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상원 소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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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남원에 '운상원 소리터' 설립하는 거문고 명인 김무길씨[ | ]

  • 출처: 전북일보 2003년 4월 6일 (임용묵 기자)

판소리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진 남원은 거문고 음악의 역사와 전통도 그에 못지 않다. 통일신라시대 거문고 명인 옥보고가 남원에서 스스로 거문고를 익히고 새로운 곡을 창작, 거문고 음악의 새 지평을 열었기 때문이다. 옥보고는 당시 지금의 운봉땅인 지리산 운상원(雲上院)에서 50년 동안 살면서 거문고의 기법을 닦고 완성시키면서 30여 곡의 새로운 거문고 가락을 만들어 세상에 널리 퍼뜨렸다. 그는 제자 속명득에게 금도(琴道)를 전했고 속명득은 그것을 귀금 선생에게 전수했는데, 귀금 선생 또한 지리산에 들어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남원 거문고 음악의 전통은 유구하다.

이러한 자랑스런 전통이 오늘에 이르러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채 그야말로 역사속에서만 자리잡고 있는 요즈음, 옥보고와 남원 거문고 음악의 숨결을 되살리려는 한 명인의 행보가 주목받고 있다.

남원시 운봉읍 권포리 1005번지 구 고남초등학교에 ‘운상원 소리터’를 설립중인 거문고 명인 김무길씨(60·국립민속국악원 예술감독). 해발 5백m 고지에 소담하게 자리잡은 초등학교 교사를 ‘거문고 음악의 요람’으로 바꾸는데 여념이 없다.

“남원은 판소리 뿐 아니라 거문고 음악이 뿌리를 내린 ‘국악의 성지’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조명 작업이나 계승, 발전시키려는 움직임이 전혀 없어 안타까웠습니다.”

지난 2001년 국립민속국악원 예술감독에 선임돼 남원에 내려온 그는 옥보고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지역 문화계를 지켜보며 아쉬움이 컸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남원 출신 국악인들과 문화계 인사들이 옥보고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옥보고 학술대회’를 여는 등 남원 거문고 음악의 뿌리 찾기에 나섰다. 그 결과 올해 남원 문화계 인사들고 국악인들이 참여하는 (가칭)옥보고 기념사업회 출범과 창극공연, 거문고음악발표회·학술대회 등이 추진되고 있다. 남원 문화계의 의지를 북돋아 옥보고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그에게 ‘운상원 소리터’는 거문고 전공자로서 옥보고의 거문고 세계를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자리.

‘운상원 소리터’는 지난해 10월부터 학교 부지 3천여평과 건물을 소리배움터로 바꾸는 공사가 한창이다. 3백명이 한꺼번에 묵을 수 있는 숙소와 식당, 연습실이 마련되며 소극장과 세미나실이 번듯하게 들어선다. 또 그의 아내 박양덕 명창(57)과 함께 생활할 안집도 한 곳에 자리한다. 지금까지 운상원 소리터를 닦는데 들어간 공사비용만 7억원. 아직 3억원 정도가 더 소요되는 대규모 공사다. 서울에서 살았던 방배동 자택을 처분했고, 양평에 마련한 연수원도 조만간 처분할 계획이다. 그와 아내가 평생 모은 결실을 모두 쏟아붓는 대규모 프로젝트인 셈이다.

소극장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운상원 소리터는 5월 중순께나 문을 열 계획이지만 그의 마음은 바쁘다. 운상원 소리터를 통해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산더미 처럼 쌓여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한 곳에 정착해 실력있는 제자를 기르고, 제 음악을 튼실하게 다져야 한다고 마음 먹었다”면서 “후학 양성 뿐아니라 우리 국악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운상원 소리터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아내 박 명창과 함께 국악을 접해보고 싶은 학생 뿐아니라 일반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단소나 민요 등 국악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전국의 국악전공자들이 공연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할 계획이다. 또 남원 지역 예술인들과 함께 전통 연희극과 시나위 등을 되살리는 단체를 만들어 소극장에서 창작작품을 올리는 작업도 구상중이다. 민속국악원 예술감독을 맡은 뒤 소홀했던 거문고곡 연구와 창작곡 발표도 운상원 소리터에서 그가 해야 할 일.

“13살부터 한갑득 선생 문하에서 거문고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신쾌동 선생을 사사했죠. 50년 가까이 국악계에 몸담아 오면서 훌륭한 스승 두 분을 모신 것은 큰 행운입니다. 두 분의 예술세계를 이어받아 나만의 음악세계를 새롭게 창출해야죠.”

그는 ‘세밀하면서도 오밀’한 한갑득류와 ‘굵은 붓으로 푹푹 글을 써나가’는 듯한 신쾌동류가 조화를 이루는 자신만의 거문고 음악 세계를 운상원 소리터에서 빚어내겠다고 다짐했다. 1천년 전 운상원에 칩거하며 오늘날 거문고 음악의 초석을 다졌던 옥보고 명인의 숨결을 이어받겠다는 김무길 명인의 꿋꿋한 의지와 노력으로 탄생할 남원 거문고 음악이 어떤 선율을 빚어낼 지 궁금하다.

