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화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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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화의 정치학 : The Politics of Islamisation[ | ]

정치학의 세계에서는, 목적이―낱말이나 용어가 아니라―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정치가가 쓰는 용어에 오도되어서는 안되며, 이러한 용어들 뒤에 있는 의도를 조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슬람 근본주의(Islamic fundamentalism), 이슬람 국가(the Islamic state), 이슬람화(Islamisation), 등등은 70년대 후반부터 몇몇 무슬림 국가에서 지배적 정치가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쓰이던 용어들의 일부이다. 또한, 서구의 대중매체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겠지만, 이 용어들을 대중화시키는 데에 정말로 열광적이었다. 이 章에서 우리는 파키스탄의 특수한 예를 참고하여, 이슬람화라고 대체로 알려진 것들의 진정한 사회-정치적 함의를 철저하게 살펴보고 아울러 비판적으로 평가할 예정이다.

우선, ‘이슬람화’라는 용어를 누가 언제 쓰느냐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우리의 문맥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이슬람화 또는 이른바 이슬람 근본주의라는 용어의 이면에 숨은 진정한 의도를 밝히고자 한다면, 이것들은 매우 결정적인 질문이다. 우리 앞에는 이슬람의 근본정신의 강화를 격렬하게 부르짖는 세 나라, 즉 사우디 아라비아, 이란, 그리고 파키스탄이 있다. 이들은 이슬람 법을 강화함으로써 같은 목표를 도모하는가, 아니면 서로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는가? 조금 깊이 고찰해 본다면 그들은 서로 다른 동기를 가지고 있음이 입증된다. 이른바 이슬람화는, 후술할 것이지만, 현상태를 영속시키기를 원하는 정치인들에 의해, 참신한 뉘앙스로 그들이 처한 난국을 타개하는 강력하고 심지어 치명적인 무기가 되어왔다.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은, 한 편으로 사우디 아라비아와 파키스탄,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 이란은 서로 다른 동기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반대의 목적을 추구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서로를 비난하기를 그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우연히도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들은 제3세계라고 불리게 된 범주에 속한다. 이 나라들은 이런저런 시대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서구의 식민지 권력의 지배를 받았다. 오늘날조차도, 이 나라들은 이런저런 경로로 경제개발이나 지배자들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서 이전에 식민지를 지배했던 권력들에 의존한다. 따라서 서방세계는 그의 학자들을 통해서 이슬람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를 투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이미지는 널리 퍼졌고 많은 사람들의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한 판단은 이 관점에 의해 채색되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지적한다 :

르낭으로부터 골드치허, 맥도날드, 폰 그루네바움을 거쳐 깁과 버나드 루이스에 이르는 동양학자들은 이슬람을 이를테면 ‘문화적 종합체’로 파악했다 …… 그것은 이슬람 민중의 경제, 사회 그리고 정치로부터 따로 떼어 연구될 수 있다는 것이다. 동양학(Orientalism)의 관점에서 본 이슬람의 의미는, 가장 간결한 공식을 찾고자 한다면, 르낭의 첫 번째 논문에서 찾을 수 있다: 이슬람을 가장 잘 이해하려면 이슬람을 ‘천막과 부족’으로 환원시켜야 한다. 식민지주의와 세계적 여건과 역사적 발전 등이 미친 영향은, 동양학자들에게는 장난꾸러기 소년이 무시하거나 심심풀이로 때려잡는 파리와 같은 것이어서, 결코 이슬람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킬 수 있을 만큼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서구 세계의 매체에 의해 빚어진 ‘이슬람 근본주의’라는 용어 또한 어떤 뿌리깊은 함의를 가지고 있으며, 아랍과 이슬람을 그 안에 끼워 맞추는 관점을 제공한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한 서구 세계의 시각을 간결하게 평한다 :

