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사나이의 크리스마스

1 개요[ | ]

『羊男のクリスマス』 (ひつじおとこのクリスマス)
양사나이의 크리스마스, 양남의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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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지음 (이지연 옮김/1997.12.25.)

양(羊)사나이가 크리스마스를 위한 음악을 작곡해달라고 부탁 받은 것은 아직 한여름이던 때의 일이었다. 양사나이와 의뢰하러 온 사나이는 둘 다 여름용 양 의상을 입고 흠뻑 젖은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한 여름에 양사나이로 지내기란 상당히 괴로운 일이다. 특히 에어컨도 살 수 없는 가난한 양사나이로서는 말이다.
선풍기는 빙글빙글 돌아가고 두 사람의 양 귀는 펄럭펄럭 나부끼고 있었다.
"저희 양사나이 협회에서는" 하고 상대편 사나이는 가슴의 여밈을 약간 풀어헤쳐 선풍기 바람을 안으로 넣으며 말했다. "해마다 음악적 재능이 있는 양사나이를 한 사람 선발하여 성양상인(聖羊上人)님을 추모하기 위한 음악을 작곡하도록 의뢰하고 그것을 크리스마스 날에 연주하도록 되어있습니다만 올해는 귀하께서 선정되셨습니다. 축하합니다."
"어이구 저런." 하고 양사나이는 말했다.
"특히 올해는 상인(上人)님께서 돌아가신지 2천5백주년이 되는 해이므로 그에 어울리는 훌륭한 양사나이 음악을 작곡해주셨으면 하는 바입니다." 라고 사나이가 말했다.
"그렇겠군요." 양사나이는 귀를 긁으면서 말했다. 크리스마스까지는 아직 4개월하고도 반이나 남았다. 그만한 기간이라면 나도 훌륭한 양사나이 음악을 작곡할 수 있을 거라고 양사나이는 생각했다.
"좋습니다.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양사나이는 당당하게 말했다. "확실하게 멋진 음악을 작곡해 보여드릴테니."

그러나 9월이 지나고 10월이 지나고 11월이 다 끝나가도록 양사나이는 양사나이 협회에서 부탁받은 음악 작곡에 좀처럼 착수할 수가 없었다.
양사나이는 낮에는 근처의 도넛 가게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작곡할 수 있는 시간이 아주 조금밖에 없었다. 그런데 양사나이가 고물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기만 하면 반드시 1층에 사는 집주인 아줌마가 찾아와서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아유, 시끄러워. 그만좀 해요. TV소리가 안들리잖아."
"죄송하지만 크리스마스까지만 하면 되는데 며칠만 참아주시면 안될까요?" 양사나이는 우물쭈물 하며 말했다.
"웃기지 말아욧." 집주인 아줌마는 소리를 질렀다. "불만 있으면 나가면 될 것 아냐. 당신같은 기묘한 옷차림을 한 남자를 우리집에 살게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으니까."

양사나이는 우울한 기분으로 달력을 바라보았다. 크리스마스까지 앞으로 4일 남았는데 약속한 음악은 한 소절도 쓰지 못했다. 피아노를 치지 못한 탓이다.
양사나이가 침울한 표정으로 점심시간에 공원에서 도넛을 먹고 있으려니, 그곳을 양박사가 지나가고 있었다.
"어쩐 일인가, 양사나이군?" 하고 양박사는 물었다. "상당히 기운이 없지 않은가? 크리스마스도 가까워 오는데 그러면 쓰나."
"제가 기운이 없는 건 그 크리스마스때문이랍니다." 하고 양사나이는 말하고 양박사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흠... 흠..." 하고 양박사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거라면 내가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정말이세요?" 양사나이는 의심스러운 듯이 말했다. 왜냐하면 양박사는 양에 대해서만 연구한다는 약간 엉뚱한 괴짜 학자인데,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머리가 이상하다는 소문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말이고 말고." 양박사는 말했다. "저녁 6시에 우리 집에 오게. 좋은 방법을 가르쳐 줄테니까. 그런데 그 시나몬 도넛은 내가 먹어도 되겠나?"
그리고 양사나이가 "그러세요"라든지 "자, 드세요."하고 말하기도 전에 도넛을 집어서 우물우물 먹어치웠다.

그날 저녁 양사나이는 시나몬 도넛 여섯 개를 선물로 들고 양박사의 집을 찾아갔다. 양박사 집은 아주 오래된 벽돌집이었는데 정원수는 전부 양 모양으로 다듬어져 있었다. 초인종도 현관 기둥도 바닥에 깔린 돌도, 처음부터 끝까지가 모두 양이었다. 우와, 대단하군, 하고 양사나이는 생각했다.

