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잡생각 - 굴드를 위하여

1 개요[ | ]

오늘의 잡생각 - 굴드를 위하여
  • 저자: Jjw
  • 2018-01-28

스캡틱 12권은 종교와 과학의 문제 특히 창조론을 골자로 하는 기독교와 과학간의 캐캐묵은 강호 은원을 다시 들추고 있다. 서둘러 변명부터 하자면 난 스켑틱의 열성 팬이고 참으로 유익한 잡지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하지만, 내게도 역린이란 게 있으니 난 자칭 골수 굴드주의자란 게 문제라면 문제인 것이다.

마시오 피글리우치는 과학이 종교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고 하면서 대표적인 사례로 굴드의 NOMA(Nonoverlapping Magisteria, 비중첩 권위 - 스캡틱 한국어판의 "교역권"이란 번역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를 한마디로 "비겁한 변명" 쯤으로 치부하고 있다. 굴드의 NOMA는 피글리우치가 괄호 속으로 묶어버린 현실 "과학의 범위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와 이에 따른 인식 "과학은 우리가 왜 사는가와 같은 질문에 답변하지 못 한다"를 바탕으로 나온 지식과 진리에 대한 기본적인 천명이다. 물론 피글리우치는 이러한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 것은 종교만이 아니며 위대한 사상가들이 보여준 철학이란 것도 있다고 말한다.

맞다. 철학도 있다. 그런데 왜 종교는 아니라고 하는가? 비유하자면 우리는 중력과 가속도를 구분할 수 없다. 비행기 속에서 자유낙하중인 사람은 자신이 추락하고 있는 것인지 무중력 상태에 놓인 것인지를 감각적으로 구분하지 못한다. 중력과 가속도의 구분만큼이나 철학과 종교의 구분 역시 만만치 않다. 과학의 범위를 넘어 멀어지는 순간 과학적 방법의 힘 역시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스토아학파는 신학자들인가 아니면 철학자들인가? 그 둘의 구분이 과학에서 유의미한가? 스피노자는 뭐라고 구분할 것인가? 범신론 신학자? 근대 철학자? 과학 밖으로 한 발자국 내딛을 때 마다 논점은 이탈되고 질문의 특성화 자체가 버거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니 이쯤하자.

피글리우치와 스캡틱 필진들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한다. 역사적으로 너무나 오랫동안 종교, 특히 기독교는 자신들의 도그마를 내세워 과학을 부정하여 왔다. 게다가 기독교 근본주의가 보여주는 반지성적 태도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위해 과학의 기초 지식을 부정한다. 특히 진화에 대한 이들의 태도는 과학자라면 누구나 식겁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굴드의 NOMA는 그런 의미에서 형성된 것이다. 종교는 그 자체로서 훌륭한 의미가 있으니 괜시리 영토를 넘어 과학을 넘보지 말라는 의미다. 또한 과학 역시 자신의 범주를 넘어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의미도 포함된다.

물론 우리는 성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과학적 오류를 신나게 지적해 줄 수 있다. 우주의 모양은 궁창이 아니요 땅은 평평하지 않고 하늘에 보이는 천체 가운데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가 종교의 교의에서 본질적인가? 아무리 많은 오류를 지적한다고 해도 그저 허수아비를 때리는 것에 불과하다. 기독교 근본주의가 성서를 문자 그대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정말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듯이, 과학의 이름으로 성서의 오류를 낱낱이 비판한다고 그것이 종교의 본질적 교의를 부정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한 사람이 예수에게 다가와 물었다. “선생님 제가 한 다리로 서 있는 동안에 선생님의 가르침을 모두 알려 주실 수 있나요?” 예수가 말했다. “하느님을 공경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끝.” 실제를 확인할 방법이 없는 하느님을 공경하라는 말은 잠깐 접어 버리자. 당신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거부할 수 있는가? 그리고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굳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어야만 의미가 있는가? 콕 짚어 “난 사촌 8명 이상을 위해서라면 내 목숨을 내 놓을 수 있다”와 같은 분석만이 유일한 해법인가? 다시 한 번 질문. “왜 사냐?” 문답이 모두 쓸데없다.

