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쉴레를 위한 음악

1 개요[ | ]

Music for Egon Schiele
에곤 쉴레를 위한 음악
  • 연주곡 음악그룹 Rachel's의 1996년 음반
  • 두번째 LP 음반

 

2 트랙[ | ]

  1. "Family Portrait" – 5:41
  2. "Egon & Gertie" – 3:02
  3. "First Self-Portrait Series" – 3:47
  4. "Mime Van Osen" – 3:05
  5. "Second Self-Portrait Series" – 2:30
  6. "Wally, Egon & Models in the Studio" – 4:41
  7. "Promenade" – 8:24
  8. "Third Self-Portrait Series" – 2:23
  9. "Trio Goes to a Movie" – 2:41
  10. "Egon & Wally Embrace and Say Farewell" – 3:09
  11. "Egon & Edith" – 2:55
  12. "Second Family Portrait" – 4:45

3 # Sonimage[ | ]

Rachel's
Music for Egon Schiele

미국의 켄터키 주 루이스빌, 1995년, 데뷔 앨범 Handwriting의 발표와 1999년의 세 번째 앨범 Selenography의 발표 사이에 레이첼스는 에곤 실레를 위한 실내악을 사려깊게 작곡하여 연주했다. 레이첼스 음악이 들려주는 변칙적인 인스트루멘테이션의 의아함과 불쑥 튀어나오는 음향에 대한 경의, 현악기를 운용하는 포스트 록의 양상의 다양성에 대한 깨달음 대신에 Music for Egon Schiele는 그 어떤 인디 음악의 마인드도 들어서기 힘든 꽉 짜인 실내악을 전달해낸다. 이 음반은 애초에 레이첼스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레이첼스의 멤버 중의 한 명인 레이첼 그라임스에게 작곡이 의뢰된 작품이었다. 하지만 결국 이 작품은 이후에 레이첼스가 인디 음악에서 도출해낸 자신들의 경향성을 설명해낼 수 있는 맥락을 찾을 수 있게 된 계기처럼 작용하게 된다.

그 어느 누구도 다른 어떤 이에 대한 정확한 전기를 쓸 수 없는 것, 하지만 과거에 대한 애원의 몸짓을 품고 에곤 실레의 사라진 생에 대한 재구성을 시도하며, 그 생을 유추하여 표현해내는 멀티 미디어 극이 90년대 중후반, 시카고 프로덕션에 의해 무대에 올려졌다. 이 무대극은 에곤 실레의 회화 작품들의 슬라이드 쇼와, 그의 그림들을 반영해내고 해석하고자 하는 몸짓들, 그가 남긴 일기들에서 발췌한 몇 줄의 독백, 그리고 레이첼스의 라이브 연주로 이루어졌다. 서른을 넘기지 못하고 죽은, 빈 분리파에 소속되었던 에곤 실레의 그림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화려한 회화적 수사와 더불어, 혹은 그의 대비되는 관점에서 모던 그 이후의 세대들에게 하나의 전범이 된다. 그는 카프카의 시대를 살아갔던 화가였으며, 마치 카프카의 인물처럼, 자신의 인간조건의 전부를 차지했던 예술세계에 들이밀어진 세인의 편견과 오만에 기인한 의심과 편협한 재단의 잣대를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자였다. 우리가 설사 그 시대의 데카당스와 노이로제를 세기 초의 징후에 불과한 것으로 지금 바라보고 있다 해도, 그것이 형성해낸 삶의 조건들 속에서 에곤 실레의 그림들이 가졌던 의미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공감을 얻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의 그림을 단순히 섹슈얼리티의 드러냄으로, 혹은 죽음과 소녀의 주제를 변주해내는 시대적 낭만주의의 소산이라고 볼 수 없으며, 그러한 단언에 저항하며, 가혹한 생의 조건에 맞서서 자신의 육체로 표현해낸 그의 회화적 양식에 차라리 헤아릴 수 없는 기이한 전율로, 침묵과 공허함으로, 그의 매체였던 회화에 보다 가까운 방식으로 소통을 시도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90년대 이후, 차이를 동반한 반복의 환기 속에, 우리는 우리 세대에 걸맞는 방식으로 그의 스타일을 재현해내었던 피터 정이나 혹은 락 이후의 락 음악이 갖는 정체성에서 탈피하여 애매한 사려깊음으로 에곤 실레를 불러내는 작업에 동참하였던 레이첼스를 통해 다시 한번 그의 그림들에 다가설 기회를 얻게 되었다.