“(서방의) 아랍과 이슬람에 대한 가장 간단한 인식조차도 매우 정치화되어 귀에 거슬릴 정도로 만드는 데에 기여한 것이 세 가지 있다: 첫째, 동양학의 역사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서방세계에 만연한 反 아랍 反 이슬람의 편견의 역사; 둘째, 아랍과 이스라엘 시온주의 사이의 투쟁, 그리고 미국의 유태인들과 아울러 자유주의 문화와 일반 대중에게 그것이 미치는 영향; 셋째, 아랍이나 이슬람을 정의하거나 냉정하게 논의할 수 있게 하는 문화적 입장이 거의 전무하다는 것. 나아가서, 현재 중동을 규정짓는 것은 강대국 외교, 석유 경제,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고 민주적인 이스라엘과 사악하고 전체주의적인 테러집단 아랍이라는 이분법이므로, 중동(즉 ‘무슬림 세계’)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말하는 이가 화제에 대한 명확한 관점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두 말할 나위 없이 매우 기대하기 힘들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서구적 태도에 의해 바로 우리 자신이 심대하게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이 긴 인용문은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한 서구의 관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필요하다. 이것은 이슬람 세계에서 이슬람의 이름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옹호하거나 변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슬람 근본주의의 제반 현상을 올바른 관점으로 파악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이 현상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기 이전에, 이란에서의 발전에 대해서 약간의 해명을 하는 것 또한 필요한 일이다.

널리 인정되고 있듯이, 이란의 샤(Shah)는 중동에서 미 제국주의의 주요한 꼭두각시였다. 풍부한 석유 매장량 때문에 중요한, 극도로 민감한 이지역을 샤로 하여금 경비하게 함으로써, 미국은 자신의 헤게모니를 영속시키고자 하였다. 샤는 자발적인 도구였다. 이 지역을 경비하기 위해 미국으로부터의 대규모 무기 구입 자금을 늘리려던 샤를 통해서, 미국은 70년대 중반의 유가 상승에 있어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저명한 프랑스의 경제학자 장 자끄 세르반 슈라이버는, 그의 책 The World Challenge 에서 1973년의 아랍-이스라엘 전쟁 뒤의 유가인상에 관한 비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

1971년과 1972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키신저는 샤와 대화를 나누었고 미국에서 구할 수 있는 근대식 무기들을 이란에 공급할 것을 약속했다. 석유로부터 얻는 샤의 세입이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감에 따라, 최신무기에 대한 그의 욕구도 보조를 맞추었다. 사실 그는 더 이상 그 무기들의 값을 귀찮게 계산하려고조차도 하지 않았다.

1973년이 되자, 두 사람 사이의 이 거래는 불안한 문제점을 야기했다: 이란은 더 이상 이러한 굉장한 무기를 살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샤는 더 이상은 계산을 치를 수 없었다. 1974년 석유금수조치에 의해 키신저와 샤에게 해답이 주어졌고, 이것은 석유시장을 압박하여 유가는 거의 멋대로 올려졌다. 이것은 샤의 재정적 여유를 유지시켜 주었고, 그가 계속 미제 무기를 주문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키신저가 샤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미국은 얼만큼의 인상을 샤가 요구하더라도 유가 인상을 막지 않기로 하였다. 1974년 말까지 미국 무기의 총 판매고의 절반이 한 나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고, 그것은 바로 이란이었다.

이란의 농촌과 도시 지역 무산계급이 기아선상에 놓였던 반면, 샤는 미 제국주의를 위해서 그리고 그의 과대망상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그 지역을 경비하는 데에 필요한 무기 구매에 엄청난 돈을 낭비하고 있었다. 또한,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과의 거래에 의해, 완전히 타락하고 서구식 생활양식에 깊이 물든, 매판 부르조아지라는 초 부유층이 출현했다. 이런 서구화된 상류층의 생활이 대중의 악화되는 조건과 공존하고 있었다. 일반 대중의 기본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계획적인 생산이 없는 가운데, 늘어나는 석유 수입은 단지 거대한 통화 팽창 압박을 창출할 뿐이었다. 샤의 이른바 토지 개혁이 많은 소농민들의 토지를 몰수했기 때문에 실업률은 치솟았다. 그들은 토지를 서구의 다국적 기업에게 팔도록 강요당했고, 그 토지는 대규모 상품작물 경작지로 바뀌었다. 땅을 빼앗긴 소농민 계급은 도시 지역을 무리지어 다니면서 일자리를 찾았고, 이것은 실업자 계층을 늘렸다.