양박사는 여섯 개의 도넛 중에서 네 개까지를 숨돌릴 틈도 없이 우적우적 먹고, 남은 두 개를 소중한 듯 찬장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손가락에 침을 발라 테이블 위에 흩어져있는 부스러기를 찍어모아 핥아먹었다.
'이 양반 정말로 도넛을 좋아하는구나'하고 양사나이는 감탄했다.
손가락을 말끔히 핥고나서 양박사는 책장에서 한권의 두툼한 책을 꺼냈다. 책표지에는 "양사나이의 역사"라고 적혀있었다.
"자, 양사나이군" 하고 박사는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에는 양사나이에 관한 것이 무엇이든지 적혀있다네. 자네가 왜 양사나이 음악을 작곡하지 못하는지 그 이유도 말이지."
"그런데 박사님, 그 이유는 이미 알고있어요. 그건 하숙집 아주머니가 피아노를 못 치게 하기 때문이에요." 양사나이는 말했다. "만약 피아노만 치게 해준다면..."
"아니, 아니" 양박사는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그게 아니야. 그 피아노를 칠 수 있게 된다고 해서 작곡을 할 수 있게 되는 게 아니라구. 거기에는 더욱 더 깊은 이유가 있지."
"깊은 이유라뇨?" 양사나이가 물었다. "주문(呪文)에 걸린 거야." 양박사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주문에 걸렸다구요?"

"그렇다네." 하고 양박사는 말하며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문에 걸렸기 때문에 자네는 피아노도 못 치고 작곡도 못하는 거야."
"어휴." 양사나이는 한숨을 쉬었다. "어째서 주문에 걸리고 하는 거죠? 아무 나쁜 짓도 한 적이 없는데."
양박사는 책장을 펄럭펄럭 넘겼다.
"자네 혹시 6월 15일날 달을 쳐다보지 않았었나?"
"아뇨, 벌써 5년동안이나 달 같은 건 쳐다본 적도 없는걸요."
"그렇다면 작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구멍 뚫린 것을 먹지 않았었는가?"

"도넛이라면 매일 점심으로 먹고 있어요. 크리스마스 이브에 먹은 게 어떤 도넛인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음..., 어쨌든 도넛을 먹은 건 확실하네요."
"구멍 뚫린 도넛이었나?"
"아, 그야 그렇죠. 도넛이라는 게 대부분 구멍이 뚫려 있으니까요."
"바로 그거야." 박사는 말하며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문에 자네가 주문에 걸리고 말았군. 자네도 양사나이 나부랭이라면 12월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구멍 뚫린 음식을 먹으면 안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을텐데."
"그런 말은 들어본 적도 없는데요." 하고 양사나이는 깜짝 놀라 말했다. "그건 도대체 뭐 때문에 그렇죠?"
"성양제일(聖羊際日)을 모른다니 이거 놀라운 일이구만." 양박사는 더욱 놀라서 말했다. "요즘 젊은것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니까... 자네는 양사나이가 될 때 양사나이 학교에 다니며 여러 가지를 배우지 않았는가?"
"네, 뭐.., 그렇긴 하죠. 하지만 저는 학교 공부는 별로 잘하는 편이 아니라서, 그저..." 하고 양사나이는 긁적긁적 뒤통수를 긁었다.

"거봐, 자네가 그렇게 부주의하니까 이런 곤경에 빠지게 되는거라구. 못말릴 친구로구만. 하지만 도넛도 받고 했으니 여기서 내가 가르쳐주지." 하고 양박사는 말했다. "자, 12월 24일은 크리스마스 이브임과 동시에 성양제일이기도 하지. 즉 이날은 성양상인이 밤중에 길을 걸으시다가 구멍에 빠져서 돌아가셨다는 신성한 날이라네. 그러니까 그 날에 구멍 뚫린 음식을 먹으면 안된다는 것은 옛날옛적부터 딱 정해져 있는 일이라구. 마카로니라든지, 오징어순대라든지, 양파링이라든지 그런 것들 말야."
"잠깐 질문이 있는데요, 어째서 성양상인님은 밤중에 길을 걸으셨고 왜 길에 구멍 같은 게 뚫려 있었나요?"
"그런 건 난 몰라. 그게 벌써 2천5백년이나 전의 일 아닌가. 하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정해져 있다네. 그게 규칙이라는 거야. 알고 있었든 모르고 있었든 규칙을 어기면 주문에 걸리는 거라구. 자네가 양사나이 음악을 작곡하지 못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네. 음."

