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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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1959년 1월, 조선일보)[ | ]

서화(序話)

당신의 입술에선 쓰디쓴 풀맛 샘솟더군요. 잊지 못하겠어요.
몸냥은 단 먹뱀처럼 애절하구, 참 즐거웠어요. 여름날이었죠.
꽃이 핀 고원을 난 지나고 있었어요. 무성한 풀섶에서 소와 노닐다가, 당신은 가슴으로 날 불렀죠.
바다 언덕으로 나가고 싶어요.
밤 하늘은 참 좋네요. 지금 지구는 여행을 한다나요?
관좌성운(冠座星雲) 좀 보세요. 얼마나 먼 세상일까요···.
기중 넓은 세상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그럼 그의 밖곁엔 다시 또 딴 마당이 없는 것일까요 ?

자, 손을 주세요. 밤이 깊었어요.
먼저 쉬이세요. 못 잊으려나 봐요. 우리가 포옹(抱擁)턴
하늘에 솟은 바위, 그 밑에 깔린 구름,
불 달은 바위 위에서 웃으며 잠들던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던 당신의 붉은 몸.

언제여든 필요되거든 조용히 시작되는 그 서무곡(序舞曲)으로 백학(白鶴)의 대원(大圓) 휘파람 하세요. 돌아가 묻히겠어요, 양달진 당신의 꽃가슴으로. 아마 운명인가 봐요.

제 1 화

그늘 밑 꽃뱀 얽혀 있는 산중에서 산삼을 찾고 있었네.
그날 삼은 보지 못했으나, 여인을 만나 정성을 다한 씨 심거주었네.
나락이며 보리며 목화씨며 경지(耕地)에 뿌리고 돌아다녀도 아무도 마다 하데. 지구는 이미 먼저 나온 사람들이 한 몫씩 논하 갖고 말아버렸네.
땅 한번 디뎌도 세금이 좇아 오데. 바람 마시는 값으론 코를 베어 주었네.

억광(億光) 하늘 아래 절름거리며 지나간 초라빛 나그네 하나있었다니라. 하여 앞도 뒤도 없는 이야기 몇 맏, 노변에 뿌려 놓고, 억광 하늘 아래 신명(神明)은 처음으로 그곳서 빛나, 벋은 무지개 우주를 벗어나 스러져 갔다니라.

이르노니,
지금 예까지 와 있는 역사의 중량이여.
당신의 보따리 속에 든 인구(人口)며 곤충이며 전통이며 문명이며, 한데 묶어 머리 이고 하늘향 앞발 한번 버팅겨 보시지.

짓궂은 이야기다.
허허만년(虛虛萬年).
초원이 있고, 냇물이 있고, 양달이 있고, 독사가 있고,
암과 수 쌍쌍이 엉켜 새끼 치곤 죽어져 갔다.

제 2 화

간 밤에 밟히워 간 가난한 목숨들의 명복을 위하여, 지금 어디선가 아우성치고 있을 못된 아귀(餓鬼)들의 진혼을 위하여. 그리고는 내일날 태양빛 찬란히 빛나 있을 사형집행장, 꽃바람 부는 교외, 잔디밭 언덕으로 끌려나갈 아름다운 인류들의 눈물을 위하여.

내 동리 불 사른 사람들의 훈장(勳章)을 용서하기 위하여. 코스모스 뒤안길 보리 사발 안은 채 죽어 있던 누나의 사랑을 위하여.

감옥돌 묻으러 갈 꽃상여의 길 닦이를 위하여. 아프리카사막서 일사병으로 눈먼 식민지 병사들의 월급봉투를 위하여. 그리고는 먼 훗날, 당신이 서 있을 대지를 쪼개고 솟아 나올 시생대 암층 깊숙이 우리의 대서사시를 새겨 넣기 위하여.