좌파와의 공조 아래 호메이니가 착수한 운동은,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샤의 후원 아래 이란의 타락한 엘리트에 의한 서구화가 채택되었고, 그것은 ‘근대화’라는 무게있는 말로써 칭송되었다. 사실, 극도로 부유한 층에서는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서구의 관용적이고 퇴폐적인 풍습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다. 엘리트의 이러한 관용적인 풍습은 이란의 민중들 사이에 강한 혐오감을 자아냈고, 중간 계층의 인텔리겐차까지도 그것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서구의 관찰자들은 젊은 여인들이 그들의 미니스커트를 벗어 던지고 이슬람의 정숙함에 맞는 차도르를 입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샤의 정적에 대한 야만적인 탄압은 강한 분노를 자아내어 급진주의자들과 율법학자들을 정치적 동맹으로 결속시켜주었다. 아야툴라 호메이니는 Guardian 紙의 특파원 리즈 서굿에 의해 ‘반동적 혁명가’로 묘사되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적절한 묘사이다.

호메이니의 전투적 이슬람이 전적으로 반동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란 민중의 가장 강력한 적인 미 제국주의에 대해 가장 강력한 도전장을 던졌고, 오늘날까지 그에 대해 적대하고 있다. 서방 세계는 무엇보다 제국주의적이고 신식민주의적인 정책에 대해 그가 성공적으로 도전했기 때문에 그를 두려워한다. 샤를 타도하기 이전에는, 그것이 현상 유지를 거부하고 대중적 봉기를 성사시켰던 까닭에 호메이니의 이슬람은 분명히 혁명적이었다. 그러나, 혁명 이후 호메이니는 영리한 협잡꾼임을 드러냈으며, 그의 정치적 목표를 위해 이슬람을 이용하고 정적을 술수로 제압하기 시작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는 샤만큼이나 무자비한 독재자가 되었다. 수천의 젊은 무자헤딘이 아야툴라의 소위 이슬람 근위병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영국의 무슬림 학생들의 주간 출판물에 따르면, “호메이니 정권의 비밀 처형은 계속되고 있으며, 지난 열 달 동안 호메이니에 의해 허가된 처형과 가두 살해의 총계는 15,000건에 이른다.”

의심할 나위 없이 호메이니의 이슬람은 그의 반대파가 관련되는 경우 왜곡돼 왔고, 또한 사실상 현상 유지를 옹호하는 것이 되고 있지만, 여전히 그것은 한편으로는 타락한 아랍 군주정치와 수장(首長, sheikh)정치에 대해, 다른 한편으로는 미 제국주의에 대해 강력한 도전장을 던지고 있다. 한편, 사우디 아라비아와 지아 울 하크 치하의 파키스탄의 이슬람 근본주의는 사실상 순수하게 반동적이며 현상 유지에 기여한다. 그것은 각각의 지역에서 미 제국주의자의 패권을 영속시키는 것을 추구한다. 이들 정권이 살아남는 데에는 미국의 지원이 그야말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반면, 호메이니의 이슬람은 광범위한 계층의 이란 민중들로부터 지지를 끌어냈고―지금도 끌어내고 있으며―따라서 혁명적인 추진력을 갖는다. 사우디 왕조와 지아의 군사정권이 주창하는 것은 이슬람의 참모습이 아니다.

사우디 아라비아가 공공연하게 미국을 옹호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했을 때 뚜렷하게 지원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스라엘이 미국의 지원이 없이는 1주일 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실 이스라엘의 1982년 6월 레바논 침공이 샤론이 5월 22-27일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에서 계획되었다는 주장까지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수천의 팔레스티나와 레바논 국민들이 시온주의 침략자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도륙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까지 사우디 아라비아는 미국 정부를 비판하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있다. 사우디 아라비아는 급진적인 아랍 국가들이 미국을 비난할 것이 두려운 나머지, 심지어 레바논 문제에 대한 아랍 국가들의 정상회담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기조차 했다. 프랑스 뉴스사인 Agence France Press는 익명의 외교소식통을 인용하여, 아랍 온건파, 특히 사우디 아라비아가 서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역할을 비난하자는 ‘강경파’의 계획에 완강하게 반대하여 예정된 회동이 무산되었다고 보도했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근본주의는, 우리가 파악할 수 있듯이, 군주정의 필요에 복무한다. 또한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러한 현상 유지주의적 근본주의는 이슬람의 儀式적인 면을 강조하고 이슬람에 의해 규정된 처벌에 강조점을 두는 반면, 이슬람이 사회 정의를 강조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간단히 언급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와는 반대로, 샤의 몰락 전야의 이란에서의 혁명적 근본주의는 사회 정의를 강조했으며 약자(mustad'ifin)에 대한 지원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란에서 나타난 바와 갈이, 통치 집단이 그가 직면한 혁명 과업을 수행하는 대신 점점 현상 유지를 원하는 자들과 함께 스스로를 규정하게 될 때, 강조점은 쉽게 의식이나 처벌로 다시 옮겨간다.

