장났습니다. 터키의 여름도 우리나라 여름 못지 않게 덥기 때문에 에어컨도 없이 여러 명이 함께 수업을 듣다보면 어느새 등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듭니다. 직원에게 에어컨 고장 사실을 바로 알렸기 때문에 곧 고쳐질 줄 알았는데 일 주일, 이 주일이 지나도 에어컨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화장실 잠금쇠도 고장나서 이를 고쳐달라고 직원에게 이야기했으나 알았다고만 할 뿐 이 역시 언제 고친다는 것인지 감감 무소식. 기다리다 못해 원장에게 직접 이야기하여 결국 고쳐진 것은 그 달이 거의 다 지나가서였습니다.

토메르의 수업은 50분 수업, 10분 휴식의 4교시로 구성되어 보통 9시에 시작하여 1시에 끝납니다. 수업은 문법, 회화, 독해, 작문들로 골고루 구성되어 있고, 선생님들은 수업 기재로 게임, 퀴즈, 발표, 비디오 시청 및 오디오 청취 등도 자주 활용합니다. 매일매일 숙제도 상당히 많습니다.

매달 한 차례 정도 소풍이나 관광유적지 탐방 등을 가는 날이 있고, 방과후 선생님의 재량으로 다함께 터키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거나 단체로 영화를 관람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때의 비용은 학생들 각자가 부담해야 합니다) 한 코스가 끝나면 학생들끼리 돈을 갹출하여 선생님에게 꽃다발과 카드를 선물하고 과자 등을 준비하여 조촐한 파티를 열기도 합니다.

터키에서 지내는 동안 숙소 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외국인 학생들이 많습니다. 그 주된 이유는 터키에는 기숙사나 홈스테이 제도가 발달이 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 부탁하면 숙소를 알선해 주기는 하지만 학생들의 요구에 맞춰 100% 구해준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때문에 한 달 내외로 단기간 체류하는 학생들은 호텔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생들끼리 몇 명이 짝을 이뤄 혹은 단독으로 아파트를 세 얻을 수도 있습니다만 가구가 갖추어진 아파트는 상대적으로 세가 비싸고, 가구가 안 갖추어진 아파트의 경우에는 가재도구를 새로 갖추어야 하는 부담이 있습니다.

'기숙사'라는 것들도 있지만 특정 학교에 소속된 기숙시설이라기보다는 학생들의 집단 자취촌 성격에 더 가까우며 시설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닙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아는 사람들을 통하여 터키인 학생들이 자취하는 집에 파묻어 들어가거나 터키인 가정에서 하숙하는 방법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지만 '홈스테이'라는 개념 자체가 발달해 있지 않은 터키에서 마땅한 조건의 터키인 거처를 찾는 것이 결코 쉽지 않고, 또 생활 풍습 등의 차이로 인한 불편을 각오해야 합니다. 저 역시도 터키에서 석 달을 지내는 동안 숙소 문제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저는 터키로 가기 전에 토메르에 홈스테이를 할 터키인 가정을 찾아줄 것을 미리 요청했었습니다. 저는 수 년 전 영국인 가정에서 반 년 간 홈스테이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의 경험이 무척 만족스러웠기에 터키에서도 홈스테이를 희망했었던 거지요. 그런데 터키로 떠나기 며칠 전 토메르에서 '터키인 가정에서의 홈스테이는 한 달 뒤부터 가능하니 처음 한 달 간은 가구 딸린 월세 300달러짜리 아파트를 구해 줄 테니 거기서 지내라'는 소식이 왔습니다. 홈스테이가 미뤄진데다 월 300달러라는 집세가 터키 물가를 감안해 볼 때 좀 비싸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시간도 없는데다 혼자서 외국의 아파트에서 지내보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기로 했지요. 그런데 터키로 떠나기 하루 전에 다시 토메르에서 '구하려던 아파트를 못 구했으니 한 달 간 월 150달러짜리 학생 기숙사에서 지내라'는 내용의 이메일이 왔습니다. 떠나기 하루 전에 소식을 준 것이 황당하긴 했으나 방세가 반값으로 내려갔기에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하여 부푼 꿈을 안고 터키로 출발했는데……

미리 부탁하여 공항에 마중나와 있던 토메르의 직원을 따라 도착한 기숙사는 달동네풍의 동네에 아슬아슬하게 얹혀진 5층짜리 건물이었습니다. 각 층마다 5∼6개의 방들과 욕실이 있고 맨 위층에 부엌과 식당이 있고, 마당에 세탁실이 있는 구조로, 각 방마다 2∼3명씩의 터키인 여대생들이 지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외국인이라서 그런지 독방을 주었습니다만.) 물론 호텔 수준의 시설을 기대한 건 절대 아니지만 시설도 별로였고, 다른 방에 있는 터키인 여학생들하고도 별로 친하게 지내지를 못했습니다. 그래도 '한 달 뒤면 터키인 가정에 입주할 테니까'하며 한달여를 그곳에서 지낸 뒤 입주일을 며칠 앞두고 토메르의 직원에게 확인 차원에서 물어보니 직원은 "네가 들어가기로 했던 가정에 사정이 생겨서 못 들어가게 되겠다."고 말하고는 나 몰라라 하는 것입니다. 아니 사정이 그리 되었으면 미리 알려줬어야지. 정말 황당했습니다. 기숙사에는 더 머물고 싶지 않았던 저는 부랴부랴 새 거처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 며칠 전에 우연히 알게 된 한국인 여성분에게 급히 도움 요청을 보내어 그분의 아는 분의 아는 분의 터키인 가정에 월 150달러에 숙식을 제공받기로 하고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방 세 개짜리 아파트에는 젊은 부부와 한 살 반짜리 아기, 그리고 집주인의 장가 안 든 형이 살고 있었는데, 다들 착한 사람들이긴 했지만 이 집에서도 역시 몇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주인부부는 걸핏하면 며칠씩 집을 비우기 때문에 주인부부가 지저분하게 어질러놓고 나간 집을 나 혼자 치우고 내가 직접 장 봐서 텅텅 빈 식료품 찬장을 채워넣고, 껄떡쇠 같은 주인네 형에게 식사를 차려주는 것이 짜증스러웠습니다. 또 주인 남자는 외국인 여자인 나의 존재를 상당히 불편해하는 것 같았고, 어린 아기 역시 귀엽긴 하지만 밤늦게까지 자기와 놀아달라고 하고 툭하면 울어대어 공부를 제대로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주인부부가 집을 비웠을 때 집주인의 장가 안 든 형과 단 둘이서만 지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집에서 지낸 지 3주일만에 다른 터키인 가정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터키어 학교의 같은 반에서 공부하던 미국 여학생 빅토리아가 귀국하면서 자신이 지내던 집을 소개해 준 것입니다. 이 집은 숙식 제공 월 300달러였습니다. 300달러라는 액수가 적은 액수가 아니었지만 달리 마땅한 거처도 없었고, 빅토리아가 적극 추천했기에 그곳에서 지내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터키에서 마지막 한 달하고 일주일을 지내게 된 터키인 가정은 터키어 학교에서 도보로 십 분 거리의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 삼십대 초반의 터키인 아주머니와 그녀의 여덟 살 난 아들 단 두 식구가 사는 단촐한 가정이었습니다. 아주머니의 남편은 아들이 아기 때 암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저로부터 받는 300달러는 이 가정의 귀중한 수입원이 되었습니다.

깔끔하고 부지런한 살림꾼인 아주머니는 정이 무척 많은 분이었고, 어린 아들 역시 저를 누나라고 부르며 잘 따랐습니다. 아주머니는 친척집에도 저를 데리고 다니고 학교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식사를 대접하기도 하고, 귀국할 때 한국의 가족들을 위한 선물까지 챙겨주면서 가족과 따로 떨어져 외국에서 홀로 지내고 있는 저를 친딸처럼 정성껏 보살펴 주셨습니다. 아주머니와 함께 차를 마시며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들이 그립습니다.

 

터키어 학교에는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이 다양한 이유와 목적으로 터키어를 공부합니다. 주류를 이루는 유형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9.1 터키인과 결혼한 사람들[ | ]

  • 잉게
러시아 출신인 잉게는 러시아로 유학왔던 터키 학생이었던 현재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여 터키에 온 지 1년여가 지났습니다. 남편이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남편 친구들과는 영어로 대화하지만 일상 생활을 하려면 터키어를 배워야 하기 때문에 석 달전부터 토메르에 등록하여 터키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다행인 점은 결혼과 함께 잉게의 국적이 터키로 변경되었기 때문에 다른 외국인 학생들보다 훨씬 저렴한 수업료를 낸다는 점입니다.
  • 유키오
유키오는 결혼한 지 4개월 된 일본인 새댁입니다. 인터넷 채팅을 통해 알게 된 터키인 총각과 2년여의 온라인 교제 끝에 결혼하고 결혼과 동시에 터키에 들어와 신접살림을 시작했습니다. 아직은 모든 것이 낯설지만 조금씩 조금씩 터키말 실력도 쌓고 현지 사정도 익혀나가고 있습니다.

9.2 대학에서 터키학을 전공하는 학생들[ | ]

  • 실비아
스웨덴계 아버지와 독일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스위스에서 성장하고 영국에서 대학을 다닌 실비아는 그 덕분에 스웨덴어, 독일어, 영어, 불어가 능통합니다.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원에서 중근동학을 전공하고 있는 그녀는 작년에 아랍어 공부를 시작한 데 이어 올해 터키어 공부도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구사 언어 리스트에 새로운 언어가 추가된 것입니다
  • 요르고스
그리스의 대학원에서 터키학을 전공하는 26세의 청년 요르고스는 여름방학을 맞아 같은 과 학생들 십여 명과 함께 단체로 이웃나라 터키로 어학연수를 받으러 왔습니다. 석사과정을 마치면 내친 김에 박사과정까지 끝내고 대학 강단에 서는 것이 요르고스의 장래 희망입니다.

9.3 터키 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 | ]

  • 페렌스
환갑을 눈 앞에 둔 헝가리 아저씨 페렌스 씨는 두 달 뒤면 앙카라의 헝가리 대사관에 대사로 부임하게 됩니다. 대사관 업무에 들어가면 앞으로 4∼5년은 터키에서 근무해야 하기 때문에 터키어 마스터가 시급한 과제지만, 마음만 조급할 뿐 오십대 중반에 시작한 터키어 공부가 영 수월치가 않습니다.
  • 다이앤
다이앤이 비서로 근무하는 미국의 회사는 터키 회사들과 무역을 하기 때문에 터키어를 구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장은 다이앤에게 한 달 유급휴가를 주고 수업료와 숙식비까지 대주며 터키어 연수를 명했습니다. 이미 미국 대학에서 일반인을 위한 터키어 강좌를 수강한 바 있어 기본적인 터키어 구사는 가능한 다이앤이지만 평소 실전 회화 경험이 부족하다고 느꼈기에 터키에서 머무는 한 달 동안 실전 회화 경험을 열심히 쌓아보려고 합니다.
  • 박 과장님
한국의 S기업 가전제품 판매부의 박 과장님은 터키에서의 한국 S전자 대리점 설립의 타당성 및 마케팅 조사를 위해 6개월 예정으로 터키에 파견되었습니다. 터키로 파견되기 전 두 달 간 개인교습을 통해 터키어집중교육을 받고 온 탓에 중급 과정까지는 비교적 수월하게 터키어를 공부했는데, 고급 과정에 들어서자 갑자기 수업 난이도도 높아진데다 본사에서 내려보낸 업무량도 부쩍 늘어나 귀국 뒤에 본사에서 실시할 터키어 평가 시험이 벌써부터 걱정입니다.

9.4 가족을 따라 터키에서 거주하게 된 사람들[ | ]

  • 진이 씨
부산이 고향인 28세의 진이 씨는 터키 교포인 남편이 한국 회사에 입사하여 부산 지점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만나서 결혼하여 8개월 전에 터키에 왔습니다. 베트남, 이란 등에서 살아 온 시댁은 15년 전에 터키에서 정착하여 살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남편과 시누이들은 외양은 한국인이지만 정서는 외국인처럼 느껴질 때가 간혹 있습니다. 낯설고 물설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터키 땅에 남편 하나 믿고 따라온 진이 씨는 처음에는 모든 것이 너무 힘들고 막막하기만 했다고 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한국으로 도로 돌아가 버릴까 하고 고민도 했었지만 터키어학교를 다니면서 이젠 일상회화도 가능해지고 현지 생활도 많이 익숙해져서 지내기가 한결 수월해졌다며 미소짓습니다.
  • 헬렌
중국계 싱가폴인인 40세의 헬렌은 미국인 남편과 결혼하여 미국에서 살다가 남편이 터키로 전근되면서 한 달 전에 터키에 들어왔습니다. 천성이 활발하고 외국 생활 경험이 풍부한 헬렌은 터키어를 공부한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벌써 학교에서 친구들도 여럿 사귀고 터키어도 제법 구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 같은 경우처럼 평소 터키에 관심이 있어 취미 차원으로 터키어를 배우는 사람들도 있지요.

