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를 네자리마다 찍어라

1 # 쉼표를 네자리마다 찍어라[ | ]

요즘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것에 대해 스스로 묻기 시작한 것 같다. '연구공간 수유+너머'를 비롯해 몇몇 연구자들이 근대성에 대한 연구서를 조금씩 펴내고 있고 시간이 좀 지났긴 했지만 '한국의정체성'이나 '한국의 주체성'같은 책들이 꽤 팔려나가기도 했으니 말이다. 스스로가 누구인가에 대해 묻는것이 근대성이라면 우리는 이제 근대화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누구인가를 묻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나라도 좀 살만해졌다는 말이 될까? 여러가지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

어쨌든 우리에 대해 묻는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라 다행스럽다. 그 분위기에 올라타 나도 한가지 제안을 해보고자 한다. 그 제안은 숫자 쉼표(,)를 네자리마다 찍도록 하자는 것이다. 왜 이런 주장을 하는가에 대해 적고 예상되는 반론 세가지에 대한 답변을 적어보겠다.

  • 세자리는 편하지 않다.

쉼표를 세자리마다 끊어읽는것에 대해 당혹스럽게 생각한 것은 고등학교때였던 것 같다. 긴 자리 숫자를 보고 항상 끝에서부터 일십백천만 세어가며 읽던 나는 도대체 저놈의 쉼표는 뭐하는 놈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도대체 왜 찍는걸까. 숫자들이 나란히 있을 때 이쁘게 보이게 하려고 찍는걸까. 별로 도움도 되지 않는데...'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어 수업시간에 긴 숫자를 천(thousand)과 백만(million)으로 끊어읽는 것을 보고 갑자기 알게되었다. 아 이것은 서양인들이 숫자를 읽기 편하게 하기 위해 찍은 것이구나.

불편한건 당연했다. 만, 억, 조...로 끊어지는 시스템과 천thousand, 백만million, 십억billion으로 끊어지는 시스템은 1,000과 1,0000에서 보이듯 한자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숫자가 커질수록 두자리, 세자리가 달라지게 된다. 내가 머리가 나빠서 나만 매번 세고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난 주변에서 자리수 세고있는 사람들을 흔히 본다. 그렇다면 뭔가 크게 잘못되어있는 것은 아닌가.

이것의 고착과정은 모르긴해도 다음과같은 경로를 밟았을 것이다. 구한말 조선에 들어왔던 열강들이 사용하던 것을 답습했거나 혹은 이후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도 무비판적으로 사용되고 있던 세자리 쉼표찍기가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고착되었고, 그것이 이후 먹고살기 바빴던 독재시절들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사용되었다라는 우리 역사의 전형적인 왜곡 경로 말이다.

주장은 간단하다. 그럼 반론을 생각해보자.

  • 이미 널리 쓰고있지 않는가.(사회성)

언어에는 사회성이라는 것이 있다.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고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는 것이 표준이다라는 것 말이다. 그 사회성때문에 내가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좆나게' 라는 말은 '졸라'라는 변형태와 함께 조만간 국어사전에 오를지도 모른다. 내 보기에 그 말은 이미 사회적으로 하나의 의미층을 꿰차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 세자리 쉼표찍기는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 표준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는 네자리마다 찍을테야'라고 생각해서 혼자 네자리마다 쉼표를 찍고다니면 금방 주변의 철퇴를 맞게된다. 그 철퇴는 당연하다. 그들로 하여금 혼란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규격이 다른 나사를 이용해 기계를 조립하려면 나사구멍에 맞지 않아서 금방 다른 나사로 바꿔야 하듯.
나는 개인적으로 그런 철퇴를 맞은 기억이 여러번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사회성을 넘어서는 문제다. 왜냐면 우리의 언어습관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잘못된' 표준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싫어한다고 해도 '졸라'라는 말을 바꾸자고 하기는 어렵다. 5천만의 머리속에 들어있는 의미 체계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졸라'라는 말 대신에 다른 단어를 넣으면 그 문장은 대번에 생기를 잃은 문장이 되는 경우도 많을 것이고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졸라'라는 단어를 개인적으로 안쓰는 것 뿐이다.
그런데 쉼표를 네자리마다 찍자라고는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언어생활을 불편하게 만들고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자리마다 찍고 그것을 읽는 순간 당신은 묵은 똥이 내려가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다음의 숫자를 한번만 읽어보시라.