파키스탄의 지아 울 하크의 이슬람은 본질적으로 현상 유지주의적 이슬람이다. 지아의 이슬람화란 공들여 독재정권을 합법화시키는 작업이다. 지아의 이슬람 파키스탄 선언은, 사회적 약자 계층을 위해 정의를 실천하겠다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이, 도둑질을 하면 손을 자른다거나 간통을 하면 돌로 쳐 죽인다거나 따위의 갖가지의 이슬람식 처벌을 강화하는 것과 아울러 시작되었다.

이슬람 형법을 강화하면서 공표된 다른 조치들은 자카트 기금의 도입, 소득세법의 자유화 그리고 ‘미래의 합당한 배상’을 국유화하는 것을 금함으로써 자본가들의 사적인 이자를 ‘헌법적으로 보호’하는 것 등이었다. 따라서 지아 울 하크 정권을 이슬람 이데올로기로 감싸는 진짜 의도가 현재 상태를 유지하고 강화하려는 것임이 명백히 드러났다. 주목할 만한 일로, 자카트 기금은 파키스탄 정부에 의해 마련되는 것과는 별도로 사우디 아라비아와 아랍 에미리트 연합에 의해 조성되었다. 지아 울 하크 정권은 이슬람 세계의 가장 반동적인 정권들에 의해 지원되고 있던 것이다. 파티스탄의 경제는 여러 경로를 통해 사우디 아라비아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렇지 않았다면 좋지 않은 상태에 처했을 것이다.

그것이 현 상태를 강화하고자 할 때, 이슬람화는 진짜 과제는 제쳐 둔 채 우스꽝스러운 지경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Pakistan Times의 한 독자는 지아 장군에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국민과 군 병력으로 하여금 턱수염을 기르도록 하는 계엄 포고령을 내리도록 촉구했다. 이유는? “제 생각으로는”, 그 독자가 쓰기를, “면도는 이슬람에서 하람(금지된 것)입니다.” 이 독자에 따르면, 턱수염은 파키스탄이 이슬람과 순나에 충실함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매일매일의 면도에 들어가는 국가의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다. 나아가서 파키스탄은 면도기, 면도날, 면도크림, 로션 등등의 광고, 선전, 구매에 소비되는 연간 수백만 루피나 되는 외화와 국부를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스꽝스러운 또 하나의 재미있는 사건이 있다. 의사였다가 목사가 되어 이슬람 이데올로기 평의회와 지아 울 하크 장군의 Majlis-e-Shoora(합의 의회) 두 모임의 정선된 일원이 된 이스라르 아메드 박사는, 여성은 의사나 교사로는 일할 수 있지만 남성과 같은 분야에서 일해서는 안된다는 그의 지론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르면 항공, 방송, 사무 등과 같은 다른 직업분야는 여성에게 개방되어서는 안되며, 여성의 자리는 그들의 집의 네 벽 안쪽이 되어야 한다. 그는 여성이 그들의 얼굴 뿐만 아니라 손도 가려야 한다고 요구한다.

당연히, 여성들은 이스라르 아메드를 그들의 권리와 안전에 대한 “위협과 공갈”로 선언했고, 그들의 저항이 폭풍처럼 일어났다. 말할 나위 없이, 이러한 보수적인 관점은 기득권층이나 극히 옹졸한 견해의 소유자들에 의해 표명된다. 聖 꾸란에는 여성이 네 벽 안에 있어야 한다거나 그들의 얼굴과 손을 가려야 한다고 규정하는 어떤 명시된 표현도 없다. 물론, 꾸란은 남편, 부모, 형제, 어린이 또는 성적 욕망을 지니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를 제외하고는, 여성들이 정숙하게 입음으로써 그들의 순결을 지킬 것과 장신구를 드러내 보이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꾸란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있다. “그리고 믿는 여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라: 시선을 낮추고 정숙하게 행동하며, 장신구는 보이는 것만 착용하며, 베일을 뺨(일반적으로 믿듯이 얼굴이 아니라) 위에 드리우며, 장신구를 내놓고 다니지 말 것이니, 단 다음 사람들은 예외이다: 그들의 남편, 아버지나 시아버지, 또는 아들이나 남편의 아들, 형제나 형제 자매의 아들, 또는 시녀나 노예, 거세한 남자 시종, 또는 여인의 나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이……”

