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뜬금포 - 정보와 언어

1 개요[ | ]

오늘의 뜬금포 - 정보와 언어.
  • 저자: Jjw
  • 2017-12-19

점점 쇠퇴해 가는 기억력 때문에 정확한 워딩이 이거였는 지 확신이 서진 않지만, "말씀이 있기 전에 정보가 있었다"라는 책광고 카피를 보았다. 순간 어 그건 아니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여러 가지로 공사 다망해서 그냥 저냥 넘어가 버렸다. 광고의 중의적 의미는 잠깐 치우고, 과연 정보가 언어에 우선하는 가 하는 문제만 잠깐 짚어 본다.

어떠한 것이든 문제는 해석이고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기 마련이다. 과학에서도 그렇다. 물질의 존재 또는 존재 양식 자체를 정보라고 "해석"하면 최소한 정보들 가운데 어떤 것은 언어보다 선행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를테면 "빛이 있으라"는 말을 하려면 우선 빛이라는 정보가 존재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물질-에너지와 정보, 언어의 관계는 사실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빛은 과연 어디까지가 빛인가? 가시광선만을 뜻하는 것인가? 적외선이나 자외선, 또는 엑스선은 빛인가 아닌가? 인간의 입장에서 가시광선이 빛이라고 하면, 꿀벌의 입장에선 자외선도 충분히 빛이다. 더 나아가면 전파와 빛을 나누는 기준은 그저 진동수의 많고 적음일 뿐이다. 그러면 우리는 도대체 어디까지를 빛이라고 하는가?

우리는 모든 전자기파를 빛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 가운데 일정 주파수 대역만을 빛이라고 한다. 이 경우 전자기파라는 물질-에너지 자체는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인식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결국 누군가가 이건 빛이야 라고 부를 때 비로소 그것은 빛이 된다. 내가 그 이름을 부를 때 비로소 꽃이 되듯이. 즉,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는 정보가 되기 부족하다. 그것이 우리가 있던 없던 이 우주가 끝날 때까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난화기의 어린이가 크래파스를 집어들고 스케치북에 낙서를 한다. 북북 긁어대고 이리저리 흔들어 대며 만들어 낸 자국을 보고 어른이 묻는다. "이건 뭐야?" 아이가 무슨 대답을 하든 의미는 없다. 그 아이에겐 그것이 어떠한 의미나 도식을 뜻하는 것보다 자신의 팔을 이리 저리 흔들어 대며 스케치북에 자국을 남기는 쾌감 자체가 더 중요하다. 아, 스케치북 보다는 분명 방바닥이나 벽지를 더 좋아할 것이다. 어른이 묻는 이것은 이미 충분히 구조화된 어떤 도식이다. 난화기의 아이에겐 그런 도식 자체가 없다. 그게 동그라미든 세모든 좀 더 아이가 자라고 나서야 커다란 동그라미에 가느다란 팔다리를 붙이고 이건 아빠야라고 말할 것이다. 그제서야 아이의 의식 속엔 도식으로 나타낼 수 있는 아빠라는 정보가 자리잡았다.

