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기타 겐파쿠

1 개요[ | ]

Sugita Genpaku ( 1733 ~ 1817 )
杉田 玄白(すぎた げんぱく)
스기타 겐파쿠

Sugita Genpaku.jpg

2 ??[ | ]

ꡔ 해체신서 ꡕ를 번역한 스키타 켄파쿠의 집안은 원래 네덜란드 류의 외과를 업으로 삼던 가문으로 스키타도 그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 업을 이었다. 스키타는 17세에 막부의 의관(醫官)이었던 니시 켄테츠(西玄哲)에게서 외과를 배우고 그뒤 오래동안 의관으로 일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특히 네덜란드 해부학서에 나타난 그림이 실제 인체의 구조와 일치함에 감탄하여 해부서의 번역을 결심하게 되었다.
1771년 3월 4일 에토의 북쪽 교외에 있는 코즈캅하라(小塚原)의 형장에서 아오치 야바바(靑茶婆)라는 여자 사형수 시체의 해부가 이루어졌다. 스키타는 네덜란드 어로 된 해부학서를 가지고 참관하였는데 이 책은 독일인 쿨무스(Johann Adam Kulmus)1)의 저서를 네덜란드 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이 책은 그림을 주로 한 것으로, 해부도에 간략한 설명이 붙어 있는 책이었다. 스키타는 형장에서 이루어진 해부를 지켜보며 인체의 내부를 자신의 눈으로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본 것과 네덜란드 의서에 나오는 그림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한의서들에 나오는 오장육부와 12경락에 잘못된 것이 많음을 알게 되었다. 그 날 돌아오는 길에 스키타, 마에노 류타크(前野良澤, 1723-1803), 나카카와 준안(中川淳庵)은 그들이 본 네덜란드 해부학서를 번역하기로 결심하였다. 하루도 이를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들은 다음날인 3월 5일 텟포우주(鐵砲洲)에 있는 마에노의 집에 모여 책을 번역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스키타가 이 책을 처음 입수한 것은 1771년 봄으로 그는 영주에게 부탁하여 이 책을 살 수 있었다. 따라서 그로서는 책임을 지고 이 책을 실제로 사용할 수 있도록 번역할 뜻을 세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참고할 사전도 없는 상태에서 마에노의 네덜란드어 실력에 의지하여 책의 번역이라는 큰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마에노는 토요타나카즈한(豊田中津藩)의 오크다이라코우(澳平候)를 섬기던 의자(醫者)로 그때까지의 학문 계통은 고의방2)에 속했다. 그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백부 미야타 젠탁(宮田全澤)에 의해 길러졌다. 그가 네덜란드 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40세가 되어서였다. 사실 번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데에는 마에노의 공이 가장 컸다고 할 수 있다.
스키타는 와카사(若狹)의 코하마(小兵) 번주 사카이 코우(酒井候)의 시의(侍醫)로 있었으며, 어려서는 니시 켄테츠로부터 네덜란드 외과를 배웠으나 당시로서는 서양의 학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스키타는 처음에는 네덜란드 어를 전혀 알지 못했으나 일단 번역사업이 시작되자 맹렬한 추진력을 발휘하여 이 일을 진행시켜 나갔다.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의 막막함을 “노와 키도 없는 배를 타고 대양에 나온 것과 같았다. 다만 질려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그는 회상하였다. 또“1년 정도가 지나자 번역어도 점차 많아졌고 책을 읽어나감에 따라 자연히 그 나라의 사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중에는 하루에 10행 혹은 그 이상을 특별한 노력이 없이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물론 마에노가 그때까지 쌓아놓은 네덜란드 어의 지식이 없었으면 번역사업이 성공할 수 없었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스키타의 추진력이 없었으면 또한 ꡔ 해체신서 ꡕ의 번역은 이루어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 번역사업의 다른 협력자로는 나카카와 준안, 카츠라카와 호슈(桂川甫周), 미네하루 야수(嶺春泰), 카라스야마 쇼우엔(烏山松園), 키리야마 쇼우테즈(桐山正哲) 등이 있었다. 나카카와는 스키타와 같은 고향 출신으로 원래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으며 특히 본초학에 정통하였는데 이 번역사업에는 처음부터 참여하였다. 카츠라카와는 네덜란드 류 외과를 가업으로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막부의 의관으로 있었는데 이 번역사업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ꡔ해체신서ꡕ는 본문 4권, 해부도가 실린 그림책 1권 등 모두 5권의 책으로 1774년 8월에 출판되었다. 이것은 스키타가 번역의 뜻을 품은지 3년 반 뒤이고, 번역 작업을 시작한지 1년 반이 지난 때였다.
책을 번역하면서 부딪힌 가장 큰 문제는 의학용어들의 번역이었다. 그들은 이를 위해 불경을 처음 산스크리트 어(팔리 어)에서 한문으로 번역한 중국이나 인도 승려들의 경우를 참고하여 용어 번역의 몇 가지 원칙을 정하였다. 첫 번째는 ‘번역(飜譯)’, 즉 대역(對譯)으로 네덜란드 어에 해당하는 단어가 일본어에 있을 경우에는 이를 그대로 쓰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의역’, 즉 의미에 따라 번역하는 의역(意譯)인데 이는 네덜란드 어에 대응하는 일본어가 없을 경우, 그 원래 말의 의미를 따져 이와 유사한 새로운 말을 만드는 것이다. 세 번째는‘직역’으로 이는 앞의 두 가지 원칙으로도 번역이 어려울 경우, 그 네덜란드 어와 유사한 한자어의 음을 따라 번역하는 음역(音譯)이었다. 그들은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새로운 용어들을 많이 만들었는데 지금 널리 쓰이는‘신경’이라는 말도 그들이 처음 만든 말이다. 신경이라는 말이 쓰이기 전 남만의학이나 홍모의학에서는‘수근(髓筋)’이나‘세이누(世奴)’라 하였다. 세이누는 네덜란드 어의 ‘Zenuw’의 음을 따서 한자로 표기한 것이었다. 스키타는 신기(神氣)의 신(神)과 경맥(經脈)의 경(經)을 따서 새로운 말을 만들었다.
ꡔ해체신서ꡕ는 쿨무스의 책을 주로 하여 번역된 것이지만 다른 책의 내용들도 참고로 하였다. ꡔ해체신서ꡕ에는 덴마크의 해부학자 카스파르바르톨린(CasparBartholin,1585-1629), 독일에서 태어난 파도바 대학 교수 베슬링, 네덜란드 인으로 암스테르담에서 개업의로 있던 블라카르트(Steven Blakaart, 1650-1702), 그리고 해부학자 겸 외과의로 산과용 겸자(鉗子)를 발명한 것으로 유명한 팔핀(Jean Palfyn, 1650-1730) 등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ꡔ해체신서ꡕ의 그림도 몇 가지의 해부학 서적과 외과서에서 취한 것이었다. 이것을 보아 ꡔ해체신서ꡕ가 나올 무렵에는 많은 종류의 서양 해부학서가 일본에 들어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거기에는 네덜란드 어뿐 아니라 라틴 어나 독일어로 쓰여진 책들도 있었다. 한가지 밝혀둘 점은 ꡔ해체신서ꡕ는 일본어가 아니라 한문으로 번역되었다는 점이다. 대신 일본인들이 읽기 쉽게 구독점을 찍어 놓았다.

3 같이 보기[ | ]

4 참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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