그러므로 알라의 의도는 여성을 그들의 집의 네 벽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합당한 기품을 유지할 것과 도발적인 장신구를 공공연하게 자랑하지 않을 것을 요구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성적 착취를 방지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기품을 유지하고 정조를 지킨다면, 공적 영역에서 여성이 일하는 데에는 직업이 무엇이든지 아무런 제약이 없다. 리비아의 지도자 카다피가 자국의 여성이 군에 입대할 것을 주장해오고 있는 것에 주목한다면 흥미있을 것이다: “모든 남성과 여성은 무기를 들어야 한다. 과학적이고 혁명적인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여성을 포함한 전 국민의 동원이 보증되었다. 과거의 예속과 여성 종속으로의 회귀란 없다.” 카다피는 심지어 제3세계의 여성을 종속시키는 것은 식민지주의의 이익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우리가 서로를 마비시켜야 한다는 것은 식민지주의의 이익에 부합하는 이야기이다. 만약 그 말에 따라 남성이 여성을 노예로 삼는다면, 그들은 아랍 국가가 결정적 국면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하는 효용과 역량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에서의 성 평등에 대한 질문을 잠시 다루는 것도 경우 없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전통적으로, 남성은 여성에 비해 우월하다고 여겨져 왔다. 신학자들은 거의 이 문제에 대해 만장일치로 동의한다. 그들은 그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다음과 같은 꾸란의 구절을 인용한다: “남성은 여성에 대해 권위를 가진다. 왜냐하면 알라께서 남성을 여성보다 우월하게 만드셨으며, 남성이 여성들을 부양하기 위해 재산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 주어진 해석하는 것은 전통적인 해석이다. 이 구절의 핵심어는 카왐 qawwam 인데, 이것은 ‘권위 (authority)’, ‘보호자 (protector)’, ‘담당하는 (in charge)’, ‘부양자 (supporter)’ 등으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나의 견해로는, 카왐의 가장 좋은 번역은 구절의 후반부가 나타내듯이 ‘부양자’일 것이다. 구절의 후반부는 다음과 같다: “……왜냐하면 남성이 여성들을 부양하기 위해 재산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성은 여성의 생계를 위해 돈을 벌고 사용하므로 여성의 부양자이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이 구절은 남성의 여성에 대한 우월성을 확고히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심지어 카왐이 ‘권위 (authority)’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해도, 남성에게 이 권위가 주어진 까닭은 명백하다: 그들이 돈을 벌고 여성을 보살피기 때문이다. 만일,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그렇게 하듯이, 여성이 역시 돈을 벌고 가족의 생계에 이바지한다면, 남성은 더 이상 여성에 대해 권위를 갖지 못한다. 알라께서 전자의 경우 남성에게 여성에 대한 우월성을 부여하셨듯이, 후자의 경우 알라께서는 (신은 전능하므로) 여성에게 남성에 대한 우월성을 부여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남성의 여성에 대한 우월성은 꾸란 신학으로 해결된 문제가 아니다. 일반적인 상황이 무엇이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기억되어야 할 것은, 꾸란은 사회-정치적이고 사회-경제적인 문제에 있어서, 최종 판결을 내림으로써 그 이상의 발전을 향한 문을 닫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심지어 위의 구절 해석의 경우처럼 어떤 문제에 대해 단언이 내려질 때도, 충분한 근거가 거기에 제시되며, 그 이상의 발전을 위한 가능성은 항상 열려진 채이다. 그러나, 오늘날 파키스탄의 이슬람화 정치는 여성의 권리에 관해 극도로 보수적인 꾸란 독해에 기초하고 있다. 무아마르 카다피가 올바르게 지적했듯이, 여성 해방은 현 상태를 뒤흔들고 급진적 사회 변화의 길을 닦는 데에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파키스탄 당국은 여성의 종속을 유지시키고자 한다.