1,234,567,890
12,3456,7890

앞쪽의 경우를 보자마자 저게 12억이라는 것이 금방 떠오르는가? 금방 떠오른 사람은 재무분야에서 일을 하거나 경제지를 열심히 읽는 사람이거나 할 가능성이 높다.

  • 국제시대의 표준 아닌가.(광의의 사회성)

지금의 세계는 서구 주도의 세계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 세자리 쉼표는 국제표준이다. 요즘은 국제화시대이고 지금도 잘 쓰고 있는 국제표준을 바꾸는 것은 국가적 낭비는 아닌가 하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나는 이 시점에서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적은 외국어사전에표준표기를넣자내지는 거북이한글로마자표기법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 문제인데 국제화 시대에서 표준에 대해 얘기할 때 우리는 사용의 주체, 편안함을 느끼는 주체가 누군가에 대해 가끔 혼동하고 있다.
설악산을 외국인에게 설명한다고 했을 때 그 표기로 무엇이 옳은가. Mt.Sorak?(1) Seoraksan?(2) 내 생각엔 SeolAkSan 혹은 Mt.SeolAk이다. 비교적 최근까지 (1)이 국가표준이었는데 2000년 들어서 바뀐 (2)가 현재의 국가표준이다. (1)에 비하면 (2)가 더 자연스러워졌는데 그것은 ㅗ와 ㅓ를 o, eo처럼 구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연음화된 발음을 표기한다는 점에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외국인들은 설중매Seoljungmae와 설악산Seoraksan의 '설'자가 같은 글자라는 것을 알 수 없다.
더욱 큰 문제는 발음 위주로 표기할 경우 예외적인 규칙이 많아서 우리가 쉽게 표준화된 로마자 표기를 이용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래서 발생되는 문제중 가장 큰 것은 검색이 불가능해진다는 점이다. 한국의 인권문제에 관심있는 외국인이 '김대중'을 찾는다고 해보자. 현재 인터넷에 있는 몇몇 예를 들면 한국일보에서는 Kim Daejung이라고 썼고 코리아타임즈에서는 Kim Daejoong이라고 썼으며 조선일보에서는 Kim Dae Chung이라고 썼다. 이래서는 우리가 우리를 세계에 알리고 싶어도 알릴 수 없는 것이다.
일단 우리에게 쓰기 편해야 우리가 일관성있게 사용할 수 있고, 따라서 외국인도 그 체계를 마음놓고 따라갈 수 있다. 괜히 그들의 발음 체계에 맞춘다고 Chosunilbo, Hankyoreh라고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음절문자인 한글의 표기방식에 맞추어 JoSeonIlBo, HanGyeoRe라고 쓰는 것이 우리가 사용하기 좋고 그들도 이용하기 편하다.
그들이 읽기가 힘들다고? 한국어 발음을 제대로 하고싶은 외국인은 한국어의 발음 시스템을 익혀야 한다. 그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일본어가 아주 쉽다고 종종 착각하는데 일본어 발음이나 관습은 우리와 비슷한 면이 있을지언정 분명히 다르고 그런 부분을 익히는 것은 결코 쉽지않다.

숫자 쉼표찍기도 마찬가지다. 그것을 사용하는 주체는 우리이기 때문에 일단 우리가 쓰기 좋아야 한다. 외국과의 호환이 필요하다면 그때그때 세자리로 써주면 된다. 영자신문이나 외국으로 보내는 송장 등에는 당연히 세자리마다 쉼표를 찍어줘야 한다. 하지만 우리끼리 사용하는 계약서나 계산서 등에서 세자리로 찍는 것은 말 그대로 바보짓이다. 우리에게 불편한 국제표준을 국제표준이라는 이유로 지킨다면 그것 주객이 전도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비용이 너무 크지 않은가.(경제성)

당연히 이 제안을 실천하려면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갈 것이다. 당장 금융기관에서 사용중인 모든 시스템을 변경해야 할 것이고, 우리가 쓰고있는 스프레드 쉬트(흔히 엑셀이라 말하는)도 바꿔야 할 것이며 당장 신용카드 명세서와 통장도 새로 찍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들에게 홍보하는 과정은 더더욱 어렵다. 우리의 일상생활과 별로 관계없는 외래어 표기법도 한번 바뀔때마다 엄청난 홍보를 필요로 하는데 숫자 쉼표찍기처럼 너무나 많이 쓰이고있는 것을 바꾸기란 결코 쉽지않을 것이다.

