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잡생각 - 연역적 사고의 힘과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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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잡생각 - 연역적 사고의 힘과 한계
  • 2022-01-10 jjw

연역적 사고의 기본적 작동 방식은 이렇다. 먼저 누구나 당연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을 바탕으로 둔다. 그 사실에서 끄집어 낼 수 있는 새로운 것을 살핀다. 기본 사실이 참이고 새로운 사실이 기본 사실에서 합리적으로 도출된 것이라면 새로운 사실 역시 참으로 인정된다.

이러한 연역적 사고의 힘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논리학과 수학이다. 에우클라테스 즉 유클리드의 "원론"은 공리가 참이라고 인정하면 필연적으로 참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명제들을 나열하고 있다. 연역적 사고는 결론의 증명과 미래의 예측에서 매우 큰 힘을 발휘한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단순한 공리에서 출발하여 모든 직각삼각형이 만족할 수 밖에 없는 성질을 증명해 내고, 뉴턴 역학은 발사된 탄환의 탄착지점부터 다음 일식의 때와 장소에 이르기까지 예측해 낸다.

현대 과학은 기본적으로 관찰된 현상의 귀납에 의한 법칙의 발견으로 규정되지만, 매번 동일한 사실을 관찰할 것이 아니라면 기존의 사실에서 연역하여 새로운 사실을 규명하기 마련이다. 어느날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생물이 발견되었다고 해 보자. 생물학자들은 이 생물의 여러 특성을 살펴보고 기존의 분류 어딘 가에 끼워넣으려 할 것이다.

실은 과학 이전의 시대부터 인류는 아주 오랫동안 연역적 사고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사회를 구성하며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여 왔다. 이는 매우 합리적인 선택인데, 하나 하나 따지고 일일이 검토하는 데 시간을 쓴다면 어느 세월에 국가를 구성하고 도시를 건축할 것인가. 연역적 사고는 그 모든 것을 자동화할 수 있다.

연역적 사고의 가장 큰 문제는 확증편향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쓰이기 쉽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교적 가치관의 핵심은 비례물언 비례물동(非禮勿言 非禮勿動) 그러니까 예가 아니면 말도 하지 말고 행동하지도 마라는 것이데, 말은 참 좋지만, 이게 확장되면 감히 아랫 사람이 윗 사람에게 지적질하는 것도 예가 아니라 잘못된 일을 바로잡을 수 없게 된다. 실제로 조선 시대에 종이나 소작인이 주인을 고발하는 것은 무엄한 일로 금지되었다.

연역적 사고의 가장 큰 한계는 대전제가 되는 "공리"를 부정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예라던가 의라던가 염치라던가 하는 덕목 뿐만 아니라 그것의 바탕이 되는 이(理)라던가 기(氣)라던가 하는 추상적 개념마저 일단은 당연히 존재하는 사실로서 인정하고 들어가야 그 다음 논의가 진행된다. 물론 이것은 일종의 도그마다. 동서를 막론하고 어떤 명제가 도그마로 작용하면 그 다음의 논쟁은 그저 해석의 문제가 된다. 새로운 판을 짤 수가 없다.

그런데 어떤 사상이고 그것의 태동 단계에서는 기존의 것이 당연히 여기는 사실을 의심하고 부정하여 탄생하기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이웃한 수 많은 다른 사상들을 참고한다. 이를테면 성리학은 만들어질 때 경쟁하는 사상이었던 불교를 극도로 배격하였지만, 성리학의 논리 구조 안에는 도교적 태극 사상과 함께 불교의 반야론이 짙게 깔려 있다.

성리학의 근원적 개념인 이(理)에 대한 설명을 보자. 조선의 성리학자 서명응은 이의 성질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이는 소리와 냄새도 없고, 부피도 없고, 겉과 속도 없고, 정의도 없고, 헤아림도 없고, 조작도 없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반야심경의 한 구절을 보자.

"그러므로 공 안에는 색도, 수·상·행·식도,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도,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도, 눈과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도다."

성리학자들이 들으면 펄쩍 뛸 일이지만, 대승불교의 심학(心學)이 없었으면 성리학의 심학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한편, 성리학의 공리였던 이와 기, 그것을 바탕으로 한 사단과 칠정은 사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범주 혼동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자연 과학적 대상인 자연 현상이 보여주는 상호 관계와 인문학과 사회 과학의 대상인 사회 속 사람들의 상호 관계를 혼동하기 때문에 스스로 존재하는 것과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것을 혼동한다. 현대 철학적 용어로 비판하면 성리학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점을 부정하여 당위를 본성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사실 근대 이전의 모든 사변적 철학이 연역적 사고의 한계라는 점에서 성리학과 대동소이하다. 딱히 성리학만의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시대는 이미 현대의 앞머리였던 20세기 초에 18세기의 문제 의식을 벗어나지 못한 그들의 세계관이었다. 자, 그러면 오늘날은 어떠한가? 우리는 과연 당위를 앞세우는 사고 방식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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