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민족주의

  • 올림픽 개막기념 2004.9 연재물 "문화오딧세이"의 원텍스트

1 들어가며[ | ]

몇 가지 장점에 대한 온갖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근대 올림픽은 우리 인류가 지닌 많은 약점을 드러내놓고 보여주는 행사가 되어왔다. 올림픽은 ‘인류 평화’를 표면적 목적으로 내걸고 있지만 기실 평화는커녕, 오히려 평화가 가장 싫어하는, 평화와 가장 거리가 먼, 국가주의와 상업주의에 오염되어 왔다. 올림픽에서는 우리 근대인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 중 가장 질이 낮은 국가주의가 아무 부끄러움도 없이 춤을 추며 발가벗고 나다녔다.

20세기의 올림픽은 스포츠로 표현된 국가주의적 경쟁의 ‘종합선물세트’였다.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독일, 일본, 그리고 중국. 20세기를(설마 21세기도?) 학살과 전쟁으로 얼룩지게 했던, 심보 나쁘고 호전적인 제국(帝國)들이 앞장 서서 올림픽을 그렇게 만들어왔다. 그러자 한국, 북한, 루마니아, 터키 기타 등등... 이런 별로 힘없고 이름도 알듯 말듯한, 엽기적인 독재자가 통치하는 것으로 유명해진 그런 나라들도 부화뇌동하여 열심히 올림픽에 참여했다. 참여의 목적은 딱 하나, ‘개근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등상을 받는 것.

즉 ‘참가하는 데 의의가 있다’는 게 아니라 메달을 따고 시상식장에서 자기네 깃발이 오르고, 별로 예쁘지도 않은 그 나라 국가가 연주되기를 한없이 바라고 소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그들은 얼마 안 되는 국력을 쏟아붓고, 온갖 비장한 수사를 동원해서 중계방송을 하고 눈물 콧물을 짠다. 그렇게 되기 위해 어린 선수들을 ‘선수촌’에 감금ㆍ수용하여 그리스식이 아니라 스파르타식으로 훈련시킨다.

하기사 잔치라고 불러놓고는 힘센 지네들끼리 등수 갈라먹고 들러리나 서게 하라고 하니 그런 가난하고 약한 나라들이 가슴에 응어리를 갖게되는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러면 세상에 올림픽 같은 거 없다, 고 딱 외면하고 우리끼리 열심히 놀면 되겠는데 그것도 잘 안된다. 잔치판은 일종의 잔치판임에 분명하고 또 그 속을 들여다보면 아주 아기자기하거나 스펙터클하게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면 올림픽을 그들이 악용했다, 라든가 올림픽이 국가주의에 오염되었다, 라는 말 자체에 어폐가 있다. 왜냐하면 올림픽이라는 체전의 방식 자체가 ‘악용’에 걸맞게 딱 고안되어 있는 것이다.
철저히 경쟁하는 방식으로 대회가 운영되기 때문에 그것은 평화보다는 전쟁을 더 많이 닮아있다. 룰을 지킨다고는 하지만 처절히 경쟁하고 난 뒤에 예선탈락시키고 몇만 남겨 본선 진출하게 하고, 또 종국에는 1, 2, 3등 가리는 방식으로 짜놓고는 자, ‘평화가 느껴지지 않니?’ 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진정 평화를 위해서 그 제전이 열린다면 당연히 평화로운 방식으로 경기가 진행되어야 한다. 또한 금 은 동 즉 1, 2, 3등이 없어야 되고(4등은 뭐란 말이냐?) 특히 1등에 대한 특별대우도 없어야 한다. 개막식에서 국기를 앞세우고 입장하는 일이나, 경기장에서 국기를 들고 응원하는 일이나, 시상식장에서 국기를 게양하고 국가를 연주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그 우승의 영광은 그저 참가한 선수들의 몫이어야 하는 것이다.

문헌을 보니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인 그 쿠베르탱이라는 남작 자체가 애초에 대회를 창시한 목적이 별로 개운치가 않다. 그 돈키호테 같은 인물은 올림픽을 구상할 때부터 보불전쟁에서 패한 프랑스 국민의 사기 진작을 위한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올림픽이 오늘날처럼 처음부터 국가주의적 국제 행사의 유일무이한 자리를 갖게 된 것은 아니었다. 1928년 올림픽에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전까지 그것은 유럽과 미국 백인들의 잔치에 불과했고, 심지어 그저 세계박람회의 부대 행사인 적도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미치광이 히틀러가 1936년 베를린대회를 나치독일과 아리안민족의 위대함을 과시하는 대회로 만듦으로서 올림픽에서의 국가 간 경쟁은 필연적인 것으로 되어버렸다. 올림픽은 전쟁과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발전해온 것이다. 냉전 시대에 미국, 소련, 동독이 올림픽에서 어떻게 경쟁했었는지, 왜 어떤 나라들이 올림픽을 그렇게 개최하고 싶어했는지를 생각해봐도 올림픽의 성격은 금방 드러난다.