어떤 경우이건 어떤 목적과 이유로 터키어를 배우건 터키어를 공부하는 분들 모두에게 '화이팅'을 외칩니다. '짐승은 냄새로 서로를 사귀고, 사람은 말로써 서로를 사귄다'는 터키 속담이 있습니다. 한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말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터키어를 공부하시는 여러분, 열심히 터키어를 배우셔서 터키라는 멋진 나라도 보다 잘 이해하시고 착한 터키 친구들도 많이 사귀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10 # 안탈리아 여행기[ | ]

10.1 # 내 친구 세빌[ | ]

세빌은 내가 터키에서 제일 처음 사귄 터키 친구입니다. 마르마라 대학교 1학년생이던 세빌은 내가 지내던 기숙사의 옆방에 사는 친구였습니다. 당시 내가 지내던 기숙사에는 터키인 여대생들 수십 명이 있었지만 그들은 외국인인 나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기만 할 뿐 선뜻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천성이 다정한 세빌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스스럼 없이 내게 다가와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녀는 내 손을 꼭 붙잡고 이스탄불 시내를 데리고 다니며 이곳저곳 구경도 시켜주고 터키어 숙제도 도와주었고 터키 도착 첫날 미처 환전을 못했던 내게 자기 지갑에서 서슴없이 돈을 꺼내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나를 여러모로 도와주던 세빌이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 안탈리아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세빌은 자신의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주며 "우리 집에 꼭 놀러와."하고 신신당부하며 안탈리아로 내려갔습니다.

안 그래도 터키에 있을 때 지중해의 휴양도시 안탈리아를 가보리라 마음먹고 있던 참이었던 지라 나는 속으로 '오호, 그것 참 잘됐군.'하고 쾌재를 부르며 "그래, 꼭 찾아갈게."하고 대답하며 세빌을 배웅했습니다.

7월 어느 날, 나는 안탈리아 행을 결심하고 세빌이 적어 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따르릉.

"여보세요."

"세빌, 나 양준이야."

내 목소리를 확인하자마자 세빌은 대뜸 이렇게 말합니다.

"양준, 너 우리 집엔 언제 올 거야? 너 오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음, 그게……저 이번 주말에 찾아가도 되겠니?"

"그래, 빨리 와, 기다릴 게."

금요일 학교 수업이 끝나자 마자 집으로 달려온 나는 점심을 먹고 배낭 속에 들어 있던 책을 쏟고 대신 세면도구와 갈아입을 옷을 배낭 안에 챙겨넣고 버스를 타고 버스터미널 오토가르에 갔습니다.

오토가르에는 수십 개의 버스회사 사무실들이 운집해 있습니다. 여행객들은 사무실 유리창에 붙어있는 행선지들을 확인한 뒤 표를 사서 해당 버스에 타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안탈리아'라고 써 붙여져 있는 어느 버스회사 사무실에 들어가 카운터 직원에게 말했습니다.

"안탈리아 행 버스표 한 장 주세요. 아, 저는 학생이에요. 학생 할인 되지요?"

안탈리아 행 버스표의 가격은 2만여 원 정도였습니다.

이스탄불에서 안탈리아까지는 버스로 12∼14시간. 터키에서는 타 지방으로 버스를 가는 경우 10여 시간이 넘는 게 보통입니다. 때문에 여행객들은 주로 밤차를 타고 취침시간을 이용해 타지로 이동하는 방법을 선호합니다. 내가 탄 안탈리아 행 버스 역시 저녁 때 이스탄불을 출발하여 다음날 아침에 안탈리아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승객들이 다 올라타자 언제나처럼 버스 차장은 승객들의 손에 레몬향 코롱을 뿌려주고 물과 커피, 차, 비스켓 등을 나눠줍니다. 차와 비스켓을 받아 먹고, 한잠 달게 자고 눈을 떠보니 어느덧 동이 터 있습니다. 밤새 강력하게 돌아가서 으실으실 떨게 했던 에어컨은 정작 아침 햇살이 따갑게 내려쬘 때는 꺼져버려 차 안이 여간 덥지가 않습니다.

안탈리아 버스 터미널에 내린 시간은 아침 8시. 후끈한 버스 안에서 내리니 버스 밖은 후끈한 정도가 아니라 찜통 같습니다. 안탈리아가 덥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아침부터 이렇게 더우니 도대체 한낮의 더위는 어느 정도까지 될지 걱정스러웠습니다.

안탈리아의 버스 터미널은 지어진 지 얼마 안 되는지 매우 깨끗하고 넓고 현대적입니다. 터미널 안에는 우체국, 각종 상점들이 있고 샤워실도 갖춰져 있습니다.

세빌에게 도착 사실을 알리기 위해 공중전화를 찾아 어느 가게에 들어가니 가게 주인이 내게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습니다. 한국 사람이라고 하니 가게 주인은 대뜸 또렷한 우리말 발음으로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건넵니다. 내 전화를 받은 세빌은 총알같이 터미널로 달려와 나를 맞이했습니다. 길고 곱슬곱슬한 금발머리에 밝은 청록색 눈, 적당히 그을린 피부에 산뜻한 미니스커트 차림의 세빌은 터키 처녀라기 보다는 캘리포니아 아가씨 같은 인상입니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돌무슈'라는 마을버스를 타고 그녀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10.2 # 지중해의 여유와 낭만이 깃든 도시 안탈리아[ | ]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인 세빌의 집은 비교적 넓고 깨끗한 아파트입니다. 중고등학교에서 수학과 화학을 가르치신다는 세빌의 부모님은 주말을 맞아 마침 친척집에 가 계셨고, 집에는 기숙사에서 사귀었던 23세의 미국 아가씨 크리스티나와 그녀의 친구 브렛이 있었습니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기숙사에 들어와 이스탄불의 터키?학교에 다녔던 크리스티나와는 지난 6월 한 달 간 친하게 지냈던 사이입니다. 그녀의 친구 브렛은 미국 대학에서 터키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25세의 청년입니다. 두어 달 간 동유럽 등지를 함께 여행한 뒤 6월에 터키에 들어와 이스탄불의 터키어학교에서 터키어를 배우던 이들 두 사람은 7월에 안탈리아의 터키어학교로 옮겨갔고, 정 많은 세빌은 이들을 굳이 자신의 집에서 숙식하게 했습니다. 무료숙식의 대가로 크리스티나와 브렛은 장차 미국 유학을 희망하는 세빌의 영어회화 선생님 역할을 해 주고 있었습니다.

크리스티나는 밝은 갈색 머리와 갈색 눈, 날씬한 체격에 언제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는, 상냥하고 서글서글한 사람입니다. 브렛은 언제나 짧은 머리와 검은 뿔테 안경, 목까지 단추를 채운 셔츠의 아주 단정한 차림입니다. 그는 차림새뿐 아니라 태도와 행실 역시 단정하고 조용합니다. 보통의 미국 청년들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는 모르몬교도입니다.(이 종교는 우리나라에는 '말일성도 교회'라는 이름으로 진출해 있지요.) 모르몬교도들은 술과 담배, 혼전의 문란한 이성교제 등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크리스티나와도 애인 사이가 아니라 단순한 여행 동반자 관계일 뿐입니다. 크리스티나는 미국에 따로 애인이 있습니다.

집에 들어선 세빌은 식탁에 빵과 차, 호두가 들어간 꿀, 잼, 토마토, 오이 등으로 아침식사를 차렸습니다. 맛있게 아침식사를 먹은 뒤 브렛은 '사즈(saz-터키의 전통현악기)'를 배우러 교습소에 갔고, 크리스티나와 세빌, 나는 오랜만에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세빌은 안탈리아의 여름은 너무 더워서 낮에는 외출할 수가 없으니 오후 세 시 이후에 나가자고 합니다. 그때까지 크리스티나는 게임을 하자며 터키식 장기놀이 '사트란치(satranc)' 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후 세 시 무렵 사즈를 들고 브렛이 돌아왔고, 우리 넷은 길을 나섰습니다. 남부의 지중해 연안 도시 안탈리아는 이스탄불과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거리에는 야자수가 심어져 있고 사람들은 수영복이나 경쾌한 반바지, 미니 스커트 차림으로 수상보드를 들고 걷고 있고,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거리를 활보합니다. 거리 곳곳에는 휴양지 특유의 여유롭고도 낙천적이고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깁니다. 관광도시답게 거리마다 기념품가게, 호텔, 환전소들이 즐비합니다.

우리들이 먼저 간 곳은 부둣가. 오래되어 보이는 예쁘장한 목조주택들과 카펫 가게들이 들어 찬 좁은 골목을 한참 지나니 호텔과 레스토랑, 바, 기념품 가게 등이 운집한 리조트 타운이 나오고 파란 수면 위에 배들이 정박해 있는 항구가 드러납니다. 하얀 벽과 빨간 기와지붕의 지중해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들, 울창한 초록 나무, 새파란 넓은 바다, 그 위에 떠 있는 하얀 배들은 그야말로 사진엽서 속의 풍경 그대로입니다. 어느새 세빌의 고향 친구 에즈라도 합류하여 다섯 명이 된 우리 일행은 아름다운 항구를 배경으로 함께 사진도 찍고 음료수를 마시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해가 떨어질 무렵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 세빌의 어머니가 전날 만들어 놓으셨던 음식으로 대충 저녁을 먹었습니다. 저녁을 먹은 뒤 갑자기 크리스티나가 세빌에게 케이크를 만들어 보라고 합니다. 세빌은 "케이크를 만들어 본 적이 없는데"하면서도 부엌에 들어가 밀가루 반죽을 하기 시작합니다. 한편 거실 소파에 앉은 브렛은 최근에 사랑에 빠진 사즈를 품에 안고 악보책을 펴놓고 노래까지 불러가며 애절한 가락을 열심히 튕깁니다. 크리스티나는 피곤했던지 세빌의 케이크가 오븐에서 나오기도 전에 그녀의 임시 침실인 베란다에 여행용 침대를 펴고 누워 정신 없이 잠을 잡니다. 지난 밤 버스에서 새우잠을 잤던 나도 얼른 자리 펴고 눕고 싶습니다. 내 표정을 본 세빌은 자신의 침실을 비워주며 내게 피곤할테니 얼른 자라고 합니다. 정말 피곤했던 나는 그녀의 침대 위에 누워 그대로 골아 떨어졌습니다. 거실에서 아련히 들려오는 브렛의 사즈 가락을 자장가 삼아 말입니다.

10.3 # 자폰과 칭쳉총[ | ]

다음날인 일요일 아침 느지막히 일어난 우리들은 전날 밤 세빌이 구워놓은 케이크와 우유로 간단히 아침을 때웠습니다. 남의 집에 느닷없이 그것도 선물도 없이 빈손으로 들이닥친 무례한 객이었던 나는 미안한 마음에 점심식사는 내가 한국식으로 차리겠다고 제안했습니다.

한국요리를 해주겠다고 큰소리는 쳤지만 막상 슈퍼마켓에 들어가 장을 보려니 도대체 무슨 요리를 해야 할지 딱히 떠오르지가 않았습니다. 한국 요리의 필수재료인 간장, 고추장도 구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이럴 때 제일 간단하게 할 수 있는 볶음밥을 하기로 하고 야채와 햄, 쌀과 인스턴트 수프를 샀습니다. 또 세빌의 부모님께 드리는 선물로 제과점에서 비스킷도 약간 샀습니다. 집으로 들어온 나는 세빌에게 중국식 볶음밥을 해 주겠다고 하자 세빌은 중국음식은 먹어본 적이 없다며 무척 기대하는 눈빛입니다. 그러고 보니 터키에는 한국이나 유럽에는 흔하디 흔한 중국음식점이 거의 없습니다. 쌀을 씻어 밥을 하고 야채와 햄을 썰어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하고 기름에 볶는 과정을 세빌은 옆에서 일일히 메모를 하며 주의 깊게 지켜봅니다. 드디어 볶음밥과 수프, 샐러드로 점심상이 차려졌습니다. 다행히 세빌과 크리스티나, 브렛 모두 볶음밥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날은 여전히 무덥습니다. 샤워를 해도 몸은 금방 땀으로 뒤범벅이 됩니다. 우리는 어제처럼 오후에 외출을 하기로 했습니다. 브렛은 사즈 교습소에 간다며 나갑니다. 나는 세빌네 가족 앨범을 뒤적이기도 하고 터키어 그림책을 읽기도 하고 널찍한 테라스에 앉아 크리스티나와 수다를 떨기도 하다가 세빌은 무얼 하나 찾아보니 세빌은 구슬, 끈, 철사, 고리 등이 가득 담긴 상자를 앞에 놓고 테이블에 앉아 땀을 흘려가며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습니다. 얼마 뒤 브렛이 돌아와 함께 차와 비스킷을 먹을 때도 세빌은 "이게 나한텐 비스킷이야."하면서 구슬과 끈을 손에서 놓지 않습니다. 이윽고 세빌이 "다 끝났다!"하면서 들어올린 것은 예쁜 목걸이였습니다. 까만 비즈 사이 사이에 옛 오스만 시대의 주화가 달린 胄�見?세빌은 선물이라며 내 목에 걸어주었습니다.