"골치 아프군." 양사나이는 아주 난처해하며 말했다. "그 주문을 푸는 방법이 없을까요?"
"흐음." 양박사는 말했다. "주문을 푸는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야. 그러나 그건 간단하지가 않지. 그래도 괜찮겠나?"
"상관없어요. 어떤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가르쳐 주세요."
"그 방법이란 자네 자신도 구멍에 빠뜨리는거야."
"구멍이요?" 양사나이가 말했다. "구멍에 빠지다니 어떤 구멍 말씀이세요? 구멍이라면 뭐든지 괜찮은가요?"
"엉뚱한 소리 하지 말게. 아무 구멍이라도 좋다는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주문을 풀기 위한 구멍은 크기도 깊이도 딱 정해져 있다네. 잠깐 기다려봐. 지금 찾아보고 있으니까."
양박사는 "성양상인전"이라는 낡아빠진 책을 꺼내어 또다시 펄럭펄럭 책장을 넘겼다.
"가만있자, 음, 여기있다. 성양상인은 지름 2미터, 깊이 203미터의 구멍에 떨어져 돌아가셨다고 되어있군. 그러니 그와 똑같은 구멍에 떨어지면 된다는 거지."
"그런데요, 깊이 203미터의 구멍이라니 도저히 저 혼자서는 파지도 못할 것이고, 무엇보다 그런 구멍에 빠져 버리면 주문이 풀리기도 전에 죽어 버리지 않을까요?"
"잠깐 잠깐, 아직 남아있어. <주문을 풀고싶다고 생각하는 자는 구멍의 깊이를 100분의 1로 생략해도 상관없다> 즉 2미터 3센티라도 괜찮다는 거로군."
"아아 다행이다. 그렇다면 괜찮아요. 팔 수 있어요." 하고 양사나이는 안도하며 말했다.
양사나이는 양박사에게서 책을 빌려 집에 돌아왔다. 그 책에 따르면 주문을 풀기 위한 구멍에는 실로 많은 규칙이 있어서 양사나이는 그것을 하나하나 노트에 적어 보았다.
⑴ 구멍은 자루가 물푸레나무로 된 삽으로 파야 한다. (성양상인이 물푸레나무 지팡이를 짚고 다니셨기 때문이다.)
⑵ 구멍에 빠지는 것은 크리스마스 이브날 오전 1시 16분이어야 한다. (성양상인이 그 시각에 구멍에 빠졌으므로)
⑶ 구멍에 빠질 때는 구멍이 뚫려있지 않은 음식을 도시락으로 가져가야 한다.
⑴과 ⑵는 그렇다 쳐도, 깊이 2미터의 구멍에 빠지는데 왜 도시락이 필요한지 양사나이는 알 수가 없었다.
'뭐, 아무려면 어때. 그렇게 적혀있으니 그대로 하면 되는거야.' 하고 양사나이는 생각했다.
크리스마스 이브는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사흘 동안에 자루가 물푸레나무로 된 삽을 만들어서 지름 2미터, 깊이 2미터 3센티의 구멍을 파야 한다. 어휴, 정말 이상한 일에 말려들었군, 하고 양사나이는 한숨을 쉬었다.
물푸레나무는 숲 속에서 찾아냈다. 양사나이는 톱으로 물푸레나무 가지를 잘라 하루종일 걸려서 그것을 칼로 다듬어 삽 자루를 만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집 뒤편 공터에 구멍을 파기 시작했다.

하숙집 아줌마가 다가와서 "당신 왜 구덩이는 파고 그래요?"하고 물었다.
"쓰레기 버릴 구덩이를 파는겁니다." 하고 양사나이는 대답했다. "그런게 있으면 편리하지 않을까 해서요..."
"흠, 그럴까... 이상한 일 벌이면 경찰에 신고할테니 알아서 해요." 아줌마는 밉살맞게 말하고는 저쪽편으로 가버렸다.
양사나이는 줄자로 치수를 꼼꼼히 재가며 지름 2미터, 깊이 2미터 3센티의 구멍을 팠다.
"음, 이 정도면 됐겠지." 하고 말하며 양사나이는 구멍에 나무 뚜껑을 덮었다.

드디어 크리스마스 이브가 찾아왔다. 양사나이는 도넛 가게에서 구멍이 뚫리지 않은 꽈배기 도넛을 한아름 가져와서 그것을 배낭에 넣었다. 이 정도 있으면 도시락으로 쓸만하다. 그리고 양(羊)복 가슴에 달린 주머니에 지갑과 소형 손전등을 넣고 여밈을 채웠다.
새벽 1시가 되자 주위의 집들도 불이 꺼지고 공터는 아주 깜깜해졌다. 달도 없고 별도 보이지 않는다. 자기 손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어두우니 성양상인님이라도 구멍에 빠져버리지." 하고 양사나이는 중얼거리며 손전등으로 구멍을 찾았다. 그러나 너무 어두워서 구멍을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큰일났네, 이제 곧 1시16분이 될텐데. 만약 구멍을 찾지 못하면 내년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기다려야만 해. 그렇게 되면... "하고 말하는 순간 갑자기 양사나이가 딛은 지면이 푹 꺼졌다. 양사나이는 구멍에 빠진 것이다.
'누군가가 낮 동안에 뚜껑을 치워놓았나?'하고 구멍에 빠지면서 양사나이는 생각했다. '분명 하숙집 아줌마가 그랬겠지. 그 아줌마는 정말 내가 싫어하는 일만 골라서 하니까.'
그러나 양사나이는 그렇게 생각한 뒤에 아무래도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아직도 계속 떨어지고 있다. 내가 판 구멍은 깊이 2미터 3센티밖에 안되기 때문에 바닥에 닿기까지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리가 없는 것이다.
갑자기 쿵하는 소리가 나고 양사나이는 구멍의 바닥에 부딪혔다. 무지무지 깊은 구멍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아프지 않았다.

양사나이는 머리를 흔들고나서 손전등으로 주위를 비춰 보려고 했으나 손전등은 없었다. 분명 구멍에 떨어질 때 잃어버렸을 것이다.
"뭐야 이런, 젠장." 하는 소리가 암흑 속에서 들렸다. "아직 1시 14분 아냐. 2분이나 이르잖아, 젠장. 위로 올라가서 처음부터 다시 해."
"죄송합니다. 어둡고 잘 몰라서 실수로 떨어져버렸어요." 하고 양사나이는 말했다. "거기다 이렇게 깊은 구덩이를 다시 올라간다는 건 도저히 무리예요."
"할 수 없군, 젠장. 하마터면 깔릴뻔했잖아. 1시 16분에 떨어질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젠장."
그리고 성냥을 긋는 소리가 나고 촛불이 켜졌다. 촛불을 켠 사람은 키가 큰 남자였다. 그러나 키가 크긴 하지만 어깨까지의 높이는 양사나이와 별 차이가 없다. 다만 얼굴이 아주 길었고 그것이 꽈배기 도넛처럼 비비 비틀려 있었다.