제 3 화

내가 온달 때 당신은 구름 덮으시더라.
나는 원시, 그래서 당신은 멀리 있어야
잘 생각난다 이렀더니, 싫어도 당신은 끄덕이시이더라.

무엇을 너는 내게 요구코 있는건가.
나의 간 말인가?
금니빨 말인가?
귀 말인가?

옛날엔 명실상부 직업전투가가 있었삽니다.
이 기 저 기 팔려 다니며 성문지기, 호랑이잡이, 이마에 뿔 돋치고 양 어금 니 째져 나온 불쌍한 종족들 이 살었댑니다.

오늘날 그들은 출세도 했습니다.내성에 들어와 옥좌를 마련코, 부족 눕혀 구중궁궐 쌓 올리고 백성 목덜미 위 군림하여 천하를 호령하고.

나도 물론 만족전쟁(蠻族戰爭)엔 나가 보았습니다.
창 들고 도끼 들고 코거리 하고 귀거리 하고.
닥치는 대로 대갈통을 바수어 함지박처럼 머리에 엎어쓰고,
가슴팍을 꿰어선 나무에 매달아 두고.

못난짓 버릇 가운데 몸을 담그고
오랜 세월 숨 쉬어간 사람들이여,

도끼는 신기해도
손 재주가 만든 것이며.
비행기는 비싸도
땅에서 뜨는 것이다.

떡쇠의 입에는 쌀이 하루 세 사발,
수상님의 대장(大腸)에는 비계가 하루 세 사발,
대헌장은 존엄해도 개호지의 안경이다.

못난짓 버릇 가운데 몸을 담그고
오랜 세월 비둥겨 간 사람들이여,

까마귀는 내려와 선달이 가슴 위에
구데기를 쪼아서 주둥일 닦을 게고
장군님의 존안 위에 평소히 앉아서
누깔을 빼 먹고선 갸웃거릴 것이다.

내 고향에 피는 꽃은 무슨 꽃일까.
봄, 갈, 여름, 내 생지(生地)에 펴 나는 꽃은
무슨 꽃일까. 두견이, 패랭이, 들국?

거짓말이다. 그런 꽃은 고향 산천에
펴 나지 않는다.

들길을 가로 질러 달구지가 지나갔다.
낯 익은 얼굴들이 호박처럼 매달려
메마른 돌밭 위에 부숴져 가고 있었다.

벗이여, 눈보라 쌓이는 밤
이리의 겨드랑에 손을 넣으면,
다스운, 다순 피가 안 돌고 있을 것인가.

벗이여, 광막한 원시림.
인간된 거죽 홀홀이 벗어 던지고
산돼지 되어 두더지처럼 살아 갈 순 없단 말인가.

아름다운 바람 하늘 높이 흘러 가고
억만년 햇빛 머리 위에 퍼 붓는다.

어데를 흘러가는 싸움떼이게
그 많은 다툼에도 시비가 남았느뇨.

어데를 흘러가는 목숨들이게
양뿔이 빠지고도 꼬리마저 잘려 있느뇨,

하면, 오늘 밤을 어떻게 할 테란가.
로운 폭약이여, 로운 침략이여.

메마른 공분모가
화려한 문명사엔 유세스런 장막이고, 이도령은 당신네
호랑이 굴 아구리에 네 다리로 막고 서서
꽂혀 오는 화살은 등가죽으로나 헤이고?

산과 산.
산과 산,

모과나무 가지엔 무엇이
걸레처럼 발기발기 찢어져
걸려 있었고.

돌 벼개,
바위 그늘.

땀으로 세수하고
이슬에 목 추기며

동으로, 서으로,
남으로, 북으로.

오늘에 미친 사람
내일로 바람자케,

내일로 죽힌 사람
모레에 환생하케.

하여 원수로 죽은 사람
원수로 더불어 복수케 하며,

독엔 독으로
창엔 창으로
바퀴엔 바퀴로.

태양 밑에 있고 싶은 자 있게 하고
없고 싶은 자 없게 하라.