오후에 세빌과 나, 크리스티나는 해안가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그곳은 아주 넓은 면적에 울창한 푸른 숲과 산책로, 체육관과 공연장, 푸른 바다와 연결된 모래사장이 있는 무척 멋진 공원이었습니다. 마침 일요일이라 공원에는 관광객들뿐만 아니라 터키인들도 가족끼리 나와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산책을 하다가 잠시 쉬기 위해 우리 셋은 벤치에 앉았는데, 옆 벤치에 앉아있던 청년이 나를 힐끔 보더니 세빌에게 "네 외국인 친구와 이야기 나누고 싶은데."하고 말을 꺼냅니다. 세빌은 "수작 부리지 말어!"하면서 우리를 일으켜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럭저럭 날도 저물어 우리는 공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데 한무리의 남자 청소년들이 수영복 차림으로 수상보드를 들고 가다가 나를 보더니 "우우, 자폰 자폰! 칭쳉총!"('자폰'이란 일본 사람이라는 뜻이고, '칭쳉총'은 동양인을 놀릴 때 쓰는 말입니다)하면서 원숭이처럼 깩깩거리며 5분여를 쫓아옵니다. 이스탄불에서도 가끔 겪었던 일이지만 이렇게 여럿이 5분여나 놀리며 쫓아왔던 적은 없었기 때문에 적이 당황스럽기도 하고 몹시 불쾌하고 창피할 뿐만 아니라 세빌과 크리스티나에게도 여간 미안하지가 않았습니다.

내일은 월요일, 오늘 안탈리아에서 밤차를 타고 올라가 내일 아침 이스탄불에 도착하여 바로 학교에 가야만 합니다. 그러려면 서둘러 버스터미널에 가야 합니다. 세빌의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짐을 챙기고 세빌에게 작별인사를 하니, 세빌은 "왜 벌써 가려고? 더 있다 가. 너도 크리스티나와 브렛처럼 우리집에서 머물면서 안탈리아의 터키어 학교에 다니지 그래?"하면서 아쉬워합니다. 세빌은 자신이 중학교 때 직접 뜨개질한 거라면 털실로 짠 냄비받침과 내가 좋아하는 터키의 미남가수 타르칸의 사진 엽서를 건네줍니다.

세빌과 크리스티나와 함께 버스회사 사무실에 가서 이스탄불행 버스표를 산 뒤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다음에 꼭 다시 보게 되기를 바란다며 작별의 포옹을 하고 나는 이스탄불행 버스에 올랐습니다. 세빌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내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10.4 # 버스에서 당한 봉변[ | ]

버스의 내 좌석번호는 4번. 출입구 바로 뒷자리입니다. 터키의 버스들은 일행이 아닌 경우 남녀를 따로 앉게 하고 일반적으로 여성들에게는 앞좌석을 배치해 줍니다. 내 옆자리 3번 좌석에는 아주 우아하고 품위 있어 보이는 초로의 부인이 앉았습니다. 세련되게 웨이브진 옅은 금발 머리에 곱게 화장한 얼굴, 품위 있고 우아하게 터키어를 구사하는 그녀는 외국인인 내게 관심을 보이며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자신의 소개를 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메랄. 나이는 쉰여섯. 전직 중학교 터키어 교사였다는 그녀는 지금은 은퇴한 뒤 휴식하고 여행 다니며 삶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메랄 여사는 내게 "지금도 터키어를 잘 하지만 앞으로 더욱 열심히 터키어 공부를 하여 이 책을 읽게 되기를 바래요."라고 말하며 자신이 평소에 가지고 다니던 조그맣고 예쁜 기도서를 선물로 건네주었습니다. 기도서에는 볼펜으로 밑줄도 쳐져 있고, 말린 장미꽃잎도 꽂혀 있습니다.

제일 앞자리인 우리 좌석의 앞에는 차장석이 있습니다. 버스가 운행 중일 때에는 출입구 계단 위에 접이의자를 펴고 차장이 앉아 있습니다. 우리 버스의 차장은 머리가 약간 대머리이긴 하지만 비교적 잘 생긴 젊은 남자입니다. 메랄 여사와 나의 대화를 들은 차장은 내게 "터키어를 참 잘 하시는군요."하고 말을 건네며 관심을 보이면서 커피도 부지런히 갖다주는 등 친절을 보였습니다. 칭찬에 우쭐해지고 친절한 태도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참 친절한 차장이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뒤 메랄 여사는 차장에게 자신은 허리가 안 좋다며 보아하니 버스 안에 빈 좌석도 있는데 빈 좌석에 가서 편하게 앉아 있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차장은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옆자리에 앉아 계신 승객분은 혼자 앉아 가셔야 되잖아요. 여자 승객을 혼자 앉게 하는 것은 위험합니다."하며 허락해 주지 않았습니다. 나에 대해 이렇게 배려해 주는 차장에게 나는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그로부터 다시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버스 안의 불들이 꺼지고 승객들은 다들 취침에 들어갔습니다. 메랄 여사도 가늘게 코를 골며 졸기 시작했습니다. 몸은 피곤하지만 잠이 금방 오지 않아 한참 뒤척이던 나도 어느새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잠결에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의 발등과 발목을 만지는 손길이 느껴졌습니다.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 발을 뒤로 뺀 뒤 다시 깜빡 잠이 들었는데 얼마 뒤 다시 또 누군가가 내 발등과 발목을 만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순간 잠이 번쩍 깨이며 소름이 오싹 끼쳐왔습니다. 내 앞에 앉은 이는 차장뿐입니다. 차장석은 일반 좌석보다 몇십 센티 내려가 있고, 일반 좌석과는 칸막이가 되어 있지만 밑 부분에는 10여 센티 정도 틈이 벌어져 있습니다.

당시 나는 긴 주름치마에 맨발에 뮬을 신고 있었습니다. 차장은 다들 잠든 틈을 노려 칸막이 안으로 손을 뻗쳐 내 쪽을 더듬고 있었던 것입니다. 들리는 소리라곤 옆 승객과 뒷승객들의 코고는 소리들 뿐. 지금 이 순간 깨어있는 이는 나와 차장, 그리고 운전기사 아저씨뿐인 듯 싶었습니다. 나는 얼른 발을 다시 뒤로 빼고 자세를 고쳐 앉았습니다. 내가 깨어난 것을 눈치챈 차장은 동작을 멈췄습니다. 다들 자는 사이에 이 놈이 계속 이상한 짓을 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일어나는 한편 이 놈에게 대체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나 하고 잠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증인도 증거도 없는데다가 이 버스를 타고 앞으로 여러 시간을 더 가야 하는데 "이 나쁜 성추행범 같으니!"하고 소리를 질러봤자 내 입장만 더 곤란해질 것 같아 나는 그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못한 채 다들 잠든 깜깜한 버스 안에서 불안에 떨면서 식은땀을 흘리며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차장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지 더는 이상한 짓을 해오지 않았습니다.

어느덧 여느 때와 같이 해는 다시 떠오르고 버스는 휴게소 앞에 멈춰 섰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승객들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나 신선한 공기와 아침 요깃거리를 위해 버스 밖으로 나갔습니다. 메랄 여사도 나갔습니다. 차장은 태연한 표정으로 내게 아침식사를 하지 않겠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퉁명스럽게 "아니, 됐어요."하고 대꾸하고 얼굴을 돌렸습니다.

그로부터 이스탄불 오토가르에 도착하기까지 몇 시간 동안 나는 내내 불안하고 불쾌한 마음으로 차장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자신의 행위를 눈치챘음을 알아챈 차장은 적반하장 격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별별 일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사실 내가 당한 일은 굳이 상대적으로 비교를 하자면 그리 심한 정도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니, 사람에 따라서는 '봉변 당했다'는 표현을 붙일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잊어먹고 넘겨 버릴 일은 분명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즐거웠던 안탈리아 여행은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벌어진 어처구니 없는 사건으로 유쾌하지 못한 끝맺음을 하고 말았습니다.

여성 여행자 여러분, 언제나 어디서나 음흉한 늑대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그리고 장거리 버스에 탈 때는 가능하면 차장석 바로 뒷자리는 피하도록 하세요.

11 # 에페스 여행기[ | ]

11.1 # 에페스 가는 길[ | ]

애초에 에페스(Efes)는 나의 여행 계획에 잡혀 있는 코스가 아니었습니다. 터키에서의 체류 날짜가 얼마 남지 않은 8월달 어느 날 이전부터 별러 왔던 파묵칼레(Pamukkale) 여행을 신청하기 위해, 이제는 단골이 된 술탄아흐메트 거리의 '세븐 스튜던트' 여행사를 찾았습니다. 나를 반갑게 맞이한 여직원 부르주는 "주말에 파묵칼레를 가고 싶다고? 파묵칼레는 당일치기로 충분히 둘러 볼 수 있는 곳이니까 에페스도 코스에 같이 끼워서 토요일에 에페스를 관광하고, 일요일에 파묵칼레를 관광하는 일정이 좋을 것 같은데."하고 권유합니다.

에페스라, 여행 안내 책자를 보니 고대 유적이 많은 역사 깊은 도시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중고등학교 때 제일 좋아했던 과목이 세계사 아니었던가! 재미있겠네, 나는 부르주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금요일 저녁에 이스탄불을 출발하여 토요일에 에페스를 관광하고 셀축(Selcuk)의 호텔에서 1박한 뒤 일요일에 파묵칼레를 관광하고 월요일 아침에 이스탄불에 도착하는 일정을 짰습니다. 비용은 160달러, 차비, 세끼 식사 및 호텔 1박 숙박비, 관광지 입장료 및 가이드 비가 포함된 가격입니다.

그 다음주 금요일 저녁 여행사 앞에서 서비스 버스를 타고 오토가르까지 가서 이즈미르(Izmir)와 셀축을 경유하는 보드룸(Bodrum)행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에페스에는 마땅한 숙박시설이 없기 때문에 숙박은 인근 도시 셀축에서 해야 합니다) 버스 안에는 북미 대륙과 유럽에서 온 배낭족 젊은이들이 왁자지껄 떠들고들 있습니다. 버스표에 적힌 번호대로 좌석을 찾아 앉으니 내 옆 좌석에는 웬 동양인 남자가 앉습니다. '어, 이상하다? 터키 버스에서는 같은 일행이 아닌 남녀가 나란히 앉는 법이 없는데.'

지난 번 안탈리아 여행 때 버스 안에서 남자 차장에게 당한 봉변도 있고 하여 외간남자에 대한 경계심이 생긴 데다 더욱이 옆자리 남자가 미남도 아니어서 기분이 좋지가 않습니다. 좀 있다가 차장이 표 검사를 할 때 항의해야지 하며 남자의 기색을 살피니 미녀가 아닌 외간여자랑 나란히 앉게 되어 기분이 안 좋기는 이 남자도 마찬가지인지 벌레 씹은 표정으로 앉아 있습니다. 흥! 그렇다면 피장파장이군. 건너편 좌석에 앉은 홍콩인들로 보이는 동양인 남녀와 일행인 듯 합니다. 이윽고 감색 제복 차림에 금발 단발의 여자 차장이 표 검사를 위해 우리 좌석 앞에 오더니 "당신들은 일행인가요?"하고 묻습니다. 내가 "모르는 남자예요."하고 대답하자 옆자리의 남자 역시 재빨리 "같은 일행이 아니에요."하고 거듭니다. 하지만 피곤에 찌든 표정의 차장은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그냥 지나갑니다.

건너편 좌석의 홍콩인 남녀가 주섬주섬 도시락을 꺼내자 옆자리 남자는 그들 뒤의 빈 좌석으로 옮겨갑니다.

잠시 뒤 차장은 커피와 과자를 승객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합니다. 집에서 급히 나오느라 제대로 저녁을 챙겨먹지 못했던 나는 커피와 과자로 요기를 할 요량으로 기다리는데 피곤에 지친 차장은 빨리 자기 일 끝내고 자리에 앉아 쉬고 싶었는지 내 자리를 그냥 휙 지나가 버립니다. 다시 불러 세워 과자 달라고 하기도 겸연쩍어 나는 속으로만 '어!'하고 짧게 외치고 말았습니다. '에고, 내 과자 돌리도!'하고 속으로 외치면서요.

버스 안의 에어컨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찬공기가 쌩쌩 뿜어져 나옵니다. 그럴 줄 알고 미리 준비해 간 긴팔 가디건을 두르고, 부릉부릉 달리는 차 안에서 한숨 자고 눈을 떠보니 어느새 아침이 밝았습니다. 간밤의 에어컨은 꺼지고 따가운 여름 아침 햇살이 기분 나쁜 더위를 가중시킵니다. 얼른 가디건을 벗고, 기지개를 켜니 여전히 피곤한 표정의 차장이 차(茶)를 건네줍니다.