도식은 플라톤이 말하던 이데아가 될 수도 있다. 삼각형의 이데아가 있어서 사람들은 어떤 것을 보고 이건 세모네 라고 말한다고. 그러나, 사람들의 인식 속의 삼각형은 수 많은 삼각형 비스무리한 것들의 공통적 상징을 통하여 구성된 것일 뿐이다. 플라톤은 이 과정을 완전히 거꾸로 말하였다. 그렇다고 플라톤이 틀렸다고 간단히 정리해 버릴 것까진 없다. 그는 어찌되었든 사람들의 인식과 실제하는 물질-에너지 사이의 간극을 처음으로 "인식"한 사람이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결국 정보가 되는 것은 그에 대한 도식 또는 개념이 먼저 형성될 때 가능한 것이다. 물론 인간은 이것을 언어와 언어가 아닌 것 모두를 사용하여 구성한다. 누군가 손을 흔들며 내게 다가오면 나도 마주 손을 흔들어 주면 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보다 추상적인 것들은 결국 언어적 개념을 통해서 구축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그렇게 함으로서 매우 추상적이고 고도로 구조화된 것도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사랑과 평화, 전쟁과 야망 뭐 그런 것들. 그러니 말씀 전에 무언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게 정보다 라고 하는 건 책 홍보를 위한 과장을 빼면 많이 빈약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정보 리터더시와 같은 말이 대유행이다. 내 마음엔 썩 내키지 않지만, 이 경우 정보는 대개 디지털로 변환할 수 있으며 네트워크로 전달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리터더시는 특정한 프로토콜에 따라 앞서 말한 의미의 정보를 수집하고 가공하여 재배포 하는 일련의 행위로 축소된다. 이러한 의미의 축소와 사용은 자칫 애초에 이런 개념을 만든 사람의 의도와는 안드로메다 만큼 멀어질 수 있다.

사람들은 끊임 없이 새로운 어떤 것을 조직화 하고 구조화하고 그것을 통해 정보를 생산한다. 전화와 라디오는 모두 외부로부터 도입된 것인데 어떤 것은 한자어로서 통용되고 어떤 것은 외래어가 그냥 쓰였는 지 생각해보면 물론 그저 처음 그 말을 쓴 집단이 무엇을 더 선호하였는 가와 같은 우연의 산물일 수도 있지만, 이미 사용하고 있는 언어로 설명하기가 더 어려운 것은 그냥 외래어로 통용되는 경향이 있다. 양동이는 바케스를 대체하지만 잉크며 노트는 그렇지 않다. 레코드는 한국어에서 더 이상 영어의 record를 뜻하지 않는다. 이게 간혹은 서로 다른 언어 성향을 보이는 집단 간에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는데, 최근 신생아의 사망을 이벤트라고 언급한 그 의사는 그저 자신이 속한 언어 집단에서 사용하는 의미 그대로 event를 뜻한 것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은 자신의 말이 특히 큰 슬픔에 빠진 당사자에게 어떤 식으로 들릴 수 있는 지 보다 숙고했어야 한다. 내 기억엔 분명 병원에서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하는 프로토콜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 뒤로 일어나는 일은 실망스럽기 그지 없다. 이야기가 샜다. 이건 여기까지.

무언가가 이미 있다고 하여도 새로운 개념과 인식이 언어로서 표현되기 전까지 그것은 정보가 아니거나 아니면 그 정보의 가치가 매우 낮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혐오 또는 포비아의 경우를 보자. 우리 어릴 적에 동네마다 한 명씩은 꼭 있던 이른바 "바보", "팔푼이", "칠푼이"들은 더 이상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제 그런 멸칭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에 대한 멸시와 편견, 혐오는 매우 오래 된 것이지만, 그것이 "여성 혐오"라는 이름으로 다시 정립된 것은 매우 최근의 일이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사용하는 언어 뭉치 속에서 이 정보를 해석하고 때로 그것 때문에 서로 전혀 다른 의미 때문에 충돌하기도 한다.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해 그럼 군대가면 비양심이냐 라고 분노하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 경우 양심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전혀 다른 정보를 전달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각종 홍보는 이러한 정보 전달의 편차를 의도적으로 노린다. 정치적 홍보라면 어떻게든 자신에게 유리한 "프레임"을 짜려고 하며, 상업적 홍보라면 되도록 매출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정보를 구성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정보 리터더시의 형성은 내가 정보를 가공하거나 전달하는 과정보다 오히려 원치 않아도 24시간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를 어떻게 걸러내야 하는 지가 일차적인 관건이 될 수 있다.

2 같이 보기[ | ]

3 참고[ | ]

문서 댓글 ({{ doc_comments.length }})
{{ comment.name }} {{ comment.created | snsti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