"그런데 너, 젠장, 도시락은 제대로 챙겨왔겠지?" 하고 가 말했다. "안가져왔으면 큰일이니까, 젠장."
"가져왔어요. 제대로."하고 양사나이는 황급하게 대답했다.
"그럼 꺼내봐, 젠장, 나도 배가 고프단말야."
양사나이는 배낭을 얼어 가져온 꽈배기 도넛을 하나 꺼내 에게 건넸다.
"뭐, 뭐야 이건?" 하고 는 그것을 보고 소리쳤다. "너, 내 얼굴 놀려먹으려고 이런걸 가져온거지? 젠장."
"아녜요, 그건 오해입니다." 하고 양사나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저는 도넛 가게에서 일하고 있어서 구멍이 뚫리지 않은 음식은 그 비틀이 도넛밖에 없었어요."

"거봐, 방금도 라고 했잖아, 젠장." 하고 는 말하고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꼬아져 비뚤어진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나라고 좋아서 이런 얼굴을 하고 이렇게 어두운 구멍 바닥에서 문지기나 하고 있는게 아니라구, 젠장."
"난처하군... 말이 잘못 나왔어요. 꽈배기 도넛이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이미 늦었어, 젠장." 하고 가 울면서 말했다.
하는 수 없이 양사나이는 꽈배기를 하나 더 꺼내서 꼬아져 비틀어진 부분을 풀어서 똑바로 편 뒤에 에게 주었다.
"자 봐요. 이제 아무렇지도 않죠. 쭉 펴졌죠? 괜찮으니까 어서 드세요. 맛있어요."
는 그것을 받아서 꾸역꾸역 먹었지만 그래도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가 울면서 도넛을 먹고 있는 동안 양사나이는 의 촛불을 빌려서 구멍의 바닥을 살펴보았다. 구멍의 바닥은 텅 빈 넓은 방으로 되어있었다. 방에는 를 위한 침대와 책상이 놓여 있었다.
'문지기라고 하는걸 보면 분명히 어딘가에 문이 있을 게 틀림없어.'하고 양사나이는 생각했다. '문이 없으면 문지기 따위는 필요 없으니까.'
양사나이가 생각한대로 침대 옆에 작은 굴이 뚫려 있었다. 양사나이는 촛불을 가지고 옆의 굴로 기어들어갔다. 굴속은 아주 깜깜했고 구불구불 굽어 있었다.
'어휴, 작년 12월 24일에 도넛 하나 먹었다고 이런 곤경에 빠지다니' 하고 양사나이는 투덜투덜 혼잣말을 했다.
10분 정도 나아가니 주변이 점점 밝아졌다. 그리고 굴의 출구가 보였다. 굴밖에는 밝은 빛이 넘치고 있었다.
'뭔가 이상한데. 구멍에 떨어진 건 새벽 1시 넘어서였으니 아직 날이 밝은 것은 아닐테고...' 하고 양사나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굴에서 나오자 휑한 공터가 펼쳐져 있었다. 공터 주변은 양사나이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키가 큰 나무로 둘러싸여 있었다. 하늘에는 흰 구름이 떠있고 새 소리가 들렸다.

"이제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거지? 그 책에는 구멍에 떨어지면 그걸로 주문이 풀린다고 써있던데 이렇게 되면 어쩌라는거야." 하고 양사나이는 말했다.
양사나이는 약간 배가 고팠기 때문에 잠깐 앉아서 도넛을 하나 먹기로 했다.
양사나이가 도넛을 먹고 있자 뒤쪽에서 "안녕하세요, 양사나이 아저씨." "안녕하세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양사나이가 돌아보자 거기에는 쌍둥이 여자아이가 서있었다. 한 여자아이는 이라는 번호가 쓰인 셔츠를 입고 또 한 여자아이는 라는 번호가 쓰인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 번호만 빼면 두 여자아이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똑같았다.
"야아, 너희들" 하고 양사나이는 말했다. "여기와서 도넛 좀 같이 먹지 않을래?"
"우와, 신난다."하고 208번 여자아이가 말했다.
"정말 맛있겠다." 하고 209번 여자아이가 말했다.
"맛있어. 이거 내가 만든거거든." 하고 양사나이가 말했다. 세 사람은 땅바닥에 나란히 앉아 우물우물 도넛을 먹었다.
"잘 먹었습니다." 하고 209가 말했다.
"이렇게 맛있는 도넛을 먹기는 처음이었어요."하고 208이 말했다.
"그거 다행이구나." 하고 양사나이가 말했다. "그런데 너희들, 나는 주문에 걸려있는데 그걸 푸는 방법 모르니? 여기 오면 풀린다고 들었는데."
"안됐군요." 하고 208이 말했다.
"주문에 걸렸다니 상당히 힘들겠네요."하고 209가 말했다.
"끔찍하게 힘들다." 하고 양사나이는 말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럼 바다까마귀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면 어떨까?" 하고 209가 208에게 말했다.
"그래, 바다까마귀 아주머니라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고 208이 209에게 말했다.
"그 아주머닌 주문에 관한 거라면 아주 빠삭하거든." 하고 209가 208에게 말했다.
"이봐, 너희들, 나를 그 까마귀 아주머니가 있는데까지 데려다주지 않겠니?" 하고 양사나이는 말했다.
"까마귀가 아니예요." 하고 208이 말했다.
"바다까마귀예요." 하고 209가 말했다.
"까마귀와 바다까마귀는 전혀 다르니까요." 하고 208이 말했다.
"맞아요." 하고 209가 말했다.
"미안 미안." 하고 양사나이는 208과 209에게 사과했다. "그 바다까마귀 아주머니가 있는데까지 데려다줄 수 있겠니?"