잠시 뒤 버스는 터키 제3의 도시 이즈미르의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사람들이 우르르 내립니다. 승객들이 반 이상 내리고 한결 가뿐해진 버스는 다시 셀축을 향해 쌩쌩 달려갑니다. 한 시간 반 뒤 버스는 셀축의 버스 터미널에 당도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니 여느 관광지가 그러하듯 호객꾼들이 여럿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들 사이에서 사람 좋게 생긴 대머리 할아버지가 내 성(姓)이 적힌 종이를 들고 서 계시다가 나를 보더니, "네가 이씨(李氏)지?"하고 다가오십니다. 하긴 그 버스에서 내린 동양인은 나 혼자뿐이니 나를 알아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할아버지를 따라 호텔로 가는 길에는 마침 장이 서 있습니다. 싱싱해 보이는 야채와 과일들이 아침 공기를 더욱 신선하게 만들어 줍니다. 할아버지는 호텔 방에 짐 내려놓고 기다리고 있으면 곧 투어 버스가 올 거라고 말씀하신 뒤 즐거운 여행을 하라고 인사하시며 총총 사라지십니다. 호텔 방에 가방을 내려놓고 욕실로 들어가 여름 더위로 인해 땀으로 뒤범벅된 몸에 찬물을 끼얹어대며 샤워부터 했습니다. 수건으로 채 물기를 닦기도 전에 요란스레 전화벨이 울립니다. 투어 버스가 호텔 앞에 도착해 있다는 것입니다. 얼굴에 로션 바를 틈도 비스킷 하나 입 속에 집어넣을 새도 없이 젖은 머리칼에서 물기 뚝뚝 떨어뜨리며 방 밖을 나와 호텔 현관으로 달려가니 여행사의 미니버스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버스 안에 올라서니 안에는 이미 한무리의 유럽과 북미 배낭족들이 앉아 있습니다. 나를 태운 버스는 잠시 달리더니 어느 펜션 앞에 멈춰 섭니다. 젊은 동양 여성 넷이 올라탑니다. '어느 나라 사람들일까?'

버스는 다시 부릉부릉 어디론가 달려갑니다.

11.2 # 세계사 강의의 현장학습지 에페스[ | ]

터키의 서해안 도시 에페스(Efes). 영어로는 에페수스(Ephesus)로 표기하고, 신약 성경에서는 '에베소'로 등장하는 이 지역은 '세계사 강의의 현장 학습지'라는 명칭을 붙여줘도 절대 지나치지 않은, 풍부한 역사 유적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한적한 시골 마을에 불과했던 에페스는 19세기 말 오스트리아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 개발되어 오늘날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원래 에페스는 기원전 7∼6세기에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고대 도시입니다. 또한 기원전 4세기경 히포다모스(Hippodamos)라는 당대의 유명한 건축가에 의해 도시 계획이 이루어져 도로들이 뻗치고 웅장한 공공 건물들과 신전, 개인 주택들이 쭉쭉 늘어선 고대의 첨단 도시의 위용을 자랑했습니다. 또 서기(A.D.) 시대로 들어서서는 바울이 이곳에서 기독교를 전파하며 신약 성경의『에베소서』를 쓰기도 했습니다. 고대 도시의 영화는 지금도 에페스 곳곳에서 그 흔적을 고스란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십여 분 남짓 달린 끝에 투어 버스가 멈춘 곳은 어느 들판. 버스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립니다. 두 대의 미니버스에 나눠 타고 온, 오늘 함께 여행할 일행은 삼십여 명. 캐나다에서 왔다는 배낭족 무리들이 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우리들을 인솔할 가이드는 50대의 터키인 아저씨입니다. 자신을 '존'이라는 영어 이름으로 소개한 이 아저씨는 피곤이 가득한 표정으로 다소 어눌한 영어로 우리들이 내려선 들판에 대해 설명을 합니다.

"이곳은 아르테미스 신전(Temple of Artemis)이야."

수렵과 처녀의 수호신, 멋진 여장부 아르테미스를 모셨던 신전. 고대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혔었다던 아르테미스 신전. 그러나 현재의 모습은 그지없이 실망스러웠습니다. 허허벌판에 기둥 하나 달랑 남아있을 뿐이니까요. 드넓은 들판을 한참 걸어 들어가 기둥 하나 보고 돌아서 나오며 일행들은 "뭐야? 아무 것도 없잖아!"하고 투덜거립니다. 이때 동양 여자 한 명이 내 옆에 다가와 영어로 말을 건넵니다.

"안녕하세요? 당신은 어느 나라에서 왔나요?"

한국 사람이라고 대답하니 자신은 대만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녀에게 같이 온 일행들은 친구들이냐고 물으니 학교에서 만나서 알게 된 사이라고 답합니다. 배낭여행 온 대만 여대생들로 생각하며, 이것저것 물어보니 네 명의 동양 여성들은 여대생들이 아니라 고등학교에서 한문, 수학, 화학,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들이며 나이는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중반이었습니다. 얼굴이며 차림새며 아무리 봐도 이십대 초중반 정도로밖에는 안 보였는데...

교사 연수 때 친해지게 되었다는 이들은 방학 때마다 이렇게 함께 여행을 다닌다고 합니다. 이름을 물으니 쏼라쏼라 하는 중국어 발음이라 영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종이에 한자로 자신들의 이름을 써 주지만 헉! 모르는 글자들이 중간중간 섞여 있습니다.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한문시간에 좀더 열심히 공부하는 건데. 그녀들에게 내 이름을 한자로 써주니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상한 발음으로 읽습니다. 일행 중 막내인 스물 아홉 살의 황 선생님은 자신을 캔디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학생들이 과거와는 달리 교사의 말에 잘 순종하지 않아서 교사들이 힘들어 한다고 말한 뒤 대만의 고교생들은 선생님 말을 잘 듣냐고 물으니 애들 나름이라고 합니다. 수학 선생님에게 학생 시절 내가 제일 싫어했던 과목이 수학이었노라고 하니 그녀는 자신도 수학은 좋아하지 않지만 수업 시간에는 애들에게 문제 내주고 풀라고 시키면 되니까 별 어려움이 없다고 웃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간 곳은 에페스 유적지.

양 옆에 기둥들이 쭉 늘어선 대리석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아고라 광장이 나옵니다. 존은 일행에게 에페스에 관한 간략한 설명을 한 뒤, "각자 자유롭게 관람하고, 한 시 반까지 주차장 투어 버스 앞으로 집결"하고는 해산시킵니다. 이곳은 정말 '와!'하는 감탄사에 느낌표가 2의 열 제곱 정도는 붙어야 될 곳이었습니다. 와아!!!!! 마샬라∼∼(영어의 'wonderful' 정도에 해당되는 터키어 감탄 표현입니다) 세계사 교과서에서 보았던 고대 유적들이 전부 이곳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닙니까!

수용규모가 2만 5천이나 된다는 고대 원형극장(The Grand Theatre), 셀시우스 도서관(Celsus Library), 하두리아누스 신전(Temple of Hadrian), 트리야누스의 샘(Trajan Fountains), 고대 목욕탕(Scholastika Baths), 고대 시장터, 고대 광장, 성 마리아 교회, 유방이 수십 개가 붙은 아르테미스 여신상 등이 전시된 박물관 등등.

대만 선생님들과 나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유적들을 돌았습니다. 표지에 '土耳基(터키의 중국어 음역)'라고 씌어진 중국어 안내책자를 읽으며 열심히 살펴보던 대만 선생님 그룹의 왕언니인 서른다섯 살의 역사 선생님은 기념품 가게에서 에페스 지도와 안내책자를 여러 권 삽니다. 귀국한 뒤 대만어로 된 터키 여행 안내책자를 쓰기 위한 자료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감동 어린 표정을 지으며 한껏 고상하게 유적들을 감상하려는 주인의 노력을 비웃기나 하듯 내 배에서는 주책 없이 꼬르륵거리며 '밥 줘 밥 줘' 사정없이 고함을 질러댑니다. 하긴 어제 저녁부터 지금까지 거의 먹은 게 없으니 뱃속도 성이 날 법하지요. 일행 중 스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백인 아가씨들 셋이 몰려다니는 그룹이 있는데 그중 금발머리 아가씨는 빵과 비스킷이 가득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며 계속 먹어댑니다. 어찌나 배고픈지 그녀에게 '나도 좀 주라'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한 시 반까지 주차장으로 모이라고 일행들에게 신신당부했던 존은 정작 두 시가 다 되서야 어슬렁어슬렁 나타나더니 일행을 두 대의 미니 버스에 다시 태우고 소풍 나온 아기돼지들 숫자 점검했던 식으로 인원 체크를 한 뒤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식당으로 가는 십오분 여를 못 참고 차 안에서 내 배는 '밥 줘 밥 달란 말이야'하고 고함을 질러대며 주인 체면을 무참하게 구깁니다.

식당은 널찍한 마당과 테라스가 있는 무지무지 넓은 곳입니다. 이곳에서는 손님이 먹고 싶은 음식들을 진열장에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종업원들이 그 자리에서 접시에 담아주는 식으로 서빙을 합니다. 배가 몹시 고팠던 나는 접시에 닭고기, 밥, 샐러드, 빵 등 음식을 한가득 담아 들고 햇볕 쏟아지는 창가 테이블에 대만 여선생님들과 나란히 앉았습니다. 우리의 맞은편에는 백인 아가씨들 셋이 앉았습니다. 음식을 먹으며 통성명을 하니 백인 아가씨들은 국적이 모두 다릅니다. 옅은 갈색의 짧은 곱슬머리에 초록색 눈, 투명한 피부에 유난히 앳되어 보이는 얼굴의, 아기천사를 연상시키는 여자는 오스트리아 인, 밤색의 숏커트 헤어에 짙은 눈썹의 여자는 포르투갈 인, 금발의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명랑한 표정의 여인, 빵 봉지를 들고 다니며 먹어 내가 군침을 삼키게 만들었던 여자는 독일인, 이렇게 국적이 다른 이들은 모두 스무 살 전후의 아가씨들로 이스탄불에서 두 달여간 함께 판매 아르바이트를 하며 알게 된 사이라는데, 아르바이트 기간이 끝나 곧 자기네 나라들로 돌아가게 되어 귀국 전에 함께 여행을 하는 거라고 합니다.

포르투갈 여자에게 내가 한때 좋아했던 록 기타리스트 누노 베텐코트(Nuno Bettencourt)가 포르투갈 태생 아니냐며 말을 붙이니 누노 베텐코트는 포르투갈 젊은이들의 영웅이라며 자부심어린 표정을 짓습니다. 식사를 마친 뒤 독일 여자는 먹다 남은 음식들을 미리 준비해 둔 비닐 봉지에 주섬주섬 챙겨 넣습니다. "이렇게 하면 한끼 식사값이 굳으니 얼마나 경제적이야."하면서요. 독일인들이 알뜰하다는 얘기는 익히 들은 바이지만 과연 듣던 대로군. 대만 여선생님은 자신의 접시 위에서 빵을 한 덩어리 집어 알뜰한 독일 아가씨에게 건네 줍니다.

11.3 # 에페스에 새겨진 기독교의 발자취[ | ]

식후경(食後景). 식사를 마친 우리는 성모 마리아(St. Mary's House)의 집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 마리아는 바로 이곳 에페스에서 노년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성모 마리아의 집은 산 속에 있습니다. 산 어귀에 세워진 터키어, 영어, 불어 등 각국어 안내표지판 사이에 뜻밖에도 한국어 안내판이 서 있습니다. 터키의 관광지에서 처음으로 접해보는 한국어 안내판입니다. 하긴 신흥 기독교 대국이 바로 우리 대한민국이니 기독교 유적지에 한국어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것도 이상할 건 없지요. 이슬람 국가인 이곳 터키에도 한국인 선교사들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고, 터키 내의 큰 교회들 대부분은 한국인들에 의해 세워진 것들입니다.

저는 특정 종교의 신도는 아니지만 부모님이 카톨릭 신도이신 데다가 평소 성모님을 위대한 여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사셨다는 집을 찾아 가니 왠지 모를 감격과 경건함이 일었습니다. 촛불이 가득 세워진 제단 앞에서 잠시 기도를 드린 뒤 밖으로 나와 계단을 내려가니 성수(聖水)가 나온다는 수도꼭지가 있습니다. 손에 성수를 받아 담아 입으로 가져가 몇 모금 마시고 있는데 알뜰한 독일 아가씨가 생수값 굳었다고 좋아하며 가방에서 빈 생수병을 냉큼 꺼내 물을 받아 담습니다. '이곳의 물을 담아 가지 마시오'라는 경고문이 그녀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나 보지요.

다음 코스 역시 기독교 유적지. 산 위에 위치한 옛 교회터입니다. 카파도키아에서와 같은 멋진 암굴 교회를 기대하고 올라가 보았으나 이곳에는 유적이라고 쳐 줄만한 별다른 흔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산 주변의 평화로운 전원 풍경은 마음에 듭니다. 산 아래에는 시골 사람들이 직접 만들어 파는 옥외 수공예방과 만두집들도 있습니다.

한편 오전부터 심드렁했던 가이드 존은 오후에도 자신의 본분인 관광 안내에 여전히 열의를 보이지 않습니다. 심드렁한 태도로 아주 기본적인 사항들만 설명하고, 누가 질문하면 마지못해 대답할 뿐입니다. 카파도키아 여행 때의 정력적인 젊은 가이드 아흐메트의 열성적인 자세와는 사뭇 대조적입니다.

우리의 다음 코스는 터키 단체 관광 코스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상점 방문 코스입니다. 우리가 당도한 곳은 초대형 귀금속점. 웬만한 백화점을 연상시킬 정도로 규모도 크고 외관도 멋집니다. 세공 공장이 한데 있는 이곳은 가이드 존의 말에 의하면 터키 최고의 품질을 보증하는 이름난 귀금속점이라고 합니다.