싸우고 싶은 자 저희끼리 싸우게 하고
독존하고 싶은 자 철창속에 독존케 하라.

투구를 쓰고 싶어 하는 자
쇠항아릴 만들어 깊숙이 씌워 주라.
영웅이 되고파 서두르는 자 로켓트에 매달아
대기밖으로 내던져 버리라.

무엇이 남겨졌고
무엇이 돌아갔는가.

빛나는 여름,
구슬 뿌리며
산맥을 넘어 간.

소녀들의
흰 발이여.

지금은 바람 잔
언덕 위.

패랭이,
민들레,
들노래처럼
사라져 간

그리운,
이름,
이름이여.

제 4 화

어두운 대지 한 가닥 서기(瑞氣) 있어, 무릎 모두우고 일어 앉는 그림자. 헝클진 앞가슴 아무려 여미며 비녀는 입에, 두 손은 머릴 간조롱이고, 동 트는 대지 계곡과 들녘에 한 올기 맨발 번 육혼을 살어.

태백줄기 고을 고을마다 강남제비 돌아와
흙 물어 나르면, 산이랑 들이랑 내랑 이뤄
그 푸담한 젖을 키우는
울렁이는 내 산천인데······

맛동 마을 농사집 태어나 말썽 없는 꾀벽동이로
딩굴 벙굴 자라서, 씨 뿌릴 때 씨 뿌리고
걷워딜 때 걷워딜듯, 이웃 말 어여쁜 아가씨와
짤랑짤랑 꽃가마도 타 보고,
환갑잔치엔 아들 손주 큰 절이나 받으면서
한 평생 살다가 묻혀 가도록 내버려나 주었던들.

흙에서 나와
흙에로 돌아가며.
영원회귀운운 이야기는 없어도
햇빛을 서로 누려 번갈아 태어 나고.
자넨 저 만큼,
이낸 이 만큼,
서로 이물을 두어
따 위에 눕고.
사람과 사람과의
중복됨이 없이,
흙에서 솟아
흙에로 흩어져 돌아갔을,

인간기생(人間奇生)을 모를
사람들.

산정의 제왕······.
얼마나 좋은가.

그리고 나의 발 아래 저렇게 많이
산의 경사를 좇아 무진한 돌들이
천꼴 만색으로 붙어 있지 아니한가.

대지에는 지열도 영천도 솟는다 하데마는,
짐(朕)이 디디고 있는 이 산은 인육(人肉)으로 구축된
말하자면 기생탑일세.

해서 그들의 등가죽엔 강물이
흐르지 않는단 말야.

헌데 건 그렇고. 우스운 이야기는
따에 붙어 사는 그 버섯들의 살림살이 말일세.

그들이야말로 이런 따위,
저희끼리 눈 감고 아웅하는 격,
왕궁과 통치권엔 아랑곳 없으니까.

2차대전 저물어 가기 얼마 전의 이야길세.
두만강변 어느 촌락을 지남 길
한 할아버지로부턴 이런 이야길
들은 일이 있네.

우리하고 글쎄 무슨 상관이 있단 말요.
왜 자꾸 와 귀찮게 찝쩍이나 말요.
내 멀쩡한 사지로 땅을 일궈서
강냉이, 고구마, 조를 추수하고
옆 마을 해삼장 점북과 바꿔 오구,
시집 보내구, 장가 보내구, 잘 사는데,
글세 뭘 어떻거겠단 말이랑요.

그러나, 그들의 마을에도, 등가죽에도,
방방곡곡 벋어 온 낙지의 발은
악착스레 착안하여 수렁이 되었나니.

그렇다 오천년간 만주의(萬主義)는
백성의 허가 얻은 아름다운 도적이었나?

제 5 화

가리워진 안개를 걷게 하라,
국경이며 탑이며 어용학의 울타리며
죽 가래 밀어 바다로 몰아 넣라.

