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잡생각 - 해적왕 장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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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잡생각 - 해적왕 장보고
  • 2023-07-29 jjw

내 생각에 장보고는 해적왕이었다. 그는 당나라 서주 무녕군에서 복무한 것을 패권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지만 그것은 독자적 세력 구축을 위한 명분이라고 본다. 당시 신라 왕은 당이 임명한 도독이 되는 것으로 대당 관계를 퉁치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 중앙 정권의 간섭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너 황상이 임명한 장군이니? 나도야" 정도의 명분이 필요했을 것이다. 실제 장보고는 군경력 보다 퇴역 이후 막대한 부를 쌓았다는 것이 여러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근대 이전의 무장 상선은 어디 건 기회가 되면 해적으로 변신하였다. 영국이나 프랑스는 왕이 아예 대놓고 사략을 허가하는 국가 단위의 해적이 있었고, 그 이전의 바이킹도 무시무시한 이미지와 달리 보통은 얌전한 상인이었다. 그런데 어라 앵글족 이 멍청이들은 수도원에 그 많은 은공예품을 쌓아 놓고 방비를 안하네? 그럼 우리가 접수. 데인족들이 노텀브리아에 깃발 꽂은 사연은 대충 이렇다. 더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넷플릭스 라스트 킹덤을 보기로 하자.

동쪽이라고 사정이 다르지는 않아서 황해를 낀 주요 무역로에 각종 해적이 들끓는 건 당나라 시기부터 명나라에 이르기 까지 참으로 유구한 전통(?)이었다. 그 오랜 시기 이 지역의 해적은 퉁쳐서 왜구로 불렸지만, 그들이 꼭 일본에만 본거지를 둘 이유도 없고 일본인들로만 구성될 이유도 없다. 그 배에 타고 있으면 출신이 일본이건 한반도건 동중국이건 다 퉁쳐서 왜구인 것이다. 한반도 출신이 주를 이룬 마지막 해적 집단은 굳이 짚자면 삼별초를 들 수 있겠다.

왜구의 구성원이 일본 중심으로 굳어진 건 아무래도 원/명 교체기 쯤일텐데, 당시 일본 이외의 다른 나라들은 이미 중앙집권화가 갖추어져 국가에 반하는 독자적 세력이 근거지를 마련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공식적 센고쿠 시대는 15세기나 되어서야 시작되었다고 보지만, 그 이전에도 중앙 권력의 힘은 다른 곳에 비해 매우 약한 상태였다. 최영 장군 나오고 이성계가 화살 쏘고 하던 시기의 황해를 주름 잡은 해적은 아무래도 쿠슈가 중심이지 싶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장보고 시대로 가보면, 당시 황해를 횡단하던 국제 무역선은 250여 톤 급이었다. 지금으로서도 제법 큰 규모의 배다. 황해를 사이에 둔 중국 동부와 한반도, 일본 쿠슈 사이에는 사방을 둘러봐도 육지가 보이지 않는 넓은 구역이 있기 때문에 배들은 횡단 항법을 이용하여 항해 하여야 하였다. 일단 육지의 특정 지점이 보이는 지점까지 항해를 한 다음 동서로 이동해서 반대편의 육지를 확인하고 해안을 따라 목적지로 이동하는 방법이다. 지남철이 알려져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았고, 동아시아 몬순 계절풍 지역에서 바람을 거스르는 항해는 어렵기 때문이다.

대충 동남풍이 불기 시작하는 봄철에 한반도면 당항포, 장산곶 등에서, 일본이면 나카사키나 시모노세키 쯤에서 배를 띄워 바람을 타고 중국의 산동, 명주 등으로 건너가면 태풍이 불어 난파의 위험이 있는 여름을 피하고 북서풍이 부는 가을에 거꾸로 황해를 횡단하였다. 도착한 무역선이 다시 출항할 때까지 길게는 반년의 기간 동안 머물 곳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신라방이니 하는 거주지가 생겨났다. 장보고는 이러한 일종의 조계지를 근거로 무관 출신임을 앞세워 거상이 되었다. 장보고 당시 황해 무역은 지중해 무역에 버금갈 만큼 중요한 무역로였고 고려를 세운 왕건 역시 해상 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이 건국의 주춧돌이었지만, 조선 시대가 되면 명의 해금 정책으로 황당선을 통한 밀무역만 근근히 남고 완전히 종료되어 조선말까지 이어졌다. 한편 일본의 경우 배 말고는 무역로가 없었기 때문에 해금 정책 이후로도 특례를 적용하여 "견당선"을 운영하였다.

신라의 수도는 경주였고 산동의 신라방까지 가려면 한반도를 빙돌아 서해안으로 나간 뒤 황해를 건너야 하였다. 일본의 경우도 육지가 보이지 않는 먼 바다로 나가면 중간에 떠있는 추자도, 흑산도, 제주도 등은 중요한 랜드마크였다. 장보고는 완도를 근거지로 이 해역의 패권을 장악하였다. 왜 그랬을까? 신라건 일본이건 당과 무역하려면 이 해역을 지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멀쩡한 척 스스로 무역선을 운용하였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조난과 난파가 흔하던 그 시기 느릿느릿 지나가는 맛 좋은 먹이감을 장보고가 과연 안녕히 지나가시라 보기만 했을까? 보호를 구실로 삥을 뜯건 여차하면 직접 약탈을 하건 무얼해도 한 몫 잡으려 했다는 데 무조건 한표다. 아무리 봐도 걔 깡패 맞고 해적왕 맞다니까. 한편, 제주도 역시 일본의 견당선 입장에서는 아차하면 배를 나포해 가는 해적들이 사는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제주의 고양부 삼성이 어떻게 지역의 호족이 될 수 있었을까에 대해서는 짐작가는 바가 있지만 물증이 없으므로 패쓰.

신라 중앙 정부 입장에서 장보고는 눈의 가시였을 것이지만 한 동안은 마지 못해 인정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서식스의 알프레드가 예뻐서 데인족을 동앵글랜드의 군주로 인정한 것이 아니듯이 신무왕도 왕권 경쟁에서 장보고의 조력을 받았을 지언정 결코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장보고는 당의 신하를 자처했으므로 대역죄를 묻기 전에는 제거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문성왕의 장보고 암살은 그 이전에 당과의 조율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장보고가 신라와 당을 오갔고 해상을 그렇게 장악했으니, 그 수하 역시 여기 저기 오만 곳에서 온 사람들이 득실했다고 보는 게 맞다. 아마도 중국인, 신라인, 일본인이 완도에서 같이 모여 다음 배를 털어먹을 계획을 세웠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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