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 야스지로 평론

1 # 영화 연보[ | ]

개봉일 제목 영화사
1962.11.18 꽁치의맛 秋刀魚の味 松竹大船
1961.10.29 코하야가와가의가을 小早川家の秋 宝塚映画
1960.11.13 秋日和 松竹大船
1959.11.17 浮草 大映東京
1959.05.12 안녕하세요 お早よう 松竹大船
1958.09.07 피안화 彼岸花 松竹大船 칼라 영화 시대
1957.04.30 東京暮色 松竹大船
1956.01.29 초봄 早春 松竹大船
1953.11.03 동경이야기 東京物語 松竹大船
1952.10.01 お茶漬の味 松竹大船
1951.10.03 초여름 麦秋 松竹大船
1950.08.25 宗方姉妹 新東宝
1949.09.13 晩春 松竹大船
1948.09.17 바람속의암탉 風の中の牝鶏 松竹大船
1947.05.20 長屋紳士録 松竹大船
1942.04.01 父ありき 松竹大船
1941.03.01 戸田家の兄妹 松竹大船
1937.03.03 淑女は何を忘れたか 松竹大船
1936.09.15 一人息子 松竹大船
1936.03.19 大学よいとこ 松竹蒲田
1935._._ 菊五郎の鏡獅子 松竹蒲田 유성영화 시대
1935.11.21 東京の宿 松竹蒲田
1935.01.20 箱入娘 松竹蒲田
1934.11.23 浮草物語 松竹蒲田
1934.05.11 母を恋はずや 松竹蒲田
1933.09.07 出来ごころ 松竹蒲田
1933.04.27 非常線の女 松竹蒲田
1933.02.09 東京の女 松竹蒲田
1932.11.24 また逢ふ日まで 松竹蒲田
1932.10.13 青春の夢いまいづこ 松竹蒲田
1932.06.03 태어나기는했지만 大人の見る絵本 生れてはみたけれど 松竹蒲田
1932.01.29 春は御婦人から 松竹蒲田
1931.08.15 東京の合唱 松竹蒲田
1931.05.29 美人と哀愁 松竹蒲田
1931.02.07 숙녀와수염 淑女と髭 松竹蒲田
1930.12.12 お嬢さん 松竹蒲田
1930.10.03 足に触った幸運 松竹蒲田
1930.07.27 エロ神の怨霊 松竹蒲田
1930.07.06 その夜の妻 松竹蒲田
1930.04.11 落第はしたけれど 松竹蒲田
1930.03.01 朗かに歩め 松竹蒲田
1930.01.05 結婚学入門 松竹蒲田
1929.11.24 突貫小僧 松竹蒲田
1929.10.25 会社員生活 松竹蒲田
1929.09.06 大学は出たけれど 松竹蒲田
1929.07.05 和製喧嘩友達 松竹蒲田
1929.04.13 学生ロマンス 若き日 松竹蒲田
1929.02.22 宝の山 松竹蒲田
1928.12.01 肉体美 松竹蒲田
1928.09.28 引越し夫婦 松竹蒲田
1928.08.31 カボチャ 松竹蒲田
1928.06.15 女房紛失 松竹蒲田
1928.04.29 若人の夢 松竹蒲田
1927.10.14 懺悔の刃 松竹蒲田 무성영화 시대

2 # 오즈 야스지로[ | ]

이번 오즈 영화제에서 처음 본 영화는 <가을 햇살>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가 180도 가상선의 인물 방향을 일관되게 지키지 않아서 너무 혼란스러웠다. 영화 보는 내내, 내 머리 속에는 저 가상선의 위반이 대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이러한 오즈의 위반은 유명한 것이라 모르고 있었던 바는 아니었으나, 지난 6개월간 작업을 했을 때 더욱 공고하게 각인된 촬영과 편집의 규칙이라 혼란스러웠다. 이를테면, 임권택 감독님의 경우, 영화의 원칙에 대한 기본이 워낙에 철저하고 탄탄한 분이라, 이런 원칙의 위반은 거의 불가능하다. 현장에서 프레이밍을 하고, 컷들을 연결시키는 것을 보면, 이게 정말 충실한 기본기에 기반한 저력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보통 단편영화제에서도 심사위원들은 이런 편집의 원칙을 위반하면 가차없이 탈락시킨다. (예를 들어, A와 B가 대화를 하고 있다치자. 근데 A가 오른쪽을 향해 대사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럼 다음 장면에서 통상 B는 (앞 컷에 의거해 A가 자신의 왼쪽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므로) 왼쪽을 향해 본다. 그런데 오즈 영화에는 이런 원칙이 없다. 이렇게 인물이 둘만 나오는 장면이 간단하지만, 이게 두 사람 이상이 되면 혼란스러워지고, 설사 둘만 나온다 해도, 그 방향에 따라 온갖 오류가 나온다. 일례로 얼마전에 본 구로사와 기요시의 <밝은 미래>에서 투 샷인데 이게 어긋나는 장면이 나오자, 갑자기 부자연스럽게 여겨졌다. 사실, 고다르를 비롯한 많은 서구의 감독들도 이런 원칙에 의미있는 위반의 선례를 많이들 남긴다. 하지만 임의적 위반은 콘티뉴이티상의 실수와는 다른 법이다.)