게다가, 이슬람 근본주의 정치는 기초적 사회-경제적 현안은 제껴놓고 상대적으로 사소한 현안을 더 중시할 것을 요구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사소한 현안들은 대중의 주의를 붙들어 매고 대중의 논쟁의 주제가 된다. 그러므로 이스라르 아메드와 같은 사람들이 부녀자를 가리는 관습 purdah 이나 턱수염 따위의 현안들을 제기하여 시대에 맞지 않고 소용없으며 유치한 논쟁을 야기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시도는 지배충에게 암묵적 동의를 표시하는 것이며, 이것은 보수적 사회 구조를 유지하는 주요한 수단의 하나이다. 가장 중요한 현안들은, 설사 그것이 제기된다고 하더라도 공공연하게 논의되지 않으며, 논의되는 경우에도 보수적인 이슬람 용어로 서술되어야 한다.

오늘날까지 어떤 파키스탄 정권도 주목할 만한 수준의 효과적인 토지개혁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주 계급은 여전히 파키스탄에서 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다. 이슬람이 봉건적 관계를 용인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아 정권까지 포함하여 어떤 정부도 봉건적 관계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공격을 가하지 못하고 있다. 파키스탄에서 아유브 정권이 수행한 이른바 토지개혁에 대해 평가하면서, 함자 알라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반대로, 파키스탄 지주들은 아유브 정권 치하에서만큼 상황이 좋았던 적이 없었는데, 그 정권은 反봉건 정권으로 믿어지던 정권이었다! 이 조치를 통해 이루어진 유일한 정책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은 1959년의 토지 개혁이었는데, 그것은 실질적인 효과를 가진다기보다 상징적인 것이었고, 경작지의 1.6 퍼센트 밖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다른 한편, 지주 계급의 가장 강력한 대변자인 칼라바그의 나왑이 서 파키스탄의 지사로 취임하였는데, 그는 그 요직을 발판으로 지주 계급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마련된 정책들을 정력적으로 실시했다.”

파키스탄의 도시와 농촌에서는 여전히 토지가 고도로 집중되어 있으며, 이것은 이슬람 정의의 기본 개념에 반하는 것이다. 이 사태에 대해서 전문 경제인 위원회는 보고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여기에 덧붙여, 토지 개혁은 토지의 족벌 소유 규모를 축소시키는 쪽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또한 황무지를 고정된 지대―어떤 신학자 Fuqaha' 은 정식으로 고리대금 riba 과 같다고 보는―로 빌려주는 널리 퍼진 관례 대신, 이슬람적 공동 차용 제도를 증진시킬 수 있는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나아가서, 이슬람의 명백한 입장은, 3년간 내리 경작되지 않은 토지는 국가에 의해 무상으로 몰수되어 그것을 경작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조치들은 더욱 집약적이고 경제적인 경작을 선도해야 한다. 사회정의에 대한 이슬람의 약속에 따라 도-농 간의 형평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도시의 토지 소유와 여타 토지의 규모를 제한하는 동일한 조치를 필히 취해야 한다. 그리고 명백한 이슬람의 금지령에 따라, 모든 목초지, 광산, 샘, 그리고 임야는 국가의 소유로 해야 한다. 또한 국가 재정으로 관개된 수로를 이용하여 개간된 사유지를 용인하는 이슬람답지 못한 관례도 종식되어야 한다.”

따라서, 경제의 이슬람화 과정이 진지하게 시작된다면, 도-농을 막론하고 토지는 재분배되어 족벌 소유의 규모를 줄일 것이고 성 꾸란에 간직되어 있는 al-'adl (사회정의)의 이상을 실현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上述한 내용으로부터 알 수 있다. 그러나 지아 정권이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정권은 토지 관계를 온존시켜놓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충성심을 확실히 하기 위해 고위 장교들과 실력있는 행정관료들이 넓은 토지를 획득하는 것을 허가했다. 군은 또한 사회 전체에 부담을 지우면서 각종 이권을 얻는 것이 용인되어 있다. 함자 알라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사회가 아니라 군 그 자체가 지아 장군의 지지층이다. 그의 정권은 파키스탄 최초의 진정한 군사정권이다―아유브 칸의 통치나 심지어 야히야 칸의 통치도 그렇지 못하였다…… 정권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군에 의지하는 것, 그리고 정권의 계속적인 존립을 위해 지지를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군대를 매수하는 악독한 방법은 시민사회에서의 정권의 취약성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이슬람화를 선언할 때, 지아 정권은 추가적인 산업 국유화는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파키스탄 경제 이슬람화를 위해 지명된 전문가 위원회는 파키스탄 사회의 약소 계층의 지분을 강화하기 위해 더 많은 국유화를 시행할 것을 권고했다. 위원회 보고서는 사적 영역을 통해 경제 성장을 촉진시킨다는 점에서 정권을 혹평하고 있으며, 더 많은 부분이 공적 영역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권고한다. 관련된 구절을 인용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