2 한국인의 올림픽[ | ]

‘키타이 쏘온’(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시상식장의 장내 아나운서가 손기정 선수의 일본식 이름을 이렇게 불렀다.)이 히틀러 앞에서 당당히 월계관을 써버린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부터 남북한 선수들이 손에 손을 맞잡고 ‘평화’ 다짐하여 입장했던 2000년 시드니올림픽까지, 20세기의 한국인들은 올림픽 때문에 참 많이도 울고 웃었다. 그러지 않았어도 좋으련만, 한국인의 얄궂은 운명은 그렇게 되어있었다.

세계 속의 당당한 일원이 되고 싶다, 되어야 한다, 는 민족주의적 당위와 강대국 틈바구니에 끼어 식민지와 골육상쟁의 처절한 경험까지 한 약소국이라는 현실 사이의 거리는 컸다. 스포츠는 그 거리를 메울 가장 좋은 매개로 인식되었다. 스포츠 속에서만 작고 가난한 조선인들은 우리를 짓밟고 괴롭혀온 양키와 로스께, 되놈과 왜놈과 당당히 맞서고 이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있었던 고구려도 아예 없었다 하는데 우리가 뭘 가지고 저 덩치 큰 자들로 하여금 ‘공한(恐韓)’하게 하겠는가? 오직 그놈의 축구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스포츠에 대해 품는 비상한 집착은 이런 ‘가난한 민족주의’와 긴밀한 연관이 있고 그 집착은 식민지 시대에 형성되어 오늘날 후손들에게까지 고스란히 물려졌다. 그러나 저 엄청난 경험인 ‘월드컵 4강’이 어떤 새로운 전기가 되었는지, 그 후과란 무엇인지? 월드컵 4강까지 올라감으로써 이제 좀 편하게 스포츠를 스포츠로서 즐길 수 있는지, 또는 그 허위인 ‘세계 4강’을 지키고 싶어서 더더욱 쌍심지를 돋구고 핏대를 세우며 ‘대한민국’ 외치게 될 것인지, 한국인들의 스포츠민족주의는 이번 아테네올림픽에서 시험대에 오른다고 볼 수도 있겠다.

3 1921년 극동올림픽 대회 - 국제 경쟁의 시작?[ | ]

식민지 시대 사람들에게 올림픽이 무엇인지는 다음과 같은 단 두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진작부터 조선인들도 올림픽대회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간 대항전인 올림픽에 식민지인은 참석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에서 발생하는 온갖 원망과 기쁨을 따라가 보기로 하자.
1896년에 시작된 올림픽이 현재와 같이 명실상부한 국제적 제전으로서의 꼴을 제대로 갖추게 된 것은 1928년 암스테르담대회가 되어서였다. 46개국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처음으로 여성의 참가가 허락되었고 아시아ㆍ아프리카 대륙 국가의 참가도 본격화되었다. 조선인들의 올림픽에 대한 관심도 이 대회를 계기로 보다 본격화되었다.

그 전에는 ‘극동올림픽대회’가 조선인의 관심을 끌었다. 정식명칭이 극동선수권대회(極東選手權大會, The Far Eastern Championship Games)인 이 대회는 필리핀에서 먼저 발의하여 1913년부터 2년 주기로 필리핀, 일본, 중국을 돌아가면서 열렸다. 이 대회가 2차대전 종전 후에 시작된 아시안게임의 전신이다.

1921년 대회가 한국인들의 관심을 많이 끌었다. 일본은 자국 대표를 선발하기 위해 경성에서도 1차 예선전을 치뤘고 육상 예선에 많은 조선인들이 참가했다. 10마일 경주 조선 예선에서 인력거꾼 김학순이 1등을 차지했는데, 정작 대회 본선에 김학순이 참가하지 못한 듯하다.
대신 이 대회에는 상해 조선인체육협회 소속이라는 동포 선수들이 반 마일 릴레이 등에 참가했다. 동아일보는 1921년 5월 30일자 1면에 장문의 사설을 써서 상해의 동포선수들을 격려했다. 시종 감격과 안타까운 심경의 쌍곡선을 보여주는 이 글은 당시 민족주의자가 가지고 있는 체육과 올림픽, 세계화에 대한 생각을 고루 잘 보여준다.