비록 이 작업에 동참한 레이첼스가 재즈와 현악에 매료되었고, 평론가들에 의해 포스트록에 접목된 미니멀리즘이라고 설명되었던 Handwriting 시절이나 파블로 네루다에서 매혹적인 정적 사이렌이나 세익스피어, 바다 항해자들에 이르는 연상들을 풀어내었던 The Sea and Bells 시절, 혹은 월면지리부도의 한 페이지를 펼쳐놓고, 비수를 품은 화가 아르테미시아에서 오늘날 예술과 산업의 경계에 있는 영화의 최초의 발명가들 중 하나였던 루이 르프랭스를 하프시코드와 볼륨 딜레이의 노이즈, 과격하게 뜯겨지는 첼로의 현 사이에 배치해놓은 Selenography 시절의 레이첼스가 아닌 것이 아쉬울 것이다. 하지만 피아니스트 레이첼 그라임스가 작곡한 곡들은 우리가 에곤 실레의 작품 앞에서 경험하게 되는 살아가는 것 자체가 스캔들일 수밖에 없는 너와 나의 삶, 육체와 정신이 동시에 처하게 되는 헐벗은 생의 조건들, 선과 면을 구별지으면서도 투명하게 흔적을 남기는 과슈에 대한 매혹, 데카당스 그 자체를 연상시키는 잔인한 미의식들 대신에 그의 그림이 진정으로 남겨주었던 열망과 긍정을 지향하고 있다. 아무런 익스페리멘틀리즘이 없는 열망과 긍정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다면, 다른 시절의 레이첼스와 차별적으로 들려오는 피아노, 비올라, 첼로의 건조한 조합의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면 된다. 애초에 이들은 음향의 틈을, 화이트 노이즈의 장관을 트랙 사이에 끼워넣었던 밴드가 아니었는가.

90년대 초반에 루이스빌의 로컬 밴드 로단 출신의 제이슨 노블과 줄리어드 출신의 크리스티안 프레드릭슨이 처음에 친구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용 음악 테이프를 만들고 자신들의 이름으로 정한 것은 레이첼스 헤일로(Rachel's Halo)였다. 그리고 음대에서 작곡을 전공하고 인디 밴드 훌라 후프에 소속되었던 레이첼 그라임스는 자신의 이름과 같은 이름의 밴드가 만든 테이프를 듣게 되었고, 이 세 사람이 모여 레이첼스라는 밴드를 만들어 1995년 시카고의 주변 밴드들 셸락, 콕테일스, 쥰 오브 44 등의 멤버들과 함께 만든 작품이 Handwriting이다. 다게르와 프리다 칼로에 대한 곡이 실려있는 이 음반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트랙은 <Full On Night>인데, 이 곡은 최근 미국의 일렉트로닉 듀오 맷머스와의 스플릿 앨범으로 발매되었다. <Full On Night>에 대한 두 밴드의 기대 이상의 변주와 해석은 맷머스의 음악적 고리의 폭은 물론, 레이첼스의 음악적 성장을 확연하게 들려준다. 레이첼스는 여전히 시카고를 필두로 한 포스트 락 씬에 편입되어 있지만 하프시코드와 첼로를 다시 발견해내고 철저하게 임프로바이제이션의 열린 결말과 노이즈가 갖는 진정성 위에 자신들의 음악을 펼쳐놓으면서 독자적인 활로를 찾아가고 있는 밴드이다.

음악적으로 레이첼스에게 가장 주목하게 만든 음반은 단연코 Selenography이지만, 이들을 동세대의 청자들에게 각인시켜던 최초의 음반은 Music For Egon Schiele일 것이다(어느 누구도 올리버 스톤의 ‘애니 기븐 선데이’라는 영화에 수록된 이들을 알아듣지는 않았을 것이다). 에곤 실레라는 키워드가 갖는 그 압도적인 매혹은, 에곤 실레를 입에 올린 그 어떤 밴드에게든지 당연히 따라갔을 관심을 이끌어냈다. 그래서 이 음반은 레이첼스의 가장 변칙적인 음반이지만(처음에 레이첼 그라임스의 개인적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이 밴드의 세 핵 중 하나인 제이슨 노블은 참여하지도 않은 앨범이다) 레이첼스 음악에 귀 기울이게 만들어준, 그리고 다시 한번 에곤 실레를 처음 보았던 그 짧은 순간에 경험했을 영원에 이를 것 같았던 도약과 상호이해의 느낌을 모두에게 상기시켜준 앨범이다.