그리고 집에 와서 기억나는 장면들을 중심으로 각 프레임을 그리고 연결시켜봤다. 통상 세명에서 네명이 밥상을 둘러앉는 장면들이 많으므로, 그런 장면을 중심으로 생각해봤다. 오즈에겐 원칙이 있다. 그 위반의 뚜렷한 원칙을 가지고 있다. 오즈의 경우, 180도 가상선는 서구적 시선 방향이라 동양인에게는 익숙하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임의의 360도 상상선을 만들어 그 안에서 인물을 배치시키고 장면을 연결시켰다고 한다. 프레임들을 열심히 그려보고 생각해본 결과, 그 안에 흐르고 있는 오즈의 원칙을 어느 정도 발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즈영화제 팜플렛에 정성일 선생님이 쓰신 글을 보면, 180도 위반이나 다다미 쇼트로 오즈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착오에 불과하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있다. 물론 그렇다는 것을 알고 봐도, 이게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실제 영화를 보다보면, 몹시 거슬릴 것이다. 그런데 오즈 영화를 내내 보다보니, 어느 사이에 이건 더이상 위반의 문제도 아니며, 딱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15편의 작품을 했는데, <동경 이야기>만 다시 보지 못했고(연일 매진이었다), 나머지는 다 다시 봤다. 처음 본 작품도 많았다. 가장 좋았던 것은 <가을 햇살>, <오차즈케의 맛>, <꽁치의 맛>, 이었다. 그리고 <태어나기는 했지만> 역시 최고의 작품이다. <태어나기는 했지만>의 컬러 버전인 도 오즈 영화의 유머의 백미이다. 거북군이 리뷰를 쓴 <바람 속의 암탉>은 오즈 영화 중 실패작에 속하는 작품이라고들 한다. 나 역시 이 작품이 가장 별로였다. 오즈 영화 중 초기 무성영화들에는 <태어나기는 했지만>외에 <대학은 졸업했지만>, <낙제는 했지만> 등의 '-했지만' 3부작이 있다. 태어나기는 했지만, 상사에게 아부나 하면서 너절한 회사원으로 살아가는 아버지처럼 인생이 굴러갈 것 같아서 막막한 초등생들의 당당한 항변이 이 무성영화를 단연코 최고의 작품으로 만드는 것 같다. 낙제는 했지만, 인생의 의미는 깨닫기 힘들고, 대학은 졸업했지만, 청운의 꿈이라는 게 대체 어느 구석에 처박혀있는지 알 수 없는 삶들.

이번에 국내에 나온 오즈 책들 3권을 다 뒤져봤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책이 그중 가장 좋다고들 한다. 왜냐면 오즈를 서구에 소개한 도날드 리치의 책이 서구적 관점에서 오즈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부분이 많지만(이 책은 번역도 상당히 문제가 있다), 시게히코의 책은 영화에 대한 오즈의 독특한 시선만큼이나 오즈 영화의 '계절', '계단' 등 영화공부에 이미 관성적인 분류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생각도 못할 키워드들 중심으로 새롭게 오즈를 읽어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부산 시네마떼크에서 나온 오즈 관련 논문집에는 정성일 선생님이 쓴 글이 있는데, 여기서 '60년대에 모더니즘의 시작이었던 오즈를 발견해내지 못한 것은 영화광의 수치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쿠로사와가 50년대에, 미조구치 겐지가 60년대에 발견되었지만, 오즈는 그의 사후에야 70년대에 들어서서, 영화광이나 평론가들이 아닌 빔 벤더스, 짐 자무쉬 등과 같은 영화감독들에 의해 비로소 발견되었다는 글이 이어진다.) 난 이번 영화제를 통해, 오즈에 중독된 것처럼 화면을 들여다봤다. 내가 나이가 들었고, 결혼을 했기 때문에 더욱 이 영화들이 와닿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봤다.