"그야 어렵지 않죠." 하고 208이 말했다.
"따라오세요." 하고 209가 말했다.
쌍둥이와 양사나이는 셋이서 숲속의 길을 걸었다. 쌍둥이는 걸으면서 노래를 불렀다.

만약에 바람이 쌍둥이라면
동쪽과 서쪽으로 불 수 있을텐데.
만약에 바람이 쌍둥이라면
왼쪽과 오른쪽으로 불 수 있을텐데.

10분이나 15분쯤 걷자 숲이 끝나고 맞은편에는 끝없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저기 바위 위에 작은 오두막이 보이죠? 거기가 바다까마귀 댁이예요." 하고 209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는 숲 밖으로 나갈 수 없어요." 하고 208이 말했다.
"고맙다. 정말 도움이 되었어." 하고 양사나이가 말했다. 그리고 배낭에서 꽈배기 도넛을 꺼내어 쌍둥이에게 하나씩 주었다.
"고마워요, 양사나이 아저씨." 하고 208이 말했다.
"주문이 잘 풀렸으면 좋겠네요." 하고 209가 말했다.

바다까마귀 아주머니네 집에 가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바위는 비쭉비쭉 솟아있고 길다운 길도 없었다. 게다가 강한 바다바람이 바위에 매달린 양사나이를 당장이라도 날려버릴 듯 했다.
"바다까마귀 아주머니는 하늘을 날 수 있으니 모르겠지만, 걸어서 올라가기도 해봤으면 좋겠어." 하고 양사나이는 투덜거렸다.
그래도 어찌어찌해서 양사나이는 바위 끝에 이르렀고 바다까마귀 아주머니 집 문을 노크했다.
"누구세요? 신문 수금왔어요?" 하고 집 안에서 괄괄하고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아뇨, 아닙니다. 양사나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만..." 하고 양사나이는 말했다.
"그런 사람한테 볼일 없어요." 하고 바다까마귀 아주머니같은 목소리가 딱잘라 말했다.
"이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문좀 열어주세요."
"정말 신문 수금하러 온 거 아니죠?"
갑자기 문이 덜컥 열리고 바다까마귀 아주머니가 얼굴을 내밀었다. 아주머니는 매우 키가 크고 부리 끝은 곡괭이처럼 날카로웠다.
"쌍둥이가 바다까마귀 아주머니라면 주문에 대해 잘 알고 계시다고 해서 왔습니다." 하고 양사나이는 쩔쩔매며 말했다. 이런 부리에 머리를 쪼이면 당장 즉사할 것이다.
아주머니는 의심스러운 듯 양사나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럼 안으로 들어와요. 얘기나 들어보게."
집 안은 엄청나게 어지럽혀져 있었다. 바닥은 먼지투성이였고 테이블에는 끈적끈적하게 소스가 묻어있었으며 쓰레기통은 당장이라도 넘쳐날 듯 했다.
양사나이는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이거 안됐군."하고 아주머니는 말했다. "당신은 출구를 잘못나와버린거야."
"그럼 다시 돌아가야 하겠네요."
"그건 안돼. 한번 나오면 다시 돌아갈 수가 없거든." 하고 아주머니는 부리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다만 내가 당신을 등에 태우고 주문을 풀 수 있는 장소에 데려다 줄 수는 있지." "그렇게 해주시면 기쁘겠습니다만." 하고 양사나이는 말했다.
"그런데 당신 꽤 무거워보이는걸." 하고 바다까마귀 아주머니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안무거워요. 42킬로밖에 안나가는걸요." 하고 양사나이는 3킬로 줄여서 말했다.

"자, 그럼 이렇게 하지." 하고 바다까마귀 아주머니는 말했다. "당신이 이 방을 청소해주면 나는 당신을 그 장소에 데려다줄게."
"좋습니다."
그러나 바다까마귀 아주머니의 방을 청소하는 것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벌써 몇 개월이나 청소를 안했음에 틀림없다. 양사나이는 때가 말라붙은 접시와 그릇을 닦고 테이블 위를 훔치고 바닥을 청소기로 청소한 후 수건을 빨고 쓰레기를 모아 버렸다. 그만큼 끝내고 나자 녹초가 되었다.
"정말 주문에 걸린 덕분에 별 고생을 다해보는군." 양사나이는 아주머니한테 들리지 않도록 투덜거렸다.
"어디보자, 깨끗해졌네." 하고 바다까마귀 아주머니는 만족한 듯 말했다. "집을 이정도는 정리해놓고 살아야 하는데."
"그럼 이제 그 장소에 데려다주시는거죠?"
"그렇고말고. 나는 약속을 꼭 지키니까. 자, 내 등에 타요."