  • 이 글은 레이첼스의 <뮤직 포 에곤 실레> 해설지로 쓰여진 글이다. 원래 이 앨범의 라이센스를 기획했던 파스텔뮤직에서는 어느 관현악 전문 필자와 잘 알려진 문화평론가 2명에게 해설지를 부탁했는데, 첫번째 필자는 차라리 관현악의 소사에 가까운 글을 써서, 레이첼스와도 에곤 실레와도 무관한 글이 되었고, 두번째 필자는 그저 에곤 실레에만 초점을 맞추어 레이첼스가 실종된 글이 되었다. 이에 소니마주는 '맞춤형 대타 필자'이기에(게다가 사실 레이첼스는 소니마주가 가장 아끼는 음악동네의 음악이다) 이 앨범의 세번째 필자가 되었다. 그래서 이 음반에는 해설지가 세꼭지나 들어있다. 또, 이 음반은 파스텔 뮤직이 다빈치 출판사에서 나온 '에곤 실레, 벌거벗은 영혼'이라는 책과 묶어 팔기도 하여, 상당히 많이 팔린 음반이다(많아봤자, 인디펜던트 라이센스이지만). 그런데 이 책은 어느 일본 필자가 쓴 책인데, 참으로 권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 너무나 기가 막혀 이런 내용이 번역되고, 출판된다는 게 믿기지 않는 내용이다.

소니마주도 1994년에 뮌헨에서 에곤 실레 그림을 직접 두 눈으로 대면한 적이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당시 에곤 실레가 우리 나이 또래의 젊은이들 사이에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여인의 늪'이라는 괴상한 제목으로 에곤 실레에 대한 전기영화가 비디오 가게에 나와있어서, 이 비디오를 찾아 쏘다녔던 기억도 있다. 어쨌거나, 뮌헨에서 어느 피나코테크였나 잘 기억은 안나지만(그 당시에는 피나코테크가 두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수리중이었을 것이다. 내가 간 곳이 아마 수리 중인 데였던 것 같다. 가물가물), 인상주의, 다리파 등등의 비교적 최근 그림이 쫙 걸려있는 어느 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방의 입구에 들어서면서, 방을 휙 둘러보다가 한 20미터쯤 건너편에 있는 그림이 순간 확 스치고 지나갔다. 제대로 그 그림을 응시하지 않았지만 그게 에곤 실레 그림이라는 것은 알았다. 그런데, 입구에서 그 그림 앞으로 곧장 가로질러 가는데, 그 그림 앞에 도착하자마자, 눈물이 뚝뚝 쏟아졌다. 아무래도 그때 나는 너무 젊은 나이였고, 너무 일찍 절망을 느꼈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그런 내 앞에 에곤 실레의 그림이 확 다가왔을때, 정말 일단 도판에서 보던 것과는 다른 사이즈로 확 다가왔을때, 직접 손으로 만져질 수 있는 절망 같은 것을 대면하는 것과 같았다.
어쨌든 그때 뮌헨에서는 렌바흐 하우스에서 칸딘스키에 대한 대대적인 회고전이 있었고, 아마 뮌헨을 선택했던 이유는 칸딘스키였던 것 같은데(그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화가이다-특히 가브리엘 뮌터와의 시기의 작품들), 그 한 장의 에곤 실레는 실체로 다가왔던 절망 그 자체였던 것 같다. 지금 다시 보는 그의 그림은 이제 그때만큼의 느낌을 주지 않는다. 내 안의 무엇이 사라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의 그림이 이제는 절망으로 수렴되어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그러한 절망을 직접 대면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든 것은 아닌가 한다.

-- Sonimage 2004-5-1 11:31 pm

4 # 오찬익[ | ]

감상에 앞서...

