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 ]
- 십일조
- 十一租
- tithe
- 헌상의 형태
- 보통 교회를 지원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목적으로 바친다.
- 십일조의 기원
- 십일조에 관한 성경 최초의 언급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자기의 전리품 중 10분의 1을 준 데서 발견된다
- 구약시대에서는 소출의 20%를 넘게 바쳤다.
- 십일조라는 말 때문에 10분의 1을 바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 율법에 따르면 십일조를 바치기 전에 '맏물'을 제사장에게 바치고 난 후에 십일조를 바쳤다.
- 율법에 따르면 1년에 두 번 십일조를 바쳤다. (일 년에 한 번 바치는 것이 아니다!)
- 맏물과 두 번의 십일조를 합하면 대략 소출의 약 22%~24%를 바쳤다.
- 율법에 따른 십일조의 종류
- 십일조에 관한 규례는 세 종류이며 세 단계로 구분이 된다. ‘십일조’(히, 마아셰르)는 레위인들을 봉양하거나 혹은 사회적인 구제 사업을 목적으로 매년 토지 소산이나 가축의 10분의 1을 바쳐야 하는 히브리인들의 종교적 의무이다(레27:30). 유대인들은 율법에 나타난 여러 십일조 규례(신12:5-19; 레27:30-33; 민18:21-32)를 근거로 십일조 헌납을 세 단계로 구분한다.
(1) 첫째 십일조: 한 해의 추수가 끝나면 백성들은 먼저 모든 소출의 10분의 1을 구별하여 자기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들에게 주어야 했다(민18:21-24). 그러면, 레위인들은 백성들로부터 받은 십일조에 다시 10분의 1을 구별하여 하느님께 거제로 바쳐야 했는데 이것은 곧 제사장의 몫이 되었다(민18:26-29). 이처럼 분배받은 기업 없이 성막에서 종교적 직무에만 전념하는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생계를 보장해 주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쳐야 하는 십일조의 첫 단계를 ‘첫째 십일조’라고 부른다.
(2) 둘째 십일조: 혹은 ‘축제 십일조’(Festival Tithe)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첫째 십일조를 바친 백성이 그 나머지 소출(10분의 9) 가운데서 다시 10분의 1을 구별한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자신들이 직접 중앙 성소로 가지고 올라가는데 한 해 동안 풍성한 축복을 내려 주신 하느님께 감사 축제를 드리는 비용으로 사용되었다(신12:5-19). 이때 중앙 성소가 너무 멀면 현물(現物) 대신 일단 현금으로 바꾸어 가지고 갔다가 성소 근처에서 다시 잔치에 필요한 예물들을 구입할 수 있었다(신14:24-26절). 한편 이 감사 잔치에는 가족과 친지는 물론 수하의 종들과 성중의 레위인들까지 모두 참여하였다.
(3) 셋째 십일조: 안식년(제7년째인 이때에는 토지를 경작하지 않기 때문에 십일조를 바치지 않았다)을 기준으로 제3년과 제6년째에는 위의 ‘둘째 십일조’로 잔치를 베푸는 대신 각 처소에서 다 모아들여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 나그네, 가난한 자, 고아, 과부들을 위한 구제비로 사용하였다(신14:28-29). 그리고, 이때 백성들은 자신들이 마련한 이 ‘둘째 십일조’를 율법대로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거짓 없이 사용했노라고 하느님 앞에 맹세하여야 했다(신26:13-15). 따라서 이 ‘셋째 십일조’는 따로 구별된 십일조가 아니라 ‘둘째 십일조’와 동일한 것인데 다만 용도에 있어서 다를 뿐이다. 즉 ‘둘째 십일조’는 안식년을 기준으로 매1년과 2년 그리고 4년과 5년째에 쓰는 ‘감사 축제용’이었고, ‘셋째 십일조’는 안식년을 기준으로 매 3년과 6년째에 쓰는 ‘이웃 구제용’이었다. 한편 신명기 14장 22-29절은 이중 둘째 십일조 (신14:22-27)와 셋째 십일조(신14:28-29절)에 관한 규례이다.
- 중세 유럽교회의 십일조
- 중세 유럽교회는 로마가톨릭교회와 정교회가 있는데
- 중세 시데에 로마가톨릭교회는 모든 국민이 세금을 납부하는 식으로 국가에 납부하였다. 즉 불신자라도 납부해야 했다.
- 중세 정교회는 따로 비율을 정하지 않고 믿음이 있는 자가 교회에 직접 십일조를 바치도록 하였다. (소위 다다익선이라고 여겼다)
- 종교개혁기의 십일조
- 종교개혁 시기에 모든 종교개혁가들은 십일조를 그리스도인이 지켜야할 중요하고 당연한 의무로 여겼으며 많은 말들을 남겼다.