이번 영화제 직전에 시네마 2 스터디에서 오즈 발제를 맡았다. 안토니오니와 펠리니와 같은 장에 있는 오즈에 대한 글은 상대적으로 어렵거나 내용이 풍부한 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럼에도 어려웠고, 이번 영화제가 아니었으면 이해하지 못할 문장들이 많았지만. 하지만 안토니오니나 펠리니는 같은 문화권에서 영화를 만들었던 사람들이라, 들뢰즈가 그들의 작품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들은 오즈의 영화에서보다는 훨씬 풍부했을 것이다. 풍부함을 넘어서서 거의 스펙터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를 들어 프랑스의 유명한 영화학자들조차 후샤오시엔 영화의 생활권 내의 문제들을 이해하는 게, 동양권의 역사와 생활 안에 머물러 있는 보통 사람들보다 힘들다고 한다. 그러나 시게히코처럼 일본의 역사와 문화 안에서 오즈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특히, 요즘처럼 모든 영화에 대한 공부와 영화들 자체가 완전히 서구적 시선과 문법에 의거하고 있는 경우는, 자신들이 그런 시선만을 배워온 상태에서 동양적 세계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영화를 찍어내거나, 새롭게 영화를 읽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 Sonimage 2004-6-10 6:29 pm

3 # 시네마2 오즈[ | ]

  • 들뢰즈의 시네마2 1장 2절의 오즈에 관한 글이다. 발제용으로 번역한 것이라 매끄러운 글은 아니지만, 오즈의 영화를 이해하는데 참고가 되리라 생각한다. (아마 가장 좋은 텍스트에 속하는 것으로는 정성일 선생님이 쓴 두개의 짧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부산시네마떼끄 책에 실린 것과 이번 영화제 팜플렛에 실린 것.)

처음에 오즈는 미국 작가들의 영향을 받았지만, 일본적 맥락 안에서 처음으로 순수한 광학적, 청각적 상황으로 자신의 작품을 구축했다. 유럽인들은 그를 모방하지는 않았지만, 후에 그들만의 방법으로 그에게 회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즈는 광학기호와 청각기호들의 발명가이다. 그의 작품들은 여행/발라드의 형태를 갖는데, 기차 여행, 택시로 돌아다니는 것, 버스 여행, 자전거 여행, 혹은 도보 여행의 형태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조부모들의 시골에서 도쿄로의 귀가여행, 한 소녀의 어머니와의 마지막 휴가, 나이든 남자의 산책.... 그러나 일본식 집 안에서 일어나는 가정사로 간주되는 대상들은 모두 일상적인 진부함이다. 카메라의 움직임은 점점 더 적어진다. 즉, 트래킹 쇼트는 느려지고 낮아진 ‘움직임의 블록’이 된다. 언제나 낮은 위치의 카메라는 보통 고정되어 있고, 정면을 향해 있으며, 또는 변화하지 않는 앵글에 멈춰있다. 단순한 컷을 선호하기 때문에 디졸브는 금지된다. 이러한 것은 ‘원시적인 카메라’로의 회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은 놀라울 정도로 절제된 현대적인 스타일의 고안이다. 예를 들어, 현대 영화를 지배하는 몽타주 컷은 이미지들 사이의 순전히 광학적 진행이나 구두점 찍기로 이미지들 사이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며, 모든 통합적인 효과를 희생한다. 사운드 역시 영향을 받는데, 몽타주 컷은 미국 영화들로부터 빌려온 ‘하나의 쇼트에 한줄의 대사’ 진행으로 아마도 그 정점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루비치의 경우에는 운동 이미지는 지침으로 작용을 하지만, 반면에 오즈는 진행의 의미를 변형시켰는데, 이제 그것은 ‘플롯의 부재’로 나타난다. 즉, 운동 이미지는 캐릭터의 성격을 나타내는 순수하게 시각적인 이미지와 그가 말하는 내용에 대한 청각적 이미지(대본의 핵심을 구성하는 완전히 진부한 자연과 대화들) 때문에 사라지게 된다. (이것인 배우들을 선택함에 있어서 그들의 용모와 도덕적 외관이 왜 중요한가에 대한 이유이며, 또한 언뜻 보기에 정확한 주제의식이 없어보이는 대사들이 구축되는가에 대한 이유이다.)