피글리우치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굴드의 NOMA를 종교에 굴복한 과학의 비겁이라 단정하면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하나는 과학을 합리적 이성으로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많은 종교인들을 모욕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를 갖고 있는 과학자들을 무슨 이중인격자로 취급 한 것이다. 과학이 우주를 설명하면서 신을 거론 않는 것은 그것을 가정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과학이 자신의 영토를 벋어날 이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근본주의는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늘 있기 마련인 종교 내의 극단일 뿐이지 그 자체가 종교를 대표하지 못한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기독교 전체가 아니다. 그러니 근본주의의 반지성을 비판하면서 그것을 그 종교 전체의 특징이라고 과대 포장하지는 말자. 기독교 근본주의가 만들어낸 “젊은 지구”니 “지적 설계”니 하는 유사과학에 대해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하고 최선인 조언은 “그러시거나 말거나 그게 과학이라고 우기진 마세요.”이다. 이걸 넘어서 기독교의 본질을 논하려면 기독교를 과학이 다룰 수 있는 개념으로 재특성화 하거나, 아니면 과학자가 과학을 벗어나 특정 신념으로 무장해야 한다.

기독교를 재특성화하여 과학적으로 다루는 작업은 이미 사회학과 같은 분야에서 오래 전부터 이루어져 왔다. 물리학자나 화학자, 생물학자들도 필요하다면 종교를 연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필요가 생길까 싶긴 하지만, 자신의 분야에 맞게 재특성화하여 연구하면 된다. 이렇게 쓰고 보니 “종교적 금기와 영양학적 특징의 상관관계” 같은 주제가 바로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이렇게 금방 떠오르는 걸 보니 누군가 이미 연구했을 거 같다. 아니나 다를까 구글에 넣자 마자 논문이 쏟아진다. 각설.

종교 현상 자체에 대해서는 진화심리학과 같은 학문에서도 무언가 할 말이 있을 것이다. 내 스스로는 진화심리학의 학문적 토대에 대해 아직도 많이 미심쩍어 하는 중이지만, 종교의 진화적 의미와 같은 연구를 할 수도 있겠지. 이것도 역시 아니나 다를까 구글 검색에는 “종교 유전자” 등을 언급한 문서가 눈에 띈다. 내가 진화심리학을 불편해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저놈의 확인되지도 않은 유전자 양산이다. 분자생물학에 따르면 유전자의 역할은 오로지 단백질을 지정하는 것이다. 그 이외의 영역은 유전자가 아니라 뇌신경과학의 몫이고 이 분야는 아직 갈 길이 멀기만 하다. 아무튼 이렇게 종교 역시 학문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 때 다루어지는 것은 “종교”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종교 활동”이다. 이 둘의 간극은 생각보다 크다.

한편 도킨스의 무신론은 그것이 아무리 과학적 사실을 자신의 근거로 제시한다고 하여도 이미 과학의 범위를 벗어난 신념일 뿐이다. 과학은 신의 존재를 증명할 방법도 없고 이유도 없다. 또 질문. “그거 증명해서 뭐하는데?” 스캡틱은 온갖 비과학적 낭설로 뒤범벅된 세상에서 합리적 “의심”을 강조한다. 내가 스캡틱을 좋아하는 이유다. 그러한 의심을 자신들의 내부로도 제기할 수 있을 때 “회의론”은 보다 성숙해 질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이 종교를 다룰 때에는 “다룰 수 없는 것은 다룰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갈릴레오의 충고에 따라 연구의 목적에 맞게 특성화하여야 한다. 그 이외에 종교 자체의 의미는 종교와 철학, 신념의 영역이다. 그걸 과학적 진리와 동등한 지평에서 다루려고 하는 것은 종교 근본주의의 미러링에 불과하다. 과학 근본주의라고 불러야 할까? 다시 한 번. NOMA를 너무 쉽게 보지 말길.

뱀발: 굴드 역시 종교 자체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음. 나도 마찬가지.

뱀발 2: 스캡틱 12호를 보니 거기도 남초가 매우 심각. 대표적 남초지대인 위백에 거주하는 1인으로서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함.

2 같이 보기[ | ]

3 참고[ | ]

문서 댓글 ({{ doc_comments.length }})
{{ comment.name }} {{ comment.created | snsti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