양사나이가 등에 타자 바다까마귀 아주머니는 휭 하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양사나이는 하늘을 나는 게 처음이었기 때문에 아주머니의 목을 꽉 움켜잡았다.
"조금만... 아이구, 숨막혀. 그렇게 목을 꽉 조르면 어떡해. 숨을 쉴 수가 없잖아." 하고 바다까마귀 아주머니가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하고 양사나이는 바다까마귀 아주머니에게 사과했다.
하늘에서는 바다와 숲과 언덕이 한눈에 보였다. 초록색 숲과 짙은 파란색의 바다가 끝없이 이어지고 그 가운데에 띠처럼 흰 모래사장이 펼쳐져있었다. 그것은 매우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아름답네요." 하고 양사나이는 말했다.
"저것도 매일 보면 지겨워." 하고 바다까마귀 아주머니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바다까마귀 아주머니는 날개의 상태를 시험하기 위해 양사나이를 태우고 집 위를 빙글빙글 몇 번 돌고나서 100미터도 안 떨어진 초원으로 쓱 내려갔다.
"왜그래요, 아주머니? 어디 몸이 안좋으세요?" 하고 양사나이는 걱적스럽게 물었다.
"몸이 안좋은게 아냐." 하고 바다까마귀 아주머니는 머리를 휘휘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내가 몸이 안좋다니. 나는 건강하기로 이 동네에서 유명한걸."
"이런데서 갑자기 내려버리니까 그렇죠."
"여기가 바로 그 장소니까." 하고 아주머니가 말했다.
"여기는 아주머니 집에서 100미터도 떨어져있지 않잖아요?" 하고 양사나이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이정도는 태워다주지 않아도 저 혼자 올 수 있었다구요."
"그래도 그럼 내 방 청소를 안해줬을거 아냐."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나는 멀다는 말은 한마디도 한 적 없잖아. 그냥 등에 태워주겠다고만 했지."
"음, 뭐, 맞긴 맞네요." 하고 양사나이는 납득하지 못한채 말했다.
바다까마귀 아주머니는 까악까악 웃으면서 하늘로 날아올라 집쪽으로 돌아갔다.

양사나이가 주위를 둘러보니 초원 한가운데에 큰 나무가 한그루 서있는 것이 보였다. 나무 줄기에는 줄사다리가 걸려있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때문에 양사나이는 일단 그 사다리 위에 올라가 보기로 했다.
줄사다리는 흔들거려서 올라가기가 힘들었다. 양사나이가 땀을 훔치면서 꽤 위쪽까지 30단이나 40단 정도 올라가자, 가지 사이에서 "이봐, 자네 무슨일인가?" 하는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주문 때문에 왔는데요, 뭐 알고계신 것 없으세요?" 하고 양사나이는 그 목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말해봤다.
"아아, 주문 말인가, 하하하. 좋아, 이쪽으로 와." 하고 그 목소리는 말했다.

양사나이가 발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가지를 헤집고 그쪽으로 가보니 그 안에는 나무에 난 구멍을 이용한 작은 오두막이 있고, 오두막 앞에는 가 걸터앉아 커다란 면도칼로 수염을 깎고 있었다.
"아니..." 하고 양사나이는 말했다. "댁은 구멍 바닥에 있던 분 아닌가요?"
"아냐, 그건 내가 아니라구. 하하하하."하고 그 가 웃으며 말했다. "그건 우리 형이야. 잘 봐, 나는 오른쪽으로 비틀려있지? 형은 왼쪽으로 비틀려있다구. 형은 울기도 잘하고 남에게 욕도 잘하지, 후후후."
오른쪽는 눈을 오른쪽으로 향하고 턱을 왼쪽으로 향해 쿡쿡 웃으면서 능숙하게 수염을 깎았다.
"같은 형제라도 상당히 성격이 다른 모양이네요." 하고 양사나이는 감탄하며 말했다.
"그건말야, 왼쪽하고 오른쪽이니까... 정반대아냐, 후후후후." 하고 오른쪽는 귀 밑에 면도를 대면서 말했다. "후후후후후."
"그런데 주문 말인데요..." 하고 양사나이는 말했다.
"아무것도 안가르쳐주지, 헤헤헤." 하고 오른쪽는 말했다. "주문에 더 걸려서 고생하는게 좋을걸, 헤헤헤헤헤."
양사나이는 화를내고 나무를 내려왔다.
"정말 못올 곳이군, 여기는." 하고 양사나이는 말했다. "오른쪽나 왼쪽나 둘다 고만고만하게 비틀어져 있고, 바다까마귀 아주머니는 염치도 없고."
양사나이는 이제 나도 모르겠다 생각하고 눈에 띄는 길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한참 걷자 깨끗한 샘물이 나타나서 양사나이는 거기서 물을 마시고 도넛을 하나 더 먹었다. 도넛을 먹고 나자 졸음이 와서 양사나이는 풀 위에 누워 한숨 자기로 했다.

