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우에 고와시

1 개요[ | ]

井上毅
이노우에 코와시, 고와시
  • 1871년 사법성에 출사했으며 이후 메이지 정부에서 이와쿠라 도모미, 이토 히로부미 등의 명으로 각종 중요 정책을 입안했다. 1881년 프러시아헌법을 바탕으로 흠정헌법 구상입안 및 국회개설 칙유를 기초했으며, 참의원 의관이 되어 제국헌법 기초 업무를 맡았다. 1888년 추밀원 서기관장으로서 헌법제정회의 사회를 맡았다. 1890년 추밀고문관이 되어 교육칙어를 기초했으며, 1893년 제2차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문상(文相)에 취임했다. 본문에 등장하는 `シラス'와 `ウシハク'에 관해서는 『梧陰存稿』(『井上毅傳 史料篇 第3』)에서 언급하고 있다.

2 국학원대학[ | ]

1843~1895년. 메이지시대의 관료정치가이다. 호는 고인(梧陰). 덴포(天保) 14년 12월 8일, 구마모토성(熊本城) 아래에서 가로(家老) 나가오카켄모츠가신(長岡監物家臣)인 이이다 켄고데이(飯田権五兵衛)의 3남으로 태어났다. 게이오 2년(慶応,1866)에 나가오카 집안의 이노우에 시게사부로(井上茂三郎)의 양자가 되었다. 신동이라 불리며, 번교 시습관(時習館) 훈도(訓導)인 기모토 사이탄(木本犀潭)의 가숙(家塾)에서 배우고 시습관 기숙생이 되었다. 게이오 3년에 유학을 명령받아 프랑스학을 배웠다. 메이지 3년(1870)에 메이지 신정부의 대학남교중사장(大学南校中舎長)을 거쳐, 다음 해 사법성 십등출사(十等出仕)가 되었다. 이후, 에토 신페이(江藤新平), 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利通),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등에게 인정받아 법제관료로서의 길을 걸었다. 10년 태정관대서기관(太政官大書記官), 14년 참사원의관(参事院議官), 17년 겸궁내성도서두(兼宮内省図書頭), 21년 법제국장관(法制局長官), 같은 해 겸구밀원서기관장(兼枢密院書記官長), 23년 구밀고문관(枢密顧問官), 26년 문부대신, 28년 자작(子爵) 등을 역임했다. 그 사이에 메이지헌법, 황실전법, 교육칙어의 기초(起草), 그 외 많은 법령, 정책의 입안에 참여하였다. 메이지 28년 3월 17일에 사망, 향년53세. 저작 다수를 포함한 관계사료집으로 『井上毅伝史料篇』전6권이 있다. --시바타 신이치(柴田紳一)

3 참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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