최근 파스텔 뮤직에서 라이센스로 내놓은 이 작품은 기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업계에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본 라이센스를 기획한 사람은 레이첼스라는 밴드의 인지도 보다는 본작에 붙여있는 에곤 쉴레란 레테르에 대한 관심때문인 것 같다고 분석하더라. 어떻든, 수년 전부터 계획되었다고 하는 본 라이센스는 에곤 쉴레의 작품이 인쇄된 카드를 함께 담는 등 기획자의 참신한 아이디어들이 돋보인다. 더군다나 우리나라 라이센스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인쇄상태의 부실함은 훌륭한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완전히 극복되었다. 그리고 잘 알려진 평론가들에 의한 작품 해설을 담은 북릿에도 정성이 깃들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외국에서 발매되었던 원래의 패키지도 매우 훌륭한 작품이지만 참신함과 정성이 담긴 본 라이센스가 여러가지 면에서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음반판매도 결국 돈 벌기위한 사업이란 관점에서 보자면 그다지 많이 팔리지도 않을 아이템에 정성을 쏟는 행위는 어리석은 짓이겠지만 작품을 사서 듣는 입장에선 이런 기획자들의 노력이 얼마나 고맙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이런 기쁨을 앞으로도 더 자주 느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은 큰 욕심일까? ^^;

포스트 록?

레이첼스의 음악을 이야기할 때 포스트 록이란 용어가 자주 등장하곤 한다. 그렇다면 포스트 록이란 무엇일까? 기존 록의 해체와 그 대안으로 등장한 음악인가? Tortoise로 대표되는 포스트 록 씬에 속한다고 믿어지는 여러 밴드들의 음악을 들어보면 외형적인 공통점이 뚜렷하지 않지만 하나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아마도 기존의 주류 록 음악의 형식에서 벗어나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포스트 록과 록의 비약적인 상승을 가져왔던 프로그레시브 록의 비교는 흥미로운 공통점과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음을 알려준다.
프로그레시브 록이 60년대 메인스트림 록에 대한 반발과 그 대안으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서 록의 기원을 살펴보면 록은 재즈와 블루스로부터 (어느 평론가의 적절한 표현을 빌어...) '육체성'을 물려받아 더 직접적이고 과격한 방법으로 표현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제시되었던 것은 '일렉트릭'과 '단순함'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프로그레시브 록이 등장하면서 방법상의 환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록의 내부에서 변증법적 발전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던 셈이다. 록이 태어날 때 부터 '육체성'을 지닐수 밖에 없었지만 그 '육체성'만으론 록이 발전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몇몇 진보적인 음악가들에겐 큰 불만이었던 것 같다. 60년대를 행복하게 해 주었던 비틀즈의 록이 그 생명을 다하갈 무렵이던 69년에 발표되었던 킹크림슨의 첫 작품은 달콤함에 대한 강력한 항의를 담아 내었다.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재즈로 뒤틀려진 록과 고전음악 에서 빌어온 듯한 장황한 구축미였던 것이다.
이런 관점은 포스트 록에서도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다양한 스펙트럼에 있어서도 많은 부분 프로그레시브 록과 일대일 대응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레이첼스의 음악은 포스트 록씬에도 매우 극단적이며 낯설지 모르겠지만 완전히 새로운 형식이라고는 볼 수 없다. 이미 70년대 RIO(Rock In Oposition)에 속했던 Julverne, ZNR, Art Zoyd등이 비슷한 양식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분명 차이점이 존재한다. 이것은 조금 뒤에 설명하기로 하겠다.
그렇다면 포스트 록은 새로운 시대의 프로그레시브 록이냐?라고 묻는다면 그래!라고 말하기엔 뭔가 찜찜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여기서 근본적인 차이점과 오해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주관적인 생각이므로 다른 관점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함께 이야기 해두자. 일단, 포스트 록은 더욱 진보된 테크놀로지의 힘을 빌긴 했지만 그다지 진보적 음악이 아닌 과거의 방법론을 재탕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그리고 근본적인 차이점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믿는다. 70년대의 프로그레시브 록은 형식도 새로웠지만 기존의 록과의 근본 차이점은 이데올로기적이라는 점에서 일 것이다. 이 당시, 프로그레시브 록이 일반 대중의 주목을 받고 인기 챠트 상위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낯섬 혹은 신기함 때문만은 아니고 그 음악의 내용에 선동적인 이데올로기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에 담긴 철학이 과장되어있거나 어설픈 점이 많았지만 어떻든 프로그레시브 록을 지탱해주는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하다. 많은 이들은 포스트 록이 기존 록의 해체를 목표로 한다고 믿는 것 같다. 과연 그럴까? 물론 포스트 모더니즘에서처럼 포스트란 접두사가 쓰이고 있다면 그렇고 또 그래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기엔 포스트 록 밴드들이 내세우는 방법론이 너무 구태의연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왠일일까. '얼터너티브 록'과 같은 평론가들의 또 다른 발명품이 아닐까.