대회에 참가한 상해의 조선인들이 상해 임시정부가 파견한 선수들인 것 같지는 않다. 그저 그들이 상해 조선인체육협회 소속이라 했다. 그들이 조선인 ‘대표’로서의 상징성이나 실질적 대표성을 별로 갖지 않았다고 보는 게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이 대회는 ‘극동’을 표방하면서도 상해에 거주하는 미국인이나 영국인들의 스포츠 클럽의 참가도 허락했었다.

어쨌든 동아일보 사설은 조선인 선수가 ‘국제적 경기대회에 참가한 것은 금차(今次) 상해의 예로써 효시’라 규정했다. 그리고는 그 스스로의 규정에 감격하여 조선인 선수의 참가는 선수 개인과 조선 스포츠계의 영예일 뿐아니라, ‘조선인이 국제적 무대에 제(際)하여 열국인으로 더불어 기를 다투는 시작이라 할지니 실로 조선인 전체의 큰 기쁨이 되는 것’이라 했다. 감격의 근거는 ‘쇄국주의 하에 생활하여 왔으며 문약주의의 누습이 뼈와 살[骨體]에 투철하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관점이 전혀 없고 무용의 정신이 부족’한 조선 민족의 과거를 극복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왜 우리는 식민지가 되어야 했던가? 하는 문제에 대한 성찰이 조선인 자신에게로 향할 때, 우리가 지지리 못난 놈들이라 그렇다, 는 결론에 이르고 그 역사적 근거로 조선 왕조의 문약과 쇄국주의를 드는 것이 아주 일반적인 가학적 상식이 되어 왔음은 앞에서도 살핀 바 있다.

그러면서 사설은 올림픽 정신을 거론하여 고대 그리스인들이 국가 정책에 따라 올림픽 대회를 즐겼으며, 현대에 와서는 국가간의 화합과 체육의 공동발달을 위해 이 대회가 환영받고 있다고 해석했다. 국가주의에 올림픽을 연결시키고 하는 것이다. 이 국가주의는 세계 속에서의 나를 인식하여 세계주의를 달성하자는 다음과 같은 생각과 표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민족주의만이 세계주의를 가능하게 한다.
“오인은 차제에 조선운동가가 맹성(猛省)하며 조선 일반사회가 크게 각성하기를 바라노니 현금은 일 변두리[地局]에서 웅크리고 있을 때가 아니라 세계적으로 활약할 때”라는 것이다.

4 큰 운동회로서의 올림픽[ | ]

조선에서 ‘올림픽’이라는 말은 이렇게 국가간 체육 경쟁의 대명사이자, 규모가 큰 운동회를 대유하는 용어로, 그리고 궁벽진 곳에 조용히 살아온 조선인이 세계로 떨치고 나가야 할 무대의 대명사로 되어갔다.

1924년 6월 3일자 동아일보는 조선체육회가 주최하는 동아일보가 후원하는 전조선육상경기대회를 소개하며 ‘세계적으로 웅비하려면 육상경기대회에 참가하라, 조선청년의 원기를 일으킬 장쾌한 이 운동회, 세계 「올림픽」에 참가할 선수는 다투어오라’라는 제목을 뽑았다. 제목만 보면 이 대회가 올림픽 대표를 선발하기 위한 대회인 것 같으나 실은 아니었다. 그럴 자격이 조선체육회에는 없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이후부터는 ‘조선인의 운동계도 세계적으로 확대되어 갈 것이요, 극동올림픽이니 세계올림픽이니 하는 중대한 회합을 앞두고 있는지라 장래 세계적 운동회에 참가하여 영광의 월계관을 얻으려는 용장한 선수는 미리부터 이 운동회에 참가하여 재주를 단련하라’는 것이다.

1920년대 초에는 수없이 많은 ‘운동회’가 경향에서 열렸는데 1920년대 중반부터 올림픽은 큰 ‘운동회’의 대명사로 굳어졌다. 그해 6월말에는 조선신문사가 주최하는 ‘女子「올림픽」’대회도 열렸다. 이 대회에는 소학교와 중등학교 여학생들이 주로 참여했는데 경기종목은 ‘오십미’, ‘팔백미돌 리레’(800미터 릴레이) 등의 ‘튜랙之部' 경기와 ‘고도(高跳)ㆍ광도(廣跳)’ 같은 ‘필드之部' 경기와 스캐 등의 종목이 주로 열렸다. 그런데 이 ‘올림픽’ 경기의 관람은 여성에게만 허락했다. 여성 전용이며 그녀들만의 올림픽이었던 것이다. 이 대회는 국제적으로 여성의 올림픽 참가가 허용되지 않자 여성들만의 대회가 열렸던 데 착안했던 것 같다. 심지어 문학평론가 김기림은 1933년에 조선의 일간지들이 각각 3-4편 씩이나 되는 신문소설을 연재하며 경쟁한 현상을 두고 ‘신문소설 ꡔ올림픽ꡕ 시대’(ꡔ삼천리ꡕ 1933. 2)라는 말을 썼다.