2 # 신라 옥보고의 거문고 선율 되살린다[ | ]

  • 출처: 조선일보 2003년 7월 15일 (김창곤 기자)

남원 폐교에 '운상원 소리터' 짓는 김무길 명인

한국 거문고의 최고 명인 김무길(金茂吉·60)씨가 통일신라시대 거문고의 대가 옥보고(玉寶高)의 전설적인 선율을 되살리기 위해 열정을 다 바치고 있다.

 

일반인들 사이에 거의 잊히다시피 한 거문고 선율 보급을 위해 김씨는 지리산 자락에 자리한 남원시 운봉읍 권포리의 폐교를 매입, ‘운상원 소리터’라고 이름 짓고 숙소와 연습실, 공연장 등을 갖춰가면서 옥보고 기념사업들을 준비 중이다. 운봉읍의 옛 이름은 운상원(雲上院)으로, 옥보고가 50여년 동안 이곳에 묻혀 30여 악곡을 짓고 제자를 길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있는 곳.

“거문고는 남명(南明)과 송강(松江)이 즐겨 탔던 남성의 악기, 선비의 악기로 자연과 잘 어울립니다. 남원의 판소리와 앙상블을 이루며 거문고 음률의 경역을 넓혀가려고 합니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그가 남원에 자리잡게 된 것은 지난 2001년 이곳 국립민속국악원 예술감독으로 선임되면서. 1년 먼저 내려온 아내 박양덕(朴良德·56) 명창을 따른 부창부수(婦唱夫隨)의 결과였다.

가왕(歌王) 송흥록에서 박초월, 강도근에 이르기까지 숱한 명창의 태가 묻힌 판소리의 본고장 남원에서 거문고는 어쩌면 새로운 변경(邊境)이었다. 그는 이곳 국악인들과 손잡고 작년 5월 옥보고를 재발견하는 학술대회를 열고, 옥보고 기념사업회를 조직하면서 거문고를 이어갈 터전으로 옛 고남초등교를 점찍었다고 한다.

작년 10월 부지 3000여평의 폐교를 매입, 200여명이 묵을 수 있는 숙소와 연습실, 공연장 등으로 개조했고, 올여름 소극장과 세미나실을 신축할 예정이다. 10억원의 비용은 그가 살던 서울 방배동 집을 팔고 부부가 저축해온 돈을 털어 충당하고 있다. 이 같은 소식은 벌써 국악계에 전해져 방학을 맞아 전국 대학의 국악과 학생들이 이곳을 찾아 3~7일씩 소리와 기악, 창 등을 공부하고 있다.

“광복 직후 국극단으로 처음 생긴 ‘햇님 여성국극단’을 이끌던 선친의 손에 이끌려 열네 살 때부터 거문고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어릴 적부터 거문고 소리에 접했던 그는 1959년 서울 국악예술고에 입학하기 전부터 창덕궁 앞 고(故) 한갑득(무형문화재 16호) 선생의 집을 드나들며 거문고를 배웠다.

“시내버스를 탈 돈이 없어 돈화문 앞에서 중앙청 자하문, 녹번동을 거쳐 불광동 집까지 걸어 다녔지만 거문고에 몰두해 다리 아픈 줄 몰랐어요. 단칸방 식구들에게 소음을 주지 않기 위해 한여름 이불 속에서 땀에 젖어 연습한 적도 많습니다. ”

그는 녹음기가 없던 시절 ‘싸링 당 다링 뜰 라징 징 쓸기둥’ 하며 입으로 거문고 가락을 외우고 다니며 거리 사람들로부터 ‘어린 친구가 안 됐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십수년 익힌 거문고를 공연할 무대가 없어 70년 결혼 후 건설노동자로 1년간 사우디아라비아를 다녀왔는가 하면, 분식집을 열기도 했다. “79년 국립국악원에 들어간 뒤에야 거문고에 다시 매진할 수 있었죠. 생활고 등으로 부부 간 갈등이 있을 때도 거문고와 창으로 쉽게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와 남원 국악인들은 오는 10월 25~26일 옥보고기념제를 열기로 하고 그 프로그램을 완성했다. 옥보고의 일대기를 재구성한 창극 대본과 악곡이 완성돼 국립민속국악단원들이 한 달 전 연습에 돌입했다. 옥보고와 거문고의 과거·미래를 조명하는 학술대회와 전국 거문고 경연대회도 펼친다. “고고했던 거문고는 이제 가야금·아쟁·피리 등 다른 악기와 어울리고 있고 창의 반주로 쓰이기도 합니다. 무거운 진양조나 중모리뿐 아니라, 자진모리보다 더 빠른 템포로도 작곡, 연주합니다.”

워낙 국악을 사랑하다 보니 부인과 함께 옛 민요와 새 창작곡 음반을 내기도 했다. 여성국극단 활동시절에 그와 만난 박양덕 명창은 지난 11일 전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딸 미선(30)씨는 대를 이어 거문고를 배워 서울 국악예고 강사로 활동하고 있고, 아들 성혁(26)씨는 추계예술대학 대학원에서 아쟁과 거문고를 공부하고 있다.