하지만 경제성이라는 것은 길게 바라봐야 할 문제다. 전 국민이 숫자 자리수를 세며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더 큰 사회적 손실인가 아니면 한번 대대적으로 바꾸는 것이 더 큰 손실인가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대대손손 사람들이 마음편하게 숫자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더욱 이득이라고 생각한다. 왜 사람들이 갯벌을 다시 살리려고 하는지, 핵발전소 짓기를 꺼려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봐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인 것이다.

물론 나는 여기서 획일적인 적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과학에서의 단위(km ppm 등)는 모두 천단위 시스템으로 구성되어있고 이런 것들까지 모두 바꾸는 것은 그다지 합리적이지 못하다. 지금은 이것밖에 생각나지 않지만 몇가지 예외적인 경우도 있을 것이며 이것들에는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옳다.


왜 신문의 그래프를 볼 때마다 기본 단위가 천이나 백만이어야 하는가. 이런 불편함은 이제 끝내야하지 않을까 싶다.
(나에겐 그렇게 느껴지지도 않지만) 이제 조금 먹고살만해졌다면 우리는 잘못된 근대화 과정의 고리를 끊고 나는 누구이며 우리는 누구인가를 조금씩 고민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첫걸음은 언어생활을 제대로 자리매김하는 것일게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왜곡된 혹은 불편한 언어생활을 강요하는 한글 두벌식 자판의 불합리성 문제, 핸드폰 키패드의 한글 배치 표준화 문제, 외국어의 표준 한글표기 문제, 한글의 합리적인 로마자 표기 문제 등에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한 개선사항의 하나로 나는 숫자에 네자리마다 쉼표를 찍자는 제안을 하는 것이다.
당신이 '한국인은 한국어로 생각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면 이 문제들에 조금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 -- 거북이 2003-11-16 8:08 pm

2 # 촌평[ | ]

여기서 제가 사는 방식이 나오나 봅니다. 전 초등학교때 네자리로 끝어 읽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왜 세자리로 쉼표를 찍는지 이유도 몰랐습니다. (밀리언 빌리언 이런건 중학교때나 배우자나요) 하지만 별루 투덜대지도 않고 흥분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내맘속으로는 네자리로 끊어 읽곤 했습니다. 이런것이 모든것에 대한 나의 응대 방식인가 봅니다. 맘에 안들면 그저 내가 안따르면 그만이다라고 생각해버리고 그닥 바꿀 생각도 안합니다. 불만을 품지도 않구요. 강요당하는 것만큼이나 설득하는 것에도 서툽니다. -- Archim 2003-11-19 6:49 pm

퇴고는 잘 모르겠고...(내일 오전에 룸미팅 발푠데 아직 한 게 아무 것도 없어서리...)
나도 일학년 땐가 이학년 때 토론 수업을 하면서 이런 얘기를 꺼낸 적이 있는데,
토론 담당자로부터 아주 멋진 답을 들었더랬지...20년만 기다리면 중국이
엄청난 경제권을 확보할 거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다음 세기에는 만단위 표기가
보편성을 얻게 될 거라고...

cf. 의외로 경제과 애들은 천단위 표기가 더 익숙한 가 보더군 -_-a -- SonDon 2003-11-19 4:51 pm

나쁘지 않은 답변이지만 경제과 애들 몇놈때문에 내가 고생하기는 싫다네 :) 20년 기다린다고 전세계가 청나라말을 쓰진 않을것처럼 만단위 표기가 보편적으로 될 리가 없네...-_- -- 거북이 2003-11-19 6:29 pm

13년 지난 시점에서 댓글 달아봅니다... 이런 문과생들 보소. 국제단위계 SI 접두어 때문에 안될 겁니다... --Jmnote (토론) 2016년 9월 17일 (토) 14:27 (KST)

3 같이 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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