70년대의 프로그레시브 록이 많은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었다면 지금의 포스트 록은 우리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가. 지금의 포스트 록은 비주류의 극단에 서 있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메인스트림 록의 반대편에 서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동시에 대중을 소외시키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포스트 록이 메인스트림 록의 대안의 성격을 띠고 있다기 보다는 '취미'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보았다. 취미는 매우 주관적인 행위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향유할 수 있는 쾌락을 담아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레이첼스의 '에곤 쉴레'를 위한 음악도 그런 관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은 애초 에곤 쉴레의 작품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무용을 위해 작곡된 일종의 배경음악이라고 한다. 필자가 미술에 무지하기는 하지만 어떻든 에곤 쉴레가 미술사에 자주 언급되었던 것은 아니었던 만큼, 그의 위치는 20세기 초반 '불꽃'처럼 살다가 요절한, 데카당트한 예술관을 자신의 작품들에서 독특한 화풍으로 표현했던 언더그라운드적 기질의 예술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이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것은 아니기에 여전히 소수의(?) 매니어들만이 향유하는 대상이었던 것이 아닐까. 따라서 레이첼스의 본 작품은 어떤 대안으로서 제시된 혁신적인 작품이라기 보다는 앨범명 처럼 에곤 쉴레의 작품을 표현하기 위한 음악가 자신의 '취미'의 결과물이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 더군다나 본작은 예전 RIO 씬에서 보여주었던 독창적인 연주를 들려주고 있는 것도 아니다. 앞부분에 비교되었던 Julverne이나 ZNR, Art Zoyd의 음악이 지니고 있는 해학적인 뉘앙스라든가 무미건조한 느낌에 비해 본작에서의 레이첼스의 연주는 따뜻하고 서정적인 느낌을 준다. 레이첼스의 멤버들이 포스트 록씬과 관계를 맺고 있어서 그렇지 그런 선입견 없이 본다면 본작은 양질의 실내악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레이첼스의 음악이 지닌 가치를 깎아내리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많은 부분 오해가 있음을 혹은 무비판적인 언어의 사용을 경계하고 싶기 때문이다.

필자가 몇년전 본작을 첨 들었을 때, '이게 왠 록...이냐?'라고 느꼈을 만큼, 적어도 록이라는 범주에서 볼 때 매우 당혹스러움을 안겨주는 작품임에 분명하다. 에곤 쉴레라는 레테르, 그리고 록 애호가들에겐 당혹스러움을 그리고 일반인에겐 안락함을 제공하기 때문에 본작이 가치가 있다고 믿고 싶지 않다. 그렇긴 하지만 록 매니어들에 한정해서 이야기하자면 첫감상에서 지루함을 느끼고 쳐박아두거나 아니면 특별한 용도(?)로만 이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꺼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렇다면 포스트 록 작품으로서 본작의 가치는 정말 음악가들의 취미의 결과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어떠한 작품이 객관적인(?) 의미를 지니려면 작품과 감상자의 소통이 반드시 필요하며 감상자의 입장에서 그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본작의 내용이 에곤 쉴레의 작품이 지니는 데카당트한 이미지를 훌륭하게 구현하고 있느냐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어떻든 본작이 에곤 쉴레를 위한 음악으로 이름지워진 만큼 에곤 쉴레의 작품들과의 연관하여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개인적인 감상...