“이슬람의 의도를 반영하기 위해서는 규제되어야 할 경제 성장의 세 번째 측면은, 고속 경제 성장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추구되는 정확한 전략이다. 파키스탄과 같은 ‘혼합’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경제 성장은 종종 사적 법인 영역을 통한 투자를 촉진함으로써 증진된다. 그러나, 그러한 전략은 소득과 부의 분배 문제에 있어서는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효과를 낳는다. 명백히 해야 할 것은, 고속 성장에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소득 격차를 넓히는 전략은 al-'adl-Wal-Ahsan (사회정의)에 대한 이슬람의 약속에 반대되는 것이므로 거부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자본 축적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이슬람 경제에서 공공 영역의 역할이 증대되어야 한다. 그것 뿐만 아니라, 공공 영역은 국영기업을 통해 사회의 가난한 계층을 위한 일자리를 창출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지아 정권은 그 자신의 재무장관에 의해 지명된 위원회의 권고를 실시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 이 권고는 실시될 경우 파키스탄 경제의 근본적 구조 변화를 야기할 것이다. 반면, 지아 의 근본주의는, 불공정한 경제 구조를 그것이 이슬람 가치 체계에 얼마나 해롭든지 간에 유지하는 데에 강력하게 이바지하고 있다. 지아-울-하크의 현상 유지의 근본주의는, 그로 하여금 종교 분야와 마찬가지로 경제 분야에서도 중세에 신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보수적인 정책을 따르도록 강요하고 있다. 이자의 문제는 적절한 사례이다. 현대 경제학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이윤이 은행 이자보다 훨씬 착취적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사실, 인플레 상황에서는, 이자의 폐지는 저소득층이 대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고, 그것은 꾸란의 뜻에 따르면 고리대금 riba 과 같은 것이다. 파키스탄 전문가 위원회는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

“이슬람의 고리대금에 대한 금지는 자본주의적 제도 전반에 대한 거부의 구성요소가 된다. 사실, 그것은 전체 경제 구조를 이슬람의 노선에 따라 완전히 재구축해야 한다는 신호이다: 이슬람의 사회정의 al-'adl-Wal-Ahsan 의 원리는 기초적인 소비, 생산, 분배 관계에 반영되어야 한다. 이슬람 경제 구조의 ‘총체성’에 대한 고려 없이 고리대금을 폐지시키자는 것은 마차를 말 앞에 놓는 꼴이다. 사실, 정말로 위험한 것은 고리대금을 폐지하고 그것을 이윤 분배 체제로 대치했을 때 부자의 빈자에 대한 착취의 수위가 높아질 것이라는 점이며……”

이러한 명백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지아 정권은 의지를 굽혀 단지 은행 이자에 대해서만 공격을 가하고 있으며, 경제의 착취적 자본주의 구조는 그대로 놓아두고 있다. 이것은 단지 소득 격차를 넓히고 사회적 약자 계층을 억제되지 않는 자본가의 착취에 노출시킬 뿐이다.

오늘날 ‘이슬람화’는 이슬람 국가에서 정치가와 기득권 세력을 비호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그 단어의 본질은 그것을 누가 사용하는가, 그리고 무슨 목적으로 사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바꾸어 말하면, 이슬람화라는 이름으로 제기되는 주장들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기 이전에, 그 특정 국가의 이슬람화의 정치학을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그것이 경제를 재구축하고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싸움으로써 zulm (억압과 착취)을 종식시킬 수 있는 강력한 수단으로 기능한다면, 이슬람화는 혁명적 동력으로 환영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적 불평등과 경제적 착취를 영속시키고 제국주의자의 패권을 지지하면서 현 상태를 강화하는 데에 기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전적으로 거부해야 하며, 이슬람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항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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