양사나이가 눈을 떴을 때 날은 이미 저물어 하늘에는 별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바람이 휘 휘 소리를 내고 때때로 거기에 섞여 늑대 울음소리도 들렷다.
"큰일났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길을 잃어버리다니. 아직 주문도 풀리지 않았는데 말야."하고 양사나이는 혼잣말을 했다.
"으음, 말씀을 듣자하니 주문에 걸려 고생하신다구요." 하고 갑자기 암흑속에서 머뭇머뭇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도대체 어디 있는거예요?" 하고 양사나이는 놀라서 말했다.
"으음, 이름도 없는 사람입니다." 하고 그 목소리는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양사나이는 주위를 둘러봤으나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저를 찾지 말아주세요." 하고 목소리는 말했다.
"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입니다. 보잘 것 없는 사람입니다."
"나와서 같이 도넛 먹지 않을래요?" 하고 양사나이는 권해보았다. "혼자 있는것도 쓸쓸하고."
"으음, 도넛을 얻어먹을만한 사람이 못됩니다. 정말로." 하고 그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말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괜찮아요. 도넛이라면 많이 있으니까. 부끄러우면 저쪽을 보고 있을테니 그동안에 와서 먹어요."
"고맙습니다." 하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말했다.
"가장 작은걸로 반쪽만 주시면 됩니다."
양사나이는 풀 위에 도넛을 하나 놓고 저쪽을 향했다. 이윽고 부스럭부스럭 소리가 나고 누군가가 다가와 오물오물 도넛을 먹었다.
"맛있다. 정말 맛있네요." 하고 그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말했다. "돌아보면 안돼요."
"돌아보지는 않겠지만, 그 주문에 대해 알고 있으면 가르쳐주지 않을래요?" 하고 양사나이는 물었다.
"주문 말씀이세요? 에에, 냠냠, 알고 있습니다." 하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말했다. "아유 맛있어, 냠냠."
"어디 가면 주문이 풀릴까요?" 하고 양사나이는 물었다.
"그 샘물로 뛰어들면 돼요. 냠냠. 간단하죠." 하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말했다.
"하지만 난 수영을 못하는걸요."
"수영을 못해도 걱정 없어요. 괜찮아요. 그건 그렇고 정말 맛있네요, 냠냠."
양사나이는 될대로 되라 하는 기분이 들어, 샘물가로 가서 그 속으로 머리부터 뛰어들었다. 그러나 양사나이가 뛰어듦과 동시에 샘물은 싹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양사나이는 구덩이 바닥에 머리를 꽝하고 부딪치고 말았다. 머리가 어찔어찔했다.

"어이구... 미안하게 됐소." 하고 누군가가 말했다. "설마 머리부터 뛰어들리라고는 생각못했다오."
양사나이가 눈을 뜨자 거기에는 키 140센티 정도의 자그마한 노인이 있었다.
"아야... 아이고 아파라." 하고 양사나이는 말했다. "할아버지는 누구세요?"
"내가 성양상인이오." 하고 그 노인이 빙긋 웃으며 상냥하게 말했다.
"그럼 할아버지가 저에게 주문을 거신 겁니까? 왜 그렇게 심한 일을 하신거죠? 나쁜짓 한 번 한 적이 없는 저를 이렇게까지 궁지에 빠뜨리시다니... 이젠 몸도 녹초가 되었고, 자.. 여기좀 보세요. 머리에는 혹까지 생겼잖아요."
"아, 미안 미안.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오. 하지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다오." 하고 성양상인이 말했다.
"그 사정이란게 뭔지 정말 궁금하군요." 하고 양사나이는 화가 난 채로 말했다.
"자, 자" 하고 성양상인이 말했다. "그 전에 이쪽으로 오시게나.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은게 있소."
성양상인이 빠른 걸음으로 구덩이의 안쪽으로 걸어갔기 때문에 양사나이도 머리를 흔들면서 그 뒤를 쫓아갔다. 이윽고 성양상인은 문앞에 서서 문을 싹 열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모두가 소리쳤다.
방안에는 모두가 있었다. 오른쪽 비틀이도 왼쪽 비틀이도, 208도 209도, 바다까마귀 아주머니도, 아무것도 아닌 사람도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사람은 입 언저리에 도넛 부스러기가 묻어 있는 것을 보고 알았다. 양박사의 모습까지 보였다.
방에는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가 장식되어 있었고 트리 밑에는 리본을 맨 선물 꾸러미가 쌓여 있었다.
"이게 다 뭡니까? 왜 모두들 여기에 있는거죠?" 하고 양사나이가 놀라서 물었다.
"모두 아저씨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하고 208이 말했다.
"얼마나 기다렸다구요." 하고 209가 말했다.
"내가 크리스마스 파티에 당신을 초대한거요." 하고 성양상인이 말했다.
"그럼, 내가 주문에 걸려서, 그래서..." 하고 양사나이는 말했다.
"내가 주문을 걸어서 당신이 여기에 오도록 한거지." 하고 성양상인이 말했다.
"그러는 편이 스릴도 있고 모두들 즐거워할 수 있으니까."
"정말 즐거웠다구, 까악 까악 까악." 하고 바다까마귀 아주머니가 말했다.
"재미있었어, 젠장." 하고 왼쪽 가 말했다.
"유쾌했었지, 후후후후." 하고 오른쪽 가 말했다.
"맛있었어요, 냠냠." 하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말했다.
양사나이는 속았다는 것에 화를 냈지만 그러는 동안 점점 즐거워졌다. 주위에 있는 모두의 얼굴이 아주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그런거라면." 하고 양사나이는 대범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양사나이 아저씨, 피아노 쳐주세요." 하고 208이 말했다.
"피아노 잘 치신다면서요.?" 하고 209가 말했다.
"여기 피아노가 있나?" 하고 양사나이가 물었다.
"있소, 있소." 하고 성양상인이 말하고 커다란 천을 싹 걷어냈다. 천 속에는 양의 모양을 한 새하얀 피아노가 있었다. "자네를 위해 이걸 만들어 둔 거요. 실컷 쳐 보시게."

