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택시기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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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편집]

좋은 사람들과 늦게까지 술을 먹고 들어온 길이지만 뭐랄까 적어두고 싶은 것이 있어 두시가 넘은 이 시간에 컴퓨터를 켰다.

매봉역 근처에서 2차를 끝내고 서로 헤어졌다. 본부장님이 택시라도 타라고 택시비를 주셨지만 소심하게 괜찮습니다 하며 택시를 잡아탔는데 나는 고민이 되었다. 택시비 꽤 나오는데 심야 좌석버스라도 탈까 하고. 한 20초 정도 행선지를 말하지 않으니 기사님은 갈 곳을 잃으셨군요~ 하시면서 슬슬 나가신다. 묘한 여유가 느껴져서 말했다. 낙원상가 지나서 효자동으로 가주세요.

별 말없이 강남역 사거리에 왔다.

혹시 저 건물에 있는 '아이러브돼지엄마'라는 상호가 뭔지 아세요?
아뇨 저는 처음 보는데요?
여기 지나갈 때마다 손님들에게 물어보는데 아무도 모르네요. 돼지엄마라면 우리 나이 때에는 뚱뚱한 아줌마나 부르는 말인데. 처녀 총각들 엮어주는 곳인가 아니면 암달러 바꿔주는 곳인가? 요새 강남역에 암달러 바꾸는 곳이 있을리도 없구요.
연구 많이 하셨네요.
(알고보니 다이어트 클리닉이었다.)

다시 신논현역 사거리까지 왔다.

저 벌집같은 건물은 겉에만 저렇고 안쪽은 일반 건물이랑 똑같네요.
아 저 건물은 기둥이 없답니다. 특수하게 지은 건물이래요. 저렇게 지은 건물은 하나 뿐이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제가 택시기사 노릇을 한 7-8년 했는데 생각보다 서울에도 볼만한 곳이 많아요. 다들 삭막한 곳이라고 합니다만, 역시 사람사는 곳이에요.
아무래도 여기저기 다니시니 그러시겠어요.
예를들어 새벽에 마포대교에서 여의도쪽으로 오다보면 관악산이 의외로 잘 보입니다. 양 옆으로 선명한 능선까지 잘 보이는데 아주 멋있어요.
비가 많이 올 때 잠수교를 건너가면 바로 옆에 수평선이 있어서 기분이 좋구요.
밤에 손님이 없어 가끔 남산을 둘러가기도 하는데 거기에는 외국영화처럼 몸파는 아가씨들이 줄을 서있기도 해요.
하하 뭐 말 나온 김에 터널 말고 그리로 지나가주시죠.
그럴까요.

이렇게 해서 한남대교를 건너 굳이 좋은 터널을 놓아두고 남산을 돌아갔다.

저기도, 여기도, 많지는 않지만 아가씨들이 많이 있네요. 오늘은 평일이니까 없고, 금요일이나 주말에는 훨씬 더 많아요.
호오, 한국에도 이런 풍경이 있다니 낯서네요.
이태원에는 빨주노초파남보 외국아가씨들이 많고, 여기나 하야트 호텔 근처에는 한국 아가씨들이 많이 서있어요. 예전에는 아줌마들이 화장을 진하게 하고 있었지만, 점점 나이가 어려지네요. 종종 하리수같은 애들도 있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하하, 뭐 저는 걱정 마세요.
실제로 홍석천씨를 태워본 적도 있지만 생각보다 수술한 사람들이 많아요.
택시기사를 처음 시작한지 1주일정도 되었나, 이태원에서 어떤 늘씬한 아가씨를 태웠는데 이 친구가 갑자기 저음으로 '신사동 가주세요.' 이러니까 갑자기 머리 뒤가 쭈뼛하고 서더라고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여자 목소리를 자연스럽게 기대하고 있었건만 남자 목소리가 나오니까 당황한거죠.
아무래도 그렇지요.
어떤 아가씨랑은 얘기하다가 미혼이라길래 왜 결혼 안했냐고, 내가 결혼만 안했어도 벌써 채갔을 거라고 하니 자기는 하리수같은 수술을 했다고 했어요. 이상한 것은 그 말을 들었을 때 뭐라고 불러야 하나 하는 호칭이 가장 먼저 난감하더라는 거에요. 죽어도 아가씨라는 말은 못하겠고. 어떻게 하나 하다가 손님이라는 말이 생각나데요. 그래서 그렇게 부르면서 얘기를 계속 했어요.
그 손님은 어쩌다보니 자기가 수술한 과정도 얘기해주게 되었어요. 거기를 자르고 나서도 거 뭐냐 껍데기까지는 자르지 않는대요. 그리고 그걸 안쪽으로 잘 넣는대요. 여자 거기를 만들어도 신경이 있어야 하니까요.
이렇게 저렇게 얘기하다보니 그 손님은 자기가 장거리를 많이 뛰니까 가끔 택시를 부르겠다며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어요. 저는 전화번호를 적어주면서 일부러 하나를 틀리게 적었어요. 그런데 그 손님은 자리에서 바로 전화를 한번 걸어보는거에요.
하하하, 식겁하셨겠는데요.
예, 그래서 뭐 아이구 실수했네 하면서 번호를 잘 적어주었고, 그 손님은 가끔 멀리서도 저를 불러주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안갔어요. 그렇잖아요, 저는 그런 사람들을 머리로 이해는 해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해요.
그 아가씨는 조금 섭섭했겠네요.
그런데 어느날 이태원 근처에서 그 손님을 또 태운거에요. 손님 말씀대로 그 손님은 섭섭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잠시 얘기를 했습니다. 당신과 나는 택시기사와 손님으로 만나서 좋았다. 그리고 당신은 나를 좋은 기사로 나는 당신을 좋은 손님으로 둘 수도 있다. 하지만 자주 만나다보면 서로 친한 관계가 될텐데 나는 당신과 좋은 관계가 될 수가 없다. 내 친구들에게 당신 얘기를 하면 그 친구들은 이상한 호기심만 드러낼 것이다. 그렇잖아요. 그놈들은 아마 그 손님 얘기를 하면 듣자마자, 야 따먹었냐? 어떻게 생겼냐? 이런 얘기를 한다구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러니 어떻게 되든 내가 당신과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게 되면 나도 모르게 나는 당신을 이용하게 되거나 당신에게 상처를 줄 수 밖에 없을거라고. 나는 그 벽을 넘을 자신이 없어서 당신에게 가지 않은 것이라고. 그랬더니 그 손님은 아무 말 없이 택시에서 내렸어요.

이 얘기를 할 때 즈음에는 이미 집 앞에 도착해있었다. 하지만 기사님이 열심히 말하고 계셨고 나 또한 뒤가 궁금해서 계산한 뒤에도 마저 듣고 있었다. 들으면서 이 기사분은 어린왕자를 아마 열번은 읽은 사람 같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는 소심한 늙은 왕자처럼 주변의 여우들과 관계를 맺는데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소심함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라,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도시속에 사는 현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근처의 다른 손님들이 이 택시를 탈 수 있나 하고 창문을 들여다 본다.

아, 손님이 타려나 봅니다.
기사님은 제가 본 가장 낭만적인 택시기사였어요. 조심히 운전하세요.
안녕히가세요~

-- 거북이 2009-8-28 3:00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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