이 방법이 즉각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을 제시하는 것은 분명하고, 영화가 진행되면서 이러한 시간이 늘어난다. 물론, 영화가 진행될수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은 더 이상 그 자체로 중요하지 않게 되고, 다른 어떤 중요한 것의 효과를 보상한다고 생각되어질 수 있다. 즉, 이 관점에서 하나의 쇼트나 하나의 대사는 아주 긴 침묵이나 비어있음으로 연장된다. 그러나 오즈에게는, 놀라운 것과 일상적인 것, 극한 상황과 진부한 상황이 확실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전자가 후자에게 영향을 주거나, 의도적으로 후자 안으로 스며들어간다. 폴 슈레이더의 견해를 따를 필요가 없는데, 그는 마치 두개의 국면처럼, 한쪽에는 ‘일상’을, 다른 한쪽에는 ‘결단의 순간’, ‘부조화’를 대립시키는데, 이 후자들은 설명할 수 없는 단절이나 감정을 일상적 진부함 안으로 집어넣는 것들이다. 이러한 구분은 엄격하게 보자면, 네오-리얼리즘에 더 걸맞는 것이다. 오즈에게, 모든 것은 일상적이거나 진부한데, 심지어는 죽음이나 자연적 망각의 대상이 되는 죽은 자들조차 그러하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눈물들에 관한 유명한 장면들(*예가 되는 장면들이 책에 소개되어있음)은 인생의 흐름 안에서 약한 순간들과 대조되는 강한 순간들에 주목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눈물처럼, 억압된 감정의 분출을 ‘결단의 행동’으로 바라볼 이유가 없다.

라이프니츠는 세계는 일상적인 법칙에 복종하며, 아주 규칙적인 방법에 따라 구성되고, 수렴하는 계열들의 현상이라고 제시했다. 그렇지만 계열들과 사건들은 아주 작은 부분들로만, 균열적이거나 혼란스러운 범주 안에서만 우리에게 나타나므로, 우리는 균열, 부조화, 불일치를 특이한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모리스 르블랑은 선 사상과 유사한 아름다운 신문 소설을 썼다. 거기서 ‘일상철학의 교수’인 주인공 발타자르는 인생에는 중요한 어떤 것도 없고, 예외적인 어떤 것도 없다고 가르치며, 가장 기묘한 모험도 쉽게 설명될 수 있고, 모든 것은 진부한 사건이다라고 가르친다. 계열들의 조건이 약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지속적으로 혼동되어있고 질서 안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어떤 하나의 일상적인 조건은 자신의 시퀀스를 벗어나더니, 다른 일상적 시퀀스의 한 가운데서 솟아오르기도 하는데, 이런 관계 속에서 그것은 강한 순간, 중요하거나 복잡한 지점의 외양을 띠게 되는 것이다. 계열들의 규칙성, 우주의 흐름의 연속성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인간들이다. 삶을 위한 시간이 있고, 죽음을 위한 시간이 있고, 엄마를 위한 시간이 있고, 딸을 위한 시간이 있는데, 인간들이 그 시간들을 뒤섞어버리고, 그 시간들이 무질서 속에서 솟아오르게 하고, 갈등으로 물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즈의 생각이다. 즉, 삶은 단순하고, 인간은 ‘고요한 물을 흩어지게’함으로써 삶을 복잡하게 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통상 이야기되는 것과는 달리, 전쟁 후의 오즈 작품은 몰락하지 않는데, 그것은 전쟁 후의 기간이 이러한 사고를 더 확고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러한 사고를 새롭게하고, 강화하고, 갈등하는 세대들이라는 주제를 넘어섬으로써이다. 즉, 미국적인 일상성은 일본의 일상적인 것과 충돌하는데, 색채로 표현될 수 있는 두개의 일상성의 충돌, 빨간 코카 콜라 또는 노란 플라스틱은 일본인들의 씻겨져 연한 톤들과 강조점이 없는 계열들의 삶에 거칠게 간섭하게 된다. <오차즈케의 맛>의 등장인물이 말하는 것처럼, 그 반대 상황이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만약 사케, 사미센, 게이샤의 가발들이 갑자기 미국인의 일상적인 진부함 속으로 들어간다면. 이런 점에서, 슈레이더가 믿었던 것과는 달리, 자연은 결정적인 순간이나, 일상적 인간과의 명백한 단절에 개입하지 않는다. 자연의 아름다움, 눈덮힌 산의 경관은 우리에게 오직 하나의 사실, 즉 모든 것은 평범하고, 규칙적이며, 모든 것은 일상적이다라는 것을 말한다. 자연은 인간이 파괴한 것을 기꺼이 새롭게 만들고, 인간이 파괴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복원시킨다. 그리고, 등장인물이 가족의 불화에서 잠시동안 빠져나오거나, 눈덮힌 산을 감상하기 위해 일어나는 것은, 그가 자신의 집을 뒤죽박죽 만들어놓았던 계열들을 질서있게 복원하기를 추구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질서는 불편하고, 규칙적인 자연에 의해 회복된다. 마치 표면적인 단절들의 이유를 우리에게 제시하는 등식에서처럼, 즉, ‘우여곡절과 기복들’이라고 라이프니츠가 정식화한 것처럼.