젊은 배낭족들이 주류를 이루는 우리 일행은 귀금속점 입장에서 보면 "봉"과는 거리가 있겠지만 그래도 점원들은 열심히 손님들에게 들러붙어 세일즈를 펼칩니다. 별 생각 없이 유리 진열장을 훑어보고 있는 내게 한 젊은 여점원이 "곤니찌와"하며 일본말로 인사를 해 옵니다. 나는 일본 사람이 아니라 한국 사람이라고 하자, 약간 무안한 표정이 된 점원은 자신은 앙카라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했다고 얘기합니다. "그 대학에는 한국어과도 있지? 나는 한국에서 터키어 배우러 이리로 왔는데"하고 시작된 대화는 계속 이어졌고, 어느새 나는 '이거 뭐 좀 사줘야겠는 걸'하며 물건을 살피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께 선물할 생각으로 성모 마리아가 새겨진 은반지를 골라 가격을 물으니, 원래 가격은 15달러이지만 '내게는 특별히' 12달러에 해 주겠답니다. 터키에는 은 장신구류가 흔하고 값도 싼 편입니다. 길거리 리어커에서는 그보다 훨씬 싼 가격의 은반지들도 많이 팔지만 이 은반지는 존의 말마따나 품질이 무척 좋아 보입니다. 12달러 값어치는 훨씬 넘어 보입니다. 더우기 성모 마리아가 사시던 곳에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니 나름대로 의미도 있을 것 같아 결국 에페스 기념품으로 반지를 샀습니다.

이로써 오늘 에페스 관광 일정은 끝. 친절한 대만 여선생님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주소를 교환한 뒤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호텔 식당의 테라스에 앉아 푸짐한 스파게티 정식으로 저녁을 먹고 방으로 들어와 터키 배우가 어설프게 성룡 흉내를 내는 유치한 터키 영화를 텔레비전에서 잠시 보다가 가방을 정리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아침 일찍 파묵칼레에 가야 하니까요.

12 # 파묵칼레 여행기[ | ]

12.1 # 길동무 로빈[ | ]

다음날 아침, 서둘러 아침 식사를 마친 뒤 가방을 챙겨들고 8시에 호텔 로비로 내려가니, 버스 터미널까지 데려다 주기로 되어 있는 가이드 존은 아직 당도해 있지 않습니다. 오늘 나와 함께 파묵칼레에 가기로 되어 있는 미국 여자도 진작에 나와서 로비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어제 함께 관광했던 삼십여 명 중 이 미국 여자와 나만 오늘의 일정이 파묵칼레 관광으로 같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들 일정이 다릅니다.)

프론트에 가서 존은 언제 오냐고 물으니 곧 올테니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합니다. 미국 여자와 나는 로비의 의자에 나란히 앉아 통성명과 호구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미국 여자는 자신의 이름이 로빈이라고 합니다. 로빈! 오호! 한때 로빈 잰더(Robin Zander)라는 금발 장발의 미남 록 싱어를 열렬히 좋아했던 나는 지금도 로빈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왠지 가슴이 설렙니다. 그런데 지금 내 옆에 앉은 로빈 역시 금발 장발이긴 한데 꽃미남 로빈 잰더와는 정반대로 '희한한' 용모를 지녔습니다. 피부는 파리할 정도로 희고 회색에 가까운 푸른 눈에는 생기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녀의 얼굴은 지나칠 정도로 좁고 긴 것이 말[馬]을 연상시킵니다. 환경과 외모 사이에 어떤 상관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미국 미네소타 주의 말[馬] 많은 시골 농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신은 그녀에게 예쁜 얼굴은 내려주시지 않으신 대신 훌륭한 두뇌를 선사하셨는지, 26세의 그녀는 미국의 명문 대학에서 사회학박사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같은 대학에서 공부하는 터키인 유학생 친구를 따라 방학 중에 터키에 놀러 왔다가 혼자 관광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어제보다도 더 무기력한 표정으로 러닝 셔츠 바람의 존이 호텔 로비에 들어선 것은 거의 아홉 시가 다 되어서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승용차에 로빈과 나를 태워 셀축의 버스 터미널 앞에서 내려 준 뒤 파묵칼레 행 차표 두 장을 사서 우리에게 건네고는 다시 차를 몰고 돌아갔습니다. 우리가 받은 파묵칼레 행 차표는 A회사의 것인데 마침 터미널에서 대기하고 있던 B회사의 파묵칼레 행 버스 직원이 우리에게 버스에 얼른 타라고 합니다. 회사가 다르다고 하자 상관 없다고 합니다. 약간 미심쩍기는 했지만 저쪽에서 상관 없다고 하는데야 뭐....

셀축 발 파묵칼레 행 버스는 여태까지 탔던 시외버스들보다 크기가 좀더 작고 차장도 없고 음료 서비스도 없습니다. 하긴 두어 시간이 채 안 걸리는 거리니까 그런 것들이 굳이 필요하지도 않지요. 원래 파묵칼레에 가기 위해서는 파묵칼레 인근의 데니즐리(Denizli)라는 도시까지 가서 그곳에서 미니 버스를 타고 가야 합니다. 하지만 여름철 관광 성수기에는 효율적인 관광객 수송을 위해 셀축 등의 인접 도시에서는 파묵칼레행 직행버스가 운행됩니다.

우리가 탄 뒤로도 버스에는 속속들이 사람들이 올라타는데 거의 대부분이 우리 같은 외국인 관광객들입니다. 버스가 막 출발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동양인 남녀 다섯 명이 헐레벌떡 버스에 올라타더니 맨 뒷자리로 들어가 앉는데 반갑게도 한국말이 들려옵니다. 요즘은 터키를 찾는 한국인 여행객들이 많이 늘어났음에도 그간 여행길에서 이상하게도 한국인 여행객들을 전혀 만나지 못했던 나는 버스가 잠시 휴게소에 멈춰 섰을 때 뒷자리로 달려가 그들과 얘기를 나눴습니다. 대학생들인 그들은 원래 두 개의 그룹으로 유럽을 여행하다가 터키에서 우연히 만나 어제 함께 에페스를 둘러보고 오늘 파묵칼레를 찾아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가지고 있던 초컬릿과 어제 에페스에서 샀던 기념품 몇 가지를 그들에게 나눠주고 이스탄불의 내 거처 연락처를 적어 주었습니다.

이윽고 버스는 파묵칼레의 관광안내소 앞에 멈춰 섰습니다.

12.2 # 세파와 볼칸[ | ]

버스에서 내린 로빈과 나는 우리 이름을 쓴 종이를 들고 서 있을 여행사 직원을 찾았으나 그런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황한 우리는 관광안내소의 할아버지 직원에게 문의를 했습니다. 이리저리 전화를 넣어 본 할아버지는 우리를 데리러 사람이 곧 이리 올 테니 걱정 말라시며 사무실 안에서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로빈이 큰 배낭을 짊어지고 있는 걸 보신 할아버지는 짐을 첸?줄 테니 관광하는 동안 여기에 놓고 다니라고도 하십니다.

사무실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보니 벽에 붙은 '사람을 찾습니다' 전단이 눈에 들어옵니다. 내용을 읽어보니 토모코라는 일본 여자가 꼭 1년 전 이맘때 이곳에서 실종됐습니다. 행방불명된 딸을 애타게 찾는 그녀의 부모는 터키에서는 엄청난 고액인 1만 달러를 사례금으로 내걸었습니다. 그걸 보며 '이국 땅에서 길 잊어먹지 말고 낯선 사람 함부로 따라가지 말아야겠구나'하고 다시 한 번 다짐하고 있는데, 키는 후리후리하게 크지만 얼굴에는 아직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청년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우리에게 자기를 따라오라고 합니다.

그를 따라 어느 골목 안으로 들어가니 골목 안에 있는 어느 식당의 테라스 위에서 어떤 남자가 "안녕, 네가 로빈이고 네가 이(李)씨지?"하며 우리에게 호들갑스럽게 인사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파묵칼레 관광을 책임질 가이드 세파(Sefa)입니다. 세파는 오늘 우리와 함께 파묵칼레를 관광할 일본 여자 사치코와 호주 여자 줄리를 인사시킵니다. 샐러드와 뵈렉(터키식 페스트리 요리), 돌마(터키식 쌈밥 요리) 등으로 점심을 먹은 뒤 네 여자는 세파의 승용차에 올라탔습니다.

첫 번째로 당도한 곳은 실내 수영장. 무척 넓고 깨끗하며 시설도 좋은 이 수영장은 일요일을 맞아 외국인 관광객과 터키인들로 북적입니다. 미리 수영복을 준비해 온 사치코와 줄리, 로빈은 얼른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물에 뛰어듭니다. 수영복이 없는 이에게는 빌려 주기도 한다며 세파는 내게도 수영을 권했지만 수영을 할 줄 모르는 나는 그냥 테이블에 앉아 있기로 했습니다.

세파는 자신이 몇 살쯤 되어 보이느냐고 묻습니다. 선글라스와 모자로 얼굴이 상당부분 가려지기는 했지만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에 장난을 잘 치는 세파는 삼십대 중반 이상은 되어 보이지 않습니다. 더우기 대부분의 터키인들은 실제 나이보다 다소 노숙해 보인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짐작했던 나이보다 몇 살 깎아 말해야 실제 나이에 근접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한 나는 "삼십"하고 답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 대답이 달라질 걸"하며 세파가 선글라스와 모자를 벗자 대머리와 주름진 이마가 드러나서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나이는 내 짐작보다 정확히 스무 살이 더 많았습니다. 부인과 아이는 있느냐는 나의 물음에, 순간적으로 표정이 어두워진 그는 헝가리 출신의 부인과는 사실상 이혼한 상태이며 자녀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고보니 잠깐 들렸던 그의 여행사 사무실에 냉장고며 간이침대, 취사도구 등이 놓여 있던 게 떠올랐습니다. 그는 집도 가족도 없이 사무실에서 혼자 숙식을 해결하며 지내는 듯 했습니다.

수영을 마친 여자들이 테이블에 와 앉았습니다. 관광안내소로 로빈과 나를 마중나왔던 꺽다리 총각도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수줍음 많은 이 꺽다리 총각의 이름은 볼칸(Volkan). 열아홉 살 대학 새내기입니다. 데니즐리가 집인 그는 이스탄불에서 대학에 다니는데, 여름 방학을 맞아 고향에 와 있는 동안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영어 회화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 동네 아저씨 세파의 여행사 일을 돕고 있습니다. 세파는 우리더러 볼칸에게 영어로 말을 걸어 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외국 여자 넷에게 둘러싸여 영어로 질문 공세까지 받으니 가뜩이나 숫기 없는 볼칸은 부끄러워서 그런지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수그리고는 영 대답을 못합니다.

12.3 # 파묵칼레의 로마 유적들[ | ]

다음 코스로 세파가 우리를 데려간 곳은 고대 로마 시대의 유적지인 히에라폴리스(Hierapolis)입니다. 기원전 2세기에 융성했었다는 이곳에는 고대 건물터와 증기 목욕탕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찾아간 아프로디시아스(Aphrodisiaa)라는 곳 역시 영화로왔던 고대 로마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유적지입니다. 이곳에 있는 수용규모 삼만 명의 대형 원형극장은 로마 시대의 원형 극장들 가운데 가장 보존이 잘 된 곳이라고 합니다.

어제 에페스에서는 아르테미스 신전을 보았었는데 오늘 이곳에서는 아프로디테의 신전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이 지역은 아프로디테를 숭배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위용을 자랑했을 신전이 오늘날에는 기둥들만 남아 있습니다.

12.4 # 솜으로 지은 성(城)[ | ]

터키어로 '파묵(pamuk)'은 '솜'을 뜻하고, '칼레(kale)'는 '성(城)'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파묵칼레(Pamukkale)는 '솜으로 지은 성' 정도로 해석될 수 있겠지요. 터키의 대표적인 관광지 중 한 곳인 파묵칼레는 그 이름처럼 하얀 목화솜이 수북이 쌓여있는 것처럼 보이는 온천입니다.

탄산칼슘이 다량 함유된 온천수가 주변 암벽으로 흘러내리면서 대지 역시 목화솜낮?하얗고 반질반질하게 변했고, 움푹 패인 틈들 사이로 온천수가 고이면서 희고 푸른 온천수와 하얀 대지가 어우러져 마치 쏟아지던 폭포가 그대로 굳어진 것 같은 풍경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멀리서 보면 이름 그대로 솜으로 지은 성같이 보입니다. 주변이 온통 하얀 백색 천지의 천연 온천장에서 관광객들은 온천물에 발을 담그고 휴식을 취합니다.

줄리와 사치코, 로빈과 나도 세파와 볼칸의 안내에 따라 파묵칼레 온천에 당도했습니다. 언덕과 봉우리가 층층이 서 있고 그 사이사이로 온천물이 고여 있는데, 바닥은 새하얗고 맨질맨질한 것이 흡사 눈 쌓인 산 내지는 스케이트 장에 온 것 같습니다. 줄리와 사치코, 로빈은 그 자리에서 옷을 훌러덩 벗더니 안에 미리 입어 두었던 수영복 차림으로 온천수 속에 풍덩 뛰어듭니다. 하지만 온천수의 깊이는 무릎 높이 정도여서 수영을 할 수는 없습니다. 욕조 속에 몸 담그는 기분으로 있다가 나오는 거지요. 신발을 벗고 바지를 무릎 위로 걷어올린 나도 그들을 따라 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온도는 적당히 미지근한 정도입니다.