필자도 첨에는 본작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편에 가까왔다. 왜냐하면 아무런 정보없이 주어진 첫 만남에서 밋밋한 느낌에 그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몇가지 정보들, 특히 에곤 쉴레의 작품들이 프린팅된 카드가 담긴 본 라이센스를 만난 후 몇번의 감상을 통해 본작에 담긴 레이첼스의 연주가 아름답게 들리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론 보통 에곤 쉴레의 작품을 이야기 할 때 많이 언급되는 퇴폐적인 이미지는 레이첼스의 연주에서 느껴지지는 않더라.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 레이첼스는 작품의 표면에 드러난 이미지들 보다는 그 안에 감추어진 것들(무엇일까?)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5 # 여러 촌평[ | ]

구윤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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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Rachel's - Music For Egon Shiele

"Poetic, Visual and Bittersweet Music"

“클래식과 락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고 있는 21세기 최고의 챔버 클래식컬 앙상블 '레이첼스'의 걸작 앨범!”

“The Musical Voice of Egon Schiele's Art”

“피아노, 첼로, 비올라 그리고 비탄과 우수의 오케스트라와 만나는 에곤 실레의 숨막히는 불안과 고통의 에로티시즘.”

“레이첼스의 음악을 두고 우리는, 음의 선형적 진행을 내파하고 소리에 공간감, 또는 색채를 부여하고 싶어하는 욕망이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특히 이들의 Music for Egon Schiele는 그들의 그런 시도가 가장 아름답게 세공된 결과물이다. 소리의 팔레트에서 물감을 짜내 황홀하게 채색해 나가는 현과 피아노의 수줍은 동거는, 실레 그림 속의 몸뚱이들보다 에로틱하게 느껴진다.” ? 박찬욱 (영화감독)

“<에곤 실레를 위한 음악>은 데카당트한 바이마르 시대의 그만큼 퇴폐적이고 또한 관능적인 에곤 실레를 위해 그들은 사운드로 조직된 직물을 만들어내고 있고, 그것은 아름다운 풍경을 듣는 이에게 촉발한다. 레이첼스의 다른 앨범들에서 한결같이 반복되듯이 이들에게 있어 음악은 풍경이다…… 피아노와 바이올린과 첼로, 비올라는 에곤 실레를 향한 사운드의 이미지, 그를 다시 환영 속에서 불러내는 사운드스케이프를 창조한다. 따라서 이 앨범을 듣기 위해서는 반드시 앨범의 재킷이 필요하다. 그것은 영화의 자막처럼 각 곡들이 불러내는 환영의 촉매가 될 것이다. 이 앨범은 아름답고 소중하게 마련된 그림과 글을 담고 있다.” ? 서동진 (문화평론가)

“무용극 ‘에곤 실레’를 위해 만들어진 이 앨범은 록음악을 기반으로 실내악적인 요소를 결합한 레이첼스의 대표작으로 요절한 천재화가의 삶에 대하여 임박한 죽음의 냄새와 관능적 쾌락을 비극적이고도 염세적인 사운드로 표현한 걸작!” - 조영욱 (영화음악가)

“이 열두개의 단편들은 1995년 시카고의 일리노이 대학 내 아이티너런트 시어터 길드에서 슈테판 마주레크가 ‘에곤 실레’라는 제목으로 공연한 무용 공연을 위한 사운드트랙이다. 베르크의 탐미적이고 열정에 솟구치는 음악과는 달리 레이첼스가 연주하는 곡들은 미니멀리즘을 연상케 하듯 반복적이고 큰 변화 없다. 곡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연민과 동정이지만 그렇다고 감정을 고스란히 이입하지는 않는다. 뭔가 동떨어진 채 훔쳐보고, 머뭇거리며, 실레의 세계에 동참하기를 꺼리는 듯한 느낌이다. 디아길레프가 라벨의 <라 발스 La Valse>를 듣고 이 곡은 왈츠가 아니라 왈츠에 대한 초상이다”라고 말했듯이 레이첼의 음악은 실레와 혼연일체 되었던 베르크와는 달리 그의 회화를 아름답게 관조하고 있다.” ? 정준호 (클래식 음악평론가, 전 ‘그라마폰’ 편집장)

“레이첼스는 소리를 강조하기보다는 침묵을 강조한다. 그렇게 해서 그 어떤 색채보다도 선연한 공허와 여백이 묵직한 톤으로 번진다. 눈을 감아야 더 잘 보이는 어떤 그림들이 그 순간 떠오른다. 현실보다 더 명징한 꿈의 언저리, 소리가 농밀한 반점처럼 번지면서 비로소 나타나는 유령들의 육체. 에곤 실레의 육체를 꿰뚫고 탄생한 그것들은 다른 세계의 초입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곳엔 뒤틀리고 깡마른 육체들이 느릿느릿 춤추고 있다. 그건 다름 아닌 레이첼스를 듣고 있는 나의 그림자가 아닐까? 우리는 레이첼스를 통해 또 다른 에곤 실레가 된다.” ? 강정 (시인)