일상적 삶은 오직 약한 감각-동력 연관들만이 지속되도록 허용하고, 운동 이미지들을 순수한 시청각 이미지들로, 시각기호와 청각기호들로 대체한다. 오즈에게는, 미조구치처럼 결단의 순간을 연관시키고, 죽은 자들을 산 자와 연결시키는 그 어떤 보편적인 항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구로사와처럼, 숨돌릴 공간이나 심오한 문제를 포함하기 위해 확장하는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즈의 공간들은 연결되어있지 않거나, 비어있는 ‘그 어떤 공간이든지’의 상태로 끌어올려진다(바로 여기서 오즈는 첫 번째 발명가 중의 하나로 간주되는 것이다). 시선과 방향, 심지어는 사물들의 위치의 잘못된 연속성은 항상적이고, 체계적이다. 카메라의 움직임만 하더라도, 비연속성의 좋은 예를 보여준다. 에서 여주인공은 레스토랑에 있는 누군가를 놀라게 해주려고, 발끝으로 조용히 걸어들어간다. 카메라는 그녀를 프레임의 정중앙에 위치시키기 위해 뒤로 물러선다. 그리고 카메라는 복도를 따라 들어간다. 그러나 이 복도는 레스토랑의 복도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집에 들어와있는 여주인공의 집의 복도이다. 등장인물도 없고, 움직임도 없는 비어있는 공간들을 보자면, 이 공간들은 사용자들이 없는 내부이고, 자연 속의 버려진 외부이며, 풍광들이다. 오즈에게 공간들은 자율성을 띠게 되는데, 이것은 네오 리얼리즘에서조차 공간들이 획득하지 못한 것이다. 네오 리얼리즘의 경우, (스토리와의 관계에서의) 상대성이나 (이미 행해진 행동과의 관계에서) 인과성(귀결)이라는 명확한 가치들이 공간에 부여된다. 이 비어있는 공간들은 순수한 감상의 경우처럼, 절대적인 것에 도달하고, 즉각적으로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실재와 가상, 주체와 객체, 세계와 나의 일치를 불러일으킨다. 이 공간들은 부분적으로는 슈레이더가 말한 ‘정체의 경우들’, 노엘 버치가 말한 ‘필로우- 쇼트들’, 리치가 말한 ‘정물들’에 대응한다. 문제는 이 범주 자체의 중심에 만들어진 구분들이 전혀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적절하게 말해진다면, <비어있는 공간이나 풍광>과 사이에는, 확실히 수많은 유사성들, 공통된 기능들, 지각될 수 없는 전환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동일한 것이 아닌데, 정물은 풍광과 혼동되지 않는다. 비어있는 공간은 무엇보다도 가능한 내용물(contenu)의 부재에 의해 가치를 얻게 되는데, 반면에 정물은 그 자체를 감싸거나 정물의 적절한 얼개(contenant)가 되는 대상들의 존재와 구성에 의해 정의된다. 즉, 의 끝부분의 화병의 롱 쇼트에서처럼. 그러한 대상들은 반드시 부재(비어있음)에 둘러싸여있을 필요가 없지만, 소프트 포커스(flou) 안에서 인물이 살아있게 하고, 말하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 마치 <동경의 여인>의 화병과 과일의 정물처럼, 또는 <그 여인은 무엇을 잊었는가?>의 과일과 골프 클럽의 정물처럼. 이것은 세잔느에게도 마찬가지인데, 비어있거나 구멍뚫린 풍광은 꽉찬(완전한) 정물화와 동일한 구성의 원칙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제 두가지 앞에서 주저하게 되는데, 그 두 가지는 그토록 기능들이 서로 침범하는 것과 그토록 전환이 미세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즈의 영화 의 시작부분에 물병과 등대의 경탄할만한 구성을 보라. 그야말로 그 구분은 비어있음과 꽉참의 구분인데, 그것은 중국과 일본 사유 안의 전적으로 미묘한 차이의 문제나 관계의 문제를 유희하는 것이다. 만약 내부든 외부이든 비어있는 풍광이 순수하게 광학적인(그리고 청각적인) 상황을 구성한다면, 정물은 그것의 이면이거나, 상관물이다.