5 운동회를 넘어서[ | ]

제1회 전조선육상경기대회는 1924년 6월에 개막되었다. 이런 대회를 통해서 조선의 체육은 1920년대 초반 인력거꾼들이 우승을 차지하던 ‘운동회’의 수준을 완전히 탈피해갔다. 대회 종료일(1924.6.17)의 동아일보는 경기 결과를 화보와 함께 대서특필하는 한편, 필드와 트랙 경기 각 종목 우승자의 기록과 세계기록ㆍ극동기록을 대조해 보여주었다. 1925년의 제2회 대회도 성황리에 개최되었는데 이 대회부터는 강령ㆍ대회규정ㆍ참가비ㆍ주의사항 등이 미리 널리 공표되었고, 또한 각 경기의 룰과 경기장 규격 등도 ‘세계 표준’을 따랐다. 동아일보에 게재된 이 주의사항을 잠시 살펴보자.

  • 선수는 필히 상당한 운동복을 당용(當用)하고 본회(조선체육회)로부터 수취한 번호표를 흉부에 부착하되 명료히 표시하게 함을 요함.
  • 선수는 장내에 무단히 출입함을 불허함.
  • 선수는 지정한 장소에 집합하여 소집원의 점명(點名)에 의하여 출장하되 이차를 점명하야도 출장시 아니할 시에는 기권으로 간주함.

선수들은 정해진 옷을 입고 마음대로 운동장에서 왔다 갔다 하면 안된다는 이런 것들은 지금 보면 모두 별 것 아닌, 너무 당연한 규정이다. 그러나 운동회를 생각해보면 이런 규정들이 왜 신문에 크게 게시되었는지 알 수 있다. 체육의 근대적 제도화가 완성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와중에도 지역의 ‘운동회’들은 여전히 활기있게 유지되었다.

특히 조선인들은 각종 트랙경기에 애정과 관심을 쏟았다. 수없이 많은 우수한 장거리 선수들이 1920년대말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전조선육상경기대회가 개시된 지 단 10년 만에 1936년에 손기정과 남승룡이 올림픽 마라톤을 제패하고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한국이 마라톤 강국이었던 것은 절대로 우연이 아닌 것이다.

1927년 8월 29일자 동아일보는 서울 시내 4대 신문사, 즉 동아ㆍ조선ㆍ매일신보ㆍ중외일보의 ‘운동 기자’들이 시내의 한 음식점에 모여 ‘운동 기자단’을 결성하고 ‘기사의 정선(精選)과 사계의 통일’을 도모키로 했다는 기사를 싣고 있다. 그러면서 기자단 결성의 취지를 현재 ‘조선의 운동계가 바야흐로 융성하여 그칠 바를 모르는 상황에 부응하기 위함’이라 썼다. 이처럼 192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체육에 대한 조선인들의 점점 높아지고, 각종 운동경기대회가 언론의 중요한 컨텐츠로 되면서 그 관심은 증폭되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체육입국(體育立國)의 기치가 본격적으로 오르고, 나라는 작아도 체육에는 강한, 즉 ‘매운 고추’인 한국인들의 면모가 본격화되는 형국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스포츠는 당시 민족개량주의, 또는 문화적 민족주의가 찾아낸 아주 적절한 소재였던 것이다.

1927년의 상해 극동올림픽대회, 1928년의 암스테르담 국제올림픽대회를 거치면서 이런 움직임은 더욱 가속화된다. 이 시기에 일본 또한 스포츠와 국제대항전에 대한 관심과 열의를 높여나가고 있었다. 일본은 1927년 극동올림픽 대회에서 주최국 중국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였는데 사실 1925년 대회에서만 하더라도 일본은 구기 종목 등에서 당시 아시아의 스포츠 강국이었던 필리핀에게 참패를 당했었다. 그러나 일본은 완전히 달라지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군사력과 경제력이 그러했듯, 곧 미국 독일과 자웅을 다투는 세계 톱 클래스의 체육 강국이 될 전망이었다.

일본 체육의 세계화에 대해서도 조선인들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일본이 암스테르담 올림픽 선수단 참가 예산을 8만원에서 12만원까지 올리는 과정에 대해서도,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부터 일본에 의해 올림픽에 ‘황화(黃禍)’가 닥칠 것이라는 독일 신문의 보도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완연히 뜨거워진 전국적인 체육열, 높아진 수준과 노하우에도 불구하고 역시 한국인 선수가 암스테르담 올림픽대회에 참가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서울의 각 일간지마다 암스테르담 올림픽 대회의 개막부터 종료를 상세히 보도했다. 동아일보 1928년 8월 2일자 사설은 참가하지 못한 섭섭함을 이렇게 돌려서 말하고 있다.