“히스테릭한 윤곽선 속에 채워진 여동생 게르티, 모델이자 연인이었던 발리, 아내 에디트, 그리고 수많은 자화상들 속의 실레 자신. 이 모두를 빠뜨리지 않고 담아가는 Rachel's의 음반 [Music For Egon Schiele]는 원래 발레극 용 음악으로 만들어진 것이란 사실이 무색할 만큼 완전히 독자적인 방식으로 요절한 천재 화가 에곤 실레의 짧고도 기이한 인생을 하나의 추보식 동선 안에 성공적으로 압축해내고 있다. 이것은 실레의 작품과 인생을 한번에 변주하는, 영화 없는 한 편의 사운드트랙이다.” ? 성문영 (음악평론가)

외국 프레스 평 “이 놀라운 앨범이, 헨리 퍼셀과 필립 글래스 같은 완전히 다른 영향세력을 갖고 있으면서 인디록의 DIY 정신에 고무된 젊은 작곡가와 뮤지션들이 만들어내는 어떤 새로운 운동, 새로운 하나의 씬의 출발점을 가리키고 있는 거라면 근사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것을 거라지 클래식이라 칭해놓고 앞으로 이 음반과 같은 아름다움을 지닌 더욱 더 많은 앨범들이 나올 때마다 기뻐하게 될 지 모른다. 훌륭하게 쓰여지고, 연주되고, 녹음되고, 또 포장된 이 앨범은, 보기 드물고 잊히지 않는 우아함을 전한다. 진정한 보물.” - [Billboard 빌보드]

진귀한 기쁨. 기타 사운드나 비트가 없는 무언가를 듣고 있다는 의식적인 생각 대신 당신은 너무도 즉각적으로 당신만의 상상의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 나머지 1분도 안 돼 이 음악이 거는 주문에 걸려들고 말 것이다. 추천. - [Melody Maker 멜로디 메이커]

억제와 감정적 힘 사이의 균형에 놀라게 된다. 첼로와 비올라 멜로디가 주선율을 연주하기에 피아노가 반복주를 담당한다. 클래식이 기반이 되어 있긴 하지만, 그것이 현대적 영향의 양념이 살짝 들어가 특징적이고 안정적인 이 사운드에 대한 변명이 되지는 않는다.
- [NME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

크로노스 쿼텟, 헨릭 고레츠키, 아르보 패르트, 그리고 어두운 면을 지닌 그 외 20세기 현대 음악 작곡가들의 팬이라면 아마도 이 음악을 좋아할 것이다. 음악이 있고 예술 사운드가 있는 앨범이다. 레이첼스는 청자들에게 소중히 간직할 선물을 주었다. 강력 추천. - [Chart 차트]

이 음반은 언제나 고요하고 정돈된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데 실패함이 없다. - [Option 옵션]

당신의 관심을 끌고도 남는 진정으로 찬란한 작품. - [Alternative Press 얼터너티브 프레스]

잊혀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곡들이라 나는 굉장히 자주 듣는다. 클래식 순수주의자들 중에선 혹시 이 음악이 너무 단순하다고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점에 있어선 순수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 [Barrow Advertiser 배로우 애드버타이저]

놀랄 만큼 야심찬 연주를 실은 이 앨범은 느와르 영화의 사운드트랙, 실내악의 고전주의, 샘플링 사운드와 재즈 등을 연상시키며 수많은 분위기를 불러일으킨다. 이 앨범은 인디 록 인구 내에서 흔치 않은 창조성을 보인다. 패키지도 흠 잡을 데 없는 이 앨범은 올해의 베스트 중의 하나이다. 당신도 마땅히 들어보아야 할 것이다. - 제이슨 페티그루, [Alternative Press 얼터너티브 프레스]