의 화병은 딸의 어중간한 미소와 막 터지기 시작하는 울음 사이에 끼어있다. 그것은 생성, 변화, 전환이다. 그러나 변화하는 것의 형식은 변화하지도 않고, 지나가지도 않는다. 이것은 시간, 시간의 화신, <순수한 상태에 놓인 짧은 시간>이다. 즉, 그것은 직접적인 시간-이미지인데, 이 시간-이미지는 변화를 산출하지만, 변화하지 않는 형식을 변하게 하는 것을 제공한다. 밤은 낮으로 변하거나, 또는 반대로, 빛이 점점 약하게, 혹은 점점 강하게 떨어지는 정물을 되돌려 보낸다.(<밤의 여인>, <변덕스러운 심장>) 정물은 시간이다, 왜냐하면 변화하는 모든 것은 시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은 그 자체가 변하지 않는다, 시간은 오직 다른 시간 안에서만 한없이 그 자체가 변화할 수 있다. 영화적 이미지가 보다 엄격하게 사진과 대면하는 순간에는, 보다 극명하게 스스로를 구분시킬 수 있다. 오즈의 정물은 물병 위에서 10초동안 유지된다, 혹은 10초 동안의 지속을 갖는다. 그러한 물병의 지속은 변화하는 상태의 연속을 가로질러 머물러있는, 바로 재현이다. 자전거 또한 지속할 수 있다, 즉, 움직이는 것의 변화하지 않는 형식을 표상하는 것이다, 머물러있고,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 있고, 벽에 붙여 세워놓는다는 조건 하에서(). 자전거, 꽃병, 정물들은 시간의 순수하고 직접적인 이미지들이다. 시간 안에서 변화하는 것의 이러저러한 조건 하에서 매 경우, 그 각각은 시간이다. 시간은 충만한 것인데, 즉, 변화로 가득 찬 변화하지 않는 형식이다. 시간은 <올바르게 놓인 사건들의 시각적 저장고>이다. 안토니오니는 <사건의 수평선>에 대해 말했는데, 그러나 그 단어는 서양에서는 이중적인데, 하나는, 인간의 진부한 수평선이고 또 하나는 접근할 수 없고, 언제나 확장되는 우주적 수평선을 뜻한다. 거기에서 유럽의 휴머니즘에 기반한 서구 영화와 미국의 SF 영화의 구분이 나온다. 그것은 SF 영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일본인들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 암시된다. 즉, 일본인들은 동일한 수평선에 우주적인 것과 일상적인 것, 지속하는 것과 변화하는 것, 변화하는 것의 변화하지 않는 형식처럼 유일하고 동일한 시간을 연결시킨다. 이러한 식으로 자연과 정체(정지, stase)가 정의될 수 있는데, 슈레이더에 따르면 <통합되고, 영원한 어떤 대상> 안에서 일상적인 것을 연결시키는 형식으로서 정의된다. 전혀 초월을 내세울 필요가 없다. 일상적인 진부함 속에서, 행동-이미지와 심지어는 운동-이미지도 순수한 시각적 상황을 위해 사라지게 되는데, 그런데 순수한 시각적 상황은 새로운 타입의 관계를 드러낸다. 그것은 더 이상 감각-동력이 아니라 시간과의, 사유와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해방된 의미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것은 광학 기호의 아주 특별한 연장이다. 즉, 시간과 사유를 감각가능하게 만들고, 시간과 사유를 시각적이고, 청각적이게 만드는 것이다.

-- Sonimage 2004-6-10 6:18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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