- 마르틴 루터가 보는 십일조
- 1517년 종교 개혁의 시발점이 되었던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의 정문에 써붙인 95개조 반박문에 십일조는 없었다. 마르틴 루터는 십일조를 성경적으로 옳바른 제도로 보았기 때문에 95개조 반박문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 토마스 뮌처가 이끄는 농민 세력이 제후들에게 작은 가축에 대한 소십일조(小十一租)를 면제해달라는 요구를 하면서 소요를 일으켰다. 이에 대해서 마르틴 루터는 구약 말라기서 3장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농민 세력을 '도둑놈들'이라는 거친 표현을 사용하면서 크게 비난하고 오히려 강력히 처벌할 것을 주장하면서 철저한 십일조 납부를 강조하였다. 루터는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해야한다는 것은 그의 일관적인 입장이었다. 그렇다고 루터가 힘없는 농민들만을 비판한 것이 아니다. 지나치게 과도한 십일조를 거두고 있는 제후들에게도 마찬가지의 비판을 하였다. 이로 인해 마르틴 루터는 농민 세력과 제후들의 양편으로부터의 보다 큰 지지를 얻을 기회를 놓치게 되어 정치적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성서에 입각한 올바른 십일조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 장 칼뱅이 보는 십일조
- 장 칼뱅은 "그리스도인들은 온전한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와 "십일조는 올바르게 사용되어야 한다"고 하며 십일조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 또한 장 칼뱅은 "마태오복음 23장 23절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십일조는 하느님께서 명하신 십일조로 다른 모든 성경말씀과 마찬가지로 동등하게 이행되어야 하며 생략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 존 위클리프가 보는 십일조
- 존 위클리프는 종교개혁에 참여하는 초기에는 "자율적으로 납부하는 십일조"를 주장하다가 후반부에 입장을 바꾸어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바치라는 명령을 확증하셨다"고 단언하고 의무적인 십일조를 주장하였다.
- 울리히 츠빙글리가 보는 십일조
- 울리히 츠빙글리는 법적으로나 의무적으로 철저한 십일조를 해야함을 주장하였다.
- 존 웨슬리가 보는 십일조
-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십일조를 평생 강조하여 그가 언급한 말은 매우 많다. 존 웨슬리는 십일조의 중요성을 평생에 걸쳐 항상 일관적으로 언급하였다. 예를 들면,
- "모든 헌금 중에서 무엇보다 먼저 십일조를 준비하고 바쳐야 한다."
- "하느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십일조를 작정하여 드려야 한다"
- "믿는자는 연보를 십일조만 하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 "십분의 일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느님께 속한 것이다."
- "십일조는 하느님이 인도하시는대로 사용해야 한다."
- "십일조를 바치지 않는 자는 황금에 마음을 둔 자이다."
- "회개와 동시에 십일조를 계산해서 드려야 한다" 라고 하는 등의 말들로써, 존 웨슬리는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늘 그리고 거듭 강조하였다.
- 그리고, 존 웨슬리의 영향으로 파생된 교단이라 할 수 있는 감리교, 성결교, 오순절교회, 구세군에서의 십일조는 존 웨슬리의 십일조를 보는 견해에 영향을 받아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성도의 의무로 삼고 있다.
- 그리고, 마르틴 루터나 장 칼뱅은 십일조를 걷는 문제 뿐만 아니라 십일조와 함께하는 올바른 믿음과 정성 및 거둔 십일조 헌금의 올바른 사용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와 같이 종교개혁기의 모든 주요 지도자들은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해야 함을 매우 엄격히 가르쳤다.
-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십일조를 평생 강조하여 그가 언급한 말은 매우 많다. 존 웨슬리는 십일조의 중요성을 평생에 걸쳐 항상 일관적으로 언급하였다. 예를 들면,
- 오늘날의 십일조
- 신약시대에서 십일조의 납부 방식 및 비율이 교회의 결정에 따라 많이 달라졌다. (구약시대에 비해 크게 하락하였다)
- 교회가 정한 규정에 따라 납부한다. (통상 교회 헌법에 규정하는데 총회의 결의로 정하는 경우도 있다.)
- 십일조는 믿음이 있는 신도만 바치게 되었다.
- 오늘날 한국교회의 십일조의 비율은 소득의 10%가 일반적인데 그 이유는 대부분의 교회가 그렇게 결정했기 때문이다.
- 현금, 수표, 이체 및 현물을 드리는 방식이 일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