순전히 멋진 재킷 하나 때문에 사전 지식 전무한 음반을 사는 일은 거의 없는 나지만, 이 앨범은 그 중 하나였다. 그토록 멋진 재킷을 만들 수 있는 이들이라면 음악적으로도 실망시키는 일은 거의 없다고 믿는 나에게, 이번에도 역시, 이들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곡들의 아름다움이 가진 인내의 미덕은 숨이 막히기 일보 직전이다(그리고 나는 평소 이런 닭살 표현을 즐기는 평론가가 아니다). 어떤 장르로든 어떤 분야에서든 훌륭한 앨범으로, 펑크 록 타입에 의해 만들어진 재즈 기반의 고딕 실내악이라는 사실은 신선하다. 정말로 오랜만에 보고 또 듣게 된 진정 훌륭한 작품 중 하나. - 카티 폭스, [Cake 케이크]

최고치의 무드를 만드는 음악. 정신 차리고 보니 나는 온통 가슴앓이, 상실, 그리고 감칠맛 나는 저속함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 - [Spark 스파크]

(겉으로는) 종이에 쓰인 짜가 악몽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실제로는 사랑스럽고 가식 없는 앨범이다.
- 존 멀비, [NME]

이 앨범은 가사가 없어도 걸작 서정 앨범이 되기 충분하다. 레이첼스는 당신이 기억하지도 못할 곡조를 가져와 당신이 절대로 잊지 못할 노래로 엮어낸다. - [Melody Maker 멜로디 메이커]

스타일리스틱한 극단성 쪽에 판돈을 올리면서 쿼터스틱 레이블은 우리 앞에 야심적인 네오 클래식 프로젝트를 내놓았다. 이 앨범은수공으로 만들어진 CD 재킷 및 미술과 시를 혼합하고 석판화를 실은 부클릿을 통해 한점 거리낌없이 ‘예술 작품’이길 주장함으로써 그 속에 담긴 준수한 음악 작곡의 내용물을 넘어서는데, 이와 같은 촉각적 요소는 음반에 의해 환기되는 예감의 무드를 상승시키는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그리고 그 결과는 미국 음악 문화 세계에서의 이정표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 음반에 클래식 명칭을 덧대는 것은 청교도적 장르들 간의 장벽을 허무는 시도를 향해 또 한 걸음 나아간 것일 것이다. - [Exclaim 익스클레임]

비밀스럽고 신비스러운 이 작품은 마치 폴터가이스트 유령이 출몰하는 아름다운 옛 건물처럼 매력적으로 불명료하다. - 콜린 베리, [Wired 와이어드] 미혹하면서도 만족을 주는 음악. 이 음반은 외관상으로도 그리고 그 안에 든 음악이 내게 말하는 내용으로도 나를 사로잡으며, 바로 그게 내가 이 음반을 턴테이블에 자주 올려놓는 이유이다 - 그것도 한밤중에. - [The Tracking Angle 더 트래킹 앵글]

토터즈(Tortoise)가 재즈에서 했던 것을 레이첼스는 클래식에서 한다. 그들은 다른 장르에서 요소들을 가져와 그것을 록과 섞어 오리지널하고 특별한 무언가를 창조해낸다. 레이첼스에는 그룹 로단(Rodan) 출신 멤버가 있는데, 이것은 마치 거의 4AD 레이블에서 찾을 수 있음직한 내용물을 갖고 와 클리셰를 배제하고 실제 그대로 정직하게 녹음하는 로단 스타일의 구성으로 다시 만들어 낸 듯한 음악이다. 이 연주곡들은 미묘하고 감동적이고 참신하지만 결코 머리를 굴려서 그렇게 한 것 같지는 않으며,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진짜 재능이다. 그들은 절대 허식적이지 않으며 대신 그들은 진심이다 - 진심으로 아름답다. - 롭 시라키 [Milk 밀크]

(이 앨범에 담긴) 멤버들의 4년간의 노력은 그 아름다움과 단순미로 감정의 원천을 두드린다. - [Chicago Tribune 시카고 트리뷴]

레이첼스는 놀라운 CD를 만들었다. 그 어떤 것보다도 레이첼스는, 록 최고의 제멋대로 스타일을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순종 록이 제한하는 구조와 연주를 넘어서는 자유를 실험할 수 있는 뮤지션들의 연속체이다. - 루시 케이지, [The Lizard 더 리자드]

6 같이 보기[ | ]

7 참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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