아래도 위도 바로 옆도 온통 새하얀 곳에 둘러싸여 있으니 동화속 세상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듭니니다. 물 속에 발 담그고 있는 것도 기분이 좋지만 맨질맨질한 하얀 바닥 위를 걸어다니는 기분도 참 환상적입니다. (* 이곳은 바닥이 미끄러워 자칫 넘어지기 쉽습니다. 주의하세요!)

온천을 나온 우리는 볼칸의 안내로 온천 물줄기를 따라 형성된 자연 산책로를 맨발로 쭉 걸어나갔습니다. 아주 얕은 온천물 웅덩이가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합니다. 적당히 따뜻한 물에 발바닥을 적시며 맨들맨들한 석회 바닥 위를 걸어갈 때의 쾌감이란! 그런데 몇 킬로미터에 달하는 이 산책로에는 간혹 석회 바닥과 물 웅덩이가 끊어지고 자갈길이 나오는 곳도 있어 그때마다 발바닥이 여간 아프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줄리와 사치코와 나는 볼칸의 뒤에서 열심히 걷고 있는데, 느닷없이 로빈이 자신은 포장도로 길로 갈 터이니 산책로 끝나는 지점에서 만나자고 합니다. 로빈은 이곳 길도 잘 모르고 터키 말도 모르는데 행여 길을 잃고 헤매게 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지만 우리가 미처 붙잡을 틈도 주지 않고 로빈은 휙 사라져 버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산책로 끝 지점에 당도하고 한참 뒤에도 로빈은 나타나질 않습니다. 우리들을 무사히 인솔해야 할 책임이 있는 볼칸은 무척 당황하며 주변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로빈을 찾아 헤맵니다. 로빈이 길을 잃고 헤매나 싶어 나도 걱정이 됩니다. 줄리와 사치코도 주변을 둘러보며 로빈을 찾아 다녔습니다.

얼마 뒤 다행히도 저쪽에서 걸어오는 로빈이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오는 도중 길을 잃었었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자기 때문에 걱정했던 것은 미처 헤아리질 못했는지 로빈의 표정은 무심하기만 합니다.

12.5 # 줄리와 사치코[ | ]

자갈길을 맨발로 걸어오느라 지친 우리는 세파가 잘 아는 어느 펜션의 옥상 테라스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습니다. 펜션의 친절한 여종업원이 가져다 준 차를 마시며 줄리와 사치코, 나와 로빈은 각자 자기 소개를 했습니다.

일본인 사치코는 삼십대의 사무원이고, 호주 출신의 29세의 줄리는 일본의 외국인 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줄리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급에도 한국인 학생들이 몇 명 있다면서 김아무개 박아무개 하고 그들의 이름을 죽 열거하더니 한국인 학생들은 영어도 잘 하고 총명하다고 칭찬을 합니다. 그러면서 일본인들은 영어도 잘 못하고 태도도 소극적인데 반해(바로 우리 옆에 앉은 사치코 역시 줄리와 친구 사이라는 데 영어도 잘 못하고 무척 소심해 보입니다) 한국인들은 영어도 잘하고 태도도 능동적이라고 추켜세웁니다. 한국 사람이 앞에 있으니까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겠지만 어쨌거나 듣는 내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습니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만족스러우냐고 내가 물으니 일본은 임금 수준도 높고, 영어를 잘 하는 백인들에 대한 선망 의식 같은 게 있기 때문에 자기 같은 사람이 지내기에는 아주 편하다고 줄리는 솔직하게 말합니다. 자신은 호주의 외딴 시골의 가난한 농가에서 여러 형제들 틈에서 무척 궁핍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지금은 일본에서 영어를 가르쳐서 돈도 왠만큼 벌고 하니 팔자 핀 것 아니냐며 웃습니다.

휴가를 이용해 열흘 간 터키 여행을 했던 사치코와 줄리는 오늘 저녁에 비행기를 타고 이스탄불에 가서 내일 일본으로 돌아가야 하고, 로빈과 나는 밤새 버스를 타고 이스탄불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치코와 줄리는 세파의 차를 타고 공항으로 가고, 나와 로빈은 이스탄불 행 버스표를 받기 위해 볼칸과 함께 관광안내소로 향했습니다.

오늘 저녁 데니즐리에서는 이 지역 최대의 이벤트가 벌어집니다. 터키 최대의 축구팀인 갈라타사라이와 데니즐리 축구팀 사이에 시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축구에 열광하는 터키인들은 각 지역마다 연고지 축구팀이 있습니다. 작은 지방 도시인 데니즐리의 축구팀은 중앙 무대에서는 명함도 못 내미는 동네 축구단입니다. 갈라타사라이와 데니즐리와의 싸움은 비유를 하자면 국가대표팀과 대학교 축구팀과의 격돌 같은 셈입니다. 실력 차이야 자명하지만 어쨌거나 데니즐리에서의 갈라타사라이의 경기는 날이면 날마다 볼 수 있는 행사가 아니기에 데니즐리 주민들은 잔뜩 흥분되어 있습니다. 볼칸 역시 빨리 집에 가서 7시에 벌어지는 축구 시합을 보아야 한다며 우리에게 인사를 하고 서둘러 집으로 갑니다.

12.6 # 잊을 수 없는 맛[ | ]

관광안내소에서 이스탄불행 차표를 받아 살펴보니 먼저 이곳 파묵칼레에서 미니버스를 타고 데니즐리 버스 터미널까지 가서 그곳에서 이스탄불 행 버스를 타야 합니다. 미니버스 승차 시각은 저녁 8시. 지금 시각이 저녁 6시니 아직 시간 여유가 있습니다. 로빈과 나는 잠시 기념품 가게를 둘러본 뒤 저녁을 먹기로 했습니다.

기념품 가게에서 사진엽서 몇 장과 은반지, 터키 전통 무늬가 새겨진 키림백을 샀습니다. 가게 주인에게 터키말을 몇 마디 건네니 아주 좋아하며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작은 장식핀 하나씩을 우리에게 서비스로 줍니다.

사진엽서를 사야겠다던 로빈은 가게 몇 군데를 돌며 한 장 한 장씩 엽서를 꼼꼼히 살폈으나 마음에 드는 게 없는지 사지를 않습니다. 사진엽서야 다 비슷할 텐데 무얼 그리 까다롭게 구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로빈의 까다로운 취향은 음식점을 고를 때도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가이드북을 이리저리 뒤적이던 로빈은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무슨무슨 터키 음식을 기어코 먹어야 되겠다며 식당 찾아 삼만리를 합니다. 인근에 식당은 많이 있지만 로빈이 원하는 음식을 파는 곳은 영 나오지를 않습니다.

날도 덥고 낮에 많이 걸어 발도 아프고 배도 고프니 그냥 아무 곳에나 들어가서 얼른 식사를 했으면 좋으련만, 유난스런 로빈의 태도에 정말 짜증이 납니다. 식당 찾아 동네 한 바퀴를 돈 우리는 다시 관광안내소에 가서 친절한 할아버지 직원에게 식당을 물어 보았습니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갸웃거리시더니 로빈이 원하는 음식을 만들어 파는 곳은 지금 이곳에는 없을 거라며 대신 음식 맛있게 잘 만드는 식당 한 곳을 알려 주십니다. 할아버지가 가리켜 주신대로 찾아간 식당은 테이블은 꽤 많지만 손님은 단 한 사람도 없고 별다른 실내 장식도 없고 종업원도 없는, 휑뎅그레한 곳입니다.

늙은 할아버지 혼자서 주인, 종업원, 주방장, 캐셔 등으로 1인 다역을 하고 계십니다. 더욱이 이 할아버지는 후두에 문제가 있는 듯 쉰 목소리로 쥐어짜듯 아주 힘들게 말씀을 하십니다. 썰렁한 식당 외관을 보니 음식 수준도 다소 의심스럽긴 하지만 들어온 곳을 다시 나갈 수도 없어서 자리를 잡고 앉아 메뉴를 살펴보았습니다. 로빈은 피자를, 나는 아다나 케밥(Adana Kebap)이라는 요리를 시키고 음료수로 아이란(요구르트를 물에 희석시킨 음료)을 곁들이기로 했습니다. 아다나 케밥이라는 게 어떤 종류의 케밥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번도 안 먹어본 케밥 종류라 궁금하기도 한 데다가 케밥 메뉴 중 제일 위에 이름이 올라있기에 한 번 먹어보기로 한 것이죠.

나중에 알고보니 '아다나 케밥'은 터키의 아다나라는 지방에서 만들어진 케밥으로, 매운 양념이 가미된 것이 특징입니다.

주문하고 한참 지나도록 음식이 나오지 않아 주방쪽을 보니 할아버지는 네루식 아궁이 모양의 전통 터키식 오븐 앞에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열심히 홍두깨를 밀면서 무언가를 만들고 계십니다. 마침내 나온 음식을 먹어보니, 우아! 이건 정말 여지껏 먹어본 터키 음식 중 최고봉, 거의 '아트'의 경지에 이른 맛입니다. 배가 고팠던 데다가 내가 터키 요리를 원체 좋아하기도 하지만 이곳의 아다나 케밥 요리는 '시장이 반찬'을 떠나 정말 환상적인 맛이었습니다. 고춧가루가 들어가 적당히 매운 맛이 도는 석쇠구이 케밥도 감칠맛이었지만 진정한 맛의 정수는 고기 밑에 깔려 나온 빵에 있었습니다. 주문 받은 즉시 밀가루를 반죽하여 홍두깨로 납작하게 밀어 전통 아궁이 오븐에서 갓 구워낸 구수한 피데 빵의 맛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까는 식당을 까다롭게 찾아 헤매는 로빈이 미웠었는데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그 덕분에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됐으니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즉석에서 반죽하여 구워낸 피자를 먹는 로빈 역시 정말 맛있다며 감탄을 내뱉습니다. 더욱 감격스러운 것은 이렇게 맛있고 푸짐한 음식이 우리 돈으로 단돈 2천원이라는 사실!

열심히 음식을 먹는 동안 손님들이 몇 명 들어오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테이블은 비어 있습니다. '아니, 이렇게 음식 잘 하는 식당을 사람들은 왜 몰라주는 거야'하며 안타까운 마음이 일 정도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내가 이 식당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때 식당 이름을 적어 놓았더라면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알려 드릴 수 있으련만. 아무튼, 그때 기막히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신 某식당의 할아버지, 정말 고맙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요, 식당이 나날이 번창하기를 기원합니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와 시계를 보니 일곱시 반. 아직 차 탈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습니다. 로빈과 나는 근처 공터에 앉아 노을로 물들어가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며 로빈이 어제 셀축의 시장에서 샀다는 포도를 후식으로 먹었습니다. (어둑어둑한 공터 흙바닥에 앉아 외국 여자 둘이 포도를 먹는 모습을 떠올리니 우습군요.)

아련히 보이는 파묵칼레의 하얀 석회봉은 노을빛 속에서 금적색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하늘이 완전히 깜깜해졌을 때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골목을 나오는데 골목의 가게들 앞에는 남자들이 옥외 테이블에 자리잡고 앉아 텔레비전을 통해 데니즐리 對 갈라타사라이의 축구경기를 열심히 시청하고 있습니다.

관광안내소 앞에 정차해 있는 데니즐리 행 미니버스에 올라타고 20여 분을 달려 데니즐리 터미널에 내려서 그곳에서 다시 이스탄불행 버스를 타고 로빈과 나는 이스탄불로 돌아왔습니다.

13 # 터키의 여인들[ | ]

여기 소개된 다섯 분의 여인들은 제가 터키에서 지내는 동안 알게 된 분들입니다. 사생활 보호를 위해 이 글에서는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각자 나름대로의 고민을 안고 어려운 처지에서 살아가심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인 제게 아무런 조건 없이 진실되고 따뜻한 애정을 베풀어 주셨던 다섯 분에게 감사 드립니다. 이 분들의 인생에 앞으로는 좀더 따스한 햇살이 비추어지기를 소망해 봅니다.

13.1 미네(15)[ | ]

지난 5월 중학교를 졸업한 미네는 여름방학이 끝나면 고등학교에 진학할 예정이다. 고등학교에서 미네는 건축과에서 공부할 예정이다. 건축 대학을 졸업하여 멋진 여류 건축가가 되어 있는 미래의 모습을 꿈꾸어 보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꿈일 뿐임을 미네는 안다. 여학생 기숙사 청소부 일을 하며 자신과 아홉 살 난 여동생 디뎀을 키우는 어머니를 보면 고등학교를 마치고 취업하여 어머니의 짐을 한시라도 빨리 덜어드려야 하는 것이 그녀 앞의 현실이다.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미네는 속이 상한다. 돈도 제대로 벌어오지 않으면서 걸핏하면 행패를 부리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로부터 어머니가 일방적으로 당해야 했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미네이기에 1년 전 부모님이 이혼할 때 미네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무능력하고 무책임했던 아버지 때문에 식당, 공장을 전전하며 궂은 일을 해오신 어머니의 인생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엄마처럼 살지 말아야지'하고 미네는 다짐한다.