“조선은 아직 국제경기를 수입한 지 일천한 관계 외 기타 모든 정치적 사회적 환경으로 인하여 세계적으로 진출을 꾀할 이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또한 어느 민족 어느 때를 물론하고 다 그러하지마는 그 중에 더욱 운동경기 같은 것은 정치적 사회적 배경이 없어 가지고는 도저히 융성하기 어려운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다.”

우리 실력이 약하기도 하지만 환경이 허락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안타까움은 서구의 식민지인 국가들과 유색인종들이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선전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 증폭되었을 것이다. 이 대회에서 인도가 하키에서 우승하고 이집트가 축구에서 4강에 오르는 한편, 필리핀과 일본도 선전했다. 사설은 ‘우리의 처지가 비록 어렵고 우리의 힘이 비록 미약해서’ ‘거국적으로 많은 선수를 올림픽에 진출시키지 못한다 해도 누르미 같이 조선을 세계에 빛낼 자 있기를 절실히 바란다’고 맺었다. 누르미는 14번의 세계기록을 수립하여 별명이 ‘달리는 인간기계’라는 핀란드의 육상선수이다. 핀란드는 강대국은 아니었지만 누르미 같은 단 하나의 걸출한 스포츠 영웅 때문에 올림픽에서 위상이 달라졌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누르미는 준비되고 있었다.

6 김은배의 대활약[ | ]

앞서 말했던 대로 손기정ㆍ남승룡의 세계 제패는 결코 어느날 갑자기 온 일이 아니었다. ‘조선의 자랑’은 손기정 이전에도 있었다. 그는 바로 마라톤 선수 김은배였다.

손기정처럼 육상 명문 양정고보 소속 선수였던 김은배는 1931년 10월 18일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제7회 조선신경대회(朝鮮神競大會)에서 당시 세계최고기록을 무려 5분이나 단축하는 2시간 26분 12초라는 경이적인 기록으로 우승했다. 이 기록은 일본 최고기록보다도 9분 12초가 빠른 기록이었다. 코스나 거리가 표준에 맞춰져 있지 않다가, 마라톤 경기를 26과 4분의1마일(즉 42.195km)의 정규코스 경기로 통일하고 난 5년 이래, 한국선수들은 일본인 선수를 물리치고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엄청난 속도로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었다.

김은배의 기록 경신이 갖고 있는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1931년 10월 20일자 동아일보 사설은 ‘조선민족이 진취적이지 않고 고식(姑息)이 전인민의 사상처럼 되어 국제무대의 은자였으나 최근 점차 진취적 사상이 보급ㆍ실행되어 특히 운동경기에 있어서는 장족적 진보의 감이 있었다’고 배경설명을 한 뒤, 김은배의 기록이 ‘조선인의 천품상 또는 기질상의 결함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말했다.

주입되거나 에서와 같이 스스로 내면화된 민족적 열등의식 이는 일종의 허위적인 이데올로기 아닌가? 남과 비교할 때만 생기는...
을 고치는 데 마라톤이 중요한 치료제였다는 것이다. 이후 김은배는 중요한 스타가 된다. 그의 회고록이 신문에 실렸으며 조선체육회ㆍ조선운동기자단ㆍ고려육상경기회 및 양정학교 동창회 등이 합동으로 김은배에게 상을 수여했다. 1931년 11월 14일에 열린 이 식장에는 양정고보 교직원, 학생과 각계 유지들이 참석했는데, 윤치호ㆍ안재홍ㆍ송진우 같은 거물들이 축사를 했다.

그리고 김은배는 권태하와 함께 1932년 7월 31일 오전 7시반(한국시간) 개막된 LA올림픽 일본 대표선수단의 일원이 되었다. 조선 전 지역에 큰 가뭄 피해가 일어났고 방학을 맞은 대학생들이 대규모 브나로드 운동 즉 농촌계몽운동을 펴려 떠난 한여름이었다.
이때 동아일보는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전국을 횡단하는 마라톤 경기를 열었다. 이는 김은배ㆍ권태하의 마라톤 출전에 맞춘 기획행사였다. 두 선수가 LA에서 출전할 때 서정국과 황자룡이라는 두 선수가 부산에서 서울로 골인하게끔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8월 6일자 동아일보는 ‘양군의 이번 장거로 말미암아 양 용사를 보낸 우리 해내의 마라손열은 안과 바깥이 서로 응하여 일약 마라톤 왕국 건설에 더욱 큰 횃불을 들었다’고 쓰고 있었다. 그리고 8월 8일 오후. 호외가 뿌려져 김은배가 마라톤에서 6위에 입상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같이 출전한 권태하는 9위 일본인 진전(津田)은 5위를 차지했는데, 이 세 사람이 팀을 이뤄 펼친 작전이 두고 두고 문제가 되었다. 당시 8월 10일자 동아일보는 세 선수가 페이스를 맞춘 것이 오히려 김은배가 더 좋은 기록을 내는 데 방해가 되었다는 것이 세평이라고 소개했고, 권태하가 경기 중에 일본인 코치의 지시를 어기고 팀 작전대로 하지 않아서 일본이 1936년 베를린마라톤에 조선인 선수 2명이 출전하는 것을 회피하고 싶어했다는 설도 있다.