3 # 남원 '운상원 소리터' 운영 김무길 박양덕 부부[ | ]

  • 출처: 동아일보 2003년 11월 5일 (유윤종 기자)

전북 남원 국립민속국악원을 출발한 차는 지리산 자락을 돌아 남원시 운봉읍으로 향했다. 가깝고 먼 능선마다 단풍이 울긋불긋했다.

  <<볕이 따스한 가을날, 김무길씨(왼쪽)와 제자들이 ‘운상원 소리터’ 뜰에 나와 풀냄새와 바람을 벗해 산조 한마당을 합주했다. 오른쪽의 장구를 잡은 사람이 김씨의 부인 박양덕 명창. -남원=유윤종기자>>

“흥부 살던 곳이 운봉과 함양 사이 어디라고 ‘흥부가’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운전대를 잡은 거문고 명인 김무길씨(60·국립민속국악원 예술감독)가 말했다. 춘향의 고장에서 흥부의 고장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묘했다.

차는 ‘운상원(雲上院) 소리터’에 멈추었다. 탄성이 나왔다. 버려질 뻔했던 시골 폐교가 말끔하게 새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김 감독의 부인 박양덕 명창(56·국립민속국악원 지도위원)과 제자들이 나와 맞아주었다.

“운상원은 운봉의 옛 이름이에요.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중엽 거문고 중시조인 옥보고(玉寶高)가 50년 동안 이곳에서 제자들을 기르며 30여편의 곡을 썼죠. 그러니 남원은 판소리의 성지(聖地)일 뿐 아니라 거문고의 성지이기도 합니다. 옥보고의 자취를 기리며 거문고의 중흥을 기대해보자는 생각을 ‘운상원 소리터’란 이름에 담았습니다.”

지난해 10월 3000여평의 폐교를 사들여 200명이 묵을 수 있는 숙소와 연습실 세미나실 소공연장 등으로 개조했다. 운동장에는 잔디를 깔고 나무를 심었다.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10억원이 넘는 서울 방배동 집도 팔았다. 초년 고생을 딛고 간신히 마련한 집이라 주위에선 ‘별일 다 본다’고 했다.

“60년대까지는 당시 인기 있던 ‘여성국극’ 반주 악사로 생계를 꾸렸죠. 국극 배우로 이름을 날리던 아내를 만나 결혼도 했지만 국극이 사라지니까 살길이 막막하더라고요. 배관 책을 달달 외우고 경력을 꾸며 사우디아라비아에 기술자로 나갔죠.”

귀국한 뒤에도 분식집 운영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79년에야 국립국악원에서 궁중 정악 외에 민속악을 받아들이면서 수석 악사로 들어갔다. 뒤늦게 실력 발휘할 기회가 마련된 셈. 음악계의 인정은 그렇게 늦었지만 사실 그는 고교시절 거문고 산조의 두 대가인 한갑득과 신쾌동을 모두 사사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먼저 한갑득 선생님에게서 배우다 서울국악예고에 들어가 신쾌동 선생님에게서 배우니 난리가 났죠. 의절하겠다는 소리도 나오고…. 일생을 바친 소리를 제자에게 전해주었는데 경쟁자 집을 기웃거리니 화가 안 나겠어요.”

2001년 국립민속국악원 예술감독으로 임명된 그는 한 해 먼저 내려온 아내를 따라 자리를 잡았다. 오래 잊고 있던 옥보고의 자취가 지리산 자락에서 전해져오는 듯했다. 예전부터 그는 ‘우리 음악은 자연을 벗하며 익혀야 한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매년 전남 구례 화엄사의 연기암에서 1년에 두세 달씩 제자를 가르쳐왔다. 정착할 곳을 찾던 중 신라시대 운상원 터 근처에서 맞춤한 폐교를 찾아낸 것.

“깊은 산, 창호지에 달빛이 비치는 밤에 뜯는 거문고 소리에는 도시에서 얻을 수 없는 향이 묻어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자연 속에서 배움에 전념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운상원 소리터’ 앞에 선 거문고 명인 김무길씨(오른쪽)와 부인 박양덕 명창.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어려운 시절을 함께한 동반자이자 같은 꿈을 가진 벗”이라고 말했다. -남원=유윤종기자>>

올해 처음 60여명의 학생이 찾아왔다. 전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부인의 제자들도 찾아와 소리를 익히고 있다.

“12월에는 경연대회를 포함한 ‘옥보고 거문고 대회’를 엽니다. 그동안 가야금 경연대회는 많았지만 거문고만의 경연은 없어 안타까웠습니다. 이 근처 어딘가 묻혔을 옥보고 선생도 기뻐하겠지요.”

▼김무길 약력 ▼
△1943년 서울 출생
△1979년 국립국악원 수석 악사
△1985년 독일 베를린음악제 참가
△1986년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장원
△1996년 한갑득류·신쾌동류 거문고산조 CD출반
△2001년 국립민속국악원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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