그날 밤 양사나이는 아주 행복했다. 양피아노는 멋진 소리를 냈고, 머리에는 아름다운 멜로디와 즐거운 멜로디가 계속 끊임없이 떠올랐다.
오른쪽와 왼쪽가 합창을 하고, 208과 209가 춤을 추고, 바다까마귀 아주머니는 "까악 까악 까악"하고 노래하면서 방안을 날아다니고 성양상인과 양박사는 둘이서 누가 더 맥주를 잘 마시나 겨루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까지 기쁜 듯이 바닥을 뒹굴뒹굴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케익이 모두에게 나누어졌다.
"맛있다, 냠냠." 하고 말하면서 <아무것도 아닌사람>은 케익을 3조각이나 먹었다.
"양사나이 세계가 언제까지나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하고 성양상인이 기도를 올렸다.

깨어났을 때 양사나이는 자기 방의 침대 위에 있었다. 전부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양사나이는 잘 알고 있었다. 머리에는 아직도 뚜렷이 혹이 남아 있었고, 양(羊)복 꼬리에는 기름이 묻어 있었으며 방에 있던 고물 피아노가 없어지고 그 대신에 새하얀 양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그건 진짜로 일어났던 일이다.
창밖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나뭇가지에도 우편함에도 울타리에도 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그날 오후 양사나이는 변두리에 있는 양박사님 댁을 찾아가 봤지만 거기에는 이미 양박사님 집이 없었다. 다만 공터가 있을 뿐이었다. 양의 모양을 한 정원수도, 현관 기둥도, 바닥에 깔려있던 돌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나는 이제 다시는 그 분을 못만나게 되는구나." 하고 양사나이는 생각했다. "두 명의 도, 208과 209 쌍둥이도, 바다까마귀 아주머니도, <아무것도 아닌 사람>도, 양박사님도, 성양상인도."
그렇게 생각하자 양사나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양사나이는 모두를 매우 좋아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숙집으로 돌아오자 양의 그림이 그려진 크리스마스 카드가 한 장 우편함에 들어 있었다.
거기에는 "양사나이 세계가 언제까지나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하고 적혀있었다. (끝)

3 # 감상[ | ]

하루키는 대학교 1학년 때 선배누나가 호들갑을 떨며 읽어보라길래 노르웨이의 숲을 시작으로 몇 권을 읽었다. 하루키의 글은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무언가'(!)를 읽고 있다는 포근한 느낌이 들게는 했으나,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 혼란 그 자체였던 어렴풋한 기억이 있다. 그 심적상태가 몇일동안 이어져 여름방학 때의 몇일간을 두문불출하며 폐인같이 살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현재로선 무언가를 '읽는' 느낌을 제외하고는 그의 자질구레한 소설들에서 무언가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무리가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전공투세대인 하루키는 60-70년대 이미 남들에게 무언가를 주장하고 설득하고 메세지를 던지는 작업 자체에 회의를 느끼고 그것을 포기해 버린 사람이 아닐까. 그의 소설에는 스타일과 무드는 있으되, 메세지는 없는 것 같다. 이건 내 편견일까? -- 자일리톨 2003-7-28 2:08 pm

착한 소품이군요. 뭐랄까 하루키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패러디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여간 하루키는 말랑한 글쓰기에는 재주가 있는 사람. -- 거북이 2003-7-26 11:07 am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징
  • 1. 우유부단한 성격 - 남들이 뭐라든 자신이 생각하기엔 그렇다.
  • 2. 그래서인지 고민이 특히,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다.
  • 3. 남들 앞에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편이다.
  • 4.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고 공상을 즐기는 편이다.
  • 5. 외로움, 고독함을 느낄때가 많다.
  • 6. 친한 사람을 제외하곤 잘 만나지 않고 이해하거나 가까워지려고 특별히 노력하진 않는다.
  • 7. 술을 잘 마신다.
  • 8. 자기 발전을 추구하고, 삶에 대해 진지한 편이다.
  • 9. 믿음, 신뢰, 자유를 중요하게 여긴다.
  • 10.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은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

4 같이 보기[ | ]

5 참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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