7 아, 1936년 베를린[ | ]

이런 전사를 보면 1936년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제패나, 그 우승이 조선 사회에 불러일으킨 엄청난 신드롬과 흥분이 이해가 된다. 그리고 그 신드롬과 흥분이 문제의 ‘일장기 말소 사건’도 만들어냈다. 일반 민중들로부터 식민지 부르주아와 언론계 및 문화계, 즉 조선 전체가 엄청난 일을 벌일만한 준비가 단단히 되어 있었던 것이다.

손기정은 1936년 6월 1일 동경에서 일본 마라톤 팀과 함께 장도에 올라, 서울ㆍ신의주ㆍ시베리아를 경유하고 동유럽 땅을 거쳐서 베를린으로 갔다. 손기정과 남승룡 외에도 축구 대표의 김용식, 농구의 이성구ㆍ염은현ㆍ장이진, 권투의 이규환 등 총 7명의 조선인 선수가 이 대회에 참가했다. 무려 7명이나 참가했으니 거의 소원을 푼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참가 못해서 섭섭했던 감정은 승리로 풀면 될 것이었다.

8월 1일에 동아일보는 「올림픽 대회」라는 제하의 사설을 써서 「나가서 싸와서 익이고 도라오라」고 격려했고, 같은 날 조선중앙일보도 「최후의 영광을 목표로 백련강(百鍊鋼)의 칠 선수 진두(陳頭)에 용약(勇躍)」이라는 큼직한 기사를 내보냈다.
그 뿐만 아니라 나중에 ‘일장기 말소 사건’의 두 주역이 된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는 속보 경쟁 체제를 갖추고 전례 없이 많은 비용과 인력을 들이고 있었다. 특히 동아일보는 독일로 경기를 보러 간 전 마라톤 선수 권태하와 육상경기협회 명예비서 정상희, 그리고 독일 유학생인 유재창 등을 임시 통신원으로 임명하고 베를린에 있는 배운성이라는 화가에게 화보를 촉탁했으며 직접 손기정 남승룡 두 선수에게 격려 전보도 쳤다.

동아일보의 경쟁자는 단지 조선 신문사들만이 아니었다. 한국 민간신문과 달리 일본 신문들은 대규모 취재단을 파견할 수 있었고 더 발전된 속보 체제를 갖고 있었다. 특히 오사카 마이니치(大阪每日)ㆍ오사카아사히(大阪朝日) 신문은 국내에도 독자가 많았는데, 이 신문들도 연일 호외를 발행하며 올림픽 소식을 알리고 있었다. 8월 2일에는 개막했다고, 8월 3일에는 육상의 촌사(村社)가 4위에 입상했다고, 8월 5일에는 전도(田島)가 동메달을 땄다고 호외를 찍었다. 일장기말소사건은 이러한 언론사 사이의 경쟁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손기정도 준비된 대스타였다. 그는 1932년에 양정고보에 입학하자마자 두각을 나타냈고 바로 학교 선배 김은배의 라이벌이 되었다. 특히 1934년부터 모든 육상대회에서 1위의 자리에 오르며 기록을 갈아치우기 시작하였다. 또한 1935년에 열린 전일본마라톤대회, 전조선마라톤대회, 명치신종대회에서 연이어 우승하고 올림픽 대표로 확정되면서부터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운명의 1936년 8월 9일. 손기정은 30km지점부터 1위로 나서고는 한번도 선두 자리를 놓치지 않고 여유있게 우승을 차지했다.
8월 10일부터 이 소식이 알려지고 난 뒤에 일어난 신드롬을 다 말하기 어렵다. 잡지 <> 1936년 11월호는 ‘삼천리 특별 시보, 동아일보는 언제 해금되나’를 싣고 손기정 올림픽 우승 이후에 일어난 신드롬과 일장기 말소 사건의 추이를 정리해 놓고 있는데 이 정리만 대충 따라가보자. 손기정 우승, 뉴스가 전해지자 말자 당일 심야까지 전화통을 붙잡고 앉았던 각 신문사 편집국원들은 만세를 불렀고 신문사들은 곧 호외를 연발했다. 그리고 8월 11일부터 신문들은 그야말로 화려하고도 장엄한 지면을 만들어 ‘수십만 독자의 열광하는 가슴에 기름을 부었다.’

