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영

시인의마을

1 # 너, 없음으로[ | ]

너 없음으로
나 있음이 아니어라.

너로 하여 이 세상 밝아오듯
너로 하여 이 세상 차오르듯

홀로 있음은 이미
있음이 아니어라.

이승의 강변 바람도 많고
풀꽃은 어우러져 피었더라만
흐르는 것 어이 바람과 꽃뿐이랴.

흘러 흘러 남는 것은 그리움,
아, 살아 있음의 이 막막함이여.

홀로 있음은 이미
있음이 아니어라.

2 # 무엇을 쓸까[ | ]

무엇을 쓸까
탁자에 배부된 답지는
텅 비어 있다
전 시간의 과목은 `진실'
절반도 채 메꾸지 못했는데
종이 울렸다
이 시간의 과목은 `사랑'
그 많은 교과서와 참고서도
이제는 소용이 없다
맨 손엔 잉크가 마른 만년필
하나,
그 만년필을 붙들고
무엇을 쓸까
망설이는 기억의 저편에서
흔들리는 눈빛
벌써 시간은 절반이 흘렀는데
답지는 아직도 순백이다
인생이란 한 장의 시험지
무엇을 쓸까

그 많은 시간을 덧없이 보내고
치르는 시험은 항상
당일치기다

3 # 벌써[ | ]

'벌써'라는 말이
2월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새해 맞이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월,
지나치지 말고 오늘은
뜰의 매화 가지를 살펴보아라.
항상 비어 있던 그 자리에
어느덧 벙글고 있는
꽃,
세계는
부르는 이름 앞에서만 존재를
드러내 밝힌다.
외출을 하려다 말고 돌아와
문득
털 외투를 벗는 2월은
현상이 결코 본질일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달,
'벌써'라는 말이
2월만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4 # 登山[ | ]

자일을 타고 오른다.
흔들리는 생애의 중량
確固한
가장 철저한 믿음도
한 때는 흔들린다.

岩壁을 더듬는다.
빛을 찾아서 조금씩 움직인다.
결코 쉬지 않는
無明의 벌레처럼 無明을
더듬는다.

함부로 올려다보지 않는다.
함부로 내려다보지도 않는다.
벼랑에 뜨는 별이나,
피는 꽃이나,
이슬이나,
세상의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다만 가까이 할 수 있을 뿐이다.

조심스럽게 岩壁을 더듬으며
가까이 접근한다.
幸福이라든가 不幸 같은 것은
생각지 않는다.

발붙일 곳을 찾고 풀포기에 매달리면서
다만,
가까이,
가까이 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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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서울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68년 에 '잠 깨는 추상'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72년 동인
1983년 제15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84년 제4회 녹원 문학상 수상(평론 부분)
1986년 제1회 소월시 문학상 수상
1992년 제4회 정지용 문학상 수상
1992년 제2회 편운 문학상 수상(평론 부분)
1999년 공초 문학상 수상
현재 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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