하여 하늘을 흐르는 날새처럼
한 세상 한 바람 한 햇빛 속에,
만 가지와 만 노래를 한 가지로 흐르게 하라.

보다 큰 집단은 보다 큰 체계를 건축하고,
보다 큰 체계는 보다 큰 악을 양조(釀造)한다.

조직은 형식을 강요하고
형식은 위조품을 모집한다.

하여, 전통은 궁궐 안의 상전(上典)이 되고
조작된 권위는 주위를 침식한다.

국경이며 탑이며 일만년 울타리며
죽 가래 밀어 바다로 몰아 넣라.

제 6 화

없으려나 봐요. 사람다운 사낸. 어머니, 어쩌면
좋아요. 이 숱 많은 흰 가슴, 텃집 좋은 아랫녁,
꽃잎 문 입술·····. 보드라운 대지 누워 허송
세월하긴, 어머니 차마 아까와 못 견디겠네요.
황원(荒原) 말 발굽 달리던 황하기 사내 찰코 그립어요.
어데요? 그게 어디 사람이에요? 기술자지.
어데? 그건 뭐 또 사람이에요? 제이급치차(二級齒車)라고
명패까지 붙어 있지 않아요? 어머니두.

저건 꼭두각시구, 저건 주먹이구, 저건 머리구.
별 수 없어요, 어머니, 저 눈먼 기능자들을
한 십만개 긁어 모아 여물 솥에 쓸어 옇구
푹신 쪼려 봐 주세요. 혹 하나쯤 온전한
사내 우려날지도 모르니까.

해두 안되거든 어머니, 생각이 있어요.
힘은 좀 들겠지만 지상에 있는 모든 숫들의 씨
죄다 섞어 받아 보겠어요. 그 반편들 껄.
욕하지 마세요. 받아 넣고 정성껏 조리해 보겠어요.
문제 없어요, 튼튼하니까!

제길할, 빈집뿐일세 그려. 주인은 없는데
하인 객들이 얼싸 붙고 닭 잡아라, 절 받아라, 난장이니 썅.

비로소, 말미암아, 바야흐로다?

거북등에다 집 짓고 늘어붙는 소라.
잠자는 코끼리 등에 올라 국경을 그어
놓고 다퉈쌌는 개미떼.

깊은 지옥의 아구리에 백지 한 장 깔고
행복한 곰의 눈.

쇠기둥과 가시줄로 천당을 지어 놓고
문 지키는 수고.

귀부인 발톱에 매니큐어를 칠해 주고
밥 얻어 먹는 전문가.

해 저문 바닷가의 구두 수선가씨,
단애(斷崖) 위의 이발사선생,
산록의 수렵가박사.

그만 돌아들 오시지,
삼간초옥 등 비친 창문이 기다리고 있는데.

매미는 언제까지 뜻 모를 소리만 울어 예는가.

온실 속서 울어 예는 매미는 무엇을 먹으려고
살아쌌는가.
노동은 머리 위에 나비 꽃이나, 한 마리 매미를
달기 위해, 열 두 해 긴 긴 헤월 밭 가는 돼지?

돼지는 노래하라,
밭을 갈면서.
씨를 뿌리라 한 알 한 톨
피 맺힌 말쌈으로.

돼지는 말씀하라,
밭을 갈면서.
예보하라, 날씨도.
실업(失業)케 하라, 왕도.

한 알 한 톨,
피맺힌 말쌈으로.

후화 (後話)

숱한 봄, 여름, 가을, 잊어진 세월
양지바른 분지 잡초의 떼는
무성케도 이루어 쓰러져 갔다.

무너진 살림살이 해마다 쌓여
마흔아홉 두께의 비옥한 층을 입었을 때,

그 곳에선 육신 같은 미근한 줄기가
아름다운 향기를 사지에 뿌리며
하늘거리는 요화(妖花)처럼 돋아나고 있었다.