손기정이 나온 신의주 제일보통학교에서는 8월 11일에 깃발 행진을 했고 손기정이 다니던 모교 양정고보에서는 전교생들이 모여 ‘손군 만세’를 불렀다. 평안북도 도지사가 손기정의 친가에 청주 한 통을 축하로 보냈으며, 각지 유력 인사와 단체들도 축하 전문을 베를린이나 신문사에 보내기 시작했다.

8월 11일 동아일보만 하더라도 전 지면의 반 이상을 써서 「세계 정패(征覇)의 개가」 「영성(永聖) 불멸의 성화」 「근역(槿域)에 이식되는 감람수(올리브나무)」, 「인류 최고의 승리」, 「힛트라 총통과 악수, 최고대에 손군 등석」, 「그 두상에는 광망찬연한 월계관」, 「승보는 전파를 타고 전세계에」 등의 기사를 화보와 함께 내보냈다. 그날 동아일보 사설은 다음과 같은 감격에 겨운 목소리를 담고 있었다.

“양군의 우승은 즉 조선의 우승이요 양군의 제패는 즉 조선의 제패이다. 조선은 양군에 불행을 여(與)하였으나 양군은 조선에 갚는 바가 있었다. 조선의 인민은 이 뜻을 알고 배우고 또 모두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 (...) 지금 손남 양군 용사의 세계적 우승은 조선의 피를 끓이게 하고 조선의 맥박을 뛰게 하였다. 그리고 한번 기하면 세계라도 장중(掌中)에 있다는 신념과 기개를 가지게 하였다.”

손기정의 우승으로 인해 1920년대 이래 동아일보를 비롯한 문화민족주의자들이 앞장서서 가꾸어온 스포츠민족주의는 드디어 완성을 보게 된 것이었다. 너무 흥분한 동아일보는 8월 13일에는 상당히 선동적인 제목의 사설 ‘청년이여 일어나라, 세계적 조선에의 기원’를 실었고, 이어 14일 ‘손남 양군의 학자 보장, 의의 깊은 호거(好擧)’, 15일 ‘체육관을 건설하라 세계 제패의 차 기회에’ 등의 사설을 연이어 내보냈다.

대중의 열기도 식을 줄 몰랐다. 전국 각지에선 우승 축하회와 깃발 행렬과 연설회가 열렸으며 최남주, 현준호 같은 기업가가 거액의 장학금을 내놓았으며 양정고보 동창회에서는 세계 정패 기념탑 건설 계획을 세웠고 다른 지역에서도 우승 기념 체육관과 동상을 세우기로 했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손기정을 입에 달고 다니자, 콜럼비아 레코드사는 손군 세계 제패 기념 노래를 취입했고, 동양극장의 「마라손 왕 손기정군 만세」라는 연극도 흥행에 성공하고 있었다.

민족주의와 상업주의가 버무려진 채 서로 상승작용하며 8월의 신드롬을 걷잡을 수 없이 뜨겁게 확산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터져나온 일이 바로 일장기 말소 사건이었다.
일장기 말소 사건은 조선의 문화민족주의가 최후로 일제와 충돌한, 내지는 식민지부르주아가 최후로 일본에게 반항한 사건이라 할 만하다. 이후 이들은 조선총독부에 제반 정책에 순응하게 된다. 그 여름에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전 조선 민중이 손기정 열병에 걸려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일장기 말소 사건의 후과는 너무 컸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 뿐 아니라 조선일보사를 제외한 거의 전 언론계가 타격을 입었다. ꡔ신동아ꡕ도 9월호부터 발매정지되었으며 주간은 구인을 당했다. ꡔ신가정ꡕ은 삭제 처분을 당하고, ꡔ아히 생활ꡕ이나 「기독신보」도 압수 조치를 받았다. 당시 미나미 지로 총독은 한국에 막 부임한 상태였는데, 길을 잘 들여놓기 위해서라도 강경한 대응이 필요했던 듯하다.

일장기 말소 사건에 대한 논란이 지금도 있는데 이 사건은 분명히 민족주의적 동기로 시작되었다. 동아일보가 스스로를 ‘민족지’라 자랑하는 것은 과장이 있지만, 적어도 일장기 말소 사건에서만큼은 동아일보가 한 중심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조선중앙일보와 그 외 언론사가 이 사건을 함께 만들었지만 동아일보가 가장 심한 조치를 받은 것이다.