장차 미네는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책임감 있고 능력 있고 다정한 남자와 결혼하여 행복하고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싶다. 중학교 동창인 지금의 남자친구 하이레틴은 잘 생겼고 친절하며 착하다. 하지만 하이레틴이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을 때 미네는 많이 실망했다. 중학교만 졸업한 남자에게 촉망된 미래가 있을 것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13.2 인지(19)[ | ]

안탈리아 출신의 금발머리 초록눈 아가씨 인지는 현재 이스탄불에서 혼자 자취하며 마르마라 대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다. 인지의 꿈은 자신의 언니처럼 미국의 대학에 유학을 가는 것이다. 5살 위의 언니는 인지가 생각해 봐도 정말 다재다능 만능 천재다. 그에 비해 자신은 너무 평범한 것 같아 가끔은 속이 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의 처지에 특별한 불만은 없다.

안탈리아에서 중학교 수학교사와 과학교사로 재직 중이신 부모님은 언니와 인지 두 딸을 자유분방하게 키우셨고, 언제나 변함 없이 사랑해 주고 계신다. 이런 부모님 밑에서 태어난 별 어려움 없이 구김살 없이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대학에 유학가기 위해서는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유학을 가면 어떤 공부를 하고 장차 무엇이 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없다. 다만 좀더 넓고 색다르고 자유로운 곳에서 좀더 멋지고 신나는 생활을 경험해 보고 싶다는 것이 인지가 미국 유학을 꿈꾸는 이유이다.

13.3 제이넵(20)[ | ]

오후 4시 25분. 남편이 집에 들어오려면 아직 다섯 시간하고도 35분이 남아 있다. 제이넵은 바지 속주머니 안에 깊이 숨겨 놓은 담배갑 속에서 또 한 개비를 꺼내어 피워 물고 베란다 밖을 물끄러미 내려다 본다. 갑갑하다. 저 바깥 세계로 훨훨 날아갈 수 있다면, 이 담배 연기처럼. 저쪽 방에서 아슬르한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제이넵의 하늘색 눈에 눈물방울이 그렁그렁 맺힌다. 때론 모든 것이 다 귀찮다. 자신에게 들러붙는 아슬르한조차도…….

제이넵이 결혼한 것은 그녀 나이 열일곱 살때였다. 네 살 위의 남편 아흐메트네 가족과 그녀 가족은 같은 마을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집안끼리 잘 아는 사이였다. 초등학교 졸업 뒤 코란학교에 다니며 주로 집안에 머물러 지내야만 했던 그녀의 삶은 결혼 뒤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결혼하고 얼마 뒤 그녀는 임신을 했고 딸 아슬르한을 낳았다.

아슬르한은 이제 한 살 반. 엄마에게서 잠시도 떨어지려고 하지를 않는다. 전자상가에서 보따리상으로부터 들어온 가전제품들을 파는 남편은 아침 아홉 시에 나가서 밤 열 시에나 들어온다. 낮 동안 근처 가게에 반찬거리를 사러 잠깐 나가는 것말고는 제이넵은 남편 허락 없이 함부로 외출할 수가 없다. 이스탄불에 올라와 산 지 2년여가 되었지만 집 밖을 나와 돌아다녀 본 적이 거의 없다. 남편이 일을 쉬는 주말에는 시골 시집에 내려가 시댁 일을 거들어야 한다.

남편은 자신을 단지 애 낳아 기르고 밥 짓고 살림해 주는 사람으로만 생각하는 것 같다. 자신의 삶이 창살 없는 감옥 같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 부쩍 더 든다. 그녀를 더 절망스럽게 하는 것은 그녀의 삶이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담배마저 없다면 어떻게 지낼까 싶다. 열두 살때부터 담배를 피워왔지만 그녀가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은 아직까지는 친정부모님도 남편도 아무도 모른다. 만일 그들이 안다면 그냥 놔두지 않겠지. 아슬르한은 다시 잠이 들었는지 잠잠하다.

제이넵은 다시 담배를 피워 문다. 그녀의 입에서 담배 연기가 퍼져 나간다, 밖으로 밖으로.

13.4 아르주(28)[ | ]

아르주가 외국인 학생들에게 터키어를 가르치는 일을 한지도 6년이 넘었다. 명문 하제테페 대학에서 터키어를 전공했던 그녀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터키어 학교에서 일자리를 잡았고, 그곳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도 하고 아들 칸도 낳았다. 외국인 학생들에게 터키어를 가르치는 일은 보람도 있고, 재미도 있다. 게다가 수입면에서도 만족스럽다. 박식함과 재치, 인내, 노련함과 함께 아름다운 미소를 지닌 아르주는 터키어 학교의 최고 인기 명강사로 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높다.

하지만 아르주에게는 더 높은 꿈이 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터키어 강사를 하는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가 석사, 박사 과정을 공부하여 미국 대학의 강단에 서서 터키학을 강의하는 것이다. 네 살배기 아들 칸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도 터키보다는 미국이 더 나을 것 같다. 그러기 위해 칸이 더 자라기 전에 구체적으로 계획을 잡아 실현해 나갈 생각이다.

13.5 치뎀(33)[ | ]

때로 치뎀은 생각해 본다. 대체 우리 부모는 무슨 생각으로 나를 낳았을까. 올망졸망한 6남매에게 지독한 가난만을 남긴 채 젊은 아버지는 세상을 떴다. 유복녀 막내딸을 낳고 얼마 뒤 어머니는 동네 홀아비에게 다시 시집을 갔다. 그 집에도 전처 소생의 자식들이 이미 다섯이나 있었고 어머니는 새 남편과의 사이에 아기를 하나 더 낳아 키우느라 먼저 남편과의 소생들은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재혼하기 전에도 치뎀에게는 무관심하고 매정했던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귀여워 한 자식은 큰아들과 치뎀의 바로 밑 여동생이었다. 어머니는 치뎀을 못난이라고 부르며 이런저런 집안일을 쉴새 없이 시키곤 했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는 집에서 큰오빠는 대학에 다니기 위해 외지로 나가고 작은 오빠는 군에 입대하고 배다른 언니는 시집을 갔다. 어린 동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열 한 살의 치뎀은 터키 동쪽 끝의 시골 고향 마을을 떠나 이스탄불로 무작정 상경을 했고 식모살이를 해가며 돈을 모았다.

세월이 흘러 대학을 졸업한 큰오빠는 학교 선생님이 되고 장가를 들더니 못 배우고 가난한 여동생이 창피한지 통 연락을 안 한다. 무심하기는 작은 오빠도 마찬가지다. 가게를 여러 개 하며 넉넉한 살림을 하고 있지만 여동생이 어떻게 먹고사는지는 관심도 없는 모양이다. 자신이 식모살이하며 힘들게 먹여 살린 동생들도 이제 성인이 되어 시집, 장가가서 살고 있지만 치뎀에게 무관심하기는 그들도 마찬가지다. 형제들의 무관심한 태도가 유난히 더 서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만큼 치뎀의 현재의 처지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는 자신에게도 행복한 생활이 열릴려나 기대했던 결혼 생활은 불과 몇 년만에 남편의 암 발병으로 종지부를 찍었고, 남편은 두 살배기 아들과 암 치료비로 인한 엄청난 빚만을 남겨두고 홀연히 세상을 떴다.

직업도 없이 돈도 없이 여덟 살배기 병약한 아들을 데리고 헤쳐가야 하는 세상살이는 치뎀에게는 너무 힘들다. 가끔씩 들려오는 친정어머니의 소식 역시 갑갑하기는 마찬가지다. 재혼한 남편은 걸핏하면 부인에게 폭력을 휘두르기 일쑤고 의붓자식들은 새어머니 알기를 우습게 알고, 재혼한 뒤 낳은 딸은 어머니에 대한 배려 따위는 눈꼽만큼도 없는 안하무인이라 어머니는 생활이 너무 힘들다고 호소해 온다. 그러면서도 그 생활에서 빠져 나올 줄을 모른다. 팔자 고치겠다고 어린 자식들 내팽개치고 가버렸던 어머니의 인생이 고작 이 모양이란 말인가.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연민이 겹치면서 치뎀은 다시 한 번 다짐한다. 나는 우리 자식을 위해서라도 절대 재혼하지 않으리라, 나 혼자서 우리 아들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리라. 하지만 당장 먹을 빵 걱정과 아이 교육비 걱정이 그녀의 어깨를 무겁게 내리 누른다.

14 # 유서깊은 역사를 간직한 에디르네[ | ]

여행 순서대로 글을 연재했다면 에디르네 여행기는 맨 처음에 소개되었어야 했습니다. 에디르네는 제가 터키에서 제일 처음으로 여행한 곳이니까요.

터키에 온지 일 주일째 되었을 때 아직 터키말도 서툴고 집 앞 거리 돌아다니는 것조차도 조심스럽던 때 저의 터키내 보호자라 할 수 있는 한국인 유학생 하미트 아비께서 제게 연락을 하여 아는 일행들과 함께 일요일에 여행계획이 있는데 저를 끼워 주겠다고 제의해 오셨습니다.

혼자서 여행한다는 것은 아직 엄두를 못내던 때인지라 제의를 고맙게 받고 약속된 날짜인 일요일 아침 약속 장소에서 하미트 아비를 만나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간 끝에 도착한 곳은 이스탄불 시내의 어느 사무실. 그곳은 PASIAD(Pasifik Ulkeleri Ile Sosyal ve Iktisadi Dayanisma Dernegi), 즉 '태평양 국가와의 사회 경제 연대협회'라는 거창한 이름을 지닌 사회 문화 교육 장학 재단의 사무실입니다.

오늘은 이 재단에서 장학금을 받아 터키에서 공부중인 아시아 지역 유학생들 및 그들의 지인들이 에디르네로 소풍을 가는 날입니다. 유학생 모임의 장인 하미트 아비 덕에 이 몸도 깍두기로 묻어 가게 된 것입니다.

45인승 버스 안에는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일본 등지에서 온 유학생들 및 이민자 가족들, 그리고 터키인들도 몇 사람 탔습니다. 두어 시간 달린 끝에 버스가 선 곳은 넓고 푸른 풀밭, 피크닉을 하며 점심식사를 하기로 한 것입니다. 케밥을 굽고 샐러드를 만들고 빵을 썰어 맛있게 점심을 먹고 게임도 하고 토론회도 하며 야외에서 두세 시간을 보낸 뒤 다시 차에 올라 30분쯤 더 달리니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인 에디르네 도착!

오늘 우리 일행의 에디르네 관광 안내를 책임져 줄 가이드는 아르바이트로 틈틈이 관광 가이드를 한다는 터키인 대학생 엠레. 우리 일행은 유학생들이 대부분이라 터키에 온 지 일주일밖에 안 되는 나만 빼고 다들 터키어가 능통하니 가이드도 당근 터키어로만 설명을 합니다. 귀머거리인 나를 위해 하미트 아비가 옆에 서서 한국어로 통역을 해 주었습니다. 에디르네(Edirne)는 이스탄불에서 서북서 방향, 그리스와 터키의 국경선 근처에 위치한 도시로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위치에 있다 보니 예로부터 외침을 숱하게 받아 왔습니다.

고대 시대에는 마케도니아에 속해 있기도 했던 이곳은 서기 125년 로마의 황제 하드리안(Hadrian)에 의해 재정비된 뒤 황제의 이름을 따 하드리아노플(Hadrianople)로 불리어졌습니다. 그뒤 비잔틴 제국이 들어서면서 에디르네로 개명되었습니다. 1361년에는 술탄 무라트 1세에 의해 수도로 재정되어 1453년 콘스탄티노플, 즉 현재의 이스탄불이 함락되기 전까지 오토만 제국의 수도 역할을 해나갔습니다. 18세기에는 유럽 7대 도시의 하나로 꼽힐 만큼 대도시였다고 합니다.

오래된 도시답게 에디르네의 거리에는 오래된 목조가옥들과 시장, 교각, 대상들이 자고 가던 여관, 궁전, 종교 관련 시설들, 이슬람 사원 등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며 위용을 뽐내고 있어 도시 전체가 대형 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위치한 터키 이슬람 미술 박물관(Museum of Turkish and Islamic Art)과 고고학 박물관, 민족지학(誌學)박물관(Ethnographic Museum)에는 고대 로마 시대의 유물들을 비롯하여 아름다운 옛 유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에디르네의 으뜸 명물은 단연 셀리미에 사원(Selimiye Mosque)입니다. 터키 건축의 신화적 인물 미마르 시난(Mimar Sinan)에 의해 16세기 후반에 설계된 셀리미에 사원은 거대한 돔 지붕 둘레로 네 개의 높은 첨탑(minarets)이 우뚝 선 채 오토만 건축의 진수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슬람 사원에 들어가려면 팔다리가 가려지는 옷을 입고 여성들은 머리를 가려야 합니다. 우리 일행은 거의 대부분 이슬람교도들이라 여학생들도 모두 머릿수건을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사원에 들르게 될 줄 몰랐던 나는 맨머리에 반팔 티셔츠 차림입니다. 다행히 사원 입구에는 여성방문객들을 위한 머릿수건과 가운이 몇 개 걸려 있습니다.

유명도는 덜하지만 연혁으로 따지자면 에스키 사원(Eski Mosque)은 셀리미에 사원의 고조할아버지뻘입니다. 15세기 초 메흐메트 1세의 명에 의해 세워진 에스키 사원은 '오래된 사원'이라는 이름 그대로 에디르네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입니다. 사원의 문은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반면 건물 벽체는 돌로 되어 있어 멋진 대조를 이룹니다. 사원 내부는 꾸란의 경구들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습니다.