한 그루 불전(佛典)을 꽃피우기 위하야
선사(先史) 오천년은 묻히어 갔고.

한 그루 피어난 성서의 지층에는
구십구억 창세인민(創世人民)의
몸부림 든 사상이 썩어 있었다.

우리들이 돌아가는 자리에선
무삼 꽃이 내일 날 피어날 것인가.

잡초의 무성을 나래 밑에 거느리며
칠천년 늙어 온 몇 그루 고목,

당신네 말쌈도, 지혜의 법열도,
문명의 행목도, 그대네 작업도,
늘어붙어 지층 이룰 갑충(甲蟲)의 무덤.

정신을 장식한 백화 만상여
몇만년 풀밭 이룬 인종의 가을이여.

흐무러지게 쏟아져 썩는 자리에서
무삼 꽃이 내일 날엔 피어날 것인가.

우주 밖 창을 여는 맑은 신명(神明)은
태양빛 거느리며 피어날 것인가?

태양빛 거느리는 맑은 서사(敍事)의 강은
우주 밖 창을 열고 춤춰 흘러갈 것인가?

2 # 4월은 갈아엎는 달 (1966년 4월, 조선일보)[ | ]

내 고향은
강 언덕에 있었다.
해마다 봄이 오면
피어나는 가난.

지금도
흰 물 내려다보이는 언덕
무너진 토방가선
시퍼런 풀줄기 우그려넣고 있을
아, 죄 없이 눈만 큰 어린 것들.

미치고 싶었다.
사월이 오면
산천은 껍질을 찢고
속잎은 돋아나는데,
4월이 오면
내 가슴에도 속잎은 돋아나고 있는데,
우리네 조국에도
어느 머언 심저, 분명
새로운 속잎은 돋아오고 있는데,

미치고 싶었다.
4월이 오면
곰나루서 피 터진 동학의 함성.
광화문서 목 터진 4월의 승리여.

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출렁이는 네 가슴만 남겨놓고, 갈아엎었으면
이 균스러운 부패와 향락의 불야성 갈아엎었으면
갈아엎은 한강연안에다
보리를 뿌리면
비단처럼 물결칠, 아 푸른 보리밭.

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그날이 오기까지는, 4월은 갈아엎는 달.
그날이 오기까지는, 4월은 일어서는 달.

3 # 껍데기는 가라 (1967년, 52인시집)[ | ]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4 # 고 향 (1968년, 창작과 비평 여름호)[ | ]

하늘에
흰 구름을 보고서
이 세상에 나온 것들의
고향을 생각했다.

즐겁고저
입술을 나누고
아름다웁고저
화장칠해 보이고,

우리, 돌아가야 할 고향은
딴 데 있었기 때문······

그렇지 않고서
이 세상이 이렇게
수선스럴
까닭이 없다.

5 # 좋은 언어 (1970년, 사상계 4월호 )[ | ]

외치지 마세요
바람만 재티처럼 날려가 버려요.

조용히
될수록 당신의 자리를
아래로 낮추세요.

그리구 기다려 보세요.
모여들 와도

하거든 바닥에서부터
가슴으로 머리로
속속들이 구비돌아 적셔 보세요.

허잘 것 없는 일로 지난 날
언어들을 고되게
부려만 먹었군요.

때는 와요.
우리들이 조용히 눈으로만
이야기할 때

허지만
그때까진
좋은 언어로 이 세상을
체워야 해요

6 # 강 (1970년, 창작과 비평 봄호)[ | ]

나는 나를 죽였다.
비 오는 날 새벽 솜바지 저고리를 입힌 채 나는
나의 학대받는 육신을 강가에로 내몰았다.
솜옷이 궂은비에 배어
가랭이 사이로 물이 흐르도록 육신은
비겁하게 항복을 하지 않았다.
물팡개치는 홍수 속으로 물귀신 같은
휩쓸려 그제사 그대로 물넝울처럼 물결에
쓰러져 버리더라 둥둥 떠내려 가는 시체 물 속에
주먹 같은 빗발이 학살처럼
등허리를 까뭉갠다. 이제 통쾌하게
뉘우침은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너무 얌전하게 나는 나를 죽였다.
가느다란 모가지를 심줄만 남은 두 손으로
꽉 졸라맸더니 개구리처럼 삐걱 ! 소리를 내며
혀를 묻어 내놓더라.
강물은 통쾌하게 사람을 죽였다.