거기에 조선 언론사들 사이의 경쟁과 일본 신문의 신속성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는 점도 사건의 분명한 요소였다. 또한 일장기 말소를 주동한 이길용이라는 탁월한 스포츠 기자가 가진 사상이나 성향도 빼놓기 어려운 사실이다. 동아일보 사주측은 사건을 수습하고 ‘반성의 자세를 보여’ 복간되기 위해 자진해서 이길용 등을 해고했다. 또한 동아일보가 정간 조치를 당할 때 조선중앙일보가 ‘자진해서’ 신문을 휴간하기로 결정했다는 점도 기억되어야 한다.

그리고 동아일보와 중앙일보가 장기간 발행되지 못한 탓에 조선일보가 챙긴 반사 이익도 대단했다는 것도 빼놓기 어렵다. 두 달 사이에 두 신문의 독자 상당수가 조선일보에 흡수되었고, 광고 수입도 엄청나게 늘어나서 1936년 가을 조선일보는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중앙일보는 기업 자체가 흔들릴 정도로 타격을 입고 있었으며 동아일보 또한 거액의 손해를 보았다.

8 일본은 왜?[ | ]

그런데 과연 일본은 손기정 혹은 남승룡이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둚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전 조선인의 민족주의적 열광을 미리 예상하지 못했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 일단 이런 대답이 가능하다. 군국주의화되며 추축국의 일원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일본은 1940년 올림픽을 동경에 유치해놓고 있었다. 일본은 ‘다음 개최국’이었기 때문에 베를린올림픽에 국력을 쏟아부었고, 그래서 ‘좋은 성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용의가 있었다. 손기정과 남승룡 외에도 축구 대표의 김용식, 농구의 이성구ㆍ염은현ㆍ장이진, 권투의 이규환 등 총 7명의 조선인 선수가 이 대회에 참가했다.
물론 손기정과 남승룡이 일본 선수들보다 훨씬 좋은 기록을 갖고 있었다. 한데 일본은 한 나라 당 출전 선수가 3명인 베를린대회에 손기정과 남승룡 외에 2명의 일본인 선수를 더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어이없게도 현지에서 단축마라톤을 해서 한 선수를 제외시키고자 했다. 결과는 일본인 선수가 제외되는 걸로 귀착되었지만 손, 남 두 조선인 선수가 같이 출전하는 것을 최후까지 꺼렸다고 해석될 여지가 충분한 일이다.

어쨌든 초기에는 일본인들 전체가 손기정의 우승을 ‘순수한’ 마음으로 기뻐했던 것 같다. 미나미 총독이나 우가키 전총독이 축하연에서 기뻐 축배를 드는 광경이 오사카마이니치 신문 등에 실렸고 일본 각의에서도 내각각료 전체가 손기정을 칭찬하였다 한다. 그러나 일장기 말소 사건을 계기로 분위기는 확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특수성이 승리의 축배를 민중적으로 들기를 꺼리게 하였으니 손기정 우승에 대한 감정이 민족적 감정으로 전화하기 쉬운 것을 간취한 경무당국’에서는 계획되었던 모든 축하회와 기념 체육관 설립 운동, 축하 연설회를 금지시켰던 것이다.
손기정은 열기가 거의 가라앉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두 달 뒤에야 양정고보 교복을 입고 귀국했다. 일본이 그의 귀국을 막은 것은 아니었다.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낸 선수들을 일본은 세계여행을 시켜주었다. 유럽을 구경하고 수에즈운하를 건너 인도와 홍콩 마카오를 거쳐 요코하마를 통해서 일본에 도착하고 10월 8일에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손기정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일경의 손에 이끌려 남산에 있던 신사부터 참배해야했다. 그의 귀국은 아무래도 민족주의적 열기에 불을 지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올림픽이 세계인의 상호 이해와 우호를 증진시키는지 아테네올림픽을 지켜볼 일이다. 이번 올림픽에서 한국 팀은 세계 10강에 재진입하는 게 목표라는데 그것도 좋지만, 시드니에서처럼 남북한 선수들과 응원단이 하나가 되는 광경을 한번 더 봤으면 좋겠다.

  • 이 글에서 손기정 관련 부분은 최근 세종문화회관에서 손기정 기념 전시회를 연 강형구 화백의 조언과 그의 책 <<손기정이 달려온 길>>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음을 밝혀둔다.

9 # 촌평[ | ]

약간 수정했습니다. 손기정 붐에 대해 알게 된 것이 새롭고, 역시 한국은 아직도 근대화중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글이었습니다. '힛트라' 총통과 함께 있었던 손기정 할아부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 거북이 2004-8-18 1:24 pm

10 같이 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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