15세기 중반에 세워진 위치 셰레펠리 사원(Uc Serefeli Mosque) 역시 건축사에 있어 중요한 건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위치 셰레펠리'란 '세 개의 발코니가 달린'이라는 뜻인데 실제로 이곳 사원의 높은 첨탑에는 세 개의 발코니가 달려 있습니다.

이곳에는 머릿수건이 비치되어 있지 않아 들어가기를 망설이고 있는데 고맙게도 일행인 태국인 여학생이 자신의 긴팔 셔츠를 내게 빌려 주고 터키인 소녀가 머릿수건을 빌려주어 사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제 경우와 같은 곤란을 당하고 싶지 않으시거든 터키를 여행하시게 되는 여성 여행자 여러분들은 필히 긴팔 셔츠와 스카프를 준비해 가시기 바랍니다.

이외에도 에디르네에는 15세기, 16세기에 세워진 병원, 목욕탕, 신학교 건물들이 옛 정취를 풍기며 늘어서 있고, 매년 여름 '크르크프나르(Kirkpinar)'라는 오일레슬링 대회가 열려 많은 구경꾼들이 찾고 있습니다. 세 군데의 사원을 둘러보고 노천 카페에서 차를 한 잔 마신 뒤 버스에 올라타니 어느덧 하늘이 어둑어둑해 집니다. 네 시간을 달려 버스가 이스탄불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완전히 깜깜해져 있었습니다.

15 # 여행자를 위한 서바이벌 터키어[ | ]

15.1 # 터키말을 배워봅시다[ | ]

아시다시피 터키 사람들은 터키말을 씁니다. 물론 외국인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찾아오는 관광대국이다보니 터키 내의 웬만한 관광지에서는 영어도 잘 통하니 터키말을 몰라도 터키 여행을 즐기는 데는 별 지장이 없습니다. 하지만 현지 분위기를 보다 생생하게 느끼기를 바라고 현지인과 보다 친밀한 관계를 맺기를 원한다면 현지말을 아는 것이 큰 도움이 되겠죠.

알타이계 어족 투르크 어군에 속하는 터키어는 우리말과 어순이 같고, 조사가 있는 등 우리말과 문법적으로 유사한 부분이 많고, 간혹 한국말과 비슷한 어휘들도 있고 발음이 명확하며 철자대로 발음되기 때문에 한국인이 배우기에 크게 어렵지 않은 언어입니다. 두세 달 정도만 배우면 간단한 의사소통은 큰 무리 없이 할 수 있으며, 6개월 정도 배우면 별 불편 없이 생활회화를 구사할 수 있습니다.

국내에서 터키어를 가르치는 대표적인 교육기관은 한국외대 터키어과와 부산외대 중앙아시아과가 있으며 일반인들은 한국외대에서 하는 10주 과정의 일반인을 위한 외국어 교육과정에 등록하여 배울 수도 있고, 서울 홍대입구에 있는 이스탄불 문화원(tel. 02-338-1823, http://www.turkey.or.kr)에서 터키인 네이티브 스피커로부터 생생한 터키어를 배울 수도 있습니다. 또 시중에는 터키어 회화책과 문법책도 몇 종류 나와 있으니 독학도 가능합니다.

참고로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터키어 교재들을 소개합니다.

·기초터어키어 문법(서재만著 /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터어키어 문법(김효정著 /도서출판 펴내기)
·터키어강독(김대성著 /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여행필수 터키어 회화(김대성著 / 문예림)
·알기 쉬운 터키어 입문(명지출판사)
·터어키-한국어 사전(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한·터·영어 사전(도서출판 펴내기)
·Berlitz Turkish English / Ingilizce Turkce (터·영 / 영·터 소사전)
·Lonely Planet Turkish Phrasebook
·Barron's Getting by in Turkish (테이프 교재)

터키 현지의 대표적인 터키어 교육기관은 TOMER(http://www.tomer.ankara.edu.tr ; tel. 90-312-432-9405)입니다. 이곳에 대한 설명은 본 칼럼 '터키어학교 이야기'편에서 자세히 다룬 바가 있으니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사실 터키어에 대해서는 네이티브 스피커 파티히 선생님이 본 사이트에서 명강을 펼치고 계시니 제가 본 칼럼에서 터키어가 어쩌구 하고 떠들어대는 것은 주제 넘는 짓입니다만 본 장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터키어를 전혀 모르는 한국인 여행자들이 터키 여행에서 무사히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서바이벌 터키어임을 밝힘으로써 저의 주제 넘는 짓거리에 대한 양해를 구하는 바입니다.

15.2 # 서바이벌 터키어 강좌[ | ]

자, 그러면 본격적인 서바이벌 터키어 강의에 들어가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외국어를 배울 때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은 인사말입니다. 우리말을 전혀 못하는 외국인이라도 한국말로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면 듣는 우리들은 흐뭇해지고 외국인이 기특하게 여겨지잖아요. 여러분이 터키에 가게 되면 현지인들에게 미소 띈 얼굴로 이렇게 말해 보세요.

▼ 멜하바(Merhaba)

아마 상대방도 미소로 화답해 올 겁니다. "멜하바"는 '안녕하세요'라는 뜻입니다.

그럼 터키어로 '고맙다'는 표현은 어떻게 할까요. 밤낮 "땡큐"만 외쳐대는 것보다는 이왕이면 터키어로…그런데 터키어로 '고맙습니다'라는 말은 좀 길고, 발음도 조금 까다롭습니다.

▼ 테셰큐레데림(Tesekkur ederim)

이 말이 입에 붙지 않는다면 좀 더 간단한 표현도 있습니다.

▼ 사올(Sag ol)

'테셰큐레데림'보다는 격식을 덜 갖춘 말입니다만 일상 회화에서는 친한 사이에서 격의 없이 쓰입니다. '아주' 고마울 경우에는 앞에 '촉'을 붙이면 됩니다.

▼ 촉(cok)

즉, '촉 테셰큐레데림'(아주 고맙습니다) '촉 사올'(아주 고마와)

터키어에서 요긴하게 쓰여지는 매직 워드가 있습니다. 발음도 아주 사랑스러운

▼ 규젤(guzel)

'규젤'은 '예쁘다', '멋지다', '좋다'는 뜻입니다. 즉 예쁜 아이를 보았을 때, 음식이 맛있을 때, 경치가 아름다울 때, 상대의 제안이 마음에 들 때 "규젤!"하고 외치면 이 말을 듣는 상대방은 아주 좋아할 겁니다. 아주 좋을 경우에는 앞에 '촉'을 붙여 "촉 규젤!"하면 됩니다.

어쩐 이유에서인지 터키에서 동양인은 아주 인기가 있고 호기심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터키인들이 여러분에게 일본 사람이냐고 묻거나 (동양인하면 으레 일본에서 온 것으로 생각들을 하니까요)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해 주세요.

'한국'을 뜻하는 ▼ 코레(Kore) 혹은 '한국인'을 의미하는 ▼ 코렐리(Koreli)

터키어 단어 중에는 간혹 우리말과 비슷한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 수(su)

네, 바로 '물(水)'입니다. 여행을 다니다보면 자연 목도 자주 마르게 되는데 가게나 식당에 가서 물 달라고 하면서 "워터"라고 하는 것보다는 "수"라고 하는 편이 말하기도 쉽고 듣는 이 입장에서도 더 잘 알아들을 수 있지 않겠어요. 사람은 물 없으면 살 수 없지만 물만 마시고 살 수도 없지요. 당근! 음식도 먹어야죠. '음식', '먹거리'를 뜻하는 터키어 단어는

▼ 예멕(yemek)

입니다. ("예멕"은 '먹다'라는 동사도 됩니다. 즉, "예멕 예멕"하면 '음식 먹다'라는 뜻이 되지요. 요건 그냥 참고삼아 알아두시고…….)

그런데 식당에 가서 '수', '예멕'만 외치고 종결어미를 생략하면 아무래도 미진함이 느껴지지요. 이럴 때를 위한 마법의 표현이 있으니,

▼ 이스티요룸(istiyorum)

"이스티요룸"이란 '∼을 원해요'라는 뜻입니다. "이스티요룸" 앞에 명사나 동사 원형만 붙이면 자신이 원하는 바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수 이스티요룸" (Su istiyorum, 물 마시고 싶어요), "예멕 이스티요룸"(Yemek istiyorum, 음식 먹고 싶어요) , "차이 이스티요룸" (Cay istiyorum, 차 마시고 싶어요) "케밥 이스티요룸" (Kebap istiyorum, 케밥 먹고 싶어요) "요우르트 이스티요룸" (Yogrut istiyorum, 요구르트 마시고 싶어요) "기트멕 이스티요룸" (Gitmek istiyorum, 가고 싶어요) 등등등…….

다음의 두 단어 역시 터키어에서 중요한 핵심 단어입니다.

▼ 바르(var)

'있다'는 뜻입니다. "수 바르" (Su var, 물 있어요) "만트 바르" (Manti var, 만두 있어요)

▼ 욕(yok)

'없다'는 뜻입니다. "풀 욕" (Pul yok, 우표 없어요), "인산 욕" (Insan yok, 인간이 없어요) '욕'은 구어체에서는 '아니오'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15.3 # 편리한 다용도단어[ | ]

지난 시간에 배운 것부터 다시 복습해 봅시다.

  • 안녕하세요: 멜하바(Merhaba)
  • 고맙습니다: 테셰큐레데림(Tesekkur ederim)
  • 고마와: 사올(Sag ol)
  • 아주 고마와요: 촉 사올(Cok sag ol)
  • 예뻐요, 맛있어요, 멋져요, 좋아요: 규젤(Guzel)
  • 아주 좋아요: 촉 규젤(Cok guzel)
  • 한국: 코레(Kore)
  • 한뮌? 코렐리(Koreli)
  • 물: 수(Su)
  • 음식: 예멕(Yemek)
  • 물 마시고 싶어요: 수 이스티요룸(Su istuyorum)
  • 밥 먹고 싶어요: 예멕 이스티요룸(Yemek istiyorum)
  • 물 있어요: 수 바르(Su var)
  • 물 없어요: 수 욕(Su yok)

어때요? 쉽죠? 그럼, 단계를 조금 업그레이드 시켜 볼까요.

다음에 소개하는 두 단어는 하나를 알면 여러 용도로 쓸 수 있는 편리한 '슈퍼 멀티플' 다용도 단어들입니다.

▼ 에펜딤(efendim)

  • 대답할 때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 "예"하고 대답해야 하잖아요. 터키인이 내게 "양준!"하고 부릅니다. 그러면 나는 "에펜딤!"하고 대답하며 달려갑니다. 전화를 받을 때도 "에펜딤!"하고 받을 수 있습니다. 이때는 첫음절 '에'에 강세를 주고 끝음절을 살짝 내려야 합니다.
  • 상대가 한 말을 못 알아들었을 때
'뭐라고요? 잘 못 알아들었는데 다시 한 번 말해 주실래요?'하는 의미로 쓰여지는, 즉 영어의 'Pardon?'에 해당되는 표현이지요. "에펜딤?" 이때는 끝음절의 '딤'에 강세를 주고 끝을 살짝 올려줍니다.
  • 호칭
'어르신', '선생님', '바깥양반(즉, 남편)' '손님'의 의미로도 쓰여집니다. 젊은이가 동네 할아버지에게, 가게 점원이나 웨이터가 손님에게, 기혼 여성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남편을 언급할 때, 이슬람교의 이맘이나 종교 선생님을 호칭할 때 '에펜딤'은 두루두루 쓰여집니다.

▼ 부유룬(buyurun)

  1. '자! 여기': 상대에게 돈이나 물건을 건네며
  2. '자, 어서 드시죠': 상대에게 음식을 권할 때
  3. '어서 옵쇼!': 가게 주인이 호객행위를 할 때
  4. '자, 어서 들어와': 문 앞에서 상대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권할 때
  5. '자, 앉으세요': 상대에게 자리를 권할 때
  6. '자, 말씀하세요': 상대가 할 말이 있다고 했을 때

15.4 # 한국말과 터키말의 닮은꼴 단어들[ | ]

외국인들이 터키어를 배울 때 편한 점 가운데 하나로 풍부한 외래어 차용이 있습니다. 터키어에는 아랍어, 페르시아어, 불어, 영어에서 유래한 단어들이 많으며 심지어 중국어에서 유래한 단어들도 있고 앞서도 언급했지만 우리말과 비슷한 단어들도 간혹 있습니다.

여러분이 긴급 상황을 맞이했을 때 터키어를 전혀 몰라도 '텔뮷?(telefon, 전화), '폴리스'(polis, 경찰), '트렌(tren, 기차)', '탁시'(taksi, 택시), '오텔(otel, 호텔)' 등을 외치면 의사소통이 이뤄질 수 있습니다.

아, 그리고 부록으로 한 가지 더! 우리말과 비슷한 터키 단어들로 어떤 게 있는지 궁금하시죠. 몇 가지를 공개합니다.

  • 수(su): 물
  • 차이(cay): 차
  • 만트(manti): 만두
  • 카박(kabak): 호박
  • 인산(insan): 인간
  • 이심(isim): 이름
  • 마마(mama): 맘마(아기 밥)
  • 다/데(da/de): ∼도(=too)
  • 에(e): ∼에
  • 쉬이르(siir): 시(poem)

어때요? 흥미롭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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