7 # 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은 이길 것이다[ | ]

말 없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내 옆에는 네가 네 옆에는
또 다른 가슴들이
가슴 태우며
한 가지 염원으로
행진

말 없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내 앞에는 사랑이 사랑 앞에는 죽음이
아우성 죽이며 억(億)진 나날
넘어갔음을.

우리는 이길 것이다
구두 밟힌 목덜미
생풀 뜯은 어머니
어둔 날 눈 빼앗겼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오백년 한양
어리석은 자 떼 아직
몰려 있음을.

우리들 입은 다문다.
이 밤 함께 겪는
가난하고 서러운
안 죽을 젊은이.

눈은 포도 위
묘향산 기슭에도
속리산 동학골
나려 쌓일지라도
열 사람 만 사람의 주먹팔은
묵묵히
한 가지 염원으로
행진

고을마다 사랑방 찌갯그릇 앞
우리들 두쪽 난 조국의 운명을 입술 깨물며

오늘은 그들의 소굴
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은 이길 것이다.

8 # 어느 해의 유언[ | ]

뭐·······.
그리 대단한 거
못되더군요

꽃이 핀 길가에
잠시 머물러 서서

맑은 바람을
마셨어요

모여 온 모습들이 곱다 해도
뭐 그리 대단한 거
아니더군요

없어져
도리하며
살아보겠어요

맑은 바람은 얼마나 편안할까요.

9 # 오월의 눈동자[ | ]

지금 난 너를 보고 있지 않노라.
훈풍 나부끼던 머리칼
오월의 푸라타나스 가로(街路) 저 멀리
두고 온 보리밭 어덕을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노라.
바람이 기어드는 가슴
나뭇잎 피는 산등성에 서서
술익는 마당
두고 온 눈동자를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노라.
남해바다 멀리
한번도 나의 울 안에
춤춰본 적 없는
푸른 빛 희열에 찬 생의 향기를
그윽한 새 잎에 받들어
나는 지금 마셔 주고 있노라,
온 마음 밭으로 깊이깊이 들여마셔 주고 있는 것이노라.

지금 난 너의 눈동자를 보고 있지 않노라.
지나온 하늘
초록정원에 딩굴던
태양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고 있는 것도 아니노라.
학창시절의 호밀밭 전쟁이 뭉개고 간 꽃잎의 촉촉한 밤하늘을
회상하고 있는 것도 아니노라.
훈풍에 날리던 머리칼
산정을 돌아 오르면
온 세계의 아름다웠던
천만가지 머언 오월의 향기를
나의 피알 속에
상기 살아있는 피 한 방울 감격 속에서
이렇게 새 잎 타고 불어오는 바람 언덕에 서서
오늘도 내일도 그제도
머리다발 날리며
마셔보고만 싶었었노라.



 

1969년 4월 7일 간암으로 별세. 경기도 파주군 월롱산 기슭에 안장
1975년 『신동엽 전집』이 에서 출간되었으나 내용이 긴급조치9호 위반이라는 이유로 판매금지당함
1980년 『증보판 신동엽 전집』이 에서 간행됨
주요 시집으로 『아사녀(阿斯女)』(1963), 『{신동엽 전집』(1975),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1980), 『꽃같이 그대 쓰러진』(1989), 『금강』(1989),『젊은 시인의 사랑』(1989) 등||

10 같이 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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